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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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경주시의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흔히 대구광역시가 사회주의로 유명한 지역이었던 만큼, 경주시도 한동안은 진보정당이 강세를 보인 지역이었다. 1956년 3대 대선 때 조봉암이 우세한 경상북도 내 몇 안 되는 지역이었다.[1] 그러나 5대 대선 때에는 포항시, 영천시, 안동시와 더불어 경상북도 내에서 윤보선의 득표율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진보의 세를 이어가서가 아니라 6.25 전쟁 당시 북한과 대치했기 때문에 여타 경북 지역에 비해 반공보수 사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남로당에 적을 두고 있었던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고깝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윤보선을 뽑는 것은 보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이후로는 경북답게 자연히 보수정당 강세 지역이 되었으며, 특히 경주대학교 설립자이자 이사장인 김일윤이 5선을 한 지역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인 만큼 쇠락했어도 규모가 어느 정도 있던 도시라 옛날에는 갑과 을 두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으나, 16대 총선에서 결국 합구되었고, 이후로 국회의원은 단 1명만 뽑고 있다. 18대엔 친이와 친박이 격돌한 지역이었으나, 다시 돌아온 친박연대 김일윤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명이던 정종복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2] 5선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대 총선에서부터 독촉국민회의 김철, 이석 후보가 당선되어 보수세가 면밀히 강한 지역구임을 보여주었고 2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안용대 후보와 대한청년단 이협우 후보가 당선, 3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김철과 이협우가 당선, 4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안용대 후보, 자유당 이협우 후보, 자유당 이종준 후보의 당선으로 전형적인 자유당 지지지역이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5대 총선에서는 자유당의 공백을 민주당이 메꾸면서 민주당 오정국, 무소속 김종해, 민주당 황한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전형적인 TK 중심 보수정당 지지지역이다. 6대 총선과 7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이상무 후보가 재선, 8대 총선에서는 신민당의 약진으로 신민당 심봉섭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중선거구제 이후 9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박숙현 후보, 무소속 이영표 후보가 당선되고 10대 총선에서는 민주공화당 박숙현 후보와 신민당 박권흠 후보가 당선되어 여전히 보수텃밭임을 증명했다.
11대 총선에서는 민주정의당 박권흠 후보와 무소속 김순규 후보가 당선되어 여전히 보수 텃밭 중에서도 상텃밭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12대 총선에서는 민주정의당 박권흠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일윤 후보의 당선이 여전한 보수 텃밭이라는 것을 계속 증명했다. 소선거구제로 바뀐 13대 총선 이후에도 보수정당 중 구 민정계 출신이 꾸준히 당선되었으나, 제14대 국회의 서수종 의원이 사망 후 치러진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는 문민정부가 TK를 홀대하고 PK만 너무 신경쓴다는 여론으로[3] 민주당 이상두 후보가 승리했지만 그 이후는 원상복귀되었다.
별다른 이슈가 없던 경주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제18대 국회의 김일윤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직을 상실한 후 2009년 실시된 재선거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실시된 제18대 총선에서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명이었던 현역 국회의원 정종복이 뜻밖에도 친박연대 김일윤 후보에게 패배했었다. 한나라당은 다시 한 번 이명박의 최측근인 정종복 전 의원을 공천했고, 친박에선 무소속 정수성 전 야전사령관을 적극 밀어주며 사실상 친이, 친박 대결 구도가 또 완성되었다. 이때 한나라당에선 이례적으로 최고위원회의를 경주까지 내려와서 하고, 나경원, 박희태, 홍준표 등 인지도 있는 친이계 정치인들까지 지원 유세를 하는 등 정종복 전 의원을 위해 화끈한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17대 국회 당시 정종복 전 의원의 의정 활동에 대한 경주시민들의 실망감 등이 겹쳐지면서 결국 정종복 의원은 무소속 정수성 후보에게 약 10%p 차이로 다시 한 번 낙선하고 만다.
여담으로, 경주시의 강한 보수 성향에는 박정희 정권 당시의 경주 개발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경주시에 대규모 문화재 발굴 및 관광 개발 사업이 있었고,[4] 이로 인해 경주가 신라 문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관광도시로 자리잡은 부분이 있기 때문. 지금 와선 그저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박근혜 역시 대선 공약으로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을 내걸고 경주 지역의 관광 개발을 시도하기도 했다.
