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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여진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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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따르면 전주 이씨로, 본래 전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근거하던 가문 출신이라지만 정작 전주에 있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역대 선조로 기록된 인명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 교차검증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본디 본래 전주 이씨가 아니라는 근거는 될지 몰라도 이성계 일족이 여진족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진족이 아니란 게 검증이 안되면 무조건 여진족? 게다가 족보를 구매해서 윤색할거라면 논란거리가 더 적은 집안들이 한둘이 아닌데 굳이 고려사 최악의 역적인 이의방 집안의 족보를 사놓고서는 어떻게든 이의방의 존재를 감추려 안달을 할 리가 없다.

  •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 그리고 또 동북면으로 이주할 때 그에 딸린 1백 70여 가(家)가 따라서 같이 이주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1가는 현대의 핵가족보다 훨씬 큰 집단이었고 이런 대규모 가구가 유력 세력가를 따라 한꺼번에 멀리까지 이동하는 것은 농경사회보다 유목사회의 모습에 가깝다?

  • 태조실록 총서에서 이안사가 '석성(石城)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거나, 도조 이춘이 함주로 이주할 때 이주하는 이유로 목축(牧畜)하는 데 편리함을 언급했다는 점으로 농업보다 목축의 비중이 높았던 집단으로 보인다?
    • 우선 원사료 내용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원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 이성계의 선조들을 보좌하는 장수들은 퉁두란을 비롯해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는데, 중세 사회에서 특별한 이유로 엮인 것도 아님에도 순수 농경지역 출신 지도자인 이성계 집안을 순순히 따랐다는 점이 역시 납득하기 힘든 점이다?
    • 여진족 데리고 다닌다고 다 여진족이라는 논리대로면 고려시대의 유금필도 여진족들에게 대추장으로 추대되었고 이징옥은 여진족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시도했으니 여진족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야인들은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룩한 역사와 경험이 일천한 탓에 일신의 무력에 경도되어 굴복하는 경향이 컸을 뿐이며, 이성계 개인의 무력은 충분히 여진 부족장들을 압도할 수준이었다. 어차피 사료상으로도 여진족들이 전주 이씨 일가를 동류로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구리까지 놓은데다가 그렇게 도망간 이춘을 알동 사람들이 따라 내려왔다는 대목으로 간단히 반박된다. 정작 그 동북면 여진족들 중에 이성계를 따라 한국계 왕조에 완전히 정착한 것은 이지란 하나였다.
  • 순수 농경지역인 전주 출신의 목조가 북방으로 이주한 후 금방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지위를 원황제에게서 하사받는데 뜨내기에 불과한 목조에게 뜬금없이 고위직을 내린 것이고 이런 사실을 믿기 어렵다?
    • 다스리는 영지와 영민이 많은 세력가이자 실력자라서 그 영민들을 관리하라고 천호장 지위를 받는건 것이므로 농경이고 유목이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게다가 이 역시 사료의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안사는 삼척 시절부터 무리를 이끌고 왜구와 몽골의 침략을 막은 공적으로 고려 조정에서도 의주병마사 직함을 내릴 정도로 의주(원산)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래서 원에게서 줄기찬 러브콜을 받아 귀부하여 천호장과 다루가치직을 받은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덜컥 항복하고 천호장이 된 것이 아니다. 한양 조씨 집안은 아예 귀부하고 쌍성총관 자리를 먹었는데, 이런 논리면 한양 조씨도 여진족 집안이 된다. 어차피 정복자인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인이건 여진족이건 한인이건 색목인이건 간에 자기들보다 아래인 것은 매한가지이며 그저 각자의 능력과 세력이 더 중요한 고려요소였을 뿐이다. 반면 터줏대감인 여진족들은 이 굴러온 뜨내기에 대해 분명히 보복을 가해 내쫓기까지 했다.

  • 몽골을 비롯한 중세 동북아의 유목부족들은 대개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각자의 상속분을 챙겨 분가한 이후에 막내가 아버지의 남은 재산 모두를 상속받았다. 그러므로 태조와 태종이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가 아닌 막내에게 양위한 점은 몽골 등 북방민족의 일반적 풍습과 같다?
