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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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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원래 사족(士族) 가문의 출신이니 근본을 잊을리가 있겠느냐"
"그대의 조부(이행리)와 부친(이춘)은 몸이 비록 원나라에 있었으나, 그 본심은 고려에 있었다는 것을 내 조부(충선왕)와 부친(충숙왕)도 알고 계셨으니 총애하고 칭찬하셨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태조실록》 1권 <총서> 9번째 기사
《동문선》 제44권 / <표전>(表箋)
집현전 진 팔준도 전(集賢殿進八駿圖箋) / 성삼문(成三問)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은 1,000년의 운수를 맞추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神物)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왕자의 작흥(作興)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蓄産)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蜀漢)의 왕은 적로(的盧)를 타고서 능히 단계(檀溪)의 액을 면하였고, 금(金)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덕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열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ㆍ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ㆍ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오면 한 번 보아 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1]
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
-(성삼문이 태조 이성계의 무용을 찬양하며 지은 찬시)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를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에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를 지리산에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신숙주가 태조 이성계의 전공을 찬양하며 지은 찬시)
젊어서 어느 절에서 쉬던 중 꿈에 무너지는 집의 서까래 세 개에 깔렸는데 깨어나 보니 등에 서까래에 눌린 상처가 있어 그 절의 중이던 무학대사가 이는 왕이 될 징조라고 말한다. 무학대사는 서까래 3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으니 석 삼(三)자 모양이 되고 이성계의 몸을 작대기(│)라고 하면, 둘이 합치면 임금 왕(王)자가 된다고 설명했다.[2]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있던 이성계는 나무 위에서 닭이 '꼬끼오' 하고 시끄럽게 우는 것을 보았다.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는 통에 이성계는 자리에 일어서려 했는데 등에 서까래 세 장이 얹혀져 있었고, 이 서까래는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성계는 서까래를 떼어내기 위해 사람을 찾다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꽃밭을 보았다. 꽃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었는데 갑자기 꽃은 시들었고,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 닭이 '꼬끼오'하고 움 : 꼬끼오를 한자로 음만 옮겨적으면 '고귀위'가 된다. 고귀위(高貴位)는 실제로 있는 단어로 뜻만 해석하면 '높고 귀한 자리'를 의미한다. 이성계가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것을 의미.[3]
- 서까래 3장 : 임금 왕이 될 것으로 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동일하다.
- 아름다운 꽃이 있으나 시들어버림 : 꽃은 이성계가 고려를 위해 세운 군공과 업적들을 의미하고 꽃이 시들면 열매가 열리므로 이러한 업적들을 바탕으로 결실을 맺을 것을 의미한다.
- 무언가 깨지는 소리 : 깨지는 소리가 나면 주변 사람들이 그 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즉, 만백성이 이성계를 우러러 본다는 의미.
- 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였다.
- 1361년 10월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파두반(破頭潘)이 이끄는 동계홍건군(東系紅巾軍) 중로군(中路軍) 20만 홍건적의 고려 침공.[4] 삭주(朔州)·이성(泥城)·무주(撫州)·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러 개경(開京)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로 파천(播遷)하고 수도 개경이 결국 홍건적들의 대군세에 함락되자 이성계가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가별초)으로 개경 탈환에 성공해서 가장 먼저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의 목을 베어 죽였다.
-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친내 함흥 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 1364년 최유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을 받들고,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오자 이에 최영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이들을 모두 섬멸했다. 이 때 압록강을 건너 도망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
- 1364년 여진족들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5] 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를 모두 물리치고 동북면이 평온을 되찾게 만들었다. 이후 밀직부사.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이 되었다.
- 1370년 1월 기병 5천,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오녀산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서북쪽 하늘이 자주빛으로 물들어 남쪽으로 뻗으니 서운관(書雲館)에서 "맹장(猛將)의 기운입니다" 하자 공민왕이 "내가 이성계를 보냈기 때문이다"라며 기뻐하였다. 그해 11월 지용수 등과 함께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고,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제1차 요동정벌)
- 1377년 우왕 3년 크게 창궐하던 왜구들을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
- 1378년 수도 개경을 위협하던 왜구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싸우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직접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왜구의 대군을 격퇴하였다.
- 1380년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발도가 지휘하는 왜구의 대군세를 운봉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황산대첩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6][7]
- 1383년 여진인 호바투가 4만 기병을 이끌고 동북면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동북면 도지휘사에 임명되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을 건의했다.
-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어 함주를 공격한 왜구를 대파했다.