1. 선거구 정보[편집]
1.1. 도의회[편집]
1.2. 시의회[편집]
자세한 내용은 경주시의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 지역 특징[편집]
흔히 대구광역시가 사회주의로 유명한 지역이었던 만큼, 경주시도 한동안은 진보정당이 강세를 보인 지역이었다. 1956년 3대 대선 때 조봉암이 우세한 경상북도 내 몇 안 되는 지역이었다.[1] 그러나 5대 대선 때에는 포항시, 영천시, 안동시와 더불어 경상북도 내에서 윤보선의 득표율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진보의 세를 이어가서가 아니라 6.25 전쟁 당시 북한과 대치했기 때문에 여타 경북 지역에 비해 반공보수 사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남로당에 적을 두고 있었던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고깝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윤보선을 뽑는 것은 보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이후로는 경북답게 자연히 보수정당 강세 지역이 되었으며, 특히 경주대학교 설립자이자 이사장인 김일윤이 5선을 한 지역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인 만큼 쇠락했어도 규모가 어느 정도 있던 도시라 옛날에는 갑과 을 두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으나, 16대 총선에서 결국 합구되었고, 이후로 국회의원은 단 1명만 뽑고 있다. 18대엔 친이와 친박이 격돌한 지역이었으나, 다시 돌아온 친박연대 김일윤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명이던 정종복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2] 5선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대 총선에서부터 독촉국민회의 김철, 이석 후보가 당선되어 보수세가 면밀히 강한 지역구임을 보여주었고 2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안용대 후보와 대한청년단 이협우 후보가 당선, 3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김철과 이협우가 당선, 4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안용대 후보, 자유당 이협우 후보, 자유당 이종준 후보의 당선으로 전형적인 자유당 지지지역이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5대 총선에서는 자유당의 공백을 민주당이 메꾸면서 민주당 오정국, 무소속 김종해, 민주당 황한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전형적인 TK 중심 보수정당 지지지역이다. 6대 총선과 7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이상무 후보가 재선, 8대 총선에서는 신민당의 약진으로 신민당 심봉섭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중선거구제 이후 9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박숙현 후보, 무소속 이영표 후보가 당선되고 10대 총선에서는 민주공화당 박숙현 후보와 신민당 박권흠 후보가 당선되어 여전히 보수텃밭임을 증명했다.
11대 총선에서는 민주정의당 박권흠 후보와 무소속 김순규 후보가 당선되어 여전히 보수 텃밭 중에서도 상텃밭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12대 총선에서는 민주정의당 박권흠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일윤 후보의 당선이 여전한 보수 텃밭이라는 것을 계속 증명했다. 소선거구제로 바뀐 13대 총선 이후에도 보수정당 중 구 민정계 출신이 꾸준히 당선되었으나, 제14대 국회의 서수종 의원이 사망 후 치러진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는 문민정부가 TK를 홀대하고 PK만 너무 신경쓴다는 여론으로[3] 민주당 이상두 후보가 승리했지만 그 이후는 원상복귀되었다.
별다른 이슈가 없던 경주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제18대 국회의 김일윤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직을 상실한 후 2009년 실시된 재선거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실시된 제18대 총선에서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명이었던 현역 국회의원 정종복이 뜻밖에도 친박연대 김일윤 후보에게 패배했었다. 한나라당은 다시 한 번 이명박의 최측근인 정종복 전 의원을 공천했고, 친박에선 무소속 정수성 전 야전사령관을 적극 밀어주며 사실상 친이, 친박 대결 구도가 또 완성되었다. 이때 한나라당에선 이례적으로 최고위원회의를 경주까지 내려와서 하고, 나경원, 박희태, 홍준표 등 인지도 있는 친이계 정치인들까지 지원 유세를 하는 등 정종복 전 의원을 위해 화끈한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17대 국회 당시 정종복 전 의원의 의정 활동에 대한 경주시민들의 실망감 등이 겹쳐지면서 결국 정종복 의원은 무소속 정수성 후보에게 약 10%p 차이로 다시 한 번 낙선하고 만다.
여담으로, 경주시의 강한 보수 성향에는 박정희 정권 당시의 경주 개발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경주시에 대규모 문화재 발굴 및 관광 개발 사업이 있었고,[4] 이로 인해 경주가 신라 문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관광도시로 자리잡은 부분이 있기 때문. 지금 와선 그저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박근혜 역시 대선 공약으로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을 내걸고 경주 지역의 관광 개발을 시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