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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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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수나라의 제2대 황제.
양제(煬帝)라는 시호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당나라 때 폄하하는 의미로 붙여진 시호였고, 수나라에서 바친 묘호와 시호는 세조 명황제(世祖 明皇帝)였다.[2] 하지만 후자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학정을 했다. 그의 시호[3][4] 처럼 부황 수문제 양견이 통일하고, 엄청나게 번성시켜(개황성세) 놓았던 수나라를 멸망시키는데(煬) 일조한 황제(帝)이다.
2. 생애[편집]
2.1. 즉위 전[편집]
2.1.1. 초기[편집]
569년에 북주의 수국공(隨國公) 양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81년 아버지 양견이 북주의 어린 황제인 정제 우문천으로부터 제위를 선양(禪讓)받고 즉위해 수나라를 세웠을 때 13세의 양광은 부황으로부터 진왕(晉王)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워 태위의 벼슬을 받았다.
양광은 양주총관을 맡아 후방에서 동생인 한왕 양량을 도왔다. 598년 2월에 동생 양량과 함께 고구려를 쳤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대군이 전멸해서 부황 양견에게 크게 질책을 받았다. 이때 양견이 얼마나 화가 났던지 양광과 양량에게 자결을 명령했으나 이를 알게 된 모후 문헌황후 독고씨가 뜯어 말렸다고 한다.
2.1.2. 위선[편집]
당시 수나라의 황태자였던 양용은 태자비 원씨가 죽었는데도 방종과 사치에 놀아나,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머니 문헌황후의 눈 밖에 나버렸다.
물론 진왕 양광도 방탕하고 한 사치하는 성격이었지만 부모 앞에서는 자신의 본색을 철저히 숨긴 채 연기했다. 양광은 야심이 큰 사람이었고, 태자가 되기 위하여 온갖 술수와 농간을 부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을 흐리게 했다. 수문제가 양광의 진왕부로 행차할 때 양광은 미리 젊고 농염한 미희들을 모두 숨긴채 늙고 추한 여자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했다. 이런 식으로 부모에게 자신은 여색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 중에 상기시켰다. 이밖에도 줄이 잘리고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거문고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놓아두기도 했는데, 수문제는 그것을 우연히 보고 양광은 자기처럼 즐기는 것을 멀리한다고 생각하여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하루는 양광이 사냥을 나갔을 때 소나기가 내렸는데, 시중이 그에게 비옷을 건네주자 그는 입기를 거절하고 말했다.
"병사들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 어찌 비를 피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수문제 부부는 양광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한다고 착각했다.[5]
양광은 이런 눈속임을 통해 부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수문제와 문헌황후에게 차기 황권 주자로 사실상 공인받은 것은 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략을 써 태자 양용과 사이가 나빴던 양소[6] 와 짜고 부모 앞에서 태자를 중상 모략하며 나쁜 아들로 매도했다. 특히 형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어머니 문헌황후가 태자를 찾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궁녀를 태자궁에 보내 술을 마시게 하는 등의 술수를 써서 양용에게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를 뒤집어 씌웠다.
결국 이를 본 문헌황후는 "양용이 태자 자리에 있으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판단해, 양광과 결탁하여 양용을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내니, 서기 600년 양광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한편, 수문제가 병들었을 때 태자 양용이 수문제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고 양광이 모함했고, 이 모함이 성공하여 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방릉왕(房陵王)으로 강등당한 양용은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양광에 의해 막히자 궁궐 정원의 나무 위로 올라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으나 이 광경을 본 아버지 수문제가 오히려 "용 저놈이 광 말대로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역효과만 낳았다고 한다.
이렇듯 양광은 연기와 쇼맨십에 매우 능했던 인물로, 겉으로는 청렴하게 살고, 의관도 누추하게 입었으며 여자를 탐하지 않는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어 가족과 주위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2.1.3. 모후의 죽음[편집]
양광은 계략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 직접 큰 공을 세울 만큼 군사적인 재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98년 2월, 영양왕의 고구려 군사들이 수나라의 영토인 요서 지방을 공격한 후 진왕 양광과 한왕(漢王) 양량이 출격해 싸웠지만 전멸했고, 이때문에 문제에게 크게 질책받았다. 양견은 두 자식들인 양광과 양량에게 자결을 하라 명령했으나, 모후인 문헌황후가 말렸다고 한다.
한편, 양광이 황태자에 책봉될 때, 지진이 일어나고 광풍이 불어 세간에는 양광이 황제에 오르면 분명 수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2년 후, 어머니 문헌황후가 사망하자 피눈물까지 흘리며 부황과 주변을 감동시켰으나, 처소에 돌아가자마자 어머니의 죽음을 아주 기뻐하면서 술과 고기를 즐겼다. 이는 양광의 이중인격을 대표하는 사례이다. 깐깐하고 아버지를 휘어잡던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이 준비된 황제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양광은 이제 그 어머니가 죽자 큰 짐을 덜었다는 심정에서 그런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2.1.4. 부황을 시해하다[편집]
그후 태자 양광은 대놓고 제위에 야심을 품었다. 당시 부황 문제는 일생을 공처가로 살아왔지만 막상 아내가 죽자 큰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그런 문제에게 예전에 자신이 멸망시킨 진(陳)나라의 효선제 진욱의 14황녀인 선화부인 진씨[7] 가 눈에 띄게 되었고, 문제는 진씨를 가까이 하다가 기력이 쇠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점은 양광 또한 진씨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8]
그러다가 604년에 문제가 중병에 걸려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는데 월국공 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키며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이때 양광은 자신이 제위에 등극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양소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황제 사후의 일을 상의했다. 양소는 양광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으므로 그에게 대비책이 담긴 서찰을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소의 서찰이 궁인의 실수로 문제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문제는 서찰을 읽고 진노했다. 그는 자신이 눈을 감기 전에 양광이 양소와 짜고서 제위에 오를 궁리를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즉시 양광을 소환했다.
이때 마침 문제가 총애한 진귀인이 울면서 대보전으로 뛰어들어왔는데, 그녀의 옷매무새는 헝클어져 있었다. 문제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태자 양광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말했다.[9] 그러자 문제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라고 욕을 했다. 양광이 자신의 후궁을 노리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 즉 양광의 사악함을 눈치챈 문제는 조치를 취했다.
문제는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유술에게 태자 양광을 폐출하고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으라는 조서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양광은 수족들을 통하여 대보전 안의 상황을 손금 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행동이 빠른 양광은 한발 앞서 심복들과 짜고 그날 밤에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황궁을 에워쌌다. 그는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유술 등의 대신들을 죽이고 인수궁을 장악했다. 그리고 대보전에서 아버지를 시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10][11]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고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이었던 우문지급을 보내 그의 목숨도 빼앗아버렸다.[12]
문제가 세상을 떠난 그날 양광은 금으로 만든 함을 선화부인에게 갖다 주었다. 선화부인과 궁녀들은 양광이 준 함 속에 독주가 들어 있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 함을 열자 독주가 아니라 사랑을 상징하는 '동심결'[13] 이 있었다. 이때 선화부인은 안도했다고 하며,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범(蒸)했다. 태자였던 양광은 제위에 오르자 그가 총애하는 선화부인을 진귀비로 책봉하여 그녀를 정식으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14] 하지만 양제의 후궁이 된 지 1년 만에 병으로 겨우 29세에 요절하고 말았다.[15] 양제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모국을 멸망시킨 부자와 잠자리를 할 수 밖에 없었으니 선화부인 진씨는 참으로 다사다난한 삶을 산 여인이었다.[16]
《수서》에서 부황 시해의 근거로 삼는 사항은 문제가 세상을 떠날 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 《수서》임에도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달라서 어떤 곳에서는 수문제가 죽을 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선화부인 진씨에 대한 음행에서도 서로 다른 기술이 존재하기에 양광이 정말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는 약간 의문이 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하루라도 빨리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광은 궁정 반란을 통하여 수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수양제이다.
