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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10.19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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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 일대의 남로당 당원과 합세하여 여수, 순천 지역을 점거하고 일으킨 반란.
2. 명칭[편집]
한 때는 '여순 반란'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해서 공식 명칭에서는 여순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또는 '여순병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순천을 빼고 '려수 군인 폭동'[2] 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민족끼리에서도 사용하는 표현이다.
북측에서 려수 '군인' 폭동이라고 명칭을 붙인 이유는 마찬가지로 여수와 순천에서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수, 순천에 주둔하던 군부대의 병력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이다. <남부군>을 쓴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이것이다.
3. 전개[편집]
3.1. 배경과 원인[편집]
사건의 직접적 발단은 제주 4.3 사건 일부 진압 임무를 하달받은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동족상잔"이라며 지휘관을 사살하고 장병들을 선동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공산 세력의 침투 및 미군이 그 침투를 통제하지 못한 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창군 과정에서 지켜본 미군의 특징은 '선서'를 무척 중시하는 것과 구타행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선서를 단순한 요식행위로 여기는 경향이지만 그들은 달랐다.
경비대에 입대하는 장병은 미군정 당국 및 곧 수립될 정부에 충성할 것을 빠짐없이 선서했다.
미군은 이 선서를 의심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좌파이든 우익이든 전력을 불문하고 선서라는 의식을 거치면 일단 충성스런 군인으로 간주됐다. 이 때문에 경찰에 쫓기던 좌파 성향의 세력들이 상당수 군에 입대해 도피처로 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중략)
여순반란 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선서 한 번으로 군에 들어와 터를 잡은 좌파 세력이 정부수립 2개월 만에 폭동을 일으켜 그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백선엽, 2009, 군과 나, 시대정신,400-402
한편, 한국군의 반란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미군철수와 한국정부 수립이 구체화되자, 주한미군은 1948년 초부터 한국군의 병력을 급격하게 증강시켰다. 그리하여 병력자원에 대한 면밀한 검열히 불가능해, 좌파 세력이 대거 군대에 유입되었던 것이다.
(중략)
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침투와 공작 · 선동에 기초한 것이지만, 급격한 병력의 확충이 초래한 허점에서 자연스레 비롯한 면도 있다.
정병준, 2006, 한국전쟁, 돌베개, 233쪽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미군정청 군사국의 한국인 고문 이응준이 국방경비대원 모집대상자들에 대해 신원조사를 실시하라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내에 파벌이 형성될까봐 우려한 군정당국은 그에 대해 향후 정보기구를 활용하겠다면서 반대했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의 각 연대별로 진행된 모병과정에서 좌파계열 군사단체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대거 입대하게 됐다. 게다가 미군정청은 ‘불편부당, 정치적 중립’이라는 입장을 내세워 국방경비대원들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수준에서 단지 그들에게 국내 치안확보에 전력하라고만 당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당초 미군정의 생각과 달리 국방경비대에 발을 들여 놓은 좌파의 세포들은 여러가지 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일찍부터 조선로동당의 국방경비대 침투를 감시해왔던 미 군정청 방첩대는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국방경비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을 계획했다. 미군정청 방첩대는 사전에 각 지역지부에 담당국방경비대와 남로당과의 관계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대 내의 좌파성향의 세포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서상문, 2005, (알아봅시다!) 6·25전쟁사 . 제1권 , 배경과 원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117쪽
3.1.1. 14연대 창설[편집]
해방정국 당시 군에는 크게 3개의 좌파 조직이 있었다. 박정희가 총책이였다.
하나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들의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 마지막으로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북로당(북한 조선로동당의 전신)이 경상남도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이다.
남로당에서 군 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조직을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장교들의 인사행정은 모두 서울에서 하며 인사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한다. 그러나 사병들의 경우 지방에서 모집하고 인사이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방당에서 관할한다.
- 서로 선을 다르게 하면 보안상 유리하다. 이 때문에 남로당은 장교 조직과 병사 조직을 별도로 조직, 관리했으며,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는 같은 부대 소속임에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여순사건의 두 주역인 4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는 ‘병사 소비에트’에 소속되어 있었고, 김지회 중위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측 공작원이다. 김지회가 ‘콤 서클’에 침투 할 때는 좌파장교들은 그를 남로당으로 알았고, 병사 소비에트는 김지회를 우익 장교로 알았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였다. 김지회는 국방경비사관학교 시절부터 교육생들을 콤 서클로 포섭하였고, 1연대 2대대장 부관을 거쳐서 전남 광주에 창설된 제4연대로 전속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2차 인민혁명군의 실질적인 총책인 김일광에게서, 김지회 중위가 이끄는 콤 서클을 인민혁명군과 합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여기에 부록으로 평양학원 항공중대를 졸업한 공작원 최일주 일병이 김지회의 당번병 명목으로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김지회의 연락책 겸 감시역이였는데, 여순사건 초기때는 김지회는 배후에서 지휘하고 최일주가 대신 ‘병사 소비에트’를 지휘했다.
정리하자면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는 남로당 계열이었고, 적색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도 자신들을 남로당 중앙당 소속으로 알고 있었으나 북한 공작원인 지휘관 김지회 중위에 의해 ‘인민혁명군’으로 소속이 변경되게 된다.[3]
김지회와 지창수가 소속된 제 4연대는 영암사건이 발생했던 그 부대이지만 사건에는 크게 휘말리지 않았고 각자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를 순조롭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자의 상부 조직을 통해 새로 여수에서 창설되는 14연대로 이동하여 혁명군 조직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4연대에서는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14연대 기간병으로 보냈는데, 이에 이미 김지회와 지창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연대 지휘부에서는 불온사상 때문에 평소에 골치를 앓아온 터라, 평상시에 불온했던 다수의 병사들을 14연대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48년 5월 초, 14연대가 창설되고 김지회는 신설 14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지창수는 연대 본부 선임하사관격인 연대 인사과 선임하사관, ‘병사 소비에트’ 부책인 정낙현은 연대본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라는 요직을 죄다 차지하였다. 그리고 14연대는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였는데 주로 전남 동부 곡성군, 구례군, 순천군, 광양군, 보성군, 여수군, 고흥군 등에서 모집했다. 이 때 지원자가 부족한 탓에,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시켰다.[4]
이 때문에 각 지방에서 좌파운동을 열렬히 하던 청년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면 14연대에 입대하기 일쑤였다.[5] 남로당 전남도당 군사부에서도 예하 군당에 비밀 지시를 내려 좌경청소년들을 14연대에 되도록 많이 입대시키도록 독려하였다. 또한 각종 범죄자들도 군에 가면 무사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찰들을 피해 입대할 정도였다. 사실 국방경비대는 건군 초기부터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미군정이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이때 4연대에서는 군인들에게 VS놀이형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승만과 박헌영 중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한 설문이었다. 여기에서 박헌영을 택한 군인들만 추려내서 그들로만 14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입대에 있어서도 사상검열 등은 전혀 없었고 충성서약과 신체검사, 구두시험만으로 선발하였다며 입대 절차가 너무나 허술했던 것으로 회고하였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765>老兵이 걸어온 길-15-숙군이 뜻하는 것
여순 사건 직전 김지회의 14연대 ‘콤 서클’에는 김지회, 홍순석, 배명종, 정영길, 김남근, 신일수 중위등 주로 경비사관학교 3기들이 소속되었고[6] 4연대 역시 비슷한 규모였다.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에는 약 80명의 하사관과 병이 소속되었다.
3.2. 군 내부의 반란[편집]
3.2.1. 배경[편집]
사건의 발단은 제주 4.3 사건으로, 여수에 주둔하면서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14연대 병영에서 남로당 계열이 침투한 1개 대대의 장병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에서 시작한다.
14연대는 이미 9월 중순부터 제주도 출동을 예정하고 있어서 10월 초부터 다른 부대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차출하여 공급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식무기인 개런드 소총과 M1 카빈, 자동소총, 기관단총을 비롯 각종 통신장비 등이 다른 부대에 앞서 우선적으로 100% 공급되었다. 그리고 종래 가지고 있던 일제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은 아직 반납하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상시보다 2배에 달하는 6천여정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어서 남아도는 소총으로 반란 후 민간인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여순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군과 경찰 사이의 알력이다.
군과 경찰의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제국 경찰이었다. 당연히 마주치기도 어려운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에서 직접 수탈하는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사 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문제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일본 순사가 그대로 경찰이 되어 버린 셈이다. 어제의 일본 순사들이 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복장이 터진 이들은 모조리 국군(과 그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지만, 이들은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했으므로 대민마찰을 일으킬 일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장 경찰 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바로 이 여순사건의 주역인 남로당 김지회 조차 왕년에 일본군 소위였다.
일본군 출신자를 제외하고는 군 경력자를 찾기 매우 어려웠다. 군을 재건하는 일은 군 경력자의 조언 내지는 직접적인 활약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일본군 출신자들이 군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 출신자는 그 수가 매우 적어서 본격적인 군사조직을 구성하기는 무리가 많았다.[7]
이후 경찰과 군은 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로 발전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도 속속 국방경비대/국군에 입대했고, 신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데다 미군정에서도 별 말이 없으니 특별한 신원조회 없이 군에서도 무작정 받아들였다. 이는 여순사건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자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제1공화국 내내 지속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상대적으로 경찰을 싸고 돌고 군부를 찬밥 다루듯 하자[8] 군사지도자였던 이범석이 정변까지 모의할 정도였다.[9] 그런데 14연대의 기간병은 군경의 무장충돌인 영암사건을 일으킨 제4연대 출신이었다.