- 1388년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어 요동정벌의 임무를 맡았으나, 위화도 회군을 통해 개성에서 고려 중앙군과 최영을 패배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홍건적)들은 궁지에 몰려 위축되기는 했으나,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므로 모든 아군 부대들이 진격해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태조는 길 가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태조가 말을 달려 동문(東門)에 도달하였으나 성문에서 피아간에 마구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통에 문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적이 달려들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형세가 위급해졌다. 태조가 칼을 빼어 앞을 가로막는 적병 칠팔 명을 쳐서 죽이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넘었는데도 말이 넘어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太祖縱兵破之, 胡拔都僅以身遁去。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바투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
“나는 갑인년에 호파두(胡波豆)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여직(女直) 대인(大人)을 배종(陪從)하여 백두산 북쪽의 새 목책성(木柵城)에 왔는데, 내가 소문을 들으니, 숙부께서 종제(從弟) 강길(康吉) 등과 사이 좋게 잘 지낸다니, 내가 나가서 서로 만나 보고자 하나……"
-─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2월 20일(신축) 2번째기사
松軒膽氣蓋戎臣 장군의 용맹함은 장수들 중 으뜸이니
萬里長城屬一身 만리장성이 장군의 한 몸에 맡겨졌네
奔走幾經多故日 바삐 다니며 어려웠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고
歸來同樂太平春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봄을 즐겼으면 합니다
如今大勢關宗社 작금의 형세는 나라의 종묘와 사직이 걸려있는데
況是前鋒似鬼神 하물며 그 선봉장(호바투)는 귀신 같다고 합니다
聯袂兩朝情不淺 두 왕에 걸쳐서 정이 얕지 않으니
只將詩律送行塵 다만 시를 지어 장군의 가는 길을 전송합니다
목은 이색
1388년 이성계는 선배 무장인 최영과 함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8] 하지만 이어진 명나라의 도발에 그야말로 천생 군인답게 우직하게 대처하는 최영 때문에 제2차 요동정벌에 휘말리는 처지에 빠졌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출정에 반대했지만 우왕이 최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9] 야사(野史)인 <연려실기술>에는 이성계의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던 차에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였다. 요동 정벌을 성공해도 이성계가 명나라와 적이 되게 만들고 실패해도 이성계의 사병 집단을 무력화시킬 기회로 봤다는 것이다. 정사(正史)인 <고려사>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의 친분이 두터웠다며 이를 부인하지만 일각에서는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기로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우왕은 최영을 총지휘관으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좌,우군도통사 휘하에는 도원수, 상원수, 조전원수 등 28명의 원수(元帥)가 각각의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원정군은 28원수들이 각각 거느린 부대를 단위 부대로 하고 있었다. 비록 최영이 총지휘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28원수들에게 절대적 통수권이 부여된 상태로 원정군 편성도 원수들 재량에 의해 조정될 수 있었고 단위 부대 차출도 원수가 주군(州郡)의 수령에게 공문을 보내 스스로 충원할 수 있었다. 즉 고려 중앙군이라고 해도 각 도의 병사들이 원수들에게 사적으로 예속되는 경향이 심해서 사병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사실상 왕명으로 신하들의 사병 집단을 동원했다고 볼 수 있다.[10] 휘하 원수들도 이화, 이지란과 같이 이성계의 사적 통제를 받는 이들이 상당수였고 이성계가 거느린 동북면 군사들이 전력도 강하지만 가장 사병적 성격이 강했다. 게다가 최영은 우왕이 붙잡아서 가지도 못했으니 사실상 요동 정벌 원정군은 이성계 뜻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우왕의 명으로 제2차 요동 정벌을 위해 북상하다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서 회군한다. 친형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으며 고려의 신하로서의 충절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11] 이후 개경을 공격하여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옹립하였다가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폐가입진)을 하며 창왕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최영에 이어 우왕과 창왕도 참살된다.[12] 공양왕 시기에 본거지인 화령군의 백작(伯爵)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양왕파였던 정몽주가 공양왕과 결탁하여 이성계 무리를 견제하기도 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참살되었다. 결국 왕대비 안씨는 공양왕을 폐위해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봉하는데 1392년 7월 17일 감록국사 이성계는 국새를 받고 수창궁에서 고려의 사직을 자신이 이어받았음을 선포한다. 실록에는 태조의 즉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한 다음날 명나라 예부에 상행문서를 올려 종친이 아닌 타성의 문하시중 이성계를 권서국사로 추대할 것을 원한다고 밝혔다. 1달이 조금 지나자 이성계는 재차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13] 명의의 표문을 올려 권지군국사로 추대된 것을 홍무제가 재가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성계를 추대한 급진 사대부들은 이를 통해 공민왕 사후 악화된 대명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이례적인 방식을 통해 이념적으로 이성계의 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14] 사실 곧바로 국왕을 자칭하지 못한 것은 태조 왕건 이후부터 시작된 일종의 관례였는데 고려 이후로는 보통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정식으로 알린 뒤 승인을 받아야 왕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태조 왕건(王建)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하여 이러한 관례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성계 또한 왕건과 고려의 이러한 사례를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중략)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명나라 홍무제는 위화도 회군이 아니었으면 조선을 결코 새로운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무제는 자신이 세운 왕조를 지키기 위함인지 역성혁명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군주가 천명(天命)을 거스르면 방벌(放伐) 즉 무력으로 역성혁명을 주장한 맹자를 공자의 정배(亭配)에서 빼버리고 제사도 못지내게 한 인물이다. 형부상서 전당이 이를 반대하다가 화살형을 당하게 됐는데 전당이 "맹자를 위해 죽으면 영광입니다"하자 감동한 홍무제가 살려주고 맹자의 제사도 회복시켰으나 <맹자>에서 은나라(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과 이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에 대한 부분은 빼버린 <맹자절요>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베트남에서 신하인 호계리가 진씨 왕조를 무너뜨리자 조공도 받지 않고 홍무제의 아들인 영락제는 이를 명분으로 대월(베트남)을 치러 20만 군대를 보낼 정도였다.[15]
1. 불세출의 신궁[편집]
공은 천재이므로 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 이두란
전공도 전공이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가히 궁술만으로 항우에 비견되는 한국사 최강의 보우마스터. 무섭게도 그 궁술이 야사뿐만 아니라 정사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 멀리서 저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마궁술, 즉 말 타고 돌격하면서 활로 적들을 갈아버린적도 꽤 된다.[16]
물론 정사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가 조선에서 쓰였기에 극적인 표현이 있지만, 없던 일을 만들어 넣진 않는다.[17] 게다가 중국의 정사인 원사나 일본 측의 기록으로 일부 교차검증도 된다. 기록에 나타난 이성계의 궁술에 관한 일화들 몇 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젊었을 때에는 훗날 정빈 김씨로 추봉되는 이자춘의 첩이자 여종이었던 김씨(의안대군 이화의 어머니)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태조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했다. 태조가 한 번의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히자,[18] 김씨는 태조에게 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 데에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출처는 태조실록 1권 총서.[19]
- 나하추의 휘하 장수가 온 몸에 철갑을 두르고 입은 벌릴 수 있게 턱에도 따로 철갑으로 무장하여 화살을 쏠 곳이 없으니 이성계가 적장의 말을 쏘아 말이 날뛰며 다루기가 힘들어지자 적장이 힘을 다해 고삐를 당기며 입을 벌리는 순간 화살을 적장의 입을 향해 쏘아 쓰러트렸다.
-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당시 고려에서 이성계와 더불어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는데, 원나라 황제가 어떻게 그렇게 활을 잘 쏘느냐며 팔을 만져보기도 한 명궁이였다. 세간의 화제는 이성계와 황상 둘중에 누가 최고의 명궁이냐였다. 드디어 개경에서 이성계와 황상의 활쏘기 겨루기가 열렸다. 둘이서 족히 수백 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때 50발까지는 둘 다 연달아 맞혔으나 50발을 넘어서자 황상은 맞히기도 하고 못 맞히기도 했으나 이성계는 단 한 발도 빗나간 것이 없었다.[21][22] 이를 전해들은 공민왕은 "이성계는 참으로 비상한 인물이다." 하였다.
