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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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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말라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나

- 상시가(傷時歌), 인조실록 1625년 6월 기사에서 발췌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어진 덕화로 다스리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했고, 시행하고 다스리는 방도는 형정(刑政)의 말단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두서가 없이 어지러워도 가닥을 찾아 다스리지 못하며, 번다하고 과중한 부역이 중첩으로 나오는 것은 대체로 백성들의 신의를 잃은 데서 나온 처사로써, 천심(天心)을 어기고 인심에 거슬린 것이 많으니, 위란(危亂)의 조짐일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어진 마음과 어진 명예를 지니셨지만 선왕의 도와 정사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은혜를 베푸는 방도가 넓지 못하고 아래에서 덕화를 이어받아 널리 교화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신은, 전하께서 마음의 천리를 다 밝히지 못하시고 위임한 신하가 혹은 적임자가 아니기도 해서 치도(治道)의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여깁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대중을 잃고서 오래도록 국가의 번영을 누린 경우는 없었으니, 이괄의 역변 때에도 조금은 증험이 되었습니다.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던 날 따르는 백성이 없었으니, 어찌 백성들만의 죄이겠습니까. 삼가 비교하건대, 백성은 창자이고 나라는 몸통입니다. 창자가 병들면 몸통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고, 외부로부터의 병의 감염이 바로 그러한 때를 타게 되는 것은 형세나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 인조실록 1626년 12월 기사, 사어 강학년의 상소 중 일부





노추(奴酋)는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지금 명나라는 곧 2백여 년간 중국을 통일해 다스려온 주인인데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한번 요동과 심양 한쪽 땅을 잃었다 하여 문득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귀국이 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옛날 왜구가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가도입명) 중국을 범하고자 했으나 우리 나라가 의리로써 배척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단서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구는 우리 나라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백성을 잔멸(殘滅)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계책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뒤에 수길(秀吉)[1]

이 죽자 그 뒤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는데, 머리가 떨어져 죽은 자들은 모두 전날에 우리에게 독기를 부렸던 장사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씨(源氏)(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평씨(平氏)(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축출하여 멸망시키고 우리 나라와 통호(通互)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성한 것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시대보다 배나 됩니다. 천도(天道)가 전쟁을 싫어하며 선을 돕고 악을 벌(권선징악)한다는 것이,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2]

(중략)

그리고 천심이 매인 바는 실로 백성에게 있는 것이니, 설사 우리 나라가 의(義)를 지키다가 병화를 입어 그 병화가 비록 참혹하더라도 원래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반드시 떠나지 않고 국명도 혹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3]

지금 귀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민심이 반드시 떠나가고 나라가 따라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접한 것으로 어둡지도 민멸하지도 않을 도리로서, 서생(書生) 소자(小子)가 간책 위에서 주워온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6월 17일







김류가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는데, 지금 어떻게 섬과 통하여 다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류가 도체찰사(道諦察使)[4]

임무를 담당하여 만약 국가의 병력으로는 그들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찌 그때에 기미책을 극력 주장하지 않고서 국가가 망하고 난 뒤에야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린다.’고 말을 하는가. 아, 당시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던가. 신진 인사들이 국가의 대사를 경솔하게 논의한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주장(척화론)을 취사 선택한 자는 또 누구였던가.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9일




  • 1636년 4월 청 측이 나덕헌과 이확 그리고 호역 박인범에게 12월 25일을 기한으로 최후통첩을 보내고, 조선인 피로인과 병사들을 활용하여 대명전쟁에서 홍타이지의 동생 아바타이(abatai)가 전사했다거나, 청 측이 대명전쟁을 준비하며 조선과는 화친을 바라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자, 인조는 이에 헛된 희망을 가지고 출병이 임박했다는 첩보들을 사실상 무시했다.[5]
  • 청군의 병력 이동에 대한 관측 / 예측에 실패해서 더 안전한 남쪽 변방이나 강화도가 아닌 애매한 곳에 중앙정부가 피신하게 됨
  • 피신처인 남한산성에 군량이 부족한 탓에 장기 농성이 불가능했음
  • 군대의 요직을 김자점, 장신, 김경징과 같은 무능한 이들이 차지한 결과[6] 청군이 쾌속 진군하고 두 왕자가 피신 중이던 강화도가 함락됨
  • 전반적으로 방어군이 지휘 체계 문제보급 미비 등으로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함




김류: 알다시피, 의주의 상황은 예전과는 달리 지킬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혹시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병력과 물자가 채워질지도 모르겠어요.

