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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조선)/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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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1]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서방 정토로 가고 있다!" -《태종실록》태종 2년(1402년) 1월 28일



"네 뜻대로[2]

결정했겠지만, 회안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이 이미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 네가 그들을 보전하면, 국가의 재앙이나 천변(天變)·지괴(地怪)가 적어질 것이다. 이 일은 큰 것인데, 나는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10월 20일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 아들인 이방원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편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같이 연회를 가지거나 같이 식사를 하는 등 나름대로 화해를 하고 부자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고 조사의의 난이 진압되자 끌려오다시피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는 태종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다시피 했다는 말[3]이 있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에도 온천에 요양을 가거나 왕실의 원찰(대표적으로 경기도 양주시회암사) 등 사찰로 행차하는 등 야외 활동을 한 여러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돌아온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록을 살펴 보면 수라를 헌수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드리거나, 놀러 나갔다가 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마중나가거나 하는 일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이방원은 고려 변방 시절부터 과거에 급제해 가문의 빛이 되주던 아들이었으니[4] 그런 아들을 아꼈던 마음은 어디 가지 않았을 것이다.
  • 함흥차사 야사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함흥부에서 돌아올 때 마중나온 태종을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유명하다. 태종이 이성계를 마중나가기 전 아버지를 맞고 나서 열 연회의 가건물을 설치할 때 태종의 참모인 하륜이 태종에게 건물의 기둥을 굵게 할 것을 주문했고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이성계가 도착하고 태종은 절을 올리려 했는데 이성계는 갑자기 을 들어 아들을 향해 쏘려고 했다.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피했고 화살은 굵은 기둥에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연회를 여는데 하륜이 또 귓속말로 태종에게 "전하께서 태상왕께 직접 을 올리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통해 올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태종은 그 말을 따라 아랫사람을 시켜 이성계에게 술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이 모두가 천운이구나"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철퇴를 품 속에서 꺼내 상에 올려놨다고 한다.[5] 야사의 기록이고 조사의의 난 이후 편히 살았지만 이 이야기는 태종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이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여 태조를 연기한 김무생과 태종을 연기한 유동근이 정말 태조와 태종이 살아돌아온 것 같은 명연기를 펼쳤다.
  • 전라북도 전주시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어진.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시대 어진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어진이다.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09년(태종 10년)에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한 것을 1872년(고종 9년)에 다시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이 당대로부터 전해지는 유일한 어진이며 홍룡포 버전은 후대인 헌종 대에 왕명에 따라 홍색으로 용포 색깔을 바꾸어 모사한 것이다. 참고로 홍룡포 어진같은 경우는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광역시로 옮겨왔었는데 보관 도중에 화재로 얼굴을 포함해 절반 부분이 날라가버렸고 복원을 통해 2011년에 공개됐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태조어진 문서 참조.
  • 경상남도 남해군금산 꼭대기에 있는 보리암에는 이성계에 대한 전설이 현재도 전승되어 오는데, 아직 장군이던 시절의 이성계가 이 곳에서 백 일간 기도를 드린 끝에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비록 역사적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꽤나 유명한 이야기로, 절에서 산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간 곳에 일명 '이성계 기도처'가 있다. 이전부터 보리암 자체가 이름난 수행 도량이자, 무속에서도 금산 일대는 소위 '기도빨'이 잘 받는 영험한 기도처로 여겨져 왔으므로 이런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도 본다.
  • 일설에는 금산의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쓰게 된 것도 이성계가 원인이라고 전한다. 기도처에서 치성을 올리며 "왕이 된다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라고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왕이 되고 나니 현실적으로 그 큰 산을 모두 비단으로 감쌀 수가 없어 금산으로 개명했다는 것이다. 보리암은 과거에는 상주해수욕장[6]에서 거의 700고지인 금산 꼭대기까지 험난한 바위산을 따라 등산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산마루 뒤쪽 저수지 골짜기로 올라와서 능선까지 접근하는 자동차 도로가 뚫려 매우 가기 편해졌다. 그러나 기도처는 보리암에서부터 또 산길을 따라 수백 미터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접근이 마냥 편한 곳은 아니다.
  •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으나, 당시 기록, 사회적 풍습, 명나라의 기록을 종합하여 교차검증 결과 신빙성 없는 설로 판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성계 여진족설 문서 참조.
  • 단순히 무용만 믿고 싸우는 인물이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 말 1377년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날뛰던 왜구를 토벌하러 갔을 때 1차례 격퇴한 왜구가 험한 지형에서 섶으로 방벽을 만들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느닷없이 풍악을 연주시키고 을 마시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병사들에게 왜구의 진 주변에 을 질렀다. 왜구들은 그냥 당할 수 없어서 진에서 뛰쳐나와 고려군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를 예측하여 사방에서 왜구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왜구들의 저항도 격렬해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술병까지 깼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 소탕을 명령해 이성계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왜구들이 타서 죽거나 무기에 맞아 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자세한 전공 기록은 태조실록 1권, 총서태조(조선)/생애 문서를 살펴보면 관련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성계는 도 잘 타고 도 기가 막히게 쏘는 체육인이었으며 당시 무인들의 스포츠격구에도 능했다. <태조실록>에 그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데 가히 묘기급이다.

