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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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광주광역시,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가 포함된다. 호남이라고도 부른다.
면적은 20,934.7㎢에 달한다.[2] 북쪽으로는 충청도,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으로는 경상도와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해가 있고, 서쪽으로는 황해가 있다.
주요 도시로는 광주광역시,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익산시, 군산시, 전라남도 순천시, 여수시, 목포시, 광양시 등이 있고, 그 중 최대 도시는 광주광역시이다. 인구는 2024년 1월 기준으로 4,973,834명이다.
2. 명칭[편집]
전라(全羅)도는 고려때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던 명칭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도의 유래를 보면, 도는 본래 도읍을 중심으로 도로가 지방으로 뻗어나가며 거점 도시를 연결하는 형태의 행정구역으로 당시 이 길의 거점 도시이자 위상이 높은 도시가 전주와 나주였다고 한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도된다. 분도의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원래 고려에서 전주 일대의 강남도(江南道)와 나주 일대의 해양도(海陽道)로 있다가 고려 시대에 이르러 전라도로 합쳐졌다.
호남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따르면 한국사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인공 저수지로 불리는 김제시 벽골제의 남쪽을 뜻한다는 설이 있고,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湖江)의 남쪽을 뜻한다는 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중국의 둥팅호 남쪽 지방과 같이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가 주업인 유사한 곳'이라 해서 전라도 지방을 호남 지방이라 불렀다는 설 등이 있다.
3. 범위[편집]
금강의 남쪽을 호남이라고 하면 충청남도 논산시, 계룡시, 금산군[3] , 부여군, 공주시와 대전광역시, 충청북도 옥천군까지 호남의 범위로 들어온다.[4]
그러나 대체로 금강-논산천-대둔산을 호서와 호남의 경계로 본다. 이렇게 보면 논산도 호남에 포함되는데, 실제로 논산은 충청도의 다른 지방과는 산으로 막혀 떨어져 있고, 호남평야에 포함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보다 충청도의 중심인 공주가 훨씬 가까웠기 때문에 충청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행정구역에 따라 광주광역시,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만을 전라도로 보고 있다.
4. 역사[편집]
4.1. 원삼국시대[편집]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은 서쪽에 54국, 진한은 동쪽에 12국, 변한은 남쪽에 12국이 있는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다", 역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으로부터 가야의 뿌리인 변한과 신라의 뿌리인 진한이 갈라져 나왔다"는 마한의 땅이었다. 마한 연맹의 54개 국가들 중에서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건마국과 현재의 전남 일대를 기반으로 했던 침미다례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추측하며 영산강 유역 세력을 포함한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까지 대략 25개 국가가 전라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미, 심미다례 혹은 침미다례는 영산강 유역 중에서 해남 일대의 백포만 지금의 군곡리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구체적으로는 해남읍 화산면, 현산면, 계곡면 일대로 추정된다. 침미다례 위치는 강진, 남해, 제주도로 보는 설도 있고, 침미다례 위치를 근처 강진으로 추정되는 고해진을 근거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사실 고해진 위치 자체도 확실치는 않다. 영산강 유역 중에서는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5][6]
초기 마한 맹주국은 기원전 190년 경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세력이 건국한 건마국이었다.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가 맞긴 맞지만 기년이 틀린 경우가 잦은 백제나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유독 건마국 같은 경우는 건국 세력의 고고학적 남천 시점과 준왕의 문헌학적 남하 시점이 거의 일치하는 정말 흔치 않은 경우. 한편 건마국이 건국되면서 전라도 일대에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데, 전북 익산, 전주, 군산 일대에 위만조선이 싫어서 내려온 한씨조선 유민들이 익산 건마국을 중심으로 응집하며 주변 토착민들에게 강력한 위계체제를 관철한 결과, 이들의 통제를 따르기 싫었던 송국리형 유형 문화 주민들이 대거 전남 남서부 일대, 즉 훗날 침미다례로 발전하게 될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그냥 전북에 남았던 여타 토착민들은 별 수 없이 건마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드러난다. 