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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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12] 또는 일본통치시대의 조선(日本統治時代の朝鮮)[13] 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조약이 체결, 발효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서 존속했던 식민지 역사로서의 기간을 말한다.
2. 명칭[편집]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주권이 강탈당하고, 일본 제국은 같은 해(메이지 43년) 칙령 제318호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할 것(韓國ノ國號ヲ改メ朝鮮ト稱スルノ件)」를 공포하여 자국 내로 편입한 한반도와 부속도서에 대한 공식 명칭을 '조선(朝鮮)'으로 환원하였다. 또한 「메이지 제령 5호」를 통해 '통감'을 '조선총독'으로, '한국'을 '조선'으로, '한국법규'를 '구한국법규'로, '한국형법대전'을 '형법대전'으로 고침으로써 기존의 국체를 나타내던 명칭을 제거하였다.[14] 이후 외교적 보호국에 준하여 시행되던 통감 제도는 해외 속령 등에 시행되는 총독 제도로 개편되었다.
이 시기 동안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부는 당대 '조선'이라는 명칭이 일본의 식민지 '조센(Chosen)'으로서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유로, 이를 버리고 대한제국의 '제국'을 공화국의 옛말인 '민국'으로 바꾼 '대한민국', 또는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중 한 사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전부를 대표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과 일반인들은 여전히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해방 직후 국내에서 성립한 치안 유지와 건국 준비에 주력한 지방자치위원회의 이름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였고, 이것이 선포한 국명도 조선인민공화국이었으며[15] 미군과 소련군의 포고문들을 번역한 전단지들의 표현도 둘 다 조선이었고 군정 직후 정부 수립 전까지 존재한 현지 임시정부 또한 북조선인민위원회, 남조선과도정부라고 칭해졌다. 최종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에 각각 '한국'과 '조선'이라는 이름을 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두 명칭 모두가 국호로 병존하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국내에서 일제강점기의 시기를 지칭하는 학술적·회화적 명칭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
-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 일제시대(日帝時代)
- 일본제국주의강제점령기(日本帝國主義強制占領期)
-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 왜정(倭政)
- 기타 명칭
3. 시대구분[편집]
특이하게도 일제강점기는 통치의 성격이 약 10년을 주기로 세차례 바뀌기 때문에, 이 시기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3분법을 사용한다.[20] 일반적으로 10년씩 끊어 1910년대~1920년대~1930년대 순으로 보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제1기(무단통치·헌병경찰통치) 1910년~1919년 - 대개 경술국치부터 1919년까지 보는데, 민족자결주의 대두 및 3.1 운동의 영향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며 식민통치 이념이 달라진 것을 기점으로 한다. 경제적으론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이 실시되었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태형을 실시하는 태형령이 공표되었고, 일본 제국 육군 소속 헌병들이 치안 업무에 투입되는 헌병경찰제도가 운영되었으며, 교원(학교 선생님)들이 칼을 차고 다녔다.
- 제2기(문화통치·민족분열통치) 1920년~1930년 - 제1기가 막을 내린 직후부터 세계 대공황이 발발한 1929년까지를 일반적으로 보며, 흔히 '문화통치기'라고 줄여서 부른다. 경제적으론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었다. 헌병이 보통경찰로 바뀌었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으며,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되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억압보다는 회유책을 쓰던 시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이때 대거 나오게 되었다.
- 제3기(황국신민화통치·민족말살통치) 1931년~1937년/1938년~1945년 -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부터 제3기 전기로 본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제3기 후기로 본다. 경제정책으론 전기의 남면북양, 후기는 국가총동원법이 발효된 병참기지화 정책이 있다.
참고로 다른 피지배국들의 사례와 비교하면 조선은 늦게 시작해서 빨리 끝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가 19세기 후반이나 말엽에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동시에 2차 대전이 끝나고도 상당수가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십 년 후에 가서 독립했으며, 어떤 나라들의 경우 식민 피지배 기간이 100년을 넘어가기도 했었다. 물론 개인의 삶에 대비해 보면 35년 역시 결코 짧지는 않았으며,[21] 그 35년에 일어났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한 악영향과 잔재는 2020년대 현재에도 완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이어져오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기간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일까지 34년 11개월로 대략 35년임에도 어째선지 일제강점기의 기간을 36년으로 계산하는 표현들이 많이 보인다. 일제에 오랫동안 탄압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35년에서 36년으로 늘렸다는 설이 있고, 세는나이처럼 계산하다 보니 36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22]
4. 역사[편집]
4.1. 1910년대[편집]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23] 을 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대표로 참석한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제국 측의 대표로 온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협상에 임했다. 이는 각국의 황제와 천황이 마주보며 날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려웠고 일본 제국 측에서 대리인을 보냈는데 대한제국은 황제가 직접 대면하는 것이 의전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일본 제국은 이 과정에서 한일병합조약을 공표하여 대한제국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식민지로 강제로 편입하고, 옛 대한제국 황실은 왕공족인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켜 일본 황실에 편입시켰다.[24]
그리하여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로 35년간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고 1919년 삼일 운동이 발발하기까지 1910년대의 일제는 무단통치[25] 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 헌병경찰들이 치안업무를 담당하였기에 헌병경찰통치기로도 불리며 조선인의 집회 결사 언론 출판 등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매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인의 저항을 강하게 묵살하기 위함도 있지만 경제적 측면도 강했다. 몇몇의 연구[26] 에 따르면 일제가 애초에 근대국가였던 다른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근대화를 완전히 끝내지 못해 일제 본토와 거의 동급의 규모인 조선을 식민통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러시아의 반격에 대한 고려[27] 와 일본 육군의 대륙진출 야욕 등으로 급하게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28] 본래 좀더 점진적인 병합을 준비했지만 예정과 달리 급격하게 병합을 진행한 만큼 경제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최대한 본토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급자족의 자립적인 체제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기 위해서 저렴한 비용과 약간의 노력으로 통치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공포정치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이다.[29] 이를테면 아예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시위를 진압할 필요도 없고 검열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1910년대는 식민통치를 위한 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과 치안유지를 병행하면서도 다른 시기와 다르게 적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럭저럭 자립 운영이 가능하게 하였다.[30]
조선인들은 일본 내지에 주거할 시에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31] 이 같은 참정권 행사 형태는 현재의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흡사하지만 실제로는 더 열악했다.[32] 조선인들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정치활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것은 전혀 보장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한반도에서는 조선인들 중 극소수의 지주들과 친일파들만이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들어가 정치적 의사를 피력할 수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 폐지된 태형 규정을 조선태형령으로 부활시켰으며,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제도에 투입하고, 헌병과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을 부여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일삼아 조선 민중의 증오를 받았다.[33] 약간의 예외로, 1920년대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 관할 영토인 조선 내에서도 조선인에게 1등 신민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제국 내각이 2,000~3,000만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들이 내각을 지지하도록 만들어 군부와 조선총독부를 견제하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 열도에 비해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고[34] , 비록 구매력은 볼품 없었다고 하나 대신, 노동력 또한 값싸고 풍부했다. 일제가 이러한 특성에 주목해서 1900년대~1910년대에 쌀, 면화, 양잠, 소에 대한 품종 개량 및 육성과 SOC 건설을 통해,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이자, 상품판매시장으로서 재편하고자 하였다[35] 는 것이 정설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조선의 관세 자주권 박탈에 따른 이득, 경쟁자로 맞붙을 수 있는 조선으로부터 일본 국내 산업 보호(회사령, 광업령, 어업령 등), 러시아 등 대국에 대한 방어기제, 식민지화(이민정책) 등이 꼽힌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게, 허수열 교수의 <일제하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토지소유규모>(2012)에서는 1935 추계 기준 일본인 소유 논 면적은 조선 전체의 15%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국유지는 상당한 규모였다. 또한 일본인의 조선 이민은 황수환 교수의 <근대기 일본인 이주농촌의 형성과 이주농촌가옥 - 강서구 대저지역을 중심으로>(2011)에 따르면 일본인의 조선 이민 수요는 1911년부터 시작되어 1927년까지 증가하고 있었다. 이는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총독부가 조선 이민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한편 조세수취를 정비하기 위해 1907년 조선통감부 시절부터 해오던 국유지 조사작업에 이어서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민유지를 조사하는 토지조사사업(1912~1918)을 완료하고 한반도에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를 확립했다고 선전하였다. 실상은 좀더 체계적인 수탈을 하기위한 사업이었을 뿐이다.
그 밖에 삼림지역에 대해서는 산림법을 제정, 산림령을 반포하였다. 임목 및 산림지역을 소유형태에 따라 구분하고, 지속적으로 관리된 토지에 대해 사유권을 인정하되, 지적도 제출을 요구하였고, 산림의 채굴이나 임의 용도변경을 못하게 하는 보안림(保安林)을 설정하여 산림보호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보안림 설정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었을 경우 청구제도를 이용케 보조하였다. 임야 및 산림토지 중 많은 수가 공유지거나 국유인 경우가 많아, 1925년 전 국토 대비 40%가 총독부의 관할이 되었다.
한편 식민지 편입과 동시에 일본시장과의 연결을 위해 재정의 절반가량을 철도, 도로, 항만 건설에 투입하고 관개시설을 개·보수, 지역 특색에 맞는 일본의 벼, 양잠 등 우량종을 보급하는 등 일본의 2차산업과 연계하여 1차산업을 증산하고자 노력하였다.[37] 그러나 재정의 30~40%를 헌병 경찰 제도에 투입하는 등 통치 체제 확립이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농업 정책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하였고, 이러한 모순적인 관계를 최대한 덮으면서 조선통감부의 업적을 날조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 같은 몇몇 교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후일 만주사변을 주도하게되는 일본 육군 장성중 하나인 대장 도이하라 겐지가 만주에 있는 백계 러시아 여자들에게 아편을 중독시켜 매춘을 강요하고 대규모 매춘 집단을 만들었던 것처럼 일본군의 군자금은 아편이었고, 조선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만들어 아편과 히로뽕(필로폰) 등으로 중독시켜 매춘을 강요했다.
이 시기에 기존 ‘국어’의 지위가 바뀌는데, 한국어는 ‘조선어 및 한문’으로 바뀌어서 격하되었으며, 일본어는 ‘국어’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4.2. 1920년대[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서 유래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 민중들 사이에 퍼지고[38] 이로 인해 촉발된 3.1 운동[39] 이 격화되고, 일제의 다이쇼 데모크라시[40] 와도 맞물리면서, 무단통치 시기는 막을 내린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이른 바 문화 통치[41] 를 표방하기 시작한다. 3·1 운동에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그동안 조선인들에 대해 시행했던 가혹한 정책들을 일부 해소하면서,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무관만이 임직했던 조선총독에 문관(文官)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42] ,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이었는데 문화 정치를 내세운 첫 해인 1920년만 해도 경찰관서의 수는 1918년보다 3.6배, 경찰관의 수는 3.4배에 달했고 경찰 예산도 3배 이상 늘렸다. 게다가 고등경찰제도를 신설해 더 악랄하게 조선인 사회를 감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경제적으로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을 펼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기업의 조선진출을 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회사 설립 조건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문화통시 시기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43] 등 조선인 언론사도 여럿 창간되었다.
문화통치의 본 목적은 회유정책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일본으로 흡수하고 나아가서는 조선인을 일본인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의 언론과 사회 운동이 허용되었지만, 실제로는 검열이나 요시찰 제도 등을 통해 언론과 사회활동을 변함없이 제한하고 탄압했으며 조선인들의 사회 활동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었다. 또한, 무단통치시기에는 송병준이나 이완용 같은 지위와 권위에 의존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내세웠다면 이 시기에는 '자치론'이라는 떡밥을 내걸어 친일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등 대대적으로 교육 시설을 정비하고 극히 제한된 인원에게만 중고등교육을 제공하면서, 광범위한 대중이 정규 교육 속에서 친일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했다.