인조: 후방에서 올려보내는 병력이나 의주 자체의 병력이나 모두 줄어들고 있으니 지금은 의주의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기 힘들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같은 식으로는 안 될 거 같고, 풍년이 들어서 여유가 생겨야 그곳의 전력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다.

김류: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어차피 지킬 수도 없으니) 의주성 보수 공사 멈추고 정예 병력도 보내지 말고 (여력이 생겨서 의주를 확실히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어) 보수 공사가 재개되면 그때 병력을 올려 보내면 되지않을까요?[7]

승정원일기 53책 (탈초본 3책) 인조 14년 9월 4일 을사 8/29 기사



의주성 가까운 곳에 성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고, 고려강감찬이 쌓은 것을 1628년 이후에 고쳐 쌓은 백마산성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 적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때에 최전방에 방어 거점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있는 것조차 제대로 관리할 여력이 없다고 포기하네 마네 소리가 나오는 것은 제대로 된 국방이라 볼 수 없다.[8]

병자년 11월 중순, 그야말로 병자호란 코앞의 시점에서도 인조 정권은 여전히 의주를 방치하고 있었다.[9] 설사 나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성 수리와 병력 공급이 재개되었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충실히 방어 시설을 구축하며 군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겠는가. 의주 같은 곳이 그 지경이었으니 그 전쟁에서 조선의 3도가 유린당했던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결코 '운'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다.

의주 수비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기록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 인조 정권의 전반적인 전쟁 준비 상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접반사 이필영(李必榮)이 치계하였다. "도주하여 돌아온 한인(漢人) 왕언과(王彦科) 등이 말하기를 '노적(奴賊; 청)은 10월 1일에 이미 소굴로 돌아갔는데, 서쪽을 침범했을 당시 장령(將領) 2명이 전사했으며, 겨울쯤에는 동쪽 고려(高麗; 조선) 지방으로 가려고 지금 말을 먹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11월 4일 갑진 1번째 기사


동지경연 이성구(李聖求)가 나아가 아뢰기를, "돌아온 호역(胡譯)의 말을 들으면 저 도적이 군대를 동원시킬 낌새가 있다 하니, 외방(外方)의 병마(兵馬)를 국경에 불러모아 몇 달 동안 변고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역이 어떻게 오랑캐의 실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성구가 아뢰기를, "이미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니 민망스럽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어할 준비를 하고자 하면 형세가 이와 같고 기미(覊縻)할 방책을 세우고자 하면 명사(名士)의 무리가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11월 12일 임자 2번째 기사


비국이 아뢰기를, (중략) "인범(仁範) 등이 격문을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적의 발동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있을 것입니다. 얼음이 언 후에 불의의 변고가 있게 되면 하도(下道)의 군사를 징발하는 일은 매우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이미 삼남(三南)과 강원도로 하여금 정초군(精抄軍) 1만 8천 3백여 명을 단속하여 대기하게 하였으니, 지금 경상 좌·우 병사와 전라·공청도 병사, 강원도 춘천 영장(春川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오는 12월 10일에 각각 필요한 무기를 가지고 경상(境上)에 진주(進駐)하여 해빙되기 전까지 변고에 대비하게 하고, 경유하는 각 관아에서는 산료(散料)를 공궤(供饋)하고, 국경에 유주(留駐)하는 기간은 그 본읍으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여 계속 공급하게 하며, 또 머물러 있을 때는 항시 조련(操練)을 시켜 위기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뜻을 선전관을 보내어 하유하소서."라고 하니, 답하기를, "서둘지 말라[姑徐]." (후략)

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11월 13일 계축 1번째 기사


홍타이지가 전쟁 계획을 내부적으로 공개한지 한달만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청의 출병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입수됐으나, 인조는 홍타이지의 가짜 출병 기한에 놀아나서 해당 첩보들을 모두 안일하게 넘겨버렸다. 더군다나 이성구의 경고에 대해 인조는 호역 따위가 무슨 남의 나라 실정을 제대로 알겠냐고 힐책하기도 했다가 이성구로부터 일침을 놓였다.