48년 9월 24일에는 구례경찰서 직원 1명과 14연대 사병 9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10] 몰려든 구례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사병들이 구타당한 뒤 구금되었다. 그래서 14연대 헌병들이 구례까지 가서 이 병사들을 인수받아 왔는데,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등은 이 사건에 대해 분개하면서 언제 한번 보복하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3.2.2. 김지회 배후설(소수설)[편집]
소수설에 따르면 반란 직전 몇가지 사건이 동시에 돌아가는데, 첫째로 48년 10월 12~3일경, 김지회 중위와 최일주 일병은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 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에게서 제주 4.3 사건에 파견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현상은 남로당원이기 때문에 김지회의 상급선이 아니지만 소련군정과 북로당 대표라는 신분을 겸하고 있어 김지회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은 있었다. 다만 이현상이 직접 김지회에게 지시했는지, 북로당, 즉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가 불분명해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둘째로 전라도 내의 4연대와 14연대를 관할하는 광주 제5여단 정보참모 김창선 소령은 군내 좌파 계보를 파악하여 우선 4연대 50여명을 구속하고 이어 48년 10월 16일 14연대 사병 40여명을 연대 내 영창에 색출하고[11] 주모자급 3명은 광주의 여단 본부로 압송하였다.
이어 좌파성향 때문에 연대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된 김지회 중위와 9중대장 홍순석 중위도 즉각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막 부임한 박승훈[12] 신임 연대장이 반대하자, 김창선 소령은 일단 여단으로 복귀 후 다음날인 17일 김지회와 홍순석에게 광주 여단 본부로 출장 명령을 내렸다. 광주에 도착하면 구금할 목적이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에게는 똥줄 타는 상황이었다.
셋째로 우연히도 같은 날인 17일 고향에 휴가 갔던 병사들이 구례경찰서 형사들과 충돌했는데 빨갱이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끌려가 뭇매를 맞고 풀려나 귀대하였다. 그러자 연대에서 구례경찰서를 습격하자며 아우성이 일어났다. 연대장 박승훈은 여단본부로 부임인사를 하러 가서 공석이였고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이 대신 여단으로 보고하면서, 장병들을 진정시키고 사기앙양을 위해 일부 병력을 구례에 보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김지회와 홍순석의 여단본부 출장 명령은 흐지부지되었다.
넷째로 18일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대대는 제1대대였고, 김지회의 연대대전차포 중대도 제1대대로 배속되었다. 출동 날짜는 19일이었다.
즉, 군내 좌파세력에게는 상급선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키라고 하고, 군내 상부기관에서는 그들의 혐의를 파악하여 체포 직전까지 이르렀고, 부하들은 경찰들과 충돌했지, 그와중에 제주도로 출동 명령이 떨어진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 연대에 대형 트럭이 4대 밖에 없어, 이것으로 1개 대대의 장비를 여수항까지 운반하려면 한세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밤이 되도록 병력 이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밤 10시경 1대대는 완전 무장한 채 내무반에서 대기중이었고 2·3대대는 취침 중이었다.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장비 선적을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 있었다.
이때 연대 본부 옆에 위치한 연대 근무중대에서 갑자기 총성 1발이 울리고, 거의 동시에 연대 정문의 위병소에서 비상나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자 비상소집으로 인지한 각 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 본부 앞으로 일반 집합한 이후 연대 종합연병장으로 집결하였다.
1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연대 근무중대 앞을 지나는데 사병들이 그를 무조건 구타하였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조병모 소위가 “왜 장교를 구타하느냐?”라고 꾸짖자 구타하던 사병들은 총검으로 조 소위를 찔러 쓰러뜨렸다.(첫번째 희생자) 조병모 소위는 반란 사병의 총에 팔을 맞으며 필사적으로 도망가 대대본부 앞에 있던 전용인 소위에게 까지 가서 쓰러졌다. 조병모 소위를 쫒아오던 4~5명의 반란 사병은 조병모 소위를 그냥 지나쳐서 무기고와 탄약고를 지키던 보초를 쏴 죽이고 문에 잠겨있는 열쇠를 총으로 부수어 연 뒤 점거하였다. 제5중대 주번사관인 박윤민 소위는 주번사령에게 비상문의를 하러 가다가 탄약고쪽에서 쏘는 반란병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한편 규정대로 연대 전 장병들이 연대연병장에 집결했는데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리고, 뒷산에서 신호탄이 날았다. 또한 사복 차림의 민간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13] 이 와중에 지창수가 사복차림의 민간인들과 함께 연병장 사열대로 뛰어올라가 "경찰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온다."라고 선동하면서 진압파병 거부, 제주 빨치산에 호응하여 본토에 제2전선을 구축, 남북통일을 위한 조선인민군으로 행동할 것을 선동하였다. 지창수의 ‘병사 소비에트’ 소속 병사들이 연대 장병 곳곳에서 “옳소! 옳소!”하면서 동조하였다. 그때 3명의 하사관이 앞으로 나서며 “지창수,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 “여러분! 우리는 엄연한 국군입니다. 불순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라며 군인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반란병들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어 ‘병사 소비에트’의 특수공작책 심재호 상사의 지휘로 반란병들은 전 부대를 뒤지며 모든 장교를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발견하는대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날 사살된 장교들은 1대대장 김일영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등 대대장 전원과 연대 작전주임 장교 강성윤, 정보주임 장교 김래수 중위, 진도연, 김녹영, 맹택호, 박경술, 민병여, 김진역, 이상술, 장세종, 이병순, 노영우, 이상기 소위등 20여명에 달했다. 동년 5월에야 창설된 14연대는 장교 충원율이 낮아 경비사관학교 5기생인 10여명의 소위들이 모두 중대장을 맡고 있었고, 각 소대장직은 고참 하사관들이 맡고 있었다.[14]
14연대 내 장교들이 대부분 살해되었을 때에야 여수항으로 수송장교 윤중위를 통해 반란 소식이 알려졌고, 이에 상황을 살피러 부연대장이 정보주임 김제주 중위를 대동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김제주 중위는 연대 탄약고에서 수화하다가 사살되었고, 부연대장은 연대본부까지 포복으로 기어가 확성기 마이크를 잡고 "불순분자들의 명령에 넘어가지 말고 대한민국에 충성할 군인들은 연대본부 앞으로 집결하라."라고 절규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총알 세례뿐이었다. 결국 부연대장은 차를 타고 빠져나와 여수읍 헌병 파견대로 향해 그곳에서 순천에 파견된 14연대 2개 중대를 이끄는 홍순석 중위에게 전화하여 반란 진압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순석은 상술했다시피 ‘콤 서클’의 핵심 멤버로 연대내 반란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준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김지회 중위는 연락병 겸 북측 감시원인 최일주 일병을 대동하고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실에서 나와 반란군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15] 이후 김지회는 아직은 자신이 노출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최일주 일병을 시켜서 간접적으로 반란군을 지휘한다.
이상이 김지회가 주도했다는 배후설이다.
3.2.3. 지창수 단독범행설(다수설)[편집]
10월 15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런데 사령부 명령이 군 통신망이 아닌, 일반 우체국 전보로 오는 바람에 일반사병에게도 금방 소문이 퍼진다. 출동 날짜는 10월 19일로 매우 촉박했다.[16]
중앙당에 소속된 김지회 중위등 장교 당원들은 남로당의 기본 방침이 아직은 무장봉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중앙당으로 연락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여 일단 출동 명령에 응하기로 한다.
그에 반해 지창수 상사 등 하사관들은 자신들의 상급기관인 전남도당에 문의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자 자체적으로 병사위원회를 열어 토론에 들어갔다. 결국 병사위원회는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선전 해설반을 편성해 대대별로 파병 반대 선동을 하는 한편, 위병사령부 장악조, 통신망 차단조, 장교 처단조, 무기고 점령조 등으로 병력을 나누어 먼저 연대를 장악한 후 지창수가 비상나팔을 불어 전체 부대원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기로 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밤,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제주도 출동을 위해 무기와 장비의 선적을 지휘하고 있었고, 장교들은 출동 장교 환송회식 중이었다. 홍순석 중위의 2개 중대는 순천에 주둔하고 있어, 여수 주둔지인 신월동에는 총 2,700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밤 10시 10분경, 이미 연대 무기고와 상황실이 장악된 상태에서 비상나팔이 울렸다. 영문 모르는 사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할 때 장교들은 환송식에서 만취하여 잠들었거나 여전히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열 받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들 장교 대부분은 남로당 중앙당원이였으니 동정은 금물이었다.
먼저 지창수가 연단에 나가 "애국병사 여러분! 우리는 동족 살상의 제주도 출동을 결사반대합니다."라는 일장 연설을 하였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좌파사병들이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라고 고함치며 바람을 잡았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지금 경찰 놈들이 부대에 쳐들어오고 있다!"라고 외치자 우왕좌왕 하던 사병들까지 "무기를 들어라! 경찰과 싸우자!"라며 단결하게 되었다. 다만 일부 사병들은 겁먹고 총을 든 채 달아나 버렸다.
이때, 하사관을 포함한 장교 3명이 연단으로 뛰어나가 "안 돼! 뭐하는 건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아직은 반란은 시기가 아니라고 만류하였다. 장교가 남로당 중앙당원인 것을 모르는 사병들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연단에 오르는 이들을 사살해 버렸다. 이어 반란군은 이미 개방된 무기고에서 무기를 들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장교와 하사관들을 찾아 죽이며 군의관 등 이용 가치가 있는 몇 명만 빼고 20여명의 장교를 살해했는데, 그중 15명이 남로당 중앙당원이었다.
