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사학보》 2013, vol., no.67, pp. 5-42 (38 pages); 박성준, <태조의 공론정치: 현안해결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2011, vol.10, no.1, pp. 29-47 (19 pages);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김인호, <조선전기 숭의전의 설치와 역사인식> 《사학연구》 2005, vol., no.78, pp. 111-146 (36 pages); 윤정, <정종대 상왕 태조의 임어와 개성 덕수궁> 《서울학연구》 2015, vol., no.58, 통권 58호 pp. 167-208 (42 pages)], '''왕씨 처분'''(王氏處分)[* 한정수, <조선 초기 王氏處分論의 대두와 전개>, 《사학연구》 2014, vol., no.114, pp. 1-36 (36 pages);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왕씨 학살'''(王氏虐殺)[*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또는 조선 초기 당대에도 사용된 바 있는 '''왕씨 영절'''(王氏永絶)[* 한정수, <조선 초기 王氏處分論의 대두와 전개>, 《사학연구》 2014, vol., no.114, pp. 1-36 (36 pages)]이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왕씨 몰살'''(王氏沒殺)이란 표현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직접적으로 '왕씨 몰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당대의 사건을 몰살[* 김영두. (2010). <단종충신 追復 논의와 세조의 사육신 인식>. 《사학연구》, 98; 문경호. (2014). <여말 선초 조운제도의 연속과 변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17(1); 강호선. (2013). <조선 태조 4년 國行水陸齋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로 표현한 국내 논문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그 외 숙청[*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 김인호, <조선전기 숭의전의 설치와 역사인식> 《사학연구》 2005, vol., no.78, pp. 111-146 (36 pages); 한형주, <조선시대 ‘역대시조묘’에 대한 의례적 고찰> 《국학연구》 2019, vol., no.39, pp. 281-317 (37 pages)]이나 '왕씨 제거'는 아니지만 제거[* 강호선. (2013). <조선 태조 4년 國行水陸齋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최인실, <『와유록』의 「사대부가거처」, 『택리지』의 원본인가> 《한국문화》 2019, vol., no.86, pp. 275-303 (29 pages)]란 표현을 쓴 논문들 또한 확인이 된다. 그 밖에 유진 박(Eugene Y. Park) 펜실베니아대 교수는 그의 SCI 논문들에서 (1394년 5월 몰살)[* [[국립국어원]]의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s Korean-English Learners' Dictionary에서는 '''massacre'''이란 영단어를 [[https://krdict.korean.go.kr/eng/dicSearch/SearchView?wordMatchFlag=N&mainSearchWord=%ED%95%99%EC%82%B4¤tPage=1&sort=W&searchType=W&proverbType=&exaType=&ParaWordNo=83707&nation=eng&nationCode=6&viewType=A&blockCount=10&viewTypes=on&myViewWord=56021|학살]] 또는 [[https://krdict.korean.go.kr/eng/dicSearch/SearchView?wordMatchFlag=N&mainSearchWord=%EB%AA%B0%EC%82%B4¤tPage=1&sort=W&searchType=W&proverbType=&exaType=&ParaWordNo=56021&nation=eng&nationCode=6&viewType=A&blockCount=10&viewTypes=on|몰살]]로 번역했다. '''다만''' 해당 영단어는 [[https://namu.wiki/thread/MatureModernBrashScrew|토론]]을 거쳐 문서 표제어에 맞춘 '''몰살'''로 통일해서 번역하기로 했는데 참고로 massacre이란 단어는 학살로도 번역이 가능하며 가령 시민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던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 국내 학계에서도 이를 '보스턴 '''학살''' 사건'이라 번역하므로 규모와 상관없이 학살이란 번역도 충분히 가능한 번역이다.]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대 실록의 기록들에서는 주로 '영절'(永絶)이나 '청거'(請去)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1021_002|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니 윤허치 않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01_003|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토록 청하니, 윤허치 않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10_001|삼성에서 남은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윤허치 않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14_001|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 설명 ==[[개성 왕씨]]는 [[고려]] 474년간의 국성으로 번영한 가문이었지만[* 특히 태조 [[왕건]] 시기 [[호족(한국사)|호족]] 포섭정책으로 조금이라도 유력한 호족에게 국성 하사를 남발하다시피 했기에 왕족과 사실상 혈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시피해도 왕씨 성을 가진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새로 건국하면서 조선의 안정에 걸림돌이 되는 방해물로 간주되었다. 