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
덤프버전 :
분류
해당 인물을 모티브로 한 '전두광'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2023년 11월 22일 개봉한 영화에 대한 내용은 서울의 봄(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2. 약력[편집]
- 1944.3. 희도소학교 졸업
- 1950.2.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졸업
- 1950.6. 6.25 전쟁 발발당시 학도병으로 참전
- 1951.3. 육군사관학교 11기 입교[6][7]
- 1955.2.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 보병 소위 임관, 제25보병사단 소대장
- 1955.10.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수료
- 1956. 중위 진급
- 1957.10.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 구대장
- 1958. 대위 진급
- 1959.4. 육군고급부관학교 군사영어반 수료
- 1959.5. 육군 공수특전단 본부 배속
- 1959.12.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 특수전학교 및 심리전학교 수료
- 1960.6. 미국 조지아 주 포트베닝 레인저 스쿨 수료
- 1960.9.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훈련 교관 과정 수료
- 1960.12.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과장
- 1961.4.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
- 1961.5. 예비장교훈련단 준비위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ROTC 교관
- 1961.5.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비서관
- 1961.7.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민원 비서관
- 1961.11. 중앙정보부 제2국 정보과장, 소령 진급 (박정희 정부)
- 1961.12.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장 (박정희 정부)
- 1963.1. 중령 진급[8] ,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 (박정희 정부)
- 1963.9. 대한민국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배속
- 1965.6. 육군대학 수료
- 1966.8.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박정희 정부)
- 1967.8.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 대대장 (박정희 정부)
- 1969.12. 대령 진급, 육군참모총장[9] 수석부관 (박정희 정부)
- 1970.12.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월남전 참전 (박정희 정부)
- 1971.11. 제1공수특전단장 (박정희 정부)
- 1972.9. 제1공수특전여단장 직무대리[10] (박정희 정부)
- 1973.1. 임기제 준장 진급,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정희 정부)
- 1974.1. 준장 진급
- 1976.6. 대통령경호실 보안차장보 겸 작전차장보 (박정희 정부)
- 1977.2. 소장 진급
- 1978.1. 제1보병사단장 (박정희 정부)
- 1979.3. 국군보안사령관 (박정희 정부)
- 1979.10.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박정희 정부)
- 1980.3. 중장 진급
- 1980.4.14.~1980.7.17. 중앙정보부장 서리 (최규하 정부)
- 1980.5.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최규하 정부)
- 1980.6. 대장 진급
- 1980.8. 예비역 대장 전역
- 1980.8.27.~1981.2.24.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80.8. 무궁화대훈장 서훈
- 1981.1. 민주정의당 총재
- 1981.2.25.~1988.2.24.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84. 페퍼다인 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 1988.2.25.~1988.4.13.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 1992.10.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
- 1999.6.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
3. 일생[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했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박정희 소장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11] 임기 말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95고합1280] ,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2]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유력 후보 세 명[13]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사면을 건의한 것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수용하며 사면되었다.
퇴임 후 상당 기간 동안 건강을 유지하였으나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 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끝으로 사망하였다.[14]
3.1. 전두환 정부[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5. 별명[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6. 선거 이력[편집]
- 11대, 12대 대통령 선거는 모두 간선제로 치러졌으므로 전두환은 윤보선, 최규하와 함께 국민의 직접선거 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세 사람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갖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두환은 사실상 유일하게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에 선출되어 임기를 마친 인물[17]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재로 비판받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조차 국민의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에서 각각 2회, 3회 당선되었다는 것[18] 과 대비되는 점이다.
7. 소속 정당[편집]
8. 여담[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9. 각종 타이틀[편집]
- 박정희에 이은 두 번째 육군 대장 출신 대통령.[20]
- 간선제로 당선된 마지막 대통령.[21]
- 국민의 직접 선거 없이 간선제로만 당선된 대통령.[22]
- 임기를 모두 끝마치고 만기퇴임한 최초의 대통령.[23]
- 가장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대통령.[24]
- 박정희에 이어 2번째 경상도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경남 지역 출신 대통령.
- 최초의 사정기관장(중앙정보부장) 출신 대통령.[25]
-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전씨 대통령.