그러자 인조도 쪽팔린 건 알았는지, 더는 침략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꾸역꾸역 방어 준비를 하는데(그럼에도 이성구 말대로 국방 역량 강화엔 다들 무관심하고) 여기에 입만 산 선비란 놈들조차 화친을 결사반대하는 현실을 개탄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이 지경이 되도록 제대로 된 전쟁 준비도, 적극적인 유화책도 마련하지 못한 총책임자인 인조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으로 아랫것들만 비판하기 시작했다.[10][11]

사실 병자호란 당시 보인 조선군의 지리멸렬한 모습은 북방의 정예 병력들이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가 토벌당해 빈집털이에 취약해진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등의 주장도 있다. 이괄의 난이 남 탓인가는 넘어가더라도, 그때 날아간 북방의 공백을 10년 동안 복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조가 군사 문제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서툴렀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병자호란 때 황해도에 2만이 넘는 정예군이 있었고, 이밖에 8만 가까운 속오군이 구성되어 있었다지만, 이들이 정말 건실한 군대였다면 충분히 피난할 시간을 벌어주어 황급히 차선책으로 남한산성으로 도피했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신이 생각건대, 온 나라의 정병과 무사가 모두 여러 대장의 수하에 모여 있는데, 일이 없으면 농장을 감독하는 역사를 하고 일이 있으면 호위(扈衛)로서 편안함을 취하는 곳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묘 호란에 강도로 피란갔던 일에 대해서는 식자들은 지금까지도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날쌘 군사를 모아 섬속에서 늙히면서 한 명의 병사나 한 마리의 말을 싸움터에 내보내지 않고 수백 보 밖에서 적의 기병을 엿보면서, 내란(內亂)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켜 그것으로 자기네의 목숨을 보전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와 휴척을 함께 할 훈신들은 부귀가 이미 극도에 이르러서,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은 없는 것이 으레 이와 같으니, 급한 때에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32권, 숭정 9년 3월 2일 정미 2번째 기사


이는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과 더불어 양대 척화파 거두였던 부제학 정온이 위의 용골대 귀국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인조에게 올린 상소다. 정온은 훈신(勳臣) 즉 공신 세력이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으로 부리며 야전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현실을 규탄하고 있는데, 그 훈신들 뒤에 누가 있는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알 것이다. 실제로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 등 반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4명은 군관을 각각 400명씩 거느릴 수 있었다. 당시 이귀야 죽고 없었지만 아직 나머지 셋은 살아있던 데서 보면(이후 이서는 병자호란 도중 사망) 무려 12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공신들의 사병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는거다.[12]

그때 사헌부도 훈국(訓局) 즉 훈련도감에서 양성한 정예 병력들이 야전을 회피한다며 비슷한 지적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인조의 반응은 한 마디로 "니들은 나대지 말라"는 거였다.

설상가상으로 인조는 공신 일가들을 챙겨준답시고 실력있는 인재들 대신 3류들이 중책을 맡게 놔뒀고, 심지어 최고위급 지휘관들조차 하나같이 무능하고 형편없는 인물들로 채웠다. 인조가 도원수, 부원수 급으로 선임한 장수가 장만, 이괄, 김자점 등인데, 이 중에서 유능하다고 할 만한 자는 장만과 이괄 정도였으나 이괄은 인조에게 버려졌다고 반란을 일으키고 죽었다. 물론 이괄 역모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인조는 자기 사람인 이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아들을 붙잡는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놓고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지휘하는 아버지가 가만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인조가 비밀리에 이괄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은 반쯤 인조가 부추긴 사건인 셈이다. 믿을 거면 확실히 믿고 내칠거면 확실히 내쳐야 했는데 어설프게 행동해놓고 자기가 바라는대로 되게 해달라고 한 셈.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말 그대로 무능 그 자체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노먼 다이크 중위마냥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아, 청군이 국경을 넘은 지 단 7일 만에 한성에 도달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13] 이게 더 문제인데 노먼 다이크는 장교 중 초급장교인 위관인 반면 김자점은 현대로 치면 4성장군급 합참의장이었다는 사실이라서 더 심각한 것이다.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구축해 둔 2만 정예병을 전장에서 이탈시켜 전력 보존만을 꾀했던 것이다. 게다가 정찰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의 전시 수도 격인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강도유수 장신도 무능했는데 그가 뭔가 결정을 내리긴 했는데, 그게 싸우자는 게 아니라 도망가자는 거였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싸우기라도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원래대로라면 강화도 수비에 책임조차 없었을 충청수사 강진흔. 허나 33척의 대함대를 지닌 장신이 도망가던 마당에 고작 7척만을 지휘하던 강진흔이 전세를 뒤집는 건 역부족이었다. 하다못해 이 상황에서 봉림대군 일행이 남쪽으로 도망칠 시간이라도 제대로 벌렸다면 조선은 계속 항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필 그 임무를 맡았던 건 가족마저 찌질하게 버리고 도망친 김경징이었다. 이 두놈의 기가 막힌 활약 때문에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해서 손쉽게 조선군을 격파하고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 원손 등 왕실의 핵심 인물들과 여러 대신들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중앙정부는 항전 의지가 완전히 꺾여서 성 밖으로 나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치욕을 겪는다.

