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ay ( [0] => [include(틀:역대 송 황제)] ---- ||<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2e8b57><tablebgcolor=#ffffff,#1f2023><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77449 0%, #2e8b57 20%, #2e8b57 80%, #277449); color: #ece5b6" '''북송 제8대 황제[br]{{{+1 휘종 현황제 | 徽宗 顯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lossy-page1-1280px-Seated_Portrait_of_Emperor_Song_Huizong.tif.jpg|width=100%]]}}} || ||<|2><width=100> '''출생''' ||[[1082년]] [[11월 2일]] || ||[[북송]] [[카이펑시|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br](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 ||<|2> '''즉위''' ||[[1100년]] [[2월 23일]] || ||[[북송]] [[카이펑시|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br](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 ||<|2> '''사망''' ||[[1135년]] [[6월 4일]] (향년 53세) || ||[[금나라|금]] [[오국부|오국성]][br](現 [[헤이룽장성]] 의란현) || || '''능묘''' ||영우릉(永祐陵) || ||<|4> '''재위기간''' ||<bgcolor=#2e8b57>'''{{{#ece5b6 제8대 황제}}}''' || ||[[1100년]] [[2월 23일]] ~ [[1126년]] [[1월 18일]] || ||<bgcolor=#2e8b57>'''{{{#ece5b6 북송 태상황}}}''' || ||[[1126년]] [[1월 18일]] ~ [[1127년]] [[3월 20일]] || ||<-2><bgcolor=#fff,#1f2023><color=#373a3c,#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1] =>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width=100> '''성씨''' ||[[조(성씨)|조(趙)]] || || '''휘''' ||길(佶) || || '''부모''' ||부황 [[신종(송)|신종]][br]모후 [[흠자황후]] || || '''형제자매''' ||14남 10녀 중 11남 || || '''배우자''' ||[[현공황후]], [[현숙황후]], 명달황후[br]명절황후, [[현인황후]] || || '''자녀''' ||35남 34녀 || || '''작호''' ||영국공(寧國公) → 수녕군왕(遂寧郡王)[br]→ 단왕(端王) → 혼덕공(昏德公) || || '''묘호''' ||'''[[휘종]](徽宗)''' || || '''별호'''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 || || '''존호''' ||계천흥도부문성무예명황제[br](繼天興道敷文成武睿明皇帝) || || '''시호'''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br](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 || '''연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br]숭녕(崇寧, [[1102년]] ~ [[1106년]])[br]대관(大觀, [[1107년]] ~ [[1110년]])[br]정화(政和, [[1111년]] ~ [[1118년]])[br]중화(重和, [[1118년]] ~ [[1119년]])[br][[선화]](宣和, [[1119년]] ~ [[1125년]])}}} || || '''절일''' ||천녕절(天寧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의 제8대 황제이자 [[금나라]]의 혼덕공.[* 혼미하여 덕을 망친 공으로, 실제로 금 황제가 내린 작위이다.] [[묘호]]는 휘종(徽宗), [[시호]]는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휘는 길(佶). [[도교]]에 심취하여, 재위 중 [[존호]]로 옥청교주휘묘도군황제(玉淸敎主徽妙道君皇帝)가 올려졌는데 흔히 사서에 송 도군(道君) 혹은 도군황제라 하면 이 사람이다.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위정자로서의 능력은 최악이라 중국 역사의 수많은 [[암군]] 및 [[폭군]]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인물이다. 송 제국이 영토의 절반을 잃어[* [[금나라]]가 화북을 정복하면서 강남으로 밀려나 남송이 되었고, 이후 [[몽골 제국]]에 멸망하는 순간까지 다시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다. 또한 한족 역사상 3대 굴욕 중 하나인 [[정강의 변]]을 당한 황제이기도 하다.] 후세 사람들이 송나라를 [[북송]]과 [[남송]]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만든 원흉이나 다름없다. == 생애 == === 내력과 출생 === 6대 황제 [[송신종|신종]]의 11남이며 7대 황제 [[송철종|철종]]의 이복동생이다.[* 생모는 진귀인(陳貴人)으로서, 흠자황후(欽慈皇后)에 추존되었다] 황자 시절에는 단왕(端王)으로 불리었다. 그가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는 말은 둘째 치더라도, 애초에 [[항렬]]이 멀었다. 즉 원래라면 제위 계승권이 없었을 것이다. 