2.2. 즉위 후[편집]
수문제와 수양제 부자의 행동은 정말 극명하게 대비된다. 문제는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20년 넘게 최선을 다해 천하를 안정시키고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와 백성의 재부를 늘려 놓았다. 그러나 양제는 이렇게 해서 쌓아온 부를 자신의 욕심과 사치로 낭비했다. 문제가 천하를 안정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었고, 이것이 국가의 근본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다져 놓은 기초가 비극적이게도 아들 양제의 망나니짓을 위한 밑천이 된 셈이었다.
2.2.1. 대운하 건설[편집]
사실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양제는 부임 초기에는 어리석고 우둔한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총명한 군주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정도로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으며, 글재주도 있었고,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는 그 좋은 머리로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다채로운 방법으로 부황이 20년 동안 열심히 일구어 놓은 국부를 14년 동안 아주 신나게, 그리고 아주 열심히 털어먹기 시작했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남북조시대 등의 분열기로 인해 남북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해 대운하 건설을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17] 대운하는 사실 부황 문제때부터 시작되었으나 국고의 손실을 염려해 중단했었다. 결국 대운하의 스케일이 커진 것은 양제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운하 건설에 동원된 연인원만 자그마치 1억 5,000만명이었고[18] , 심지어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주왕의 재림',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다'면서 수양제의 악랄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발행된 《만리중국사》라는 전연령판 역사만화에서는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끝내려면 10년이 넘게 걸리는데 황제께서는 이걸 6년 안에 끝내라고 한다'며 관리가 푸념하다가 여성들까지 끌고 가서 운하를 파는 일에 참여시키는 걸로 나온다. 운하가 완성된 후, 보다 못한 신하 한 명이 수양제에게 '운하 사업은 나라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일인 건 맞지만 폐하께서는 너무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십니다. 통제거 옆에서 죽은 사람만 250만 명이 넘으며, 운하로 양측에 쌓인 유골은 아직 다 치우지도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너무 많은 백성이 노역에 끌려간지라 농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데 흉년까지 겹쳐서 백성들은 굶어죽을 지경입니다'고 간언하자 '에잇! 저놈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잖아! 여봐라, 이놈을 끌고 가서 매질해 죽여라!' 하고 반응한다.
당시 강남 지역은 한나라 이후 개발이 전혀 안된 습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백성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부려먹었냐면,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던 터라 발의 살이 썩어 구더기와 모기 유충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2.2.2. 대업(大業)[편집]
게다가 수도인 장안을 놔두고 굳이 낙양에 제2의 수도를 건설하는가 하면 경성 낙양 서쪽에 황가의 대공원인 '서원'을 조성하기까지 했는데, 주위가 무려 200여 리에 이르렀다. 이때 수양제는 날마다 300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공사를 했는데, 이들 중 과반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공원 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진귀한 화초와 나무, 희귀동물들을 모아놨는데 날마다 수만금을 뿌렸고, 주위 넓이가 10리가 넘는 인공호수를 파서는 호수 한 가운데에 높이 10장이 넘는 해상신산을 3개나 쌓았다. 각각의 산 위에는 정자와 누각 따위를 세웠으며, 자신의 제2의 수도가 영원히 봄날 풍경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궁녀들을 시켜서 비단으로 울긋블긋한 꽃잎을 오려 나무에 가득 뿌리도록 했는데, 색이 선명하지 않으면 다시 갖다 뿌리게 했다. 거기에 겨울이 와서 호수가 얼어버리면 호수의 얼음을 모두 깨내고 역시 형형색색의 비단을 오려서 만든 연꽃을 뿌리게 했다.
그리고 달밤이면 화장을 짙게 한 수천 명의 궁녀들을 데리고 말을 탄 채 천천히 거닐다가 말 위에서 청야유곡을 연주하도록 했다. 재위 3년차인 606년, 양광은 특별한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 과거 북제, 북주, 남진 왕조의 궁중에서 가무를 하고 연기하며 서커스 공연을 했던 전문 악대와 광대들 집안의 자제들을 징집하여 '악호'[19] 로 편성하는 한편, 6품 이하 관원과 백성 중 이 방면에 특기를 가진 사람들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전무후무한 대규모 공연을 거행했다. 이 공연은 양제 또한 관람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참가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상을 내렸는데, 그 수가 30,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거기에 공연에 필요한 복장을 만드느라 동•서 양경의 옷감이 모조리 바닥나기도 했다. 양제의 이러한 행동은 영락없는 진나라 이세황제 영호해의 재림이었다. 과연 연호부터 대업(大業)이라고 할 만했다. 또 양제가 방벽의 외부조사를 명목으로 요동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수령들은 양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1주일만에 100만명을 동원해 별궁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좋은 머리를 이상한 데 발휘해서, 임의거(任意車)와 어녀거(御女車) 등의 수레를 만들도록 했다. 이름에서 짐작이 가능하겠지만 이 수레에 여자를 태우면 수레 내부의 장치가 자동적으로 여성의 사지를 결박해 양제의 색욕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임의차를 만든 장인은 큰 상을 받았으며, 양제의 아이디어를 적극 채용하여 수레가 험한 길을 가도 내부로 진동이 전달되지 않아 수레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개조된 어녀거를 새로 제작했다. 순행 때 배에서 내리면 적극적으로 애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의거와 어녀거는 명나라때 만들어진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임의거는 명대에 살았던 첨첨외사(詹詹外史)라는 사람이 편집한 《정사》(情史) <정호류>(情豪類)에 나오고, 어녀거는 명대 소설 《수양제염사》(隋煬帝艷史: 수양제의 섹사)에 나오는 섹수레이다. 이 책들에 의하면 임의거는 하조(何稠)라는 사람이, 어녀거는 하안(何安)이란 사람이 모두 수양제를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이 수레들의 특징은 안에서는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보이며, 안의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는 고급 밀실 수레였다. 즉 비밀이 보장된 수레였다. 임의거라 한 이유는 수양제가 하조에게 이 수레의 이름을 묻자 임의로 만들어서 없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었고, 어녀거를 풀이하면 '어녀'의 '어'는 '수레나 말을 몰다'라는 의미였고, 여기에 여자를 붙여 여성을 몰다.라는 뜻이었다. 《수양제염사》(隋煬帝艷史)의 묘사를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성명이 하안(何安)이란 사람이 어녀거를 만들어서 양제에게 바쳤다. 그 수레는 공간이 넓고 침대와 이불이 모두 갖춰져 있으며, 사방을 비단(鮫綃)으로 둘렀는데, 이것이 가늘고 섬세한 장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밖에서 안을 보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안에서는 십분 투명해서 밖의 산수초목을 모두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또, 수많은 금붙이와 옥붙이가 이러저리 휘장 가운데 걸려있어서, 수레가 이동할시 흔들려서 쨍쨍 소리가 났는데, 마치 섬세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수레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밖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길을 가는 동안 궁녀를 희롱할 때[20]
, 마음대로 해도 무방해서 이름을 어녀거라고 지었다. 양제가 보고 십분 만족해하며 “이 수레 잘 만들었네, 길에서 적막하지는 않겠군!”이라 하고, 하안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21]
2.2.3. 무리한 건조 사업[편집]
