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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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新羅)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약 1천 년간 56명의 군주를 거치며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왕국이라는 별명과 함께 화려한 황금 문화로도 알려져 있어 황금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동남쪽에서 시작[26] 했으며 《삼국사기》의 서술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 중 가장 빨리 건국됐다. 삼국통일전쟁 끝에 백제 전체와 고구려 중남부[27] 를 병합한 이후 삼국통일 의식을 바탕으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676년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는 통일신라라고 불린다. 이때부터 남북국시대에 접어들고 정세가 이전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통일신라 시대의 신라를 단독으로 신라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어 사실상 다른 나라 취급된다.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완전한 통일을 이룬 뒤로는 강력한 군사력과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강국이자 부국으로 거듭나 남해와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28] 불교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당대 아시아에서 중국과 더불어 가장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운 바 있다. 옛날 신라의 경제적 풍요로움과 문화적 번성함은 멀리 서역까지 알려져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도 이상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말에 이르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나머지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종국에는 왕건을 필두로 한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고려에 의해 병합되었다. 신라정통론(新羅正統論)적 입장에서는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을 이후 고려 왕조가 계승한 것이 훗날 한민족 의식으로 발달하였다고 보아 삼한일통 사상을 한민족의 의식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29][30]
2. 국호[편집]
3. 연호[편집]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들 중 독자적인 연호를 걸고 내린 기간이 가장 명확하게 확인된다.
4.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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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치[편집]
처음에는 박씨&석씨&김씨 3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교대로 왕에 즉위하며 국가를 통치했지만, 중앙집권 과정을 거쳐 김씨가 독점을 하게 되었다.
6. 경제[편집]
처음에는 변방에서 시작한 나라답게 굉장히 열악했다. 하지만 신라는 복수의 칼날을 노리며 국력 증대에 온 힘을 썼고 마침내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중국과 다이렉트로 교역을 하게 됨으로써 성장해 나갔고 결국 삼국통일을 하게 된다. 까고 말하자면 신라의 경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7. 행정[편집]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은 신라 경덕왕 대에 행정을 개혁하면서 지은 한자식 명칭[35] 을 토대로 한다. 다만 경덕왕의 한자식 지명은 신라 당대에는 행정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쓰이지 못했고 후의 고려 왕조에 들어서 경덕왕이 만든 한자식 지명을 참조하여 새로 작성한 한자식 지명을 완전히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연히 이 또한 고려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행정개혁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6]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게, 경덕왕의 지명 개혁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작업인 것처럼 착각해 신라중심주의적인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지명은 경덕왕이 완전히 새로 창조한 것이며 후대에도 계승했으니 신라문화만이 남았다!라 여기고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경덕왕은 삼국의 전통을 소멸시킨 사대주의자(이에 따르면 기존 신라의 전통 또한 말살된 것이 된다)에 불과하다!라 여기기도 하는데 일단 이런 한자식 지명은 삼국시대에도 한자문화가 완숙해지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37] 경덕왕 또한 무작위로 새로 창조하여 작명을 한 게 아니라 이전 삼국시대 지명의 뜻과 전통을 계승하여 한자화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중국 문화 도입을 통한 중앙집권화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고, 권력과 기존 전통을 유지하려 했던 기성 귀족들의 반발 또한 시시각각 터졌다는 건 기록으로도 많이 남아있다. 게다가 이런 개혁 및 교류로 인해 후기 삼국의 문화는 이미 무덤양식까지 같아질 정도로 서로 유사한 형태로 수렴 중이었고 따라서 경덕왕의 개혁은 완전히 새로운 신라중심주의적인 혹은 기존 전통을 깡그리 소멸시킨 독자적인 작업이 아닌 삼국시대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중앙집권적 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것에 해당하며 종합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 일련의 작업이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7.1. 중앙 행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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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지방 행정구역[편집]
통일 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머물러 있던 514년(지증왕대)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주, 소경식의 행정구역 체계는 삼국 통일 이전에도 비슷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진흥왕대에 실직주(옛 실직국, 현 영동지방), 신주(백제 한강유역), 사벌주(옛 사벌국, 상주 등 경북 북서부 일대), 비사벌주(옛 비화가야, 창녕 일대), 비열홀주(옛 옥저 등 함경남도 해안 지대) 5주와 중원경(현 충주), 동원경(현 강릉) 2경# 체계였다. 이후 신주가 남천주, 북한산주로 개편되고 비열홀주가 고(구)려에 함락되어 폐지되었다.