이후 위만조선이 망하자 또 다시 중대한 변화가 전라도에 일어난다. 위만조선이 망한 후 대규모로 남하한 조선계 유민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전북 일대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대부분 그보다 거리가 먼 침미다례에 정착하게 되는 사실이다.[7] 이렇게 되다보니 침미다례는 아예 애초부터 건마국을 필두로 한 전북 마한 세력과는 여러모로 연합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된다. 전북 마한 세력 입장에서 보았을 때, 침미다례는 준왕의 지배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토착민 집단과, 준왕 세력을 조선에서 쫓아낸 바 있는 위만조선 후예들이 연합해서 세운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건마국은 기원후 3세기 시점에서는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청당동에 자리잡은 걸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목지국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침미다례 내부에선 위만계 고조선 세력이 토돈분구묘계 세력 및 송국리 문화 유형계 주민들을 누르고 주도권을 잡게 된 반면 기존 건마국 내부에선 준왕이 처음 등장했을 때엔 주도권을 내주면서 피지배층 입장이었던 토돈분구묘계, 송국리 문화 유형계가 오히려 주도권을 잡게 되는, 상당히 묘한 상황이 등장하게 된다. 한편 이 전라도의 마한 거수국들이 천안 목지국 세력과 맺었던 관계는 묘한데, 아무래도 목지국이 이들에게 훗날 백제가 행사했던 간접 지배력은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지국의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는 없으되 훗날 등장하는 백제에 비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마한이라는 연맹체에는 크게 보아 한강~임진강 유역, 안성천 일대, 금강 유역, 영산강 유역, 섬진강 유역 등 다섯 유역으로 분류해 볼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목지국만 못 했던 걸로 추정되지만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 역시 나름 세력이 있었기에 그 지역들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미치진 못 했던 걸로 보인다. 섬진강 유역은 세력은 미약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8]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세기~5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은 고유의 묘제가 6세기에도 어느 정도 유지된다.[9]# 다만 침미다례 등이 있었던 것이 유력한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 연맹체를 이끈 바 없으며, 굳이 후기 마한 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국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왜계 전방후원분(초기 횡혈식 석실분)[10] 또는 가야 세력의 유물이 전남해안 일대에서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백제의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 수록 침투해가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의 타지 진출을 제한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다른 마한 소속 연맹 국가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바탕으로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근초고왕이 마한, 즉 전라도 남해안 일대까지 모두 정복했다는 학설은 문제 있는 학설이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 자체가 왜의 한반도 정벌이라는 황당무계한 내용에 여기에는 또 왜의 신라, 가야 정벌 기록도 있는데 신라, 가야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외면하고 굳이 침미다례만 콕 집어 마한 전체를 정벌했다고 해석했던 게 그것. 다만 지명의 비정이나, 근초고왕 이후 고고학적으로 금강 유역 일대의 성장이 억제되는 점, 그리고 백제가 대방군(현재 황해도 일대)의 옛 교역 루트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되는 신미-침미다례를 직접지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옛 목지국이나 건마국보다 훨씬 강력한 지배력과 위상을 영산강 유역 세력권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건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 한성백제의 한성 공함 전까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무덤 부장품의 양이 꽤 줄어들고, 가야 세력도 침투에 서서히 성공해가는 전라도 동부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데 이는 백제의 강력한 견제와 간섭 탓으로, 굳이 말하면 이는 그전 건마국이나 목지국은 아예 시도도 해볼 수 없었을 강권 행사였다.[11][12] 이러한 설은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이론으로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2000년대 후반에 충청남역사문화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의 웅진백제 편에서 삼국사기까지도 고려하여 해석한 것이다.