개국 초기에 왕씨들을 섬으로 옮겼다가 시간이 약간 지나자 다시 섬에서 나와도 된다며, 재주있는 왕씨들은 벼슬도 하게 해준다고 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1016_003|태조 3년 1월 16일]] 그러나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쟁이에게 태조와 공양왕 중 누구 운세가 더 좋은지, 왕씨들 중에서는 누가 제일 운세가 좋은지 물어보는 역모 행위를 하자 고려 왕씨 일부를 거제도로 다시 옮겼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1017_001|#]]왕씨 몰살을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태조도 마침내 왕씨를 제거하기로 결정했고, '''4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도에 있던 왕씨 일족들을 강화 나루에서 익사시켰다. '''4월 17일'''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 왕요 일가가 교살당했고 '''4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모아놓았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제거 대상자는 《개성 왕씨 대동보》에서는 공양왕을 포함해 '''약 150여 명'''이라 전하며[* 다만 《개성 왕씨 대봉보》엔 몰살당하지 않고 나중에 병사한 [[이성계]]의 [[사돈]] [[왕우(고려)|왕우]]와 그의 아들 [[왕조(고려)|왕조]], 왕관까지 포함되어 있는 등 일부 오류가 있기 때문에 해당 인원수에서 몇 명은 제외해야 한다.], 이 사건을 연구한 재미 한국사학자인 유진 박 펜실베니아대 교수[[https://www.amazon.com/Genealogy-Dissent-Progeny-Fallen-Royals/dp/1503602087|#]]가 참조한 사료인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혼기(魂記)>와 이 <초혼기> -명부-에 기록된 규모도 삼척에서 공양군 왕요 포함 8명[* <동학사 초혼기>는 [[무안대군]] 이방번의 장인이라 화를 면한 공양왕의 형 왕우와 그 두 아들을 명단에 포함시키고, 공양왕과 함께 죽은 폐세자 왕석을 빠뜨린 오류가 있어 이걸 빼고 더하면 8명이다],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111명, 강화도에서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 '''도합 135명'''으로 역시나 비슷한 규모이다.이후 지속적으로 감시와 색출이 법제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왕씨들은 지방에서 쥐죽은듯 숨어지냈다.[*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역사와 담론》, 99 (2021).] 태종 13년 공주에서 일어난 '''왕거을오미 사건'''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탄압을 중단시키기 이전까지 개성 왕씨들은 약 20여년간 숨죽여 지내다가 태종과 세종을 거쳐 점차 점차 처우가 개선되어 문종~세조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선 지배층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진행 ==태조의 즉위 직후에는 공양왕과 세자 왕석에 더한 처분 문제만 논의되었을 뿐 나머지 왕씨들을 어떻게 할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500년 가까운 통일왕조의 왕족으로 '''[[저민의|용손(龍孫)]]'''으로 신성화되었던 왕씨들에 대한 처분은 곧 심각한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고려 왕실 처분 문제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태조 원년 7월 20일에 이루어졌다. 사헌부 대사헌 민개(閔開)가 전조 왕씨들을 외방에 둘 것을 청하자 태조의 결정은 다음과 같았다.1.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아들 왕강(王康)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논하지 말라2.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아들 왕조(王珇), 왕관(王琯)은 고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니 논하지 말라3. 나머지는 거제와 강화에 나누어 분치하라왕승과 왕강 부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를 했는지 기록이 없어 오늘날에도 인지도는 거의 없지만 매우 드라마틱한 인물상으로 [[개성 왕씨]]지만 왕씨의 사직을 버리고 이씨의 사직을 택해 공신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왕강은 조선에 충성하며 관직 생활을 함에도 지모와 계략이 빼어나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거듭 처분을 요구했던 점이나 태조가 학식과 실무 능력을 칭찬했던 점으로 보아 정치적 수사를 감안해도 당대에 상당히 유능하고 자질을 인정받는 인물이었던듯 싶다. 왕우는 공양왕의 형제이자 [[이방번]]의 장인으로 이 혼맥으로 태조의 보호를 받았다.[* 왕우는 1397년에 죽었다. 피살당하지는 않았지만 대간과 형조에서 지속적으로 탄핵을 당해 마음 고생을 많이 하다가 죽었으며, 작위를 이은 왕조와 왕관은 이듬해에 일어난 [[무인정사]] 때 방번의 사돈이라는 신분 때문에 [[태종(조선)|정안공 이방원]]의 칼에 맞아 죽었다.]강화와 거제에 나누어 분치케한 방법은 상나라의 탕왕이 걸을 남소로 나가 거처하게 하고, 서주의 무왕이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을 제후로 봉해 잔존한 상나라의 후손들을 다스리게 한 방식과 유사하다. 어느 쪽이든 목숨은 보장해 주는 쪽이었다. 7월 28일 정도전이 지어 반포한 태조의 즉위 후 첫 교서에서 왕씨에 대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1. 왕우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 2.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들의 처자와 동복(僮僕)들은 그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는데 '''소재 관사에서 힘써 구휼하여 그들의 처소가 어디인지를 놓치지 말 것'''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되 어쨌든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의사를 유지했다. 아무튼 태조 원년 8월 7일 원주에 있던 왕요를 '공양군'(恭讓君)으로 삼아 [[간성군]](杆城郡)에 두어 폐주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왕씨의 제사는 아우 왕우가 맡으며, 전 왕대비 안씨는 '의화궁주'(義和宮主)로 삼아 처우를 보장하는 조치가 발표되었다. 일일이 언급되진 않으나 뒷날 왕강, 왕승보, 왕승귀와 나란히 탄핵받는 영복군(永福君) 왕격(王鬲)이 태조 원년 9월 3일 거제나 강화가 아닌 화령부(和寧府)로 안치되었다는 《실록》 기사까지 감안하면 7월 18일 기사처럼 왕승과 왕우 가족을 제외한 이들이 몽땅 강화와 거제로 전부 보내진게 '''아니라''' 상당수는 '''외방종편'''(外方從便 서울 이외 지방에 거주케 하는 형벌)이 행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외방종편'이면 뒷날 이거이나 이숙번이 받은 형벌로 무겁다고 보긴 힘들었다. 