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조선)
최근 편집일시 : (♥ 0)
1. 개요[편집]
청룡 백호가 좌우에 둘렀는데 / 靑龍白虎左右邊
마치 호랑이가 바위에 걸터앉은 듯 / 山虎石上如蹲踞
공후며 부귀며 영화로운 세상 / 公侯富貴榮華世
일세를 통령한 대장군일세 / 出世統領大將軍
명예는 우레처럼 천하에 떨치고 / 雷振名譽天下遍
온 세상 막힘 없어 글과 수레가 사해에 통하였네 / 四海無防車書通
석 자 칼로 사직을 편케 하고 / 三尺劍頭安社稷
한 줄기 채찍으로 천하를 평정하였네 / 一條鞭末定乾坤
고려 말기의 명장이자 조선을 건국한 조선왕조의 창업군주.
묘호는 태조(太祖), 성은 이(李), 초명은 성계(成桂). 즉위 후 개명한 이름은 단(旦).
귀신같은 활솜씨와 지휘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막아내 최영과 함께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고려 말 최대 군벌로서 실력을 갖춘 데다가 급진 신진사대부들의 뒷받침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로 떠오른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정적들을 차례로 숙청했으며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다.
정도전, 조준 등을 앞세워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신덕왕후가 죽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둘째 정종에게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처가 쪽 생존자였던 조사의와 1402년 함경도에서 군을 일으켜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태종에게 진압됐다. 1408년 붕어하여 건원릉에 안장되는 한편 신위는 종묘에 봉안됐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조(조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시호, 묘호, 휘[편집]
묘호는 천자의 칭호이므로 유교 예법상 제후국은 묘호를 올릴 수 없다. 시호도 스스로 올릴 수 없는데, 이는 천자의 신하로서 천자가 주는 시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8] 그래서 원 간섭기의 고려가 독자적 묘호도 시호도 없었던 것이다. 묘호는 고려 멸망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시호는 공민왕 때 회복했다.
하지만 조선은 두 가지를 지키는 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몰래 독자적인 묘호와 시호를 써서 태조(太祖)와 그 4대조들에게 모두 천자의 묘호를 올리고 독자적 시호를 올렸다. 물론 명나라와의 외교에 있어서는 명나라가 준 시호를 철저하게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묘호는 절대 명에 알려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시호는 독자적으로 올리되 명이 보내준 시호를 대표시호로 삼았다. 고려의 경우 원 간섭기 이전엔 묘호를 독자적으로 쓰고 시호도 누구한테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쓰고 독자적 시호를 대표 시호로 삼았다. 고려 국왕 문서의 '태조·○종 ○○대왕'의 빈 칸 모두 독자적 시호이다.
그래서 조선이 올린 시호는 대표 시호로 삼지 않았고 명이 보낸 시호를 묘호 뒤에 대(大) 자를 붙여 사용했다(묘호 + 명으로부터 받은 시호 + 대왕). 그래서 조선이 정한 공식 존호는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으로 조선왕조실록 태조편 제목도 〈태조 강헌대왕 실록〉으로 되어 있다. 명나라가 준 시호가 '강헌(康獻)'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앞에서는 철저히 '강헌왕'이라고만 일컬었다. 훗날 청나라도 당대의 조선 국왕들에게 시호를 줬지만 그때는 받기만 하고 쓰지도 않았다.
전조 고려처럼 굳이 조선의 자주적 묘호와 시호를 합쳐 부른다면 '태조 신무대왕(太祖神武大王)'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불린 적은 없다. 조선왕조 당시 이성계의 대표 시호는 어디까지나 강헌대왕(康獻大王)이었다. 신무(神武)는 위대한 무장이었던 점을 감안해 올린 시호로 이성계의 두 아내들도 神 자 돌림 시호를 가지게 된다.(신의왕후, 신덕왕후)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은 천자국의 예법으로 태조 이성계에게만 한정하여 이 예법을 적용하고 후대 국왕 왕후들은 시호를 맞추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이 시호 예법을 철저히 따랐다.
조선조 역대 국왕의 독자적 시호 중 마지막 부분을 보면 태조 아래의 모든 국왕이 '효(孝)'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태종은 광효(光孝), 세종은 명효(明孝), 숙종은 원효(元孝) 등등. 이들은 태조의 자손으로 효성을 다해 국가를 이끌었다는 뜻으로 받은 것이다. 효종만 정덕(正德)인데, 이는 이미 묘호에 '효'가 있으니 또 쓸 필요가 없어서이다.
종합하면 비록 태조의 대표시호는 명의 시호로 했지만, 조선은 시호 예법에서 해줄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바쳤다. 이후 대한제국이 열리고 대표시호를 바꾸었다. 함흥본궁의 위패엔 '태조 고황제'가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이 대표시호를 '강헌대왕'에서 '고황제'로 재추존해서 바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 정식 시호는 명나라와 조선의 시호를 합친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1683년(숙종 9년)은 '정의광덕(正義光德)'이 추가되어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 되었고, 대한제국의 고종이 고황제(高皇帝)로 추증하며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인 '강헌(康獻)'을 폐했다. 그래서 최종 정식 시호는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도 부활해 태조 고황제의 시호에 맞춰져 왕후들도 신의'고'황후, 신덕'고'황후로 추존됐다.