4.2. 삼국시대[편집]
4세기부터 지금의 서울에 있던 백제가 남하하며 조금씩 백제에 복속되기 시작했고, 이 무렵에 대가야도 금강 상류와 섬진강 일부 유역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까지 전라도에는 제대로 통합된 국가가 없이 성읍국가만 난립한 상태였던 건 아니다. 전북 서북부 해안 일대는 백제가 아예 근초고왕 이전 시기까지도 직접 지배 영역을 굳혀 나가고 있었으며 이는 충청도 북부보다 백제의 진격이 빠른 경우였고, 전라도 서남부 내륙 일대는 건마국 세력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주변 소국이 응집하는 구도였는데 서부 내륙 일대는 전북 서해안보다는 직접 세력화는 늦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백제와 훨씬 타협이 쉬운 상태였다. 한편 나름 세력이 만만찮은 영산강 유역(=침미다례) 일대가 전남 서남부[13] 에서 세력을 이뤘고, 전라도 동부에서는 주로 진개의 고조선 정벌 당시 내려온 유민들로 구성된 세력이 각기 있었다. 즉 마한에 속했던 거수국들이 그저 생각없이 흩어져 있었던 게 아니라, 비록 고대 국가 체제는 이루지 못할 망정 각자 정치, 경제, 문화적 경계에 따라 나름대로는 응집해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일찍부터 마한의 영역이었던 전라도 일대에 관심을 안 둘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일대를 장악해야 백제의 대방군 무역권 승계, 즉 경기-충청-전라-왜 열도의 무역망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수왕의 한성 공함으로 당장 망하지 않기 위해선 호남 일대의 직접 지배화 프로그램을 더욱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긴 했지만 그전 한성백제라고 마냥 전라도 일대를 방치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개로왕 사망 직전까진 금강 유역 일대, 즉 전북 일대에 대한 직접 지배 영역은 상당히 넓어져 있었고, 그나마 가장 독자적 세력이 강성하여 적어도 근초고왕 재위기 초반엔 백제의 마한 수장국 자격에 정면 도전했던 영산강 세력은 아예 마한 운운하는 얘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면서 코앞의 전라도 동부 진출도 제어당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백제가 남천하면서 전라도의 백제화에 가속화가 붙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 이후 상당한 기간의 진행과정을 뭉뚱그린 결과론적 얘기다. 적어도 한성 공함 당시 백제의 국력과 위상은 급전직하로 추락한 상태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 천안 목지국 휘하의 일개 거수국에 불과했던 백제국이 목지국의 국력 약화를 기회로 틈을 엿보아 성공했던 것처럼, 아직은 지배 기반을 해체당하지 않은 전라도의 옛 마한 거수국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며 풍전등화인 백제의 애간장을 더욱 태우게 된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다름아닌, 전라도의 옛 마한 거수국들 중 가장 강력했던 영산강 유역 세력, 즉 침미다례였다. 이 시기 나주 금동관국보 제295호이 보다 화려해지는데, 이는 백제 내에서도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하려 했던 데다,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나는데, 백제 입장에서 이는 그간 꾸준히 공을 들여왔던 영산강 유역 세력이 대가야보다도 백제에게 비협조적이 되었다는 걸 뜻했다.
그러나 정작 백제에게 더 큰 타격은 그간 침미다례는 물론이요 건마국 일대 세력보다도 경제군사적으로 약했던 전라도 동부 섬진강 유역 일대에게서 발생하게 된다. 이 전라도 동부는 그 시대 기술로는 평지가 적고 물살도 좁고 빨라 큰 공동체가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때문에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공동체들이 죄다 따로 노는 분위기였다. 그래서였는지 한성백제는 마한 신미국이란 명칭으로 대외에 자칭하면서[14] 백제국의 마한 대표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던 영산강 유역 세력에게만 신경을 썼는데, 그러나 4세기 초에 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활발한 교역을 추진하면서 영향력을 심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이 전라도 동부의 경제군사적 실력은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고, 한성백제가 한성을 공함당하자 대가야 연합에 참여하면서 아예 백제가 주도하는 마한 연합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현재 전북 동부인 남원시, 장수군, 구례군이나 순천시, 여수시 같은 섬진강 유역 에는 가야 계통 유물과 고분들이 나타나는 게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15]