- 1차 요동정벌 당시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편전(애기살) 70발을 쏴 성벽 위에 있던 고안위의 부하 70명의 얼굴을 하나씩 쏘아 모두 맞혔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하여 도망갔으며, 나머지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했다.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했는데 그 수가 1만여 호나 되었다. 출처는 태조대왕실록.[23]
- 동녕부의 오녀산성을 점령한 후, 요동성 전투에서 처명이라는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서 한 발은 투구에, 한 발은 허벅지에 맞힌 후 "마지막 한 발은 네놈 얼굴에 맞히겠다!"라고 하자 용맹한 처명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항복한 처명은 이후 이성계 막하에서 부장으로 활약하여 황산대첩 때에도 참전했다.
- 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구리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일본 투구에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인 멘구(面具)라는 부품이 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가 떨어지면 이지란이 쏘는 걸로 되어 있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끈이 끊어져 투구가 기울어져 떨어지기 직전, 아기발도가 투구를 붙잡아서 고쳐 썼는데, 그러자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다시 맞혀서 마침내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얼굴을 쏴서 죽였다고 한다. 이런 무협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먼치킨 스토리가 야사도 아니고, 정사인 고려사에 당당히 적혀있다. 일본 갑옷의 투구를 보면 이성계가 맞혔다는 정자 부위 자체는 제법 크다. 한국의 투구는 그 부분이 상당히 작으나 일본 투구에는 화려하고 너무 큰 장식이 달렸기 때문에 정자도 크다. 그렇다 해도 전투 중이라서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을 상대를 2번이나 같은 위치에 맞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 이성계는 왜구와의 격전을 앞두고 150보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놓아두고 3번 쏴 3번 다 맞혀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보가 대략 1.2m니, 180m 거리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 사거리는 웬만한 초기 화약병기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한 가지고 있던 화살 20개중 17개를 쏘아 모두 맞혔는데 모두 왼쪽 눈초리에 명중했다고 한다. 출처는 역시 태조대왕실록.
-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보(12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떨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를 많이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步)밖에 서 있고, 나무 위에는 열매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여러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 번 쏘니 다 떨어졌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하니, 여러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賀禮)하였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54번째기사 태조가 화살로 쏴 떨어뜨린 배를 가지고 손님을 대접하다
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 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했다.이 이야기는 정도전(드라마)에서 황산대첩 직전에 각색이 가해져서 재현되었다. 사실은 황산대첩 3년 전에 있었던 일화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했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했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背)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했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 정종 이방과)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서 보겠다" 하면서, 이에 휘하의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은 마땅히 뒤따라 올라올 것이다" 했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61번째기사 태조가 지리산의 험한 지세에서 왜적을 섬멸하다
-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 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다.
- 어느 날 신하들이 공민왕 앞에서 활을 내었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쏴 다 맞히자, 공민왕은 "오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라며 감탄하였다.
공민왕이 경대부(卿大夫)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고 친히 이를 구경하는데, 태조가 백 번 쏘아 백 번 다 맞히니, 왕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순제(順帝)가 친히 그 팔을 당겨서 이를 관찰하였다. 태조가 동렬(同列)들을 모아 덕암(德巖)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백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도 태조는 쏠 때마다 다 맞히었다. 해가 이미 정오(正午)가 되어 황상(黃裳)이 이르니, 여러 재상(宰相)들이 태조에게 홀로 황상과 더불어 쏘기를 청하였다. 무릇 수백 번 쏘았는데 황상은 연달아 50번을 맞힌 후에도 혹은 맞히기도 하고 혹은 맞히지 못하기도 했으나, 태조는 한번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는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내부(內府)의 은(銀)으로 만든 거울 10개를 내어 80보(步) 밖에 두고,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이를 쏘게 하되, 맞힌 사람에게는 이 거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태조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왕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태조는 항상 겸손(謙遜)으로 자처(自處)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고자 아니하여, 매양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다만 그 상대자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겨우 상대자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이고, 이기고 지고 한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비록 구경하기를 원하여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살 한 개만 더 맞히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56번째기사 태조가 활을 쏜 것이 백발 백중하니 모두가 감탄하다
8월, 범이 서울에 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많이 해치니, 태조가 이를 쏘아 죽였다.다만 자주 호랑이를 사냥하다보니 우왕이 이성계를 걱정했다는 기록도 함께 남아있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65번째기사 태조가 서울의 많은 인명을 해친 범을 쏴 죽이다
10월, 태조는 나가 사냥하다가 범을 쏘아 잡아서 우왕에게 바치니, 우왕은 의복을 내려 주면서 이내 유시(諭示)하였다.참고로 이성계의 호랑이 사냥은 굉장히 젊은 시절부터 취미(...)로 이뤄졌었는데 한번은 호랑이가 이성계가 탄 말 궁둥이에 올라탈려고 하자 순간적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때려서 떨어뜨린 뒤에 호랑이가 정신을 못차리는 틈을 타서 곧바로 활로 쏴 죽인적도 있었다.
"흉악한 짐승은 마땅히 잡아야 되겠지마는, 그러나 또 위태한 일이니 후에는 그 일을 조심하오."-
- 태조실록 1권, 총서 58번째기사 태조가 사냥한 범을 우왕에게 바치니, 우왕이 조심하라고 유시하다
태조가 소시(少時)에 산기슭에서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한 마리를 쫓아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쏘려고 했으나, 갑자기 백 길[仞]의 낭떠러지에 다다르니, 그 사이가 능히 한 자[尺]도 되지 않았다. 태조는 말 뒤로 몸을 빼어 섰고, 멧돼지와 말은 모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 어느 사람이 고(告)하기를,그 밖에 쥐 3마리를 죽이지 않고 떨어뜨리기만 한적도 있었다.
"큰 범[虎]이 아무 숲속에 있습니다."