경성 낙양에서 배를 타고 양주까지 유람하기 위해 양제는 용선과 대규모 선박 수천 척, 잡선 수만 척을 만들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렸다. 이 작업에 투입된 인원만 200,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만들어진 대룡주(大龍舟)를 탔고, 황후와 후궁, 대•소 신료, 승려, 도사 등은 그 뒤를 잇는 화려한 배들에 탔다, 제1차 남순때 양제가 탄 용주(龍舟)는 상하 4층이었고, 높이가 45척, 너비가 50척, 길이가 200척에 안에는 금과 은을 장식하여 인테리어가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배 안에서는 음주와 가무가 끊이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인 황후, 비빈, 대신들도 각각 배를 가졌으며, 수행선이 1,000척을 넘어서 행렬이 전후로 무려 100리나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선대가 지나는 곳에는 대량의 기병을 파견하여 호송하도록 했다.[22] 이때의 모습도 장관이라서 적힌 바에 따르면 칼과 창과 깃발이 마치 숲을 이룬 듯 했다고 한다. 또한 지나가는 군과 현은 도로를 닦아야 했을 뿐 아니라, 운하 500리 이내의 지역은 배가 도착하는 곳마다 지방관이 나와서 양제에게 온갖 진귀한 물품과 산해진미를 갖다 바쳐야 했는데, 그냥 요리도 아니고 그 지역의 가장 맛있는 요리만을 바쳐야만 했다. 이러다보니 양제가 지나가는 곳에 위치한 군과 현은 말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었다. 군, 현의 관리들이 앞다투어 요리를 바쳤는데 이때 양제에게 풍성하게 바친 자는 승진했고, 약소하게 바친 자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방 관리들은 양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백성들을 쥐어짜서, 많은 민간의 재물들이 엄청나게 수탈당했다. 배가 떠날 때가 되면, 이 음식들 중에서 다 못 먹은 것은 그냥 그 자리에서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떠났다.[23][24] 이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집안 살림이 거덜날 정도로 가산을 탕진했다. 거기다가 당시 양제의 배는 그냥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서 차출된 백성들이 강 양편 언덕에서 끌고 이동했다. 배를 끄는 사람을 '전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모두 더하면 무려 80,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강남 놀이가 싫증이 나면 양제는 생각을 바꿔서 서북쪽으로 행차했다. 양제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첨꾼과 간신들이 서역 소국들의 국군과 사신들을 후한 선물로 꼬드겨서 양제가 지나는 길에 무릎을 꿇고 영접하도록 했으며, 그들의 접대를 받는 것에 양제는 만족해했다. 또한 북방에 유람을 떠나다가 길이 막히면 태행산에 굴을 뚫었고, 근처 백성들을 동원하여 대로를 건설했으며, 100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0일 만에 장성을 쌓기도 했다. 이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당연히 기일이 늦어지기 마련이었고, 그 때문에 커다란 눈보라의 습격을 받아서 양제의 북방 원정을 수행하던 병사들 상당수가 동사했다. 말이나 노새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어, 거의 열에 아홉 정도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2.4. 민심의 악화[편집]
당시 양제가 지나는 곳마다 해골이 땅바닥에 널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에 백성들은 홍수, 가뭄, 메뚜기 떼 같은 천재지변을 가장 두려워했지만, 양광이 황제로 있는 동안에는 양광의 놀이에 따른 재난을 더욱 두려워했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놀러 나가는 양제의 놀이 행렬은 인원이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했고, 이 행렬은 온갖 명목을 붙여서 백성의 재산을 쥐어짜냈다. 이런 무지막지한, 거의 약탈에 가까운 행렬이 지나가고 나면 지방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백성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당시 천재지변에 희생당한 사람보다 양제의 무분별한 놀이와 그에 따른 대재앙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25]
주변 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게 되자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손이나 발을 잘라 노역을 면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여기서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는 말이 나왔다. 즉 팔과 다리가 없는 것이 복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까지 치닫고 노역할 남자들이 부족해지자 양제는 여자들까지 징용했다고 한다.
나중에 양제는 건축가에게 '이동식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했는데, 이 궁전을 관풍행전(觀風行殿)이라고 칭했다. 관풍행전은 언제든지 조립과 해체가 가능했다고 한다.
2.2.5. 도덕적 결함[편집]
신하들도 양제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간언을 했다가는 양제의 분노를 사서 처형되었던 터라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수양제의 신하들인 관롱집단은 전통적인 귀족이자 북주-수나라-당나라 시절 내내 황권을 가볍게 여기고 여러가지 만행을 일삼은 집단으로서 부황 수문제조차 이들을 통제하지 못해 재위 내내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수양제 시기때 그들은 양제의 말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원래 황제라는 자리가 상당한 격무를 매일 같이 수행하는 직위임에도 양제가 매달 놀러 나갈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양제의 황권이 어마어마했다는 뜻이다.[26]
그리고 양제는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어서 늘 자신의 실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인물에 대해 시기를 하기도 했다. 가령 수 왕조 초기에는 설도형(薛道衡)이라는 가장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가 지은 <석석염>(昔昔鹽)이라는 시가 있었는데, 그 시는 특히 후반부에 있는 대목이 특히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수양제는 이전부터 연애시 몇 수를 지었는데, 자신의 성격상 다른 사람이 시를 써서 이름을 날리면 몹시 기분 나빠했다. 양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설도형의 이 시를 보고 시기를 했고,[28] 결국 누명을 씌어 설도형을 살해했다.[29] 그 뒤 양광은 설도형의 시신을 보면서 "그래, 지금도 '빈 들보에선 제비집 진흙이 떨어지네'라고 읊을 수 있겠는가?"라며 모욕했다고 한다.
2.3. 고구려 정벌[편집]
양제는 수많은 실책을 범해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고구려 정벌이다. 양제는 주변국들에게 입조와 조공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하면 대대적인 정벌을 펼쳐 굴복시켜왔다. 북쪽의 돌궐, 서쪽의 서역과 토욕혼(土谷渾), 남쪽의 베트남을 정벌하여 각국의 군주들이 자신에게 입조하게 하는 등 북쪽, 서쪽, 남쪽으로의 원정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수양제가 여기까지만 했으면 과도 있지만 그래도 공도 어느정도 존재하는 만큼 한무제나 패륜으로 집권한 영락제나 세조 정도의 평가는 받을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직 동쪽의 고구려만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조 및 조공을 거부했다.[30] 과거 양광의 아버지였던 수문제도 고구려를 입조시키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문제는 고구려에 서한을 보내 조공하라며 압력을 넣었지만 고구려의 영양왕은 거부했고, 오히려 수나라의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했다. 분노한 문제가 수•륙군 300,000명을 동원해서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지만 역병과 태풍으로 손해만 보고 끝났다. 이미 한번 격퇴해내서 기세등등해진 고구려가 양제의 요구에 대해 그렇게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다른 속국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고구려처럼 대항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고구려를 반드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양광은 돌궐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고구려 사신을 만나게 되었는데 대놓고 그 사신에게 고구려 태왕의 입조와 조공을 요구했으며 이를 어길 시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위협하는 행태를 보였다. 당연히 사신에게 보고를 받은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 요구가 부당하다고 여겨 거절했다. 이에 양제는 수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를 행하라며 압력을 넣었지만 영양왕은 전혀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격분한 양제는 아버지 문제가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고구려를 침공하고자 했다.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598년 이후 14년 만이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3차에 걸친 대원정이었다. 특히 1차 정벌에서는 113만 대군[31] 을 동원했다.
