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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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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 유송의 외척 출신 군인. 난릉현을 본관으로 하는 난릉 소씨 집안 출신으로 소사화의 아버지 소원지(蕭源之)는 소문수의 동생이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소사화는 10대 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말을 타거나 도박을 즐기거나 한가롭게 노니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세요고(細腰鼓)를 치면서 이웃들을 소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소사화는 자신의 잘못을 고쳐먹고 몇 년 사이에 좋은 명성을 얻었다. 소사화는 서사를 읽는 것을 좋아했고 고금을 잘 연주했으며, 궁술과 기마술에도 능했다. 유유는 한눈에 소사화를 보고 나라를 다스릴만한 인재라고 칭찬했다.
소사화는 동진에서 대사마 사마덕문의 행참군을 지냈고 상국부 참군으로 전임되었다. 420년, 소원지가 죽은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 우림감(羽林監)으로 제수되고 석두수사(石頭戍事)를 겸임했으며, 부친의 작위인 봉양현후(封陽縣侯)를 습봉했고 선위장군(宣威將軍), 팽성패2군태수(彭城沛二郡太守)로 전임되었다. 소사화는 온갖 서적을 섭렵했고 예서에 뛰어났으며, 음률에도 정통했고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났다. 424년, 사회가 형주로 부임하면서 소사화에게 자신의 사마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소사화는 사회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2.2. 구금[편집]
426년, 소사화는 중서시랑(中書侍郞)에서 도독청주서주동관제군사(都督靑州徐州之東莞諸軍事), 진무장군(振武將軍), 청주자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사마랑지(司馬朗之), 사마원지(司馬元之), 사마가지(司馬可之) 형제가 발간현(發干縣)에서 반란을 계획하자, 소사화는 북해태수 소왕지(蕭汪之)를 파견하여 사마랑지 형제를 토벌하고 그의 잔당을 모두 평정하였다.
431년, 경릉왕 유의선 밑에서 사마(司馬), 남패군태수(南沛郡太守)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기 직전, 북위군이 남진하여 단도제가 퇴각하자 소사화는 북위의 대규모 침공을 염려하여 청주를 포기하고 평창(平昌)으로 달아났다. 소사화는 참군 유진지(劉振之)에게 하비(下邳)에 진수하라고 명했는데, 유진지는 소사화가 청주를 포기하고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달아났다. 다행히 북위군이 휴병하고 남하하지 않았으나, 동양군에 축적되어 있었던 물자들을 백성들이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소사화는 이 문제로 인해 정위(廷尉)로 소환되어 추궁을 받고 상방(尙方)에 구금되었다.
2.3. 구지 정벌과 한중 평정[편집]
432년, 구지에서 기근이 든 한편 유송의 익주(益州)와 양주(梁州)는 풍년이 들었는데, 양주자사 견법호(甄法護)가 임지에서 인심을 상실하여 양난당이 한중을 침공하였다. 옥중에 있었던 소사화는 도독양남진2주제군사(都督梁南秦二州諸軍事), 횡야장군(橫野將軍), 양남진2주자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소사화는 출병 도중 견법호가 이미 수성을 포기하고 북쪽의 서성(西城)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마인 건위장군(建威將軍) 남한중군태수 소승지에게 500명의 병사들을 거느려서 서둘러 진군하도록 명했고 서융사마 소왕지에게 소승지를 따르도록 명했다. 소승지는 길을 따라 진군하여 1,000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얻었다.
433년 정월, 소승지가 오두(磝頭)를 점령하였다. 한편 양난당은 한중을 약탈한 뒤 서쪽으로 돌아갈 때 수하인 보국장군(輔國將軍) 양진2주자사 조온(趙溫)을 남고 양주를 수비하게 하고 위흥태수 설건(薛健)를 황금성(黃金城)으로 파견했다. 소승지는 오두를 점령한 뒤 음평태수(陰平太守) 소탄(蕭坦)을 황금으로 파견했다. 설건의 부장인 강보(姜寶)는 황금성과 1리 떨어진 철성(鐵城)을 점령한 뒤 나무를 베어서 진군을 막고 있었는데, 소탄은 철성과 황금성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2월, 조온이 다시 설건과 구지의 영삭장군(寧朔將軍) 빙익태수(馮翊太守) 포조자(蒲早子)를 이끌고 소탄의 군영을 공격하자, 소탄이 이를 격퇴했지만 소탄 자신도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소승지의 사마 석문조(錫文祖)가 황금성으로 진군했고 소왕지와 그가 이끄는 보병과 기병 500명이 뒤이어 도착하였다. 한편 평서장군 임천왕 유의경이 배방명과 3,000명의 군사들을 파견했고 소승지 또한 황금성으로 진군하여 포조자와 설건 등이 하도(下桃)로 물러났다. 소사화는 자신의 행참군 왕령제(王靈濟)에게 일부 군사들을 이끌고 양천(洋川)을 따라 남성으로 진군하도록 명했다. 구지의 능강장군(陵江將軍) 조영(趙英)이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굳게 수비하자, 왕령제는 조영을 격파하여 사로잡았다. 이후 왕령제는 남성으로 진군했지만 성이 비어있었고 물자도 없었기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가서 소승지와 합류하였다.