다만 이 시기의 교육 기회 확장은 철저히 일제가 통제 가능한 수준과 범위에서만 이루어졌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수많은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초등교육이 보편화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전례없는 보통학교 입학시험이 이때 생겼다. 모든 면에 보통학교가 1개교씩 생긴다 해도 그 면 지역 전체의 교육을 관할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고, 애초에 1면 1교 정책이 제대로 실현되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3면 1교였고, 나중에는 면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도 결국 1면 1교는 완성되지 못했다. 최대로 늘었을 때도 2천 개가 되지 못했는데, 2017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개수가 1만 개가 넘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저 학교라는 것들이 얼마나 넓은 범위를 관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덤으로 전대미문의 보통학교 입시가 시행되었고, 1차 조선교육령 기준으로 교육시간은 주당 10시간. 여기에 6년제마저 정착되지 않아서 대부분은 4년을 다녔고, 5~6학년은 개설되지 않은 학교가 태반이었다. 이 부분은 조선과 일본의 교육시스템에 차이가 생기게 만들어서, 이 시기 조선에서 교육받은 것으로는 일본에서 진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1920년대 말 보통학교 취학률은 18%에 불과했다는 조사까지 존재한다. 한편 소학교가 설립을 하려는 시도라도 한 것에 비해 중등학교의 설립은 극단적으로 억제되어 있었다. 2개의 도마다 남자ㆍ여자 중등학교가 1개교씩이라도 설립되어 있으면[44] 형편이 그나마 괜찮은 것으로, 한 도 내에 중등학교가 아예 없는 시기도 있었다. 중등교육이 이런데, 고등교육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일제가 이처럼 교육기관을 철저히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둔 것은, 영국령 인도의 식민통치를 보고 느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식민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미개한 인도를 계몽하겠단 의도로 보편 교육제도를 도입했다. 이렇듯 인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한 수준의 초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중 인적 잠재력이 있는 인재는 고등교육 역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영국은 이러한 교육제도를 통해 친영적 프로파간다를 내재시키려 했지만, 보편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수십 년이 지나자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본의 아니게 계몽이 이루어졌고, 이는 반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상을 목도한 일본은 식민지 내에서 교육만큼은 철저히 억압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인력에게만 선택적으로 교육을 제공하기로 한다. 경성제국대학만 해도 식민통치에 필요한 법학과 의학을 교육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고, 태평양전쟁 이후 공업기술인력이 필요해져서야 이공학부를 개설한다.
이 시기는 3.1 운동의 직접적 영향으로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였다. 김원봉 단장의 지휘로 결성된 의열단은 부산경찰서(박재혁, 1920년), 밀양경찰서(최수봉, 1920년), 조선총독부(김익상, 1921), 종로경찰서(김상옥, 1923), 도쿄 궁성 이중교(김지섭,1924년), 동양척식주식회사(나석주, 1926) 등에 폭탄 투척을 하였고, 중국 관내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에서는 흥사단과 국민회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민족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을 제정하여[45]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이 시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일본인 아니면 부유층들이나 투표할 수 있었기에 기득권층들로 채워졌고,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는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광복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46] 또한 각종 친일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일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민족개량과 자치를 내세우는 타협적 인사들을 지원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게 하였다. 이런 갈등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하여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조선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역설적으로 이후 시대보다 사상적, 이동적으로 개방적이었다. 한반도가 비록 식민지 체제에 속해 있었지만 세계와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조선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47] 오히려 냉전 때의 독재정권 시절의 대한민국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세계 여행이 통제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더욱 억압되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당시에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이며, 반제국주의 사상으로서 한반도의 해방에 일부분 기여하였다. K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난 수많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으나, 일제 관헌의 탄압과 내부 분파투쟁으로 와해와 재창당을 반복했다.
1926년 경 경성 거리 기록영화
4.3. 1930년대[편집]
1931년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되던 시기로, 일본군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창설한 것이 1932년도이며 1932년에는 만주국이 수립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개시되었다. 대신 이러한 일본의 승승장구로 인해 국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기도하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국제반제동맹이 창립된 이후 반제동맹이라는 반제국주의 운동 단체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에서 반제동맹은 1930-193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반제동맹이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같은 국내 대중운동의 폭발과 일본의 만주침략에 따른 반전투쟁의 긴급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반제동맹은 주로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비밀 독서회를 만들어 활동가를 양성해 학교 단위로 반제동맹을 만든다. 학교 단위를 기초로 지역 단위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반제동맹 조선지부 학생부'를 완성하려고 했다. 학생 반제동맹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 활동가를 양성하는 훈련장이기도 했다.[50] 당대에 유명했던 반제동맹은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경성반제동맹)와 경성제대반제동맹(성대반제동맹)이 대표적이다. 경성반제동맹의 경우 이관술, 이순근, 조정래가 지도했다.
군국주의 특수로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토양이 마련되기도 하였고[51] , 총독부에 의해 농촌진흥운동과 전시체제 준비기에 남면북양 정책이 실시되고 전국적으로 농업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쌀 이출량이 증가하는 등 농촌과 경제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주식투자와 회사설립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다. 물론 빈부격차가 매우 커서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 많은 건 여전했고 그에 따라서 문맹률 또한 매우 높았기에 하층민들에게는 탄압이 다소 줄어든 것을 빼면 큰 변화가 없었기는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이제 한반도 내부와 완전히 괴리되어 1919년 수립된 상해임시정부는 1932년 이봉창 의사 의거,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여파로 중국 내륙 깊숙한 곳인 항저우(1932)와 난징(1937)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당시 조선인은 임시정부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52] 해외 무장투쟁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1930년대 넘어오면서는 초반, 만주사변 시기 지청천, 양세봉 등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독립군은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건국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53] 반면 국내에서는 이재유의 경성 트로이카를 비롯한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이 다양하게 벌어졌는데,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쟁의나[54] , 노동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등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종업원 5인 이하의 가내공업을 모두 포함할 경우 1940년 공업 생산액의 55.9%는 북한에서 44.1%는 남한에서 생산되었으며, 1940년 일본 치하 대한민국의 산업비중은 서비스업을 제외할 때, 농업 42.8%, 공업 39.1%였다.[57]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무렵, 일본제국은 이듬해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표하여 전시체제기에 들어간다.
초등학교 과정을 2년으로 압축한 형태인 간이학교(簡易學校)가 이 시기에 생겼다.
4.4. 1940년대[편집]
1940년대가 되자,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양면전쟁, 총력전의 특성상 일본군의 전력이 부족해지자[58][59] 일제는 외지와 내지를 완전히 통합하는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인 민족말살정책을 강제로 수행하였다.[60] 본래 일제의 통치목적은 점진적인 영구병합이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흡수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어 일본 기업이 더 활발하게 진출함은 물론, 한국어를 사용하는 매체를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시행하였으며, 징병제까지 도입했다.[61] 그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지식인층과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친일로 전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한민족은 꾸준히 점진적으로 번져왔던 영구병합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당면하게 되었다.
문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물자 부족 및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나 징병 계획[62] 도 군부의 강력한 반대를 거스르고[63] 실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쟁의 성과가 나빠지자 일제는 전쟁물자 공급에 더욱 사력을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공출제를 실시한다. 부설된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고[64] , 금속으로 된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은 물론, 징이나 꽹과리 같은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 심지어는 요강까지 빼앗아 갔다.[65] 그러나 미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실제 공출된 물자가 일제 본토로 이송되지는 못하였고, 더 큰 문제는 물자를 거둬들인 후 다시 마구잡이로 분배하는 통에 시장과 유통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 극심한 혼란상황이 빚어졌다.
태평양 전쟁 시기는 독립운동사의 암흑기 그 자체이다. 이미 1930년대를 경유하여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관술의 지도하에 경성 트로이카 활동가들이 1939년 만든 항일 비밀결사 경성콤그룹[66] 은 1941년의 대규모 검거와 박헌영과의 연락 두절에도 불구하고 조직원들은 조직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광복 순간까지 항거를 계속했다.#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김태준, 연안행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식민지 조선 남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꽃[67] 이 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이라면 식민지 조선 북부에는 이주하가 지도하는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원산그룹사건은 혜산사건[68]
과 달리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 등과 전연 연락 없이 완전히 사상적 전과자에 의한 일군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기초로 했으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점에서 현저한 특색이 있다. 테러 행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수뇌부의 높은 사회주의 의식 수준, 인민전선전술의 정확한 파악, 그 운동 전개의 교묘한 점, 특히 대중 획득을 위한 적극적인 문서 활동의 전개 등은 혜산사건에 비할 바 아니고, 그 대상이 국경 산악지대의 의식수준이 낮은 농민과 원산 같은 수준 높은 노동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현저히 운동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 점 주목된다. 만약에 원산의 이 운동이 1, 2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원산철도 2천 수백여 명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어느 때고 무장봉기에 동원할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원산그룹에 대한 일제 경찰의 기록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8회] 역사에서 사라진 원산그룹
1944년에 결성되었던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도 이 시기의 몇 안 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과 대구 학병 거부의거, 평양 학병거부의거도 매우 희귀한 사건에 속한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사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는 교육과정에서는 위와 같이 무조건 독립운동이 암흑기이며 희귀하다고 배우지만, 아래와 같이 미래에는 교육 내용이 바뀔 수도 있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일본 제국 자체가 자체적인 모순과 한계로 인해 문제점을 맞이했듯 식민지 조선은 조선인의 독립 요구와 저항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일제도 완벽하게 억누르지는 못했는데[69]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점점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과부하가 심해지기 시작하자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는 소문[70] 이 돌고 있었고 농촌, 도시 등 조선인 사회가 전시체제로 인한 징용과 물자 공출로 인해 피폐해져 가면서 붕괴 양상이 나타나는 등[71]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1945년이 되어서야 조선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을 검토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내용에 그마저도 시행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미군의 공습 역시 한반도까지 다다르기 시작했는데, 일본 본토의 대규모 전략폭격과는 달리 군수 시설이나 철도 등을 겨냥한 핀포인트 폭격이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만주를 넘어 현재의 북한 일부 지역에 소련군이 진격하고, 핵 두 발을 맞고 나서야 일본은 8월 15일 정오에 연합군 측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 한국은 8.15 광복을 맞았고 이 무렵 동시에 일제 치하 조선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 조선건국동맹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해 자체적으로 치안, 행정 활동에 들어갔으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어주기로 되어 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당시 경성부에서는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72] , 결국 조선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그해 9월 초 전권을 미 군정에게 이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인수하는 1945년 9월 8일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계속하여 업무를 수행했고, 존 하지 장군 휘하의 미군이 서울에 진공하고 이반 치스차코프 장군 휘하의 소련군이 평양에 진공하였으며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에서 조우한 이후인 9월 9일이 되고 나서야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35년간 지속되었던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잠시 동안의 신탁 통치 기간을 거쳐 비록 분단되었고 강대국들의 눈치를 봐야 했으나 한민족에 의한 자주적인 정부가 한반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일제의 수뇌부들은 이 시기에도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혼란 상태였던 조선에 위폐(가짜 화폐)를 뿌리며 인플레를 일으키는 등 조선의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었고, 일본에서 건너온 일반 일본인들을 반쯤 방기하고,[73] 미군에게는 여러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떠날 때까지도 끝까지 민폐를 끼치고 떠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일제강점기 체제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으며, 문화적, 사회적 악영향과 친일파 민족배반자에 얽힌 논란[74] 은 해소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제는 황궁 이전을 포함해서, 제국의 수도를 경기도 용인시 근처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 본토는 지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일본 제국의 영토였던 만주국, 조선, 일본 제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의 경기도 정도가 거리 관념으로 대략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수도를 용인시로 옮긴 다음, 대규모 인구 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지진에서 비교적 안전한 조선반도로 대거 이주시키고, 조선인들은 만주로 강제로 추방시키는 안이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도시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까지 했지만, 모두 알다시피, 태평양 전쟁에서 원자폭탄 2방을 맞고, 항복하면서 모든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었다는 것. #
5. 한일병합의 유무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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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편집]
6.1. 사회 분위기에 대한 고찰[편집]
일제강점기의 사회 분위기는 계층별로 복합적이었고 그 기저에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친일파 양성정책, 조선을 편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개발 의도와 군수공장과 요새로 사용하려고 한 병참기지화가 혼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민족말살정책과 병참기지화 정책의 피해자인 다수의 못먹고 못살던 조선인들, 친일파 양성정책의 혜택을 받은 지주 및 자본가들, 일제의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느낀 사회 분위기가 각자 달랐다.