2.3.1. 제1차 공격[편집]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34]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했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32]
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33] 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딱따기(야간 순찰 때 맞부딪혀 소리를 내는 한 쌍의 나무 조각)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했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으며,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의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며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며,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요역의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며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며,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고,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暆)·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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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원정을 준비해야 했기 떄문에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당시 산동 해안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배를 건조했는데,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할 때 그러했듯이 완공 기한이 무척 촉박했고[35] 이에 기술자들은 밤낮없이 쉬지도 못한 채 물 속에서 일해야만 했다. 물에 불을대로 불은 하반신이 썩어 문드러져서 목숨을 잃은 자가 전체 인원의 40%에 육박했을 정도로 매우 참담했다.
또한 양제는 백성들을 징집하여 식량을 운반하기도 했는데, 운반 기구가 모자라 작은 수레까지 총동원했다. 하지만 식량을 많이 싣지 못하는데다가 길이 너무 먼 탓에, 가는 도중에 식량을 다 먹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막상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건네줄 식량이 없어서 백성들은 도주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1,000리나 되는 수송로에서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군수 물자를 운송하다보니 병사하는 자,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여 시체가 길을 덮을 정도였다.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대고구려 전쟁 준비를 한 양제는 자신이 직접 612년 정월 113만 3,800명의 대군[36] 을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선두 부대가 출발하고 나서 마지막 부대까지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소요되었으며 그 행렬이 자그마치 1,000여 리(400km)가 되었다. 좌장군 우문술의 군사 450,000명, 우장군 우중문이 이끄는 군사 450,000명의 실로 유례가 없는 엄청난 대규모 출정이었다. 그리고 양제 자신이 이끄는 병력 수만 해도 260,000명이었고 행렬은 200(73km)여 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향해 진격한 수나라군은 며칠에 걸쳐 그 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 지역인 요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건설하여 고구려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부교가 불과 1장(丈:약 3m)이 모자라서 강을 건너기엔 짧았다. 이 장면을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고증대로 건너지 못하고 대규모 피해를 입는 것으로 묘사했다.
수나라 군사들이 부교를 건너지 못해 우왕좌왕하자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해서 수나라군에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이 공격으로 강을 건너기에 앞서 많은 수나라 군사가 전장의 귀가 되고 말았다. 피해를 보고받은 양제는 부교 건설 책임자인 우문개를 불러내서 질타했고, 군사를 재정비한 다음 부교를 다시 만들어 도하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수나라군이 도하에 성공하여 고구려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은 응전했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10,000명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도하에 성공한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는데 이때 100만 명의 군사라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오판했다. 당시 요동성은 평야성이었고 규모가 꽤 컸는데, 방어적으로 규모가 큰 평야성은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태종 이세민은 요동성의 상황을 잘 공략해서 약간의 시간만 소요하면서 함락시켰다.[37] 그 때문에 요동성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벽이 무척 높았는데,[38] 높이는 30m인 데다가 주변의 산과 더불어 길이가 3.5km였다. 수나라군은 성벽을 올라가려 시도했지만 공성용 사다리가 요동 성벽보다 낮아 올라갈 수 없었고 후퇴한 뒤 다시 재정비하여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돌과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끈질기게 저항하여 올라가지도 못하고 다시 후퇴했다. 그러자, 성벽과 성문을 파괴하려 했지만 문제는 내구도가 중국의 성과 달라서 안 부서졌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성은 중국의 벽돌성과는 전혀 다른, 돌로 만든 석성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벽돌성은 중국에 있고, 석성은 한반도와 만주에 분포하고 있다. 황하 지대의 황토의 경우, <판축법>이라고 해서 흙을 틀 안에서 때리고 다져서 벽을 올리는데[39] 웬만한 벽돌보다 튼튼하게 뭉친다. 게다가 이 흙은 벽돌로 구우면 경도도 높고 튼튼해서 중국에서 벽돌 건축이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고대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일관되게 사용되어 온 건축 기법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역시 목재와 석재의 부족 때문에 벽돌을 이용한 건축 기법이 발달했다.
반면에 부여와 고구려가 있었던 만주, 백제와 신라가 있었던 한반도에서는 화강암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보니 화강암을 이용한 석조 건축 기법이 발달해서 절에서 만든 석탑만 화강암으로 만든 게 아니라 성벽도 화강암을 통으로 잘라서 만들어 썼다. 본래 요동성은 중국이 요동 일대를 차지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성이었다.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빼앗은 성이었지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땅이라 성벽을 갈아엎은 상태였다. 아무리 벽돌이 판축 기법으로 만들어서 튼튼하다 하더라도, 거대한 화강암을 통으로 사용한 것과 내구성이 다르다. 거기다 성문과 다리도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견고했다.
벽돌을 쌓으면 끝인 중국의 성과는 달리, 고구려의 석성은 쌓은 돌을 흙으로 에워 감싸서 더욱 단단했으니, 중국의 벽돌성을 기준으로 만든 수나라의 무기로는 당연히 부술 수가 없었다. 특히 수나라 군대는 판축 토성과 벽돌성에 익숙하고 청야전술을 겪어보지 못했다 보니 공성전에서 헤멨다. 그렇게 공격을 말아먹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설상가상으로 양제가 "자신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수나라 군대가 물량으로 밀어붙여서 지친 고구려군을 공격할 기회를 노려도 양제에게 먼저 보고해야 했다. 따라서 수나라 군대는 군사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공격을 해도 고구려군이 이 틈에 재정비를 하거나 수나라의 움직임을 먼저 눈치채 대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요동성에서 투항 의사를 내비친 한 고구려인이 "지금 요동성은 재정비를 못했으니 지금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걸 또 다시 황제에게 보고하러 가서 시간 손실이 났다. 이러니 번번이 요동성 사람들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고, 뒤늦게 공격해도 이미 요동성은 재정비가 끝난 상태였다. 물론 배반 의사를 내비친 고구려인은 끝내 요동성주에게 들켜서 죽었다. 이에 우중문은 요동성 함락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양제에게 가까운 육합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자, 우중문은 요동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의 눈을 돌리는 한편 일부 군사를 이끌고 육합성을 공격했지만 이 육합성도 고구려군의 철벽 수비에 밀려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한편 수나라 수군의 장수 내호아는 수군 100,000명을 평양성 인근에 상륙시키고 나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는 양제의 명령을 거부한 거나 다름없었다. 양제는 출정 전에 각 장수들에게 육군과 수군이 협공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는데, 내호아는 전공에 집착한 나머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려고 들었다. 이러한 집착은 끝내 패배로 이어져 고구려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에게 수나라 수군의 절반 이상이 궤멸당했고, 내호아는 급히 물러나야 했다. 수나라 육군의 상황도 비슷했다. 요하를 건너와서 요동성을 포위한지 벌써 6개월이나 지났지만 113만명의 수나라 군사 중 단 한 명도 요동성 성벽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0,000명의 별동군을 편성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별동군은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는 양제가 이 군사들에게 100일치 식량을 한꺼번에 줘버렸던 것이다. 직접 들고 가는 식량은 당연히 소량이어야 하고 목적지에 주둔한 뒤에 지속적으로 보급해야 정상이다.[40] 그러나 양제는 군사 개인에게 식량을 휴대하게 하고, 만약 식량을 버리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포했다. 결국 305,000명의 별동대는 수십 kg에 달하는 식량을 등에 업고 요동성에서 평양성까지 험난한 천산산맥을 하나하나 넘어가며 진격해야 했고, 무거운 군장 때문에 수나라 군사들은 갈 때마다 야음을 틈타 천막 속에서 몰래 식량을 땅에 파묻었다. 그로 인하여 수나라 군대는 식량이 떨어졌고 굶주려 싸울 힘이 없었다. 요동성에서 내호아의 패전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고, 처음 계획이 수륙합공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일이 지체된 양제가 별동대를 파견했으며, 이들에 대한 보급은 내호아가 담당해야 했을 수 있다. 사실 양제가 모지리도 아니고 요동에서 평양까지 100일 만에 갔다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평양성에 도달하기 전에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도착한 우중문과 우문술이 내호아의 패전을 알고 나서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에 서둘러 후퇴한 것과 연계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 항복을 청하며 동시에 수나라 군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이나 고구려의 영양왕이 올 때에는 반드시 잡으라는 양제의 기밀 명령에 따라 을지문덕을 포박하려 했으나, 우문술과 유사룡 등 주변 장수들이 항복한 장수를 잡아들이면 저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며 반대하여 결국 을지문덕을 그대로 송환했다. 그러나 우중문은 나중에 이 작전이 별동대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겸사겸사 내부를 염탐하기 위한 거짓 항복인 것을 알아채고 을지문덕을 추격했다.
