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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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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의 현재 이름인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에 대한 내용은 제주도 문서
1. 개요[편집]
탐라(耽羅)는 제주도의 옛 명칭이자 그곳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이다.
약 12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20] , 조선 초기에 완전히 본국에 편입되고 이후 구한말까지 제주도의 이름을 계속해서 '탐라'로 부르다가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라는 이름에 밀려나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탐라국의 주민인 제주 원주민, 즉 탐라인은 탐라국이 있던 당시 육지의 한민족계와 완전히 다른 혈통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한반도에서 공존한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서로 말이 통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삼한인이라 지칭하는 등 어느 정도 공통의식은 있었으나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가야인이나 탐라인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말하자면 본토 사람들과는 고구려-백제 관계와 비슷한 수준인 형제뻘 관계 정도였다. 한국이 현재 단일민족 국가이며 친척국가가 없다 보니[21] 생소할 뿐이지 이런 형제뻘 민족이나 국가 관계는 지금도 세계 각처에 흔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본토와는 차별되는 문화가 발전해 왔고, 언어적으로도 차이가 났다.[22]
원나라때부터 명나라 초기까지는 탐라국에 중국 윈난성과 몽골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나, 본토에서의 중앙 집권 통치가 굳건해진 조선 왕조때부터 한반도 본토와 같은 목, 군, 현 단위의 행정구역이 설치되고, 관리를 받으면서 점점 한반도 본토와 일체화가 되어 갔다.
2. 명칭[편집]
명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삼국시대 말기 신라 문무왕 때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원래 복속했던 백제의 멸망 이후 신라에 탐라국을 대표하여 입조할 때, 전라남도 강진군의 옛 지명인 '탐진'의 '탐'과 '라'를 합쳐서 붙여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백제가 아직 건재했던 476년 백제 문주왕 때 이미 탐라국에서 조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며, 백제 멸망 이전에 편찬된 《수서》에도 탐모라국에 표류한 사신들이 백제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따라서 위의 설화와 달리 '탐라'라는 국호는 외부에서 붙여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쓰이고 있었던 자생적인 국호로 보인다. 오히려 '탐진'이 '탐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어로 '읍(邑)'을 '담로(擔魯)'라 부르고, 《신당서》에는 탐라가 '담라(儋羅)'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탐라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주'라는 한문식 지명은 건널 제(濟)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지명인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행정구역인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면서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가설로 평가받으며 제주어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탐라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23] , 《양서》[24] , 〈울진 봉평리 신라비〉[25]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26] , 〈광개토대왕릉비〉[27] , 《삼국사기》[28] 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통 일본어의 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편이다.[29]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ᄆᆞᅀᆞᆶ(/*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한편 과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서 "우리말로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 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이 풀이를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 다만 이는 언어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조선 후기에 나온 가설이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많다. 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섬을 뜻하는 당시 고대 한국어는 '세마'에 가깝게 발음된 반면[30] 한자 탐(耽)의 당대 발음은 '톰'이었으므로 큰 차이가 있다.[31]
3. 언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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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편집]
제주도의 역사는 오랜 기간 한반도와 동떨어져 진행되어 왔으며, 그 기록 또한 매우 소략하다. 이로 인해 기초개론 수준인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내용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잘 인지하지 못할 뿐, 선사시대 고산리 선사유적 기록부터 시작해 은근히 제주도 관련 기록이 적지 않다.