태조는 보유할 수 있는 노비 숫자를 20명 이내로 제한한[*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20일] 부분을 제외하면 외방에 보내진 왕씨들의 생활을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중앙에 남은 왕씨 중에 [[왕강]]은 왕승보(王承寶)와 함께 특별히 개경에 불러와서[*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5월 26일] 굴포의 운하건설 작업을 맡겼고, 운하 건설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왕강의 학식과 실무 능력은 극찬하며 그를 [[남재]]와 같은 '회군공신'(回軍功臣)의 예로 대우하게 했다. 왕조와 왕관은 외가의 성을 따라 노씨로 성을 바꾸게 한 다음 대장군과 상장군으로 삼았고, 형제의 아버지인 왕우도 주기적으로 궁에 초청해 격구를 하며[*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4월 4일 / 《태조실록》 권4, 태조 3년 12월 1일] 챙겨주었다. 뒷날 왕우 부자를 끝까지 지켜준 점이나 왕강을 섬으로 보내야 한다는(=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연고가 있는 공주로 귀양보내는 선에서 끝낸 태조의 조치를 감안하면 이들에 대한 후대가 전부 위선이라고 보긴 힘들다. 공양왕 옹립때까진 한 배를 탔다 돌아선 정몽주에게 인내심을 발휘했던 태조는 왕씨라도 우리편임이 명확하고 능력이 되면 임용해 책임있는 자리에 올려도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변방 무장 출신으로 자기 힘으로 정적들을 쓰러뜨리고 올라선 창업군주 태조의 의사였고,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의 의견이 아니었다. 조정의 실권을 쥔 중신들은 건국 직후 [[이색(고려)|이색]], [[우현보]], [[설장수]] 등 온건파 56인을 바다에 던져서(擠之於海) 제거하자고 주장했던 이들이었다. 왕씨를 방치, 봉건하자는 온건론의 기반은 태조 1인의 관용이 전부라서 당대 정치적 격변에 따라 태조의 의향이 바뀌면 얼마든지 뒤집어질 방침이었다.태조 즉위 후 2개월이 막 지난 시점에 대사헌 남재가 올린 <시무상서문>이다. 남재는 정도전, 조준과 함께 태조 추대 세력 가운데 핵심인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었다. 그가 대사헌의 직분을 역임하며 올린 <시무상서문>은 정도전을 비롯한 공신 세력 대다수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상소에선 왕업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왕씨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그들을 모두 강화와 거제에 분치토록 하자 청하고 있다. 역으로 해석보면 태조 즉위 직후 거제와 강화에 옮기라는 지시가 예외없이 적용된 사안이 아니며, 상당수 왕씨들이 지방 군현에 흩어져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태조는 도당과는 뚜렷한 온도 차이를 보이며 재위 2년차까진 입장이 변치않았다. 공양왕을 원하는 장소에 기거케 하는 한편 거제에 있는 왕씨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여 주군에 안치토록 지시했다. 원년에 하달한 처리 방침보다 한결 전향적인 조치로 도당에 시행을 서두르도록 촉구하기까지 했다.전향적 조처의 배경에는 명나라의 인정이 있었다. [[홍무제]]는 홍무 25년 윤12월 초9일에 고 했고, 이 같은 결정은 태조 2년 2월 15일 주문사(奏文使) 한상질(韓尙質)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을 전달함으로서 알려졌다.[*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2월 15일] 명실공히 고려의 국왕이 아닌 신왕조 '''조선'''의 군주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태조는 고려 왕족들도 자신의 신민으로 포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리라 미뤄짐작할 수 있다. 도당은 이에 따랐고 전술한 왕강과 왕승보의 개경행도 이때 진행되었다. 하지만 도당의 의지는 태조와는 전혀 달랐고, 무엇보다 섬에서 나와 지방에서 살게해준 태조의 호의는 의도와 달리 결코 왕씨들에게 좋게 작용하지 않았다. 거제와 강화라는 좁은 섬에서는 생활은 불편하지만 바다 건너 섬안에만 있으니 감시가 쉬워서 꾸미지도 않은 역모 누명을 쓸일도 없다. 국립공원안 천연기념물쯤 되는 셈인데 육지로 올라와 넓게 흩어져 지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왕래하고 모이기는 한결 쉬워지는데 감시는 어려운만큼 아주 작은 빌미만으로 역적 혐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고 그렇게 되었다.불길은 '흥국사 9공신' 중 한 명인 '''박위'''(朴葳)로부터 시작되었다. 박위는 태조 2년 3월 전 문하평리로서 양광도에 나아가 왜구를 막거나, 전함을 제조하는 등 태조 2년까지 국방 부분 외 정치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태조 3년 정월 병진일 순군옥(巡軍獄)에 수감된다. 이유는 박위가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을 시켜 밀성(密城)에 사는 장님 점쟁이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을 치게 한 까닭이었다. 점괘는 하는 극히 민감한 내용이었다. 이흥무는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명운이 가장 귀하고, 그 아우 영평군(鈴平君) 왕거(王琚)가 다음이라고 말해주었으며, 순군옥에서 심문받을 때도 그대로 토설했다.왕씨들은 다시 거제도로 옮겨지고, 왕화와 왕거는 안동옥에 수감되었는데 대간과 형조에서는 더 나아가 왕강, 왕승보, 왕승귀, 왕격과 공양왕 부자를 모두 제거할 논의를 시작한다. 대간과 형조에서는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려 공양왕과 여러 왕씨들을 섬에 안치했다가 모두 대역죄로 제거하기를 청했다. 대간과 형조에서 왕씨 제거를 요청한 명분은 철저히 유학 논리에 기반했다. 정말 강력한 발언은 바로 이 다음이다.결국 대간과 형조는 모든 업무를 중지하고 왕씨 제거를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태조는 결국 왕강 등 4인을 불러들여 위로한 뒤 왕강은 [[공주]]로, 왕격은 [[안변]]으로, 왕승보는 [[영흥]]으로, 왕승귀는 [[합포]]로 귀양보내어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도 이들은 연고가 있거나 외지에서는 제법 큰 고을들로 보내줘 사정이 나았다. 이튿날 왕씨들에 대한 감시를 보다 철저히 하도록 방침이 내려져 강화부에서 왕씨의 노약자들까지 동태를 아뢰게 했다. 나아가 공양왕 부자를 [[삼척]]으로 안치시켰다.