- 전임 대통령에 이어 자와 호 두 가지를 다 가진 대통령.
- 예복 차림으로 취임식을 거행한 마지막 대통령.[26]
- 박정희에 이어 만 나이 기준으로 두 번째로 40대에 취임한 대통령.[27]
-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퇴임(57세)한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50대에 퇴임한 대통령.
- 마지막으로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훈장을 대통령 본인에게 셀프 수여한 대통령.[28]
- 현재까지 유일한 대머리 대통령.[29]
-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시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 (33년 9개월)[30][31]
- 두 번째로 장수한 대통령.[32]
- 이승만, 윤보선 이후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대통령.[33]
- 마지막으로 사망한 일제강점기 출신 대통령.[34]
- 퇴임 후 가장 많은 후임 대통령을 본 대통령.[35][36]
- 화장 된 대통령 중 최초로 시신이 화장 이후 사저에 안치 된 대통령.[37]
10. 어록[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11. 다른 대통령과의 관계[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12. 대중매체에서[편집]
역대 대통령 중 카메오로든 주연으로든 대중매체에 가장 많이 등장한 대통령이다. 보통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정치 드라마에서는 군인 출신 독재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는 반면, 카메오로 등장할 때는 숨은 흑막으로 나오거나 주연들과 우스꽝스럽게 엮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얼굴과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고 그냥 안경 쓴 대머리 아저씨로 나온다.
이렇게 많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오래 전에 재임하기도 했고, 1990년대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데다가 워낙 이미지가 나빠서 정치적 논란이 발생할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또한 전두환이 활동한 8~90년대가 시대극의 주요 배경으로 자주 다뤄지는 이유도 있다.
- 평소 애연가로써 말보로 미디엄을 즐겼었다
- 탤런트 박용식이 전두환과 용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39] 박용식은 1991년 MBC 대하드라마 《땅》과 1993년 MBC 《제3공화국》 및 KBS1 《다큐멘터리극장》, 1995년 MBC 특별기획 《제4공화국》, 1998년 《성공시대》 등지에서 전두환 역을 맡아 혼신의 열연을 보여주었다. 박용식 문서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 2005년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영화 평론가이며 한겨레신문 문화부장이었던 임범이 전두환으로 분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쐈어. 민주주의를 위해서. 알어 인마?"라고 심정을 말하는 김재규를 유리창 너머로 보다가 "어이, 어때? 저 또라이 저, 절마가 지 혼자서 총질하고 지랄한게 맞제?"라고 상황을 정리하고 퇴장한다.
-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덕화가 전두환 역할을 이어받으며 절륜한 연기를 펼쳤다. 비록 외모적인 유사성은 박용식에 미치진 못했지만 주인공으로서의 묵직한 포스를 내며, 특유의 말투까지 음성을 전두환 본인과 비교해도 거의 판박이로 재현해낸대다 특유의 대머리와 날카로운 용모 덕에 박용식에 못 미칠 뿐 전두환의 외모에도 상당한 싱크로율을 선보였다. 본인도 연기에 상당히 만족했다는 것이 후문이다. 이를 위해 집안 친척인 최병서에게 특훈을 받았다는 후문도 전해지기도. 그리고 이덕화 본인이 악역 전문 배우로 명성을 날린 적이 있는 사람인데 조선왕조오백년의 장희재,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사랑과 야망의 태수 등 완벽한 인간말종 연기를 달인 수준으로 실감나게 잘했던 과거가 있어서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냉혹한 면모를 잘 살려서 연기한 덕에 외모는 박용식에 비해 미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되려 박용식을 압도했고, 박용식이 타계한 지금은 전두환 담당 배우 중 전두환과 제일 외모와 음성이 제일 흡사하다고 평가받는다. 확실히 장군 시절의 전두환의 모습은 웃음기 없는 냉철한 분위기로 연기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의 모습은 그보다는 다소 희화화된 모습도 보여준다. 전두환은 실제로 이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
-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와 2012년 영화 26년에서는 장광이 전두환 역을 맡았다.[40] 해당 작품은 전두환의 퇴임 후 현재의 모습을 담아낸 이미지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작은 운동장 급의 광활한 그의 사택에서 쓸쓸히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곽진배에게 붙들려 힘없이 표적에 잡히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김갑세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선물을 주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데, 악역으로서 보이는 악랄한 연기가 일품이다.