한편 여기서 금동관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왕과 신하와 같은 수직적 관계에서는 칼이 하사품으로 등장하지 금동관이 등장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칼이 주로 하사품으로 등장하는 지역은 해당 공동체의 수장이 극히 미약해서 금동관까지 줄 필요가 없었거나, 아니면 아예 해당 지역을 백제 중앙 지역에서 파견한 군사령관이 힘으로 지배하는 직접 지배 지역에서 나타나는 양상이기에, 칼이 아니라 금동관이 등장한다고 지배 지역이 아니라곤 할 수가 없다.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의 최고 지배자를 뜻하는 것으로 금동관을 하사하였다면 이는 곧 공존과 협력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백제와의 상하 관계를 꼭 뜻하지 않는다곤 해석할 수 없다. 이런 해석으로는 백제가 아예 천도까지 감행하기 직전 공주 수촌리 세력이 한성백제 시절에도 금동관을 사여받은 사실, 그리고 백제국이 마한의 원수장국이었던 익산 건마국을 해체하기 위해 준왕 계열의 잔여 세력인 입점리, 웅포리 세력들에게 금동관을 사여한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래도 한성 공함 직후 백제가 정신을 추스르기 전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서 쓴 금동관은 당시 백제에게서 사여받았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화려할 수 있고 독자성도 강하기에, 적어도 영산강 유역 세력을 우대해줬거나 반(半)독립적 지역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다만 이렇게 서남부는 자치체가 상당기간 존재했고, 동부는 대가야 연합으로 이탈하는 일이 일어났어도, 개로왕 때까지 진행된 백제의 남진이 헛되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전라도 세력들보다는 백제에게 협조할 이유가 많았던 옛 건마국 세력의 전북 서부, 그리고 영 제어가 버거운 영산강 유역을 상대하기 위해 백제가 직접 키운 광주 세력을 위시한 전남 내륙부 일대는 여전히 백제 왕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는 이 일대 세력들을 지렛대로 삼아 영산강 유역 세력은 회유와 타협을 통해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경에 복속을 완료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전 한성백제 시절엔 백제에게 딱히 반항한 바 없는 가야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가야의 지원에 힘입어 영산강 유역 세력과는 달리 무력으로 백제에게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적어도 한 번은 대가야와 함께 백제의 공격을 격퇴해냈지만 이때도 여수, 광양, 순천 일대는 백제가 사수해냈고, 끝내 520년대 중반부터는 백제에게 무력으로 복속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무령왕 재위기인 520년대부터 전라도는 한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전체가 직접 지배세력화되게 되는데, 이것이 경상도-신라에 대응하여 전라도에 백제 계승의식이 자리잡히게 되는 이유가 된다. 전라도 일대는 이 상태로 660년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적어도 수백년 동안은 백제의 직접 지배 체제 아래에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16] 다만 이 또한 아무래도 후세인의 통설적 설명에 불과한 것은 사실. 이 시기에 백제는 영산강 유역 세력, 건마국 일대의 옛 준왕계 세력에게 베풀었던 호의적인 조치와는 달리, 유독 전라도 동부 일대의 현지인 유력자들에겐 현령 자리도 주지 않으면서 소단위 지배 단위까지 죄다 외부에서 파견해 채우는 꽤나 신경질적인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이는 다름아닌 통일신라가, 백제 멸망 직후 옛 백제 지역 전체에게 단행한 조치와 비슷하였다. 적어도 6세기 중반 시점에선 백제에 대한 호감도와 친밀감이, 전라도 각 지역마다 제각기 달랐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이렇게 백제는 6세기에 지역 체계로 22담로를 갖추고 있었는데, 6세기 중반에 가서야 완전히 전라도를 지배지로 편제한 후 백제의 지역 체계가 37군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아 옛 마한 거수국들 당시 형성된 자연 경계들이 백제라는 이름 아래 체계만 달리하여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수도권의 마한 17국은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16개 행정구역을 편성한 것을 보면 이는 마한 54국 중에서 수도권 마한 17국 정도와 거의 일치한다. 즉 현재 지역 기준으로 수도권 마한 17국, 충청도 마한 12국, 전 마한 10국, 광주와 전남의 마한 15국으로 추정되는데 도합 마한 54국으로 이중에서 수도권 17국을 뺀 37국과 백제 멸망 무렵의 지역 체계가 일치한다. 다시 말해 백제 복속 전에 이 지방에 있던 세력이 그대로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된 것이다. 백제가 직접 지배를 완료한 시점에서도 옛 마한 거수국들 시절의 문화적, 경제적 경계를 무시할 수 없었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538년에 성왕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천도하였으며 부여 바로 아래에 있는 전북은 이때부터 차차 백제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무왕 대에 가면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는데, 왕궁리 유적이 당시 천도하려고 짓던 도시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4.3. 통일신라시대[편집]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전라도는 신라에 복속되었다. 685년(신문왕 5년)에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5소경을 설치하였는데, 전라도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에 완산주,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지역 무진주가 있었다. 한편 섬진강 일대 일부는 강주(현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경남 서부)에 속했는데, 옛 가야의 영역이다.
