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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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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7대 국왕에 대한 내용은 선덕여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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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37대 군주. 주왕산 급수대의 유래에서 언급된 군주가 바로 이 사람이다. 《삼국사기》의 구분에 따르면 신라 하대를 개막한 군주.
명칭이 비슷해서 제27대 선덕여왕과 헷갈리기 쉬운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원래 선덕여왕은 따로 여(女) 자가 들어가지 않는 '선덕왕'으로도 불렸지만 먼저 집권했음에도 그 쪽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2] 아이러니한 점은 선덕왕은 모계 쪽으로 태종 무열왕의 혈통을 진하게 잇고 있어서 무열왕계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덕왕은 과도기 군주고, 진정한 신라 하대 왕조의 시작은 열조 원성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3]
2. 출신과 가족[편집]
부계로만 따지면 제17대 내물 마립간의 10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찬 김효방(金孝芳)이고, 할아버지는 김원훈(金元訓)이다.[4]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5] 으로, 따라서 선덕왕은 성덕왕의 외손자이며, 효성왕과 경덕왕의 외조카이자 혜공왕의 고종사촌형[6] 이다. 그러므로 부계로만 따지면 선덕왕은 내물왕계이지만 어머니가 성덕왕의 딸이라 모계도 같이 따지면 선덕왕은 이전 왕들과 매우 가까운 친척이며, 태종 무열왕계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덕왕은 5묘를 모실 때 외조부인 성덕왕을 함께 모시기도 했다.
선덕왕의 왕비인 구족부인(具足夫人)[7] 은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기록마다 다른데 《삼국사기》에서 각간 양품(良品)의 딸 혹은 아찬 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각간 낭품(狼品)의 딸이라고 다르게 써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름인 양품과 《삼국유사》에서 기록된 이름인 낭품이 이름 표기가 음운이 유사해서 동일인이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는 의공 쪽의 관등이 6두품 진급 상한인 아찬에 걸려있기 때문에 구족부인은 진골로서 양품/낭품의 딸이고, 후궁은 6두품으로서 의공의 딸로 본다.
선덕왕의 할아버지 김원훈의 여동생이 박씨 진골 박창근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이, 다름아닌 원성왕의 어머니였으므로 선덕왕은 경덕왕의 고종사촌 동생임과 동시에 원성왕에게도 모계쪽 6촌 형이기도 했다. 게다가 선덕왕의 작은 할아버지의 손녀딸, 즉 선덕왕의 부계쪽 6촌 여동생은 원성왕의 아내이자 이후 원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신라 임금들의 모후였다. 선덕왕은 고로 원성왕에겐 모계쪽 6촌 형이자 아내의 부계쪽 6촌 형이 되는 것인데, 선덕왕 자신은 결코 바라진 않았겠지만 징검다리 임금으로선 가장 좋은 후보자였다.
3. 생애[편집]
왕위에 오르기 전 김양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경덕왕 재위 기간인 764년 정월에 이찬 만종이 상대등, 당시 아찬이었던 김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 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이후 왕위에 오르는 열조 원성왕과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지속적으로 올랐던 점으로 봤을 때는 전제 왕권을 견제하는 귀족 세력의 득세라 보기는 어렵고, 당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세력과 일본과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세력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도 나왔지만 주류로 받아들여지는 의견은 아니다.
어쨌든 771년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 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감찰 기관인 숙정대(肅正臺)의 장관이었다는 점으로 당시 선덕왕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혜공왕 12년에 경덕왕 시절 한화된 관제의 복구 작업을 주관하였다. 즉,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다시 무위로 되돌린 것이다.[8] 혜공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그런데 당시 혜공왕과 가장 가까운 인척은 김양상 뿐이었다는 사실과 이후 그의 행적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
기록에 따르면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였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김양상이 4월에 김경신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김지정을 죽이고, 김양상이 혜공왕과 왕비를 시해한 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기록을 있는 그대로만 바라보면 그의 즉위가 무열왕 방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고 결심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위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덕왕은 뒷날 조선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잠시 즉위한 정종과 비슷한 바지사장 위치였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을 정도.