4.1. 선사 시대[편집]
애월읍의 빌레못굴 유적과 같은 구석기시대 유적부터 인류 거주의 흔적이 발견되며, 이는 당대에는 제주도가 해수면의 영향으로 육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사적 412호인 고산리 선사유적이 매우 유명하며, 삼양동 선사유적 역시 사적 416호로 지정되어 있어 제주도의 인류 거주가 역사 기록 이전에도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에서 송국리형의 문화상이 청동기 중기 이후로 발현한 이래 가장 오래도록 송국리 유형의 주거지와 문화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제주도, 즉 탐라국이기도 했다. 5~6세기가 되면서부터 백제나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제된 기법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일종의 해상 문화 지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제주도의 신화적 기록으로는 개척 설화인 삼을나(三乙那) 설화가 있다. 이는 특이하게도 타 지역과 다른 '3성(三姓) 신화'의 형태이다. 《고려사》와 《동문선》 등에 인용된 탐라국 건국신화에 따르면 태고에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 오늘날의 삼성혈)에서 신인(神人) 3형제가 솟아났는데[32] , 맏이가 양을나(良乙那)[33] , 버금이 고을나(高乙那), 막내가 부을나(夫乙那)였다.[34][35][36] 이들은 벽랑국(碧浪國)[37] 에서 들어온 세 명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면서 제주 양씨, 제주 고씨, 제주 부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 형태상 고구려, 백제와 동계인 부여계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도 하며, 지도자의 칭호가 을나(乙那)인 것 또한 음가상 백제에서 부여계 왕호로 보이는 어라하(於羅瑕)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38] 시조가 바다를 건너온 여인과 결합한 부분은 김해 금관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바다를 건너온 왕후 허황옥과 결합한 것이나 신라 혁거세 거서간이 물의 근원으로 태어난 알영부인과 결합한 것과 유사하다고 본다.
이렇듯 초기에는 3을나(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후술하듯 고려시대 이후에는 국왕격인 성주(星主), 부왕격인 왕자(王子), 이 양자가 함께 다스리는 2원적 통치체제로 변화해 나간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2337년으로 단군조선보다 빠른 건국이라지만, 애초에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부터가 신뢰하기 어렵다. 이때 세 씨족 사회가 뭉쳐 고씨가 왕이 된 건 인간 세상이 생긴 후 900년 뒤라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신화적 기록은 실제 출신이나 성씨, 시간관념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창세 설화 내지 건국 설화에 나타나는 신화적 요소로서 파악해야 한다.
4.2. 삼국시대[편집]
탐라국이 본격적으로 역사서에 등장하기 이전에,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주호국이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마한 서쪽 바다 큰 섬의 세력이라는데, 한반도 부속 도서 중에는 제주도가 가장 크므로 이들이 고대에 탐라를 지배한 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사항은 아니며, 진도 등 다른 섬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적으로 탐라가 한반도 국가와 직접적으로 통교한 것은 5세기 말 백제의 남하 시기 이후로 추정된다.[39] 백제 제13대 근초고왕 대의 남방정벌 기사를 연구할 때, 과거에는 침미다례를 탐라로 규정하여 제주도까지 소급 적용했던 바 있었으나 이후에는 침미다례와 같은 마한계 후기 국가의 소재를 전남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백제 문화권이 전남으로 내려오는 것은 웅진백제 시기 이후이고,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서도 백제의 전남 및 제주 등의 남방 진출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이후로 해석할 수 있다.[40]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의 공물 납입 및 복속 기록, 《일본서기》의 복속 기록, 《수서》 〈백제전〉의 백제 부용국인 '탐모라(耽牟羅)'[41]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일반적으로 시기의 오차가 조금 있기는 해도, 동성왕 대를 전후한 500년 무렵에 전남 해안 지역과 탐라까지의 편입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3품)로 임명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년) 4월. 한국 사서 중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42]
南海中耽羅人, 初通百濟國.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
《일본서기》 17권 케이타이 덴노 2년(508년) 12월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진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중략)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3개월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토산물로 노루와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九韓, 구한)에도 탁라(托羅)가 들어간다. 이외의 8국은 왜(倭), 중화(中華), 오월(吳越),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말갈, 단국(丹國, 거란), 여적(女狄, 여진족)[43] , 예맥(濊貊, 고구려로 보임)이다. '구한(九韓)'이라고 하여 삼한을 비롯한 주변의 대동소이한 민족들을 열거한 것으로 보인다.