완산주는 완주로도 불렸는데, 지금의 완주군이 그 지명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리고 완주의 완(完) 자는 전(全) 자와 뜻이 같으므로 전주의 유래가 되었다. 한편 무진주는 광주 근교에 솟아 있는 무등산의 어원이 되었으며 현재 광주광역시에는 무진대로라는 도로명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여하튼 이때부터 전북과 전남의 틀이 잡힌 것이다. 757년에는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며 비로소 전주(全州)와 무주(武州)[17] 가 되었다. 고로 훗날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이 '무진주에서 일어나 완산주로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은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것이지만,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완산주와 무진주라고 언급하는 걸로 보아 훨씬 더 먼 훗날에 조선왕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한성부(漢城府)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도 백성들은 여전히 관습적으로 한양이라 불렀던 것처럼 완산주가 경덕왕 대에 전주로 바뀌고 나서도 백성들은 관습적으로 완산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에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전라도에 정착했다. 안승이 세웠다는 보덕국은 지금의 익산에 있었는데, 문무왕의 묵인 하에 옛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의 영토 내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 보덕국은 신문왕 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고, 보덕국 유민들 중 일부를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로 옮기면서 남원경을 설치하였다. 그 나머지 보덕국 사람들은 서라벌 혹은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에 분산 배치하게 된다.
이렇게 9주 5소경을 설치한 까닭은 동쪽에 치우친 서라벌의 지리적 특성 상 지방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목적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다스려 신라에 동화되도록 라는 것이었다. 하여 최종적으로는 백제부흥운동을 잠재우고자 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까진 영산강 유역보다 다소 낙후되어 있었던 전남 동부 일대에 대한 개발사업이 행해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 통일신라가 전남 남부와 동부 일대 호족이나 인민들을 물리적으로 옮긴 예는 없으나 그 과정에서 원신라 지역 출신인들의 이주가 전남 중동부 일대에 이뤄지면서 오늘날 광주전남 서남부 일대의 영산강 호족들과 묘한 대립이 이뤄지게 된다. 이는 신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으로 등재된 3곳 즉 공주, 부여, 익산 중에서 고구려로부터 가장 먼 익산 지역에 의도적으로 보덕국을 만들었던 것과 대강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되며, 신라 입장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를 백제부흥운동의 방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전라도 영역 전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의 물리적 융합이 이뤄진 격이 되었다.
4.4. 후삼국시대[편집]
백제는 허무하게 멸망하였으나,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서라벌 중앙세력을 위협했다. 신라 말기에는 청해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을 중심으로 중국과 해상 무역을 하며 세력을 키운 장보고가 서라벌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 배경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조차 융화되지 못할 정도로 폐쇄적이였던 골품제 특유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9주 5소경을 설치하며 고구려, 백제 유민을 융합하고자 했던 통일 초기 화합의 정신은 물거품이 되고 결국에는 신라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지 못 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옛 백제 지역 전역에서 반신라(反新羅)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진성여왕 대에 접어들자 서라벌의 조정은 정치가 문란해져 지방을 통치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를 틈타 백제의 부활을 이루겠다며 무진주에서 세력을 일으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후백제의 왕 견훤이다. 옛 백제의 후기 중심지가 충남에 있던 것과 달리, 후백제의 중심지는 완전히 전라도에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을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에 의하면 견훤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후자는 견훤이 왕을 칭하던 초기에 퍼뜨렸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은 900년에 완산주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왕을 칭하며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이때 전북 일대는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북 일대에 옮겨진 옛 보덕국 유민들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전혀 고구려 부흥을 외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영산강 일대는 이들과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영산강 유역이 백제에게 가장 늦게 복속된 지역이란 관념은, 아예 백제가 주도하는 마한 연합에서 이탈해서 대가야에게 가담했다가 무력으로 병탄당한 전남북 동부가 영산강 유역보다도 백제의 직접 지배 체제에 편입이 늦었기에 옳다고 할 수 없다.