하지만 대간과 형조는 만족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박위와 이흥무의 점복 명운에서 비롯한 옥사를 통해 왕씨 제거의 명분을 상소하자 마침내 도당에 명하여 대소 각 관사와 한량, 기로를 모아 가부를 진술하여 바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4월 14일] 조정 실세들이 모인 [[도평의사사]], 법률 집행을 맡은 형조, 젊은 언관들이 모은 [[대간]]이 모두 한결같이 왕씨 제거를 강력 요구하고 있었으니 결론은 뻔했다. 서운관(書雲觀), 전의(典醫), 요물고(料物庫)의 하급 관원 수십명만이 해도에 안치시키자는 온건론을 표방했고, 나머지는 모두 극형을 주장했다.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晋)과 형조의랑 함부림(咸傅霖)을 삼척에, 형조전서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몽을(吳蒙乙)을 강화도에, 형조전서 손흥종(孫興宗)과 첨절제사 [[심효생]](沈孝生)을 거제도에 파견해 왕씨들을 바다에 던져 죽이도록 했다.4월 15일에는 강화도에서 공양왕의 숙부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왕향(王珦) 등 16명을 강화 나루에서 빠뜨려 죽였고, 4월 17일 공양왕과 폐세자 왕석이 삼척에서 교살되었다. 4월 20일에는 거제도에서 수연군(壽延君) 왕규(王珪) 등 110여 명이 바다에 던져졌다. 나아가 고려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받은 이들은 모두 본성으로 돌아가게하고,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개성 왕씨가 아니라도 외가 성을 따르라는 방침이 내려졌다.[*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4월 26일]이로서 왕위에 가까운 유력 왕씨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대간과 중신들은 더 원했다. 태조가 전 왕조의 제사를 받든다는 명분으로 보호한 귀의군 왕우와 그의 두 아들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태조 4년 4월 25일 간관 이고(李皐) 등은 왕우 3부자가 흉모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며 다른 나라로 달아나 걱정을 끼칠 수 있으니 3부자를 강화도로 옮겨 출입을 금하고, 잡인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환란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이 유폐지 앞서 강화도에서 던져진 왕씨들처럼 죽이자는 소리인데 태조는 잘라버렸다. 그리고 2개월 가량 지나 7월 이고는 다른 건으로 풍문탄핵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7월 5일에 파직된다. 태조가 끝까지 막아주긴 했으나 이토록 시달리며 마음 고생한 왕우는 태조 6년 2월에 사망하고, 귀의군 작위를 이어받아 노씨에서 왕씨로 복성한 상장군 왕조가 뒤를 이었으나 왕조와 아우 왕관은 이방번의 사돈이었던 탓에 [[무인정사]]때 불똥이 튀어 비명횡사한다.왕씨에 대한 기찰은 이어져 태조 6년 12월 왕씨(王氏)의 [[서얼]] 백안(伯顔), 연금(延金), 금만(金萬)이 가명으로 도성에 출입했다가 적발되어 참수되었고, 동년 12월 8일 약사노(藥師奴)라는 왕씨 서얼이 붙잡혀 처형되었다.결국 이러한 진행 과정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왕씨 몰살은 [[태조(조선)|태조]] 본인의 의지보다는 조선 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제 막 왕조를 세운 태조의 입장에서는 신하들의 입장과 세력은 무시못할 상황이었고, 태업과 함께 12차례나 상소를 올려 왕씨들의 처벌을 청하는 그들의 요청을 계속 물리칠 수 만도 없는 상황에서 결국 태조는 조선 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신의 명으로 고려 왕족들을 몰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 처형된 왕씨 숫자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는 추가 숙청을 제외하고 강화도, 삼척, 거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숫자는 아이 포함 개성 왕씨 남성 135명이다. 1. 조선 건국에 협력한 왕승 일가 2. 이성계 및 조선 건국 세력과 혼맥으로 이어진 왕우 일가 3. 여성 4. 방계이들을 제외하고 직계 남성들 '''130여명이 제거'''되었다. 후술할 희생자 명부에 '왕씨쌍생소아'(王氏雙生小兒), '소아'(小兒)같은 기술이 있어 유력 왕씨 남성이라면 나이 구분을 두지 않고 제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연구한 사람은 재미 한국사학자 유진 박 펜실베니아대 교수이다.[[https://www.amazon.com/Genealogy-Dissent-Progeny-Fallen-Royals/dp/1503602087|#]] 박 교수는 강화도, 거제도, 삼척 등지에서 일어난 제거 작업으로 희생된 '''희생자 규모를 135명으로 규명했다.''' 이는 당시 희생당한 인물의 원혼을 빌기 위해 작성된 <제문>에 근거했는데 실제로도 공양왕 직계를 포함해 고려 말 왕위 계승권에 근접한 왕씨 '남성'을 중심으로 제거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여인들과 방계 왕씨, 조선 개국 세력과 혼맥으로 얽혀 있는 인물은 숙청에서 제외되었다. 유진 박 교수가 참조한 사료는 18세기 문인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의 문집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전문이 옮겨져 있는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혼기(魂記)>다.[* 성해응, 《연경재전집》 <외집> 권37 <동학사혼기석>(東學寺魂記釋)] 공주는 왕씨에게 특별한 장소인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이성계가 사돈 왕우와 나란히 거론하며 숙청 대상에서 제외시킨 순흥군 왕승의 아들 왕강을 제거하라는 중신들의 요청을 거부한 이성계가 왕강과 아우 왕휴 등을 귀양보낸 고장이며, 왕승의 사위이자 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왕자의 난때 태종에게 협력해 공신 반열에 오른 [[우현보]]의 아들 우홍부의 연고지이다. 공주 동학사에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위패를 모신 삼은각(三隱閣)이 자리잡고 있는데 1394년 길재가 고려 국왕과 정몽주를 제향하며 건립되었다.이 <혼기>의 존재 자체는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뒤쪽에 실린 계유정난 희생자들의 명단과는 대조적으로 앞에 실린 왕씨 희생자들의 명단은 거제도와 강화도로 나누어 죽거나 귀양간 이들의 명단을 상세히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조명받지 못했다.조선 제19대 숙종 시기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시키면서 부딪친 딜레마는 세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조선 전기에 가장 중요한 임금중 한 명인 세조를 부정할순 없고, 단종과 사육신도 포기할수 없었던 유학자들은 세조의 비도덕적 행위를 어떻게든 묻어버리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데 그중 하나가 공주 동학사의 <초혼기>다. 