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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잠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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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와 백제간의 전투. 가잠성에서 펼쳐진 전투는 총 3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이중 가장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는 전투는 <해론 열전>에도 기록이 존재하는 1차와 2차 공방전이다. 가잠성의 위치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죽주산성설, 충청북도 괴산군설로 나뉘어 있다.
2. 전투[편집]
2.1. 1차 공방전[편집]
백제 무왕은 611년 10월, 신라의 가잠성을 점령하기 위해 대군을 출동시킨다. 611년 2월부터 수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보내 고구려 침공 일정과 관련되어 알아보도록 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612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임금은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했지만 실은 훼이크였다."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두고, 수나라와의 우군이던 신라가 고구려 침공에 협력하기 위해 병력을 고구려 전선에 집중한 것을 계산하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당시 가잠성을 지키던 성주는 전투가 발발하기 불과 1년전인 610년에 진평왕의 신임을 받아 가잠성 현령으로 부임한 찬덕이었다. 찬덕은 용맹함을 갖추고 있었으며, 진평왕이 이를 알고 보냈다는 점을 보아 과거에 전장에서 공을 세운 적이 있는 듯 하다.
가잠성에 도착한 백제군은 가잠성을 포위 공격했다. 찬덕은 용맹하게 백제군과 맞서 싸워 버텼으며, 백제군의 가잠성 공격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상주(上州)[3] , 하주(下州)[4] , 신주(新州)[5] 에서 병력을 차출해 급히 구원에 나서게 했다. 이들 지역을 보면 알겠지만 신라에서도 최전선에 나가 있던 정예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오히려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하고 결국 물러나게 된다. 그 모습을 본 찬덕은 다음과 같은 한탄을 남겼다.
그리고 찬덕은 다시 병사들을 다독여 백제군과의 전투를 치열하게 이어 나갔고, 이 전투는 무려 100일간 이어졌다. 전투가 길어지는 데다 지원군 마저 오지 않은 가잠성은 하늘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한겨울이었던 지라 식량이 떨어지고, 우물이 말라갔고, 결국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버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처절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이런 상황에서도 가잠성의 신라군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세 주의 장수들이 적이 강한 것을 보고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것이다. 의리 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를 지켜 죽는 것이 낫다.”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그러나 전황을 뒤집기는 힘들어 성이 함락될 위기가 되자 찬덕은
라는 유언을 남기고 느티나무에 달려들어 자결했다.[6] 찬덕의 죽음 이후 612년 정월, 가잠성의 성문은 백제군에게 젖혀졌고 결국 성은 항복하고 말았다."왕께서 나를 믿고 보내셨는데 내가 그 기대를 저버렸으니, 죽어서라도 백제인의 살집을 뜯어먹어 이 성을 되찾겠다!"
33년(서기 611)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가잠성(椵岑城)을 100일간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讚德)이 굳게 지켰으나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으며, 성은 함락되었다.
三十三年 冬十月 百濟兵來圍椵岑城百日 縣令讚德固守 力竭死之 城沒.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겨울 10월, 신라의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하여 성주 찬덕(讚德)을 죽이고 성을 멸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冬十月 圍新羅椵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2.2. 2차 공방전[편집]
한편 진평왕은 이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전사한 찬덕의 아들 해론을 20세의 나이에 대나마로 임명하고[7] 618년에는 금산당주(金山幢主)로 임명했다. 그리고 618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8] 의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때 해론도 동참했다. 해론의 참전에는 아버지 찬덕을 죽인 백제에 대한 복수심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변품이 이끄는 신라군의 남하 소식에 백제도 병력을 모아 신라군의 진격로로 진군했다. 그리고 양 측의 군대가 격돌하게 되었고, 해론은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칼을 쥔 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적진으로 뛰어들어간 해론은 백제군 여럿을 쳐죽이며 아버지 찬덕과 같은 용맹함을 과시했으나 결국 백제군에게 둘러싸여 전사하고 말았다. 해론의 용맹함에 힘입어 신라는 다시 가잠성을 되찾는데 성공하게 되었고, 진평왕은 해론의 죽음에 몹시 슬퍼하며 그의 가족들을 보살피라는 명을 내렸다. 신라인들도 해론의 죽음에 슬퍼하며 장가(長歌)[9] 를 지어 그를 기렸다고 한다.“예전에 내 아버지께서 여기서 숨을 거두셨는데, 나도 지금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게 되었으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40년(서기 618), 북한산주의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다. 해론(奚論)이 종군하여 적과 마주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四十年 北漢山州軍主邊品 謀復椵岑城 發兵與百濟戰 奚論從軍赴敵力戰 死之 論 讚德之子也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19년(서기 618), 신라의 장군 변품(邊品)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다시 빼앗아갔다. 이때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椵岑城 復之 奚論戰死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2.3. 3차 공방전[편집]
618년의 전투에서 가잠성을 빼앗긴 백제는 623년 신라의 늑노현(勒弩縣)[10] 을, 624년에는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신라의 서부전선을 공격했다. 그리고 628년에 요충지인 가잠성에 병사를 보내어 공격했으며, 진평왕은 그 소식에 병력을 보내어 가잠성을 구원토록 했다. 1차 공방전 때와는 달리 구원군들이 제몫을 한 듯, 가잠성을 백제로부터 방어해 내는데 성공했다.
50년(서기 628) 봄 2월,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임금이 병사를 내어 쳐부수었다.
五十年 春二月 百濟圍椵岑城 王出師擊破之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29년(서기 628) 봄 2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椵岑城 不克而還.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KBS의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4화에 1차 가잠성 전투가 등장한다. 전체적인 진행은 사서의 기록을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지만 각색된 부분도 상당하다. 일단 길달과 배신한 귀문 일당이 백제군과 내통했으며 소년이었던 김유신이 단독으로 출정했다는 내용이 첨가되었고 사서에서 진평왕의 명을 받고도 3주의 성주들이 미적거리면서 출정하지 않은 것을 드라마에서는 인간 말종으로 등장하는 국반 갈문왕에게 오롯이 그 책임을 넘기고 있다. 덕만공주와의 국혼을 대가로 자신이 직접 서라벌의 구원군을 이끌었지만 자신에게 반발하는 장수들을 누르고자 진군을 차일피일 미루고 진격을 주청하는 장수들을 다그쳤으며 주색잡기로 시간만 잡아 먹다가 끌내는 서라벌로 복귀해 버렸다. 이 때문에 가잠성의 군민(軍民)들은 구원병 없이 겨우 파상 공세는 막았으나 길달 휘하의 계략으로 곡창이 불타버리면서 성은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마지막 파상공세에서 김유신과 비형랑이 가잠성 내 아이들을 빼내는 동안에 성주 찬덕이 병사들과 분전을 벌이며 막아내었고, 결국 패배에 이르자 찬덕은 설화에서와 같이 나무에 머리를 들이받아 자결했고[11] 가잠성은 백제군에 함락되었다.
- MBC 드라마 <계백> 10회에 가잠성에서의 전투를 다루고 있으나 실제 역사에는 나오지 않은 가상의 전투다.
- 한국컨텐츠닷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라는 컨텐츠가 있는데 여기에 제 15화,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 제 16화 처절한 가잠성 최후의 날이라는 글이 있다. 당연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차용한 소설에 가깝다. 따라서 위의 기록 그대로를 믿어선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