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신규 (문단 편집) == 생애 == 음력 1911년 12월 9일 [[평안남도]] [[안주시|안주군]]에서 당시 안주군 서기로 근무하던 아버지 현도철(玄道澈, 1869. 9. 22 ~ ?)[* 이명 현도철(玄道轍, 玄道徹).]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응선(金應善)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현도철은 [[평양시|평양]] 지역의 유학자[* [[평안남도]] [[평양시|평양부]] 융흥면에 거주했다.[[http://db.history.go.kr/id/im_114_00541|#]]]로,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종9품 [[숭령전]] [[참봉]], 1905년부터 1906년까지 평양군 향장(鄕長), 1906년부터 1908년까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43_12A_26A_00060|평양군 주사]](主事),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안주군 서기를 역임했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4&totalCount=4&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D%98%84%EB%8F%84%EC%B2%A0&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98%84%EB%8F%84%EC%B2%A0&searchKeywordConjunction=AND|#]] 한편, 일제 말 애국계몽운동에 관심을 가져 1907년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 평양군지회에 회원으로 가입했고[[http://db.history.go.kr/id/ma_001_0110_0300|#]], 같은 해 서우학회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http://db.history.go.kr/id/ma_003_0050_0240|#]] 1909년에는 서북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http://db.history.go.kr/id/ma_004_0080_0230|#]] [[경술국치]] 이후에는 지역 유지로 있다가 1927년 11월 안주금융조합 정상화를 위한 전형위원(銓衡委員)에 선임되었다.[[http://db.history.go.kr/id/npjo_1927_11_04_v0004_0890|#]] 그는 [[일본]] [[릿쿄대학]] [[철학과]]에 유학을 다녀온 맏형 현인규(玄仁圭)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철학자를 꿈꾸었다. [[휘문고등학교|휘문고보]] 시절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 [[야마구치대학|야마구치고등학교]][* 중등교육기관인 현재의 [[고등학교]]와는 다르다. [[구제고등학교]] 참조.]에 입학원서를 내기도 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지시로, 1930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s-3.3|수원고등농림학교 임학과]][*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으로 당시는 대학이 아닌 [[구제전문학교|전문학교]]였다.]에 입학했다. 꿈이 좌절되어 1년간 방황하던 그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종교가인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전집을 읽다가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글[*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을 읽은 것을 계기로 임업이라는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정희섭]]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1933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규슈대학|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임학과에 진학하였고, 1936년 졸업하면서 당시 조선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1937년부터 기수(技手)로 정식 직원이 되었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5&totalCount=5&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D%98%84%EC%8B%A0%EA%B7%9C&brokerPagingInfo=&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98%84%EC%8B%A0%EA%B7%9C&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이곳에 근무중 50여명의 학자로 구성된 조사대의 일원으로 [[백두산]] 생태조사에 참여하였다. 1943년 규슈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연구하다가 1945년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농림전문학교]]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임업시험장을 재건하였고, 수원농림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규슈대학]]에서 수행했던 연구 결과를 틈틈이 지도교수였던 사토 케이치(佐藤敬二) 교수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학위논문으로 인정되어 1949년 7월 한국인 최초의 임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1951년 미 정부의 전후 재건 계획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 파견되어 산림유전학을 연구하였다.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자연 제5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http://www.nas.go.kr/member/basic/basic.jsp?s_type=&s_value=&member_key=10000315|#]] 1959년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공로상을 수여받았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제2대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에는 [[5.16 민족상]] 학예부 본상을 수여받았다.[[https://www.snu.ac.kr/about/winners/pride/2017/138|#]] 1986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신풍동(수원)|신풍동]][* 1988년 [[장안구]], 2003년 [[팔달구]]에 편입되었다.] 자택에서 별세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112100209207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11-21&officeId=00020&pageNo=7&printNo=20044&publishType=000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