지창수는 스스로 연대장에 취임하고 병사위원회 소속 하사관들을 즉석에서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빨치산 종군기자 출신의 이태가 쓴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에 의하면, 여순사건은 완전히 지창수 상사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14연대 장교 16명중 대부분이 좌파장교였지만 극심한 팀킬로 이중 15명이 사살되었고, 사상이 불분명한 김지회만 살려두었다고 한다. 이후 지창수 상사는 순천으로 이동한 반란군 주력을 이끌고 가다가, 이현상이 22일 오후에 순천에 나타나 반란군을 격려하고 “여수에서부터 회색분자 혹은 반동장교 혐의를 받고 열차에 감금당해 온 김지회의 신원을 이현상이 보증하여 풀어줌으로써 그 시각부터 비로소 김지회가 반란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며, 그 동안 당에서 애써 부식해 놓은 14연대의 수많은 장교 프락치들을 신원도 확인하지 않고 마구 살해해 버린 지창수 일파의 경거망동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어 각고의 노력 끝에 포섭한 좌파장교들이 죄다 팀킬당한 사실을 안 이현상은 김지회와 함께 엉엉 운다.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14연대가 제주도 파견이 결정나자 지창수 상사는 당황하였고, 전남도당과 대책 마련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 급박해지자 일단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 이후에야 전남도당도 그 사실을 알았다고 나온다. 22일, 여수 14연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중앙당 노동부장 이현상이 봉기 지휘를 위해 순천에 도착했다. 이현상은 지창수를 만나자 먼저 중앙당에서 심어놓은 좌파계 장교 16명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야 평소 모병할 때 박헌영을 존경한다는 사람들만 입대시키는등 평소 좌경적인 언동을 자주 해 순천역 화물차에 감금되어 있던 김지회를 만나게 되었고, 이현상은 물론 지창수까지 회한의 눈물을 터뜨렸다. 이후 이현상의 지도 아래 홍순석 중위를 총지휘관으로, 김지회를 부지휘관으로 임명하여 14연대의 지휘체계를 개편하였다.
김남식의 <실록 남로당>에서는 “당시 반란 사병들에게 체포, 감금되어 총살 직전에 있던 후일의 반란군의 지휘자 김지회 중위가 지리산에 가면 나를 증명해 줄 사람이 있다. 내가 반란부대를 지휘토록 해 달라고 사병들에게 요구”하였다고 되어 있다.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에 의하면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가 "나는 여러분의 편입니다. 내가 반란군을 지휘하게 해주시오. 아니면 나를 지리산으로 데려가주시오. 지리산에 가면 나의 신분을 확인해줄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살아 남았다.
반란의 중심지인 전남 전역을 관할하던 전남도당이나 여수, 순천 군당들은 모두 산악에 숨어 있는 상태로 14연대 반란군과 사전에 모의할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남도당이 순천군당에게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으나, 이들은 올려 보낼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은 가장 늦게 반란 소식을 알았고, 뒤늦게 라디오로 사실을 들은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에서 긴급히 간부 두 사람을 파견하여 기차로 광주까지 갔으나, 계엄군들에게 차단되어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야산대들의 현황을 점검하던 이현상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그는 경남 서부지구당 위원장 김상홍을 만나 상의한 후, 경남 도당 연락원의 안내에 따라 22일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홍순석과 지창수를 만난 이현상은 제일 먼저 "그런데 장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리고 총지휘권은 이현상이 넘겨 받았다.
24일에는 마산에서 진압하러 온 15연대장 최남근[17] 이 반란군에 합류하고 싶어 문의하지만, 이현상은 "이승만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려면 산발적인 봉기가 아닌 전면적이고 직격적인 봉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라며 돌려 보낸다. 이후에도 이현상은 산중에서 여러번 이 사건을 반란사건이라고 규정지으며, 남로당의 전력을 노출시킨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각종 빨치산 문학에서도 대부분 북한의 개입설을 부인하고, 지창수 상사의 단독 범행을 주장한다. 또한 백선엽의 토벌기록인 실록 <지리산>에서도 남로당은 이 사건을 전혀 몰랐으며 지창수 상사의 단독범행이라고 하는 등 좌우를 통틀어 학계에서도 정설로 인정된다.
여기에 김지회 배후설처럼 이현상이 사전에 여수에 도착하여 김지회와 지창수를 만나 반란을 지시하지 않고, 사건 이후에야 순천에 도착하여 반란을 지도하게 되었다. 또한 이를 도와 북한에서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 180명을 남파한 것은 사건 1달이 지난 11월 17일이었기 때문에, 북측에는 여순사건의 사전 정보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정적으로 남로당 여수시당과 주변의 군당들은 긴급회의를 열었으나 이 갑작스런 사태의 대처법을 두고 우왕좌왕했다. 서울의 중앙당은 며칠 후 라디오를 통해서나 사태를 파악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시도 내릴 수 없었다.
여수시당은 무조건 호응해 나서야 한다는 측과, 지시가 없는 가운데 지하 조직을 전부 노출시킬 수는 없다는 주장이 맞섰는데, 격론 끝에 이익주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치밀한 사전계획 없이 사병 중심의 돌발적인 상황이라 급속히 진압되어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에 전념하게 된다. 평양에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으며, 이후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내 좌파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조작하여 박헌영과 남로당을 숙청하는 계기가 된다.
3.3. 14연대 반란의 진행[편집]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사명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병사위원회, 『여수인민보』 1948년 10월 24일자[18]
10월 20일 여수읍의 주요 공공 건물과 요소요소에는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의 깃발이 게양되었고 오후 1시부터 중앙동 광장에는 여수인민대회(군중대회)가 열렸다. 또한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름으로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 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민족반역 정권의 명령에 대하여 조선인민의 아들로서의 사명하에 이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하여 일어섰다.”라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식사는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 이용기였고, 격려사는 보안서장으로 내정된 유목윤, 세 번째로 인사말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자 14연대 ‘병사 소비에트’ 총책으로 반란의 주역이였던 지창수 상사였다.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이 내린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지시에 의해 이미 20일 오전 8시경 김지회의 지휘로 반란군 주력 2개대대(1,400명)은 기차와 화물 트럭으로 순천으로 향했고, 일부는 지역방어를 해야 한다는 지창수 상사의 주장에 의해 2개 중대만 여수에 남았다. 그 탓에 이후 여수에 진압군이 왔을 때는 이미 반란군 주력은 없었고, 그때까지 날뛰고 있던 좌파세력이 조직한 ‘인민의용군’ 정도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19일 야간에 일어난 반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21일에 이르러서야 국무총리의 공식적인 담화발표가 나왔고, 22일이 돼서야 중앙일간지에 첫 사건보도가 나왔다. 김지회가 반란군을 총지휘한다는 보도는 26일자 국제신문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평양방송에서는 이미 20일 아침 6시에 제 1보로 반란의 진전 사항을 수시로 보도하며 여수·순천 지역의 좌파세력을 격려하고 남조선의 모든 애국적 인민과 국방군 장병은 여기에 호응 봉기하라고 선동했다. 같은날자 ‘로동신문’, ‘민주조선’등에서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소련의 정부기관지 ‘이즈베스챠’와 ‘타스’ 통신은 북한 쪽과 쿵짝이 안 맞았는지 반란 이틀 전인 10월 17일에 이미 남조선의 ‘대구’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다가 21일날 다시 평양방송 인용으로, 남조선 여수지역에서 군대의 반란과 인민폭동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하였다.[19]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처음으로 여순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정부측에서는 여수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1,1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다.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학살 자체가 발생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시기에 목숨을 잃은 손양원 목사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당하는 여수의 시민들도 존재했고 좌파청년들은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을 학살했다. 물론 깡패·양아치·부랑아들이 가세해 평상시 감정있던 사람들을 죽이거나 부자들 죽이기도 해서 민간인의 피해가 커진 측면도 있었다.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김지회의 인도로 20일 오전 순천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홍순석이 이끄는 14연대 2개 중대와 합류한다. 홍순석은 반란에 주저하는 사병 8명을 총살해 놓은 상태였다.[20] 20일 오후 경 순천을 장악하였고, 21일에는 구례·광양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때 약 200명의 병력이 서쪽인 보성군 방면으로 무단 이탈하였다. 이들은 거의 전부 벌교·보성·고흥·화순·광주 출신이었는데, 벌교읍과 그 주변 지역에서 한풀이식 무차별 살육을 벌였다. 그러나 주력에서 무단이탈한 소규모 부대인지라 광주 방면에서 달려온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걸려 전멸당한다.[21]
20일 새벽 광주의 4연대가 진압을 위해 1개중대의 병력을 급파하였지만, 4연대는 위에서 이미 언급듯이 영암사건으로 경찰들과 전투를 벌였던 부대이며, 4연대 출신인 김지회와 지창수가 이미 붉은 조직들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4연대는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오전 10시경 부대 안에 있던 좌파 부사관 이진범 일등상사의 인솔로,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이명은 소위, 장인호 소위등 장교 2명과 사병 28명을 학살한 후 잔여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22일에는 15연대장 최남근이 자신의 반란 동참 여부를 상의하기 위해 포로가 된 것으로 위장하여 지리산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군내 조직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27일 다시 탈출을 가장하여 15연대로 귀환하였다.[22] 이후 정체가 탄로나 총살형을 당했다
3.4. 정부의 진압[편집]
하지만 결국 고립된 반란군의 세력은 차츰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23]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진압군은 대전 제2연대, 전주 제3연대, 광주 제4연대, 부산 제5연대, 대구 제6연대, 군산 제12연대, 마산 제15연대의 전 병력 또는 일부 차출병력,[24] 육군비행대 L-4 10대, 육군 기갑연대 소속 장갑차 20대, 해군 경비정 7척, 서울 및 각도 혼성 경찰병력 약 2개대대로 거의 1개 사단 규모였다. 그에 반해 반란군은 김지회의 14연대 주력 2대 대대 1,400명에 홍순석의 2개중대, 4연대 1개 중대등 1,600명 중대였다.[25]
진압군 중 4연대는 21일 새벽 구례방면으로 북상하던 홍순석의 부대를 순천 북방 약 8km 지점 서면 학구리에서 격파하였다. 진압군의 첫 승리였다. 그 바람에 홍순석 부대는 이미 광양방면으로 이동하던 김지회와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부터 순천탈환 작전에 들어가 22일 오전 순천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한편 광양방면으로 이동중인 김지회는 22일 오후 광양군 옥곡면 백운산 기슭에서 마산에서 출동한 15연대와 대치중 연대장 최남근과 만나는데 그는 이현상과 만나 자신의 행동 지침을 듣기 위해 포로로 가장하여 입산한다. 이때 군내 지하세력을 유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탈출을 가장하여 하산한 최남근은 이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총살당한다.
