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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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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雲龍
1562년(명종 17년) ~ 1610년(광해군 2년)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見) 또는 경회(慶會), 호는 동계(東溪).
권준, 무의공 이순신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가장 아꼈던 장수 중 한 명이다.
2. 생애[편집]
1562년 경상도 청도군 상남면 명대동(현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명대마을)에서 중직대부(中直大夫:종3품 문관의 품계) 행 남해현령(行南海縣令:종5품)[1] 이몽상(李夢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로위(定虜衛)로 복무하다가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85위로 급제하여 1587년(선조 20)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녹둔도 전투 이후 이순신과 백의종군하게 된다. 훗날 복직하여 1589년(선조 22) 옥포 만호로 부임하게 된다.
1592년(선조 24)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육지로 도피하려던 경상 우수사 원균에게 "사또께서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곳은 바로 호남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로워집니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하여 이순신에게 구원 요청을 하도록 설득하였다. 해당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 기재된 것이며, 거제읍지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나오며 다음과 같다.
같은 해 5월 7일 옥포 해전에서 선봉장으로 앞서서 적선 50여척을 격침시키는데 일조하였고 이후 사천 해전,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 등에 참가하였다. 1596년엔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 좌수사로 승진하게 되지만 이듬해 칠천량 해전 당시 좌천되어 육지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유지, 장수들이 수장되는 가운데 살아남아 영천, 창암 등지의 육전에 참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605년 내직으로는 비변사 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다. 이후 선무 공신 3등으로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고,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임진년(1592년) 5월,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망쳐 패배한 군대(敗軍)로 되려 하자, 옥포만호 이운룡이 막아서며 말하길 "주상이 임명한 이곳에서 죽어야합니다. 이곳은 바로 호남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로워집니다." (원균은) 즉시 율포만호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충무(이순신)은 충을 받드는 무인이라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다.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이 선봉에 나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왜가 30여척의 배를 버리고 달아나자 이를 불태워 버렸고, 나머지 배를 추격하다 노량에 이르러, 적을 또다시 무찌르고 30여척을 분쇄했다.
右水使元均敗軍欲走玉浦萬戶李雲龍抗言曰, "使君當死於對內此兩湖咽喉失此則兩湖危矣."此則兩湖危矣卽遣栗浦萬戶李英男請救於.李忠武忠武引軍赴之會均於.玉浦雲龍與永登萬戶禹致績爲先鋒大破.倭船三十餘艘彼棄船而走遂盡焚其船追擊至露梁大破之又燒三十餘艘.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옥포지 중.
여담으로 충무공 휘하에서 선무 공신에 봉해진 사람은 이운룡 외에 권준, 무의공 이순신이 있다. 타협을 하지 않는 강인한 자세와 곧은 성품이 이순신과 닮아 탄핵을 여러번 당한다. 1602년 모친상으로 진을 비워 탄핵받은 적도 있고 비변사 유사당상에 올랐으나 탄핵으로 은퇴한 적도 있다. 그러다 1607년 오랑캐의 침입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를 진압하고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1610년 또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건 뭐...
현재 명조팔사품이 보관 중인 통영시의 충렬사는 이운룡이 통제사가 된 후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운룡 이후 후대 삼도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충렬사에서 충무공 제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병영 일기인 <거영일기>와 <식성군실기> 2권이 있다.
이순신이 아꼈던 장수답게 인연도 깊다. 바다에서 함께 싸우기 전 육전에서 이미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조선사 최대 국난을 맞아 다시한번 더 같이 싸우게 된다. 물론 이운룡은 웅천현감으로 재직중이라 경상우수사 였던 원균의 휘하 아래 있었지만 똑같이 원균의 부하였던 이영남처럼 오히려 원균보다 이순신을 더 따르고 신뢰한다. 사고가 멀쩡한 사람이라면 원균을 좋게 평가할 순 없다... 그리고 원균이 지도력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우치적 한백록도 원균보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일하고 싶을 정도로 원균이 무능하고 형편없다는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영남과 함께 자주 이순신을 찾아와 함께 식사하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운룡이 경상좌수사로 승진한 후에는 아예 한산도에 함께 거주하며 매일 통제사 이순신을 만나러온다. 후에 이운룡이 다른곳으로 떠나게 되어 인사차 방문했는데 이순신은 아쉬운 마음에 술을 듬뿍 먹여 술에 취해 그날 떠나지 못하고 다음날 떠나기도 했을 정도.
여러모로 이순신과 뜻이 통하는 장수였으며, 훗날 충렬사를 짓고 이순신의 제사를 모시면서 이순신 사후까지 이어진다.
3. 대중매체[편집]
1962년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이기홍이 연기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최준용이 연기했…… 다? 애매한 이유는 드라마 내에서는
다만 이렇게 된 것은 원래는 이운룡이 주요 인물이었으나, 최준용의 소속사와의 계약에 문제가 생기면서 임진왜란 이후 캐릭터 자체가 아예 증발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한마디로 고증오류 같은 게 아니라 어른의 사정이 개입된 문제다.[3] 본래 이운룡이 맡았어야 할 부분은 한백록이 일정 부분 맡게 된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