세조 3년 9월 세조가 공주 계룡산 동학사에 거동하게 되었는데 그곳 중들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명단을 적은 <초혼기>(招魂記)를 써서 넋들을 위로하고 있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직접 제수를 마련해 단종과 단종 충신들을 추모하며 초혼제를 지냈다는 이야기였다. 공주 동학사 이야기는 당대 무척 널리 퍼졌던 지어낸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대신들이 언급하는가하면(《숙종실록》 권 63, 45년 4월 30일, -행판중추부사 이이명의 언급-), 당대 최고의 거유 송시열의 《송자대전》(권 193 <墓表> -高麗典書朴公墓表-), 정조 15년 단종릉인 장릉에 배식단을 설치하며 정조가 내린 교서에서 배식단 설치의 전례로 동학사가 언급되며, 일제강점기에 동학사에 얽힌 전승과 사적을 정리한 송주헌의 《동학지》(東鶴誌)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물론 세조가 이들을 추모했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세조 3년 7월에 세조는 귀양가서 일을 꾸미다가 발각된 금성대군을 사사하느라 바쁜 정국을 보냈고, 9월에는 맏이인 의경세자가 사망하는 흉액을 겪었다. 한가하게 공주로 나들이할 일이 없었다. 세조 12년에 고성 탕정에 피부병을 치료할겸 해서 간적은 있으나 고성-강릉-오대산-횡성-원주을 거쳤지 계룡산에 가지는 않았다. 지방 야사를 유학자들이 주워섬겨서 역사로 빚어낸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간적이 없을 뿐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적은 <초혼기>와 제사는 존재했다.제16대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의 아들이자 제14대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은 인조 20년(1642) 심희세가 간행한 성삼문의 문집 《성근보집서》의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흔쾌히 받아들인 신익성은 일찍이 동학사의 <사부>(死簿)를 보고 성삼문과 가족들이 모두 해를 입었음을 알았으니, 명 성조 영락제가 혜종 [[건문제]]의 충신이었던 방효유의 10족을 멸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써주었다. 제21대 영조 44년(1768)에 간행된 하위지의 문집 《단계유고》(丹溪遺稿)의 <부록>(附錄)에서도 <동학사 초혼기>를 인용해 41인의 희생자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제22대 정조때 규장감 검서관 성해응이 등장한다. 연경재 성해응은 정조 12년(1788)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왕명을 받은 각종 편찬작업에 투입되었다. 단종의 충신들을 배향한 장릉 배식단과 《배식록》은 정조 15년에 완성되었으며, 노비에 무당까지 총망라해 단종에게 충성한 이들을 추렸다.규장각에서는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는데, 성해응도 이에 참여하여 공주 동학사의 <초혼기>를 조사했으며, 13장으로 구성된 <초혼기> 전문을 인용하고 해설한 글이 그의 문집 《연경재전집》에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이 <초혼기>는 역대 고려 왕과 태조 3년에 죽은 개성 왕씨들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며 시작한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하니 태조 3년 4월에 삼척, 강화, 거제에 보내놓은 왕씨 직계 남성들이 죽자 이듬해 태조는 죽은 왕씨들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비는 수륙재(불교식 천도재)를 지냈고, 권근에게 시켜서 《연화경》(불경) 3부와 37부의 《수륙의문》(水陸儀文, 의례 절차를 정리한 의례서)를 펴내게 했다. 이때 작성된 희생자 명부가 동학사에 전해져 보전되어 내려온 것이다.왕씨들을 추모하면서 작성된 <초혼기>는 이후 조선 초기에 옥사로 죽은 이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 둘씩 추가해서 늘려온 명부로 단종 복위를 꾀한 집현전 학자들을 거쳐 제8대 예종때 죽은 남이와 강순까지 기록하며 끝난다. 이 명부에 기록된 왕씨는 삼척에서 공양군 왕요 포함 8명[* <동학사 초혼기>는 무안대군 이방번의 장인이라 화를 면한 공양왕의 형 왕우와 그 두 아들을 명단에 포함시키고, 공양왕과 함께 죽은 폐세자 왕석을 빠뜨린 오류가 있어 이걸 빼고 더하면 8명],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111명, 강화도에서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 도합 135명이다. 《개성 왕씨 대봉보》에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을 감안해도 150여명 선으로 이와 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족보는 정양군 왕우같이 이성계가 보호해 화를 입지 않은 이들까지 이때 죽은 것으로 적는 오류가 있어 이런 이들을 빼고 나면 거의 차이가 없다. 여기에 왕씨에서 떨어져 나간게 거의 확실한 옥씨와 《개성 왕씨 족보》에서도 대거 확인되는 유(柳)씨, 이(李)씨, 여타 외가성으로 개성한 수많은 왕씨들을 감안하면 이상할 것 없다. 외가의 지위가 친가와 동등했던 고려는 외가성을 써서 형제끼리 성이 다른 경우도 꽤 흔했다. 당사자가 모를뿐 왕씨 후손은 지금 개성 왕씨 숫자보다 많다.이성계의 아들 이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일가를 보자. 왕씨가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꿨다는 이야기에는 후세의 조작인 경우도 있지만 왕우의 아들들은 일시적으로 노씨로 성을 바꿨음이 《실록》에서 확인된다. 서초패왕 항우가 패망한 이후 유(劉)씨로 성을 갈아버린 [[항백]]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이성계가 직접 구명해줬고 무엇보다 왕씨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왕씨 성을 유지해야만 했던 왕우의 아들들도 잠깐이니마 왕씨 성을 버리며 숙였는데 방계들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편 개성 왕씨지만 조선 건국에 협력해 2대에 걸쳐 이성계에게 충성한 순흥군 왕승과 맏이 왕강의 집안이 성을 바꿔 남양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거짓이다. 