- MBC 라디오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 50년에서는 성우 신성호가 맡았다.
- 이외에도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종준이, MBN 다큐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에서는 윤동환이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두 작품에서 모두 1979~80년 사이,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인 40대 후반의 전두환 장군으로 나온다.
- 1996년 MBC 드라마 화려한 휴가에서는 배우 전운이 연기했는데, 극 중 배역은 이장군으로 나왔으나, 인물소개를 보면 전두환의 일생이 거의 비슷하다.
- 2010년 SBS 창사 20주년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에서는 56화에 잠시 출연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뒷통수만 나와 배우가 누군지는 추정할 수 없다.[41]
- 2011년 MBC 월화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염동헌이 연기한 '정장군'이 전두환을 모티브로 했다.[42]
- 2013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조윤진이 연희동에서 차 안에 있던 서태지를 촬영하였지만 차에 있던 사람은 알고 보니 전두환이었다. 사진에 찍힌 전두환을 본 조윤진의 찰진 욕설은 덤.
- 2015~16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는 백담사에 간 김정봉과 만난다. 김정봉이 아는 체를 하려다가 경호원들에게 끌려간다.
- 2006년작 영화 홀리데이에선 성우 겸 배우 이의선이 전두환을 본뜬 '전직 대통령' 역으로 나왔는데, 점퍼에 마스크 차림으로 나왔다.
- 2020년작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전두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서현우가 연기했다. 다만, 실제 전두환과는 차이점이 많은데, 박통의 스위스 은행 계좌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결말부에 밝혀지며, 실제와는 달리 5.16 군사정변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묘사된다. 전두환의 포지션에 차지철과 김형욱의 포지션을 추가한 듯한 캐릭터. 작중에서 "이아고"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 2022년작 영화 헌트에서는 천수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43] , 배우 손성호가 연기했다. 김정도가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이유가 과거 목격한 5.18 진압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서명도 잘 보면 전두환의 서명을 약간 어레인지한 모양새.
- 2022년작 넷플릭스 영화 서울대작전에서는 배우 백현진이 분했으며, 역시 직접적으로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고 '전 장군'이라는 이름으로만 등장한다. 영화 성격 상 나올 때마다 이리저리 망가지는 모습을 보인다. 말투 역시 상기된 영화속에서 묘사된, 위압감 있거나 거친 말투가 아닌 뭔가 찌질하고 유약한 말투로 묘사되었다.
- 2023년작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황정민이 연기한다. '전두광'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다만 이전까지는 그래도 정치인, 장군에 가까웠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이번엔 교활하고 사악한 모습이 많이 부각되었다.[44]
-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는 부산 포위전 캠페인에서 언급으로만 등장, 6월 항쟁이 일어나자[45] 끝내 군을 진압작전에 투입하는 바람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고[46] , 전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북한은 다시 한번 남침을 강행해 국군은 5일 만에 경남까지 밀려나게 된다.