결국 살수(청천강)를 건넌 수나라 별동군이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사들의 포위는 의미가 없어 퇴각을 결정했고, 후퇴 와중에도 이어진 고구려군의 기습 공격에 기진맥진한 수군이 살수를 건널 때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아 수나라 30만 별동군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때 수나라 305,000명 중 살아 돌아간 군사는 2,700명이었으며, 이것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 양제는 크게 분노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그해 10월 퇴각했다. 결과적으로 양제의 제1차 침공은 수나라의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2.3.2. 제2차 공격[편집]
그러나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613년 3월 양제는 350,000명의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또다시 침공했다. 지난번의 패배를 되새긴 양제는 이번에는 별동군을 조직하여 공격을 시도했다. 도하한 수나라 군사는 요동성보다 토성을 높게 쌓아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41]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들은 이러한 수나라의 화살 세례에 쉽사리 대항을 못했고, 양제는 효력이 있다고 판단해 계속적으로 화살로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나라 측에서 문제가 터졌다. 양제의 폭정을 보다못한 수나라의 예부상서 양현감이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백성들이 폭정에 저항하면서 '죽음의 땅 요동으로 가지 말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를 따랐다. 양현감은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는 황제의 본가로, 억만금의 재산이 있으며 관직 또한 이미 상주국에 이르렀거늘 무슨 부귀를 더 바라겠는가? 지금 9족이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폭군에 저항하고자 일어섰다. 실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기병한 것이다.
그러자 양제와 함께 이 소식을 들은 양현감의 친구 곡사정은 이번 반란때문에 자신에게 미칠 일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에 투항했다. 양현감의 반란에 당황한 양제는 우왕좌왕하다가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하자 급히 퇴각을 결정했다. 곡사정의 보직은 병부시랑이었는데 이는 군사 행군, 보급, 작전을 총괄하는 군사부문 최고 직책으로 현대적인 의미로는 국방부 차관에 가까운 직위였다. 그런 인물이 고구려에 투항해 작전 기밀이나 군대 내 상황 등이 모두 드러났으니 전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기에 고구려 군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식량과 무기를 모두 버리고 퇴각을 시도했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해 고구려군이 뒤늦게 추격했고 수나라 군사 수천 명이 전사했다. 그나마 제1차 때에 비해 피해는 훨씬 적었고, 고구려도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2.3.3. 제3차 공격[편집]
가까스로 양현감의 난을 진압한 양제는 다시 고구려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때는 수나라의 대내외적 사정이 나빴던 데다가 많은 대•소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특히 양현감 건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반란이 터지고 있었고 고구려 원정에 국가의 부를 모두 탕진하다보니 우선 반란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집이 센 양제는 대신들의 반대를 철저히 무시한 채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처형하겠는 엄포까지 놓으며 정벌을 강행했다. 결국 614년 3월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섰으나, 이때의 수나라 군사들은 계속된 전쟁의 패배로 인해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으며 고구려 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탈영병이 속출했다. 이렇게 되자 양제도 원정이 더이상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 측에서 사절을 보냈다. 항복을 할 것이니 군사들을 철수시키라는 것이었다. 또한 양제의 제2차 침공때 투항했던 곡사정을 함께 보내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사실 고구려는 수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으나, 고구려 역시 전쟁 피해가 커서 한계를 느꼈다. 계속 전쟁을 이어가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양제의 자존심을 추켜세우면서 수나라 군사들을 철수시키고 전쟁을 적정선에서 마무리짓고자 했다. 양제는 대•소 신료의 주장에 못이기는 척하고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철수시켰다. 이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사신단에 섞여 있었던 누군가가[42] 품에 숨겨두었던 쇠뇌를 꺼내 양제를 향해 쏘아 맞혔고, 난리가 난 틈을 타 달아났다. 그러나 이미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된 터라 양제는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43]
2.4. 시해와 수나라의 멸망[편집]
고구려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귀결되자 수나라 내부에서는 반대급부격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터지면서 내부 분열이 극심해졌다. 고구려 정벌에만 집중해왔던 양제는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양제는 수나라의 수도를 세 곳으로 나누었다. 원래 수도는 장안으로 서도(西都)라고 칭했고, 동도(東都)인 낙양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장강 이남의 양주에 강도(江都)를 건설했다. 전국의 거센 반란에도 불구하고 만약 양제가 남아있는 군대를 끌어모아 반란군의 공격에 맞서 제대로 된 방어와 진압 작전을 펼쳤다면 상황을 반전시켜 수 왕조를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양제는 별다른 대응이나 대책 마련은커녕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장강 이남의 강도로 황족들과 함께 피난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주색에만 몰두했다. 양제는 하루종일 술로 쓸쓸함을 달랬고, 그저 하루하루를 주색잡기로 소일하며 지냈다. 소황후는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에게 기운을 내라고 권했지만, 그는 술에 취해 시간만 낭비했다.
나중에 할 일이 없을 때 양제는 거울을 끌어당겨 멍하니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소황후가 그 이유를 묻자, 양제는 거울을 보면서 "좋은 머리로다. 이 머리를 누가 벨 것인가?"라고 답했다. 때로는 독을 탄 술을 곁에 놓고서, 자신이 총애하는 비빈과 황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일 적이 오면, 네가 먼저 마셔라. 그 다음에는 내가 마시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소황후는 깜짝 놀라면서 양제에게 어찌 그런 불길한 말을 하느냐고 말했다. 이에 양제는 죽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다며 "세상사 무상하고, 인생은 꿈 같으며, 빈천고락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니 목이 잘린들 무슨 상관일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고 한다.
남도 강도에는 자신과 손자인 연왕(燕王) 양담(倓)이 있고, 제1수도인 서도 장안에는 손자인 대왕(代王) 양유(侑), 제2수도인 동도 낙양에는 월왕(越王) 양동(侗)[44] 을 주재시켰다. 이 조치는 수도 세 곳에 자신과 손자 셋으로 하여금 각각 웅거함으로써 전화가 거세져 수나라가 통일제국은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 한 곳은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에서 나온 묘책이었다. 하지만 양유와 양동 둘 다 어린애라 잘 지킬 리가 없었고, 장안에는 양제의 이종사촌형인 이연과 이세민 부자가 태원으로부터 남진하여 입성했으며, 낙양에는 관료였던 왕세충이 입성했다. 이연 부자와 왕세충은 각각 양유와 양동을 옹립했지만 둘 다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그들이 쥐게 되었다.