일부는 일제강점기가 35년이나 지속된 것에 대해 다수의 조선인들이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이를 묵인하고 침묵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이전부터 을미사변으로 왕의 부인도 자기들 맘대로 죽였으며[75] 고종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76] 만행을 보여줬다. 일제는 정치판뿐만 아니라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들과 의병전쟁이 일어나던 지역사회를 도륙내어 일본에 대한 저항 분위기를 두려움으로 바꿔버렸다. 1910년대에 헌병경찰통치를 하며 범죄즉결례로 재판도 없이 경찰이 맘에 안 드는 조선인들에게 바로 태형을 가한 것은 더욱 사회 분위기를 복종하게끔 만들었다. 결국 1919년에 3.1운동으로 참다못한 조선인들의 반발이 대거 터졌으나 일제는 인정사정없이 총칼로 유혈진압했다. 신문지법과 출판법으로 저항 여론은 언론을 탈 수도 없던 시기였고 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내서 불구로 만들거나 순국하게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말기로 치닫을수록 최하부까지 애국반으로 조선인 가구들을 묶어서 감시하고 통제하게 했다. 왕가는 물론이고 일반인 가구 1세대까지 다 장악하는 이같은 제국주의적 폭력과 학살과 탄압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일반 조선인 개개인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다 알 순 없으나 총칼의 공포와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 힘든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일제하의 조선 사회가 다수의 조선인들의 묵인으로 지배계급만 양반에서 일본인들로 바뀌었을 뿐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와 나치독일의 프랑스 지배가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멍청함을 드러낼 뿐이다.
반면 지주와 자본가들은 일제의 포섭대상이 되었고 이 중에서 친일로 빠진 이들은 일제가 제공한 풍족함을 영위했다. 이들의 양복으로 대표되는 의문화와 서양식과 일식이 혼합된 식문화, 서양건축과 적산가옥이 포함된 주택 문화, 신소설, 영화, 음악 등 예술 문화로 꾸며진 생활 양식은 앞에서 말한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과 딴판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친일도 용납했을 뿐더러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황군에 입대하여 피를 뿌리자고 일반 조선인들을 선동할 수 있었다.[77] 2008년 영화 <모던 보이>에서 나오는 주인공 이해명(박해일 배우)의 삶이 그런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당시 조선 내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취미 잡지를 표방하며 나온 별건곤[78] 의 창간취지를 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대 조선인들이 소수의 유산자와 대다수의 무산자로 나뉘어 생활과 문화를 극단적으로 다르게 영유했음이 드러난다.
보라! 오늘날 조선 사람치고 인간적 취미를 가지고 생활하는 자 몃 사람이나 되는가? 월급 푼에 팔려서 다이푸라이타 모양으로 살아가는 관공리(官公吏) 급(及) 교원(敎員), 회사원이 잇스니 그네들에게는 인간적 취미가 풍부타 할가? 물론 먹고는 살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뿐이 생활의 취미는 아니다. 상리(商利)에 몰두되여 점포에서 공장에서 로로역역(勞勞役役)하는 상공업자가 잇스니 그네들에게 인간적 취미가 풍부타 할가? 그 역(亦) 먹고는 살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뿐이 생활의 취미는 아니다. 진실로 그럿타. 우리 조선에 활동사진관(活動寫眞館)이 몃 개지만 그것이 노농대중에게 무슨 위안을 주엇스며 무도(舞蹈), 음악이 유행하지만 그것이 또한 노농대중에게 무슨 취미가 되엿느냐? 박물관, 동물원, 공원, 극장이 다 그러하다. 그것은 다 일부 인사의 독점적 향악(享樂) 기관(機關)이 되고 마랏다. 우리의 노농대중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든지 이 빈취미증(貧趣味症)을 면(免)해 볼 길이 업다. 이제 만성(慢性)에서 운명을 재촉할 뿐이다. 화류계에 출입하며 가무고취(歌舞鼓吹)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흥겨워 노는 것을 위안으로 하는 사람도 잇지만 돈업는 사람은 천만부당한 일, 등산, 기차 여행 등을 취미로 아는 사람도 잇스나 그것을 실혀하는 사람도 잇고 그것이 못되는 사람도 만타하면 민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온천, 약수도 또한 그러하다. 삐이오린, 만또린, 오루간, 피어노를 가춰놋코 사이사이 한 곡조 울리는 것을 유일한 취미로 아는 신사숙녀가 잇지만 그는 더욱 유산계급의 향악소위(享樂所爲)이고 대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현진건의 작품 <고향>에서 드러나는 일제강점기 일반 조선인들의 사회상은 더욱 비참하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딴 동리였다. 한 백 호 남짓한 그곳 주민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붙이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79]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나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작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80]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의 삼 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 갔다. ... "이야기를 다 하면 무얼 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내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자, 우리 술이나 마저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윤봉길 의사 처형 직전 모습]
평범한 조선인들보다 더 억압받고 친일파들이 누린 이득과는 거리가 더 먼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이 느꼈을 사회적 분위기는 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언제 일제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발각됐을 경우 처참한 고문에 처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광복이 될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과 관련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굳게 믿는다.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있었다.
중앙에 있는 김구와 오른쪽 아래에 중절모를 쓴 이시영을 보자.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광복이 되었음에도 무념무상의 표정이고, 나중에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은 그 동안의 고생과 광복에 눈물을 닦고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느끼었던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해주는 사진이다.
이러한 사회의 각각 다른 방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것이 일제가 조선지원병을 모집했을 때 나타난 상황이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반 강제적으로 말만 의용이지 사실상 징집되었다. 한편 이중에는 진짜로 자발적으로 지원한 인물들도 있었다.이 자발적 지원자들도, 각각 궁핍한 경제사정 때문에, 명예욕등의 신분상승을 위해 지원한 이들이 대다수였고, 조선지원병 문서의 우수용 회고록에서 본인이 언급하듯 자신의 참여로 조선의 자치를 좀더 강화해, 일본 내 조선의 영향력을 키우려 했던 이들도 있었다. 여하튼, 중요한점은 일제강점기를 평가할 때는 위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특히 침묵당했던 다수층을 일방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태도다. 여기서 왜곡이라고 하는것은, 모두를 식민지배에 찬성한 것으로 보는 것도 왜곡이지만, 반대로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려고 했다고 하는것도 비록 불편하겠지만 왜곡은 왜곡이다. 오히려, 강요된 침묵 속에서 상황에서 가만히 있던 사람이 절대 다수인 와중에도 그들과 달리 극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깨고 적극적으로 항거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더욱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6.2. 동화주의[편집]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동화주의를 추구했다. 대만, 조선, 만주에 일본의 제도를 이식하고, 가능한 한 본토와 점령지를 동질화해서 결국에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조선을 완전히, 영구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일본 열도의 서쪽에 있는 두 섬의 이름을 따서 당시 '조선의 시코쿠(四国), 큐슈(九州)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고,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동화주의는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구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제도가 거의 그대로 조선에 이식되어 지역 통합이 이루어진 단계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화폐가 통합되었다. 둘째, 시장이 통합되었다. 조선과 일본 간에는 거의 모든 관세가 폐지되었다. 몇 개 품목은 예외로 두었지만, 그것도 점차 폐지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을 제외한 지역 간의 무역에는 일본의 관세율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의 시장은 완전히 통합되었다. 셋째, 일본의 사법 제도가 조선에 이식되었다. 일본에서 시행되는 법령이 모두 조선에 시행된 것은 아니고, 선별하여 시행되었다.
예컨대 대표적인 법령으로 1912년에 시행된 <조선민사령>을 들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일부의 예외 조항을 두면서도 일본의 민법, 상법, 각 시행령, 민사소송법 등 23개의 법률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해당 법령이 일본에서 개정되면, 그 개정된 내용이 자동으로 조선에도 적용되게 된다. 이를 통해 경제 활동을 일본 또는 조선에서 어느 쪽에서 하든지 차이가 없도록 두 지역의 법적 환경을 통합한 것이다. 다른 한편,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에 관련된 <중의원 선거법>을 들 수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동화주의는 정치적 권리는 억압하면서 경제면에서는 동화를 지향한, 편의주의적 접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 통합은 일본제국 전체로 확대되었다. 일본의 지역통합은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한 형태이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역내의 각 지역이 완전히 개방되어 상품과 자본과 노동이 보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역내의 경제 변화가 급속히 촉진되었다.
6.3. 차별[편집]
6.3.1. 제도적 차별[편집]
일제강점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 예컨대 교육과 직업 선택의 불평등, 사회・법 제도의 불이익, 신민화 정책을 위한 민족 문화의 말살 및 왜곡,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동원(징병 포함)[82] , 산미증식계획 등 병참기지로서의 착취, 일본군 위안부 등 전쟁 범죄 문제 등이 얽혀 있는 데다가 그 이후의 한반도에 있어서 좋지 못한 유산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제강점기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을 때 저절로 분노하지 않는 한국인은 드물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 또한 민족의 암흑기라는 입장이다.
일본 우익사관 학자들이나 넷 우익들은 일본 제국 내 조선인에 대한 명문화된 차별은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명시된' 차별이 없었다는 점은 사실이나, 미즈호 학살 사건이나 이봉창 의사의 일화, 간토 대지진 시기 조선인 학살사건 등을 보면 실질적인 사회 내부적 차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앞에서 언급한 우익의 주장은 무시하는 것이 좋다. 제도적으로 일본 제국 신민의 구분은 내지인,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지역의 거주민, 정식 영토가 되지 않은 지역의 거주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에겐 각각 다른 법률이 적용되었는데, 사할린, 조선, 대만처럼 식민 통치 기관이 설립된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는 신민으로 취급했으나 대일본제국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즉 기본법도 없이 조선의 총독, 대만의 총독, 가라후토청 장관이 천황의 명을 받아 그냥 자의적으로 해당 지역을 다스렸다.