철종이 승하할 당시, 그의 살아있는 동복, 이복 동생 중에서 [[조필(송)|신왕 조필]]에 이어서 두번째 연장자였고, 철종의 친동생인 [[조사(송)|간왕 조사]]가 멀쩡히 살아있고 개인적인 흠결도 없어서 즉위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신종의 생존한 아들들 중에서도 제위 계승권 상 휘종 앞에 2명이나 있었고, 앞에 있는 두명이 무슨 불상사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황제 자리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더해 철종의 아들인 조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제위 계승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 형의 사망과 계승권 논쟁 === 그러나 철종의 외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요절]]하고 철종 본인도 일찍 붕어하자 후계를 세워야 했다. 철종의 친동생 간왕은 '누구는 황제 친동생이라서 예법상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반대, 철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조필(송)|신왕 조필]]은 눈병이 있는데 황제 업무 보기 힘들 것이라고 반대하자[* 당시 신왕 조필의 눈병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왕은 심한 안질로 거의 앞에 있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는 과거 중국 황제 중 지능이 모자란 이들보다 더 큰 결점으로 인식되었다.] 황태후 [[흠성헌숙황후|상씨]](상태후)[* 신종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였던 흠성황후 상씨로 명재상 [[상민중]](向敏中)의 증손녀이다. 신종과의 사이에서는 주국장공주(周國長公主)를 낳았지만 11세 나이에 요절했고 이후 자녀를 얻지 못했다. 상씨는 철종과 휘종에게 친어머니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정실 부인이므로 '어머니'였다. 당시 황실 어른 중에서도 가장 어른이기도 했다.]가 단왕을 직접 차기 제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따라서 철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 지명 당시에도 [[장돈]] 등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분 노는 걸 너무 좋아하지 않나? 적장자라면 몰라도 황족 자제를 지명하는데 꼭 그분이어야만 하나?\''''라는 여론이 있었다. 상태후가 회의에서 황실 예법을 무시하고 단왕을 후계로 지명하자, 장돈이 "단왕께서는 성품이 가벼워 황제로선 불가합니다." 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래 상태후와 그 측근들은 유독 단왕을 좋게 보았다고 한다. 평소 행실과 달리 단왕은 황궁을 들러 상태후를 뵐 때 예의를 갖추고 상태후의 비위를 워낙 잘 맞춰 다른 왕들과 달리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태후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단왕의 예술적 재능을 칭찬하고 멋쟁이인 데다 외모 역시 단정하다고 하여 단왕을 좋게 보았다. 이런 까닭에 상태후는 "내가 정실임에도 불운하여 후사가 없고, 신종의 자제들이 모두 서출이라서 모두 내겐 똑같다."라고 말하며, '공평하게' 연장자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눈병이 있어서 일찌감치 참석자 모두에게 황제 후보에서 탈락한 신왕 다음 연장자인 단왕을 지지한 것이다. 더해 '단왕 조길의 외모가 잘생기고 단정하며, 신종께서도 생전에 단왕이 인자하고 효행도 있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는 주장까지 펼쳤고, 평소 같은 신법당파였지만 재상 장돈을 시기한 [[증포]][* <송사> 간신편에 증포 역시 수록되었다. 그는 장돈이 재상이 되었을 때 철종 앞에서 장돈을 잘 대해주고 계속 칭찬하면서 내심 장돈이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매몰차고 정치적 계략을 잘 쓰고 알던 장돈은 평소처럼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할 뿐 증포를 추천하지 않아 증포가 원한을 품었다.][* 증포는 철종 친정기 때 원우당인 사건이 일어나자 평소 자신과 처남에게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라고 찍힌 구양비를 원우당인이라고 모함해 지방지주로 좌천시키고, 장돈 역시 '황제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장돈을 두려워하니까 내가 탄핵한다.'고 주장해 공격했다. 하지만 이때 장돈은 철종에게 사마광 등의 위훈, 명예, 묘비 등을 파괴하면 아니된다고 주장해 관철시키고, 여러 명사들을 추천해 등용케 했기에 증포의 이런 주장은 동의를 받지 못했다.]가 >장돈은 저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태후마마 의견이 맞습니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채변[* 채경의 친동생이자 왕안석의 사위. 신법파였으며 철종 친정 당시 구법파와 상당히 대립하고 원우당인 사건에서도 구법파 탄압에 앞장선 까닭에 구법파 관료들에게 원성을 많이 들었다. 그는 형 채경과 마찬가지로 서예가로도 유명했지만 형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허장상이 >태후마마의 의견이 맞사옵니다. 이대로 해야 합니다. 라고 합세하면서 그대로 상태후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단왕 조길은 상태후의 수렴청정 아래 철종의 뒤를 잇게 됐다. 이후 즉위를 반대하던 장돈은 장지로 가는 상여꾼들이 철종의 관을 진흙탕 위에 올려놓고 잠시 유숙한 것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대파들에게 꼬투리를 잡혀서 탄핵받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는 당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당쟁,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도 관련 있었다. 