하니, 태조는 활과 화살을 쥐고, 또 화살 한 개는 허리 사이에 꽂고 가서 숲 뒤의 고개에 오르고, 사람을 시켜 아래에서 몰이하게 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보니, 범이 자기 곁에 있는데 매우 가까운지라, 즉시 말을 달려서 피하였다. 범이 태조를 쫓아와서 말 궁둥이에 올라 움켜채려고 하므로, 태조가 오른손으로 휘둘러 이를 치니, 범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는지라, 태조가 말을 돌이켜서 이를 쏘아 죽였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31번째기사 태조가 용맹스럽게 멧돼지·범 등을 사냥하다
우인열(禹仁烈)이 일찍이 태조를 저사(邸舍)에서 알현(謁見)할 적에, 태조가 서청(西廳)에서 마주 앉았었는데, 차양(遮陽)을 쳐다보니 쥐 세 마리가 문미(門楣)에 붙어 달아나는지라, 태조가 아이를 불러 활과 고도리(高刀里) 3개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기다리니, 쥐 한 마리가 돌아와서 문미(門楣)를 지나갔다. 태조는 말하기를,
"이것을 맞히기만 할 뿐이요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면서 마침내 이를 쏘니, 쥐와 화살이 함께 떨어졌는데 과연 쥐는 죽지 않고 달아났으며, 남은 두 마리의 쥐도 또한 이와 같았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63번째기사 태조가 문도리 위의 쥐 3마리를 활을 쏘아 떨어뜨리다
- 우왕 시절에도 이성계의 활 실력은 여전히 백발백중 수준으로 이는 실록에서도 정확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우왕이 일찍이 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는데, 과녁[的]은 황색 종이로써 정곡(正鵠)을 만들어 크기가 주발만 하게 하고, 은(銀)으로써 작은 과녁[小的]을 만들어 그 복판에 붙였는데, 직경(直徑)이 겨우 2치[寸] 정도이었다.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 태조는 이를 쏘았으나 마침내 은 과녁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우왕은 즐거이 구경하기를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태조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려 주었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71번째기사 태조가 자유 자재로 활을 쏘다
- 거기다 배(梨)만한 나무공을 공중에서 쏘아 맞췄다는 기록도 실록에 남아있다.
태조는 평상시에 나무공[木毬]을 만드니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 사람을 시켜 5, 60보(步) 밖에서 위로 던지게 하고는 박두(樸頭)로 이를 쏘았는데 바로 맞혔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75번째기사 나무공을 만들어 박두로 쏴 맞추다
- 그 외에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24] 여진족과 싸울 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 위에서 모두 피해 냈다고 한다. 또한 이지란이 길거리를 걷는 아낙네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에 구멍을 내자 솜을 끼운 화살을 쏴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야사도 아니고 정사에 나온다.
- 야사에는 화살 3발을 한 번에 쏴 모든 과녁에 명중, 그것도 마상에서 해냈다는 기절초풍할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인 만큼 반 정도는 깎아서 접수하도록 하자.
2. 무장 이성계의 세력[편집]
파일:이성계 휘하 여진부족2.png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였으며, 그 뒤를 이은 이성계의 벼슬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 일단 금오위상장군은 고려군 2군6위 중 개경 방어를 담당하는 금오위의 수장으로 오늘날의 국군의 4성장군 7명에 해당되는 고려군 8대 상장군 중 하나인 최고위 중앙군직이고, 동북면상만호는 내무군인 순군만호부 소속으로서 동북면 방면의 수장이니, 대강 '4성장군 수도 방어군 총사령관 겸 내무군 동북관구 사령관' 정도 되겠다. 물론 이는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태종 시기에 남아 있던 이성계 직할 사병인 '가별초'가 5백호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상징적으로라도 이런 최고위 군직을 줄수밖에 없을 정도로 동북면의 상당한 토지와 인구를 '봉건 영주'처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5]
그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개경 탈환에서 이성계가 동원한 사병은 2,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그 만한 사병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성계의 사병 규모는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정예였는데, 이성계는 외적과 싸울 때도 아낌없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했었으며 이들은 이성계의 화려한 전공을 뒷받침하는 정예병이었다. 그냥 정예 보병 정도도 아니라 이성계의 개인 사병 집단 대부분은 수천 명의 정예 기병이었다. 또한 이성계는 동북면 - 동만주 지역의 수많은 여진족 세력을 거느린 일대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전장에 이성계의 최대 전공 중 하나인 황산대첩에서처럼 여진족이 포함된 기병[26] 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성계 휘하 무장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이성계가 적접 다스리던 고려인 농부, 평민들 뿐만 아니라 여진족, 몽골인들이 모두 잡다하게 섞인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정예 사병인 이성계 군단은 전투전에 대라(大螺)를 부는것이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 걸 알고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고려 내에서 매우 드높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글을 참고하자
이성계의 정예 부대인 가별초는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왕자들에게 분배되었다가, 태종 시기에 완전히 혁파되어 관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성계의 가산은 조선 왕실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왕들의 비자금인 내탕금으로 사용되었다. 정도전 등은 이 재산도 국고로 귀속돼야 한다고 했으나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한 후 이 가산은 왕의 개인 재산이라고 선포했다. 명목상으로 조선의 재산은 모두 왕의 재산이었으나 사실 세금 등을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27][28] 반면 이 가산은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들은 내탕금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절을 짓거나 잔치 등을 여는데 활용하였으며,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거나 땅을 사들여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함경도 땅의 3분의 1이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그래도 함경도의 대부분이 길주분지를 제외하면 경작이 불가능한 개마고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성계가 대한민국 전도에서 보이는 함주평야나 영흥평야를 통째로 가지고 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가히 대재벌이 따로 없었다 하겠다. 이는 나중에 별도의 내시 기관인 '내수사'가 관리하였다. 내수사에서는 이 땅을 소작하거나, 소출로 이자 놀이를 해 재산을 늘렸는데 소작료와 이자가 시중에 비하여 낮았으며[29] 이 관료들의 수탈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앞다투어 내수사에 소작을 하거나 돈을 빌리려 하였다.