심각한 점은 이렇게 기존 수도인 장안은 그냥 방치 상태가 되고, 양제가 피난간 곳에 정부 요인들이 같이 가지도 않았으므로 사실상 수나라의 중앙정부가 활동을 멈추었고, 그 덕분에 반란은 120여 건이나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양제는 정신을 못차리다가 평소 양제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장 우문화급, 우문지급 형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우문화급의 난을 양제가 가장 아끼던 장손 양담이 사전에 탐지해 양제에게 상주하려 했으나, 궁궐을 담당하는 자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란군 수장들은 양제가 무지막지한 폭군이고, 병사들도 그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만약에라도 그냥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병사들이 지지하지 않아서 실패할 가능성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양제가 독주를 만들고 있으며, 그 독주를 이용하여 반란을 기도하는 친위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남방의 병사를 중용하여 친위병들이 북쪽으로 돌아갈 희망을 끊어버리려 한다.'
이러한 유언비어를 듣게 된 병사들은 양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정변이 일어나고, 병사들이 안팎에서 호응했기 때문에 양제는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 이때 반란의 소식을 처음 들은 양제는 미워하던 차남 양간이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소 이런 아버지를 두려워하던 양간은 반대로 아버지가 자신을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양제는 살해당하기 직전, 황제는 황제라고 마지막 위엄을 보였다. 반란군이 궁전으로 들어닥치자 인상을 쓰면서 호통쳤다.
수양제: "짐이 무슨 죄가 있길래, 목이 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반장 마문거(馬文擧): "당신은 호화사치의 극을 달리면서 허구한 날 이곳 저곳을 놀러다니고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힘을 함부로 낭비했다. 그리고 계속된 무리한 정복전쟁으로 국가의 재정이 파탄났으며, 주색잡기에 소일했고, 이로 인해 온 천하의 백성들이 당신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당신의 죄악은 하늘을 채우고도 남으니 100번 죽어 마땅하다. 어찌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가?"
수양제: (탄식하면서) "그렇다. 짐은 정말 백성들에게 잘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뭘 했느냐? 하루종일 나를 따라서 잘먹고 잘살며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느냐? 너희는 모두 내가 먹여살렸던 군인들이다. 어찌 반란군들과 같이 놀 수 있단 말이냐?[45] 그러니 묻겠다. 주동자가 누구냐?"
사마덕감: (코웃음을 치면서) "지금 천하는 도탄에 빠졌고, 하늘과 땅에 모두 원성이 자자하다. 세상 사람들은 네놈 같은 우매한 폭군을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고 있는데, 어찌 주동자가 한 사람 뿐이겠는가? 이제 세상의 분노를 풀기 위해서는 오로지 네놈의 수급으로 천하에 사죄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사마덕감은 말을 끝내고 양제를 누각에서 끌어내렸다. 이때 우문화급의 사자가 달려와 "이런 우매한 황제는 내게 데려올 필요도 없으니 즉시 그를 해치워라."고 명령을 내리자 사마덕감은 양제를 죽이려고 검을 빼들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13살된 양제의 어린 아들인 조왕(趙王) 양고(楊杲)가 울먹거리자, 반란군들은 양고를 한 칼에 죽여버렸고, 피가 양제의 몸에까지 뿌려졌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보고, 양제는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반란군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자는 천자로서 죽는 방법이 있다. 천자가 죽을 때는 칼을 써서는 안 된다. 독주를 가져와라, 짐이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진하겠다!"[46]
그러나 반란군은 "지금 이 판국에 황제가 어디 있고, 천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독주를 마시고 죽는 것은 칼로 죽는 것보다 편하니 허용하지 않겠다."라면서 허락하지 않자, 양제는 "어쨌든 짐이 천자였으니 짐의 시신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47] 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교살해 달라고 했고, 반란군들도 이는 받아들여 내실로 끌고 들어가 허리띠로 즉석 교수대를 만든 뒤 양제를 교살했다.[48] 이때 수 황실인 홍농 양씨 일족은 우문지급과 친한 양제의 조카 양호를 제외하고 모두 목숨을 잃는 비운을 맞았다. 양제의 시신은 대중에게 공개된 다음 오공대 인근에 묻혔다가, 훗날 양제의 이종사촌인 당고조 이연[49] 에 의해 뇌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48년 당태종 이세민은 수양제의 황후였던 양민황후 소씨가 사망하자 그녀의 유해를 강도로 보내 수양제와 합장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제묘 동쪽의 또 다른 묘의 묘주는 양민황후 소씨로 추정하고 있다.
3. 가족[편집]
- 양민황후(煬愍皇后) 소씨(蕭氏) - 후량 양명제의 딸로 양광의 아내가 되어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수나라의 황후가 되었으나, 618년 우문화급의 난때 살해는 면했고, 대신 남편과 아들, 손자들을 잃었다. 오직 차남 양간의 유복자로 손자이자 양제의 유일한 혈손으로 남은 양정도(楊政道)는 살았으나, 우문화급의 감시하에 놓였다. 하지만 619년 두건덕이 우문화급을 격파하자 두건덕에 의해 보호되다가 620년 돌궐의 가한이 사자를 보내자 돌궐로 망명했다. 그러나 망명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인 630년, 돌궐이 당나라 장수 이정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양정도와 함께 당나라로 돌아와서 장안에 거주했다. 장안에 사는 동안 태종 이세민이 소씨에게 황족의 예우를 해주어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648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남편 양제와 합장되었다. 여담으로 중국에선 양민황후 소씨가 수양제를 비롯해 돌궐 가한, 태종 이세민까지 유혹한 요녀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후대의 소설 《수당연의》에서 묘사한 것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태종 이세민 덕분으로 간신히 중원에 돌아온 때가 그녀의 나이 64세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이세민의 어머니 뻘이었다.[50]
- 장남 원덕태자(元德太子) 양소(楊昭) - 훗날 세종(世宗) 효성황제(孝成皇帝)로 추존되었다.
- 제왕(濟王) 양간(楊暕) - 34세의 나이로 우문화급에 의해 처형될 때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켰는지도 몰랐다. 두 아들은 살해되었으나, 유복자인 양정도는 살아남아 630년 할머니인 양민황후 소씨와 함께 당나라에 귀순하여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에 임명되었으며 측천무후가 재위한 영휘(永徽) 연간 초기에 사망했다. 아들 양숭례(楊崇礼)는 태부경(太府卿)을 지냈다. 양숭례와 양숭례의 세 아들 모두, 재정회계 분야에서 전문성을 과시한 대단히 유능한 행정관료였다. 그러나 이림보에게 양숭례의 세 아들 모두가 살해당하고 만다.
- 남양공주(南陽公主) 양씨 - 우문화급의 이복동생이었던 우문사급(宇文士及)의 아내였다. 부황 양제가 시해당하자 분노하여 남편과 이혼을 했다. 그 이후 둘은 다시 만났는데, 우문사급이 다시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하자
"당신과 나는 원수 사이이다. 당신이 죽고 싶으면 따라오라."며 화를 내고 거부했다.
- 빈(嬪) 소씨(蕭氏) - 양민황후 소씨의 친족으로, 우문화급의 난 때 살해되었다.
- 조왕(趙王) 양고(楊杲) - 양제가 아끼던 어린 아들로 13세의 어린 나이로 살해되었다.