耽羅始遣王子阿波伎等貢獻. 伊吉連博德書云, ... 九日八夜, 僅到耽羅之嶋. 便卽招慰嶋人王子阿伎等九人, 同載客船, 擬獻帝朝. 五月廿三日, 奉進朝倉之朝. 耽羅入朝, 始於此時.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이길련박덕서》에서 말하였다. "(중략) 8박 9일만에 겨우 탐라도에 도착하였다. 섬사람인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객선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려 생각하였다. 5월 23일에 아사쿠라(朝倉)의 조정에 이 사람들을 바쳤다. 탐라의 입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서기》 26권 사이메이 덴노 7년(661년) 5월 23일
耽羅遣佐平椽磨等貢獻.
탐라가 좌평 연마(椽磨)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일본서기》 27권 덴지 덴노 6년(667년) 7월 11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조했을 때 백제가 복속시킨 이후 백제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며, '왕자'의 존재도 확인된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44]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탐라국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45]
한편, 663년, 신라 및 당나라와 백제 부흥군, 왜의 양대 연합군이 맞서 싸운 백강 전투에 탐라국도 백제/왜 연합군측에 참전했다고 보는데 이는 《구당서》 〈유인궤 열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가령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에는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 왜군과 연합해 나당동맹군에 맞서 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탐라는 한·중·일 역사서에 모두 나오는 이 전투 관련 기록을 통틀어봐도 《구당서》 〈유인궤 열전〉 이외에는 언급이 없고, 그 《구당서》에서도 백제·왜 연합군의 잔병들이 항복할 때 탐라인도 같이 데리고 항복했다는 구절이 전부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의 비중이 미미해 많은 병력을 보내 참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662년 도동음률의 신라 항복과 663년 백강 전투 당시 탐라가 백제 부흥군의 편을 들었다는 두 기록은 모순되는데, 둘을 모두 인정할 경우 당시 탐라는 백제/왜와 신라/당이라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 신라가 다시 한 번 탐라국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탐라를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662년의 신라는 백제 부흥군을 상대하랴, 고구려를 상대하랴, 그리고 곧 나당전쟁 준비하랴 바빴기 때문에 탐라국에 신경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본쪽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직후인 661년에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를 보낸 이후, 수 차례 탐라국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백제가 붕괴한 이후 탐라국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활로를 모색한 흔적이 보인다. 탐라국과 일본의 교류는 693년 사신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리고, 이후로는 일본이 탐라국과 연락할 일이 생겨도 직접 하지 않고, 신라 조정을 통하는 식으로 바뀐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이즈음부터 신라의 탐라국 통제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4.3. 남북국시대[편집]
위와 같이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항복했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에 따르면
라는 기록이 있다.“신라 때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3형제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고계에게는 도내(都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했다.”
성주란 명칭은 '별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탐라가 입조할 당시 신라 남쪽에 객성이 떴고, 그 후 고후 형제가 신라에 입조해오자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하사한 것이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항로 지표로 별자리를 이용했고, 탐라국에선 북두칠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칠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 칠성단인데 현재 속칭 '칠성통'이라 불리는 곳에 칠성단이 있었다.[46] 《탐라지》 등에 조선조 칠성단에서 제를 지냈는데 칠성은 하늘의 북두칠성이고, 제의도 천제란 기록이 있다.
이후 탐라국은 제51대 진성여왕 때인 892년 육지에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통일신라에 정기적으로 조공했다. 보덕국이나 우산국처럼 일종의 신라의 번국이 된 것인데, 속국이지만 일단 국가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어서, 신라 복속 초창기인 7세기까지는 당나라에 조천사를 보내거나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과 탐라 사이에 견탐라사(遣耽羅使)라는 사신단이 잠깐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8세기가 되면 신라의 속국화가 진행되어 견탐라사는 끊겼다. 8~9세기가 되면서 일본 측도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인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제36대 혜공왕 때인 778년 일본의 견당사가 탐라국 주민들에게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나자[47] 779년 신라에 견신라사를 보내 탐라국에 억류된 우나카미노마히토 미카리(海上眞人 三狩) 등을 빼내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이는 탐라국에서 붙잡은 외국인을 신라 조정이 지시하면 바로 수도 서라벌로 데려올 수 있었단 말이며, 즉 탐라국은 일단 시스템은 별도의 국가지만 신라의 통제를 받는 상태였던 것이다.[48]
제31대 신문왕 대인 684년에는 고지창(高支昌)을 신라에 보내 설총의 이두 문자를 도입했다고 한다. 다만 《탐라국 왕세기》에서만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낮다.