    • 실록에 이미 답이 나와있다. 처음부터 막내인 의안대군을 책봉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교국가에서 그럴 수도 없었고. 실록에서 태조가 먼저 세자로 밀었던 건 무안대군 이방번이고 그는 신덕왕후의 입장에서는 장자였다. 안변한씨를 왕후 시호도 주지 않을 정도로 홀대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방번에 대해 '적장자' 대우를 시도했던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 첫째, 고려는 폐쇄적인 문벌에 기반한 세습 귀족 계층이 주도하는 국가였으며 철저한 계급 체제를 갖추고 있었므로 세습 문벌 외의 잡상인이 족보를 살 수도, 산다고 귀족 행세를 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가문의 방계나 인척, 지인들은 가짜 귀족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챌테니. 이 귀족이라는 건 악명높은 음서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후대 조선의 양반과는 궤를 달리하는 극도의 폐쇄적 집단으로 혈통이 결여되면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진입이 불가능한 이너서클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집안은 이미 쌍성 시절부터 고려 조정에 음서로 출사를 해왔다. 도조 이춘의 동복형 이송,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 등. 사촌형 이천계 역시 이자춘 부자보다도 먼저 고려에 귀부했다. 이는 쌍성 시절에도 이성계 집안이 고려 조정과 연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이성계 집안에 명예직 벼슬을 꾸준히 수여해왔기 때문이다. 여진족설은 여기서부터 이미 박살난다. 이너서클 귀족집단들이 고려인도 아닌 여진족에게 음서 자리를 내줄 리가 없다. 이지란의 아들들은 음서로 출사한 정황이 보이나 이는 이지란의 가계가 완전히 귀부한 이후의 일이다. 또한 이성계 집안의 계보에서는 목조의 할머니[1]가 의종~명종대의 명재상 문극겸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모계가 부계 못지 않게 중요했던 고려 사회 분위기에서 당대의 명문가인 남평 문씨 문중은 여진족이 자기 집안 외손이라고 주장하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족보의 매매나 위조는 활자와 인쇄술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면서 족보의 간행이 활발해서 개나소나 돈만 있으면 족보를 한 질 뽑아낼 수 있게 된 조선후기의 이야기지, 이도 저도 해당되지 않는 고려시대에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때 최고의 권신이었던 정중부이의민, 김준, 이인임도 집안 내력을 뜯어고치지는 못했다. 이인임은 그래도 원간섭기 초기인 충렬왕대에 학문을 닦아 일어난 가문이라 그렇다 쳐도 정중부는 묶여서 개경에 보내졌다고 기록될 정도의 흙수저였고[2] 이의민이나 김준은 아예 천민이었으니 권력 잡으면 충분히 족보 뜯어고칠 만했다. 후에 정선 이씨 족보에서 베트남 왕족 출신이라고 기록해놓긴 했지만 이건 이의민이 죽고도 30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이성계 집안이 잠시 고려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순간은 있었으나, 그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기에 몇촌만 거치면 충분히 족보의 교차검증이 가능한 상태였다.
  • 둘째, 고려는 수백년동안 북방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저항하면서 확고한 민족 의식이 자리잡은 일종의 민족 국가다. 이 때문에 한국은 '민족은 근대의 발명'이라는 현대 서양 학계의 주류설을 완전히 뒤집는 사례로 엄청난 골칫거리다. 때문에 고려는 북방 야만족에게 개방적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야만족 출신이 주로 노비나 백정 계급으로서 천시되는 상황에서 여진족 나부랭이가 출신을 숨기고 귀족 행세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도전은 모계가 노비 출신이라는 의혹만 제기되었음에도 정치 생명은 물론 일신의 생명까지 끝장날 뻔 했었다. 애초에 황제에게 천호장 직위를 받았다면 이미 원나라 조정에서도 그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거나 최소한 명문가로 인증한 것이다. 다만 세력이 커진 도적집단을 초무하여 관직을 내리는 경우는 존재했다.. 중국 역대왕조에서 군대로 쓰기 위해 도적집단을 사면하고 군벌로 들여 쓴 경우는 흔하다. 원나라에선 심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말았다를 반복한 장사성에게 태위라는 삼공(三公)의 벼슬까지 내린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는 초기의 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승계 문제로 계모와 다투면서 아예 직접 원 조정의 공인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이미 고려 지배층들도 모두 알고있을 것을 속일 방법은 없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쌍성 총관부의 한양 조씨들이 증인이다. 