즉 신종의 정처[* 흠성황후 상씨(欽聖皇后 向氏)]와 철종의 모후[* 흠성황후 주씨(欽成皇后 朱氏)로 당시에는 덕비 주씨라고 불렸다. 따라서 덕비의 아들 철종은 적자가 아닌 서자였다.]가 사이가 나빴다는 점과 선인태후 고씨 사후 상태후를 중심으로 재편된 구법당파와 신종의 정책을 계승한 철종과 장돈 등 신법당파의 향후 헤게모니 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간왕, 신왕 대신 단왕이 선택된 것이다[* 물론 상태후 생전에는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균형적 인사 속에서 재상으로 증포가 선택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따라서 철종 사후 철종의 유지와 장돈 등 신하들이 예법대로 동복동생 간왕, 생존한 신종의 아들 중 철종 다음으로 연장자인 신왕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두 무시되고 휘종이 옹립됐다. === 채경의 만행 === 신종 사후 어린 철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던 선인태후 고씨가 구법당을 복권시켰던 원우연간 시기와 철종 친정기인 소성,원부 연간의 기간 동안 [[장돈]] 등 신법당파가 집권한 이후 북송의 당쟁은 점점 심해져갔다. 따라서 철종 사후 휘종을 수렴청정한 상태후는 구법당과 신법당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구법당의 한충언, 신법당의 [[증포]]를 재상으로 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여담이지만 한충언은 키가 크고 증포는 키가 광장히 작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증포와의 대립 끝에 한충언이 사퇴하면서 증포가 모든 국정을 쥐게 된다.] 그런데 상태후가 얼마 안 가 갑자기 죽고 채경이 등장하자 정국은 다시금 요동쳤다. 평소 그림 그리기와 회화첩을 좋아한 휘종에게 총애를 받은 환관 동관이 휘종의 명으로 항주로 가서 회화첩을 가지러 올 때마다 그 옆에서 비위를 잘 맞추던 채경은 신법당이었지만 장돈 등 당시 집권 대신들이 신용 없는 인사로 평가하여 파직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휘종의 측근 환관인 동관의 추천과 평소 채경과 친했던 휘종의 후궁 유씨의 도움으로 채경이 다시금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후 채경은 증포의 도움과 추천을 통해 대명부지사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했으며 휘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16년 동안 재상으로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증포를 시작으로 자신에 반대된다면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 증포를 탄핵할 때 채경은 “재상 증포가 부정한 뇌물들을 받고 황제가 내려야 할 하사품 등을 마음대로 측근들에게 줬습니다.”라고 휘종과 증포를 포함한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그의 부정을 폭로했다. 당연히 자신 면전 앞에서 모욕을 받고 탄핵당한 증포는 얼굴까지 빨개져 휘종 앞임에도 크게 화를 내고는 채경을 이성을 잃어가면서 논박하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대신들은 증포의 무례함을 지적했고, 휘종 역시 증포가 앞뒤 안 가라고 황제마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당연히 증포는 조사를 받은 뒤 채경의 폭로가 사실로 드러나자 파면되어 지방으로 쫓겨났고 잠시 명예를 회복했으나 지방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윤주에서 사망했다. 이외에도 채경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면 신구법 인물에 상관없이 약 300여 명을 모조리 몰아내고 나아가 그 자손들까지 연좌제로 과거응시금지 등 불이익조치를 취하는 조치 등을 무기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여 조정 전체를 장악했다.] || [[파일:external/www.chinaculture.org/xinsrc_480704031435582659826.jpg|width=500]] || || 기암괴석을 그린 송 휘종의 그림. 이런 소재를 앉은 자리로 옮겨오면 자기는 좋지만... || === 국가를 파탄내다 === 우선 선대 황제였던 [[송신종|신종]], [[송철종|철종]]이 [[왕안석]], 장돈 등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고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놨는데, 이걸 '''고귀하신 황제님께서 예술활동한다는 이유로 파탄'''내버렸다. 그러자 [[채경(북송)|채경]] 등 신하들이 나서서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둔다거나, 소유문제가 애매한 토지들을 일괄적으로 국고에 환수시키는 방식으로 파탄난 국고를 채워나갔다. 그리고 휘종은 예술품을 좋아하여 예술품 수집을 위해 명금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전국의 진귀한 예술품들을 수집하게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집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행패가 극심했는데 그들은 황제가 예술품을 원한다는 명목으로 부자들과 백성들의 예술품을 강탈하는것은 물론이고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마구잡이로 부과하여[* 부역은 그 자체가 세금의 일부이다. 