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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선)/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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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했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며,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했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 했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했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했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느즈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했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 2월 17일자 첫 번째 기사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중에서.



  • 농사직설: 조선 풍토에 맞는 농서 편찬 지시.
  •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에게 명해 왜구를 토벌.[1]
  • 4군 6진 개척: 최윤덕 장군(4군)과 김종서 장군(6진)에게 명해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
  • 집현전: 정책, 학문 연구 및 국왕자문기구 설립.
  • 고려사 편찬.
  • 훈민정음 반포: 수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
  • 정간보: 박연이 음악 정리, 새로운 악기 개발.
  • 속육전, 등록 등의 법전 편찬 및 정리.
  •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등 발명.(장영실과 함께)
  • 유교 사상 발전.
  • 전세 제도 확립.
  • 총통, 신기전, 화차를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 대대적 개발, 개량.
  •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칠정산 편찬.

















음운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실제로 배울 수 있는 것은 극한까지 배우려고 했다. 그것은 현명한 임금의 배움이라기보다도 거대한 한 지성으로서의 영위라 할 만한 것이었다.

-노마 히데키 저, <한글의 탄생>에서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 노비

  • 노인

  • 죄인

영조: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는가?

원경하: 영묘조(英廟朝)[2]

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선비들만 배출한 게 아니라 예법과 음악을 만들고 정비하던 시대였습니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박연 같은 기술 인재들도 이 시대에 태어나 경쇠[3]도 그때에 나왔고, 법율을 만드는 기장도 그 시대를 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원경하,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 1월 9일 원문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의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원문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 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난 뒤. 원문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벌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했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變)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했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김문, 정창손 등을 비판한 뒤. 원문


  • 김문은 이전에 세종이 "말 소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글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안될 것 없지요"라고 대답했던 사람인데, 이번 상소에서는 언문 제작을 반대했으니 그걸 기억한 세종에게 찍혀서 일종의 괘씸죄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 참고로 정창손만 파직된 이유는,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인군자는 타고나는 것이라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4]"는 요지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공자 이후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한마디로 "수양을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명목상 천민(노비 등)만 아닌 양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문반, 무반을 합쳐 양반이라며 계급화된 것은 양란 이후의 일이고, 조선 전기에는 농사꾼 출신 과거 응시자, 합격자도 있었고 세종 대에도 천한 이들 중에도 장영실 등 뛰어난 인재들을 손수 픽업해오기도 했으니 철저한 유학 군주 세종이 대노할 만했다. 정창손의 말대로라면 빈민이던 안회나 양아치 출신의 자로를 제자로 삼아 가르친 공자는 헛짓거리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유학 최고의 성인이자 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자신이 직접 "가르침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논어 위령공편)고 말했는데도 말이다. 이때 세종대왕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5]한 선비"라며 정창손을 강하게 비판했다.[6] 그리고 파직시켰다. 여담으로 정창손은 후에 김질과 함께 사육신을 고변했다. 세종의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했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했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3월 13일







“上, 學 <啓蒙算>, 副提學鄭麟趾入侍待問, 上曰: “算數在人主無所用, 然此亦聖人所制, 予欲知之.”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세종실록 12년(1430) 10월 23일



"화포를 설비했다가 적이 침입하거든 시기(時機)에 응하여 쏘면 열 사람이 적 1백 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22년(1440) 5월 13일 기사 중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화포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도록 전지하다






"임금의 도리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의 충성은 적개심(敵愾心)이 귀하다. 무지한 이 야인이 시랑(豺狼) 같은 마음으로 벌같이 쏘는 독기(毒氣)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 국경을 침략하고, 우리 백성의 생명을 살해하여, 고아(孤兒)와 과부(寡婦)가 원한을 일으켜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것은 과인이 불쌍하고 슬퍼함을 마지 않는 소이이며, 또한 경들이 가슴을 치고 이를 가는 바이다.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성명(聲明)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에게 아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기를 명하노니, 모두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주장(主將)의 방략(方略)을 듣고 적을 쳐서, 꺾는 공을 이룩하여 변경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게 하라."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1433) 3월 22일 을해 2번째기사 집현전 부제학 이선을 보내어 북정의 장졸에게 교서를 반포하다.















[1] 다만 이는 세종 단독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기획하고 주도했다.[2] '영묘조(英廟朝)'란 세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에서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선대 왕 치세를 가리키는 말로 이런 식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대충 번역하면 '어느어느 릉에 묻히신 선대왕의 치세' 정도의 뜻. 가령 세조 시대는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서 따 '광묘조(光廟朝)'라고 불렀다. 다만 이는 세종과 세조의 묘호의 시자(諡字)가 세(世)로 겹쳐,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폭넓게 사용된 면이 크다. 보통 -묘조(-廟祖)로 지칭하는건 묘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예)선조→선묘조. 이 경우엔 '무슨무슨 묘호를 받으신 선대왕의 치세' 정도의 뜻이다.[3] 편경을 만드는 옥[4] 서구권에서도 귀족이 출신 성분의 차이를 들먹이면서 백성을 무시하는 근거로 잘못 쓰이기도 했다.[5] 평범하고 속되어 이렇다할 특징이 없다.[6] 사극에서도 정창손을 꾸짖는 장면이 재현되는데, 대왕 세종에서 정창손이 삼강행실도의 편찬, 보급을 반대하며 백성이 강상의 도리를 지금까지 배우지 못해서 패역한 짓거리를 한 것이 아니라며 타고난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자 차분히 반대 토론을 진행하던 세종이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면서 曰 "감히 네 놈이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고 나와! 사람의 천성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네 놈이 정치를 왜 해! 단지 백성 위에서 군림하며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라 일갈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소재로 한 픽션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사람의 천성은 타고나서 바뀌지 않는 것인데 글자까지 새로 만들어가며 백성들을 교육시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론에 대해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대왕은 "네놈이 (그러고도) 선비냐?"며 매우 강하게 비난한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정창손이 등장하지 않아서 역사와는 달리 이순지정창손의 발언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