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덤프버전 :
분류
동시대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이순신(무의공) 문서
충무공 오 충무공 민족의 태양이여,
충무공 오 충무공 역사의 면류관이여
충무공의 노래 가사 中
1. 개요[편집]
16세기 말 조선의 명장이자 구국영웅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제독이었다. 시호는 충무공이다.
2. 위상[편집]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영웅이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다.[8]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름을 떨친 호레이쇼 넬슨 같은 명장들은 모두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순신은 정부와 외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반대로 이순신이 정부와 명나라 육군에게 식량, 무기, 종이, 부채, 조총 등 각종 물자와 진상품을 지원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생계까지 직접 돌보면서 힘겹고 외롭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으며 심지어 권율 휘하의 육군이 허락도 없이 이순신이 어렵게 마련한 수군이 먹을 식량을 시도 때도 없이 약탈하고 수군 병력을 마음대로 빼내어 육군으로 편입시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급자족했으며, 휴전기 당시 수군 기지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군비를 꾸준히 확장하여 최강의 함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7년간 수군을 이끌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군함을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뤄냈다.[9]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10]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했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추격하여 퇴각로를 차단한 뒤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왜선 200척을 깨부수고 100척을 포획하며 일본군 수만 명을 처치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크나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임금에게 삼도수군통제가 된 이후 쿠데타 의심과 견제를 받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원균의 칠천량 해전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대한민국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11]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수도 한양,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 파병 등에 일조하며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과 자기 사람들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 및 대우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 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12]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13]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14]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평가에는 정치적인 성향 등이 영향을 끼치게 마련인데, 이순신은 그런 부분에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15]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16]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17]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18] 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했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19]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20] 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21] , 이러한 덕에 40여 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3. 역임 관작[편집]
- 사후 추증된 관작
- 해석:
- 생전(전사 직전)의 관작
- 행[32]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에 상당하는 의전 예우를 받은 뒤[35] , 해군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36] ,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직[37] 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업적을 인정 받아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 명예 원수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38]
3.1. 장군?[편집]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었겠지만,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던 시절이나 최종 계급을 생각하면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틀린 호칭이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나 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39]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었다.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로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및 육군에서 파생된 공군의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 '해군의 자존심 문제'라는 건 이진삼 의원과 해군 간의 갈등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육군 일색인 국군의 상황으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은 '제독' 칭호 고수에 민감한 편이다.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제독(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40]
그리고 명칭의 역사적 유래와 직무유사성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충무공의 최종 직책인 삼도수군통제사는 현대의 해군 원수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영국식 영어에서 해군 원수를 지칭하는 '함대 제독'[41] 의 기원 자체가 사실상 영국 해군의 삼도수군통제사였기 때문이다. 이 관직은 14세기 잉글랜드 왕국에서 등장한 관직인 '남과 북, 서쪽의 제독'[42] 인데, 말 그대로 남북서 잉글랜드의 3개 주력함대의 지휘권을 쥔 직책이었다. 이 긴 명칭을 줄인 것이 바로 Admiral of the Fleet이다. 이후 ADMF는 최고 등급의 해군 장성 계급으로 굳어졌고, 영국 해군이 세계 해군의 표준으로 자리잡자 각국 해군에 전파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한국으로 치면 삼도수군통제사를 줄인 '통제사'가 훗날 한국 해군의 공식적인 원수 명칭으로 정착했다고 보면 된다.
반면 당시 조선군의 육해군 구별이 유별하지 않아서 장군으로 불러도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이순신이 오늘날의 장성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보직을 육군에서 맡았던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최종 육상 보직은 조산보 만호(혹은 정읍 현감. 정읍에는 해안선이 없다.)이고, 병마 절도사나 관찰사처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즉슨 그의 최종 관직을 일일이 붙여서 호칭하는 게 아닌 이상 국제적인 관례대로 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다.
다만 현대에는 장군이란 단어가 실제 장성급 장교를 지칭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무(武)의 최고봉격인 인물에게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다.[43] 또한 당장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 호칭하는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일반 언중들이 받아들이기에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충무공의 호칭을 구별짓는 것이 아닌 이상, 대중적으로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순 없다.