넷 우익들은 조선인을 대우했다는 증거로 내선일체라는 선전성 구호를 내세우지만, 그 실상은 좋게 봐야 2등 국민, 대부분은 불령선인 신세였다. 그것도 독립운동가 같은 일부 체제 저항세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국의 고위직에 오른 극소수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한 모든 조선인을 잠재적 불령선인 취급했다. #, #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를 보면 심지어 돈도 덜 주는데, 거기서도 또 사기를 쳐서 3분의 2 정도를 빼돌렸다. 특히 내선일체의 실체는 의무는 평등하지만 권리는 불평등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외형상 조선인을 일본인화 시킨다는 것이었기에 엉뚱하게도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반발이 많았다. 근데 일본인들의 반발은 제국주의를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저 조센징들이 왜 우리랑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나요"라는 차별적인 시각 때문이란 게 포인트.
만일 일제강점기가 지속되었다면 상술한대로 조선인들의 생활권은 한반도에서 만주국으로 쫓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비명을 찾아서처럼 일제 정부가 적당히 처세를 하고, 일제 본토는 물론 식민지까지 전시에 동원하는 태평양 전쟁이라는 막장이 없는 상황에서 일제시대가 계속된다고 해도, 명목상 2등 시민일 뿐 조선인의 처우는 사실상 부라쿠민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장 현실을 봐도 오키나와는 옛날부터 일본과 교류했으며 일본어와 비슷한 류큐어를 사용했고 조선보다 훨씬 이전에 본토에 편입되었지만 현재에도 앙금이 조금 남아 있다. 만약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외지 조선인'으로 남았다면,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시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주의처럼, 조선 출신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엄존했을 것이다. 특히나 제국헌법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던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속해서 해외 활동을 지속했을 것이란 점을 미루어 볼 때 내지 일본인과 달리, 여권, 비자 발급이나 해외여행에 있어서도 출국제한, 사상교육 등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본의 우파 사학계와 넷우익,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일제의 전시동원체제[83] 하에서 이루어진 폐해에 대해서는 일부는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이후 한국이 한국인을 대표해 일본에 배상을 받는 과정이 또 상당한 논란거리였는데, 이는 한일기본조약 문서 참조. 하지만 이러한 시기를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시기에 조선의 발전 자체가 이루어졌음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식민지 근대화론 참조. 물론 일제강점기 시절 경제성장의 수혜는 히키아게샤를 비롯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들과 극소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인에게 돌아갔으며, 일제 본토 또한 산미증식계획이나 동척회사, 식산은행 등을 통해 조선 경제성장의 수혜를 받았다. 그리고 한반도가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제 본토가 있었기 때문인 동시에 소련이 한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일제가 항복했기 때문이지 일제가 한반도를 애지중지해서가 아니다. 당초 조선도 약간이긴 하지만 미국의 폭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행적으로 보면 조선에서라고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무려 오키나와에서 1억 총옥쇄라는 미친 소리를 한 자들에게 뭘 기대하겠냐마는. 비유하자면, 비록 소고기를 얻기 전에 주인이 죽었다 해도, 좋은 소고기를 얻기 위해 축사를 개선한 것이 어떻게 소를 위한 일이겠는가? 때문에 한국이 한반도를 불법 점령하고 한민족을 착취한 일본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일본이 비록 한반도에 공장을 짓고 철도를 까는 등 근대화를 하였으나, 그 수혜 대상은 한반도의 식민지인을 위해서가 아닌, 일본인들만을 위한 근대화였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근대화의 혜택을 누릴 대상은 2등 국민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진짜 일본이 한국을 위해서 근대화를 해줬다면 밑에 교육 문제에서 밝힌 대로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 중 절대 다수가 왜 그렇게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았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부터가 의문이 된다. 넷 우익들은 이런 반론을 들으면 우생학까지 들고와 한국인들의 DNA 드립을 치며 교육으로도 미개함은 어쩔 수 없더라라는 주장만 반복한다.
참고로 전후 본국 정부나 총독부가 지은 시설들과 재한 일본인들이 설립한 기업들을 비롯한 자산을 모두 몰수해 3년 후에 성립되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에 주었고, 자금이 없었던 정부는 민간에 팔아 자산가들이 헐값에 매입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재벌그룹의 시초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 자산의 규모를 당시 가치로 60억 불을 산정하였다. 당시 이러한 행위는 전후 민간인의 재산 약탈을 금지한 헤이그 육전조약 위반이었기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자산 규모를 축소했으면 축소했지 과대평가할 여지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국에서 평가절하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장을 주도한 일제의 의도가 철저히 착취를 전제로 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점,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인해 산업 기반의 상당수가 폭격으로 파괴된 점에서 기인한다.
사실 다른 식민지 제국들과의 식민 지배와 비교해도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는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랄하고 어정쩡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제국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처럼 체급이 좀 작은 지역은 철저한 탄압 후 강제동화정책을 펼치거나, 남아시아 처럼 덩치가 너무 큰 경우 현지 지배층 세력을 포섭하고 자치권을 주거나 권력을 주거나 하는데 일본의 조선 통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강압 통치로 조선인을 말살시키기에는 조선의 인구수가 2천만을 넘어가고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했음에도 강압적인 탄압 정책을 펼쳤고, 그렇다고 문화 통치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을 적용한 헌정 체제도 아니고, 친일 성향의 지식인들을 모아 자치권을 주거나 처우개선을 하는 식의 포섭 노력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일본 제국 자체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군부와 정계를 아우를 거물 정치인이 부재하는 상황이 되면서 막장가도를 달려가고 있었기에 일제의 조선 통치는 다른 식민제국과 비교해서 본토민과 식민지 주민의 괴리가 심각하게 차이가 날 정도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가 꼽히고 있다. 실제로도 아일랜드인들은 3.1 운동과 같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상황과 동일하게 바라보며 공감을 표했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많은 학자들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와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의 유사점이 많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조선인 참정권 문제 참조.
6.3.2. 교육의 차별[편집]
일제는 처음부터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처럼 문명화된 지식인 양성 교육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일제는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정도의 조선인 인력이 필요했지, 고급 조선인 인력은 오히려 독립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조선교육령의 반포하에 조선인들에게 초중등교육 및 실업교육을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인 학제는 1차 조선교육령(1911~1922)에서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C]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 실업학교와 전문학교로 편제되어 일본 내 학제와 차별되었고,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이 배제되고 일본어 보급이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 교원들은 잘 알려져있듯이 제복을 입고 검을 소지해서 조선인 학생들을 위력으로 압박했다. 총독부가 세운 공교육 체제 외의 사립학교들은 이미 1908년의 사립학교령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얻은 학교들만 있었으며, 1915년의 사립학교 규칙으로 인가 조건이 더 강화되어 민족교육은 힘들어졌다.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자체 대학 설립은 이뤄질 수 없었다. 조선에 보편적으로 있던 서당의 경우 처음에는 그대로 방치하여 신교육을 방지하는 데 쓰려고 했으나, 서당들에서 근대적 교육이 일기 시작하자 1918년 서당규칙을 만들어 허가제로 운영하게 하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쓰게 하여 민족교육을 탄압했다.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시행된 2차 조선교육령(1922~1938)으로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여자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까지 수업연한은 연장되었다. 그러나 3면 1교주의를 시행해서 학교 수가 턱도 없이 부족했고, 1교실에 60명씩 우겨 넣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과목으로 돌리긴 했으나 수업 시수가 적었고, 조선사는 식민사관으로 점철된 내용이었다. 게다가 일본어와 일본사, 일본지리의 수업 시수는 더 확대되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지만 조선인은 학생 총원의 3분의 1만 입학할 수 있었고 전공도 많지 않았다.
3차 조선교육령(1938~1943)은 내선일체, 일선동조, 황국신민화 선전이 일어나던 1937년 중일전쟁 후부터 시행됐다. 내선일체의 구색을 맞추고 조선인들도 전쟁에 동원해야 했으므로 종전의 분리됐던 학제를 통일시켰다. 그리고 조선어는 수의과목으로 바꾸고 조선사와 조선지리 교육은 금지됐다. 또한 이때부터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외우게 만들었고 무사도 등 일본 정신교육을 강화했다. 1941년부터 심상소학교를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의미로 국민학교로 개칭하게 되는데, 국민학교는 광복 후에도 쓰이다가 지금의 초등학교로 개칭되게 된다.
4차 조선교육령(1943~1945)은 전시체제에 맞춰 조선인 학생들을 완전히 병사와 군수인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업연한을 (구제)중학교[C] 4년, 고등여학교 4년으로 줄였고, 그나마 수의과목으로 남아 있던 조선어까지 완전 폐지시켰다. 목도를 들고 군사훈련을 하는 체련과가 중시됐으며 학도근로령을 내려서 학생들을 군수산업에 동원시키거나 전쟁터에 징병했다. 징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도망쳐 광복군이 된 사례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고 김준엽 교수가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으로 조선인들은 우민화되다가 공장 부품과 총알받이로 쓰인 것이며, 그 피해는 광복 후까지도 이어졌다. 일제의 우민화 교육과 식민사관이 얼마나 철저하고 효과적이었는지, 광복이 되어 기뻐서 태극기를 흔드는 어른들에게 학교를 다니던 어린이들이 일본을 자기 나라로 착각하고 왜 기뻐하냐며 슬퍼했다던 일화가 있을 정도다.
교육기회의 불평등만 봐도 해방 때까지 36년 동안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단 12명에 불과했으며, 내지의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불과 2명뿐이었으니 당시 조선인들이 박사 학위를 딴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 중 3 %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의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의 47 %, 중등학교 졸업자의 44 %, 2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73%가 일본인이었다.[박효선] 당장 초등 교원의 40% 이상, 중등 교원의 과반수가 일본인이라서 해방 직후 부족한 교원을 충원하기 위해 각종 강습과, 임시교원양성과들을 설치해서 2~12개월 만에 교원을 마구잡이로 충원하는 판이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근대화 학습'이란 '매우 극소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1938년까지 일제는 내지와 조선의 교육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들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이러다보니 학제가 달라, 구제중학교가 아닌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조선인은 당시 일제 본토 기준으론 '구제중학교 졸업자 미만'이었던 게 엄연한 현실이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등 역시 전문학교라기보다 '각급학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일반대학에 설치된 '예과 과정'을 밟아야만 제대로 된 대학생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84] 유독 일제강점기 시절 유학생들의 출신이 OO대학 전문부·예과가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상 국내에는 경성제국대학 말고 제대로 된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많은 이들은 일본으로의 유학을 타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본토의 대학들의 경우 조선인에게 할당되는 티오가 쥐꼬리수준이었기때문에 일본인들과 경쟁하기에 매우 불리한 환경이기도 했다. 일제가 끝난 이후 문맹률[85] 도 엄청나게 높았다. 사실 일제 내내 일본어만 할 줄 아는 조선인까지 포함하여 문맹률이 80%에서 변동이 거의 없었다. 즉 일본어를 말할 줄은 알아도 읽고 쓸 줄을 몰랐단 얘기다. 심지어 일제에 의해 사적으로 조선인들을 교육하던 1910년의 2, 241개 초등학교가 1940년에는 391개교가 되어 30년 동안 82%나 되는 사립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해당 출처에 의하면 국가적으로도 조선인들이 미개하다면서 교육을 기피한 모양. 당시 대만 등 다른 식민지들도 비슷한 문맹률을 보였다.[86] 일본인들은 국가에 의해 "조선인은 미개하다"라는 차별적 교육을 강요받았다.[87] 문맹이 아닌 한글 수준도 이후 조사에 따르면 이름과 숫자만 알면 통과하는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88] 주로 친일파 양반들이나 중인들이 혜택의 수혜자라 일본으로부터 독립에 실패하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문맹 상태에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의 시대가 와서 점차 개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일단 그 악명높은 중국도 소수민족들 및 광동인 등 남방 한족들에게 표준중국어를 강요하긴 하지만 명분은 문맹 퇴치인 점을 보면, 일본의 조선인 어문정책은 그냥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인은 조선인 80%가 문맹일 때 2%만이 문맹이었다.[89]
다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보급은 꽤나 했다고 하나, 같은 식민지인인 대만인 80%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과장한 면도 있어서 알 수 없다. 친대만 성향 넷 우익의 역사 왜곡과는 달리 당시 대만인들 다수는 일본어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아서 기준이 낮거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경우처럼 입말만 할 줄 알고 읽고 쓰기가 불가했을 수 있다. 대만인이 공식적으로 일본어를 잘하게 된 시기는 대만이 민주화되고 난 이후, 친일 성향이 늘어나게 된 이후였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문맹률이 보여주듯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면 전근대 문어체 일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대다수는 귀동냥을 통해서나 소학교(혹은 국민학교)에서 배운 구어체 회화만 가능한 수준이었다.[90] 여기에 해방 및 건국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어의 잔재를 어문생활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국가 및 민간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2세대(약 60년)도 되지 않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어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 차원의 기억으로 남은 채 공용어로서 생명력을 빠르게 잃었다.[91] 이로 인해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물이 방대하게 남아 있으나, 해독 가능자의 부족으로 인해 사료화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오역 역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공립학교의 수와 그 수학률의 증가를 보여주는 통계만을 두고 교육의 근대화를 주장하지만 정작 그 공립학교의 운영방식이 영리적이었으며 차별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급 인재들의 격차가 컸다는 점[92] 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이시하라 신타로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일제가 의무교육을 시켰으며 그것 때문에 시부야 사관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한 적 있는데 그 이후로 인터넷 상에서 일제 때 조부모가 일제덕분에 교육을 받았다는 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시부야 사관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6.3.3. 악습의 유입[편집]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국과 북한에는 나이 한 살 차이만으로도 반말과 존댓말을 가르는 식의 전에 존재하지 않던 악습이 생성되거나 이미 존재하던 악습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의 악습의 경우 대부분이 동시대 대부분이 나라들이 가졌던 전근대적 신분제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타국에 비해 유별나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북한과의 차이점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악습들이 모두 일제에서 유입된 것은 아니나 조선시대에 이미 잔존했던 권위주의가 일제의 영향으로 기존에 없었던 요소까지 융합해 부정적인 시너지를 일으켜 악화되었다.