또 그는 동만주 북방 여진족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일의 청 태조인 누르하치의 6대조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이성계의 부하였을 정도. 당시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글을 참고하자. 단, 중간에 나오는 여진족 부족 지도는 링크된 본문에서도 조금 언급하지만 모두 이성계에게 완전히 복종한 부족들은 아니며, 지도에 나타난 지역이 모두 이성계의 땅인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 크든 작든 일단 미치기는 하는 지역을 뭉뚱그려서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지도를 잘못 해석하면 마치 이성계가 현대의 간도 북부와 연해주 지역 일부까지 지배한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이성계가 당대 만주 최고의 용사이면서 여진족에게도 통크게 베풀었기 때문에 동만주 여진족 족장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큰형님 취급을 받은것일 뿐, 결국 이성계가 동족인것도 아니고 여진 부족들을 규합한 것도 아니었기에 만주 유목세계의 지존인 한(카간)으로는 대우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고려놈이긴 하지만 존나 짱쎈 양반이 더이상 개기지만 않으면 한턱 크게 쏴준다는데 받들어주고 떡고물이나 먹자' 정도 마음으로 따른 것 뿐이다.
3. 군주 시절[편집]
4.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편집]
왕이 된 후의 평가는 업적은 많되 후계를 잘못 세우는 결정적인 실수를 한 왕으로 요약된다. 행정이나 국방 등 정책적으로는 정도전, 조준을 재상으로 세우고 고려 말 전시과의 붕괴와 재정파탄을 가져온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 문제 같은 여러 문제들을 과전법 같은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해결하였고 국방에도 힘써 고려 말을 지옥으로 만든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을 대마도 정벌 등을 통해 사실상 대규모 침략은 조선 건국 이후로는 완전히 종식시킴으로서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
조선 개국을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뜻을 드러낸 때는 1380년, 이성계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임명된 때는 1383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서 처음 만났을 때는 1383년, 즉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는건 근거도 없고 억지스럽다. 이성계의 정치 스타일은 불도저처럼 유능한 주변 재상들을 자신의 막강한 권력으로 팍팍 밀어주는거지 바지사장이나 하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보스 기질도 충분했고 한 나라의 창업자답게 친화력과 포용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몽주에 대한 처우도 그렇다. 태종이나 다른 가신들이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말했지만 태조는 정몽주와 인연으로 신진 사대부와 연결된 것이며 정몽주와 정치를 논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일등이 잦았고 그래서 끝까지 정몽주를 포용하려고 했다.
태조 치세 중에는 제3차 요동정벌이 제기되었던 적이 있다. 명 실록에는 주원장이 "조선의 20만 강군이 요동을 치면 맞설 방법이 없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받고 우려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태조는 요동 정벌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요동 정벌을 반대한 조준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태조는 제1차 요동정벌에서 요동성 함락에는 성공하였지만 요동 공략 후에 식량 부족으로 후퇴하기도 했고, 제2차 요동정벌 때는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요동 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당시 조선도 실제로 동원 가능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터이므로 학자들 가운데서도 진짜로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하려고 했다기보단 사병을 억제하고 중앙 군권을 강화하려 한 시도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실제 영토로 삼으려면 백성들이 거주해야 하는데, 세종 대에 4군 6진을 개척하며 백성들을 이주시키자, 춥고 척박한 곳이라며 안가려고 자해하는 이들까지 있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당시 조선은 고려 말부터 홍건적, 왜구, 여진족 등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고, 주원장이 저 말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당시 조선이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제2차 요동정벌 즉 위화도 회군 당시 병력 5만명 중에서 보급병력이 2만이고, 실제 전투병력은 3만이다. 게다가 문제는 주원장이 저 말을 하는 당시에도 한반도 남부와 명나라 동남부는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 주원장 본인의 문서에도 나오지만 주원장 역시 조선을 칠 마음 같은 건 없이 그냥 협박질을 한 것에 불과했으며 당시 일본에도 조선이랑 비슷한 수준의 협박질을 했다가 반박을 받은 일이 있었다. 태조 시절 조선과 명의 대립은 양측 다 블러핑 성격이 강했다는 말.
5.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편집]
하지만 말년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데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1차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킨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 영락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4, 7년 8월 26일 기록 中. 정도전과 박위가 참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매핵기 증세를 호소하며.
5.1. 성급한 후계 결정[편집]
태조가 이렇게 후계 문제를 성급하게 결정하게 된 원인으로는 당시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맺은 자녀들의 혼인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여기에 반이성계파의 거두가 되는 이색[31] 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 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32][33]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후실(숙의 지씨, 성빈 지씨)로 들였다. 3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 최씨로 바로 그 최영과[34] 인척 관계에 있다. 4남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5남 방원과 6남 방연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들과 혼인했는데, 민선과 민제는 둘 다 황려 민씨(여흥 민씨)로 재상지종으로 꼽힌 유력 권문세가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사위이자 변안열의 사위이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 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35] 이러한 혼맥은 변방 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 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린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 세력과의 혼맥이 없었기에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36]
다만 이 구세력과의 결별설은 어디까지나 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래에서도 다시 검토하겠지만 신의왕후 소생들이 권문세가에게 장가를 들었다면 이방석은 아예 권문세가의 외손이라 딱히 명분 면에서 우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곡산강씨의 원류인 신천강씨 집안은[37] 원 간섭기에 새롭게 일어난 권문세가도 아니라 무려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짜배기 명문가였다.