말을 달림이 너무 빨라서 벌써 수양이 되었는지라, 공이 문득 돌에 부딪쳐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고 누워 몸을 돌려서 말 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공이 도로 말 앞 두 발 사이로 나오므로,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가리켜 방미라 하였다. 또 공을 운행해 칠 때는 또한 벌써 수양이 되어 공이 다리 기둥에 부딪쳐 말의 왼쪽에 나가므로, 태조는 오른쪽 등자를 벗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가리켜 이를 횡방이라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 고대에는 '수정포도'라 불린 청포도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조선 임금 중 후대의 연산군과 더불어 청포도를 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임금.
  • 이성계는 또한 보리를 좋아하여 보리밥을 즐겨먹었다고 한다. 후대의 영조와 더불어 보리밥을 즐겨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임금.
  • 2020년대부터 한국 로판계에서 '북부 대공'이라는 북방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주로 이민족을 상대하는 쿨계 남주 타입이 곽광받기 시작했다. 왕좌의 게임스타크 가문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이 클리셰를 장르소설 마이너 갤러리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까 한국사에서 북부대공 클리셰에 정확히 맞는 인물이 바로 이성계라는 결론이 나온 적이 있다.# 얼굴만 미청년계였으면 로맨스 사극 주인공으로 딱이라는 평가도 나올 정도.
  • 고려 말기 이성계의 준동을 우려한 반이성계파가 명나라 조정에 '윤이(尹彛)', '이초(李初)'를 첩자로 파견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다"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명나라 내에서도 크게 믿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불씨는 태조 즉위 후에 터졌다. 조선이 계속 명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낌새가 보이자 명나라에서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사신이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거짓말로 알 거라고 생각했던 태조는 그 사신에게 "나는 이인임이 아니라 이자춘의 아들이다"라고 일러 보낸다. 자세한 내용은 종계변무 문서 참조.
  • 조선의 왕들과 왕족 중에서는 태조처럼 기골이 장대하거나 명궁인 사람들, 무예가 있는 왕들이 많았다. 연산군때는 이제까지 태조 이성계를 닮아 기골인 왕들이었는데 이번 왕은 그렇지 않다고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다.[7]

  • 한국사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창업군주인만큼 대한민국 해군의 함선이름으로 쓰였으면 하는 역사인물로 계속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쓰이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 때문에 위화도 회군으로 반역을 저지른 전과가 있어 쓰이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8]
  • 70대 초반까지 살며 장수했지만 그 때문에 두 아내, 장남과 사남, 육남과 막내, 딸, 의형제 겸 전우, 왕사, 정도전을 비롯한 듬직한 개국공신 일부를 먼저 보냈다.
[1]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번과 방석, 사위인 흥안군 이제를 말한다.[2] 실록 원문에도 '너 여(汝)'자가 쓰여 있다. 태종을 '주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사가에 있을 때처럼 격의 없이 '너'라고 부르기도 했던 듯.[3] 실제로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제 아무리 왕이라도 친아버지를 감시하는 것은 혹시 모를까 유폐했다가는 언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친아버지가 대원군도 아니고 태상왕에까지 오른 초대 국왕이었으니 제 아무리 왕자의 난으로 수족이 다 잘려나갔다고 해도 권위는 결코 무시못할 수준이었다. 조사의의 난 때 조사의가 이끌던 반군이 1만명인데 정계에서 딱히 특출한 입지에 있지도 않던 조사의 혼자서는 모을 수 없는 숫자라 실제로는 난의 주모자인 태조의 권위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4]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동생 이방연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던 경력이 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성계는 기뻐해서 이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방원이 급제하면서 고려 조정에 몸을 담게 되었고 이 일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5] 철퇴가 아니라 던지는 무기인 철구(鐵球: 쇠공)였다는 이야기도 있다.[6] 해수욕장이란 말인즉 해발 0m부터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다.[7] 연산군은 키가 컸으나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고 한다.[8] 다만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세종과 정조는 이미 함선이름으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