그런 기록을 통해 보면 신라의 왕위 계승 서열상 태종 무열왕계의 방계에 불과했던 김주원보다 성덕왕의 외손인 김양상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김양상이 김경신과 함께 혜공왕을 죽인 후, 왕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김양상이 중립적인 성향의 범왕당파로서 혜공왕을 도와 정책을 펼쳤다가 자신의 군주가 시해당하는 사변 속에서 김경신 및 귀족들의 강압적인 추대로 인해 즉위한 것으로 볼 여지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은 김양상이 아닌 김경신을 노린 것이었으며, 이 때 김경신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김지정을 포함한 반란 세력을 평정한 뒤 혜공왕을 포함한 왕의 일가를 아예 쓸어버리고, 범왕당파였던 김양상을 강제로 왕위에 올렸다고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선덕왕 사후 즉위한 열조 원성왕이 선덕왕의 왕비를 예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하하고 있으며 동시에 출궁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다.
김양상을 귀족 세력의 선두 주자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러한 견해는 성립하기 어렵다. 우선 성덕왕 및 효성왕 시기에 태종 무열왕 직계 왕실를 보위하긴 했으나 견제 또한 했던 가장 강력한 김씨 귀족 세력은 성덕왕 및 효성왕의 외척 계열이었던 김순원 계열이었고, 금관가야계 신 김씨인 김유신계 또한 적어도 경덕왕 때까지는 얼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내물왕계 김경신 집안이 오히려 경덕왕 때에 와서야 두각을 드러낸 신흥 세력이었고, 흔히 태종 무열왕계로 알려진 김주원 계열은 무열왕 계통이긴 했어도 상당한 방계였으며, 그닥 무열왕 직계인 혜공왕을 위해 한 것도 없는데다 오히려 그 당시 무열왕 직계 왕실에선 가장 위협이 되는 집안이었다. 그 중 외척인 김순원 계통이 점점 홀대받기 시작하는 신 김씨 김유신계와 함께 서둘러 혜공왕을 제거하려 획책하다가 그 나머지 김씨 귀족 및 그나마 남은 왕당파 연합에게 먼저 광탈당하고 마는 거고, 이후 무열왕 방계인 김주원 계열과 내물왕계인 김경신 계열이 서로 팽팽히 맞서는 사이 선덕왕이 일종의 과도기 군주이자 타협안으로 즉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이치에 맞다.
혜공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김양상, 즉 선덕왕은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으며, 이찬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의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즉위 시점에 이미 사망했던 아버지 김효방을 '개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선덕왕의 치적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즉위년의 어룡성에 대한 개편이다. 780년에 어룡성(御龍省)[9] 에 둔 봉어(차관급)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패강진[10] 개척인데 781년에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산주(오늘날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783년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 사업을 일단 완료했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 세력의 양성 또는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의 축출을 꾀하려는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만에 승하하니 불교 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선덕왕의 아버지인 김효방이 732년 9월~733년 정월에 당나라에서 숙위 중 사망했으므로 늦게 잡아도 732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사망 당시에는 최소 50대 중반으로 즉위 시점이 늦었기 때문에 재위 기간이 짧은 것이다. 후사가 없는 가운데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승하하여 그의 사후 김복호의 후손인 김경신과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 사이에 차기 왕위를 놓고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5년 4월에 왕위에서 물러나려 했으며 6년 정월에 병에 걸리고 내린 조서에서는 왕위를 물러나고자 했던 의사 표현과 곧 죽을 것에 대한 내용 및 자신을 화장해 줄 것을 드러낸 점'에서 태종 무열왕 방계의 김주원을 후계로 삼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선덕왕 사후 처음에는 김주원이 의논되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열조 원성왕의 즉위는 김주원에게 돌아갈 왕위를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자신의 세력으로 억누르고 즉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덕왕 사후 때마침 비가 내려서 강물이 불어났고, 이로 인하여 김주원이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김경신을 즉위시키니 비가 그쳤다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많은 사건을 함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이야기에서 선덕왕이 생사기로에 있을 때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김주원이 집에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의문점을 던진다.