게다가 바로 위에 나왔듯이 세자의 친위세력으로 이성계가 밀어준 이방번과 이제 역시 구세력 걸고 넘어지면 할 말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쪽은 공양왕의 조카사위고 한쪽은 이인임 조카다. 이방석이 설령 처가를 부유 심씨 집안으로 갈아치운들 여전히 구세력과 혼맥으로 얽혀있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일각에서 주장하는대로 유씨에게 누명을 씌워 폐출시키고 이방석의 처가를 갈아줌으로서 구세력과의 결별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고작 한 살 차이인 형 방번 역시 그리 할 수 있었다. 누나 경순공주도 마찬가지로 이혼시키고 다른 신흥 신진사대부 집안의 매형을 만들어주는 것이 이런 목적 설정에 훨씬 부합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움직임은 전무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먼저 태조가 신덕왕후의 첫 아들인 이방번의 세자 책봉을 밀고, 조준과 정도전을 포함한 신료들이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배극렴이 총대메고 나서서 이방번 대신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해 일이 마무리된다.[38][39] 태조의 머릿속에서는 애초에 고려왕실과의 연계성 문제는 고려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방번을 세자 후보에서 배제한 표면적 이유가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해서'였던 것을 보면 태조도 이 문제를 지적받고 적잖이 당황했던 정황이 보인다. 만약 보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 하에 이방번을 배제시켰다면 이방우의 사례처럼 보다 그럴듯한 미담을 꾸며 이방석의 책봉 명분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5.2. 책봉의 본질[편집]
고려에서는 첫째 부인 소생이나 둘째 부인 소생이나 모두 다 적통이었다.[40]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고 적통, 어느 어머니의 신분이 더 높다고 적통 그런 거 없다. 게다가 이름을 보았을 때 '계'자 돌림임을 알 수 있다. 이원계와 이성계의 사촌의 이름을 보면 마찬가지로 '계'자 돌림인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이화는 몰라도 최소한 이원계는 적자라는 말이다. 하지만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성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왜곡[41] 이다. 아마도 고려 시기에는 원나라와 몽골 유목 민족의 풍습으로 여러 부인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려 시대에 지방 호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호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수도에 소환해서 생활하게 하는 제도 때문에 고향의 아내인 '향처'와 수도의 아내인 '경처'가 따로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것이 후일에 그런 제도들은 사라진 뒤에 이해 부족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42][43]
결국 태조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성공을 뒷바라지해준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소생을 세자로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북면 변방 출신인 이성계가 개경에 자리를 잡고 고려 최고의 권신에 이어 왕 자리까지 오르는데는 경족 처가인 곡산강씨 집안의 조력이 절대적이었을수밖에 없으며, 그 곡산강씨 집안은 이성계에게 귀한 딸을 내준것만이 아니라 이성계의 사촌누이들[44] 에게도 연달아 장가를 드는 등 전주이씨 가문의 개경 진출에 그 누구보다도 큰 힘을 주었으니 적어도 신덕왕후가 살아있는 한은 차라리 큰왕자들을 숙청하면 숙청했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아달라는 신덕왕후, 나아가 곡산강씨 가문의 요구를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방석은 태조 자신이 각별히 총애하던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 정도 예우하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 부인들이 신덕왕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45] 알 수 있듯 신덕왕후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 태조 입장에선 왕의 아들이자 살아 있는 왕비의 아들인 방석의 세자 책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 쪽이 진실이건, 중요한 것은 태조의 생각과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물론 다수의 여론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고, 즉위 과정까지 왕자들의 공이 매우 많았음에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문제는 왕자들과 혼인한 고려의 구세력들은 조선에서도 여전히 중추에 있었다는 것이다.[46]
애초에 다 떠나서 세자인 이방석이 책봉될 당시 10살이었다. 애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보통 15세부터, 성인은 20세부터임을 감안하면 10살짜리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는건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더욱이 개국 초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화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물론 결과적으로 태조가 1408년까지 살아 장수했기에 살아서 즉위했다면 20대 중반이라 안정적인 계승이 가능했지만 태조의 사망 당시 나이는 72세로 조선왕들 중 2번째로 장수했으며 그 때 기준으로 70이면 꽤나 장수한 나이라 태조가 70넘게 살아있을 줄 예상할 수 없다. 아무리 양보를 해줘도 태조가 10년을 재위할 보장이 있어야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인데 태조는 즉위 당시 57세로 그럼 10년 재위하고 죽는다면 67세(...) 당시로선 60 넘으면 언제 죽어도 딱히 이상할 거 없는 나이니 태조의 선택지는 너무 안일했다.
5.3. 기타 가설과 신덕왕후의 사망[편집]
일각에서는 이성계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몽골, 여진족 등 북방 유목 민족에서는 큰 아들부터 재산의 일정 지분을 주고 차례로 독립시키고 막내가 끝까지 본가에 남아 부모를 모시다 부모님 사후 나머지 재산을 상속 받아 본가의 후계자가 되는 풍습이 있는데.[47] 동북면에서 성장한 태조가 그 지역의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의 풍속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태조가 세자로 책봉하려던 아들은 막내가 아닌 방번이었고, 배극렴, 정도전 등의 간언을 받아들여 결정을 바꿨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치적 이유 등으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을 배제한 후, 신덕왕후의 장남인 방번을 먼저 염두에 뒀다는 점에서 말자상속의 원칙으로 후계자를 세운 것은 아니다.[48] 더불어 태조는 다시 고려인으로 귀부하기 위하여 유목 민족에 영향을 받은 풍습을 완전히 끊어버린 인물인데 느닷없이 왕위 계승 문제에 유목민 풍습을 끌어들이는 것은 뜬금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반발속에서 1396년 6월 세자 이방석의 생모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뒷배가 부실해졌다. 태조는 세자 이방석의 권위를 위해 일부러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을 한양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빈으로 책봉하고 세자 이방석과 현빈 심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49]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 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세자와 왕손이 장성하고 기반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종친, 구 세력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5.4. 분봉 조치와 반발[편집]
태조도 나름대로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방과, 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 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50][51]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중 이성계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 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52] 방번이 넘겨받는다. (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 급진 정책에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왕실 집안 싸움이 되다보니 병사들도 혼동이 왔고 아우 이화나 조카 조온, 의형제 이지란 등 친위 세력이 되어 줘야 할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되었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어도 세자의 동복형이니 세자의 편을 들어줄거라고 믿었던 방번은 세자 자리를 뺏긴 탓인지 친동생의 위기를 수수방관해 버렸고 이화의 교란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키려 했던 이제까지 행동에 나서지 못하면서 방석을 지킬 방패는 한없이 얇아져 버렸다.[53]
그래도 태조 본인이 워낙에 무력 만렙인데다 현존 최고의 지휘관이었으며, 또 당시에도 전주 이씨 문중과 동북면 가별초의 최고 대빵이었던 태조의 힘은 당연히 막강했기 때문에,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왕자든 종친 나부랭이든 감히 태조의 결정에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리 태조의 나이가 많다고 해도 원체 강건한 무골이기 때문에 세자가 보위에 오를 때 까지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원래 건국왕이라는 게 그 이름값이 어마어마하기에 본인만 멀쩡하다면 결코 덤빌 수 없는 권위를 갖는 법이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타이밍 좋게 태조가 병환으로 인해 거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두 아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난리는 이성계의 용상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하루아침에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해 자신의 수족 같던 사람들과 이방석과 이방번 두 어린 아들이 목숨을 잃는 광경을 그대로 접할 수밖에 없게 된다.
