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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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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 상서 육수성(陸樹聲)이 대답하는 제사에 , “성지를 받들어보니, 그 나라의 전후 주사(奏詞)를 상세히 황조실록(皇朝實錄) 안에 편찬하여 넣으라 하셨사오니, 새 회전에는 조지를 기다려서 이어서 편수할 적에 더 넣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예부 상서 만사화(萬士和)의 제사에, “조선 국왕의 그 선조의 원통함을 가슴 아파해서 재삼 변명하여 아뢰기에 이르렀다. 다만 전에 이미 명백한 조지를 받들었으며, 제왕의 말씀이 한 번 나오면 미덥기가 사철과 같으니 누가 감히 더하고 감함이 있으리요. 마땅히 그 나라의 전후의 주사(奏詞)를 황조실록에 편찬해 넣는 한편, 그것을 초록하여 사관에 회부하고, 회전 편수를 기다려서 기재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예부 상서 서학모(徐學謨) 등이 말하기를, “만약 회전이 완성되면 곧 나누어 주도록 아뢸 것이니 칙서를 내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17년 만력 12년 갑신에 주청사 황정욱이 돌아올 때에 가지고 온 예부 상서 진경방(陳徑邦) 등의 제사에, “개정하여 편찬한 문사는 어람을 거치지 않습니다. 간행하면 초고를 가려 뽑아서 보일 것이며, 성지를 받들어 그대로 써서 왕에게 줄 것입니다.” 하였고


유홍이 명 나라 서울에 갔는데 예부에서 회전은 어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주기가 어렵다고 하여, 유홍이 꿇어 앉아서 청하기를 마지 않고 땅에 머리를 두드려서 피가 흐르니, 상서 심리(沈鯉)가 여기에 감동되어 갖추어 아뢰어 사신이 오는 편에 부쳤던 것이다.




박영준(朴永俊)·김귀영(金貴榮)·노수신(盧守愼)·김계(金啓)·민기문(閔起文)·유희춘(柳希春)이 모두 승문원에 모이고 영상과 좌상도 이어 이르렀다. 존시사(尊諡使)와 존호사(尊號使)의 문서를 살펴본 뒤에 다시 의논하여 확정하고, 주상이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종계(宗系)의 악명(惡名)을 변정(辨正)하는 일에 대해 대략 먼저 말로 하고 이어 단자(單子)로써 자세히 기록하여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영상이 예조 판서 박영준에게 단자를 기초(起草)하게 하고 좌상이 조금 다듬어서 김계에게 주어 통사 홍순언(洪淳彦) 등을 시켜서 한어(漢語)로 번역하여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주어 아뢰도록 하였다.'''

-선조 5년 9월 11일 갑오 1번째기사 1572년 중국 사신이 올 때 종계 변무하는 일을 논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