4. 용모[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5. 생애[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5.1. 전투 관련[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5.2. 연표[편집]
5.2.1. 임진왜란 이전[편집]
- 1565년(21세) 명종 20년
-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 1573년(29세) 선조 6년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 1576년(32세) 선조 9년
- 1579년(35세) 선조 12년
- 1580년(36세) 선조 13년
-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46] 로 임명되다. 관사 오동나무 사건으로 상관인 성박과 그 후임 이용에게 밉보이다.
- 1582년(38세) 선조 15년
- 1월: 군기경차관[47] 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 1583년(39세) 선조 16년
- 1584년(40세) 선조 17년
- 1월: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 1586년(42세) 선조 19년
-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 2월: 종4품(중령)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 1587년(43세) 선조 20년
- 1588년(44세) 선조 21년
-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 1589년(45세) 선조 22년
- 1590년(46세) 선조 23년
- 1591년(47세) 선조 24년
5.2.2. 임진왜란[편집]
- 1592년(48세) 선조 25년
- 4월 12일: 거북선(귀선) 건조를 완료하다.[52]
-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 4월 15일: 전쟁 발발 소식을 고지 받다.
- 5월 4일: 전라 좌수군의 1차 출동.
-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승리로 거두다.
- 5월 8일: 적진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5월 : 종2품 하계 가선대부로 가자되다.
- 5월 29일: 전라좌수군의 2차 출동. 사천 앞바다에서 승리로 거두다. 이때 이순신이 총상을 입었다. 거북선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다.
- 6월 2일: 당포 앞바다에서 승리를 거두다.
- 6월 5일: 당항포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다.
- 6월 7일: 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6월: 정2품 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다.
- 7월 6일: 전라 좌수군의 3차 출동.
- 7월 8일: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10일: 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정2품 상계(중장과 대장 사이 실질적으로 도원수[53] 정헌대부로 가자되다.
- 8월 24일: 전라좌수군의 4차 출동.
- 8월 29일: 장림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1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593년(49세) 선조 26년
- 1594년(50세) 선조 27년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6번째 출동.
- 3월 4일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9일 장문포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다.
- 10월 1일 영등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4일 장문포에서 2번째 승리를 거두다.
- 1597년(53세) 선조 30년
- 2월 6일: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 2월 26일: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 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 3월 4일: 감옥에 갇히다.
- 4월 1일: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오다.[54]
- 4월 2일: 류성룡을 만난 후,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 4월 11일: 어머니가 사망하다.
-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다.[55]
-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다.
-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 8월 18일: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다.
- 8월 28일: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 9월 2일: 배설이 도주하다.
- 9월 16일: 전선 13척과 피난선에 힘입어 명량(鳴梁)입구인 임하도의 좁은 목(우수영 앞바다)을 이용하여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 10월 14일: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다.[56]
-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 1598년(54세) 선조 31년
-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하여, 새로운 통제영으로 삼다.
- 7월 19일: 절이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0일: 명군과 합류해 장도[57] 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7일: 명군과 합류해 왜교성에서 전투를 진행했으나, 명군의 무리한 전술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다.처종형[58] 인 황세득 사도첨사가 전사함.
- 11월 19일: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요격하던 중 관음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다.
5.2.3. 사후[편집]
- 1643년 인조 21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6. 가족[편집]
아버지 이정(1511~1583), 어머니 변씨 부인(1515~1597) 슬하 3남으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방수진을 아내로 들였고 병마사 오수억(吳壽億)의 서녀인 첩 해주 오씨가 있었다.
방수진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예[60] , 3남 이면[61] 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서 서자 이훈(李薰)을 두었고, 오씨 소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첩 소생인지 알 수 없는 서자 이신(李藎)과 서녀 2명이 있었다.
오씨외에 이순신에게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었고 이신과 두 서녀가 그녀 소생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전적으로 난중일기의 번역자들의 창조번역이다.
1594년 8월 2일. 꿈을 꾸었는데, 부안 사람(扶安人)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했더니, 태어날 달이 아니었다. 꿈이었지만 쫓아 보냈다.
1594년 11월 13일. 저녁에 윤련이 왔다. 그의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헛된 말이 많았다. 우스운 일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곧 남은 어린 세 자식이 끝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구나.