3월, 소승지가 군대를 이끌고 아공고(峨公固)를 점령하자, 구지의 양난당은 자신의 아들인 양화를 보내 한진(漢津) 너머에 진을 쳤다. 양화는 조온, 포조자, 좌위장군(左衛將軍) 여평(呂平), 영삭장군 사마비룡(司馬飛龍)을 거느리고 총력을 동원하여 소승지를 공격하려고 했다. 구지의 병사들은 수십 겹으로 소승지의 군대를 포위 공격하여 소승지의 군사들이 활과 화살을 쏘아도 통하지 않았고 또한 쇠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어서 창이 통하지 않았다. 이에 소승지는 창을 몇 자의 길이로 자르고 큰 도끼를 써서 창 하나로 구지군의 병사 10여 명을 죽였다. 구지군은 소승지의 반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군영을 불태운 뒤 달아났다. 한중이 평정되면서 유송군은 상실한 영토를 수복하고 가맹수(葭萌水)에 성채를 설치하였다.
유송이 들어서기 이전 동진의 권신 환온이 동진을 찬탈하면서 환희(桓希)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환희가 패주한 뒤 구지가 한중(漢中)을 점령했고 범원지(范元之)와 부흠(傅歆)이 각각 자사를 맡으면서 위흥(魏興)에 치소를 두었으나 실질적인 통치 범위는 위흥군(魏興郡)·상용군(上庸郡)·신성군(新城郡)에 불과했다. 뒤에 색막(索邈)이 자사로 부임하면서 남성(南城)에 치소를 두었으나, 남성이 약탈당하면서 수비에 어려움을 느꼈던 소사화는 치소를 남정(南鄭)으로 옮겼다. 한중을 평정한 뒤 소사화는 영삭장군으로 진호되었으며, 소승지를 태자둔기교위(太子屯騎校尉)로 임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소사화에게 한중을 토벌한 것에 대해 보고를 올리고 사관에게 이를 기록하게 했다.
한편 견법호는 옥중에서 사사되었는데, 견법호의 동생인 견법숭(甄法崇)이 지방관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감옥을 관리하는 관리는 유의륭의 명에 따라 견법호가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를 올렸다.
2.4. 구지 정벌 이후[편집]
437년, 소사화는 사지절(使持節) 평서장군 임천왕 유의경의 밑에서 장사가 되었고 남만교위(南蠻校尉)를 맡았으며, 이때 문제 유의륭으로부터 궁금(弓琴)을 하사받았다.
439년, 형양왕 유의계가 유의경을 대신하여 부임한 뒤 소사화는 유의계의 밑에서도 장사로 제수되었다.
442년, 시중(侍中)으로 임명되고 전군장군(前軍將軍)을 겸임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전의 직무를 그대로 맡았다.
443년, 지절, 감옹주양남북진4주형주남양경릉순양양양신야수6군제군사(監雍州梁南北秦四州荊州南陽竟陵順陽襄陽新野隨六郡諸軍事), 영만교위(寧蠻校尉), 옹주자사, 양양태수로 옮겼다.
445년, 시중으로 제수되고 태자우솔(太子右率)을 겸임하였다. 447년, 좌위장군(左衛將軍)을 겸임하였고 다시 남서주(南徐州) 대중정(大中正)을 겸임하였다.
448년, 예전과 같이 감옹양남북진4주경릉수2군제군사(監雍梁南北秦四州荊州竟陵隨二郡諸軍事), 우장군(右將軍)이 되었고 영만교위와 옹주자사는 그대로 맡았다. 449년, 이부상서로 임명되었다. 450년,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옮겼다.