제41대 헌덕왕 대인 822년 일어난 통일신라 역사상 최대의 내란이었던 김헌창의 난 당시에는 신라의 일부 귀족이 탐라국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4.4. 고려시대[편집]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2년여가 지난 938년 탐라국주 고자견은 태자 고말로를 보내 고려에 입조하여 형식상 속국이 되었으며, 이에 고려 태조는 전대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에 성주와 왕자의 관작을 제수했다. 탐라가 신라나 고려로부터 관작을 제수받은 것은 지방 호족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가진 중앙정부에 입조하여 탐라 지방의 지배력을 인정(책봉)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 초기까지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지방 호족을 고려의 지배 체계에 편입시키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탐라국 역시 차츰 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입되었다. 처음으로 설치된 제주라는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탐라인이 고려의 빈공과[49] 에 합격하거나, 탐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간관에 임명되지 못한 고유의 사례처럼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고려와는 별개인 속국 취급을 받는 등 자치는 허용되었다.
1105년 제15대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편되면서 속국의 지위가 박탈되었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갔다.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탐라 현지인은 서로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제18대 의종 때인 1168년 양수의 난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성주'는 여전히 대를 이어 세습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고려 말 목호의 난 진행 과정에서도 목호 측과 고려 진압군 측 모두 명목상 탐라의 지배자인 탐라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고려 중기 이후의 탐라는 사실상 고려에 복속했지만 아직 독립국가의 성격도 일부 가진 2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3권 명종 광효대왕편에 따르면 탐라국 내에서도 정쟁이 일어났는데, 본래 양씨가 '왕자'를 제수받았지만 정작 마지막 왕자의 이름은 문충세(文忠世)였다. 오히려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다. 이렇게 된 사연은 좀 길다. 탐라국은 명목상 고씨가 성주였지만 사실상 서쪽 반만 성주의 영토였고, 동쪽 반은 양씨 왕자의 영토였으며, 수도는 공동 통치였다. 화산재 때문에 농사가 어려운 동부보단 서부가 항상 더 강력했지만 고씨 성주들은 이에 만족못하고 외국인 고려에서 과거를 보고 관직까지 얻을 정도로 중앙의 개경 조정에 협조해서 지원을 받았다. 조정은 덕분에 고씨와 양씨가 분열한 틈을 타 탐라국을 속국화시켰고, 고씨 성주는 탐라국 내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얻는 윈윈 전략이었으나 이들에게 부림을 당하는 탐라인들과 토호들에겐 의문의 2패가 되었다. 그러다가 제18대 의종 때의 무신정변으로 고려의 중앙 정부가 막장이 되니 고씨 성주는 반발하는 토호들을 찍어누를 수 없게 되었고, 왕권 유지를 위해서 육지의 문벌귀족 출신의 이주민 가문인 남평 문씨와 결혼 동맹을 맺게 되었다.[50]