8. 사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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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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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언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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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는 고대 한국어의 동남지역 방언인 신라어를 기반으로 발달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이후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거의 소멸되어 신라어로 통합되었으며 고려의 영토는 통일신라 시기의 영토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에 이르는 한국어는 신라어에 기반을 두었다고 보는 가설이다. 다만 현대에는 신라와 고려의 향가에서 나타나는 차이[38] 등의 역사적인 기록 및 유화부인 숭배, 5층 석탑 건립 등 이전 삼국시대 문화를 계승해온 흔적이 드러나는 후삼국 호족 문화의 삼국문화로부터의 연속성, 현대 한국어의 방언연속체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점 등에 근거해 고대 한국어의 동남방언보단 중부지역 방언[39] 이 후의 표준어로 발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론 또한 제기되고 있다. 또한, 삼국어 자체가 예맥계의 언어이기에, 애초부터 삼국어 자체가 방언연속체였을 경우, 한반도 중부지역 방언이라는 것은 결국 고구려 유민들의 전통의 거주지인 개성 및 평양시 주변부 언어이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가 고구려어계 직계 또는, 고구려어와 통일신라어의 융합의 결과물이라는 반론 또한 강하게 존재한다.
11. 외교[편집]
백제 와는 상쟁하면서 나제동맹을 맺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었다. 때론 국가의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했다[40] . 하지만 국가의 이익에 따라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백제 멸망 시기까지 양국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 영역과 인구는 고스란히 신라에 귀속된다.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거나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는 하지만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41] 이후 고구려인의 일부[42] 는 신라인에 포함되었다.[43]
발해와는 초반에 고왕이 신라 대아찬 벼슬을 받으면서 외교관계를 형성했고[44] 당나라에 의해 한때 상호 대립하기도 했지만 선왕 시기 남경 남해부를 통해 신라도가 연결된 이후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가 거란에 압박받을 때에는 신라와의 동맹을 추구하기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두 나라는 사이좋게 9년의 시차를 두고 멸망했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후 중심을 잃은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각개격파당하면서 흡수된다.
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회복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신라방, 신라원 등이 생기면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며, 한반도에서는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 교류했다.
고대사에서 이 부분이 간과되는데, 왜국과 신라와의 관계는 끔찍이도 좋지 않았다. 왜국은 신라보다는 백제, 가야와의 친밀한 관계를 삼국시대 거의 내내 유지했으며, 때로는 백제-가야-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라와 백제가 손 잡은 나제동맹 때도 왜는 '친구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초기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 번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를 침략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27년 규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도록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 유례 이사금 시기에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까지 침공했다는 일본측 기록 등 기타 일본측 사서에서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들도 많이 나오는 등 신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45] (반면에 백제는 왜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칠지도 명문)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문서로.)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신라와 일본은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괜찮던 시기가 있었는데, 양국 모두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며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의 사이가 단순히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 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었다.
특히 일본의 우방이던 백제가 사라진 통일신라로 들어서는 상황이 변하게 된다.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선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일본 역시 백제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다음에는 나당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얼마 전까지 싸웠던 신라와 전격 화친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라는 일본 외교사신 접객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두어 체계적으로 대일관계를 관리했다. 훗날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신라 때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도 신라를 25차례나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다만 활발한 교역량과는 별개로 왕실과 백성들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중동과 유럽 지역에 소개되었다. 위 지도는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인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참고로 원본은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1636년작인 테세이라의 <일본전도>에서도 한반도가 섬나라로 잘못 그려져 있다.
