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 (문단 편집) == 외교 == [include(틀:신라의 대외관계)] [[백제]] 와는 상쟁하면서 [[나제동맹]]을 맺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었다. 때론 국가의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했다[* [[장수왕]] 즉위 이후 최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에 있었다. 해당 문서로.]. 하지만 국가의 이익에 따라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백제 멸망 시기까지 양국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 영역과 인구는 고스란히 신라에 귀속된다.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거나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는 하지만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당에 대한 적대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라와 손을 잡은 것이다. 물론 신라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컸을 것은 분명하다.] 이후 고구려인의 일부[* 주로 황해도, 강원도 지역민들과 여러 사유로 남하한 고구려인들]는 신라인에 포함되었다.[* 다만 백제인은 거의 대부분이 신라인이 된 반면 고구려인은 일부만이 신라인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발해]]와는 초반에 [[고왕]]이 신라 대아찬 벼슬을 받으면서 외교관계를 형성했고[* 단 대조영이 신라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신라인인 [[최치원]]이 발해를 비하하는 글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다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아 교차검증이 안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당나라에 의해 한때 상호 대립하기도 했지만 [[선왕]] 시기 남경 남해부를 통해 신라도가 연결된 이후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가 거란에 압박받을 때에는 신라와의 동맹을 추구하기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두 나라는 사이좋게 [[926년|9]][[935년|년]]의 시차를 두고 멸망했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후 중심을 잃은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각개격파당하면서 흡수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udy.zumst.com/%EC%8B%A0%EB%9D%BC%EC%9D%98%EB%8C%80%EC%99%B8%EA%B4%80%EA%B3%84.png]]}}}|| [[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회복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신라방]], [[신라원]] 등이 생기면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며, 한반도에서는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 교류했다. 고대사에서 이 부분이 간과되는데, '''왜국과 신라와의 관계는 끔찍이도 좋지 않았다.''' 왜국은 신라보다는 백제, 가야와의 친밀한 관계를 삼국시대 거의 내내 유지했으며, 때로는 백제-가야-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라와 백제가 손 잡은 [[나제동맹]] 때도 왜는 '친구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초기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 번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를 침략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27년 [[규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의 난|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도록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 [[유례 이사금]] 시기에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까지 침공했다는 일본측 기록 등 기타 일본측 사서에서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들도 많이 나오는 등 신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 [[일본서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과장되고 왜곡된 내용이 많다.](반면에 백제는 왜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칠지도]] 명문)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문서로.)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신라와 일본은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괜찮던 시기가 있었는데, 양국 모두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며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의 사이가 단순히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 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었다. 특히 일본의 우방이던 백제가 사라진 [[통일신라]]로 들어서는 상황이 변하게 된다.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선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일본 역시 백제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다음에는 나당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얼마 전까지 싸웠던 신라와 전격 화친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라는 일본 외교사신 접객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두어 체계적으로 대일관계를 관리했다. 훗날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신라 때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도 신라를 25차례나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이웃나라/안 좋은 사이|다만 활발한 교역량과는 별개로 왕실과 백성들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pture+_2018-03-28-07-44-36-1.png|width=700]]}}}|| [[통일신라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중동과 유럽 지역에 소개되었다. 위 지도는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al-Idrisi#/media/File:TabulaRogeriana_upside-down.jpg|'<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인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참고로 원본은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https://www.dh-jac.net/db/maps/results-big.php?-format=resultsp.htm&-max=300&enter=cortazzi&singleskip=3&skip=0|1636년작인 테세이라의 <일본전도>]]에서도 한반도가 섬나라로 잘못 그려져 있다. 중동인들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신라가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했고, [[이라크]] 지역 사람들 몇십명이 신라에 정착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용]]을 이 예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경주시에서 특이한 유리구슬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식리총 상감 유리구슬, 경주 노서리 상감 유리구슬이 그것이다. 영국 런던 고고학연구소의 제임스 랭턴 박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지역의 고대 펠랑기 구슬과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적어도 4세기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 주민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외에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신라 승려 2명이 인도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을 거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스리비자야 왕국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로 오가는 구법순례의 중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와 교류가 있었던 근거가 되고 있다.한국에서 베트남에 대해 기록한 최초 사례는 신라의 문인 최치원의 882년 저작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이다. 《계원필경》의 일부이며, 당시 베트남 역사에 대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신라 승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기록이 부족한 당시 인도-중앙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행기를 남긴 혜초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신라 승려들이 인도를 오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법사, 혜업 법사, 현태 법사, 현각 법사, 혜륜 선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까지 일곱 명의 신라 승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현태법사는 중앙아시아 루트를 선택한 혜초와 달리 650년에서 656년 사이에 티베트와 히말라야 산맥, 네팔을 거쳐서 육로로 인도에 갔고, 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승려는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해로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신라인의 인도 구법순례는 비록 기록이 부족해 완전한 복원은 어렵지만, 이렇게 여러 경로가 개척될 정도로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기엔 이란의 전신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무역으로 교류가 있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혜초가 파사국(波斯國)도 갔다 왔음이 언급되는데 파사국은 페르시아를 음차한 것이다. 반대로 훗날 이란계가 관료층으로 자리잡은 중동, 이슬람의 세계지도나 지리서에선 신라가 언급되며 신라에 정착한 이란인들도 있었다. 또한 중세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에서는 판타지가 가미된 픽션이지만 신라가 '바실라'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극중의 무대가 되기도하며 주인공인 파리둔은 페르시아-신라 혼혈이기도 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원성왕릉의 호인석과 처용역시 당시 이주한 이란인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어떤 국내 모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니라 태봉의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몰락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했으면 신라 침공 후 경순왕만 세워놓고 괴뢰국화하는 선에서 그친 견훤과 달리 무력으로 멸망시킨 다음 태봉 영토로 강제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 892년에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신라 서면 도통 지휘 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 공식 읍 이천호'''라는 형식상 신라의 신하로 깔고 들어가는 칭호를 자처했다. 백제 왕 칭호는 8년 뒤엔 900년부터다.]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했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의 [[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과 조공을 하였는데 [[5대 10국]] 중 [[후당]]과 주로 조공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