- 생모 미상
4. 평가[편집]
전대의 서주 유왕, 진 2세 황제, 서초 패왕, 후한 환제, 후한 영제, 오나라의 말제 손호, 후조의 무제 석호, 유송의 전폐제 유자업, 후폐제 유욱, 남제의 울림왕 소소업, 명제(남제) 소란, 동혼후 소보권, 후대의 당 의종, 북송 휘종, 금나라 해릉양왕, 명 4대 암군의 백미인 신종 만력제 등과 함께, 이견의 여지가 없는 중국사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은 중국사의 황제 중에서 최악의 폭군을 꼽으라고 할 때 바로 수양제를 거침없이 1순위로 꼽을 정도이다.[51]
수나라는 다른 단명 왕조들과 달리 제도적인 모순이나 심각한 명분의 하자가 없었고 통치 기반도 탄탄했으며 지배 집단도 정상적이었다. 오직 수양제의 폭정 하나 때문에 단 2대 만에 멸망한 것이었다. 당나라가 수나라의 통치 기반을 거의 비슷하게 물려받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양제가 차라리 범군이기만 했어도 수나라는 훨씬 오래 존속될 수 있었다.
사실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서주 유왕, 후한 영제, 당 의종, 북송 휘종, 명 만력제 등 망국의 원흉으로 꼽히는 최악의 암군들이 많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아버지와 형을 살해하고, 병중에 있는 아버지의 후궁을 노리는 등 패륜 행각은 저지르지 않았고, 황위를 찬탈한 케이스도 아니었으며, 직접 수많은 백성들을 살육하지도 않았고 굳이 무의미한 대외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하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망국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해당 황제들이 핵심 원인이기는 하나 최소한 전대 황제들이 쌓아온 여러 폐단이나 문제점들도 없진 않았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다. 이러니 패륜, 색욕, 황위 찬탈, 학살, 무리한 공역, 대외 전쟁, 처참한 패전, 망국 등, 폭군의 소양을 두루갖춘 양제의 추악함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한국사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과 비교하면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서모(庶母)와 이복동생을 살해했으나 수양제처럼 친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으며, 신하들에게는 '사화'라는 이름의 대학살을 저질렀으나 일반 백성들을 학살하지 않았다.[52] 무리한 전쟁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연산군은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들기는 했으나 망하게 만들지 않았으니 연산군과 수양제를 비교하면 연산군은 양반으로 보일 지경이다.
세계사적으로 봐도 수양제 수준으로 멀쩡했던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아넣은 인물은 직전 왕조인 북주의 선제 우문윤[53] 과 1,300년도 더 뒤에 집권한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54] 정도밖에 없다.
수나라 직후의 당나라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양제를 폄하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교차검증이 가능한 내용만으로도 최악의 폭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목격자가 없는 궁중 암투와 관련된 내용은 다소 부풀리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양제가 전국을 유람다니며 수많은 백성들을 학살하고, 무리한 대외 원정을 기획하여 백성들을 사지로 몬 것은 당대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었다.
수양제의 개인적인 품성을 봐도 문제가 많다. 양제는 군주가 절대로 가지지 말아야 할 성격들을 모조리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는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난 점만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여 일찍이 신하들에게 "사람들은 내가 선제의 유업을 이어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지금의 문인들과 겨루어서 그 실력으로도 황제가 될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게다가 남이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에 대해 매우 학을 뗀 탓에 간언하는 신하는 무조건 죽음으로 다스렸다.[55] 그는 일찍이 명사 우세남에게 “나는 평생 남의 충고를 원치 않는다. 높은 관직에까지 오른 자가 입바른 소리로 명성까지 추구하는 꼴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수서》는 이런 그를 두고 ‘하늘 아래 원수 아닌 자가 없었고, 좌우 모두가 그의 적국이었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 결과 나라가 처참히 망하고 자기자신도 더 처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양광 본인이 천하의 사람들을 해쳤고 자기 자신도 해친 셈이었다.
그리고 양제가 한 행동에는 인간이 저지를 만한 거의 모든 사악한 범죄들이 다 포진해 있다. 아버지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형제들을 음해하고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며 자신을 따르는 간신들은 총애하고 충언을 하는 충신들을 죽일 만큼 음흉하고 잔혹했으며, 음탕하여 새어머니와도 같은 여자를 범하는 등 여자를 너무 많이 밝히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무리한 공사로 나라를 말아먹고, 대규모 전쟁을 일으켜 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잃게 했다. 또한 국정 운영을 방치하여 나라를 망가뜨리고 반란이 일어나게 하여 결국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의 일들에서 나오듯이 수양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그런 악행들을 밥먹듯이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죽기 직전에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냐고 되물었다는 것을 보면,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의심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 민족이 수양제를 특히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실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기질이 정상적인 사람이 보았을 때 너무 지나친 탓이 컸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똑같이 국가 멸망의 씨앗을 뿌렸다고까지 평가받는 시황제보다 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통일과 여러 정치적인 면모만 보면 시황제의 부정적인 면과 후임인 이세황제 호해를 합친 아니 몇 배는 더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진숙보를 공격할 때 총사령관이 바로 양광 본인이었다. 잡힌 사람이나 잡은 사람이나 똑같은 시호를 받았다니 모순이다. 그나마 양제가 진행한 대규모 건설 행위 가운데 대운하만은 이후 당나라 시대에도 이어지면서 중국 전역의 영토 연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사실 대운하 건설은 언젠가는 반드시 할 일이었지만 양제가 너무 무리하게 다그친데다가 이거 말고 수많은 대규모 사업을 병행했기에 문제가 커졌다. 특히 위에 나온 대규모 용선이나 수많은 이궁 등 사치스럽고 규모가 엄청난 토목 공사들을 대운하 공역과 병행하는 바람에 수문제 시절 '개황성세'때 쌓인 어마어마한 국부가 순식간에 거덜났다.
관롱 귀족 집단과의 갈등도 패망의 지름길로 떨어진 원인이었다. 당나라을 세운 고조 이연이 속했던 호족 세력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은 북위의 초기 수도였던 평성의 방위를 위해 그 이북에 세운 군사기지인 6진의 하나인 무천진 일대에서 세력을 만들어 귀족화한 호족 가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들 중 양견이 북주 우문씨 황실의 외척을 하면서 수나라를 개국했고, 당나라를 건국하는 농서 이씨 가문 또한 수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수나라의 창업군주였던 문제는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황실이 그들을 직접 통치하는 것을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요 권세가들은 소수의 귀족들이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며 황실은 이 귀족들을 통해 국가를 간접적으로 통치할 것을 국가에 요구하면서 반발했다. 이에 따라 외척 관계로 밀접한 사이였던 황실과 관롱집단이 중심인 주요 귀족들 사이에 긴장감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런 긴장감은 상호간의 갈등으로 발전해 문제 양견은 귀족층의 대규모 숙청이라는 극약 처방을 단행했다. 당연히 귀족들이 눈뜨고 앉아서 당할 리는 없었고, 대규모 반란을 도모하나 문제가 직접 나서서 진압했다. 하지만 양견과 그 이후 황제가 지속적으로 족쳐서 와해시키거나 멸족시켰으면 되는데 그러기도 전에 양광이 탈법적으로 제위에 오르면서 문제가 벌어진 것이다.
패륜으로 즉위했으니 명분적인 면에서 결함이 있었고, 어찌보면 양제는 좋으나 싫으나 황족들과 귀족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려 지속적으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 정벌도 그래서 벌인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제2차 침공부터는 병력 규모도 그리 큰 편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이것의 규모가 지나칠 만큼 커졌고, 여기에 사치스러운 본인의 성향과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사실 대운하는 수문제가 먼저 계획하고 시작했던 사업이었다. 허나 비용도 많이 들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자 곧바로 중단시켰는데, 수양제가 이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 막장 테크 하이웨이를 충실히 탔다.