한편 열조 원성왕은 태종 무열왕 사후 지속된 왕위 계승자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방계 출신이었다.[11] 즉 제2왕통의 시작, 진정한 신라 하대의 포문을 연 군주는 선덕왕보다는 열조 원성왕부터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동프랑크 왕국 독일의 콘라트 1세와 유사한 면이 보인다. 전 왕가의 외손으로서[12] 전 왕가의 부계 직계가[13] 끊어지자 옹립됐지만, 정작 본인은 본인 일가에게 물려주지 못하여 1대에 그치고, 전 왕가와 혈통상 거의[14] 혹은 완전히 무관한[15] 다른 가문으로 왕권이 완전히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一年 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 왕의 부모를 추존하고 처를 왕비로 삼다
一年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의공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 어룡성 봉어를 경으로 고쳤다가 다시 감으로 고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秋七月 사자를 보내 주와 군을 위로하다
三年春閏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옮기다
三年秋七月 시림 벌판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四年春一月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로 삼다
四年春一月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리다
五年夏四月 왕이 왕위에서 물러나려 하다
六年春一月 당에서 왕을 책봉하다
六年春一月 왕이 병이 낫지 않자 유조를 내리다
一年春一月十三日 선덕왕이 죽다
《삼국사기》 9권은 효성왕부터 시작하여 선덕왕에서 끝난다.
5. 둘러보기[편집]
[1] 어머니인 사소부인이 704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에 맞추어 대강의 출생연도를 추정함. 선덕왕의 아버지인 김효방이 732년 9월 - 733년 정월에 당나라에서 숙위 중 사망했으므로, 늦게 잡아도 732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신당서》의 기록상 열조 원성왕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그의 출생년도로 추정되는 730년대보다는 확실히 앞서서 태어났다.[2] 본 문서는 '宣'德王이고, 여왕은 '善'德王이다.[3] 원성왕도 흔히 내물 마립간계 군주라고 하는데 사실 원성왕은 지증왕의 직계로서 부계로서는 선덕왕보다 무열왕계에 가깝긴 했다. 그러나 직접적 혈통은 선덕왕에게 밀리는데다 부계로는 무열왕 직계인 김주원에게 밀리는 상황이었기에, 원성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무열왕계, 자신 같은 지증왕계, 선덕왕 같은 내물 마립간계를 포괄할 내물 마립간을 부각시키면서 본인이 선덕왕과 같은 내물 마립간계의 동생으로서 선덕왕을 이었음을 천명했던 것이다.[4] 성덕왕 1년에 아찬 관등에 중시(中侍)로 임명된 인물의 이름도 원훈(元訓)으로 동일인이라면 성덕왕의 측근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김양상이 귀족파의 수장이 아니라 왕당파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김양상이 경덕왕이 죽기 얼마 전인 경덕왕 23년 아찬으로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경덕왕에게 아들 혜공왕을 도와줄 인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5]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남편인 김효방의 사망 연대로 보았을 때 성정왕후의 소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선덕왕이 즉위한 후에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존되었다.[6] ...이기는 한데 선덕왕은 대략 719년생, 혜공왕은 758년생이므로 무려 40살이나 차이난다.[7] 구족왕후라고도 불린다.[8] 21세기 대한민국의 지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경덕왕의 지명 한화 정책은 다음 혜공왕대에 사실상 취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의미가 없지는 않은 게 나중에 다시 부활시키고 오락가락하다가 고려시대에 들어 완전히 한화 지명이 자리잡았다. 결과적으로는 경덕왕이 구상했던 대로 된 것이다.[9] 경덕왕 때인 752년에 설치한 왕 주변 관리를 관할하는 관청[10] 오늘날의 황해도와 평안남도(대동강) 인근 지역으로 고구려 후기의 중심지로서 신라는 삼국통일 100여 년만에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신라 영향권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계통의 토호들을 통해 느슨한 형태의 간접 지배를 하고 있었고, 성덕왕 때 패강에 수자리를 설치하는데 그쳤었다. 약 50년만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군사 시설인 진을 설치한 것이다.[11] 정확히 말하자면 열조 원성왕의 증조할머니가 태종 무열왕의 딸이기는 하다. 그러나 성덕왕의 외손자인 선덕왕과 달리 다른 태종 무열왕계 왕들과 촌수가 너무 벌어져 내물왕계로 보는 것이다.[12] 각각 콘라트는 카롤링거 가문 아르눌프의 외손자, 선덕왕은 김씨 무열왕계 성덕왕의 외손자.[13] 각각 루트비히 4세와 혜공왕.[14] 원성왕(김경신) 계열. '거의'인 이유는 부계로는 정말 멀기는 하지만 어쨌든 같은 김씨이며, 또한 증조모가 무열왕의 딸이기 때문.[15] 콘라트 및 그 자손의 작센 왕조(오토 왕조). 신라와는 달리 구 카롤루스 왕가와는 전혀 친인척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