똥군기와 병영국가화 된 사회 분위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 이 유산들은 군사독재와 결부되어 일제의 잔재가 더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지금도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93]
북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안 좋은 유산이 꽤나 많이 남아 있다. 이런 한국과 북한의 악습은 일제를 제외하고는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는 특성이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되고,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국력이 상승되면서, 과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호주제 폐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보고 있다.
6.4. 신분제의 유지와 권위주의[편집]
간혹가다 몇몇 사람들이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신분제를 철폐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된 것은 고종 시기인 1894년 갑오개혁 때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자면 오히려 일본 덕분에 친일파 양반들이 신분제 비슷한 덕을 본 경우가 더 많다.[94]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갑오개혁 시기에 사라졌어도 신분 차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기 때문에 일제가 신분제에서 조선 민중을 해방했다는 억지 주장도 나오지만, 그런 논리라면 1920년대에도 평민 들의 참정권을 주장하던 민주주의 운동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일어나고 현대까지도 부라쿠민 차별이 남아 있는 일본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신분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아주 황당한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법적 신분제 철폐가 아닌 실질적으로 사회속에서 신분 차별이 사라진 것도 6.25 전쟁을 거치면서이기 때문에 애초에 원인과 결과가 모두 틀린 주장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천민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를 존속시켰다. 대표적으로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95] 하였다. 그래서 백정들은 학교를 다니려고 해도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운동이 형평 운동이다. 사실 천민 차별은 일본도 마찬가지라 일본에서도 수평 운동이 일어났다. 의외로 조선이나 일본이나 양반, 사무라이 같은 귀족 출신들[96][97] 보다 평민들이 천민들에 대한 반발[98] 이 특히 심했다. 조선에서도 그런 반발로 농민 같은 평민들에 의한 반형평 운동이 일어났는데,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축하식 다음날에 진주 지방의 농민 2,500명[99] 은 바로 형평사 본부를 습격했다. 이런 반형평운동은 진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평민들은 백정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모자인 ‘평량립’을 쓸 것을 강요했고 백정들에 대한 교육을 거부했다.
심지어 홍산사건으로 음식점에서 중국인이 시비를 붙은 형평사원을 폭행하자 평민들은 오히려 중국인에 동조하여 백정을 폭행하였다. 다른 예로, 1925년에 수천 명의 농민이 예천형평분사를 습격한 ‘예천사건'의 대응이 있다. 1925년 8월 9일 예천청년회장은 축사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면서 일어났다.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하등의 죄악이 될 것이 없다. 어느 시대·국가를 물론하고 국법이 있는 것이다. 그 국법을 어기다가 백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백정을 압박하는 것이 결코 개인의 죄악이나 사회의 죄악이 아니다. 또 조선왕조 오백 년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았지마는 지금은 좋은 시대를 만나 형평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칙령으로 차별을 철폐하였으니 형평사는 조직할 필요가 없다. 아무쪼록 돈을 많이 모아 공부만 잘하면 군수도 될 수 있다.” 평민들은 이 발언에 동조하여 형평운동이 필요없다며 형평분사를 공격하였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군중들이 형평사원의 집을 약탈하고 형평사원을 구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제는 자신들도 천민 출신들을 탄압[100][101] 하고 있어서 그런지 백정에 대한 조선 평민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더욱 부추겼는데, 형평 운동이 전국적으로 세력이 더 늘어나고 기관지 세광 등을 통하여 백정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하자 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발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래도 일본과 달리 형평 운동에 동조하는 조선 양반들[102] 이 점점 늘어나자 일제는 곧 제대로 된 형평운동 탄압에 나섰다. 일제는 1927년 ‘고려혁명당사건’과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인터넷 댓글 중에는 조선시대 천민이었던 할아버지가 일제 덕에 출세했다는 근거 미상의 글들이 많이 있는데, 정작 조선시대에도 평민들은 물론이고 천민 출신으로서 국과장급 인사까지 성공한 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 천민은 물론이고 평민조차도 그러한 신분상승의 사례가 많지 않다. 기껏 상승해봤자 동네 이장이나 헌병 수준까지만 허락되었다.
6.5. 식민사관에 대한 반론[편집]
한국인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풍습,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인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지만 그들의 혼은 결코 꺾지 못했다.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전쟁, 점령기 도중 상대편에 부역한 자가 있는 건 다 마찬가지이며 일부 부역자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확대해석하여 전체가 동조하였다고 몰아가는 것은 약소국을 탄압했던 제국주의 국가들과,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만든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어리석은 물타기성 주장에 불과하다. 이런 논리대로면 중일전쟁 중 일본에 부역한 중국인도 있다는 이유로 중국도 전쟁범죄에 동조했다거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같은 유대인 동포를 학살하는 나치의 부역자였던 존더코만도의 예를 들어 유대인도 전쟁범죄에 가담했으니 오늘날 유대인들은 독일에 책임을 물 자격이 없다는 논리가 성립 된다.(자세한건 만주국, 아우슈비츠 수용소 참조)
다른 시각에 적혀 있는 내용과 같은 여러 의견들이 나오고 있으나 학계 이외에서의 반응은 싸늘하고 학계에서조차 쉽게 언급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일단 소위 '객관적 시각'으로 나온 미국과 소련 측 기록이 아직 영향력이 남아 있던 일본의 흑색선전과 편견에 의해 작성된 자료도 많아 정확한 분석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고[103] 반대로 한국 내에서 일제의 침략 행위에 가담하여 일제가 침공한 지역의 현지인이나 연합군 병사들을 앞장서서 착취하고 수탈한 행적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넘기며 민감한 화제를 덮으려 하기 급급한 상황이다.[104]
하지만 주류 학계에서 이런 류의 의견을 무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 객관적으로 역사를 다루며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극소수의 인물들을 제외한 대다수 인물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객관적 시각'으로 볼 수 없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판한다면서 일본의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 논리에 치우친 논리를 ‘객관적 시각’, ‘냉철한 견해’라 내세우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이 한반도 등의 지역을 점령하고 일으킨 전쟁범죄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방대한 자료와 증거를 통해 팩트로 증명되었다.
윗 문단에서는 일본의 지배 과정에서 보통교육 확대는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실제로 보통학교가 전국적으로 증설된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광복 직후 조사한 문맹률[105] 이 80%였을 정도로 높았다는 점과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에서조차도 수업료를 납부하게 하고 있었다는 점 등 일제강점기 '보통교육'의 열악한 실상을 간과하거니와, 일본제국이 시행한 '보통교육'이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과 맞물려 촉진된 내선일체라는 강제적인 동화 정책과 맞물려 시행되었음을 간과한다. 무려 35년 동안 문맹 하나조차 해결 못했으면서 교육 혜택이니 근대화니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즉 3차 조선교육령의 성과를 감안해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교육을 평가한다 하더라도 '획기적 진전'이라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열악한 현실에 머물렀던대다, 급격하고 무리한 동화 교육 정책으로 인해 실제 교육 행정에 있어서 주먹구구식 행정이 난무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이 반포되면서 보통학교를 급격히 확충하고 동시에 일선에서 조선어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은 학교에서부터 빨리 일본어를 주입시키기 위해서였지 조선인들의 교육 기회를 보장하려는 목적은 당연히 아니었다.[106] 문맹률은 해방 직후에서 부터 문맹 퇴치 운동을 통해 급격히 떨어졌으며, 당시 한반도 인구에서 극소수를 차지하는 일본인들이 고등교육 과정으로 갈수록 절대다수를 점유하는 불공정한 모습을 보였음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조선 내에서 공인된 정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단 하나뿐이었고 일본인, 친일파, 자본가와 지주 자제가 아니면 진학이 거의 불가능했다.[107] 보통학교가 늘었으니 교육은 확대되었다는 주장은 수박 겉핥기식 주장일 뿐이다.
6.6. 사법 분야[편집]
1912년에 공포된 조선형사령을 통해 형사 재판 제도가 개편되었다. 행정과 사법의 분리를 통한 전문주의, 몰(沒) 신분과 몰(沒) 친소의 평등주의,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 증거주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 시효제도, 복심(覆審) 제도, 변호사 제도 등이 있다.
조선민사령이 적용한 일본 민법 제1조는 모든 사람을 사권(私權)의 주체로 공인하였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기타 외국인도 마찬가지였다. 개인 또는 법인 간의 매매, 임대차, 고용과 같은 계약과 재산권 행사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1958년에 대한민국 민법이 제정되고 1960년에 시행되는데, 해방 전의 '조선민사령' 즉 일본의 민법과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민법안을 기초했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는 일본의 민법전과 민법학이 프랑스와 독일의 법을 이식한 것이며,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6.7. 경제 분야[편집]
일제에 의해 근대적 경제 시설·기구·제도가 들어서고, 농업 성장을 중심으로 무역 확대와 산업고도화가 이루어졌으나, 사회 전반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매우 컸고, 경제전반에 걸쳐 일본에 종속된, 불완전하고 기형적인 구조를 가져왔다.[108]
동국대학교 김낙년 교수[110] 의 추계를 참고하면 1920년대 초반[111] , 생산가액과 부가가치의 각각 과반이었던 농업이었던 반면 이후 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해감에 따라 1940년도에는 절반 이하까지 떨어지고, 공업이 30~40%, 광업이 10%에 못 미치게 되는 등 공업의 성장에 눈에 띄인다.