광해군은 외적 방비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국경에 집중시키고도 국가 예산을 궁궐 짓는 데 낭비해서 국방 강화를 스스로 방해했고[14][15], 인사 관리에 실패해서 훈련도감 장수들이 능양군과 내통하게 만들어 끝내 권력을 잃은 것처럼, 인조 역시 청의 침략에 대비해 뭔가 이것저것 하긴 했는데 본인이 실토한 바와 같이 전투 준비 태세 수준은 형편없었고, 결정적으로 자질이 없는 인물들을 중요 직책에 임명해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따위로 형편없는 인사는 심지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김경징과 장신은 사약으로 죽게 해주는 자비를 줘놓고, 정작 진짜로 부족한 전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싸웠던 충청수사 강진흔은 갑곶 수비를 맡았던 변이척이라는 장수와 함께 참수형으로 처형해버렸던 것이다. 강진흔이 저 둘과 달리 반정공신과 별다른 인맥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유야 뻔하다. 그 이유가 인조 본인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이건, 이따위 전후처리는 신상필벌에 완전히 실패한 행태로써 난세에 최악의 인재 운용 방식이었다. 도망간 놈들은 덜 고통스럽게 죽게 해주고, 사력을 다해 싸운 애국자는 잔혹하게 처형해버리는데 이런 놈을 누가 군주랍시고 옹위해주고 싶을까?

이러한 인사 실패는 단순히 '인조가 인재 보는 눈이 없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사실 인조도 저 작자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철저히 인조가 자신에게 왕위를 선사하고 보전해 준 사람들에게 베푼 '보은 인사'였다.[16] 위에서 언급한 정예 병력의 야전 회피 문제도 결국 훈신들의 군대 사유화가 빚어낸 것이었다. 결국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보인 한심함은 인조 반정으로 형성된 공신 세력이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구조적 문제'의 결과물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 '개인'이 휘하의 대신들에 비해 특별히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다른 혜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12월 13일에 청군이 안주에 이르렀다는 김자점의 장계를 받고도 적이 깊숙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강화도 파천을 유보한 것, 대신들이 청하는 세자 분조를 거절한 것 은 분명한 실책이다.

결국 인조는 런조라고 불리는 선조나 런승만이라 불리는 공화국 체제 이후의 이승만과도 비교되며 그 도망도 제대로 못 쳤다고 '런도못한조' 등의 별명이 붙으며 까이고 있다(...)

1. 비정한 군주 - 강빈 옥사[편집]


당대에 가장 비판받았던 인조의 실책. 그것도 집권 당시 이해관계가 비교적 일치하던 서인 세력이 대놓고 까던 정책이다. 실록을 보면 사관들의 비판이 가득하다.[17]

현대에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상당부분 부정되지만, 그렇더라도 소현세자가 부왕에게 핍박을 많이 받고 일찍 죽은 것이 사실이다.