13. 관련 문서[편집]
- 12.12 군사반란
- 서울의 봄
- 29만원
- 5.17 내란
- 5.18 민주화운동
- 6월 항쟁
- 박정희
- 최규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 이순자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 땡전뉴스
- 보도지침
- 전두환 시리즈
- 평화의 댐
- 하나회
- 봉황새 작전
- 일해재단
- 전두환 회고록
- 택시운전사
14. 둘러보기[편집]
[1] #, 1930년생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아 출생신고를 실제보다 늦게 하고 애초에 학교 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니였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다만 2007년 8월 이명박이 자택 방문을 했을 당시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가 1931년생이니까... 77살이거든?"이라 말했기에 1931년생으로 보는게 맞다. 족보에는 1931년 12월 6일 출생으로 적혔다. #[2] 노태우와 이웃 사촌으로, 연희궁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평소 명절때마다 주변 이웃들에게 고기, 과일등 선물을 돌린걸로 유명하다. 실제로 집 근처에 연희궁로라는 도로 표지가 있었다가 논란이 일자 지워졌다.[3] 장지를 정하지 못해 자택에 임시안치가 됐다. 전두환 본인이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고 유언을 남겼고, 이를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방부의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임시" 안치라고는 하지만, 사망 2주기가 가까워지도록 자택에 보관 중이다. 이후 2023년 전방 고지에 장지를 찾는데 난항이 있어서 늦어졌다는게 밝혀졌다. 파주시 장산리의 사유지를 매입해서 안장될 예정이였으나# 반대의 여론이 많았고 # 이를 의식한 토지주가 매매를 안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 당분간 계속 자택에 보관할걸로 보인다. [4] 1979년의 12.12는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고 정권은 이듬해 5.17 내란과 31일 국보위 설치를 통해 잡았다. 당시 헌법인 유신헌법상 제11대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는 박정희와 최규하의 잔여 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였지만 5공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조기(早期) 종료.[5] 이때는 아직 유신 헌법 시절이라 박정희, 최규하와 같은 내용을 읽었고 8차 개헌 이후 12대 취임 선서에서는 "국헌"을 "헌법"으로 고치고 "민족 문화의 발전"을 추가해서 읽었다.[6] 후에 11기로 변경.[7] 이들은 종전 시까지 전투에 투입되지않고 후방에서 교육만 받았다. 그랬으면서 선배 기수들이 최전방 고지들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말 그대로 다진고기가 되어 갈려나가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은 종전 때까지 안전한 후방에서 지냈으면서 자신들이 진정한 정규육사 1기라고 추켜세우며 선배들을 비하했고, 자신들 및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정치군인들을 모아 그들만의 안위와 영달을 위한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군인으로써 절대 해선 안되는 행위인 쿠데타 즉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정권 찬탈까지 저질렀다.[8] 소령에서 중령 진급까지 불과 1년 2개월밖에 안 걸렸다. 이는 박정희의 대단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9] 1969년 9월 서종철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서종철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관생도 시절 훈육요원이었다.[10] 1972년 9월부로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서 부대장도 대령에서 준장 보직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은 될 수 없어서 일단 '여단장 직무대리'의 형식으로 부대장직을 유지하다가 1973년 1월 임시제 준장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된던 것이다.[11] 제11대 대통령 때는 유신헌법에 따라 선출되었기에 제4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95고합1280] [12]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최종적으로 인정된 죄명은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살인, 살인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다(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이 판결이 확정되어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다.[13]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14] 오랜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 후 딱 4주가 된 시점이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되었다. 전두환의 사망을 끝으로 20세기에 집권한(임기 시작부터 퇴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퇴임 후 생존한 기간은 33년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장 기록에 해당한다.[15]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 선거[16] 대통령 선거인단제 간접 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 폐지)[17] 윤보선은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의원내각제 의회에서 선출하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였으며, 최규하는 10.26 사건 이후 보궐선거로 선출되어 박정희의 잔여임기만을 재임하고 빠른 시간 내에 개헌하여 유신 정권을 민주 정부에 정상적으로 이양한다는 약속을 하고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더구나 윤보선, 최규하 모두 각각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18] 간접선거까지 포함하면 이승만은 3회(3.15 부정선거 제외), 박정희는 5회 당선되었다.[19] 백담사 은둔 시기에 탈당. 1988년 11월 23일.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33년 후 사망했다.[20] 전두환에 이어 세 번째는 노태우인데, 이들 3명 외에는 직업군인 출신 대통령마저 없다. 참고로 김영삼은 6.25 전쟁으로 인한 학도병이었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각각 예비역 상병과 병장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병역의무에 따른 병역 수행이다.