당대 조선 산업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농업 분야는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소되기보다는 더 강화되었다. 조선 농가의 소작지 면적은 1918년 50.4%, 1926년 50.7%였다. 소작지 면적은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으며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자작농은 20년대 이후로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농업은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쿠즈네츠가 권고한 경제성장률 3%를 넘김으로써 유의미한 성장을 한 것으로 보이며, 개항 이전 0.25%였던 것과 달리 인구증가율은 1%를 기록하여 적어도 사이먼 쿠즈네츠가 주장한 근대적 경제성장 요건까지는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나와 있듯이 수치적으로 보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긴 하다. 그러나 1940년 이후 일제의 전시경제정책과 해방 후 3년간의 혼란과 결정적으로 6.25 전쟁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의 경제유산'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의 1인당 GDP는 태평양 전쟁 말기 때의 수탈과 해방 후 일본인들의 철수로 인해 1945~1946년에는 사실상 구한말이던 1910년 당시 1인당 GDP 수준에서 반토막이 났다.#
이 부분에 관해선 식민지 근대화론 문서에 보다 심도 깊은 내용이 실려있다.
6.7.1. 한반도 진출 기업[편집]
일부 기업 상당 수는 전범기업, 적산불하기업 과도 겹친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기업들은 아래와 같다. 광복이후 한반도에서 대부분 철수 하거나, 국내 기업들과 기술제휴 형식으로 리메이크된 상품들이 한국에 출시되기도 한다.
- 유통 - 미츠코시 백화점(三越 百貨店)
- 금융 - 조선은행, 일본제1은행[112] , 일본제18은행, 일본제58은행[113] , 조선식산은행 등
- 금융, 중화학공업, 전기전자통신 - 미쓰비시 그룹(三菱グループ)
- 미쓰비시제철(三菱製鐵)
- 방송 -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JODK)
- 철도차량 - 일본차량제조(니혼샤료, 日本車輌製造)
- 철도차량 - 히타치제작소(日立製作所)
- 부동산업, 원자재 -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 제지 - 오지제지(王子製紙)
- 시멘트 - 오노다(小野田)시멘트[114]
- 문화, 컨텐츠 - 태평레코드(タイヘイレコード , Taihei Record Co., Ltd.), 야마하 악기 제조소(山葉楽器製造所)[115]
- 의약 - 모리시타인단(森下仁丹)
- 의약, 식료품 - 아지노모도(味の素)
- 의약 - 류카쿠산(龍角散)
- 식료품 - 다이니혼제당(大日本製糖)[116]
- 식료품 - 메이지(Meiji,明治)
- 식료품 - 모리나가 제과(森永製菓)
- 식료품 - 기린맥주(麒麟麦酒(キリンビール)株式会社)
상기 일본업체 이외에도 영국 포드 자동차, 유한양행, 경방, 동화약품 과 같은 민족 기업도 있었다.
6.8. 문화 분야[편집]
경술국치 이후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고분들을 상대로 경주와 개성을 중심으로 고분 도굴을 자행했다. 그들은 무리를 짓고 버젓이 고분들을 파헤쳤는데 특히 개성은 고려왕조 오백 년의 도읍인 까닭에 왕릉을 비롯해 고대 고분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더욱이 이 고분들은 모두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호하고 있었던 무덤들이었다. 그렇기에 분형뿐 아니라 내부의 시설에서 고려자기 같은 부장품은 거의 틀림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고분들을 마구 파헤치고 그 속의 부장품들을 약탈하는 만행이 버젓이 행해진 것이었다. 일본 도굴꾼들의 도굴 과정을 목격한 조선인들은, 그들이 대략 마차 10대 분량의 부장품들을 싣고 갔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상상도 안 될 정도의 규모의 유물들이 도굴당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에 "일본의 침략이 마침내 우리 선조의 백골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고려청자들은 국내에 있는 수량의 배 이상이 일본에 있다고 추측되며 현재 한국의 국보급 유물 중 일정 부분은 일본의 도굴꾼들이 경매에 내놓은 것을 조선인이 구매하거나 개인적으로 그러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구매한 것이다.[117]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확히 어떤 고분들이 파헤쳐졌는지 어떤 유물들을 가져갔는지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진 뒤 문화재 협정을 체결했지만,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대다수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만일 일본인들이 도굴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국보들이 상당수 추가되었을 것이다.
비단 유물들 뿐만 아니라, 건축물 또한 훼손되거나 헐리는 등 피해를 입은 곳이 많다. 대표적인 것은 한양 도성 내 궁궐들인데, 경복궁의 경우 심각한 수준으로 전각들이 팔리고 헐려나갔다. 경복궁에서 과거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건물은 근정전, 근정문, 경회루 등 몇 채 되지 않으며, 광화문은 엉뚱한 곳으로 이전되었다. 또, 궁궐을 행사장으로 활용하며 이런저런 행사를 개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궐 전면부를 통째로 밀어버리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경복궁 내에 듬성듬성 있는 녹지는 대부분 사라진 전각들의 터라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창경궁의 경우에는 궁궐 부지 내부에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이 들어섰고, 덕수궁의 경우 화재 사건 이후 가뜩이나 줄어든 전각들이 일제강점기 들어 또다시 훼손되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는 서로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순종이 사망하자마자 '종묘 관통 도로'(現 율곡로)를 개통했다. 순종이 생전에 완강히 반대했던 것을 그가 사망하니 '옳다구나' 하고 착공해버린 것이다. 결국 두 건물 사이가 끊겨버렸고, 이러한 형태는 2022년 율곡로가 지하 차도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위의 상황은 문화 침탈을 설명한 것이고, 그외 35년간 일제시대 동안엔 전반적으로 일어난 문화의 변화는 다양하다. 도시 지역에서는 본격적으로 20세기의 풍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화, 극장등 문화예술 분야의 활동이 점차 늘어났으며, 그외 자전거, 정구(테니스) 등의 스포츠, 라디오의 본격적인 유입등 구한말부터 시작된 서구문화의 유입이 활발하게 시작된 것이 이 시기 부터이다. 문학분야에서는 항일 정신을 담은 작품들, 친일 정신을 담은 작품들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났으며 현대한국문학이라고 부를수 있는 작품들이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배달문화의 발달로 설렁탕이 인기를 끌고, 아지노모토같은 새로운 조미료가 인기를 끄는등 식문화의 변화도 나타났다.
이런 문화들은 주로 친일파,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이들이 누렸지만, 완벽히 이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도시 지역의 중산층은 어느정도 이런 변화를 누릴수 있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다. 이런 문화들이 오직 친일파,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반일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진정하게 조선을 위한 근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골지역은 이런 변화를 거의 겪지 않았으며, 이들의 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구한말 조선의 상황에서 별로 나아지지 못했다.
6.9. 남북한에 끼친 악영향[편집]
1945년, 일제의 항복으로 인해 한반도는 해방되었으나 한반도 북쪽은 김일성의 독재와 함께 공산화되었고, 남쪽 역시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고 한국전쟁과 군사정권까지 거친 결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남북한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으며 일제의 잔재는 아직까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일단 남북한 모두 공통적으로 군사문화가 뿌리 깊게 박혔다. 남한의 경우, 미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이승만과는 달리,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군[118] 장교로 복무하던 박정희는 일본제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려 많은 병폐를 야기했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로 들어서고도 근절되지 않고 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똥군기 문화가 남아 있는 것과 군 내부에 아직까지 병영부조리가 있는 것[119] 역시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악영향이 남한보다 북한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여기는 김일성 독재와 주체사상으로 인해 오히려 일제의 잔재가 좋지 않은 쪽으로 더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 문제가 된 친일파나 지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누명까지 씌워 해방 정국에 숙청을 감행했으나, 정작 친일파 중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은 그대로 기용했다.[120] 거기에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주민들이 외세의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점을 악용해 주체사상과 김씨 세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했다.[121] 그러고서 80년대 이후에는 김일성 가문의 초상화를 일본 제국에서 천황의 어진을 숭배하듯이 그대로 아끼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일제처럼 북한도 김부자 초상화를 구하다 숨진 사람들이 영웅으로 우대가 되는 폐해가 일어났다.
분단 그 자체부터 일본의 강점으로 일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그 처리과정에서 분할이 논의된 것으로, 그렇지 않았다면 연합국 사이에서 아예 분할 자체가 논의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제는 패전 직전까지 시간을 끌어 소련을 참전하게 하였고 그 결과 옛 조선의 영토는 소련과 미국이 점령하게 되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강대국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도자를 좋아하여 통일 국가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였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만들 역량이 쇠약해져 오스트리아 같이 합의하 통일도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전쟁까지 나는 사건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한국인들의 국가 운영 참여 경험이 무려 반세기 가까이 차단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근대 국가 운영 경험은 아예 제로였던 점이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광복 당시 한반도의 정치인이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이지 제대로 된 정치적 경험과 경륜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계파와 정파 간 협상과 논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제도권 정치에 매우 미숙했으며, 여기에서 해방공간의 온갖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국에서 정식으로 정치학을 공부하고 미국 민주주의를 직접 보고 왔다는 이승만 같은 이들부터가 온갖 테러를 일삼았으니 더 말이 필요한가?
정작 일본은 일본제국 패망 이후로 미국에 의해 민주주의가 도입되며 징병제 등 군사주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고 6.25 전쟁 등을 통한 특수로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졌으며, 진정성 있는 역사교육의 부재로 일본 제국이 남북한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도리어 남북한의 분단과 군사주의로 인한 악습을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 당파성론 등 식민사관의 논리로 오해하며 민족성 자체가 미개하기에 생겨나는 문제로 여기고 싸잡아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122] 다만 일제의 군사주의 문화를 경험한 일본 노년층이나 중장년층 일부는 이해하거나 동감하는 경우도 있다.
6.10. 청구권 문제[편집]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한일기본조약, 한일 무역 분쟁, 아시아여성기금,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를 참고.
6.11. 일본에 끼친 영향[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받은 영향에 대해선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해석 역시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일본 중앙정부가 조선총독부 측에게 지급한 재정 보충금이나 식민지 조선의 경상수지의 수치, 일본과 조선의 민간 교역 내용 등을 보면 '한국을 착취했지만, 일본이 일방적으로 이익만을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도의 해석도 있다. 식민지 통치는 자국의 경제에 어느 정도 부담을 주는 정책이기도 하였다.
사상적인 측면을 따져 보면 일제강점기는 일본인들의 상당수와 일본 정부를 비롯한 일본 사회에서 일본서기에서의 신공황후 신화와 더불어 한민족에 대한 멸시 및 우월의식 등을 비롯하여 한국은 언제나 일본보다 아래이며 일본을 위해서 희생해야한다는 인식과 반한 정서가 만연하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서 일본 정치권이 비리와 스캔들이 일어나면 여론몰이를 위해 반한을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6.12. 종합 [편집]
일제강점기는 한반도에 근대화가 빠르게 이루어진 시기이긴 하나, 그 근대화의 방향성은 한민족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과정의 근대화가 아닌, 제국의 중심부인 일본 열도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에 맞춰진 근대화이기에[123] , 이 과정에서 한민족이 입을 수 있는 수혜는 상당히 한정되거나 일부 친일 고관 및 왕족, 귀족들에게 편중된 형태로 일어났다.