또 소현세자가 병사하자 원칙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장남이 세손이 되어야 하나 이걸 무시하고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으며, 소현세자의 정실 민회빈 강씨까지 역모를 꾀했다면서 세자빈을 폐한 연후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강빈의 시녀들을 마구 국문해 10명 중 7명이 죽어나갔는데도 1명도 끝끝내 시인하지 않자 추측, 단정과 욕설로 가득 찬 비망기를 내린다. 결과적으로 이때 유일하게 인조의 정책에 동의하던 권신 김자점의, 효종 초의 김자점 역모 사건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원인은 청나라의 압력에 더해, 세손이 어린 상황에서 실권자가 될 다혈질인 강빈의 성품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세손들은 안 된다 "라는 논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인조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기 힘들다는 것을 예상한 것으로 보이며(4년 뒤 실제로 사망한다.), 강빈 사사 당시 고작 11살에 불과한 장손 이석철이 어머니인 강빈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경계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단 인조가 주장하는 혈서가 사실이라는 전재하에)[18]인조는 강빈이 죽기 전에 "소숙[19]조씨가 이 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자녀들과 시비들에게 남겼다고 했는데, 어쩌면 저주가 담긴 유언을 남긴 강빈을 보면서 "죽어 마땅한 년이었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실제 조선 왕조에는 인수대비, 폐비 윤씨, 문정왕후라는 쟁쟁한 사례들이 있었다. 좀 더 설명하면, 인조에겐 새 중전 장렬왕후가 있었으나 장렬왕후가 민회빈 강씨보다 13살이 어려, 후에 대비로 승격할 가능성이 높은 민회빈 강씨가 인수대비나 문정왕후처럼 강경하게 나설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민회빈 강씨가 저런 유서를 남겼다는 건 증거가 전혀 없는, 인조 혼자만의 독단적인 주장이며 정작 이 저주 유서를 신하들이 정식조사하려고 하니 인조가 틀어막기까지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강빈의 수사와 사사 자체가 인조 혼자만의 독단적인 수사로 진행된 일이며 신하들의 개입을 강경하게 막아세우고 혼자서 밀어부친 결과물이다. 만약 강빈이 저와 같은 유서를 남겼다면 이는 인조에게 있어 엄청난 명분으로, 신하들도 사형을 반대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런데 정작 믿는 신하들은 없었다.

더불어 이 혈서 유언를 근거로 강빈의 어린 아들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려 한명만 빼고 죽도록 방치해두었다.

주요 명분이 된 소용 조씨의 저주 사건도 소용 조씨의 자작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위의 저주 사건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조는 이 사건의 배후도 강빈이라 주장했다. 당시 인조는 이미 강씨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감금한뒤 바깥과의 교류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상식적으로 강빈이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독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없었다. 애초에 수라상에서 독이 발견됐다면 당연히 음식을 만든 궁인들부터 심문하는게 순서인데 인조는 심문도 하기 전부터 강빈이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인조의 행동은 사관들에게도 대차게 까였다. 실록에서는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라고 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신하들이 당태종의 일을 들고 동정론을 펴자 인조가 '당 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씨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비답하였고 다시금 신하들이 '강빈이 비록 전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빈(嬪)으로 있을 때는 소현(昭顯)의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라 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윗전을 모욕했다며 쌍욕을 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인조실록》 24년 2월 9일[20]

.


이 발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몇 안되는 욕설사례다. 물론 조선의 왕들도 사람인지라 욕을 하기는 했다. 정조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맘에 들지 않는 신하를 가리켜 '호로자식'이라고 한 정도가 기록에 남아 있다. 경종도 영조가 연루된 역모사건과 관련해서 당시 세제였던 영조의 면전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런 욕설을 공문서인 실록에 그대로 싣기는 어렵기 때문에 더벅머리 선비 정도의 순한 욕설만 싣거나, 주로 '임금께서 대노하여', '차마 듣지 못할 전교' 등으로 필터링한다. 이렇게 왕이 직접 "개XX"라 욕한 것이 사관에 의해 여과되지 않은 사례는 인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를 감안하면 사실 인조의 저 발언도 '순화'되었거나 듣던 사관들도 빡쳤을 가능성이 크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선비들 상당수가 '당연히 소현세자가 장자고 그의 후손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시각을 가졌고 이 때문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에 대한 동정 여론이 강했다. 사관이 이런 쪽으로 깐깐하고 원칙주의자인 선비였다면 나라의 국본을 함부로 다루는 이런 일은 설령 왕이라 해도 충분히 부당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조가 자기 며느리 상대로 개새끼라는 패드립을 쳐가며 광분했고, 이런 사실 때문에 그가 독살을 지시하진 않았다고 해도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죽였네 하는 등, 야사의 이야기에서도 좋은 소리 못 듣는 임금 중 한명이다.

당장 이러한 음모론을 제기한 것도 인조 지지세력서인들이고, 이들이 대놓고 사초에 적어 놓았을 정도다.[21] 그리고 인조의 이런 행태는 양반가 전체에 엄청난 반감을 사게되는데 사실 봉림대군의 세자 계승은 성리학적 명분 쪽으로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국토파괴, 혼란스러운 청나라의 관계, 어린 원손(이석견)과 늙은 인조의 나이 등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만했고, 양반들에게도 설득할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설득이나 회유는 고사하고 오히려 오만 무리수에 누명을 씌워가며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여버린 덕분에 그나마 봉림대군의 세자 계승에 온건적이었던 인사까지 모조리 반감을 가지게 만들어 버렸다.