[21] 초임인 이승만, 임기가 짧았던 윤보선, 개헌으로 간선제를 만들어 집권했던 박정희, 그 뒤를 이은 최규하에 이어 마지막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헌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초대 선거를 빼고는 2회, 3회 모두 국민의 직접투표로 당선되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였던 박정희도 제5대 대통령 선거부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까지는 3회간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22] 전두환은 11대, 12대 대선 모두 간선제를 통해서 당선됐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단 한번도 대통령 당선이 된 적이 없는 것이다. 전두환처럼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사례로는 윤보선, 최규하가 더 있지만 이 두 명은 특수 케이스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전두환이 유일하게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23] 그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으로 하야하였고, 윤보선은 5.16 쿠데타의 압박으로 사임했고,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18년 장기 집권으로 비판을 받다가 결국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재임 중에 사망하였으며, 최규하는 12.12 군사반란으로 압박을 받다가 취임 8개월만에 사임했다.[24]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재판 1심은 사형, 2심,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25] 이후 윤석열이 검찰총장으로서 역대 2번째로 사정기관장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26] 굳이 말하자면 11대 취임식에서는 수트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했는데 이것도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이 패용한 모습으로는 마지막이었으며 12대 취임식에서는 훈장 패용 없이 모닝코트 차림이었다. 19대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에 취임하여 일반적인 양복 차림으로 취임했으며, 20대 윤석열 대통령 역시 유권해석에 따라 2022년 5월 10일에 취임을 하게 되었다.[27] 1980년 11대 대통령 취임 당시 전두환의 나이는 만 49세였다.[28] 다만 그 훈장들은 2006년 노태우와 함께 전부 취소되었다.[29] 탈모를 앓는 대통령은 있었지만(1970년대의 박정희, 최규하, 이명박, 문재인) 대머리인 대통령은 전두환이 유일하다. 다만 이명박은 모발이식을 했고 문재인의 탈모 루머는 불명확하다.[30] 그 다음으로 긴 순서는 노태우(28년 8개월), 윤보선(28년 4개월), 최규하(26년 2개월) 순이다. 다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예우가 박탈돼서 예우가 박탈된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보선이 가장 길다. 참고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7년 9개월이고 현재 살아있는 대통령중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대통령은 이명박(9년 3개월)이다.[31] 반면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은 노무현(1년 3개월, 자살)이며, 자연사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이승만(5년 3개월), 김대중(6년 6개월) 순이다. 박정희는 임기 도중 암살당했으니 제외.[32] 첫 번째는 윤보선.[33]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승만에 이은 두번째로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루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다. 윤보선도 가족장으로 치뤘으나 당시 2공화국은 대통령이 국가원수였을 뿐 정부수반이 아니었다.[34]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났으나 일본제국 본토(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35] 19대인 문재인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36] 미국의 8대 대통령인 마틴 밴 뷰런과 매우 비슷한데, 그는 퇴임 후 후임 대통령 8명을 보았으며, 전두환과 같이 바로 뒤의 후임자 4명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전두환이 사망한 시점은 20대 대선을 석달 반 정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전두환이 조금만 더 건강해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봤더라면 마틴 밴 뷰런과 같은 기록을 갱신했을지도 모른다.[37]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화장 후 정토원에 임시 안치 후 봉하마을에 안장되었고, 13대 노태우 대통령은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 후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38]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카메오로 나왔다.[39] 다만 그가 고초를 겪은 것은 전두환이 지시해서가 아니라 당시 방송계 분위기가 워낙 험악하다보니 방송사 사람들이 알아서 긴 것이라고 한다. 도리어 전두환 본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황당하다며 사과까지 했었고 한술 더 떠 옆에 있던 이순자는 왜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지 않았느냐며 안타까워 했다고. 이 자리에서 전두환이 박용식에게 "앞으로 내 역할은 박선생이 다 하시오"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40] 이분 이전에 전두환 전담 배우로 유명했던 박용식 씨가 자신의 후배 성우인 박지윤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둘 다 KBS 성우극회 소속이다.[41] 황태섭 역을 이덕화가 맡았는데,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맡아서 배우개그가 성립했다.[42] 이후 염동헌은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의 선배인 유학성을 모델로 한 배송학 역을 맡아 연기했다.[43] 이름은 작중 서명란에 등장한다.[44] 배우가 이전에 맡았던 수리남의 전요환 목사가 생각난다는 평가가 많았고 반란 성공 후 화장실에서 혼자 박장대소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곡성의 악마가 생각난다는 평도 있다.[45] 김일성의 명령으로 북한이 시위대 내부에 간첩을 침투시켜서 현실보다 훨씬 혼란한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이다.[46] 정확히는 계속해서 몰려드는 시위대를 보고 패닉에 빠진 한 현장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휘하 병력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가 서울 전역이 피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