이방원의 공신인 전흥이 왕강의 아들이라는 주장인데 《실록》과 현지 묘비명을 참조하면 왕강과 함께 귀양가 공주에 터잡고 친인척들의 비호를 받아 무사히 대를 이은 왕강의 아우 왕휴와 왕휴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의 존재가 확인된다.《실록》에서도 유력 왕씨들을 처리한 다음에는 숨어사는 왕씨의 존재가 들통나더라도 적당히 다른 성으로 바꾸게 한 선에서 그친 정황이 확인된다. == 중지 ==왕우의 아들 왕관과 왕조가 제1차 왕자의 난때 죽어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어진 태종 시대 '''왕거을오미 사건'''을 통해 복권이 시작되었다. 왕거을오미 사건은 태조의 배려로 공주에 숨어 살던 왕휴의 후손을 김여지가 일부러 제보해서 공식적으로 복권시켜준 사건으로 태종과 김여지간에 사전 교감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 공주는 [[우현보]] 집안의 연고지이며 '''우현보는 사적으로 태종의 스승'''이니 이쪽 연줄이 활용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종 시대 왕우지가 '[[왕순례]]'라는 이름을 받아 왕씨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대를 거치며 의전상 상당한 우대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개성 왕씨]]이면서 고려를 버리고 조선 건국을 도운 왕승의 후손이었다.''' 왕순례가 서자로 근근히 대를 잇다가 손자를 끝으로 후손이 단절되면서 전조 제사를 받드는 일을 오래하진 못했지만 가만 있었다면 왕승과 왕강, 왕휴 모두 유력 왕족으로 거제도 앞바다 수온을 몸으로 측정했을테니 이성계를 도운 보람이 없진 않았다 하겠다.이후론 다른 왕씨들 중에서 숭의전을 지킬 후손을 정하게 되는데 [[선조(조선)|선조]]때부터 [[왕훈(조선)|왕훈]](王勳)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자세한 내용은 [[이왕삼각]] 문서를 참고.[[단종(조선)|단종]]을 죽이러 갔다가 시를 읊었다고 《[[청구영언]]》에 기록된 금부도사 [[왕방연]]은 왕순례보다는 서울에 살았던 동양군파인 왕미의 자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왕방연은 음서로 출사하여 벼슬이 금오랑(金吾郞)에 이르렀다.[*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은 그의 이름을 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04429&cid=43722&categoryId=43722|'왕방골']]이라 한다.] 동양군파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데다, 그가 살던 곳은 아예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04442&cid=43722&categoryId=43722|왕촌]](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451번지)이라 불렸을 정도이다.== 결과 ==유력 왕씨를 죽이고, 죽이지 않은 왕씨도 조선 초기 수십년간 숨어살게 만든 숙청 작업의 결과, 고려의 부흥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성계가 온건한 입장을 취하자 법을 맡은 형조부터, 핵심 중신들이 모인 도평의사사에, 젊은 관료들이 모인 대간까지 일치단결해서 왕씨를 발본색원해 주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공신들의 위기감이 젊은 신료들에게까지 공유된 것으로 여겨진다. 개성 왕씨가 공식적으로 지배층(사족)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누구도 고려 부흥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준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지난날 [[고구려]], [[백제]], [[발해]], [[신라]]가 왕조가 사라진 지 수백년이 지나서까지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 [[발해부흥운동]],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 계속 나라를 되살리려 시도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들은 고려의 신하로 남고자 한 [[원천석]]과 [[길재]]조차 자신의 자식, 제자들이 조선에서 벼슬살이하는 건 만류하지 않았고 이색의 제자인 권근도 뜻을 꺾고 조선 조정에 합류했으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만하다. 이 철저한 숙청 덕분에 신생국가 조선은 1차,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태조의 난) 같은 크고 굵직굵직한 위기를 겪고도 단단한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설령 왕씨 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그들은 민심을 얻지 못한 채 고려 부흥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희박하게나마 존재하던 고려 부흥 가능성이 왕씨 몰살로 인해 아예 0%가 되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이성계의 한양 천도는 왕씨 제거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관련이 없다는 반박도 있다. 공민왕, 우왕때도 거론되었고 공양왕때도 이성계 측에서 간접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개경]]은 면적이 좁은데 인구는 과도할 정도로 많았다. 또한 경작지는 적고, 강과 거리가 꽤 있어 수운 활용이 불편해 천도 논의가 꽤 나왔고, 그때마다 수백년 도읍, '풍패지향'이라는 관성으로 버텼다. 공양왕때 이루지 못한건 나라 살림이 어려운데 토목공사가 웬말이냐는 명분을 권신이라도 어쨌든 신하인 이성계가 반박할 명분과 권위가 없었기 때문으로 조선 건국 이후 창업군주의 권위와 새술은 새부대에 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여서야 가능했다. 이성계는 개국 이후 겨우 한 달만에 한양 천도 카드를 꺼내들었고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은 처음에 완강히 반대했다. 왕씨를 죽여서 이성계에 대한 민심이 나빠졌다 볼 근거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개성의 역사성은 고려의 수도에만 있지 않다. 개성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고려의 수도라는 점 못지않게 조선 왕실의 어향, 태조가 즉위하고 태종이 성장한 풍패지향이란 점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했다. 세종 즉위년(1418)에 개성의 태조 잠저에 사당을 짓고 '[[목청전]]'(穆淸殿)이라 이름하여 어진을 봉안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개성 사람들은 200년이 넘게 요청한 끝에 대한제국 시기인 광무 5년(1901)에 재건하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을 정도로 조선의 역사도 중요하게 여겼다.] 