이 때 진압군은 여수, 순천을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김지회의 반란군 주력의 목표는 지리산 입산이었고, 이에 전투를 회피하며 빠져나갔다. 사실 원래 진압군의 작전은 지리산 입산 차단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19일에 일본으로 갔고, 20일 새벽 기타 주요인사가 모인 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이 지도를 보면서 반란군은 진압군에게 몰리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진압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순천시가지 수복작전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장갑 수색중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L-4 정찰기들을 상공에 띄우고 제3연대, 제12연대등이 공격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반란군의 저항은 미미하였다. 여수와 마찬가지로 순천에 도착한 반란군들은 순천을 장악한 즉시 빠져나갔다. 순천에 남은 반란군의 숫자는 미상이지만, 벌교출신 한모 상사의 지휘하에 150명이 벌교로 후퇴하여 벌교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으로 봐서 여수에 남은 2개 중대와 비슷한 규모로 추측된다. 순천의 완전 수복은 10월 23일 오전중에 이루어졌다. 반군토벌 사령부는 11월 13~14일 순천현지에서 군법회의를 열어 검거된 폭도 피의자 458명중 101명을 무죄석방, 79명을 징역 20년, 79명을 징역 5년, 102명을 사형에 처했다. 또한 전남 학무당국은 이에 관련된 순천지방 초등학교 불순교사 61명을 파면하였다. 23일 오전 9시 40분 함포 사격을 지원받아 5연대가 여수 수복작전을 개시하였지만 반란군의 저항이 거세 실패한다. 24일 두번째 공격은 송호성 장군이 직접 지휘를 맡아 여수 인구부(연등동 일대)에서 펼쳐지나 이번엔 매복에 걸려 송 장군이 부상을 당하고 그렇게 후퇴하게 된다. 25일부터 박격포로 화력 지원을 받는 12연대가 주공을 맡게 되고 결국 27일 여수를 탈환한다. 하지만 이때 이미 대다수는 지리산이나 벌교 등으로 도주한 이후였다.
3.4.1. 온건파의 실패[편집]
하루 쉬고 24일 아침 여수 수복작전이 개시되었다. 육군총사령관이자 진압군 사령관인 송호성은 이승만, 이범석과 다르게 온건한 진압을 주장했다.
당시 부산일보에서는
1960년대 일본 역사학자는25일 직접 교전중의 여수읍내까지 출동하여 상황을 시찰한 육군 총참모장 宋虎聲장군은 동 시가전투가 반군진압작전으로부터 완전한 봉기시민 소탕으로 변하였음을 솔직히 인정하였는데, 동 장군은 시민의 그 같은 저항의식을 의외로 생각하고 동시에 금반 전투의 막대한 물적 손실을 개탄하였다. 동 장군은 공격에 앞서 3차례나 삐라를 뿌리는 등 반군측과 양민을 분리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는 반도측 보안대의 방해로 말미암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25일의 제1일 공격에서 장갑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부대가 시가에 돌입하였을 때 건물 안으로부터의 사격이 여전히 맹렬하였음
부산신문 1948년 10월 31일 #
이명박 정부 시기의 진실화해에서는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여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 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하야시 히데키(林英樹), 內側 見 朝鮮戰爭 民族問題硏究會 編 朝鮮戰爭史 評論社 , 1967, pp.16 ~ 17
등으로 평가했다.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사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진실화해 2010년[26]
상반기 조사보고서, 437쪽
그러나 온건파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반란군측은 김지회-홍순석이 곳곳에 남겨놓은 안내원을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반란의 주력부대가 여수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고 이에 차단선을 풀고 여수만 노리게 되어 반란군들은 큰 피해 없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여수의 무장 폭도 분자들도 지창수를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하였고 정작 여수에는 북한군이 남진하여 오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던 여수인민위원장 이용기 등 일부 좌파분자들만 남게 된다.
3.4.2. 강경파로 교체[편집]
뒤늦게 진압군사령관을 송호성에서 김백일로 교체하고 25일, 근처에 차단선을 펼치고 있던 군부대까지 싹싹 긁어와 여수를 향해 진격한다. 물론 여수에 14연대의 주력부대는 없었다. 전날 매복당했던 미평리를 무혈 점령하고 여기에서 신중하게 하룻밤을 보낸 후 26일 아침 여수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장갑차들이 돌진했고, 여수에서는 약간의 무장폭도들이 남아 있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해상의 LST 선상에서 여수로 상륙하는 5연대 1대대의 박격포가 12연대 수색대를 강타해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27] 이후 지루한 시가전이 지속되었지만 진압군은 시내 중심부를 속속 탈환해 나갔다.
시가전 끝에 27일 오전, 여수남국민학교에 진압군사령부가 설치되며 완전 수복이 이뤄진다. 그리고 2진으로 도착한 경찰부대는 동료 경찰과 그 가족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어졌고, 1차 진압군경의 피해 규모를 10배 이상 상회하는 대규모 보복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 이후 12월에 화순·나주 민간인 학살사건도 벌어졌는데 2016년 12월에 돼서야 국가의 책임, 배상을 인정하였다.대법 "화순·나주 민간인 학살사건 국가가 배상하라"
3.5. 지리산 유격대[편집]
48년 11월 중순 지창수가 이백여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오면서 총 6백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조계산 방면에도 2백 명이 가 있기는 했지만, 최초 14연대 반란군과 4연대 일부 병력, 이에 동조하는 좌파세력까지 합쳐 4천명에 달하는 수의 병력이 작살나, 열흘 남짓만에 겨우 1/5 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병력 중 4백명은 진압군과 싸우다 죽고, 2천8백명은 생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있었다. 49년 1월 10일까지 진행된 군사재판에서 410명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바로 집행되었으며, 568명은 종신형으로 대전교도소 등지에 분산 수감된다. 기타 병사들은 10년 이상 중형을 받고 수감되다가 6.25가 터지면서 전부 총살당한다.
지리산 입산 이후 반란군은 빨치산화하였다. 기존의 14연대 반란군 출신들만이 아니라 남로당 중앙에서 보낸 이현상이 사령관이었으며, 구례군당(위원장 최규복)등 지방 좌파 세력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규복과 박종하가 지리산에서 14연대 반란군에게 사상 교육을 하기도 하는 등, 당이 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후의 일이지만 이현상이 이들 부대를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남하할 때 편제를 보면, 사령관 이현상, 총참모장 박종하(전 구례군당 유격대장), 정치위원 여운철(전 충남도당 위원장) 승리사단장 이진범(14연대 하사관 출신)으로 구성된다. 즉 반란군 14연대 색깔이 많이 약해진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전북도당에서 전속된 부대가 승리사단 서울부대(부대장 14연대 사병 출신 김금일)였는데 다른 빨치산 부대와 달리 승리사단은
여담으로 정지아의 소설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정지아의 부친이자 주인공인 유혁운(본명 정운창)은 곡성군당 소속이며 여순사건시 14연대 반란군이 인민군이 곧 내려와서 해방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기뻐한다. 그러나 며칠만에 14연대가 지리산으로 도망가자, 조직이 전부 노출된 상태라 할수 없이 대거 입산하여 도당, 군당, 면당 별로 빨치산화하여 투쟁한다. 당시 지방 조직원들이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의 할 것은 이들이 전부 14연대에 합류해서 남부군이 된 것이 아니라, 여수-순천지역에 있다가 14연대를 따라가거나 지리산이 있는 구례군당 정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군당/면당원들은 해당 군/면 지역 안에서만 활동하는 빨치산이 되었다. 명령 계통도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았을 뿐, 이현상 부대와는 별개였다. 그러나 상호 협조 관계가 되어 구례군당 유격대장
3.6. 14연대 반란군들의 최후[편집]
여수군에서 활동한 남로당 여수 지구 위원장 이용기는 반란 일주일 후 여수 근교 석천사 뒤 마래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반란군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살한 것이 의문인데, 아마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각지에서 다른 국방군도 호응하고 38선에서 인민군이 내려오기로 굳은 약속이 되었다는 말만 믿고 있었지만 결국 아무일도 안 일어나자 비로소 기만당한 것을 알고 참담한 심정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여수지구 위원들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48년 10월 중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14연대 반란군 600여명에 여순지역의 좌파폭도들을 합쳐 대략 1천명 정도가 광양 백운산, 지리산에 입산하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후 국군의 적극적인 진압작전과 민심 이반, 약속된 북의 지원군 부재 등으로 이들 세력은 급격히 약체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이현상이 반란군을 정규전처럼 운용하는 실책으로 그 해 말에는 350명, 사건 겨우 반년만인 49년 4월, 고작 2백명 정도만이 남아 지리산 일대에 분산 고립되었다.[29]
이후 지리산에서 유격활동을 펼치던 반란군은 진압군의 승전으로 열세에 몰리면서 그 잔당이 한국전쟁 때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다. 반란의 주역 지창수는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이현상의 명령을 어기고 2개 중대를 여수에 잔류시켜 지역 방어에 매달리다가, 48년 11월 이후 지리산에서 이현상에게 '금싸라기 같은 봉기군 주력의 분산과 무모한 지역점령으로 인한 희생의 책임'을 물어 호된 비판을 받고 모든 지위가 박탈되었다.[30] 이후 의기소침한 상태로 대열 후미를 따라다니다가 49년 2월 지리산 기슭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발목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교전 중에 생포되면 그자리에서 총살되는게 보통이었지만 반란의 주모자라 정식 군법회의에 가게 된다. 그러나 지씨 가문은 광주의 이름난 부호로,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고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50년 8월 중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숙청된 것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라 소식 없는 북의 지원군,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대규모 군경토벌군의 압박으로 인해 반란군이 전의를 상실하자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9년 4월 9일 새벽 2시 30분쯤, 김지회·홍순석 일당 29명은 산내면 반선리 선술집 금판정에서[31] 술집 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군경과 맞닥뜨려, 홍순석을 비롯한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고, 7명은 포로로 잡혔다. 생포된 공비들이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도 같이 있었다고 진술하였지만 이들 부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김갑순 일등상사는 조경순을 비롯한 일당을 생포하였고 조경순을 심문하여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 6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김지회는 반선리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창자가 밖으로 나오는 등 그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하여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처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케 했다. 빨간 스웨터의 여대장으로 알려진 김지회의 처 조경순도 생포 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형무소에서 처형된다.[32] 이때 공을 세운 3연대 3대대는 전원 1계급 특진되었고, 김갑순 상사는 상금 100만원과 훈장을 탔다.