중동인들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신라가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했고, 이라크 지역 사람들 몇십명이 신라에 정착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46]
경주시에서 특이한 유리구슬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식리총 상감 유리구슬, 경주 노서리 상감 유리구슬이 그것이다. 영국 런던 고고학연구소의 제임스 랭턴 박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지역의 고대 펠랑기 구슬과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적어도 4세기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 주민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외에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신라 승려 2명이 인도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을 거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스리비자야 왕국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로 오가는 구법순례의 중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와 교류가 있었던 근거가 되고 있다.한국에서 베트남에 대해 기록한 최초 사례는 신라의 문인 최치원의 882년 저작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이다. 《계원필경》의 일부이며, 당시 베트남 역사에 대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신라 승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기록이 부족한 당시 인도-중앙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행기를 남긴 혜초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신라 승려들이 인도를 오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법사, 혜업 법사, 현태 법사, 현각 법사, 혜륜 선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까지 일곱 명의 신라 승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현태법사는 중앙아시아 루트를 선택한 혜초와 달리 650년에서 656년 사이에 티베트와 히말라야 산맥, 네팔을 거쳐서 육로로 인도에 갔고, 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승려는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해로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신라인의 인도 구법순례는 비록 기록이 부족해 완전한 복원은 어렵지만, 이렇게 여러 경로가 개척될 정도로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기엔 이란의 전신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무역으로 교류가 있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혜초가 파사국(波斯國)도 갔다 왔음이 언급되는데 파사국은 페르시아를 음차한 것이다.
반대로 훗날 이란계가 관료층으로 자리잡은 중동, 이슬람의 세계지도나 지리서에선 신라가 언급되며 신라에 정착한 이란인들도 있었다. 또한 중세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에서는 판타지가 가미된 픽션이지만 신라가 '바실라'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극중의 무대가 되기도하며 주인공인 파리둔은 페르시아-신라 혼혈이기도 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원성왕릉의 호인석과 처용역시 당시 이주한 이란인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냈다.[47]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48]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했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의 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과 조공을 하였는데 5대 10국 중 후당과 주로 조공을 하였다.
12. 군사[편집]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기록을 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총사령관인 국왕이라도 6부병 부하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했는데 이는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대표였지 그들 모두의 위에 초월적으로 서는 위상은 아니었던 게 이유다. 하지만 나물 마립간 때부터 슬슬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찍어눌러서 씹어버리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승리를 거두는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나물 ~ 소지 마립간 때까지 신라 임금들이 걸핏하면 딴지를 걸어대는 진골들에게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늘날 경북 서남부, 충북 남부 추풍령 일대를 왕실 직할령으로 키우면서 그 일대에서 진골들과는 무관한 정예 부대를 육성한 게 이유다. 이후로 지증왕 때부터 등장하는 습보계 왕가는 눌지계 왕실에게서 승계한 추풍령에 더해 고구려에게서 수복한 '고구려 고지'인 경북 북동부 조령 일대을 또 하나의 직할지 비슷한 영역으로 확보하고, 이를 통해 옛 6부병 체제의 유산을 청산해낸다.
