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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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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折爾島海戰
명량 해전 이후 함대 재건을 어느 정도 진행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의 일본 수군과 정면으로 교전한 전투. 절이도는 현대의 전남 고흥군 거금도 지역이다.
2. 상세[편집]
1598년 8월 20일(음력 7월 19일)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 수군은 당시 조선 수군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에 대한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전 정찰로 조선 수군은 적의 기습 시도를 파악하였고, 거금도-녹도 인근에 함대를 배치, 일본 함대에 대한 역공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전선 50여 척을 격침시켰다.
특이하게도 이 전투는 이순신이 집필한 난중일기에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조선왕조실록 등 다른 사료에는 제대로 기록되어 있는 전투이며, 실록에서는 왜선 50여 척을 분멸하고 수급 71개를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당 부분을 다룬 난중일기 초고가 보관상의 문제로 망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수군이 결성된 이후의 첫 전투이나, 당시 명 수군의 지휘관인 진린은 전투에 대한 의욕이 낮아서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조선 수군 함대만을 출격시킨 채 전황을 관망하였다.[4]
진린은 자신의 전공이 없어 애꿎은 부하들에게 역정을 내었으나, 이순신이 수급 40급을 나눠준다.. 그리고 진린은 조선 수군이 조정에 보고할 때 26급만 베었다고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린의 전공을 보고 받은 명나라는 '진린이 그럴리가 없는데'라며 조선 조정에 사실이냐고 물어보는데, 이에 이순신이 장계를 두통 작성, 한통은 진린의 전공을 기록한 장계(즉, 거짓말), 한통은 사실을 기록한 장계를 올려 무사히 마무리 짓는다.[5]
3. 미디어[편집]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9화에서 짤막하게 나왔으며, 해전이 끝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도 다카토라에게 할복을 명령하자 도도가 전쟁을 끝내라며 거세게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고, 도요토미가 홧김에 도도를 베려 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힘으로 뜯어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도요토미의 신하들 대다수가 도쿠가와에게 붙고, 도요토미가 사망하는 장면이 뒤따른다.
[1] 하지만 노량 해전에서 투입된 판옥선이 최대 60척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수치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맞다면 절이도~노량 사이의 몇 달 동안 25척의 판옥선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2] 고흥반도까지 제해권 확보[3] 다만 후술된 바와 같이 명나라군은 사실상 방관했다.[4]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을 배후 지원세력으로 업고서 명량대첩의 전훈을 되살리면서, 원균의 하극상에 의해 실패한 장문포·영등포해전의 쓰라림을 생각할 때, 결코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5] 이순신이 단순히 전투만 잘하는 용장만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자신의 전공을 내어줌으로써 첫째로는 진린의 마음을 얻고, 둘째로는 자신만 믿고 따라와 주면 전공은 알아서 주겠다는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전투 작전에 대한 주도권을 거머쥘수 있으며 셋째로는 진린의 기세를 크게 꺾을 수 있었다. 명 수군 없이 조선군 단독으로도 얼마든지 승리할수 있음을 보여준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명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가 자신의 손에 있으니까. 이처럼 이순신은 단순히 전승만 거머쥔 명장이 아니라 사람을 꿰뚫어보고 그에 대처하는 능력 또한 독보적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