그 후폭풍은 당연하게도 아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효종은 죽을 때까지 정통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손자 현종 때는 송시열 등의 '체이부중'론으로 이후 예송논쟁이 벌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으며 숙종 초까지 예송이 이어졌다. 자기 욕심으로 자손 3대가 피해를 본 셈이다.

왕비는 2명으로 능양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 그녀가 1635년 늦둥이를 낳다가 사망하고 3년 후 1638년에 간택된 장렬왕후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로 불리었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이나 어렸다. 나이 차이만 따지면 딱 인목대비-광해군 시즌 2이다. 그러나 인조에겐 장성한 적자가 셋이나 있었고, 장렬왕후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인조 사후 그녀는 궁궐에서 국왕들과는 별 충돌없이 지냈다.

그러나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 역사상 최대의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바로 예송논쟁이다. 물론 예송논쟁 자체에 장렬왕후가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고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이자 내명부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으므로 왕비가 필연적으로는 필요하긴 했다. 전쟁 피해를 수습하고 나서 할 일이 줄자 노는 데 집중한 점도 까인다. 궁 내에 연못을 파고 누각들을 화려하게 꾸미고 후원에서 노는 걸 좋아했으며 시녀들이 드는 가마를 타고 다니다 몇 번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인조는 광해군의 패륜적인 모습을 반면교사 삼겠다면서 오히려 자신은 제대로된 명분없이 광해군보다 더한 패륜을 저지른 내로남불의 군주가 되었다.


2. 총평[편집]


앞선 정권에서 수십년에 걸쳐 정치세력들이 서로 싸우다가 공멸했던 시점에서 운이 좋은 정치세력의 얼굴마담으로 즉위했지만, 청나라의 침공 직전이라는 최악의 시대를 장식한 강운과 악운을 지닌 암군이다.[22]

그러나 인조라는 인물은 성격 자체는 무난하여서, 평범한 고위층 자제가 하루아침에 복수심으로 왕이 되었다가 수십년 동안 고생한 이후 말년에서야 그럭저럭 왕으로서 경험과 업적을 쌓아온 사례라고 볼수있다. 즉 인조는 의외로 평범한 애국청년이었지만, 그런 평범한 애국청년 도련님[23]이 위기사태에 왕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현대에는 선조와 광해군을 내세우며 현대인들이 각자의 정치이론을 주장하고 있는 탓에, 인조는 까일 인물인 것도 맞지만 별별 저주와 욕설까지 받으며 다른 왕을 옹호하기 위한 방패로 남용되는 인물이다. 물론 전쟁을 말아먹은 인조가 까이는 것은 백번 당연하다. 그러나 폭군들이 일으키는 정치싸움의 결말은 인조 같은 뜬금없는 왕의 탄생이라는 교훈을 보여주는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상 이전 정권들의 정치파국에서 탄생한 왕이 인조이기 때문이다.[24] 그런 성격 덕분에 국내외의 혼란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정말 무난한 업적들이 있는 편이다.

인조는 늙어서야 왕으로서 뭔가를 각성했을 정도로 청년 시절에는 준비가 전혀 안 되었고, 그 기간이 용서받기 힘들 정도로 괴악하여 두고두고 비난받지만, 그 뒤로는 정말 무난한 상식인이 왕이 된다면 국가를 위해서 시행하고 후대를 위해서 남겨줬을법한 업적을 이뤘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정치적인 무능력으로 인한 암군, 말년에는 누명으로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을 사지에 방치한 막장짓[25]으로 비판받아 그나마 있던 업적들도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다.