따라서 세금에도 세율이 있듯이 부역에도 정도가 있어서 매년 일정 일수까지만 부과하고, 이보다 더 부과할 경우 다른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제도적 보완책이 있었다. 그런데 벼슬아치들이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답시고 그 기준을 넘겨서 마구잡이로 부역을 부과했기에 문제가 된 것. 즉 현대 기준으로 말하자면 '별로 긴급하지도 않은 이유로 임시추가과세를 마구 때렸다' 정도로 보면 된다.] 강제로 징발해 일을 시키면서 숲을 밀어버리고 운하를 따라 기석들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가는데 집이 있으면 집을 무너트리고 논과 밭을 뒤엎고 길을 내기도 했다. 워낙 이 기암괴석을 싣고 가는 배가 많아서 '화석강(花石綱)'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강(綱) 자는 '벼리 강'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벼리]]란 그물의 위쪽 코를 꿰는 줄을 가리킨다. 벼리를 잡아야 그물을 펴고 거둘 수 있다. 여기서 의미가 파생하여 '요점'이란 뜻으로도 쓰였고, 당송시대에는 어떤 물품을 일괄배송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니까 화석강(花石綱)이란 '꽃과 돌을 왕창 (황제 계신 수도로) 보낸다.', 또는 그렇게 보내는 물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암군]].[* [[수호전]]의 등장인물 [[양지(수호전)|양지]]도 화석강 운반 감독이었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때 '''감히 황제폐하의 돌을 가라앉혔다'''(...)는 죄목으로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녔다. 이후 사면령이 내려져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임충과 충돌하는 것이 작중에서의 첫 등장. 당연하지만 이 화석강을 운반하면서 많은 백성들은 일당도 받지 못하고 다치거나 죽는 것과 동시에 집과 논밭 등 생계터전도 잃어버린다.] === 반란과 몰락의 징조 === 결국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다 못한 민중들이 폭발하여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대표적으로는 [[수호전]]의 주인공인 [[송강]]과 최종보스격인 [[방랍]]이 있다. [[방랍의 난]]이 점점 격화되고 방랍이 아예 독립 국가를 세우는 수준에 이르자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조성하였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그 결과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지만[* 다만 이때 송나라 군대는 심하게 약화된터라 방랍의 반군을 제대로 진압못하고 반군에게 패하고 말아서 다시 진압군을 보낸터라 진압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 송나라의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백성들 민심을 수습하고자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화석강 수집을 그만 두었으나, 방랍의 난이 진압된 지 두 달도 안 되어서 또 화석강 모으기를 시작하였다. 물론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고 백성들도 반발하였으나 송휘종은 암석 모으기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유배 보내고 백성들 반발을 억눌렀다. 당연히 송의 남부지역은 송왕조와 조정에 반감이 심했고[* 특히 송나라 관군이 진압 도중 남부의 백성들을 300만 명이나 학살했다.] 이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의 고종이 북벌하는데 간접적으로 방해요소가 된다. 불과 몇 년전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라 언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후방이었던 것. 오죽하면 악비를 죽인 권신 진회가 재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불안한 남부지역을 폭압적이기는 해도 안정시킨 공이 인정되기 때문일까?. 이 와중에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비록 송왕조가 문치주의로 군사력이 약하기도 해도 황제가 있는 수도가 적들에게 두번이나 쉽게 점령될 정도는 아니었고 경제력도 풍부하였으나 송휘종의 실정으로 국경은 커녕 수도와 황궁을 지킬 군사력도 없었고 국가재정은 바닥이었기에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자원도 동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송휘종과 조정에 대한 민심이 최악이라서 의병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악비나 한세충 등 의병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도 송고종이 남송을 재건하면서 가능했다.] === [[정강의 변]] === 이를 알게되어 분노한 [[금태종]]이 군대를 파견하자 휘종은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장강 이남의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 당시 휘종은 수도가 함락되면 자신이 다시 제위에 복귀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송흠종|흠종]]은 영토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를 수용해서 황실종친, 절 등에서 금은보화를 각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태수습을 했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휘종은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휘종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며 연회를 즐기고 후궁들과 어울리는 등 평상시와 같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금군이 물러가자 마자 주전파 신료들이 일제히 강화 반대를 외치자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흠종은 주전파 신료들의 의견을 덜컥 수용해버렸고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 송나라를 침공했다. 