한반도 역시 일본 열도처럼 마땅한 지하자원이 없어[124][125] 저임금 노동력으로 산업혁명 초반의 국가 재정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인데, 이러한 저임금 노동력으로 조선인들이 벌어들이는 국부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인 사업가들을 통해 본사가 있는 일본 본토로 쏠려들어가는 상황이 일본 제국시대 내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서구에서 들여온 화학 비료의 도입으로 전 지구적인 인구폭등이 일어난 시기였고, 조선에서 일본이 이룩한 발달된 서구식 행정의 도입과 치안의 확보와 맞물려 인구가 2배에 가까이 증가하는 폭증이 일어났다. 하지만 단순히 인구만 늘렸을 뿐, 자본 투자처로서의 매력이 없는 가난한 농경국가 조선에는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 제국의 정부 차원에서의 투자액도 조선보다 훨씬 작은 대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지라[126] , 인구의 폭증에 합당한 일자리의 증가와 도시 인프라의 구축은 굉장히 더뎌질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의 통치형태에 의해 조선의 낙후 현상이 장기간 유지된 면도 큰데, 산업화로 인해 이농현상이 일어나 농촌의 인구와 생산량이 급감한 일본은 조선 중남부의 쌀로 초중반의 제국을 부양하였기에, 조선의 쌀값을 저가로 묶어두기 위해 총독부가 조선의 대지주들과 짜고 조선 자영농들을 의도적으로 몰락시켜 이들을 노예에 가까운 저급여 소작농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조선 소작농들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생존권인 '도지권' 등은 철저히 부정되었다. 중남미의 엔코미엔다식 식민착취 시스템과 흡사한 이 농촌 착취 구조를 '식민지 지주제'라고 한다.
특히 일본 제국 중반으로 넘어가면 일본 농촌이 화학비료의 보편적 보급과 기계화의 시작으로 인해 식량의 자급이 가능해져서 조선쌀에 대한 의존도가 급락했는데[127] , 조선은 여전히 곡식 수출 외엔 경제를 유지할 방도가 없는지라, 결국 일본 곡식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쌀값을 저가로 장기간 동결해야했고, 당연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의 소작농들에게 전가되었다. 이 때문에 굉장히 많은 조선 농민들이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그나마 소작도 불가능한 극빈농들은 결국 집과 땅을 잃고 '유랑민', '토막민'이라는 처참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는 조선 북부에 전개된 일본 제국의 공업지대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으며, 투자와 경영이 전부 일본 자본가 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던 일본 제국의 공업지대에서 조선인은 본토 일본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낮은 임금과 가혹한 노동조건에 묶여 있어야 했다. 조선의 인구 폭증에 의해 값싼 노동력은 얼마든지 남아돌았기 때문에, 임금상승률은 거의 동결에 가까운 형국으로 장기간 유지되었다. 또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고급 기술들은 대부분 일본인 기술자들의 영역이었고, 조선인은 가계빈곤에 의한 교육수준 미달이나, 기술 보안적 측면에서 신용하지 않았기에, 해방 직후까지도 조선인 고급 엔지니어링 인력은 수십명 단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흥 국가인 일본 제국은 만성적 재정 빈곤에 시달리다보니[128]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들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삶에 머무르도록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농촌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한반도에 막대한 도시 인프라를 연결하여, 유지시킬 자본은 가난한 일본 제국에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원금손실이 뻔한 투자를 할 생각을 지닌 일본인 기업가도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러다보니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직업이라곤 소작농과 하부 노동자 외에는 가질 수가 없었고, 당연히 세금납부액도 본토에 비해 형편없었으며, 이런 재정 악순환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재정적자가 심각하여 지배기 대부분을 본토에 구걸해가며 적자예산으로 굴려야 했다.
즉 낙후된 조선 → 일자리 없음 → 돈 없음 → 교육비 없음 → 저임금 노동자 양산 → 실업자 → 적은 세수 → 총독부 재정고갈 → 투자저조 → 낙후된 조선 이라는 악순환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조선인의 자본축적이 힘들어진 이유는, 일제 본토에서 온 대기업의 큰손 사업가들의 외래자본에 기인한 측면이 큰데,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알토란 사업에 일본의 대자본이 직접 개입하면서 개미 사업가 조선인들은 마구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외래자본인 일본의 투자자본이 조선의 돈 되는 사업들로 벌어들인 이윤 역시 대부분 조선땅에 재투자되지 않고 일본 본사로 흘러들어갔다. 사업체들은 번성했지만 벌어들이는 이윤이 현지에 낙수효과를 일으키지 못해 지역 회사의 번창과 현지 경제의 발전이 정비례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단절되어버린 것. 즉 조선의 경제가 일본 투자자본의 유원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것을 근대화라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극심한 수도권 집중, 서울 공화국 체제와 지방 인프라 황폐화 역시 발전이라 칭할 수 있다. 어쨌거나 무언가는 지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총칼로 일어난 일본 제국은 국력을 초과하여 무리하게 군대와 전선을 비대하게 확장해가는 과정에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본토인 일본열도와 제2의 본토인 한반도에서 약탈해와야 했다. 특히 조선의 쌀은 전란기동안 추수하기 무섭게 전선으로 빨려들어갔으며, 납과 구리를 포함, 거의 모든 민간 물자들이 제국 정부에 강제 공출되었다. 이로 인해 제국의 후반부에 가면 조선의 농촌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이렇듯 일본 제국은 조선에 경제 구조적 착취를 가했다. 즉 대외적으로만 조선인을 일본 민족과 일시동인이며, 조상이 같고, 천황폐하의 동등한 적자이며, 신의 자손이고, 같은 시민권자이며, 해외에 나가면 같은 여권을 부여받는 '동등한 입장의 제국신민'임을 표방했지만, 내적으로는 조선인들에게 경제 구조적인 착취를 가한 것이다. 즉 경제에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일본 제국 치하에서 대자본을 굴리는 일본인은 언제나 승자였고, 소자본을 굴리는 조선인은 언제나 패자였던 것이다. 일본 제국의 경제 구조적 착취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일자리가 고갈된 조선인들은 저임금 노동이라도 얻으려고 일본 열도로 몰려들었고, 조선인이 저임금 노동을 차지해 일자리와 임금이 줄어들고 거리가 슬럼화되자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 분개해 멸시와 학대를 가했다. 제국 시대가 지속될수록 내선일체는 공허한 구호가 되어버리고, 경제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한 일본민족과 한민족의 갈등과 증오의 골은 임계점을 넘은 수준으로 깊어갔다. 관동 대지진 이후 발생한 대규모의 조선인 학살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한민족의 삶의 질의 상승을 가져온 근대화이자 산업화는 광복 후인 1960년대 개발독재부터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의 경제구조는 민족이 질적으로 향상되려면 '민족자본 육성'에 왜 사활을 걸어야 하는지, 왜 식민지 근대화라는 것이 뿌리부터 한계가 명백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일부 근대화론자는 일본의 지배가 해방 이후 한국의 한강의 기적과 '직결'되는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전후 한국의 자체적 노력을 경시한 허점이 많은 주장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행정 시스템의 경우, 대한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행정 조직[129] 을 단순히 계승만 한 것 뿐 아니라 더 발전시키고 한 측면도 있으나 정작 행정조직을 운영하는 주요 주체는 일본인이었지 조선인 출신 관료들은 명예고문직인 중추원의 고문으로나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 조선인이 조선의 실무에 끼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 역시도 해방되고도 십수년이 지난 뒤에야 시작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한국전쟁이 있긴 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노력은 한국의 산물이다. 당장에 문맹률도 일제강점기 시기와는 달리 이승만 정부를 거치며 크게 개선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들이 받은 교육은 모두 한국어지 일본어가 아니다. 즉 1공 시기는 명백하게 일본의 지배의 덕을 본 시기가 아니다.
때문에 해방 이후 이승만을 비롯한 광복 직후의 정치인, 관료들이 행정력 부재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많은 친일 부역자 출신 실무자들을 그대로 그 자리에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130] 일본의 통치가 끝나자마자 해방 이후 조선은 행정망 붕괴로 아노미에 시달렸으며 이승만 집권기 내내 행정능력 부족으로 고생하게 된다. 일제 시대에 양산된 인재들은 해방 이후 워낙 손이 부족했던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중용되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일제가 조선 식민지인 교육에 무심했던 데다, 그나마 그런 식으로 나온 인재들조차 정치적, 경제적으로 출세할 길이 막혀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에 실무능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극렬한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조차 현실적인 타협을 위해 친일부역자들을 이렇게 적극 기용했음에도 이정도 행정적 인력부족 사태였다는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조선인 교육제도가 효과가 있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를 절실히 반증해주기도 한다.
이택선 교수의 저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에 의하면 한국정부 수립 당시 관료들이 대부분 20대들이었으며, 친일관료들조차 본인들의 친일행위를 숨기려 직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을 한국정부가 관료로 삼기 위해 쫓아다니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뿐 아니라 김구의 임정 세력들을 위시로 이루어진 우익청년단의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었을 정도였으며, 북한의 경우에는 관료계급의 상당수를 일제시대때 그대로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는 등, 좌파가 우파의 인재를, 우파가 좌파의 인재를 서로 가져다 쓸 정도로 한반도의 인재의 절대치가 극심하게 부족한 상황이었다.[131]
경제계 역시 산업 엔지니어링의 중추를 담당했던 공장 고급 인력들 태반이 일본인 노동자들인지라, 상당수의 공장들이 가동되지 못하고 올스톱 상태가 되었으며, 미국이 일본으로 도망간 일본인 경영자들을 강압적으로 한국땅으로 끌고와 공장운영과 기계운용법의 인수인계를 한국인들에게 끝마칠때까지 한국땅의 공장들은 제대로 운영도 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북한은 아예 일본인 노동자 600여 명을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게 강제 감금하여 공장을 운영토록 했다.
군대의 경우 6.25 전쟁 당시 활약했던 만주 군관학교 출신 지휘관들이 존재하긴 하나, 홍사익 장군 등 극소수를 제외하곤 한직의 하급 위관급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상급 지휘권자로 파격 승진하게 된 건 해방 이후였다. 여담으로 군대의 상황도 일제강점기가 조선인들이 출세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승만 정부 초중기만 해도 사관학교 출신들은 출세가 엄청나게 빨랐는데 육사 7기생까지는 국군 조직의 확대가 겹치긴 했지만 20대에 별을 다는 등 초고속 출세를 거듭했다. 만일 일본이 교육에 있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면 이정도로 빠를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조국 근대화에 착수하여 현대 경제대국 한국을 만들어낸 인재풀은 일본,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돌아온 애국심에 불타는 초기 유학파 세대들이었으며, 이들은 개발독재 과정에서 크게 등용되어 한국경제의 파격적 성장을 가능케한 테크노크라트층의 중추를 이루었다. 일본 유학파 세대들은 제국시대에 형성된 현 일본 정경계 유력가들과의 인맥을 동원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것도 미국이었고 1세계를 주도하던 것도 미국이었기에 각종 행정제도나 이론 등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일본 유학파보다 상대적으로 주도권에서 유리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이승만은 1950년대와 자신이 하야하는 1960년까지 다량의 인재들을 국비를 들여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1956 ~ 1957년 기준 미국내 외국인 유학생 중에 한국인이 캐나다와 대만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132] 이들이 이후 박정희 시대 산업화와 경제 발전 시기에 맹활약하게 된다. 당장 학제만 봐도 일제강점기의 그것은 기후적 요건으로 어쩔 수 없이 살아남은 춘추제 정도를 제외하면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봉건적인 조선 사회 구조를 타파했다는 인상과 달리, 일본 제국은 여전히 작위 귀족이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어, 백정들이 형평운동을 벌이는 등의 사회적 차별 구조는 여전했으며 농촌의 경우 생산량 향상이라는 목적으로 지역 토호들과 결탁해 대지주들이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133] 해방 이후에도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오늘날 한국에서 본격적인 봉건적 사회 구조의 붕괴는 6.25 전쟁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134]
한국과 일본에서 몇몇 지식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이 공산당 세력에 지배를 받는 것을 막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나, 당시 일본 제국 자체가 조선뿐 아니라 자국민들에게도 딱히 좋은 정권은 아니었기 때문에[135] 조선과 일제 본토의 좌파, 아나키즘 세력의 협력은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오히려 중국 내 공산당 세력을 탄압하던 국민당 정부 하 중화민국을 침략하여 중국 공산당의 세력을 키워주었고 소련의 건국과정에서 1905년 러일전쟁의 영향을 볼 때 오히려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에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큰 일을 했다. 중국과 동남아처럼, 전쟁 이전에는 공산권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지역들이 일본의 침략 이후 상당수가 공산권으로 뒤집힌 것만 보면 일본이 공산주의를 퍼뜨린 것이라는 아니냐는 촌극과도 같은 해석조차 가능해진다.