당대 사람들도 인조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인조를 이용해서 조선을 재건하는 수단으로 써먹었다. 당장 아내인 인열왕후부터가 내조 하나로 불안정했던 인조의 초중기 통치도 해내게 만들었고, 그런 인열왕후가 사망하고 난뒤엔 인조를 다독이든지 해서 제어할수 있는 인물이 아예 없었기에 인조의 불안정함이 더욱 가속화되어서 강빈 옥사 등의 실책을 말년에 저지르게 된것이다. 그럭저럭 인조는 정말로 맹물 같은 성격 덕에 나름 쓸모있는 왕이었다. 인조의 초기 통치는 피끓는 애국청년으로서 아버지와 청나라에 분노하는 감성으로 거병했던 것 뿐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치에는 초보였다. 하지만, 인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적들에게 물자를 삥뜯기더라도 그만큼의 산업기지와 인구수를 더 많이 늘린다는 단순무식 하고 당연한 정책을 진행하여, 왕조의 수명이 몇세대 더 늘어나도록 물리적인 재건에 도움을 주었던 왕이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2] 실상 전쟁을 일으킨 너희 청나라가 악이고 조선과 명이 선이며, 도요토미가 그러했듯 너희도 우리한테 찝적대면 하늘의 뜻대로 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3] 이 부분 때문인지 청은 조선을 침공한 후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온 것은 다 너네 임금 때문이다.' 라는 내용을 적는다. 즉, 이 당시인조가 보낸 도발성 격문을 읽고 그대로 받아쳐준 셈.[4] 도체찰사라 하면, 종이품의 고위 관직으로서 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군 전체를 군령으로 통솔할 수 있는, 현재로 따지자면 합참의장 정도 되는 파워를 가진 군의 최고 사령관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도체찰사라는 직책이 결코 가볍지 않다.[5] 구범진(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東洋史學硏究》 150.[6] 이괄의 난의 원인이다. 이괄을 2등으로 밀고 1등에 앉힐 사람이라면 임경업쯤 되는 재원이어야 했지만 문제는 이괄보다 못한 놈들에게 이괄보다 높은 계급장을 쥐어준 것이며 이괄은 그게 빡쳐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7] 이 대화 앞에는 안주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이 대화 다음에는 최명길이 "기어이 척화를 하려거든 의주를 어떻게든 사수해야지, 북방 방어 거점이 안주 하나여서는 안 된다. 기왕이면 정부가 의주까지 나가서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투 태세를 취하자."는 요지의 진언을 올렸다. 최명길의 말에 인조는 깜놀해서 "너님이 의주를 반드시 지키자는 건 너무 막나가는 말 같다"고 했다.[8] 해당 회의 기록은 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백마성의 병력과 물자를 옮기면 의주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김류의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식 대책에, 인조가 "지금 대책을 마련해 놓은 것도 아니면서 말로는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거 아니냐
[今不能預加措備, 而徒曰可守, 豈不異乎]
"며 황당해 하는 반응으로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1. 의주를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대책도 없으면서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건 "이상하다"와 2. 의주를 지킬 수 있는 제대로 된 대책이 없으니 지키는 거 일단 "포기하자" 둘 중에 어떤 것이 저 회의의 결론에 가까운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9]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15일 을묘 1번째 기사, 2번째 기사 참조.[10] 이는 인조정권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정통성 있게 왕위를 물려받은지라 나름대로 중립정책을 할 수 있었다지만 인조는 광해군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했고 그 '찬탈'한 명분은 폐모살제와 재조지은이었다. 문제는 폐모살제는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대충 실천에 옮겼는데 재조지은은 명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인조나 인조정권의 수뇌부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괜히 후금-청을 건드렸다가는 우리나라만 망할 거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청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또 재조지은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일이다. 결국 인조정권 성립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인조정권이 그렇게나 청을 건드리진 않으려고 했음에도 인조정권 자체가 청나라에 호의적이진 않은 건 청이나 명이나 다 알았다.