5.5. 태조의 건강 상태[편집]
병환설이 조작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작이 아니고, 실제로도 아닐 가능성이 높은 정황 증거들이 있다. 조선 건국부터 세자 책봉까지 행보를 보면 50대의 나이로 위화도 회군을 시작해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달려왔다. 그 기간동안 태조가 겪은 일들을 보면 조선 건국 불과 10개월 전 첫 번째 아내인 신의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 와중에 이성계는 여전히 정권을 장악하며 차근차근 조선을 건국하는 발판을 마련해갔지만 당연히 고려에 충성하거나 권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세력들이 계속 위협해왔고, 이성계는 그들의 도전을 물리쳐왔다.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건국을 했지만 외부적으로는 고려 때부터 분쟁이 있던 명나라와의 대립,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남은 고려충성파 잔당 소탕, 거기에 히스테릭을 일으켜 저지른 왕씨 몰살, 새로운 수도를 정하기 위한 지역 탐색, 명나라의 도발에 신경전을 펼치며 기어이 태조 본인과 정도전의 주도로 요동 정벌을 다시 재개 준비, 세자 책봉, 신덕왕후가 갑자기 사망하는 등 실로 굵직한 일들이 연속해서 터졌다.
그리고 난이 펼쳐진 시기는 음력 8월, 양력 10월의 가을인데 가을날씨의 쌀쌀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설상가상으로 지속적인 폭우와 우박까지 내렸다. 이때 태조는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신덕왕후를 묻을 장지를 찾느라 수도권을 돌아다녔다. 이 무렵의 태조는 60대인데 그동안 겪은 일들로 적지 않게 심신이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은 60대 노인이 험한 날씨에 여기저기 다녔으면 병에 안 걸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커다란 중병이 아니라 며칠 요양만 하면 완쾌될만큼 단순 감기에 걸렸거나 태조의 신체능력이 정정했기에 기적적으로 잔병에 걸린 정도였을 것이며, 국왕이 병에 걸렸는데 정도전 등이 느긋하게 술을 마셨다는 건 태조의 몸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정도전 일파는 태조의 몸상태를 확인하러 문병왔을 테고, 태조가 직접 자신은 며칠만 쉬면 나을 거라고 안심시키고 돌려보냈을 확률이 높다. 몸상태가 심각했다면 오히려 정도전은 경계를 철저히 했을 것이다. 또한 태조가 멀쩡했다면 아무리 명분을 내세웠어도 엄연히 왕과 국가에 반역을 일으킨거다. 그리고 이렇게 반기를 들면 오히려 태조는 그렇지 않아도 그냥 놔두기 찜찜하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정리할 명분이 생겨 몸소 활을 챙겨들고 이방원 세력을 인간 과녁으로 삼아 모조리 꿰뚫어버리고도 남았다. 굳이 활을 쥘 필요도 없이 맨몸으로 멀쩡히 걸어나와있으면 과거에는 자신들을 지휘하던 장군이자 현재의 건국왕에게 감히 목숨걸고 개기려는 병사들보단 얼른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병사들이 대다수일 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1차 왕자의 난은 감정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여 빈틈을 노리고 벌인 일인데 태조의 상태도 제대로 안 살피고 그냥 대뜸 들이닥쳤을 리는 없다.
6. 최후와 건원릉[편집]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70이 지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는다."
아들을 둘이나 보내버리고[54]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꼴도 보기 싫었는지, 이성계는 1401년 11월 한양을 탈출하여 소요산에 위치한 이태조 행궁으로 행차한다.
참고로 이 1차 왕자의 난부터 태종 즉위 사이에 이성계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보가 둘 보였다. 하나는 양위 반년만에 개경으로 재천도하게 되자 떠나기 전날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찾았다가 아무래도 고생고생해서 마련한 새 수도에 강씨가 묻혀있는 곳을 떠나기 싫었던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게 나만의 뜻이더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의논해서 내린 결정이었지 않느냐!" 라며 고함을 쳤는데 아무런 호응이 없었다는 기록, 다른 하나는 이것보다 이후로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세자가 된 이후인데 하루아침에 모든걸 잃다시피한 상황에서 권력이라도 자기 손에 있는걸 확인해보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들이 괘씸했는지 대뜸 태종에게 "조영무, 조온, 이무를 두고 조영무와 조온은 아무것도 없던 녀석을 내가 키워주었는데 지난 난리 때 날 배신하고 네게 붙었지 않느냐? 이무 그 놈은 누가 이길지 간이나 보던 놈 아니냐? 그런데 이놈들이 날 배신했듯이 너도 배신하리란 보장이 없진 않겠지?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 이놈들 얼렁 쫓아내라"고 말했는데 일단 태종이 태조의 체면을 챙겨주기 위해 정종에게 청하는 형식으로 셋 다 유배를 보내긴 했지만, 유배령을 내린 직후에 사면하고 모두 얼마 안가 관직에도 복귀함으로써 오히려 태조의 영향력이 미비함만 보여주고 말았다. 다만 이중에 이무는 민씨 형제들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나중에 태조가 죽고나서 1년 뒤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숙청될때 연루된 옥사를 겪고 처형당한다.
함흥차사라는 속담은 태조가 이태조 행궁에 머무르던 일에서 비롯되었다.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기 전 이방원이 이성계를 모시기 위해 여러 사람을 함흥부에 차사로 보냈으나 이성계가 모두 활로 쏴서 죽여버려 돌아오지 못하자 무학대사를 보내 설득하였고, 무학대사는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이성계가 뜻을 꺾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야사에서 비롯되었으며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이지만 정사는 아니며 사실 함흥부에 차사로 갔다가 이성계의 활 맞아 죽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함흥차사로 갔다가 죽었다는 인물 중 송유나 박순은 조사의의 난에 휩쓸려서 죽었고, 성석린은 애초에 함흥부에 간 적이 없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없는데, 반대로 차사로 갔다가 살아왔다는 사람은 무학대사 제외하고도 많다. 애초에 태종이 차사로 보낸 사람이 엄청나고, 이중 반란에 휩쓸린 사람 제외하고는 다 살아왔다. 아무리 태조가 태종에 대한 증오가 여전하던 시점이라도 감정적으로 아무나 막 죽여댈만큼 성격이 뒤틀렸거나 분노로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을 리 없으며, 부자의 대립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지 않은 차사를 마구 죽여대면 여론이 불리해질 것이 뻔한데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짓은 하려 들지 않았을 터다.