태조대 실시된 과거들은 야사와 달리 개국에 반대하던 온건파들까지 슬슬 합류해 합격자 정원 꽉꽉 채워서 성황리에 치러졌고, 태조 3년 조성된 수도 '''한양 인구 상당수는 개성에서 이주시킨 인구였다.''' 그리고 '''무인정사가 끝나고 혼란한 상황에서 정변 세력은 개성 환도를 단행했다.''' 개성은 조선 초기 제2수도로서 재환도 이후에도 세종 20년 개성유후사를 개성유수부로 개편하고 경기감사가 당연직으로 '''2명의 개성 정유수 중 1직을 겸할 정도로''' 개성에 대한 특별대우는 지속되었다.[* 유후사를 유수부로 고친 것은 '''원래 유후는 관직명이지 행정구역 단위명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중국 사례를 상고해보니 제2수도에는 유수부를 두는 게 관례라서''' 유수부를 설치한 것이다. 즉 명칭만 바뀐 것이지 제2수도라는 지위는 똑같다.] 심지어 개성유수는 경관직으로 지위 자체가 8도 감사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지방관직을 거친 뒤에 지방관을 사실상 졸업하는 자리가 바로 개성유수였다. 17세기부터 <개성소외론> 같은 야사가 등장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개성의 위상변화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의 수학기관은 절과 학당, 향교 등인데 개성은 수도 한양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은데다 고려시대부터 수도라 학당도 있고, 공부하러 들어갈 절도 지천에 널려있어 개성문인들은 맘껏 혜택을 누리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성종과 연산군대에 개성의 유생들이 개성 유생들을 위한 알성시(특별과거)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신료들이 그랬다간 한양 사람들이 개성에 가서 시험친다며 반대한 사례에서 엿보이듯 조선시대 지리관념상으로도 개성은 한양과 같은 권역으로 여겨져서 조정 입장에서 불이익을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 속현, 소 같은 고려시대의 차별적 행정구역은 조선 개국 후에 바로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사라지다가 16세기에 가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양의 절대적 우위가 고착화되어 개성과 한양의 격차는 비교할 수 없게 커졌고, 반면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중앙에 비해 낙후되었던 지방의 학문적 역량이 향상되면서 개성과 타 지방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쑥밭이 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어버리니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차천로(車天輅), 최립(崔岦)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는 끊어져 버렸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이 <개성소외론>이란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감은 18세기에 노론 낙론 종장들에게서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그리고 상업은 소외받아 융성한 게 아니라 500년간 수도로 기능하며 원래 상업 종사자가 많던 도시였다. 고려 태조 왕건부터가 예성강 하구를 기점으로 무역을 해 부를 쌓은 해상 세력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4대문안 시전 상인의 유래가 한양으로 강제 이주된 개성 상인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연려실기술]]을 비롯한 야사에서는 왕씨 몰살 직후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인 왕건이 나타나서 "내가 삼한을 통일하고 백성들을 편안히 한 공이 있거늘 어찌 내 후손들을 해치느냐? 너희 또한 대가를 치룰 것이다."라고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처분된 왕씨 혹은 처분 대상으로 지목당한 왕씨 ==== 성을 바꿔 살아남다 ==《개성 왕씨 세보》에 유(柳)씨, 이(李)씨 등 외가성으로 개성했다는 기록이 남은 왕씨들이 있고, 태종 13년 왕거을오미가 외가성인 이씨 성으로 살고 있었던 사례와 같이 왕씨 대신 외가성으로 바꾼 왕씨들은 직계 제거가 진행 중이던 조선 초기에 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한편, 왕씨 일가의 대부분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한자 '왕'(王)을 약간 변형시켜 [[옥씨|옥(玉),]] [[금씨|금(琴),]] [[마씨|마(馬),]] [[전씨|전(田),]] [[전씨|전(全),]] [[김씨|김(金),]] [[차씨|차(車),]] [[신씨|신(申)씨]] 등의 다른 성씨 혹은 왕을 상징하는 [[용씨|용(龍)씨]]의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고려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인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서 왕사온이 [[옥사온]]이라고도 기록되어 동일인이 성만 바꾼게 확인되는 옥씨(의령 옥씨 단일본)가 유일하게 교차 검증이 되고 나머지 성관은 일방적인 주장 외에 근거가 없다. 옥씨의 사례를 감안하면 성을 바꿔 숨어지내고 그 바꾼 성을 후대까지 유지하는 사례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갈아탄 외가성을 유지하거나, 태종~세조를 거치며 왕씨에 대한 경계가 수그러드는 과정에서 복성한 것으로 보인다. 예외적으로 옥씨는 문헌 기록 외에 왕씨 집성촌이 경남 의령에 있었을 정도로 관계가 깊다.== 비슷한 전 왕가 숙청 사례 ==세계사에서 살펴보면 사실 전 왕조가 몰락한 후 새 왕조가 정권보위를 위해 전 왕조의 일원들을 숙청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흔하다. [[송태조|북송 태조 조광윤]]의 후주 황족 시씨 보호는 그래서 특히 주목을 받는다.