2.5. 북벌[편집]
450년, 북위군이 현호(懸瓠)를 공격하자 문제 유의륭은 북벌을 준비하고자 했다. 대신들이 모두 논의에 찬동한 가운데 소사화는 여기에 대해서 간언을 올렸으나 유의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사화는 결국 3,000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팽성에 진수하였다. 북위군이 물러난 뒤 소사화는 무릉왕 유준을 대신하여 지절, 감서연청기4주예주양군제순사(監徐兗靑冀四州豫州之梁郡諸軍事), 무군장군(撫軍將軍), 연서2주자사로 부임하였다.
452년, 소사화는 양무장군(揚武將軍) 기주자사 장영(張永)과 함께 확오(碻磝)를 포위하였다. 이전에 진군부 자의참군 신탄(申坦)과 왕현모(王玄謨)가 활대(滑臺)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여 면직되었다. 이후 청주자사 소빈(蕭斌)이 신탄을 건위장군(建威將軍), 제남평원2군태수(濟南平原二郡太守)로 임명하고 역성(歷城)에 진수시켰으며, 임중인(任仲仁)에게는 다시 신탄의 보좌를 명하고 함께 선봉이 되어 황하에 도착했다. 5월, 다시 진군을 재개하여 장영의 사마 최훈(崔訓)과 건무장군(建武將軍) 제군태수(齊郡太守) 호경세(胡景世)이 청주의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소사화도 7월에 합류하여 3개의 경로를 따라 출병하기로 계획했으며, 조정에서는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서원(徐爰)을 파견하여 전투를 독려했다.
장영과 호경세는 동쪽에서 공격하고, 신탄과 임중인은 서쪽에서 공격하고, 최훈(崔訓)은 남쪽에서 공격을 각각 감행했다. 그러나 밤에 북위군이 출병하여 최훈의 수레와 호경세의 군수품을 공격했으며, 최훈의 공격 경로도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에 소사화는 성을 눈앞에 두고도 철군을 명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걸린 기간이 18일이었다. 최훈은 확오에서 붙잡혀 살해되었고 장영과 신탄은 투옥되었으며, 소사화는 기주자사로 좌천되었다가 강하왕 유의공의 탄핵으로 결국 면직되었다.
2.6. 말년[편집]
453년, 문제 유의륭의 태자였던 유소가 유의륭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이때 소사화는 사지절, 감서청연기4주예주양군제군사(監徐靑兗冀四州豫州之梁郡諸軍事), 서연2주자사가 되었다. 직후 소사화는 팽성으로 돌아가서 유소를 토벌하고자 거병한 무릉왕 유준에게 호응하였다. 무릉왕 유준은 이후 유소를 토벌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였다.
소사화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임명되었으나 고사하였으며, 중서령(中書令), 단양윤(丹陽尹)으로 전임되고 산기상시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한편 수도 건강에서 20일 사이에 17번의 강도 사건이 발생하자, 소사화는 스스로 책임을 지며 사임하려고 했지만 효무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454년, 사지절, 도독서연청기유5주예주양군제군사(都督徐兗靑冀幽五州豫州之梁郡諸軍事), 안북장군(安北將軍), 서주자사로 전임되었다. 부임하기 직전에 강주자사(江州刺史) 장질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사화는 사지절, 도독강주예주서양진의신채3군제군사(都督江州豫州西陽晉熙新蔡三郡諸軍事), 강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장질의 난이 평정된 뒤 형주, 강주, 예주를 나누어 영주(郢州)를 설치하면서 소사화는 도독영상2주제군사(都督郢湘二州諸軍事), 진서장군(鎮西將軍), 영주자사가 되어 하구(夏口)에 진수하였다.
소사화는 455년에 사망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되었고 목(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여담[편집]
- 소사화가 청주자사로 재임할 때 항상 사용했던 구리 되가 약방 바닥에 거꾸로 놓여 있었고 갑자기 되 밑에서 2마리의 참새가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때 소사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리로 만든 되가 거꾸로 놓여있고 새 2마리가 죽어있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로다.결국 소사화의 예감이 들어맞아서 소사화는 결국 상방에 수감되었다.
- 소사화는 유의륭과 함께 종산(鍾山)을 오르다가 반석과 맑은 샘이 있는 곳에 멈췄는데, 유의륭이 소사화에게 고금을 연주하게 하고 술을 내렸다. 이때 유의륭은 소사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께 감상하니 소나무와 돌 사이이의 뜻이 있도다.
- 소사화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주를 떠날 때 측근 9명에게 사무를 맡겼는데, 유의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인께서 끝내 고향에서 농부가 되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 사람을 부리는 것을 근심하지 아니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