또한 중국 침략을 위해 북한지역에는 대규모 공업지대가 형성되었고,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수풍발전소가 지어졌으나, 분단으로 전부 한국땅에서 떨어져나가고, 공업지대도 소련군에게 약탈당하거나 6.25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었기에, 일제가 남긴 유산은 현대 한국에 끼친 순기능적 면에선 물질적 유산보다 무형의 유산에 훨씬 치중되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을 찾으려는 것은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수많은 개도국들 중 한국이 2020년 기준으로 사실상 유일하게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결국 방법론만 다를 뿐 이러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인물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가 근대적 행정력을 구축하고, 1차 산업들[136] 과, 민간용 군사용으로 갈고 닦아놓은 전 국토의 도로, 철로, 교량 등 기본 교통 인프라들을 깔아놓았고, 이것이 한반도 전체에 근대적인 뼈와 힘줄과 신경망의 역할을 한 것[137] , 이후 한국 개발독재의 고도성장이 이 위에 근육과 혈관과 살을 완성하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한국의 경제성공은 3세계의 작은 개도국의 산업선진국으로의 진입이 가능했던 최후의 기회인 1960~1980년대 세계의 전후 복구시기의 막차를 타는 '속도전'이었음을 염두에 둘 때, 사실 한국의 근대화에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 통치 시기였던 일제 시기의 유산의 영향이 큰 것 자체는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13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해방 직후, 한국전쟁 직후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3세계 빈곤국가에 불과했던 한국의 '한강의 기적'의 원인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바라보는 주장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인의 '절대가치'인 한국 민족이 스스로 치뤄야했던 '막대한 노력과 희생의 가치'를 등한시한 굉장히 자학론적인 시각이다. 한강의 기적은 한국민족 자체의 처절한 '자강'의 결의가 없었으면 그 누구도 기대하지도 원치도 않는 결실이었다. 자유진영 국가인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중공업화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미국의 경우 이미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위해 투자금을 지원했다 전부 떼인 충격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 산업 도전을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고 투자 자체를 꺼린 경향이 컸으며, 한국에 대한 지원은 대부분 식량 지원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일본의 경우에도 한국이 해보지도 않은 자본집약 산업을 일으키다 망해 그 여파로 한반도 남부마저 적화될까 두려워했던 기색이 강했다.[139]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륙 국가들은 전부 적성국가들이었고, 한민족은 이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쏟아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산업발전에 필요한 시드머니를 확보하기 위해 베트남전에서 서방세계를 위해 피를 흘려야 했고, 중동의 열사의 사막이나 동남아의 정글 등 돈이 되는 곳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산업화의 재원을 확보하는데 수십년간 민족의 사활을 걸고 매진해야 했다. 따라서 '일본의 전후 배상금과 차관, 산업기술 지원이 현대 한국의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라는 논리는 옳아도, '일본제국의 통치가 현대 한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라는 주장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사의 윤곽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편협하고 무지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사 상식이 부족한 상태로 수혜론만 내세우는 일본의 우익들 또한 '다 된 남의 밥에 숟가락 얹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사실 일제강점기 조선은 세계사적으로도 굉장히 특수한 위치에 있는데, 사실상 열강이 마지막으로 신규 획득한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즉 1차대전을 계기로 열강 간에 전후처리로 기존 영토 혹은 식민지를 넘기거나[140] 아예 2차대전 전범행위로 획득한 식민지들을 제외하면 조선 이후에 열강이 기존의 독립국가 혹은 정치공동체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편입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141] 조선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멸망한 국가가 아님에도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독립한 것도 이런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였다. 앞에서 일본의 한국 병합은 매우 급작스러웠다고 지적했지만, 반대로 일본이 한국 통치에 대한 내부논의를 완료하고 병합을 추진하려 했다면 이 때는 이 '논의'의 완료 시기에 따라 아예 병합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최대 보호국 체제에 만족했을 가능성이 높았다.[142] 한국인들이 일제 지배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어찌됐건 좌충우돌하며 20세기 초까지 독립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나름 근대국가 단계에도 발을 들여 본 나라가 하루아침에 식민지로 전락했으니 당연히 그 이후 일제 통치가 어떤 성과를 냈건 간에 '한국인'들이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직후 일본이 받았어야 할 분단이라는 전후 징벌을 짬처리당한 부분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143]
이와 별도로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민족의 민족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제시대 내내 일본 제국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상이 같은 동조동근론 내선일체론을 내세우며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에 맞는 사상을 일본인들에게 주입시켰는데, 전통 가부장 질서에 비추어볼 때 일본인들은 정실부인과 결혼해 낳은 종가집 정통계승자의 민족이고, 조선인들은 첩과 낳은 방계 서얼 민족이기에[144] , 민족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서자의 민족인 한민족의 '열등성'을 강요받았다.[145] 유능한 형 일본이 없으면, 무능한 동생 조선은 자립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개된 조선민족관을 역사학적 측면에서만 고려할 때 식민사학이라고 일컫는다.
7. 관련 문서[편집]
7.1. 역대 조선총독[편집]
이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조선총독부 문서 참고.
-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년 ~ 1916년)
-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년 ~ 1919년)
- 사이토 마코토 (1919년 ~ 1927년)
- 우가키 가즈시게 (1927년)
- 야마나시 한조 (1927년 ~ 1929년)
- 사이토 마코토 (1929년 ~ 1931년)
- 우가키 가즈시게 (1931년 ~ 1936년)
- 미나미 지로 (1936년 ~ 1942년)
- 고이소 구니아키 (1942년 ~ 1944년)
- 아베 노부유키 (1944년 ~ 1945년)
7.2. 역대 이왕[편집]
이태왕(고종)과 이왕(순종 → 영친왕)은 천황이 하사한 작위일 뿐 통치권은 전혀 없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지속된 이태왕과 이왕의 존재는 나라를 판 장본인은 고종과 순종이라는 논란[146] 을 야기시켰고, 독립운동가 중 구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을 꾀하는 근왕파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7] 그리고 실제로 이왕가에서는 의친왕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순순히 일제에 순응했으며 적극적인 친일파도 제법 나왔다. 이것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에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해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148]
- 도쿠주큐(덕수궁) 이태왕
- 쇼토쿠큐(창덕궁) 이왕
7.3. 사건 사고[편집]
- 을사늑약[149]
- 을미사변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 경술국치 - 일제강점기의 시작[150]
- 남한 대토벌 작전
- 부군면 통폐합
- 105인 사건
- 토지 조사 사업
- 신한청년당
- 2.8 독립 선언
- 3.1 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산미증식계획
- 간도 참변
- 봉오동 전투
- 청산리 전투
- 자유시 참변
-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 물산장려운동
- 조선물산공진회
- 을축년 대홍수
- 미쓰야 협정
- 민립대학설립운동
- 조선공산당
- 신의주 사건
- 해수구제사업
- 브나로드 운동
- 6.10 만세 운동
- 광주학생항일운동
-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 만보산 사건
- 만주사변
- 민생단 사건
- 경성 트로이카
- 보천보 전투
- 중일전쟁
- 창씨개명
- 수양동우회 사건
- 조선의용대
- 경성콤그룹
- 항일단파방송 사건
- 조선어학회 사건
- 조선건국동맹
-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 8.15 광복 - 일제강점기의 끝(종말)
7.4. 미디어[편집]
일제강점기는 그야말로 격동과 암흑의 시대였던 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올 수 있고 한국은 물론 중화권, 동남아시아, 일본까지 시장으로 삼을 수 있으며[151] 고증을 위한 자료까지 많이 남아 있어 영화, 연극, 드라마 등 공연예술에서 시대배경으로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다. 특히 영화의 경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대적 여건과 제작환경의 한계로 '일본은 나쁜 놈' 이상의 주제의식이 없는 퀄리티 낮은 반일반공[152] 민족주의물(...)이 다수였으나[153] 21세기부터는 주제의식과 완성도, 작품성과 대중성을 둘 다 잡는 꽤 괜찮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 구미호뎐1938
- 각시탈(만화)/(드라마)[154]
-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
- 강덕순 애정 변천사
- 경성 스캔들(드라마)
- 경성야상곡[155]
- 경성 트로이카(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다루는 소설로 이재유가 주인공이며 이관술, 이효정, 박진홍, 이순금, 이현상, 김삼룡이 등장한다.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영화)
- 고래별[156]
- 군함도 : 하시마 섬을 소재로 한 2017년 7월에 개봉된 한국영화
- 절정
- 김두한/창작물
- 대체역사물
- 새벽의 여명(소설)
- 2009 로스트 메모리즈(영화)
- 비명을 찾아서(소설)
- 일 베티사드 - 한반도(일 베티사드)(게임)
- 대호
- 덕혜공주
- 동주
- 말모이(영화)
- 모던 보이(영화)
- 무정
- 무지개를 이은 왕비(드라마)
- 미스터 션샤인(드라마): 1902년에서 1907년까지의 구한말 시기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회 최후반부에 1910년으로 넘어간다.
- 밀정(영화)
- 바람의 아들(드라마)
- 박열
- 버티면 10억 (만화) [157]
- 별님의 레일(소설/애니메이션) : 신의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가족이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봉오동 전투
- 사의 찬미, 사의 찬미
- 안중근 관련 미디어
- 아가씨
- 아나키스트
- 암살(영화)
- 야망의 신화(게임)
- 야화, 야화 2 (게임): 1996년과 1999년에 FEW에서 만든 게임으로 김두한과 시라소니를 선택하여 일제시대 당시 주먹계를 평정하려는 사투를 그린 액션게임. 하야시가 최종보스 이며 1편은 벨트스크롤 액션게임과 전략 시뮬레이션의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2는 아예 RPG액션으로 바뀌어 있다.
- 여명의 눈동자(드라마)
- 영웅 (영화)
- 이몽/(영화)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디어
- 청연(영화)
- 해어화
- 815: 1998년에 클라리온 소프트에서 제작한 게임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을 배경으로 한 광복군과 일본군의 대결을 그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비록 고전 게임이라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대한민국 광복 50주년을 기념한 작품이기 때문에 자료 고증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 수업료(1940):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학교에서 수업하는 내용과 한국과 일본 지도를 같이 칠판에 교사가 그리는 내용이 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일본어, 밖에서는 한국어를 쓴다.
- 항거: 유관순 이야기
- MazM: 페치카(게임)
- 마이웨이(영화)
- 파친코
- 흑무경담(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