끝내 수 황실은 내부 황위 다툼으로 관롱집단을 와해시킬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버렸고, 양제의 계속된 병크로 나라 꼴이 엉망이 되자 이씨가 나라를 차지한다는 참언으로 이금재(李金才)를 죽였으나, 관롱집단에 휘둘려 고조 이연에게 나라를 내줬다. 관롱집단은 당나라때까지 권세를 휘둘렀으나, 당태종 시기 이후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해 측천무후의 숙청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당현종 시기에는 그저 명맥만 유지하다가, 그마저도 안사의 난 이후부터는 와해되고 만다.
여담이지만 수양제의 황릉은 최근까지도 수양제릉(隋煬帝陵)이라는 비석을 못보면 그냥 지나칠 만큼 초라한 몰골로 방치되어 왔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초라한 몰골 덕분에 문화대혁명의 광풍속에서 중국 역사상 수많은 위인들이 무덤이 파헤쳐지고, 부관참시를 당하는 막장 상황에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용케 넘어갔다.
같은 묘호를 가진 수양대군과 비슷한데 실제로 두 군주는 친족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러 찬탈하고 여러 실책들을 남겼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명군은 아니라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수당시대를 다루려면 무조건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다.
- 1987년 홍콩 TVB의 퓨전 사극 <대운하>에서는 배우 오계화[56] 가 해당 역할을 맡아 전형적인 패륜아에 폭군, 인간쓰레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머니 문헌황후 독고씨, 아버지 문제 양견, 형 양용을 직접 살해까지 한다. 여담으로 이 드라마에서는 고구려가 고려국으로 언급되면서[57] 요동 국경에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언급된다. 다만 아시아엔 자막 판에서는 주변국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는 가짜 황제가 장안에 감금시켰는데 쇼토쿠 태자와 오노노 이모코가 뻘짓을 하다가 실수로 가짜 황제를 죽여서 그가 구출된다.
- 2013년 중국드라마 <수당연의>에서는 배우 푸다롱(富大龙)이 연기했다. 자신의 지하궁을 발견한 여동생 경화공주를 독살하고 형이 술김에 과실치사한 것으로 꾸몄다. 경화공주의 죽음 때문에 수문제는 태자를 폐위하고 양광을 태자로 삼았다. 수문제에게 미량의 극독이 들어간 가짜약을 계속 마시게 했다. 신하들의 밀고로 양광의 비밀을 알게 된 수문제는 양광을 폐태자하려 했다. 황궁의 움직임을 알게 된 양광은 군사로 황궁을 점령했다. 수문제는 직접 칼을 뽑아 양광을 죽이려 했으나 젊은 양광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양광은 직접 수문제의 목을 졸라 죽이고 즉위했다. 즉위후 의문을 제기하는 신하는 팽형을 하거나 두 눈을 뽑고 몸을 난도질하여 죽이게 했다. 우문화급이 죽이려고 하자 수양제는 독주로 죽고 싶다고 말했고 우문화급이 거부하자 수양제는 자신의 허리띠를 천장에 메달아 자살했다.[58]
- 2019년 드라마 <독고황후>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황위에 욕심있는 인물이며 간계로 형을 태자의 자리에서 몰아냈다. 마지막 회에서 태자가 된다.
"나는 말이오. 천하의 영웅 호걸들 중에 그래도 진시황을 최고로 칩니다. 그 자가 100년만 더 살았어도! 이 중원의 역사는 변했을 겁니다! 나는 말이오! 그 진시황이 못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 넓고 큰 대중원을! 한 길로 통하게 만들겁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하여! 고구려로 갈 겁니다! 고구려 말이에요.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에 조의선인들이 있다면 우리도 죽음을 모르는 돌격대들을 만드시오. 지금보다 더 나은 효과들을! 그리고 100만 대군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곡식을 저장하시오! 무역 상단들을 서역으로 보내서 고구려의 과하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군마들을 모두 사들이시오! 제일 시급한 것이 고구려로 가는 길이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그리하여 평양성에! 수 제국의 깃발을 꽂는 것이오. 제국의 깃발을!"
<연개소문> 21화의 마지막 장면
오냐.... 하.... 사는 게 참으로 고달팠다. 나는 너에게 죽는 게 아니다. 실은... 고구려에게 죽는 것이다. 아니 그러냐? 내 인생... 이 거대한 수 제국도, 결국 고구려에게 진 것이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연개소문> 53화의 마지막 장면 -수양제의 최후
종놈아, 개처럼 짖어봐!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김갑수가 연기했다. 1부의 진 주인공이자 드라마 최고의 인기 캐릭터였다.[59] 차남에 불과했던 양제가 권모술수를 부려 황제에 오른 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고구려와 일전을 벌이다가 패배해서 죽는 것이 1부의 주된 내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수양제의 존재감이 독보적이었다. 워낙 김갑수가 열연을 펼친 관계로, 극 중 청년 연개소문을 맡았던 이태곤이 페이크 주인공을 넘어 아예 엑스트라급으로 전락할 정도였다. 하도 양제의 존재감이 크니까 네티즌들이 대놓고 이 드라마를 주말수트콤, 양제소문, 수나라 사람들이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1시간 가량의 러닝타임 중 수나라 얘기만 하느라 명목상의 주인공인 청년 연개소문(이태곤 분)이 고작 10분 남짓 나온 회차도 존재한다. 사실상 양제를 연기한 중국 입장에서 외국인 배우 중 크게 성공한 듯한 케이스. 사료에 따르면 양제는 음주로 소위 술배가 나온 배불뚝이라서 마른 체형의 김갑수는 미스캐스팅 같았어도 간간이 터지는 개그와 경박하면서도 섬뜩한 면이 있는 웃음소리, 비열하고 광기에 찬 카리스마로 간지폭풍을 선보였다. 다만, 실존 인물인 수양제가 폭군이자 암군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별개로 수양제에 대한 드라마의 묘사는 꽤나 과장되었다. 가령 선화부인(진부인)에 대한 태도가 기록과는 완전히 다른데, 실제 선화부인은 수양제가 즉위한지 1년 만에 병으로 죽었고 수양제는 이를 크게 슬퍼했다. 하지만 드라마상에서의 수양제는 그토록 진부인을 얻길 갈망했으나, 정작 아버지인 문제가 살해당한 밤에 진부인을 마음껏 강간하고 제위에 오른 후, 잔치에서 진부인이 자신을 거부하자 바로 군사들을 시켜 그녀를 궁 밖으로 끌어낸뒤 화살을 여러 번 쏴서 죽이도록 한다.[60] 초반부까지만 해도 후반부에 나오는 자만심, 광기, 개그가 없이, 냉혹한 위선자로서의 캐릭터성을 피력했다. 이때 양광은 황제에 오르려는 야망을 위해 몸을 낮추고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며 기어코 형 양용을 몰아내고 태자가 된다. 나중에 즉위하고 본색을 드러낸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고구려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오만함에 수나라와 함께 그 자신도 망가져 가는 흐름은 상당히 흡입력이 있었고,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소시오패스의 면모보다는 감정선과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발상 자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광인의 면모가 두드러지는데 배우의 열연이 기괴하면서도 병맛 넘치는 캐릭터성을 제대로 표현했다.
- <천일야사>에서는 배우 정흥재가 연기했다. 문제의 후궁인 선화부인 진씨를 겁탈하려다가 부황에게 들키고 나중에 아버지를 암살하고 황제가 되는건 역사와 동일하나 실제 기록과는 달리 측근의 칼에 찔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