국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가 큰 변화를 겪게 되며, 초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지방군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뀐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583년), 낭당(郞幢: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 단위로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10,000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삼국 전쟁 말기 고구려 원정, 그리고 이후 달벌대전 때에는 10만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참으로 특이한 편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흥왕 이래로 서라벌 방어 부대 편제와 서라벌 왕궁 방어 체제를 완전 분리한 것이었다. 서라벌 방어 정예 부대는 당연히 서라벌 거주 왕경인들을 위주로 편성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서라벌 왕궁 근위대는 지휘관이든 병사든 서라벌인들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근위대는 앞서 신라 왕실이 진골들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척한 추풍령과 조령 등에서 자원 입대를 받았으며, 왕궁 근위대장 자리는 아예 진골은 임명되지 못하게 하여 왕궁 내 무력 집단에 서라벌 거주 진골이나 6두품 등이 진입하는 건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이는 이미 진흥왕 때부터 진골 집단이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 광범위한 개혁을 추구하는 왕실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49]
군복무 기간은 삼국사기에 실린 가실 열전에 의하면 3년인 듯 하지만, 워낙 전쟁이 많았던 난세인 삼국시대다보니 한없이 연장되는 일이 많았던 듯 하다. 가실은 6년이 지나서야 결혼을 약속했던 설씨녀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일본과 워낙 전쟁이 자주 일어나다보니 군복무도 혹독했는지 6년만에 나타난 가실은 너무 초췌해져 처음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50] 그러다 나당전쟁을 마지막으로 통일신라부터는 한반도에서 큰 전쟁이 수백년간 거의 없는 평화기가 찾아오게 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옛 고구려 지역 3주, 옛 백제 지역 3주, 원래 신라였던 지역 3주인 9주 5소경으로 편제하고 국왕 직속으로 수도에 출신별로 아홉 개 서당(誓幢) 부대, 그리고 지방 각 주에 하나씩 정(停) 부대를, 단 전방지역인 한주만 2개 부대씩 해서 9서당 10정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주마다 만보당 2개 부대를 각각 배치해 지방을 방어하였다. 이들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
- 신라 중앙군
- 신라 지방군
신라군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말을 목축화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백제와 유사하게 보병 중심이었으나, 이후 나당전쟁 때 당나라의 유목민 출신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장창을 주 무기로 하는 장창당(長槍幢) 부대를 따로 구성해 운용하기도 했다.
기병의 전체적 비중은 적었지만 소수의 정예 기마병을 육성했고, 경주시와 인근 가야 지역인 함안군에서 상태가 좋은 마갑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탑승자와 말 전체를 갑옷으로 감싸는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이 유물로 밝혀졌다.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板甲)을 주력으로 운용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으로 찰갑(札甲) 운용이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진천의 천보노라는 우수한 쇠뇌, 그리고 거점 수비에 쇠뇌를 사용하는 노사(弩士)를 몇천명씩 배치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조선시대부터는 쇠뇌보다는 국궁을[53] 주력으로 사용했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신라의 군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해당 링크.
이러한 신라의 군제는 통일기에 격변을 거쳤고, 통일한 이후 경덕왕에 의해 한차례 더욱 정밀한 군제 개편을 거치게 된다. 경덕왕의 군제 개편으로 구서당은 완전 해체되었고[54] 서라벌 방어 부대는 육기정 부대로 제개편되어 서라벌로 향하는 여섯 경로를 방어하도록 구체적인 임무를 받았으며, 일본이 침공해올 가능성에 대비해 부산으로부터 경주 방어선을 구축했다. 위에서 상술한 정예 쇠뇌부대들도 물론 그 방면에 배치되었다. 또한 발해나 여진을 대비해 동북방 국경 부대도 대폭 확충되었고 전면적인 요새 정비 사업도 행해졌다. 태봉과 고려가 생각보다 여진족이 북쪽으로부터 내리누르는 압력에 고생한 편인데, 경덕왕의 이런 군제 개편에 아주 덕을 많이 보았음은 물론이다. 자세한 부분은 경덕왕 문서로.
이후 김헌창의 난을 거치면서 신라의 지방군 동원 체제가 생각보다 취약하고,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게 확인되자 이번에는 헌덕왕 때부터 종심 방어선 체제 구축이 시작되어 헌강왕 때 끝을 본다.
통일신라의 중후기에 행해진 신라 임금들의 주도면밀한 군제 개편 작업 및 축성 작업 등은 후삼국시대 때도 후삼국의 쟁패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경덕왕, 헌강왕 문서로.
