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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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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592년(선조 25년) 6월 7일 조선 수군이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율포(밤개) 앞 바다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전투.
2. 율포 해전의 전개 및 결과[편집]
6월 7일 영등포 앞 바다에 이르러 왜선을 경계하던 중 일본군의 전선 7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발견하고, 이순신이 즉시 추격을 명하였다.
이 때 여러 전선이 역풍에 노를 재촉하여 율포 근해까지 추격하자 다급해진 일본군의 전선들은 배 안의 짐짝을 버리면서 뭍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 싸움에서 우후(虞侯) 이몽구(李夢龜)가 전선 1척을 나포하여 불태운 것을 비롯해 우척후장 김완(金浣), 좌척후장 정운(鄭運), 중위장 어영담(魚泳潭), 가리포첨사 구사직(具思稷) 등이 힘을 합해 일본군의 전선 5척을 나포 또는 격파하고 수많은 일본군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것을 본 일본군의 지휘관 구루시마(來島通之)는 뭍으로 도망쳐 자결하였다. 뒤이어 여도권관(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과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은 위험한 적중에 뛰어들어 남은 일본군의 목을 베는 등 마지막 승리를 장식하였다.
이 해전은 제2차 출전에서의 마지막 전투이다. 제1차 출전 때의 합포(合浦) 및 적진포(赤珍浦) 해전처럼 소수의 적선을 상대한 싸움으로,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3. 관련 문서[편집]
[1] 來島通之는 得居通幸(도쿠이 미치유키)의 이명이다. 다만 得居通幸는 5일 전인 6월 2일 벌어진 당포 해전에서 이미 권준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는 설이 유력하기 때문에, 만약 6월 2일 사망설이 맞다면 이날 지휘관은 불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