1597년 10월 25일.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냥 부안사람이라는 뜻의 부안인(扶安人)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난중일기를 번역한 홍기문, 이은상 등은 아무런 문헌근거도 없이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다는 사족을 붙였고 윤련이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윤련이 부안에서 왔다는 기술을 근거로 윤련이 이순신 첩 부안 윤씨의 오라비라 주장했다. 근거는 전혀 없다. 부안인, 윤씨는 덕수 이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저 부안사람과 윤련의 누이로 적혀 있다. 아무 근거 없이 부안 사람, 혹은 윤련의 누이를 '이순신의 첩'이라는 쓸데없는 사족을 달아 번역하는 것은 과잉 번역이다.
이순신의 서녀 중 1명은 윤효전(1563~1619)의 첩이 되었는데, 윤효전은 바로 현종~숙종 연간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휴의 아버지다. 다만 윤휴는 이순신 서녀의 소생이 아니라 윤효전의 적자고, 윤효전과 이순신의 서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윤영(1611~1691)으로 그가 윤휴의 이복 형이다.
6.1. 부모[편집]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62]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3] 1583년 11월 15일 타계했는데, 고향의 소식이 늦어 이순신은 부친의 부고를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접하고 뒤늦게 달려가 3년상을 치렀다.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64] 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했다.[65]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관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했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했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글을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날 지경. 더 기가 막힌 것은 모친의 본관이 초계인데, 이 지역은 다름아닌 이순신의 귀양지다. 어머니의 죽음에는 선조도 일정부분 기여한 공이 있다. 아들이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다 건강도 나쁜 몸인데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까지 직접 오기로 했고 결국 아산에 오기 전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6.2. 부인[편집]
이순신의 아내인 방수진(方守震)은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딸인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씨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방문을 열어놓고 앉아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더미를 바닥에 와르르 쏟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66] 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방씨가 사위를 박대한 이유로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67]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수진이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방수진의 본명은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에 와서는 그냥 '방씨', 혹은 본관을 붙여 '상주 방씨'라고 불려졌다. 일부 야사 및 창작물에서 '연화', '태평'' 등의 이름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중일기,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된 서간첩[68] 을 연구한 결과 본명이 '수진'임이 밝혀졌다. 다만 이에 대해선 '수진'은 방씨의 이름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허나, 위 기사 속 반박은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의견이라 아쉽다. 이순신이 부계 쪽인 살던 서울에서 출생하여, 모계쪽이 있던 아산으로 온 것이나 자신의 사후부터 장인으로부터 받은 현중사가 자신의 부계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타당성도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그녀도 병을 앓아서 전란 중에 사경을 헤맸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들 이회가 1603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후인 1603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3. 형제, 자녀[편집]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했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 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눈치 안 보고 조카들을 다 부임지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가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은 정읍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晨昏戀慟淚凝成血
조석으로 그립고 애통하여 눈물이 엉겨 피가 되어 흐르거늘
天胡漠漠不我燭兮
하늘은 어찌 무심하게도 나를 굽어살피지 않으시던가?
何不速我死也
어찌 속히 죽이지 않으시나?
정유년 5월 6일(1597년 6월 20일), 《난중일기》, 꿈 속에서 죽은 두 형을 만난 후[69]
아들 사랑 또한 지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새벽 2시쯤 꿈에서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물에는 빠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듯 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난중일기》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정유년 10월 16일(1597년 11월 24일) 《난중일기》
"새벽나절에 꿈 속에서 고향의 종자 진(辰)이 찾아왔기에 면이 생각나 통곡했다."
(중략)
"한밤에 생각하자니 눈물이 흐르는데,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기어이 내 불효함이 예까지 이를 줄 누가 알았으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니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정유년 10월 19일(1597년 11월 27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이때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姜莫只)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그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이면이 자신을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은 명량 해전 직후 이뤄진 보복성 침략 때문에 죽었으므로 비록 전투는 이겼으나 자신 때문에 자식이 죽었으니 그 자책감은 이루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 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하고 사라졌다. 이순신이 꿈에서 깨고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끌어와 심문하니 과연 그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융통성이 없는 수준으로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70]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율곡 이이[71] 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1년 뒤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가 됨).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세길 열렸다며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고 싶어 매파를 띄웠으나 단칼에 거절하기도 했다.