6.25 직전에는 이현상 휘하의 제2병단(일명 지리산인민유격대)은 겨우 70~80명이 남았고, 이후 구대원으로 불리며 남부군의 주력이 된다. 이때의 14연대 반란군 출신은 이영희(남부군 부사령관), 이진범(남부군 승리사단장), 김흥복(2대 승리사단장. 이후 81사단으로 개편), 송관일(승리사단 관일부대장), 김금일(승리사단 서울부대장)[33] 등으로 지휘관이 된다. 공식 기록에는 반란군은 392명이 사살되고 2,298명이 투항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 이현상 역시 토사구팽당한다. 이현상은 5년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행세하다가 남로당 출신의 김일성 절대지지파로부터 출당 및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산중고아가 되어 홀로 지리산을 배회하다가 1953년 9월 군경토벌대에 의해 사살당한다.[34] 당시 북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이 숙청될 때라서, 대한민국 내 박헌영의 오른팔인 이현상은 김일성에게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이태의 <이현상(남부군 비극의 사령관)>을 보면 북한에서 내려와 그를 암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김지회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이현상은 51년말 군경의 1차대공세로 남부군이 다 작살나자 100명 밖에 안남은 병력으로 '김지회 부대'와 '박종하 부대'로 부대를 재편한다. 이후 김지회 부대만은 이현상의 직속으로 끝까지 그를 지켰지만, 남로당 숙청으로 이현상이 숙청될 때 김태규를 부대장으로 하고 이름도 995 부대로 바꾸어 전남도당 구례군당 산하로 소속을 변경해 버린다. 995부대는 53년말 군경의 2차대공세때 김태규가 투항하면서 끝난다. 14연대 반란군과 남부군도 이로써 완전히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자세한 것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항목 참조.
4. 사건 이후[편집]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진압이 완료된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는 군부의 숙군이 본격화되었다. 현역 군인의 약 5%가 갈려나갔는데, 억울하게 붙들려간 사람도 한두명이 아니었다. 나중에 석방되어 고위장성을 역임한 사람도 여럿 있지만, 무고하게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받아 장애를 입은 사람도 숱하다. 신원조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엉망이던 군부를 다잡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이 북한의 지령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남로당에서도 북한에서도 전혀 원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남로당은 지상파 라디오 뉴스를 듣고 비로소 사건 발생을 알았다고 할 정도. 우발적으로, 게다가 사병 위주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의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결국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군 내부에 세포조직을 키워 세력화하려고 했던 남로당은 이 사건 이후로 군 내부의 좌파계열들이 모조리 색출되어 군 내부에서 남로당의 기반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타격이 매우 컸다.
한국전쟁 종전 후 북한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공방이 일었을 때 만주파를 제외한 연안파, 남로당파, 소련파는 이 사건의 귀결을 매우 아쉬워했다는 후문도 있다. 박헌영의 입버릇이던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 이라는 게 사실이 되었을 테니... 하지만 나중에는 되려 남로당계를 숙청할 때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 남로당 거두 박헌영의 재판에서 박헌영이 "여순사건은 내가 미군과 짜고 대한민국 군 내의 세포조직을 노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일으킨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사상적 기반이 나빴기 때문이다."라고 자아비판식으로 했던 진술이 기록돼 있다. 헌데 당시 박헌영은 1946년에 홀로 월북해 북한 내에서 입지가 약했기에 정치 기반인 남로당을 통해 입지를 강화할 속셈은 있었어도 미군과 내통하고 섣부른 반란 유도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령 아바이는 정치 경쟁자들을 어떻게든 숙청하려고 했기에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진술을 이끌어낸 것이다.
여순사건으로 군내 좌파세력이 색출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순사건 이후 숙군작업을 통해 숙청된 군인은 전체 군인의 5% 정도이다.[35] 이 숙군작업을 통해 반공성향의 군문화가 정착되었다. 한편으론 당시 군의 파벌 가운데 만주군 출신들이 대거 중요 보직에 포진하는 결과[36] 를 가져왔다고도 한다.[37] 한편 숙군작업은 반공 이데올로기 확립과 좌파세력을 척결한다는 대의명분도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확고한 군 장악 목적도 있었다. 그 결과 반국가 세력들도 좌파들과 같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이후 불어오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의 전주곡이었을 뿐이었는데 사건이 일어난 여수 지역도 아니고 근처인 순천 지역도 아니고 저~ 멀리 있던 지역의 좌파세력들까지 여순사건과 관련있다고 학살당했다. 위로 올라가는 보고의 상당수에 따르면 여순 세력들이 출몰했다고 한다.
4.1. 부족한 인지도[편집]
이 사건이 지닌 파급력에 비해서 인지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이는 대구 10.1 사건(일명 대구폭동)도 마찬가지이다. 수십 년 후에 비슷한 지역의 전남 광주에서 발생하게 되는 5.18 민주화운동에 비해서 피해 규모, 희생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여순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남로당의 지창수, 김지회라고 곧바로 답할 사람의 비율은 높지 않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은 현대사의 다른 사건인 보도연맹 학살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상세히 강의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초중고 시험에서 출제되지 않는다.
4.2. 대법원 재심 개시[편집]
대법원 2019. 3. 21. 선고 2015모2229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재심을 개시하였다.
이 사건은 전남 순천 시민인 장씨 등은 1948년 10월 국군이 반란군으로부터 순천을 탈환한 직후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돼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사형당했다.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군과 경찰이 438명의 순천지역 민간인을 내란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는 결론을 냈고, 장씨의 유족 등은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심인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당시 판결문에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내용과 증거요지가 기재되지 않았고, 순천 탈환 후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된 점 등에 비춰보면 장씨 등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검찰이 "유족의 주장과 역사적 정황만으로 불법수사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항고했지만, 2심인 광주고법도 "장씨 등이 불법으로 체포·구속됐다"며 1심의 결정이 옳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사건을 기각했다.#
이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2020. 1. 20. 선고 2013재고합5 판결
그리고, 2020년 1월 20일 오후 2시 19분,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무죄가 72년 만에 확정되었다. [1보] 법원,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무죄선고'판사의 눈물'…여순사건 피해 유족에 고개숙인 재판부 김정아 부장판사 "위법한 공권력 더 일찍 명예로움 선언 못 해 미안"
무죄판결을 내린 광주지법 순천지원 김정아 부장판사는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이번 판결의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립니다" 며 김 부장판사를 비롯한 배석 판사와 검사, 법원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장환봉씨 유가족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또한 그는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아직도 멀고도 험난하다며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 사건과 같이 고단한 절차를 더는 밟지 않도록 특별법이 제정되어 구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바랐다.
4.3. '여순항쟁'으로의 개칭 시도[편집]
4.3.1. 위령탑 명칭 변경[편집]
2020년 '여순사건 위령탑'을 '여순항쟁위령탑'으로 변경했다. #
4.3.2. 여순항쟁 10.19 역사관 개관[편집]
2020년 10월 5일, 여순사건 72주기를 맞아 전남 순천에 처음으로 여순사건을 다룬 역사관이 개관하였다. 이름은 여순항쟁 10.19 역사관으로 위치는 여순사건 순천유족회관 2층이다. 위 보도를 보면 앵커와 기자는 '여순사건'으로 부르고 시설 명칭과 안내판은 '여순항쟁'이라고 적혀있다.
4.3.3. 2022년 토론회 개최[편집]
2022년 순천대학교에서 토론회를 개최했다. #
4.4.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편집]
2018년 사건 발생 7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도 시작됐다. # 하지만 경찰 유족은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생자 합동 추념식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2021년 6월 29일, 사실상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도올 김용옥 선생은 KBS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에 출연하여 여순사건특별법 통과에 대해서 “여순특별법 같은게 통과됐는데 그런 것만 해도 사실은 이게 단순한 하나의 법을 통과한 게 아니라 이거는 여야 전체가 합의해서, 여야 전체가 합의해서 역사의 인식 전환의 획기적인 고리를 만든거란 말이에요”(중략)“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사실 문재인 정권은 나는 인정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
특별법은 여순사건 발생 73년 만에, 16대 국회부터 7명의 국회의원이 8번 발의하며 입법을 시도한지 20여년 만에, 제21대 초선 소병철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지 1년 만에 제정됐다. # 소병철, "여순사건특별법 국회 통과로 화합과 통합의 위대한 역사 시작"
2019년에 71년만에 불법연행 등 관련해서 재심을 확정했다.재심결정 환영…피해자 유족 “특별법이 숙원”
국가법령정보센터
이후 희생자 유족들이 월 100만원씩 생활보조비를 지급받게 되었다. #
4.5. 45명 첫 희생자 결정[편집]
김영록 “여순특별법 개정·국가 기념일 지정해야”
김영록 지사 "여순사건 희생자·유족 첫 결정 환영"…후속 조치 촉구
지난해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이후 올해 처음으로 희생자와 유족이 처음으로 공식인정되었다.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행사 또한 열렸다.