== [[/대중매체|대중매체에서]]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왕씨 몰살/대중매체)][[분류:조선(14세기)]][[분류:숙청]][[분류:학살 사건]][[분류:개성 왕씨]][[분류:조선의 사건 사고]][[분류:14세기 사건 사고]][include(틀:포크됨2, title=왕씨 몰살, d=2023-12-10 17:03:03)]{{{#000000,#eaeaea * 본 문서 전체에 [[NPOV]](중립적 관점)를 적용한다. * 본 문서에서 왕씨 몰살과 관련된 조선시대, 학계, 1차 사료의 사실관계를 서술할 시에는 나무위키:기본방침/토론 관리 방침에서 규정한 근거 신뢰성 순위 6순위 이상의 자료만 인정하고 서술하며 신뢰성 6순위 미만의 근거를 기반으로 하거나 독자 연구, 가치판단성인 서술들은 서술하지 않는다. * 현재 문제가 되는 [[개요]] 부분의 서술은 아래와 같이 수정한다. * 국내의 학술 논문들 중 현재 본 문서의 표제어인 '왕씨 몰살'(王氏沒殺)과 같은 용어 사용은 학계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학계에서 비슷한 용어 사용례들을 찾아보아도 해당 사건을 지칭할 때 왕씨 제거(王氏削除)[* 한정수, 조선 초기 崇義殿 설치와 四位 享祀-16位 功臣從祀의 성립, 조선시대사학보 2013, vol., no.67, pp. 5-42 (38 pages); 박성준, 태조의 공론정치: 현안해결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2011, vol.10, no.1, pp. 29-47 (19 pages);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김인호, 조선전기 숭의전의 설치와 역사인식 사학연구 2005, vol., no.78, pp. 111-146 (36 pages); 윤정, 정종대 상왕 태조의 임어와 개성 덕수궁 서울학연구 2015, vol., no.58, 통권 58호 pp. 167-208 (42 pages)], 왕씨 처분(王氏處分)[* 한정수, 조선 초기 王氏處分論의 대두와 전개, 사학연구 2014, vol., no.114, pp. 1-36 (36 pages);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왕씨 학살(王氏虐殺)[*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또는 조선 초기 당대에도 사용된 바 있는 왕씨 영절(王氏永絶)[* 한정수, 조선 초기 王氏處分論의 대두와 전개, 사학연구 2014, vol., no.114, pp. 1-36 (36 pages)]이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왕씨 몰살(王氏沒殺)'이란 표현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직접적으로 '왕씨 몰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당대의 사건을 몰살[* 김영두. (2010). 단종충신 追復 논의와 세조의 사육신 인식. 사학연구, 98; 문경호. (2014). 여말 선초 조운제도의 연속과 변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17(1); 강호선. (2013). 조선 태조 4년 國行水陸齋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로 표현한 국내 논문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그 외 숙청[* 최명진, 왕거을오미 사건과 公州 지역 동향, 2021, vol., no.99, pp. 41-88 (48 pages); 한상길. (2009).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禪學(선학), 23; 김인호, 조선전기 숭의전의 설치와 역사인식 사학연구 2005, vol., no.78, pp. 111-146 (36 pages); 한형주, 조선시대 ‘역대시조묘’에 대한 의례적 고찰 국학연구 2019, vol., no.39, pp. 281-317 (37 pages)]이나 '왕씨 제거'는 아니지만 제거[* 강호선. (2013). 조선 태조 4년 國行水陸齋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최인실, 『와유록』의 「사대부가거처」, 『택리지』의 원본인가 한국문화 2019, vol., no.86, pp. 275-303 (29 pages)]란 표현을 쓴 논문들 또한 확인이 된다. 그 밖에 유진 박(Eugene Y. Park) 펜실베니아대 교수는 그의 SCI 논문들에서 the May 1394 massacre(1394년 5월 몰살)[* [[국립국어원]]의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s Korean-English Learners' Dictionary에서는 '''massacre'''이란 영단어를 [[https://krdict.korean.go.kr/eng/dicSearch/SearchView?wordMatchFlag=N&mainSearchWord=%ED%95%99%EC%82%B4¤tPage=1&sort=W&searchType=W&proverbType=&exaType=&ParaWordNo=83707&nation=eng&nationCode=6&viewType=A&blockCount=10&viewTypes=on&myViewWord=56021|학살]] 또는 [[https://krdict.korean.go.kr/eng/dicSearch/SearchView?wordMatchFlag=N&mainSearchWord=%EB%AA%B0%EC%82%B4¤tPage=1&sort=W&searchType=W&proverbType=&exaType=&ParaWordNo=56021&nation=eng&nationCode=6&viewType=A&blockCount=10&viewTypes=on|몰살]]로 번역하였다. '''다만''' 해당 영단어는 [[https://namu.wiki/thread/MatureModernBrashScrew|토론]]을 거쳐 문서 표제어에 맞춘 '''몰살'''로 통일해서 번역하기로 했는데 참고로 massacre이란 단어는 학살로도 번역이 가능하며 가령 시민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던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을 지칭 할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 국내 학계에서도 이를 '보스턴 '''학살''' 사건'이라 번역하므로 규모와 상관없이 학살이란 번역도 충분히 가능한 번역이다.]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대 실록의 기록들에서는 주로 영절(永絶)이나 청거(請去)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1021_002|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니 윤허치 않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01_003|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토록 청하니, 윤허치 않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10_001|삼성에서 남은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윤허치 않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14_001|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 * 'the May 1394 massacre'은 '1394년 5월 몰살'로 번역한다. * 개요 문단과 논문의 내용을 인용해서 서술한 경우들을 제외한 타 문단에 존재하고 있는 일반 서술 상의 ‘해당 사건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은 표현을 ‘왕씨 몰살'로 통일한다. * ‘1394년 5월 몰살', ‘1394년 5월 학살'이라는 리다이렉트를 생성하도록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