이같은 엄격함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 이봉[72] 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이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종제 이훈과 함께 전사한다. 서자 이훈과 이신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이신은 이괄의 난때 격전지였던 안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고, 이훈은 정묘호란때 이완과 함께 의주를 지키다 전사했다. 두 사람 모두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정유년에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삼남 이면까지 포함하면 다섯 아들 중 4명과 조카 3명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전장에서 분골쇄신했다. 집안의 이단아(?) 차남 이예[73] 는 순수 문관으로 형조정랑을 역임했으며 사후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덕수 이씨는 이순신 사후 조선 유수의 무반 명가로 자리하는데 무과 합격자 명단인 무과방목에선 79명의 덕수 이씨 합격자가 확인되며 이중 75명이 이순신 사후 나온 합격자다.# 75명이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무과방목은 조선시대 실시된 총 무과 횟수의 20%가 채 안 된다. 7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전체 2,513 성관에서 덕수 이씨 포함 77개에 불과하다.
또한 덕수 이씨 세보에 의하면 이순신 아래로 무과에 급제한 인원 수가 267명으로 대폭 늘어난다.
6.4. 후손[편집]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덕수 이씨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무반 가문으로 손꼽히게 된다. 무과 급제는 267명[74] 인데 반해 문과 급제는 단 1명[75] 에 불과하다. 이순신의 조상대에선 성균관 대제학을 역임하거나(이변) 병조참의로 재직하며 세자의 스승 노릇을 했고(이거), 할아버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도 미관말직이나마 지낸 적이 있는 전통적인 문반 가문이었는데 이순신을 기점으로 무반 가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76]
이렇듯 그의 후손들은 충무공의 후예라는 이유 때문에 진로선택 시 무반을 강요당한 정황이 보이지만 정작 실록에 기록될 때는 충무공에 비해서 어떤 점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꾸준히 조상과 비교당했다. 그래도 한몸을 바쳐 종묘사직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의 후손이라 조선 시대 내내 특별대우를 받았다.
5대손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은 심각하게 무능했던 사람으로, 오죽하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저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탄핵 상소까지 올라왔다가 기각됐을 정도였다.[77] 하지만 이쯤 되면 무능이 아니라 조상과 저울질 당하는 탓이 큰 듯하다... 충청병사로 재임하던 시절 이인좌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로잡히기는 했으나 투항을 거부하여 피살되었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였다. 능력은 없을지언정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점을 높이 사 사후에 충민공(忠愍公)[78] 으로 추존되고 조상인 이순신과 함께 현충사에도 배향되었다.
이외에도 정조 시기에는 이인수, 이승권 등이 있었다고 하며 근대 시기에는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하면서 독립유공자 집안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2, 13, 14대 종손인 이세영, 이종옥, 이응렬이 있다. 이순신 장군 후손, 일제강점기 3대 걸쳐 항일독립운동 투신, 이순신 장군 13대 종손도 항일무장투쟁 첫 확인. 9대 종손 이필희, 10대 종손 이규풍, 이규갑, 이규현, 11대 종손 이민호, 이민화, 12대 종손 이길영, 이일영도 독립운동가다. 다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부계 후손은 아니지만 친일파인 권중현도 있다.[79]
현대에는 방송인 이종환과 배우 이미숙이 있다.
7. 인간관계[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8. 묘소[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9. 어록 및 장계[편집]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본시 있던 것과 새로 만든 것을 물론하고 먼저 집합한 것이 110척이요, 사후선도 110척이라 사부, 격군을 합해서 무려 1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1명당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 나누어준다면 하루 먹을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요, 1달에 드는 것이 3,400여 석 입니다. 경상우도는 벌써 바닥이 나서 식량을 각출할 도리가 없고, 전라도 열 고을만 쳐다보는데, 열 고을에서도 남아 있는 군량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식량을 제하고 나면 수군들 먹을 군량은 겨우 앞으로 2달 남짓, 5월 보름께 밖에 더 계속되지 못할 실정입니다.'