4.6. 정부 추모식 개최[편집]
여순사건 74년만인 2022년에 드디어 정부 주요인사들이 참여한 추모식이 열렸다.#
4.7. 위령사업[편집]
5. 여수, 순천 주민들의 증언[편집]
21세기에는 사건 이후로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사건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작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 당시에 30~50대의 청장년층이었던 사람들은 진작에 세상을 떠났고, 현재 생존자들도 나이대가 최소 90대 이상이다. 생존자들이 작고하기 전에 인터뷰를 따서 만든 다큐멘터리나 생존자가 여순 사건의 참상을 기록해놓은 수기집도 있다."반란사건이 6.25사건보다 더 무서웠어..."
여순사건 당시 순천농업학교 교사였던 김관수의 증언.
순천시 구도심 지역에는 여순사건 유족회관이 있다. 그 정도로 상흔이 가시지 않은 지역이 대부분이며, 특히 벌교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던 낙안면, 상사면 일대 주민들 중[38] 80~90대 노인들은 여순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치를 떨 정도다.
6. 당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및 진압군의 증언[편집]
7. 이승만 정부의 반응[편집]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6.25 전쟁 이전부터 치안유지법을 국가보안법으로 개정하고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국가를 구축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박정희 정권과 이후 군사정권 기간 내내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근거로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다. 정부 측의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역사학계에서 공공연하게 밝히기 시작한 것은 거의 60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 전까지 교과서는 물론 모든 매체에서 일방적으로 반란군의 탓으로 돌려왔다.
이범석은 이게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고 발표했다.[39] 그래서 당시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 이걸 가지고 김구가 여순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둥 루머가 퍼져나갔다. 김구 암살 관련 미 정보문건(.)을 보면 김구, 염동진은 우익 반대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한다. 역사편찬위에서는 염동진과 몇몇 장교들의 발언만 가지고 하는 거라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40]
심지어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이승만에게 대항하여 출마한 최능진 전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과 백범 김구 선생 계열로 48년 9월 29일 해임된 오동기 전 14연대장(광복군 출신)을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조작하여 구속했는데, 이 사건과 뒤섞어서 여순반란 사건의 총책은 최능진과 오동기라는 괴랄한 결론을 내린다. 이에 최능진은 사형, 오동기는 징역 10년을 받았다. 상술했다시피 김지회는 적색장교로 분류되어 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이라는 요직에서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를 지시한 사람이 당시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었다. 오동기 소령은 직접 상경하여 군 고위층에 김지회의 구속 건의까지 하였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장교를 함부로 구속하느냐고 하여 허위로 몰아간 적이 있다. 이런 그에게 반란의 주모자라고 하니 본인은 환장할 노릇이다.
결국 여순 반란이 북로당+소련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고, 정치적으로 눈에 가시인 김구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으니 결국 이걸 짬뽕하여 극좌와 극우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으킨 사건이라는 결론. 이 사건이 북로당+소련의 지시인지, 자신의 세력 약화에 조급해 했던 박헌영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남로당 이현상을 통해 일으킨 사건인지, 친일경찰과의 불화와 제주도로 출동을 거부한 14연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인지 등 이견이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김구가 북측과 짜고 일으킨 우익 쿠데타라는 것이나, 북한측에서 주장하듯 박헌영이 미군과 짜고 군내 세포조직을 소멸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째 극우든 극좌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실체와 관계 없이 잘되면 내 공로이고 안되면 정적에게 뒤집어씌우기다.
그러나 김구 안티세력에서는 이를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에 진압하러 갔다가 반란군이 된 제4연대장의 이름을 최남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저건 당시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룬 오마이뉴스 기사도 있다.
실제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 오동기 제14연대장에서, 제4연대장이었던 박승훈이 후임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임 제4연대장은 이정일[41] 이다. 훗날 이성가[42] 로 개명한다.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국민당정부의 정보조직인 남의사에서 활동했으며,해방전후에는 한국광복군의 북평 잠편지대 소속이었다.
저 극우 부분은 박정희 시대에 삭제되었는데, 박정희에게 있어서도 흑역사였다. 당연히 박정희에 대한 부분도 삭제된다. #,# 박정희 본인이 여순사건으로 발발한 숙군의 대상이었을 뿐더러, 극우=김구를 지칭하는 만큼 박정희로서 그냥 놔둘 일은 없었다. 자세한 것은 김구 항목의 김구의 복권 부분을 참조.
8. 학살과 희생[편집]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히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리니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드래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속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등한히 하다가는 자상 잔멸로 사망의 화를 피할 자가 몇이 아니될 위험성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하우스먼[46]
은 비공개를 전제로 한국인들은 "잔인한 개자식"이고 일본인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했으며, 한국인들에게 이를테면 처형한 시신을 가솔린으로 제거하여 처형 방법을 숨기고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에게 돌리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잔인성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브루스 커밍스, 2017,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196 페이지
특히 이승만 정부의 진압군이 반란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사상 검증을 당하고 죄파로 판정되어 살해되는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는 제주 4.3 사건에서의 과잉 진압과 유사한 형태를 보였다. 진압 임무에 나선 경찰관과 극우 폭력 단체 "서북청년단"이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였다.죄 있는 사람은 살았고, 죄 없는 사람은 무조건 총살시켜 죽였다.[47]
당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여수는 전통적으로 우익이 우세한 지역으로, 좌파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만큼 이에 대한 정부와 극우 단체의 탄압도 순천 지역에 비해서는 비교적 덜했다고는하나 여수에서도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수 근방 섬인 안도에서도 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여수시 공식 자료 그리고수년 전부터 극단적으로 좌우익이 대립해 서로 보복 살상을 일삼던 순천에는 대규모 학살극이 일어나게 되었다.
8.1. <봉선화>와 <바위고개>[편집]
반란 당시 평소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좌파계열 시민과 학생들도 이들에게 협조한 정황이 외부에 왜곡된 정보로 퍼져나가며, 사건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학생들이 협조했던 사실은 이후에 '여학생들이 치마에 무기를 숨기고 접근해 진압군을 공격했다는 "카더라 통신"'식의 크게 과장된 이야기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은 빨갱이 협조자 색출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의 수보다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처단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500명 남짓인데 비해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6,000명 이상이다. 그것도 정부 발간 공식기록이다. 어찌되었든 쌍방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반란 중 죽은 군인들의 수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살아남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이 복수에 눈이 뒤집혀 젊은 사람들은 일단 잡아가 죽이고 보는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총살당한 민초들은 총살이 집행되기 전 가곡 <봉선화>와 <바위고개>를 불러 현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으며, 이 일이 세인들에게 알려져 각 노래들이 다시 주목받는 한편, 한동안 해당 지역에서는 암묵적인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타 지역 사람들이 여수, 순천 등지에서 멋모르고 이 노래를 부르면 이상하다는 시선을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여순사건에서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먼저 발생한 것은 기록, 목격담으로 확인된다.[48] 또한, 진압군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해 재판 과정 없이 보복성 학살이 자행된 것도 맞으며, 그 과정에서 관련 없던 사람이 많이 죽었다. 늘 그렇듯 양편이 다 총을 들고 있으면 양편에서 다 죽게 되어 있다.[49] 참으로 이데올로기의 비극이라 하겠다.
- 일부 진압군들은 지리산에 진압차 들어가는 대신 전라남도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란군인 척하며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한 다음, "반란군의 명령에 따라 모였으니 너희는 좌파 빨갱이다!" 하는 낚시 작전으로 마을사람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사실 반란군들이 행군할 때 마을사람들이 진압군인지 알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있다. 반대로 고흥반도에서는 국군이 진입하자,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 만세!"라고 외쳤다가 학살당하였다.[50]
-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군인들이 와도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럴 때는 마을 사람은 전원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로 좌파으로 분류되어, 집집마다 군인들이 수색하며 사살했다. 심지어 각 섬에서 배 타고 육지로 나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야 했다.
- 각 학교의 운동장 한켠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20~40세의 모든 남성은 속옷만 입고 무릎 꿇고 앉은 채 경찰관 가족과 우익청년단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좌파와 그 부역자 외에도 평소 앙금이나 원한이 있었던 이들도 손가락으로 지목했으며[51] 그 외에도 손바닥이 투박하거나 군용 팬티를 입었거나, 머리가 짧거나, 심지어 딱 보면 빨갱이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이유로도 지목되었다. 이렇게 지목된 사람들은 다섯명 씩 손이 철사에 묶인 채 총살되어 구덩이에 던져진 뒤 장작과 기름으로 불태워졌으며, 이 광경은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다른 쪽에 있던 여자와 노약자들에게 여지없이 보여졌다. 게다가 5연대 1대대를 지휘하는 김종원은 아예 일본 헌병대 시절부터 간직해 온 일본도로 참수하다 지치면 총을 꺼내 사격연습하듯 총살했으며, 급기야 어느 골목에서 마주한 청년들조차 모두 현장에서 일본도로 베는 등 마치 분풀이 하듯 사람들을 죽여댔다.
- 또한 이 광경은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일부는 사진으로 남겨지기도 했으며,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는 "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묘사하였다.
