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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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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은 한때 배부르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학문의 자미(滋味)[1]

는 일생동안 배부르게 한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29년 5월 20일




비망기(備忘記)로 심상운에게 전교하시길:

아! 금년의 혹심한 가뭄은 팔순 나이에 처음 보는 것이라, 애태우고 근심하노니 이 또한 헐후어(歇後語)로다. 고인이 말하길,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옛 한나라의 근 100년 기업(基業)은 삼로동공(三老童公)에서 비롯되었으니, 비록 연의(演義)이기는 하나 서한연의의 한 제목인 '부로(不老)를 논하여 한왕이 덕을 펼치다.'에서 그 모습을 그리게 했고, 또 말하기를 '황구(黃耉)에게 조언의 말을 구해야지 이를 놓아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로(耆老)가 어찌 전폐(殿陛)에 오를 수 있으랴? 내 오늘 지영처(祗迎處)에서 마땅히 볼 것이니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가히 치신(致身)할만한 자들을 모두 오게 해 기다리게 하라.

하셨다.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하는 하교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0년 5월 17일



나는 번저(藩邸)[2]

로부터 입승하여 비록 사사로이 여항(閭巷)의 일을 알았으나 부모님의 병환을 보살필 때가 많았던 까닭에 또한 두루 알지 못하였다. 너는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러한 곳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러하다면 비록 부녀자가 언서(諺書)[3]를 읽을 때에도 시비(是非)와 현우(賢愚)의 나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싯적에 어떤 부녀자가 삼국지를 읽다가 맥성의 일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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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영조 27년 3월 2일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중에 소일(消日)하는 방법으로는 혹은 소설이 있고, 혹은 잡기가 있으니, 나는 이 두가지를 하지 않고서는 과연 소일하기가 어렵다. 유신(儒臣)에게 읽도록 명하여 이를 들으면 오히려 낮잠을 자는 것 보다 나으니 침전에서 인접하여도 또한 무방하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길:

이 또한 반드시 무방한 것은 아니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22년 6월 27일






이 나라는 노론·소론의 조선이 아니라, 바로 나의 조선이다.[4]

조선왕조실록 영조 30년 8월 18일
















  • 창업군주이자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를 쿠데타로 밀어내고 이복동생들을 죽인 태종.
  •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통성이 있던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나중에 죽인 세조.
  • 할머니에게 폭언을 하고[5] 성종의 후궁이던 귀인 정씨, 귀인 엄씨을 폭행으로 죽게 만들었으며 그 소생의 자식이자 이복동생이던 안양군, 봉안군까지 사사한 연산군.
  • 서장자 복성군작서의 변의 범인으로 몰리자 유배를 보냈다가 결국 사사시킨 중종.
  •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
  • 며느리 민회빈 강씨와 손자들을 죽게 만든 인조.


  • 태종은 자기 자식들에게 만큼은 자애로워서 인간말종짓만 하고 다니는 양녕대군을 끝까지 비호했다. 물론 쿠데타로 부왕을 몰아냈던 인물 답게 자신을 직격하는 양녕의 상소를 받고는 폐세자 시키긴 했지만.
  • 세조는 부인인 정희왕후금슬이 좋아서 후궁도 거의 들이지 않았고 손자들까지 평등하게 대하던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 연산군조차도 자신의 가족 만큼은 무척 아꼈다. 생전 폐비 신씨[6]를 무척이나 아껴 그녀의 충언을 듣지 않을지언정 질책하지도 않았으며, 신씨에 대해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고, 폐위 후 죽기 직전 "중전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애처가였다. 또한 자식을 무척이나 아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산군과 그의 첩 장녹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영수는 연산군 일기에 대놓고 '매우 사랑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 중종 역시 복성군의 성장 과정에서 그를 학대했다는 기록도 없고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으며, 어쩔 수 없이 사사 명령을 내릴 때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 광해군은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일 때문에 신하들에게 비판을 받으며, 이로 인해 폐모살제를 저지른 폭군이라는 명분으로 폐위 당했다.[7] 다만 영창대군은 부왕, 인목왕후의 삽질과 이후 관련 고변이 들어왔기 때문에 살려두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친형 임해군은 살인·강도 같은 강력범죄는 기본이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도 경악할 정도의 막장 갑질 행각을 함경도 백성들에게 일삼으며, 귀부인 하나를 첩으로 삼기 위해 그 귀부인의 남편인 도승지 유희서를 죽이는 등 지은 죄가 워낙 많은 사람이라 오히려 신하들이 제발 사형을 시키라고 더 원성이었으며,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에도 적어도 임해군을 죽인 걸 가지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또 광해군도 가장으로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 그것이라도 손자라 하시며, 영조나 선희궁께서 약간이라도 봐주시거나 또는 경모궁께서 이것에게 혹하시면, 내 비록 도량이 있다 해도 부녀자의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리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서 영조와 선희궁께서 알은체 않으시고, 경모궁께서는 겁만 내셔서 어찌할 줄 모르시니, 그 와중에 나까지 투기하면 경모궁께서 황겁하신 중 근심하셔서 병환이 몇 층이나 더하실 줄 알리오.

























[1] 자양분도 많고 맛도 좋음을 의미하는 말로, 현대어 '재미'의 어원이다.[2] 유력자의 저택. 잠저창의궁 시절을 말한다.[3] 언문으로 된 글.[4] 붕당정치에서 벗어나 군주 중심의 정치 운영을 추구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5] 폭행했다는 것은 야사이지만 왜 친모를 죽이셨냐며 폭언했다는 기록은 실록에도 있다.[6] 후궁, 나인들에게조차 존댓말을 할 정도로 품성이 온화하였다. 이를 본 사관들조차 위엄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답답해 하며 안타까워했다. 이후 연산군이 폐위 및 유배되자 자신도 주상의 곁으로 가게 해달라며 애걸하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7] 사실 광해군의 폐위 사유가 폐모살제만은 아니다. 이미 명과 후금 사이에서 애매한 외교적 조치와 조선이 아직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앓던 상태에서 무리한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고 있던 중에 폐모살제가 결정적인 명분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