신라 수군의 활약상은 우산국 정벌, 기벌포 전투 등 다방면에서 전하지만 수군의 편제에 대해서는 육군에 비해서도 기록이 훨씬 부족하다. 삼국사기의 본기와 직관지를 참조하면, 신라 초기에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가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문무왕 18년(678) 선박 업무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 침공 당시 기록을 토대로 당항성에 소속된 신라 황해 함대가 100척에 6,500여명 규모일 것으로 이상훈 교수는 추산했다. 이들은 병선(兵船), 대선(大舩), 거함(巨艦)으로 표현되고 있어 당시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규모가 큰 전투함으로 볼 수 있으며,[55]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신라 육군과 별개로 당나라 수군과 오늘날의 경기도 앞바다에서 합류해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금강 하구에서 백제 수비군을 물리친 후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에서도 시기별로 수군의 규모나 편제가 달랐을테고, 신라 국토 구조를 보면 신라 수군의 주력은 남해와 동해에 배치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황해 함대 기록만으로 신라 수군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신라군은 상당히 수성을 잘 한 편이었는데, 천년이나 되는 긴 역사 동안 수도인 경주가 외적들에 의해 점령된 건 1번 뿐이었다. 고구려는 이미 동천왕, 고국원왕 때 국내성 수도가 점령 당했고, 백제는 아얘 한강 시절 수도인 위례성이 장수왕 때 통째로 점령 당해 결국 천도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는 결국 수도가 점령 당하면서 나라가 멸망했고. 이에 반해 신라는 견훤이 경주를 점령한 게 유일하다. 그 외는 내물 마립간시절, 왜군들에 의해 수도가 거의 점령당할 뻔 할 정도로 위기였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위기를 벗어난다.
역사가 신라에 비해 절반 수준인 고려나 조선 역시 수도가 최소 2번 이상 점령 당했다는 걸 고려해보면 신라군은 수성을 정말 잘 한 편이었다. 물론 신라 시절엔 수나라, 당나라가 수십만, 100만 이상 대군으로 쳐들어 온 적도, 북방 민족인 거란족, 몽골족이나 왜군이 많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적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기록이 적어서 그렇지, 나당전쟁 시절은 신라에게 국가적 위기였다.
13.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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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외국사서의 기록[편집]
《북서》<열전>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傳, <辰韓>不得自立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辰韓>之始, 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 或稱魏將毋校勘 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校勘 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諸本 「雜」 訛作 「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註 ·不耐註 ·韓註 ·濊註 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傳世三十, 至<眞平>.《隋書》作[傳祚至<金眞平>]. 按《通典》卷一八五《新羅傳》云[其王姓<金>名<眞平>], 引《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 三十餘葉.] 這裏[眞平]上當脫[金]字. 以<隋><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신라'는 근본이 '진한'의 종자이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때의 '낙랑'땅에 거한다. '진한'의 역시 '진한'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로 '진'나라때에 사역을 피하여 온 사람이라고 하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거하게 하였다.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고로 '진한'이라고 하였다.그 말로 물건의 이름이 중국인과 유사하니 나라의 이름을 나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하고 주를 상이라고 상을 도라고 하니 '마한'과 같지 않다. 또한 '진한'의 왕은 항시 '마한'사람이 하는데, 대대로 전하여 '진한'은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어, 밝혀 유이민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제도를 따랐다. '진한'의 처음에 육국이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십이국이 되고, '신라'는 그중의 하나였다. 혹 칭하길 '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쳐서 이를 깨뜨렸는데, '옥저'로 도망해서, 나중에 옛날의 나라로 돌아 왔다. 남는 자가 있어서 '신라'를 이루었다 하니, 역시 '사로'라 불리었다. 그 사람들은 '중국'과 '고려', '백제'와 섞여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도 겸하여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에 의지해 있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엄습하고, '가야국'에 의지하였다. 삼십세를 전하여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 '개황'십사년이다.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문제'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17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8월 15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 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 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 처자의 상까지 1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大業>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也.
대업'때에 왔는데, 해마다 조공하였다. '신라'의 땅은 산이 많고 험하고, '백제'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백제'도 능히 제도할 수 없었다.
