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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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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신규
玄信圭 | Hyun Shinkyu


파일:현신규.jpg

출생
음력 1911년 12월 9일[1]
평안남도 안주군
사망
1986년 11월 21일 (향년 74세)
본관
연주 현씨

향산(香山)
학력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수원고등농림학교 (임학과 / 졸업)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임학 / 학사)
규슈대학 대학원 (임학 / 박사[2])
경력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기수
수원농림전문학교 조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농촌진흥청장

1. 개요
2. 생애
3. 연구
3.1. 포플러 개량
3.2. 리기테다소나무
3.3. 은수원사시나무
4. 가족
5. 평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임목육종학자. 본관은 연주(延州)[3], 호는 향산(香山).

한국 임학의 대부이자 산림녹화의 선구자로 불리며, 대표적 업적은 리기테다소나무와 은수원사시나무(현사시나무)의 육종을 통해 산림녹화의 초석을 다지고 한국 육종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것이다.

2. 생애[편집]


음력 1911년 12월 9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당시 안주군 서기로 근무하던 아버지 현도철(玄道澈, 1869. 9. 22 ~ ?)[4]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응선(金應善)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현도철은 평양 지역의 유학자[5]로,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종9품 숭령전 참봉, 1905년부터 1906년까지 평양군 향장(鄕長),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평양군 주사(主事),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안주군 서기를 역임했다.# 한편, 일제 말 애국계몽운동에 관심을 가져 1907년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 평양군지회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같은 해 서우학회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1909년에는 서북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지역 유지로 있다가 1927년 11월 안주금융조합 정상화를 위한 전형위원(銓衡委員)에 선임되었다.#

그는 일본 릿쿄대학 철학과에 유학을 다녀온 맏형 현인규(玄仁圭)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철학자를 꿈꾸었다. 휘문고보 시절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6]에 입학원서를 내기도 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지시로,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임학과[7]에 입학했다.

꿈이 좌절되어 1년간 방황하던 그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종교가인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전집을 읽다가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글[8]을 읽은 것을 계기로 임업이라는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정희섭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1933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임학과에 진학하였고, 1936년 졸업하면서 당시 조선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1937년부터 기수(技手)로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이곳에 근무중 50여명의 학자로 구성된 조사대의 일원으로 백두산 생태조사에 참여하였다.

1943년 규슈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연구하다가 1945년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수원농림전문학교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임업시험장을 재건하였고, 수원농림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규슈대학에서 수행했던 연구 결과를 틈틈이 지도교수였던 사토 케이치(佐藤敬二) 교수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학위논문으로 인정되어 1949년 7월 한국인 최초의 임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1951년 미 정부의 전후 재건 계획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 파견되어 산림유전학을 연구하였다.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자연 제5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공로상을 수여받았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제2대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에는 5.16 민족상 학예부 본상을 수여받았다.#

1986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신풍동[9] 자택에서 별세했다.#

3. 연구[편집]



3.1. 포플러 개량[편집]


포플러는 빨리 자라 헐벗은 산야를 녹화하는데 적합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태리포플러를 도입하여 한국의 기후 풍토에 맞는 품종을 찾아 전국에 보급하였다.


3.2. 리기테다소나무[편집]


미국 원산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새로운 잡종인 리기테다소나무를 만들어 1962년 미국 학회지에 소개되었다. 리기다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지만 생장속도가 느리고 가지가 구불구불하며 송진이 많고 재질이 좋지 않았다. 테다소나무는 곧게 자라고 재질이 좋고 생장속도가 빨랐으나 추위에 약하고 비옥한 땅에서만 자랐다. 이 잡종소나무는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빨리 자라고 곧게 자라며 추위에도 강했다. 이 나무는 유럽의 잡종낙엽송과 에테뉴 라디아타소나무에 이어 교잡육종에 성공한 세계에서 세 번째 사례로 꼽혀 국제적으로 소개되었으며 미국 산림국이 이 품종을 미 북부 탄광지역에 심어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특히 1962년 미국이 對한국 원조를 삭감하려 하자 리기테다소나무가 대한 원조의 대표적인 성과로 제시되어 삭감안을 부결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개화 시기가 달라 자연적인 잡종 교배가 불가능하여[10], 일일이 수작업으로 교잡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종자 생산 효율이 좋지 않아 녹화사업 당시에도 많이 식재되지 못하였다.[11] 산림녹화가 완료된 현재는 힘들게 리기테다소나무의 종자를 생산할 이유가 없으므로 추가로 심고 있지 않고 있다.

3.3. 은수원사시나무[편집]


유럽 원산의 은백양과 한국 원산의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은사시나무를 만들었다. 이 나무는 평지 뿐 아니라 산지에서도 잘 자라 1973년 치산녹화10개년계획에 따라 전국에 대량으로 심어졌으며, 1979년 박정희대통령의 권유로 육종을 한 현신규 박사의 성을 붙여 현사시나무라고도 명명하였다. 국내 뿐만 아니라 포퓰러나무의 나무녹병으로 골머리를 앓던 뉴질랜드에서도 1976년부터 이 나무를 대거 수입해 전국적으로 심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 나무를 수원사시나무의 서식지였던 수원 여기산의 이름을 따 'Yeogi'라고 부른다.

4. 가족[편집]




5. 평가[편집]


흔히 리기테다 소나무의 육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 외에도 1호 임학박사로서 서울대 교수직을 맡아 수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고 신품종의 육종, 종자의 채취 보관, 정책 수립 측면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과학 명예의 전당과 임업 명예의 전당에 모두 올려진 유일한 인물이다.


[1] 양력 1912년 1월 27일.[2] 박사학위논문 : クエルクス属及びカスタニア属樹木の血清学的類縁関係 (1949)[3] 좌승선공파 25세 규(圭) 항렬.[4] 이명 현도철(玄道轍, 玄道徹).[5]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에 거주했다.#[6] 중등교육기관인 현재의 고등학교와는 다르다. 구제고등학교 참조.[7]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으로 당시는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였다.[8]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9] 1988년 장안구, 2003년 팔달구에 편입되었다.[10] 작은 관목도 아니고, 키가 큰 소나무 상층부에 있는 수꽃과 암꽃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수분시켜야 한다.[11] 약 6000만 본이 식재되었는데, 많은 양처럼 보이지만 1차, 2차 치산녹화 사업 통틀어 약 50~60억 그루의 묘목이 식재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다.[12] 족보명 현정형(玄正馨).[13] 수안 이씨(遂安 李氏) 이시우(李時雨)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