《고려사절요》 제13권에 따르면, 남평 문씨는 고려 제19대 명종 때인 1194년에 탐라국에 파견되어 중앙 문물을 제주에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 문탁의 5세손이었던 문창우가 성주인 제주 고씨의 사위가 되면서 탐라의 부왕격인 왕자직을 세습했다. 근래에 연구진에 의해 복원된 《씨족원류》 및 《동문선》의 복원에 따르면, 문탁의 5세손이자, 문극겸의 장남 문후식의 차남인 문착(文𧨳)부터 문양부(文陽夫), 문영희(文永禧), 문신(文愼), 문창우(文昌祐), 문공제(文公濟), 문승서(文承瑞), 문신보(文臣補), 문충걸(文忠桀), 문충세(文忠世)로 이어지는 왕자직 세습으로 고씨 및 양씨의 성주, 왕자 가문에 버금가는 명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51]
여기서 뜬금없이 남평 문씨가 등장하는 이유는 탐라 서쪽의 성주 고씨 세력이 탐라 동쪽의 왕자 양씨 세력에게 위협받자, 육지의 세력인 고려의 개경 중앙정부 문벌귀족들과 권력적으로 연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들간의 다툼으로 혼돈의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무신들에게 잘못 줄을 대었다가는 역으로 숙청될 위험이 높았다. 따라서 문신 출신이면서 무신들과 가깝고, 또한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가까운 남평(나주)의 문씨가 정치적 차선책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4권에서 제17권 그리고 고려 시기의 《씨족원류》에 따르면, 제주 고씨는 탐라 내에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재상이자 상장군이었던 문극겸에게 지속적으로 접촉했고, 문극겸의 아들들인 문후식 및 문유필 때가 되어서야(고려 제23대 고종 시기) 군사와 친족을 보내어 왕자 가문인 제주 양씨를 축출하고, 기존의 성주 가문인 제주 고씨는 탐라의 서쪽, 신진 유입 세력인 남평 문씨는 탐라의 동쪽으로 함께 권력을 분점했다. 그 결과, 제주 고씨는 고려의 중앙정부와 연줄을 대고, 지속적으로 성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남평 문씨는 이후 약 400년간 탐라의 동쪽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우봉 최씨 무신 세습정권때 일어난 몽골 제국의 침략에 대한 것이 있다. 당시 고려가 더더욱 혼돈 상황이 된 끝자락 쯤, 고려의 빽이 완전히 증발한 성주 고적을 왕자 양호가 끌어내리고, 성주에 올랐다.(양호의 정변) 다수의 탐라인들과 성주 양호는 탐라국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제24대 원종 때 일어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도왔고, 1인자 자리에서 밀려난 제주 고씨와 고려 중앙정부에서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남평 문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해줄 여몽연합군을 지원했다. 최종적으로 김통정이 이끌었던 삼별초가 전멸하면서 제주 양씨가 몰락하고, 이때부터 제주 고씨가 다시 성주를 차지했으며, 동맹인 남평 문씨에게 부왕격인 왕자의 자리와 왕자의 영토인 섬 동부를 주었다. 이후 이 문씨의 왕자 직위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한 이후인, 원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몽골인들이 주목해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중국 동북의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제25대)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고려에서는 충렬왕 치세때인 1295년부터 탐라라는 이름을 '(바다를) 건너야(濟) 갈 수 있는 고을(州)'이라는 뜻의 제주로 고치고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하는 제주목으로 행정단위를 재설정했는데, 한편 원나라와의 외교관계하에서 탐라는 지방관인 만호가 파견되는 탐라만호부로도 기능했다.