태조 왕건과 마찬가지로 '태조'라는 묘호보다 본명이 대중에게 익숙해서 '이성계'나 '태조 이성계'라 많이 부른다. 다른 왕들처럼 그냥 '태조'라고만 하면 고려의 태조 왕건이나 그 외에 태조 묘호를 쓴 국내외 다른 왕들과 혼동이 되고, 즉위 전 고려의 장수로서 오랜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오늘날에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태조(李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는데 오늘날에도 장·노년층에서 이성계를 이태조라고 부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이태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고려 왕건을 가리켜 '왕태조(王太祖)'라고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 좋다. 베트남의 경우 국호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왕조 교체가 자주 일어나서 이태조, 진태조, 여태조와 같이 성과 묘호를 붙여 쓰는 게 정식이다.
왕이 되면서 피휘 문제 때문에 이름을 '단(旦)'으로 개명했는데 개명한 휘가 당예종과 한자까지 완전히 겹친다. 성(成) 자는 원래 이름으로 잘 쓰고 일상적으로도 자주 쓰이는 글자라서 아예 왕 본인이 갈아버린 것. 피휘로 인해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단(旦)자의 日과 一 사이를 연결하는 짧은 획을 하나 더 썼고 함부로 글자를 고칠 수 없는 경전에서 이 글자가 나올 때에는 원래 음 대신에 됴(=조)로 독음을 달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조차 군주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도 금기시하기에 거의 불리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인 것은 구한말의 일로 피휘를 할 필요가 없던 서양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소개할 때 이단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오랜 피휘의 역사 때문에 이단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역시 이성계라는 이름이 주로 쓰인다.
여담으로 별호로 성조(聖祖)라고도 불리웠는데 세종 시절인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이 용비어천가의 팔준(八駿)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을 시켜 태조의 여덟 마리 말들을 그리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팔준도'로 당시 세종은 이 팔준도에 대해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년)에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서 이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는 글을 짓도록 했다. 이 때 신숙주와 성삼문이 올린 글귀과 찬시들을 보면 당대 집현전 학사들이 '태조(太祖)'를 '성조(聖祖)'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별호는 성종(聖宗)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몽골어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성계는 몽골식 이름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로 귀부(歸附, 망명하여 귀속함)할 당시 이성계는 20살이 채 안 된 청년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몽골식 이름이 있었을 확률이 높지만 아무래도 왕조의 개창자다 보니 정통성 차원에서 본인이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4. 가족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조(조선)/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후궁: 성비 원씨(誠妃 元氏): 태상왕이 된 이후에 정식 봉작되는 바람에 후궁으로 분류되었다.
- 후궁: 정경궁주 유씨(貞慶宮主 柳氏)
- 후궁: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17]
- 후궁: 찬덕 주씨(贊德 周氏)
- 후궁: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무협아(巫俠兒)[20]
- 왕녀(王女)[19]
5. 사용한 무구[편집]
5.1. 어궁구[편집]
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소리통(哨)을 만드니, 크기가 배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桓祖)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쓸 수 있는 보통 물건이 아니다."고 하였다.
이성계가 친히 사용했던 '어궁구(御弓具)'는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었던 흔치 않은 활유물이었으며 사실상 조선 최고의 명궁(名弓)으로 알려져 있다. 어궁구는 함경도 함흥의 조선 왕실 사당인 함흥본궁(咸興本宮)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불행히도 한국전쟁 중 함흥본궁이 불타버린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되었다.
5.2. 전어도[편집]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전어도(傳御刀)가 이성계의 칼로 알려졌으나 근거는 없다. 실제 이성계가 썼던 칼은 용두검(龍頭劍)이라 하여 전주 경기전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1950년 3월 도난당한 이후로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
5.3. 화살보다 빠른 말[편집]
또한 정사가 아닌 야사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성계의 화살보다 빠른 말도 있다. 내용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갈고 닦을때 어느 연못에서 튀어나온 한마리 용마(龍馬)가 있었는데, 이 용마는 몹시 사나워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이성계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아무도 길들이지 못한 말을 길들이기에 단번에 성공해 자신의 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무예 연습을 계속하다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기위해 과녁에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을 따라잡기로 했다. 하지만 말을 타고 전력질주로 과녁에 도착하자 화살이 이미 박혀있는걸 보고 말이 화살보다 느린것에
5.4. 팔준마[편집]
용비어천가에서는 8마리의 애마들도 확인된다. 이름은 각각 유린청, 횡운골, 추풍오, 현표, 발전자, 용등자, 응상백, 사자황이다. 이를 조선 왕실에서는 '태조의 팔준(八駿)'이라고 불렀는데, 동각잡기에 이 말들에 대한 간단한 내력도 기록되어 있다.