이성계의 가문이 여진족이었다면 적어도 원나라 시절 쌍성 총관부에선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역사서 어디를 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이성계가 출사한 이래 즉위하기까지 그와 대립하던 이들이 이인임, 조민수, 정몽주 등 한둘이 아니었고, 반면에 이성계를 지지한 것이 반몽주의를 내세운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이성계의 혈통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면 반대세력들이 "저새끼 여진족" 한마디로 정치생명을 끝장낼 수 있었음에도 누구도 이를 이용해먹은 적이 없다. 또 이성계가 이 정도로 본인부터가 혈통에 약점을 지닌 상태라면 폐가입진이라며 감히 왕실의 혈통을 문제삼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사망하고 신도비를 세울때 조상의 이력을 명기하는 신도비문을 고려말 당대의 최고 석학인 목은 이색이 은쾌히 작성하고 자신의 문집에도 기록해 놓았다는 것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 셋째,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신천 강씨(신덕왕후)나 성주 이씨(이인임 집안) 등의 귀족 신분과 혼사를 트려면 당연히 같은 고려인 귀족급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크다한들 당시에 전주 이씨 일가가 고려인인지도 확실치 않은 북방 군벌 나부랭이였다면 고려 중앙 정계의 귀족들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들어온지 오래된 오늘날의 일본에도 부라쿠민 집안에서 천황가나 정치인 가문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고 상류층으로 편입하는 것이 관습상 불가능에 가까운데, 수백년 전의 고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여진족 출신임이 확실한 이지란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나는데, 그나마 개경에 따라와 출사한 이지란도 이미 시집을 두번이나 갔고 그나마도 한번은 시집갔다가 뭔가 사고를 쳐서 쫓겨난 여자를 선심쓰듯 넘겨받는 처지였다. '의를 상하게 해서' 쫓겨나 이인임에게 뇌물을 주고 무마했다는 것을 보면 어떠한 범죄적 사건일 가능성도 있다. 그나마 이지란은 처가 누구인지도 기록되어 있고 후에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을 후처로 맞이하기라도 했지, 명색이 검교직일지언정 문하부사까지 간 이원경 같은 경우는 아예 누구한테 장가갔는지 기록도 없다(...). 반면 이성계는 전통의 명문가인 신천 강씨 집안의 장녀를, 그것도 자기 아들보다도 어린 계처를 얻었으며, 그 숙부인 강윤충과 사촌 강우도 이자흥의 사위들로 이성계에게는 사촌매형이 되었다. 이는 신덕왕후의 친가인 곡산 강씨, 외가인 진주 강씨 모두 이성계를 비롯한 쌍성 전주이씨 가문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집안의 운명을 걸었다는 것으로서 이성계의 가계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덕왕후는 일반적으로 곡산 강씨로 설명하는데, 곡산 강씨는 신덕왕후의 아버지인 강윤성 대에 신천 강씨에서 분적된 가문으로 현재는 다시 신천 강씨의 일원으로 합쳐졌기 때문에 그냥 신천 강씨 집안으로 봐도 무방하다. 신천 강씨는 무려 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집안이며,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모 집안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즉 이성계를 비롯한 쌍성 전주이씨 가문은 비교적 최근에 흥한 신흥족벌을 운좋게 잡은 것도 아니고, 족히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진짜배기 명문가와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이성계의 형 이원계는 더욱 대단(?)해서, 개성 김씨[3], 경주 김씨, 남평 문씨 집안의 여식들을 줄줄이 처로 맞이했다. 심지어 삼배인 남평 문씨는 바로 문익점의 딸이다. 이복동생 이화 역시 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초부터 내려오는 명문가인 교하 노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1] 이린의 아내[2] 다만 저기서 묶였다는게 실제로 죄인처럼 포박당해서 올려보내진게 아니라 정중부 본인은 원하지 않았던 개경으로의 징병을 당했다는 의미의 관용어일거라는 의견도 있다. 하여간 적어도 강제징병을 당할 정도의 흙수저인 건 맞다.[3] 의성 김씨에서 문종조에 분적한 집안. 의성 김씨는 경순왕의 후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