영산강 유역 세력이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할 동기가 약했던 사정은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 이렇게 된 건 견훤이 아무래도 본인과 보다 관계가 밀접했던 전남 동부와 영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영산강 유역 세력에겐 그저 그전 통일신라의 정책이 계속된다는 부정적 인상을 지운 이유가 컸다. 견훤 자체도 무려 5세기부터 신라 왕실의 직할 지배령이었던 추풍령 경북 서남부 출신이었던데다, 지배력의 원천도 다름아닌 신라 정규군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903년에는 태봉이 후방에서 쳐들어와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의 서남부 해안 지방을 점령했다. 이 전투를 나주 공방전이라 하는데, 이 당시 선봉에 섰던 것이 바로 고려의 창업군주가 되는 왕건이었다. 그리고 왕건은 이곳에서 두 번째 정실부인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게 되는데, 장화왕후의 아들이 바로 고려 제2대 국왕인 혜종이다. 장화왕후는 나주의 호족이었던 오다련의 딸이다.
이는 단순히 전쟁하러 온 장군이랑 귀족영애가 눈이 맞아 부부가 된 것이 아니라, 영산강 유역 세력이 왕건을 지지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주 일대는 왕건의 지지 기반이 되고, 전주 일대는 견훤의 지지 기반이 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당시에는 전남 남서부가 백제 동성왕에게 항복한[18][19] 반면 한곳에서만 200여 기에 이르는 가야의 대형 고분군이 발견될 정도인 전남 동부가 백제에게 저항했는데, 후백제 때는 이런 구도가 뒤집힌 것. 전라도 전체를 먼 과거부터 하나의 실체로만 떠올리는 요즘 감각으론 상상이 어렵겠지만, 광주전남 서부와 동부는 유역권 자체가 달랐기에 고대에는 정치적 향배가 이렇게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가야는 영호남 소통의 열쇠로 통하기도 한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에서도 가야사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우연의 일치인지 당시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부 다 김해 김씨였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초기 가야사 연구도 김해에 집중됐었는데, 가야사를 파면 팔수록 영호남 전체에 걸쳐서 김해 못지 않은 가야의 유적들이 나오게 되고, 그래서 가야사 연구에 영,호남 지자체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가야사 연구의 권위자인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가야는 여러 독립국들이 연합을 맺고 있는 형태로, 각각이 다 정치세력을 지닌 국가였고, 유적들도 예상보다 훨씬 넓게 분포되어 가야사 연구가 진행될수록 영,호남 주민들간의 소통이 된다고 한다.[20] 한편 사비백제 초기에는 침미다례와 달리 백제와 관계가 험악했던 옛 전라도 가야 세력이, 이번에는 견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옛 백제의 제2수도권 일대 및 광주 세력과 제휴하여 백제를 부활시키는 묘한 구도가 나타난다. 그보다 약 사백팔십년 전 무령왕이 510년대 초반에 대가야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남북 동부 일대를 정복하기 시작하던 때와는 정반대로 뒤집힌 양상이었다.
그렇게 후삼국시대 군사, 무역의 요충지인 나주 일대를 놓고 궁예, 왕건 그리고 견훤이 패권을 겨루게 된다. 견훤은 서남부 지역을 수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후백제의 멸망 때까지 서남부를 정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주 호족은 고려 건국의 주요 세력으로 활약한 공으로 고려 제2대 왕 혜종을 배출하기도 할 정도의 위세를 떨치며 중요한 곳으로 대접 받아 훗날 전주와 함께 전라도를 이루게 된다.
견훤은 큰아들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금산사에 유폐되고 말았는데, 그때 몰래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한 루트가 바로 나주였다. 그렇게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이후 후백제는 몰락하게 되었고, 936년 이후 고려에 복속되었다. 후삼국통일의 향방이 바로 전라도에서 결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