15. 시기 구분[편집]
한국사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특히 신라는 국가 존속 기간이 1,200여 년[56] 이나 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나라 체제의 차이가 커서 여러가지 시기 구분이 있어 왔다. 옛날부터 사용되던 구분 방식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대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는 방법과 《삼국유사》의 구분대로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유학자 김부식이 주도해 집필한 책인만큼 왕의 혈통을 기준(성골 → 태종 무열왕계 진골 → 내물왕계 진골)으로 했는데, 상대는 혁거세 거서간 ~ 진덕여왕, 중대는 태종 무열왕 ~ 혜공왕, 하대는 선덕왕 ~ 경순왕이다. 상대는 통일 이전, 중대는 왕권이 강했던 전성기, 하대는 쇠퇴기와 대강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구분이다.[57] 후자는 승려 일연의 구분답게 불교와 연관됐는데, 불교 수용 이전(고유어 왕호) → 불교식 왕호 사용 → 중국식(유교식) 왕호 사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상고는 혁거세 거서간 ~ 지증왕, 중고는 법흥왕 ~ 진덕여왕, 하고는 태종 무열왕 ~ 경순왕이다.
현대에는 좀 더 세분화해 여섯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신화 시절을 포함하여 사로국으로 존속한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고 국가로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58]
676년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부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통일 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까지 아울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현대에는 대체가 된 편인데, 그럼 남북국 두 나라 중 남국인 신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하면 이 쪽은 지금도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부적절한 호칭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자리잡은 대체 용어는 없고 학자에 따라 대 신라, 후기 신라 등의 이름으로 676년 이전(삼국 중 1개국으로서의 신라)과 구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 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 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 기간인 992년과 같은 기간이다. 고려와 조선이 당대 중국 왕조들보다 2배 가량 더 존속한 장수 왕조들임을 감안하면 신라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나라를 영위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16. 왕조[편집]
16.1. 왕비[편집]
16.2. 왕실[편집]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 세 성씨가 여러 번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찾아봐도 비슷한 경우가 거의 없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어떻게 박, 석, 김이라는 성씨가 다른 왕이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게 가능한가. 또한, 왜 그 어떤 나라의 역사적 사료에서도 신라의 특이한 3성 정치 체제와 역성 혁명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는가.
사실 신라 초창기에는 성씨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김알지의 후손이라 전하는 김(金)씨 진흥왕(540~576년)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라 내에 있던 3개의 다른 집단인 박혁거세 후손, 석탈해 집단, 김알지 집단이 이때부터 성씨를 소급하였기 때문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성씨가 3개가 있는 것처럼 뒤죽박죽 마치 성이 바뀌듯 나오게 된다.
다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초반부는 불완전한 고대 기록을 모으는 과정에서 신화적인 대목이 많고, 초기 왕들의 지나치게 긴 수명 등 연도에 오류가 너무 많아[59] 진흥왕 이전의 박씨, 석씨 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신라 왕실은 대부분의 기간을 김씨 왕들이 통치하였지만 그들 모두 시조인 박혁거세를 참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군주는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 집단이 992년의 대부분 기간인 586년을 지배했지만, 모시는 시조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였다. 중국이나 외국 사료에서 박혁거세 시조를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외부, 그리고 머나먼 후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지 못하고 그냥 왕의 성씨가 김(金)씨여서 김씨 왕조가 세운 왕조인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신라가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김씨가 왕으로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말기에 신라가 기울면서 처남이었던 박씨 왕조가 728년 만에 잠깐 다시 부활하나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다시 김부가 왕으로 등극하나 얼마 안가 고려의 왕건에 항복하고 신라는 992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앞서 서술한 대로 신라 왕실의 군주가 된 석탈해·김알지 혈통은 석탈해 신당이나 김알지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하지 않고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시조로 숭배하였다. 일례로, 제14대 유례왕은 석탈해 혈통이지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 신당을 자기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또 제18대 실성 이사금, 제19대 눌지 마립간, 제20대 자비 마립간,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등은 김알지 혈통이지만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들 모두 박혁거세 신당을 자신들의 시조로 참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비록 성은 다르지만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석·김의 세 혈통 모두 박혁거세를 자신의 시조로 같이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김씨가 왕위를 500년 이상 독점할 때에도 박혁거세 시조 참배는 계속 되었으며, 이러한 시조 박혁거세에 대한 신성함이 후대에 박씨 왕조가 잠깐이나마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커다란 가문 내에서 작은 가문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성씨 제도, 즉 성과 씨의 제도에서 그런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