- 그리고 각 지방 면장들도 군경 앞에서 의무적으로 좌파세력을 지목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면민 중에서 좌파 30명만 추려내!" 하면 어떻게든 30명을 맞춰 지목해야 했다.[52] 허나 이미 주요 좌파 세력은 반란군 14연대를 따라 입산하고 남은 것은 반란군이 군청창고를 깨서 나눠준 쌀 받아 먹은 사람밖에 없던 상황에서, 면장들은 할 수 없이 평소 고분고분하지 않던 사람 몇을 지목해야 했고, 그렇게 지목된 자들은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김종원 역시 이렇게 지목된 사람들을 일본도로 하나하나 목을 쳤는데, 얼마나 잔인한지 미군 보고서에서 '짐승같은 인간'이라고 특기할 정도였다.
- 일부 마을에서는 주민들 간에 도장을 빌려줄 정도로 친분이 쌓인 것이 화가 되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남로당 가입실적을 내려는 당원이 마을 이장 이름으로 도장을 빌려 주민분들 존함을 당원 가입신청서에 올렸기 때문이다.
- 심지어 여순 사건이 시작한 날 어떤 대위는 8~10명 정도의 악양 고등공민학교[53] 학생들을 산으로 끌고 가고는 일본도로 참수한 후[54] 한 학생을 살려놓은 채 그 학생에게 자신이 자른 목을 머리를 줄로 묶어 짊어진 채 산을 내려오게 하는 미친 짓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55]
그럼 여순 건으로 죽은 전체 민간인은 몇 명인가? 당시 방송과 신문은 반란군이 3,000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는 7,000명이라고 발표하고, 이듬해 전남 보건후생부는 이재민 구호자료에서 여수 등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즉 7,000명 가량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좌파 세력이 죽인 사람은 1,300명이었다.
8.2. 유언비어와 그 진상[편집]
- 한편 앞에서 여학생이 총을 들고 군인을 공격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언급했었는데, 이는 완전히 조작된 이야기다. 이기봉의 <빨치산의 진실>에서는 “교복을 입은 여수수산학교와 여수여중생들에게까지 권총과 카빈이 지급되었다. 이들은 스승을 예사로 살해하였다. 좌파 이념을 지닌 70여명의 각급 학교 교사들도 가담하여 학생들을 충동질하였다.”라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부 좌파 학생이 가담한 수준이었다.
고위간부들에게나 돌아가는 권총이 어린 학생들에게 지급되었다는 것부터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56] - 또한 당시 여수여중의 교장이었던 송욱이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소문도 이러한 유언비어가 퍼지는데 한 몫 했는데, 그는 반란군에 협조한 사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악의적인 주장으로 송욱은 물론이고 여학생들까지 연행되거나 사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 당시 수많은 헛소문이 퍼졌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어린 초등학생까지 반군에 가담해 총을 들고 저항했으며 좌파인 아들이 우익인 아버지를 쏘아 죽였다느니 하는, 그의 입 외에는 어디에서도 출처를 찾을 수 없는 괴담을 퍼뜨렸다.[57] 또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취재를 나간 이들도 헛소문을 부추겼는데, "여고생들이 '오빠' 하며 군인을 불러 다가가자 치마 속에서 권총을 꺼내 죽였다"라는 기사가 바로 이때 나왔다.[58] 하지만 여수중학교에서 조사한 결과, 실제로 실종된 여고생은 단 1명뿐이었다.
9. 반란군에 대한 평가[편집]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과 진압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존재했다는 점은 합의가 됐지만[59] , 반란군의 반란 동기와 이들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 의견이 혼재하고 있다.
9.1. 대한민국[편집]
9.1.1. 반란으로 평가[편집]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반란으로 평가하며 흑역사취급하는 관점이 주류였다.
정병준 교수는 반란이라 평가한다.
1994년에 여수문화원은 이 사건의 이름을 '14연대 반란사건' '10 20 사건' '여수주둔 군인반란사건' 중 하나로 고쳐줄 것을 정부에게 요청했다.[60]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마치 여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지역 명예가 실추된다는 사유로 14연대 반란으로 수정하기를 바란 것."이 반란은 자연 발생적이며 거의 무계획적이었다. 하사관과 사병 몇몇이 시작한 군사 반란은 몇 시간 만에 2000명 규모의 폭동으로 발전했다. 여수에서 시작된 반란은 인근 도시 순천으로 번졌고 곧 전라남도 전역을 휩쓸었다. 반란 세력은 지역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결합해 군인 반란을 지역 폭동으로 전환시켰다.
(중략)
관공서와 경찰서 등 공공 기관이 습격을 당했고, 최소 2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당시 발생한 여타의 많은 사건들과 같이, 이는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다는 폭동의 모습을 띠었다."
정병준, "한국전쟁" 233페이지
9.1.2. 항쟁 평가 및 긍정적 평가[편집]
항쟁이라고 평가하는 여순 사건 박사 2호[61] 주철희 박사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하였다.
아래 폭동론에 소개된 황남준은 항쟁과 폭동을 동시에 사용한다.“여순 사건은 제주도 4.3 사건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항쟁'이며, 이제는 이념 투쟁이 아니라 역사로 봐야 한다."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디자인흐름, "2017"[62]
이후 주철희는 '군인의 봉기는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했다'라며 여수, 순천 주민들이 반란군에 호응했다는 것을 논거로 들었다.[A]
문수현 순천대 연구원은 더 나아가 '10·19통일항쟁'이라며 통일운동으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A]
9.1.3. 기타 평가[편집]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기고한 학자 황남준은 기고글에는[63] 여순사건이 쿠데타라기보다는 무장폭동에 가깝고 그 파급 과정에서 남로당이 가담해 반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평가했으나, 동년(1987년)에 투고한 연세 제25호에는 '항쟁'이란 용어도 사용하였다.[64] 항쟁과 폭동이란 용어를 동시에 사용한 경우.
종군기자 출신의 한국전쟁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는 14연대 반란을 연대 하사관 그룹에 의해 "엉터리"로, "때이르게" 시작된 반란이며 이딴 걸 왜 비중 있게 다루냐고 의문시했다.[65]
상술된 것처럼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21년 여야 합의로 21대 국회에서 여수순천 사건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은 여순사건을 여순반란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다수가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였고, 민간인 피해를 규명하고 치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후 순천의 팔마종합운동장에 있던 기존의 '여순사건위령탑'은 '여순항쟁탑'으로 바뀌었고, 순천 버스터미널 인근에는 '여순항쟁 역사관'이 문을 열었으며, 순천대에서는 '여순항쟁 역사화전'을 개최했다.‘여순사건’ 특별법 이끈 소병철 의원의 부친은 당시 경찰
김태선 당시 수도경찰청장의 여순사건 회고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 총살장서 구사일생
(전략) 경찰관들의 수난이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당시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소씨는 현재 순천시 인제동 55의11에서 남산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다.)
반군들이 여수시를 습격한 19일 밤 소 경위는 부하 18명을 이끌고 시내로 나가 반군에게 대항했지만 순식간에 13명이 피살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나머지 5명에게 피신할 것을 명령하고 철경 사무실로 달려갔다. 주요 서류를 정리해 버리기 위해서였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벌써 반군들은 철경 사무실 쪽으로 벌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소 경위는 숨을 곳을 찾다가 숙직실 벽장 문을 열어젖혔다. 비좁은 벽장 속에는 이미 3명의 철경들이 숨어 있어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되돌아서 나오던 소 경위는 사무실 뒷문으로 뛰어든 반군들에게 잡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승으로 두 손을 결박당했다. 소 경위는 반군에게 끌려가면서 “나는 경찰관이 된 지 한 달밖에 안 된다.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마침 소 경위의 주머니에는 2만7000원이 들어 있었다. 소 경위는 7000원을 꺼내 옆에 앉은 반군에게 쥐여주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돈을 받은 반군이 운전하는 동료를 보고 “이 자식 살려줄까?” 하고 물었다. 소 경위는 다시 만원을 꺼내 그들에게 주면서 사정했다.
반군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를 집까지 태워다주고 돌아갔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소 경위는 그대로 있다가는 또 반군들에게 잡힐 것 같아 여수를 벗어나기로 하고 밤을 틈타 떠났다. 그는 약 20리 떨어진 미평(여수시 미평동)까지 가서 또 반군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소 경위는 “어린아이 병이 위독해 약을 지으러 간다”고 둘러댔다. 반군들은 이 말을 곧이들었으나 지방폭도 중에서 얼굴을 아는 자가 소 경위를 가리키며 “저놈은 여수 철도경찰대장”이라고 소리쳤다.
반군들은 소 경위를 미평 주재소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시작했다. 반군들은 “철경으로 있으면서 열차 안에서 유부녀 몇 명을 겁탈했느냐”면서 당치도 않은 신문을 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자 반군들은 장작으로 소 경위를 마구 두들겨 팼다. 고문에 못 이긴 소 경위가 “세 번 했다”고 거짓 자백하자 이번에는 “쌀을 몇백 가마 훔쳐 먹었느냐”고 다그쳤다. “100〜200가마 훔쳐 먹었다”고 아무렇게나 대답하자 반군들은 “그럼 됐다”면서 소 경위를 유치장으로 밀어넣었다.
소 경위는 깜깜한 유치장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손 짚은 곳이 끈적끈적했다. 오물인 줄 알고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피비린내가 코를 울컥 찔렀다. 유치장 바닥은 선혈로 가득했으며 칼에 찔려 죽은 10여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학살당한 경찰관들이었다. 어둠 속에 눈이 익자 시체 가운데서 한 명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철경 사무실 벽장에 숨었던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깨가 반쯤 잘려 팔 하나가 밀려 나간 무참한 꼴이었다. 그는 소 경위를 알아보고 “주임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주임님은 칼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하다 눈을 감고 말았다.