다음해인 1402년 이성계의 묵인 하에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왕의 친정이기도 한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조사의의 난이라고 불리지만, 실질적 주동자는 이성계라는 게 중론이다. 건국왕인 이성계가 배후이니만큼 조사의의 반군의 기세는 컸지만 이미 자신의 기반을 다져놓은 이방원이 이끄는 관군은 숫자와 질 모두 앞서 결국 손쉬운 승리를 거둔다. 결국 허무하게 자신의 마지막 전쟁을 아들에게 패배한[55] 이성계는 그 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와 아들과 화해하게 되며, 그 뒤 절이나 온천을 유람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풍질(뇌졸중)에 걸려 앓다가 결국 1408년 음력 5월 24일 파루시간[56] 얼마 뒤에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태상왕(太上王)이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항상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자면서 친히 진선(進膳)의 다소(多少)와 복약(服藥)에 있어서 선후(先後)의 마땅함을 보살폈는데, 이날 새벽에 이르러 파루(罷漏)가 되자, 태상왕께서 담(痰)이 성(盛)하여 부축해 일어나 앉아서 소합향원(蘇合香元)을 자시었다. 병(病)이 급하매 임금이 도보(徒步)로 빨리 달려와 청심원(淸心元)을 드렸으나, 태상이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상왕(上王)이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오니, 임금이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으로 하여금 전(奠)을 주장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동한지(東漢志)》의 국휼고사(國恤故事)를 상고하면, ‘백관(百官)이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고리(故吏)·이천석(二千石)·자사(刺史)·경도(京都)에 머무르고 있는 각 지방의 상계 연리(上計掾吏)는 모두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천하(天下) 이민(吏民)은 발상(發喪)하여 3일을 임(臨)한다.’ 하였고, 또 대명(大明) 영락(永樂) 5년 7월 초4일 황후(皇后) 붕서(崩逝) 때의 예부 상례 방문(禮部喪禮榜文)을 상고하면, ‘경사(京師)에 있는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본월(本月) 초6일 아침에 각각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사선문(思善門) 밖에 다다라,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초8일 아침에 각 관원(官員)은 소복(素服)으로 띠[帶]와 효복(孝服)119) 을 가지고 우순문(右順門) 밖에 이르러 착용하고, 성복(成服)을 기다려서 사선문(思善門)에 들어와,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효복(孝服)으로 바꾸어 입고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이것이 끝나면 각각 효복(孝服)을 가지고 나간다. 초9일·초10일도 예(禮)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대행 태상왕 전하(大行太上王殿下)께서 5월 24일에 승하하시었으니, 즉일(卽日)로 각사(各司)에서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곡림 봉위(哭臨奉慰)하고, 26일에 이르러 각각 효복(孝服)을 착용하고 곡림 봉위하며, 28일 즉 승하하신 후 제5일에 이르러 시왕(時王)의 복제(服制)에 따라 삼차(三次)의 곡림 봉위례(哭臨奉慰禮)를 행하게 하소서."
하고,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었다.
"경외(京外)의 음악(音樂)을 정지하고, 도살(屠殺)·가취(嫁娶)를 금하고, 대소례(大小禮)와 조시(朝市)120) 를 정지하고, 제3일에 이르러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에 고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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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이방원이다.[57] 다른 아들인 이방과도 소식을 듣고는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왔지만 이미 도착했을때는 아버지가 승하한 직후였다. 죽기 직전에 이성계는 담이 심해서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태종이 청심원을 직접 아버지에게 올렸지만 이성계의 기력이 다했는지 이를 삼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서는 '눈을 들어 왕(태종)을 다시 쳐다보더니 이에 승하했다'고 이성계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왕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58] 이후 역대 조선 국왕들의 왕릉 봉분이 잘 정돈된 것에 비해 태조의 건원릉은 억새풀이 무성하여 매우 투박한데, 어떻게 보면 무덤 주인 이성계와 잘 부합한다. 건원릉의 상징이 되면서 억새풀 벌초는 1년에 딱 한 차례만 한다. 동구릉에 가면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없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태조 이성계의 왕릉이니만큼 야사도 존재한다. 야사 내용들을 보면 태조가 내가 죽으면 고향 함흥부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아들이자 3대 임금인 태종은 나라의 창업자인 자기 아버지를 동북면에 위치한 함흥부에 묻는 것은 왕실의 위엄이 서지 않고 제사도 힘들다 생각해서 도성 근처에 모시고자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불효를 저지르게 되니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태조의 능에 심어놓았다.' 부터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를 그리워하여 신덕왕후의 묘가 있는 정릉에 합장되기를 원했으나 생전 신덕왕후와 사이가 나빴던 태종은 차마 그 말을 따를 수 없이 새로운 묏자리를 알아봤고,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죄책감에 평소 향수병이 있던 태조를 위해 함흥에서 자라나는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심었다는 내용 이렇게 존재한다. 사실 조선에서 왕릉은 왕이 궁궐에서 하루만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서 조성할 수 없으니 즉 왕은 궁궐을 비울 수가 없다. 그래서 왕릉이 아무리 멀어도 경기도 권역에 존재한다. 원칙은 그랬지만 외부에서 하루를 넘기는 일이 생기면 임시 궁궐인 행궁(行宮)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단 어느 쪽 내용이던 한양(지금의 서울)과 함흥은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니 그냥 파서 가져오면 가져오는 시간동안 억새가 말라 죽으니 이를 고민하던 태종이 한양에서 함흥까지 사람들을 일렬로 줄줄이 세워 릴레이 형식으로 억새를 운반해 건원릉에 심었다고 전해진다.[59]
또 다른 야사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양이 왜군에 의해 함락당했을 때 왜군은 건원릉에 불을 질렀으나 정자각에서 불어온 바람에 의해 불이 꺼지자 왜군이 몇 차례나 재방화를 펼쳤음에도 계속 실패하여 결국 방화를 단념했다는 야사를 비롯해서 여러 야사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