[11] 다만, 그럼에도 이것은 후대에도 평가가 좋게 받기가 어려운데 다름 아닌 인조가 나라를 위해 정권을 잡았다기보다는 권력을 위해 정권을 잡았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태생적인 한계여도 누가 보든 간에 청나라를 간섭하지 않고 이것은 명과 청의 싸움으로 두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거기다 광해군의 정책처럼 자신들은 그냥 배후교섭을 통해 청에게 잘해주는 척, 명을 도와 청을 위협하는 정도로 정책을 나아갔어야 하는데 인조는 그저 정치적 명분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그냥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가 나라에 전운을 감돌게 한 것이다.[12] 전쟁에서든 군대에서든 야전은 필히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성웅 이순신도 야전이나 정찰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를 소홀히하면 곤장을 때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거기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야전군 중 한 명이 보초를 서다가 졸자 자신이 대신 서서 그 병사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듯이 야전과 정찰 및 보초는 전장에서 제일 중요하다.[13] 이건 좀 논란이 있다. 김자점이 이후 간신으로 타락한 건 맞는데, 적어도 도원수 시절엔 상식적으로 업무를 봤던 그럭저럭 괜찮았던 지휘관이다. 실제로 병자호란 시기엔 도르곤의 군대를 격퇴해내기도 했을 정도. 자세한 건 김자점 문서 참고.[14] 하지만 국방 강화를 이때 얕볼 수 없는 것이 정충신이 광해군 대의 절반만 해도 후금의 방비를 막을 정도라고 최소한의 조건의 2배 이상의 방어를 해둔 상태였다. 즉 수비전에 필요한 전력은 충분하다못해 넘치도록 해둔 상황이었다.[15] 하지만, 이 공사는 어떻게 보면 왕권강화를 위한 시각도 있는데 흥선대원군경복궁 재건을 보면 왕권 강화라는 목적을 두고 있었다. 즉, 신하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것이 어떻게 보면 서서히 강해지는 왕권에 대해 경계하기 위해서 인조를 추대한 것이고 인조는 자신을 왕으로 올려준 사람들에게 계속 작위를 퍼주다 보니 이 꼴이 난 것일 수도 있다.[16] 패전의 결정적인 요인을 만든 작자들 중 보은인사라고 보기 힘든 건 광주목사 한명욱 정도인데, 이 인간이 내린 멍청한 결정을 보면 그마저도 능력을 보고 뽑았다고 보긴 힘들다.[17] 인조가 죽은 이후 실록을 쓴 이들이 공신들에 비판적이었던 서인 청서파 산림들임은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차자(효종)에 대한 정통성을 빌미로 왕권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는 것. 그러나 동시대에 실시간으로 쓰여진 승정원 일기에도 인조의 땡깡과 그걸 말리려한 신하들의 분투는 명백하게 기록된 내용이다. 즉 이미 동시대에도 인조의 행태는 옹호받지 못하고 있는게 확인되는 부분이다.[18] 후술하겠지만 이 혈서를 처음 주장한 인조 본인이 주장한 자리에서 신하들이 정식조사를 요청하자 조사를 못하게 막아서 신빙성이 의심되는 내용이다[19] 인평대군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많았으나, 후대엔 대놓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저격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후술하듯 애당초 인조가 독단적으로 주장한 것이라면 봉림대군을 저격했다고 퍼트리는게 아귀가 맞는다.[20] 인조 47권, 24년(1646년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2월 7일(갑신) 2번째 기사, 2월 8일(을유) 3번째 기사, 2월 9일(병술) 1번째 기사[21] 실록에서 나온 욕설에 따르면 인조는 스스로를 라고 셀프디스를 한 꼴이다. 사관들이 왕을 개라고 조롱한거.[22] 인조를 옹립한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일으켰을 당시 오래전에 괜찮은 인물들이 숙청당하여 무시받은 세력이었고, 당시의 조정에서는 남인과 소북, 대북이 싸워댔다. 일찍 쫓겨났기에 수많은 인간들이 숙청당했던 개싸움 정치판과 멀어져 재야에 있다가 최후의 승자가 된 세력이 서인들이다.[23] 인조는 정말 평범한 애국청년 고위층 자제라고 밖에는 볼수없는 타입이다. 인조가 즉위했을때 외교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초기에 명나라 만세를 주장했던 것도 전형적인 고위층 청년의 모습이다. 인조의 남동생이 너무나 소문난 천재라서 모함을 받아서 억울하게 처형당할 정도의 재능꾼이었던 것과는 달리, 인조는 정말로 평범한 청년이었다. 다만 그토록 개판이었던 초기 통치를 보면 상당히 열혈스럽고 청년스러운 대사를 많이 남겼다. 무능하지만 의도와 의지는 순수했던 청년이라는 것.[24] 광해군과 북인정권이 일으킨 내치의 파국이 아니었다면, 인조는 애시당초 왕이 될 생각조차 없이 평범한 왕족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100%를 초과한다. 당장에 인조반정도 협력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인조반정에서 이전의 정권을 끌어내린 협력자의 대다수가 국가를 이끌던 중책과 영웅들이었다.[25] 현대의 인조반정에 대한 저평가의 원인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명분 중 하나였던 폐모살제는 반정 당시에는 충분히 공감받을 만한 명분이었으나, 나중에 인조가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저지른 패륜을 잘 알고있는 후대인들 입장에서는 "넌 뭐가 그리 잘났길래 폐모살제를 들먹였나?"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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