《청조획군량장》 갑오년 3월 10일 中 - 군량미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
'수전과 육전의 어렵고 쉬운 점, 그리고 지금의 급한 일들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망령되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겁쟁이이고, 용감한 자는 열에 한둘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분간되지 않고 서로 섞여 있지만 일단 소문만 들리면 그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놀라서 달아나는데.....[생략] ...... 수전의 경우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다 같은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비록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으며 노질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울리면, 그 뒤를 군법이 따르니 모두 전력을 내어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수전의 쉬운 점입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육군과 수군의 통솔 차이
수사가 수군의 대장으로서 호령을 내리더라도 각 고을의 수령 등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핑계대면서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사상 중대한 일까지도 내버려두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많아서 매사가 이완되고 있으므로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와 병사의 예에 따라서 고을의 수령들까지 수사의 지휘를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전시행정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의 장검 2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80]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81]
는 남의 애를 끊나니
勿令妄動 靜重如山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祭死亡軍卒文
親上事長 爾盡其職
投醪吮疽 我乏其德
招魂同榻 設奠共享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기는 등 너희는 그 직책을 다했건만
막걸리를 주고 종기를 뽑는[83]
등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혼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죽은 군졸을 제사하는 글
今臣戰船 尙有十二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84]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85]
此讎若除 死即無憾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 이분[88] 의 충무공행록
임진장초 및 난중일기 원문 번역 사이트들[89]##임진장초 원문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며 수군을 끝까지 지휘하겠다는 주장이다.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했으니, 적들이[90]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발언은 흔히 이순신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난중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병법, 정확히는 오자병법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조건 죽을 각오로 옥쇄해라'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하나,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필사즉생행생즉사 문서로.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再三嚴約。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강화 협상을 하며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된 1594년, 명나라 칙사인 담종인이 '함부로 왜군과 교전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이란 내용의 통보인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자, '답담도사금토패문'이라는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현대에는 이 중 '저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2010년대 이후 한일관계가 크게 나빠지고 한국 내 반일감정이 더 강해지면서, 저 문구를 인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 번역본은 왜로 알려졌지만 원문은 보다시피 日本.日本之人, 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兇狡之徒, 尙不斂惡。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흉악하여, 그 악랄함을 감추질 않습니다.
답담도사금토패문(答譚都司禁討牌文, 담종인에게 보내는 답장 중에서.-이충무공전서 1권 잡저中)
이어서 투항해온 왜놈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1596년 1월 15일자 (양력 2월 12일) 일기 中
항왜 관련.어두울 무렵 항복해온 왜놈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만, 붙좇은 왜놈들이 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못하게 하지 않았다.
1596년 7월 13일자 (양력 8월 6일) 일기 中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
1594년 1월 14일자 (양력 3월 5일) 일기 中
면천 관련.장언춘(張彦春)을 천민에서 면하게 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1595년 2월 14일자 (양력 4월 4일) 일기 中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91]
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棟樑)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柱石) 같은 인물이 없으니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모르겠다. 심사(心思)가 번란해서 종일 엎치락뒤치락했다.
1595년 7월 초1일자 (양력 8월 6일) 일기
10. 평가[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후대의 평가와 각국의 평가를 모아놓은 문서. 일본 웹에서의 왜곡도 포함되어 있다.
10.1. 의문점[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이순신의 일생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와 음모론을 모아놓은 문서로 검증되지 않은 연구 내용을 포함하니 검열하면서 읽어야 한다.
역사의 인물 중에 과오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은 없지만, 이순신은 본인이 활동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논란에 시달린 적이 없다. 1990년대는 이순신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인데 과거 박정희 정부가 이순신의 공적을 과장하고 원균을 미화하여 정부의 치부를 감추려고 시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흠결이라도 바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집요하게 연구했으나 겨우 찾은 흠결은 실록에 기록된 그대로 너무 고지식하여 굴할 줄 모른다는 내용이 전부. 선조실록과 징비록에 적힌 기록으로 교차검증을 해도 별다른 흠결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순신을 비판한 내용이 많은 기록은 바로 이순신 자신이 서술한 난중일기.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사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세종도 실록에 흠결이 있는데, 이순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이순신 자신이 전부였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12. 관련 영상[편집]
13. 관련 단체[편집]
- 충무공이순신기념사업회
- 한국서화교육협회 성웅이순신연구회
- 여수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 순천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14. 관련 문서[편집]
- 기타 관련 문서
15. 여담[편집]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