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갑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 정치인.
2. 생애[편집]
1936년 경상남도 밀양군 초동면#에서 태어났다. 마포구에서 잠시 유년시절을 보낸 적이 있으며, 밀양국민학교, 밀양동명중학교, 밀양공립농잠학교, 육군사관학교(17기)를 졸업하였다. 허화평, 허삼수, 김진영, 안현태 등과 동기. 다만 하나회 소속은 아니었다. 수송 병과 장교로 복무하다가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여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하였다.
전두환 정부 때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1] 1987년 6월 항쟁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수용을 건의하였다. 노태우 정부 출범 후 1988년 총무처장관에 임명되었다. 총무처장관 재임 당시 좌경세력이 확대되고 있다고 발언하여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 야당의 반발을 야기했으며, 1989년 3월 노태우의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 이행을 촉구하면서 장관직을 사퇴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김덕룡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2]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밀양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7월 31일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남도 밀양시·창녕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산업자원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아무런 직도 맡지 않고 "보수정권이 권력을 되찾았으니 이제 정계를 떠나겠다. 그리고 퇴임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선 그리 호의적인 기억이 별로 없지만 고향마을 사람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나누는 모습에는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3]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한국당 - 한나라당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김덕룡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자 "참 치사한 사람"이라며 맹비난했다.[4][5] 현재는 국민의힘 상임고문이다.
3. 정치 성향[편집]
강성 우파의 아이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애초에 육군 출신인데다 5공 인사라서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5공 인사의 핵심이었던 허화평, 허삼수 같은 인물들보다 더 보수 성향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당에 좌경세력이 늘어나는 것 같다는 발언을 여러차례 해서 민주당 출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6] 노무현 탄핵 사태 때에는 노무현의 탄핵에 적극 찬성한 사람이기도 하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남경필, 원희룡, 고진화 등 소장파들을 여당의 프락치로 간주하고 열린우리당으로 가라는 발언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할 말은 하는 소신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례로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땡전뉴스에 대한 국민들의 솔직한 반응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6월 항쟁이 터졌을 때에는 직접 명동성당을 찾아가서 시위 현장을 살피기도 했다. 당시 시민들의 시위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두환에게 과감한 결단(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내려줄 것 등을 직언하기도 했다. 제17대 국회 시절에는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당하자 조승수 지키기 탄원서에 서명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으며[7]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7인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 파동 당시 이를 전격 비판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 당시 당대표 후보로는 이준석을 지지했다.#
4. 논란[편집]
아들들이 병역면제라서 욕을 먹었다.
5. 여담[편집]
애처가다. 1998년 2월 뇌출혈로 아내가 쓰러지자 1년 넘게 사물의 이름을 가르치고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어주며 병간호를 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아내 얼굴을 화장하는 남자’란 책도 출간했다.# 이후 17대 국회 말기에 정계 은퇴 선언을 한 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유인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내를 돌볼 겁니다.(중략) (아내하고) 해외 가면 렌트카 내가 얻고 부킹도 내가 할 거예요.” 라고 대답했다.#
2021년 11월 24일 전두환 장례식에 등장하여 조문을 한 뒤 기자들을 만나 1988년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이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반대하는 노태우 대표를 전 전 대통령이 설득해 직선제 개헌을 실현했다고 증언했다.#[8]
2023년 2월 1일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6·29 선언이 발표되기까지의 청와대 내 상황을 담은 자필 메모 2건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