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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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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기 [[남양주시|{{{#bf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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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형식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왕조 14대 임금인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의 능이다. 동구릉에서 가장 동북쪽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파일:htm_20090707141211a000a010-001.jpg

목릉을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에서는 가장 왼쪽이 의인왕후릉, 가운데 아래가 선조릉, 오른쪽 위가 인목왕후릉이다.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각각 다른 언덕에 능이 자리하고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했다. 기사


2. 역사[편집]


파일:5231.jpg

1930년대 목릉의 모습 (출처: 조선고적도보). 인목왕후릉에서 선조릉을 바라본 모습이다. 현재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른 점이 없는 모습이다.

목릉이 최초로 조성된 것은 1600년이다.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선조 33년)에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능을 조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기사

이 후 선조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에 세상을 떠나자, 1608년 2월 25일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고 하였으나조선왕조실록기사, 태조의 증조모 정숙왕후의 능호 숙릉(淑陵)과 음이 같다고 하여 5월 19일에 능호를 목릉(穆陵)으로 고쳤다.조선왕조실록 기사1, 기사2 이후 6월 12일에 건원릉 서쪽 산줄기[1]에 장사를 지냈다.조선왕조실록 기사, "이해 6월 12일에 양주의 건원릉 서쪽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후 1630년(인조 8년)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2]과 목릉(穆陵)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하였다. 즉, 현재 헌종과 그 왕후가 묻혀있는 경릉은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은 흉당(凶堂)이라는 의미.

마지막으로 1632년(인조 10년)에 선조의 2번째 왕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는데, 이 인목왕후릉은 의인왕후릉이나 선조릉과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 혜릉(惠陵)[3]이라는 별도의 능호를 정하였다가 목릉과 능역을 합치자는 의논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능호도 목릉으로 통일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3. 형식[편집]


조선 왕릉 중에 3개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이 조성된, 즉 3개의 다른 언덕에 각각 단릉이 조성된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은 목릉이 유일하다.[4] 목릉에 있는 3기의 봉분 중에서 선조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같이 둘러쳐져 있는, 상대적으로 위엄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의인왕후릉과 인목왕후릉은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만 두른 상태로 조성이 되었다.

또한, 목릉의 정자각은 모든 조선왕릉에 있는 정자각 중에 유일하게 다포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보물 17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조선국 선조대왕 목릉 의인왕후 부중강 인목왕후 부좌강(朝鮮國 宣祖大王 穆陵 懿仁王后 附中岡 仁穆王后 附左岡)"이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로 조선왕후 왕릉에 있는 표석 중에 부중강(附中岡)[5]이라는 용어가 들어가 있는 비석은 이 목릉이 유일한데, 이 부중강이라는 단어가 쓰인 연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기사 1746년(영조 22년) 12월 23일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표석이 세워진 년도는 숭정 기원후 120년으로서 서기 1747년(영조 23년)이다. 이 목릉 비석 안내문에는 숭정 기원후 120년을 서기 1748년이라고 적어놓고 있으나, 숭정 기원후 120년은 1747년이 맞으므로[6] 비석의 안내문이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2017년 9월 현재, 수라간[7]은 정자각 왼쪽 아래 편에 위치하고 있으나, 수복방[8]은 인목왕후릉 아래편에 현재 터만 남아 있어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목릉의 석물들은 다른 왕릉에 비해 어딘가 조형미가 떨어지고 서투르게 제작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키는 큰데 상체와 하체의 비율이 맞지 않고, 특히 무인석은 얼굴이 지나치게 크고 두 귀가 코끼리 귀처럼 앞을 향한 형상이다. 봉분을 둘러싼 난간석도 조형미가 다소 떨어지는데다 장명등도 뭉툭한 모습이다. 기록에 따르면 석물 자체가 혼란기에 제작된데다 2차례의 왜란을 겪으면서 인명피해가 컸던지라 석공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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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헌종의 경릉이 잇는 자리[2] 이후에 이 유릉이라는 능호는 순종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같이 묻히게 되는 왕릉에서 능호로 사용한다.[3] 이후 이 능호는 경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의왕후가 묻힌 능의 이름으로 사용된다.[4] 숙종 과 2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가 같이 묻혀 있는 명릉이 그나마 비슷한 케이스인데, 명릉은 2개의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5] 가운데 언덕에 붙어서 위치하다[6] 명나라 숭정제는 1627년에 즉위하였으며 1627년이 숭정 즉위년, 1628년이 숭정 1년이므로 숭정 기원후 120년은 1747년이다.[7] 제향에 쓰이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8] 왕릉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머무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