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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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화(白話, Vernacular Sinitic)는 중국어의 서면어(문어체, 즉 한문)에 대비되는 구어체 중국어를 의미하는데, 한자를 이용해 이를 그대로 옮겨 적은 글을 백화문(白話文)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 중 초창기를 제외하면, 중국에서 글말(문어)로 썼던 한문은 중국어의 입말(구어)인 백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미 한나라 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구어와 문어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고, 수나라나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는 구체적인 한문 지식이 없으면 둘이 완전히 다른 언어로 보일 정도로 달라졌다. 그래서 공식적인 기록은 대부분 한문으로 적었지만 가끔 입말 그대로 옮겨 적는 기록도 있는데 이러한 문체를 '백화문'이라 한다.
오늘날의 표준중국어도 북경 방언의 백화문을 표준화하여 규범으로 정립한 것이다.
2. 역사[편집]
한자로 쓴 텍스트(한문)이라고 해도 시대와 국가, 지역에 따라 종류는 다양하다. 한국의 이두나 향찰 또한 한문이라면 한문이지만, 중국의 사대부들이 읽고 해석할 수는 없다. 전근대 한자 문화권에서 지식인들이 여러 한문들 중에서도 품위 있고 격식을 갖춘 표준으로 생각한 정격한문(正格漢文)은 대체로 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시대 무렵 상고한어의 문법에 기초한 글말이다.
상고한어가 쓰이던 시절에는 중국인들에게 입말과 글말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입말이 점차 변하고 방언화 됨에 따라 입말과 글말의 괴리는 커져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한자를 정격한문의 상고한어 문법이 아닌, 입말의 문법에 따라 배치한 텍스트가 바로 백화문이다.
백화문은 당나라 대에 발생하여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북경 방언을 글로 옮겨 적었다. 입말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이미 문법이나 구조적인 면에서 정격한문과는 차이가 있다. 당연히 후대에 사용된 백화문일수록 현대 중국어에 가까워진다.
백화문을 쓸 때는 입말 그대로 옮기기 위해 기존의 한자를 빌려와 표기하거나 새로이 한자를 만든다. 그래서 백화문에 쓰인 한자들 중에서는 한국이나 일본, 심지어 중국에서도 다른 방언을 쓰는 사람이라면 듣도 보도 못한 한자들이 튀어나오기도 하며, 같은 한자라도 일반적으로 정격한문에서와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백화문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 생동감을 불어넣어야 하는 소설 작품들에 종종 사용되곤 했는데, 이를 백화소설(白話小說)이라고 한다.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전, 금병매, 유림외사, 홍루몽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대 중국인들은 백화문을 한문보다 수준 낮은 글로 여겼다. 이 글들은 사실 준백화문으로, 문어와 구어의 절충된 문체이다.
신해혁명 이후에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어려운 한문 대신 입말 그대로 써서 대중과 더 친밀하고 배우기 쉬운 백화문을 쓰자는 '언문일치 운동'이 일어나면서 글을 쓸 때도 점점 정격한문 대신 백화문을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루쉰이 1918년에 내놓은 광인일기를 최초의 백화문 소설로 보는 견해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과거에는 마땅히 정격한문으로 써야 한다고 여긴, 격식을 갖춰야 할 글들(공문서 등)도 백화문으로 쓰게 된 것이다. 오늘날 표준중국어의 문어체 역시 북경 방언의 백화문에 기초한다.
처음에 백화문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반발도 꽤 있었다. 기존의 한문에 익숙한 사람들이 '수준 낮은' 백화문을 문어로 쓰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백화문 도입 전 과도기에는 한문의 어휘 수를 제한하고 전고(典故)[1] 사용을 배제한 쉬운 한문을 만들어서 보급하자는 대안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엔 그냥 백화문을 쓰자는 쪽이 승리해서 쉬운 한문이나 고전 한문 모두 서면어로 쓰지 않게 되었다.
표준중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중국어 방언도 백화문으로 적을 수는 있다. 대표적으로 광동어가 그렇다. 백화문은 사람들의 입말을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니 지역별로 방언에 따라 다른 백화문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광동어 정도를 제외하면 방언이 백화문으로 작성되는 예는 흔하지 않다. 한국에서 글을 쓸 때 사투리 화자라도 표준어 문법과 맞춤법에 따라 쓰지 사투리를 입말 그대로 옮겨적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더군다나 방언 백화문은 광동어같이 따로 백화문 규범을 정해놓은 몇몇을 빼면 한자 표기의 표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같은 뜻인데도 문헌에 따라 표기가 중구난방이다. 또한 글말로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컴퓨터에서 방언 백화문에 쓰이는 한자를 입력하려고 해도 유니코드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 제대로 입력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다. 그나마 활발하게 쓰이는 광동어 백화문마저 백화문 전용 한자가 유니코드에 모두 포함된 것이 2009년이니 다른 방언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본어의 한자 표기나 한자어 조합들은 중고한어~근고한어 시절의 백화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국식 한자 용법은 일본어에 비하면 조금 보수성이 강한 편이다.[2]
3. 둔황 변문[편집]
둔황 지역의 고문서에서 쓰인 둔황 변문(敦煌變文)이라는 문체 양식도 존재한다. 문어체와 구어체가 섞여 있으며, 문언문(한문), 백화문 어느 쪽으로도 분류되지 않고 그냥 둔황 변문 자체가 별도 카테고리를 이룬다.
불교 경전을 해설하는 이야기와 노래를 글로 적은 것이 많은데, 그 독특한 문체는 중국문학사에서 예외로 취급될 정도로 이질성이 강하다. 이야기(산문)에는 주로 당대 백화문이 쓰였고, 노래(운문)는 당대 지역 구어체가 섞인 7언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쉽게 해설한다고 쓴 글이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옛 둔황 지역의 온갖 이체자와 구어체가 폭넓게 쓰이고 산문으로 쓰인 부분도 불교의 영향이 강하며 가끔 변려문도 튀어나오다 보니 문체가 상당히 난해하다. 중국 고전에 웬만큼 익숙한 중국인 학자들조차도 둔황 변문으로 쓰인 강창문학은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잘 읽지 못한다.
4. 관련 문서[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옛 문학작품에 사용된 표현을 인용하는 것. 당연히 해당 작품을 접한 적이 없으면 그 표현도 이해할 수 없었다.[2] 한국식 한자용법은 당연히 양반이 정립하였는데 과거제때문에 고전한문의 정석인 유교경전 수십권을 달달 외워야했던 터라 일본 식자층보다 고전한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굳이 수천년 전부터 사용된 '고상한' 용법을 놔두고 "격 떨어지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