- 유린청(遊麟靑 = 기린과 노니는 청마): 함흥에서 난 말로 제1차 요동정벌과 황산대첩 때 이 말을 탔고, 전장에서 화살 세 대를 맞았으며 31살 때 죽었는데 장사지낼 때 석조(石槽)에 넣어 묻었다. 실제로 이성계는 황산대첩 때 혼전 중에 말 두 필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쩌면 이 때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말만 유독 수명과 어떻게 장사지내줬는지까지 기록된 걸 보면 이 말이 이성계가 가장 아꼈던 말로 추정된다.
- 횡운골(橫雲鶻 = 구름을 가로지르는 송골매): 여진산 말로 나하추와 싸울 때나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다고 한다. 기록대로면 이성계가 가장 젊은 시절부터 활용했던 말이다.
- 추풍오(追風烏 = 바람을 쫓는 까마귀): 여진산 말로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발전자(發電赭 = 번개를 발하는 홍갈색 말): 안변에서 난 말.
- 용등자(龍騰紫 = 용처럼 오르는 보라색 말): 단천에서 난 말로 해주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탄 말이며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응상백(凝霜白 = 서리가 내린 백마): 제주산 말로 위화도 회군 때 탔던 말이다.
- 사자황(獅子黃 = 사자 같은 누런 말): 강화 매도에서 난 말로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 현표(玄豹 = 검은 표범): 함흥산 말로 토아동(兔兒洞)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1446년(세종 28년), 세종은 용비어천가의 팔준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이를 그림으로도 그려 건국의 자취를 남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림의 발견]안견의 팔준도(八駿圖) 이야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安堅)이 태조의 여덟 마리 말을 그렸으며, 집현전 학사들은 찬문(撰文)을 붙였다.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년)에는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서도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는 글을 짓도록 했는데, 성삼문이 1등으로 뽑히기도 했다. 해당 그림은 임진왜란 · 정유재란 이후 사라져서 현존하지는 않으나 숙종 대에 어느 사대부가에서 안견의 팔준도를 모사한 듯한 그림이 나와 그 그림을 모사했는데 이것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화첩이다. 비롯 원본은 사라졌지만 그 당시 신숙주와 성삼문이 올린 글귀과 찬시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동문선 제44권 / 표전(表箋)
집현전 진 팔준도 전(集賢殿進八駿圖箋) /성삼문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聖人)은 천 년의 운수를 맞추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神物)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왕자의 작흥(作興)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蓄産)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蜀漢)의 왕은 적로(的盧)를 타고서 능히 단계(檀溪)의 액(厄)을 면하였고, 금(金) 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大業)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부덕(副德)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禍亂)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龍鱗)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壯氣)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열(參列)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參禮)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上考)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卒)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오면 한 번 보아 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宣尼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起業)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德澤)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신숙주가 올린 팔준도에 대한 찬시】
6. 직접 쓴 글과 시[편집]
북한산에 올랐을 때 쓴 시이다.백운봉에 올라
담쟁이 넝쿨 더위잡고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흰 구름 속에 암자 하나 높이 누워 있네
눈에 들어오는 곳 모두 우리 땅이 된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용납하지 못하리
서경 즉 평양에 있었던 자신의 어진(초상화)를 보고 쓴 시이다.서경의 영전 어용에 대해 쓰다
박복한 형상이 어찌 여기에 있는가
이치를 생각하면 선조의 풍모로다
조선의 시조라고 일컬어지지만
선현보다 덕이 적어 끝없이 부끄럽다
1398년(태조7) 3월 초하루 밤에 꿈을 꾸고 지은 시이다.꿈속에서 지은 시
북소리 종소리 온 나라에 진동하니
바로 이곳이 삼한의 만세 터전이네
1397년 음력 12월 신극공을 통해 정도전에게 보낸 글이다.정도전에게 내려주는 글
서로 작별한 지 오래되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신 중추[25]
를 보내어 행역[26] 의 수고를 위문하려 하는데, 마침 최긍이 와서 그곳의 소식을 잘 알게 되니, 스스로 조금 위안이 된다. 이번에 유의[27] 한 벌을 보내어 바람과 이슬에 대비하게 하고자 하니, 받아주면 다행이겠다. 이 참찬(이지란), 이 절제사(이원경)에게도 유의 각각 한 벌씩을 함께 보내니, 내가 간절하게 생각하는 뜻을 말해 주면 좋겠다. 나머지는 신 중추에게서 듣고, 봄추위가 한창인 이때에 몸을 잘 보호하여 변방에서의 일을 다 하도록 하라. 나머지는 예를 갖추지 못한다. 송헌거사[28] 가 쓰다.
7.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조(조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어진[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태조어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조(조선)/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조(조선)/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관련 문서[편집]
- 조선/왕사
- 조선/왕실
- 개국원종공신녹권
- 경복궁
-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 김회련 고신왕지
- 대구 보성선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복장전적
- 응제시주
- 이제 개국공신교서
- 전어도
- 황산대첩
- 정도전
- 정몽주
- 최영
- 이인임
- 제1차 요동정벌
- 제1차 왕자의 난
- 제2차 왕자의 난
- 위화도 회군
- 위키피디아: 조선의 북진정책(태조, 세종, 세조, 효종)
- 진충귀 고신왕지
-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