새벽이 되자 반군들은 소 경위를 끌어내 여수경찰서로 데려갔다. 여수경찰서에서도 총살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반군들은 밤 9시쯤 되자 유치장에 갇혔던 10여명을 불러내 경찰서 뜰에다 나란히 세워 놓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나란히 섰던 경찰관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소 경위도 물론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소 경위는 추운 기를 느꼈다. 그는 “내가 틀림없이 총살당했는데 웬일인가” 하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 아무데도 상한 데가 없었다.
살았다고 생각한 소 경위는 여수 뒷산으로 허둥지둥 기어 올라갔다. 죽을힘을 다해 소라(여수시 소라면)까지 다다랐으나 날이 밝자 또 반군에게 잡히는 몸이 됐다. 반군들은 피투성이의 소 경위를 보자 처형장에서 도망 온 것을 당장 알아차리고 총대로 소 경위의 등어리를 수없이 펑펑 내리쳐 반죽음이 된 그를 소라 유치장으로 끌어넣었다. 유치장에는 소라 지서장과 여수경찰서 기마대장이 먼저 끌려 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져 보기조차 처참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총살장으로 또 끌려 갔다. 총살장은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에는 발가벗긴 채 학살된 시체들이 즐비하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후략)
자료: 1974년 11월 21일, 중앙일보 게재 ‘김태선 회고록’[66]
9.2. 북한[편집]
"전라남도 려수 주둔 남조선 괴뢰군 제14련대 군인들이 미제의 식민지 파쑈 통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지향하여 일으킨 대중적 무장 폭동이다. 8. 15후 남조선 인민들은 날로 혹심해지는 미제침략자들의 식민지 파쑈 테로 통치와 야수적 학살 만행을 반대하여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인민들의 이러한 애국 투쟁의 불길은 괴뢰군 장병들에게도 미치였다.
미제와 리승만 괴뢰 도당은 1948년 10월 19일 려수 주둔 괴뢰군 제14련대 군인들에게 제주도 인민들의 애국 투쟁을 진압하라는 《동원령》을 내리였다. 이에 격분한 려수 군인들은 원쑤들의 출동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군인들은 10월 20일 악질 장교들을 처단한 후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장을 강화하면서 순식간에 려수 시가를 점령하였다. 여기에 또한 려수 시민들과 대구 주둔 괴뢰군 제6련대와 라주 주둔 괴뢰군 제5련대의 병사들까지 합세함으로써 폭동은 대중적 규모로 확대되였다.
폭동 군인들과 인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미군 나가라!》, 《남조선단독정부를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괴뢰 정부의 통치 기관들을 까부시고 려수, 순천을 비롯한 여러 지방을 해방하였다. 해방된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였으며 민주주의 단체들이 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민족반역자[67]
들을 인민재판에 넘기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인민위원회는 또한 토지 개혁 준비 사업을 하는 등 일련의 인민적 시책을 실시하면서 대중을 항쟁에로 조직 동원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동 진압에 날뛰였다. 폭동 군인들과 무장한 인민들은 비행기, 포병, 장갑차 부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해오는 미군과 괴뢰군, 무장 경찰대들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
애국적 인민들과 군인들의 영웅적 항쟁에도 불구하고 폭동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야만적인 탄압과 박헌영 간첩 도당의 간악한 파괴, 와해 책동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폭동은 남조선 인민들이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국내 반동들의 매국 행위를 강력히 반대하며 민주주의 제도의 수립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견결히 요구하고 있다는것을 보여주었으며 인민대중의 혁명성과 그 위력을 크게 시위하였다.
또한 폭동은 오직 전인민적인 항쟁으로써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철저히 때려부실 때에만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였다."
에 쓰여진 글 中
한편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정과 남한을 반대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폭동, 즉 인민 봉기 및 항쟁이었다고 선전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반란이 실패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박헌영에게 떠넘기고 있다. 정작 반란을 일으키고 그에 가담한 핵심 인원들은 남로당 당원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지창수, 김지회를 비롯한 반란군의 공을 가로채면서도, 그 실패의 책임은 박헌영에게 떠넘기는 이중적 행태를 보인 것이다.정종균 려수군인폭동의 영향 밑에 일어난 남조선괴뢰군 내 애국적 군인들의 투쟁 력사과학 3호; 려수군인폭동 백과사전 쪽 박창옥 최근의 남북조선의 정치정세 근로자 제1호; 조선중앙연감 1950년판.
- 김득중, 麗順事件과 李承晩 反共體制의 구축, 7페이지 참고.
10. 여담[편집]
이 사건 이후, 그렇잖아도 불길한 취급받는 숫자인 4는 대한민국 육군의 독립 부대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당연히 없어졌고, 일부가 반란에 가담한 4연대는 20연대(현 제20기갑여단)로 재편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역시 함번 및 중대급 이상 육상 부대번호에 4를 넣지 않으나, 이는 여순 사건과 별개로 한국전쟁 당시 함번이 4인 함정들이 우연히 좋지 않은 사건을 겪거나 격침되는 일이 잦아 미신에 민감한 뱃사람들의 특성상 사기에 영향을 크게 주기 때문에 생긴 방침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6연대는 3차에 걸쳐서 일부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지리적인 영향상, 이현상과 14연대가 있는 지리산 대신 태백산맥이나 팔공산으로 들어가서 남도부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결국 6연대도 없어졌다.
작가 리영희는 생전에 한국해양대학교에 재학할 때 이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항해 실습을 하던 선박이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던 선박이어서 여수항까지 따라가게 되었다고 한다.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 시설인 애양원을 운영하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도 이 사건 때 좌파계열 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69]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학생인 안재선 씨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런 손양원 목사의 모습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손 목사는 피난하지 못한 한센병 환자들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남아 있다가 여수 지역으로 온 조선인민군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 14연대의 주둔지는 현재의 여수시 신월동 일대로 한국화약 여수공장이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해상에 인접한 특성상, 진압에 조선해안경비대도 동원되었는데, 함 승조원을 해군 육전대처럼 차출하거나 국방경비대를 태워 상륙시켜 운용하는 등엔 행정 절차 등이 복잡하고 육해군간 연계력이 떨어져, 해군이 직접 운용할 수 있는 지상전 및 상륙전 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손원일 제독이 이를 관철시켜 창설한 것이다. 해군 역시 진압 과정에서 기관총으로 화력지원하던 경비정 승조원 1명이 육상의 반란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 전사자를 냈다.
육군 간호장교단이 최초로 활약한 사건이다. 그래서 크림전쟁과 함께 간호사 면허 국가고시 단골출제로 간호학도들에게 익숙하다.
박정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 준 김호남과 결혼하여 박재옥이라는 딸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었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이지만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에게 실망하게 되었고, 결국 두 남녀는 결혼하지 못하고 끝내 헤어졌다. 이후 이현란은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 아주 우연히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박정희와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일반인(고등학교 교사)과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사망했다. 한편 박정희는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숙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살아남는다.
순천시의 각 오래된 초등학교들에는 국민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학살이 일어나 단체로 생매장했다는 괴담이 존재한다.
2016년 4월 30일 여순사건 당시 세계적인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친 칼 마이던스가 남긴 사진이 재미사학자 유광언 씨의 기증으로 공개되었다. 보러 가기
11. 문화에서[편집]
소설 태백산맥 초반부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빨치산들이 벌교를 점령한다. 이들은 지주, 경찰, 우익인사 등을 살해하고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나 얼마 되지 않아 국군의 반격으로 산으로 돌아가게 된다. 소설을 기반으로 한 태백산맥(영화)에도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정주영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천태산(차인표가 분함)이 이 사건 때문에 죽을 뻔한다.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그를 부역자라며 고발한 것. 그 때문에 그는 총살대 앞에까지 서지만 겨우 신분이 확인되어 목숨을 건진다. 결국 신고자는 반좌율로 인해 군인들한테 잡혀간다.
손양원 목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영화에서도 이 사건이 나온다.
신준영 감독의 동백(영화)는 본 사건을 다루었다. 여순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노인 황순철과 가해자의 딸 장연실의 세대를 이어온 악연을 풀기 위한 갈등과 복수 그리고 화해와 용서를 담았다.
북한의 시인 조기천은 이 사건을 주제로 1948년 「항쟁의 려수」라는 서정시를 썼고, 민병균의 서사시 「분노의 서」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한다. 물론 북한문학인만큼 대한민국에 대한 비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하지만 사건 이후 거의 최초로 시도된 문학적 형상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전라남도 구례군에는 <산동애가>라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노래가 본 사건과 연관이 있다. 구례군 산동면에 살고 있는 19살 소녀 백순례는 둘째 오빠가 사건 관련자로 처형되고 셋째 오빠까지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자처하여 오빠 대신 경찰에 끌려가 살해됐다. 경찰에 의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가 이것이었다고 한다.[70] #
당시 대표적인 유명가수 중 하나인 남인수는 사건이 일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49년에 <여수야화>라는 곡을 발표하였다. 이 곡은 김초향 작사에 이봉룡 작곡으로 여순사건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은 한 가정의 모습을 구슬프게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곡이 발표된지 한달만에 이 곡을 금지곡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상 공식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금지곡이라 한다. 다만 60년 이후 금지곡 목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제2공화국 출범이후에 금지곡에서 풀린 걸로 추정된다.
노래 <여수블루스>도 여순사건의 아픔을 담고 있는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는 당시 대놓고 불러지지 못하고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져 왔다. 여순사건 전후로 작곡된 건 분명하지만 그외 곡의 정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작사가 강석오에 작곡가 임종하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은 듯하다. 구전가요 여수블루스에 얽힌 일화
12. 참고 문헌[편집]
- <실록 제14연대(독서신문사)>
- <빨치산의 진실(도서출판 다나, 1992년)>
- <여순병란(청산,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