제31대 공민왕이 즉위한 뒤 일어난 병신정변(1356) 이후 개경의 중앙 정부가 강력한 반원정책을 펴자 제주에 남아 있었던 몽골인 목호(牧胡)[52] 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공민왕 치세 말기인 1374년에 목호의 난이 일어나 명장인 최영 장군이 진압군의 수장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렇게 고려 정부, 몽골, 삼별초 등이 탐라국을 계속 뺏고 빼앗았지만 그 동안에도 탐라 성주는 계속 존재했다. 탐라의 토호인 성주와 왕자는 고려와 원나라에서 보내는 지방관들에게 밀려 지역의 실제적인 통치권을 서서히 잃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62년(공민왕 11년)에 성주 고복수가 목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거나, 제32대 우왕 치세 말기인 1386년 고려가 성주 고신걸과 그 아들 고봉례를 개경에 억류해두고서야 비로소 탐라가 귀순했다고 평가한 것을 보면 고려 말기의 제주(탐라) 성주가 허울뿐인 직책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5. 조선시대[편집]
조선시대에 들어선 제3대 태종 2년(1402), 명칭이 제주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高鳳禮)가 삼국시대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했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랜 세습 제도가 한 번에 폐지된 건 아니었고, 제4대 세종 27년(1445)이 되어서야 좌도지관은 상진무(上鎭撫)로, 우도지관은 부진무(副鎭撫)로 명칭이 바뀌면서 비로소 선출제도가 실시되었다. 그 후 제15대 광해군 12년(1620) 상진무는 진무(鎭撫)로, 부진무는 유향(留鄕)으로 개칭되었다.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도에 속했으나 제주목은 사실 조선시대에도 특수행정구역에 가까웠다. 실제로 다른 군수와 현감들이 목사와는 독립적으로 관찰사의 직속 부하였던 것과 달리 정의현과 대정현의 현감들은 전라도 관찰사의 직속이 아니라 제주목사의 관할하에 있었고, 소속 현감에 대한 행정적인 명령에 대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사후 보고했다.
5. 역대 군주[편집]
중국과 일본 사서에서 나타나는 조공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가계도가 만들어진다.
아래의 연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정사가 아닌 《제주 고씨 문중 족보》에서[54]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열람에 주의를 당부한다. 연표에 포함되지 않은 족보상 추가 정보는 제주 고씨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족보상 정사에서 확인되는 탐라국 왕의 이름이 몇 있지만 워낙 기록이 적어 제대로 된 왕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유리도라 같이 고씨가 아닌 왕의 인명도 기록되어 있으며, 자료에 따라 양씨가 탐라 국왕 및 성주를 지낸 기록도 있어 고씨가 쭉 탐라국의 군주였는지도 의문이 가는 노릇이다. 그리고 애초에 시조 고을나왕의[55] 무려 136년이라는 재위기간부터가 신빙성이 없다.[56] 신라에 입조한 이후에도 다시 고려에 입조하기 이전까지 왕이라는 칭호가 이어진 것을 보면 외신내왕적 성격을 띈 것으로 보인다.
5.1. 역대 성주 및 왕자[편집]
이하는 《고려사》 등의 사서에서 확인되는 고려의 제후인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조선의 지방관인 좌·우도지관의 목록이다.
6. 연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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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편집]
- 탐라국 궁궐의 존재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많으나 본궐은 지금의 제주목 관아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이유는 탐라국의 성주가 업무를 보았던 성주청이 제주 우체국 자리에 위치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신라 헌덕왕 16년(824년)에는 서귀포에 이궁인 남궐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민간설화에는 탐라국의 왕자가 지금의 서귀포 위미리 또는 한남리에 남궐을 지었다고 한다. #
- 성주청을 다시 짓는다고 한다. # 다만 애초에 탐라국 건축 관련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전통 양식의 건물을 새로 짓는 수준이 될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많다. 백제문화단지와 월정교 등이 존재한다.
- 사실 건축 관련 자료만이 아니라 탐라국 자체의 기록이 원체 부족하다. 고려 중기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 초기의 《고려사》 등에서도 짤막하게만 나와 명확히 무얼했는지 알기가 힘들다. 이 때문에 긴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 제주도 지역이 나오면 간혹 탐라국을 모델로 만든 것이 나오긴 해도, 탐라국 자체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은 거의 없는 편에 속한다. 그래도 울릉도의 우산국에 비하면 많은 유적과 유물 및 기록이 나온다. 신빙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시조와 말왕의 기록도 우산국보다 더 많다.
- 〈해적: 도깨비 깃발〉에서 권상우가 작중 탐라국의 왕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주인공 일행들이 찾는 보물들을 노리고 있는 부흥수라는 악역을 연기했다.
- 야사에서는 베트남 왕족을 제주도의 왕이 죽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