그리고 금나라한테 박살나고 수도 함락 직전까지 몰린 송나라의 군사력이[* 송나라 군대가 문치주의 영향으로 약한 것도 있지만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데 정예군을 많이 소모한터라 가뜩이나 약한 송의 군사력이 더욱 약화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휘종이 국가재정을 파탄내어 송은 병력과 자원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복구될 리는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금군한테 깨끗하게 갈려나가고 뒤이어 개봉마저 함락당하고 만다.[* 사실 당시 개봉에는 수비군으로 금군(禁軍) 3만 명이 있었지만 문제는 금군조차 형편없다보니 금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방비하기는 커녕 대부분이 도망간터라 개봉이 금나라 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정확히는 송휘종이 국가재정을 파탄내어 군사력 강화시킬 방도가 없었다.] 이때 피신하지 못한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혀 황후, 후비, 황자, 황녀, 친왕, 왕비 등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녘의 금나라 영토로 끌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정강의 변]] 문서로. [youtube(9SZ9XELcvO4)]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휘종과 흠종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종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 [[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서진]] 시대 [[영가의 난]]처럼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http://pure11004.blog.me/120051459778|#]] 휘종의 아내들을 비롯한 많은 황족 여성들은 세의원(洗衣院)[* 원래는 빨래방을 말한다. 빨래는 찬물에 옷감을 박박 문대야하는 고된 작업이고, 중국 왕조에서는 왕의 총애를 잃거나 잘못을 범한 여성들을 벌주는데 제격이었기 때문에 이런 벌칙을 받곤 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세의원은 금군 병사들이 즐기는 위안소, 일제의 종군위안부 수용소와 같은 곳으로 황족여성들은 위안부로 사용되었다.]으로 보내졌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져있는데 이것은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원래 [[태종(송)|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기에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하였다. 사실 금으로 끌려가면서 휘종은 '[[기생]] [[이사사]]와 함께 끌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기생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말을 주절대는 꼬락서니가 금에서 보기에는 혼덕공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휘종 때문에 북송이 망했다는 주장도 사실 틀린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그를 금나라로 끌고 갈 때 한 백성이 술과 고기를 올리자 호송하던 금나라 대장은 그 술과 고기를 땅에 버린 다음 강제로 주워먹게 했다. 거기에 도중에 쉬는 도중 술을 마시던 대장이 흠종의 황후 주씨에게 술을 따르도록 권했고 주씨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때 한 대신이 '''금나라 놈들은 인면 수심의 [[인간말종]]이다!'''라고 부르짖다가 끌려나가 맞아 죽었는데, 이것을 본 금나라인들은 "요가 망할 때는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이가 그래도 족히 10명은 되었는데, 송이 망한 지금은 의를 위해 죽는 자가 '''저 사람 단 한 명뿐이구나!'''" 라고 서로 말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송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인재들 중 많은 이들이 남쪽으로 탈출하여 [[남송]]에서 금과 계속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요 역시 이때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고 후계 왕조인 [[서요]]를 세우기는 했다. 다만 '중국사의 중심부'에서 각축전을 벌이던 요나라 vs 송나라에 비해 서요의 위치는 중국사의 영역인가 [[중앙아시아]]사의 영역인가 좀 애매한 편이기도 하고, [[요나라]] 문서의 지도와 [[서요]] 문서의 지도를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영토의 북쪽 절반을 잃었지만 본래 영토의 남쪽 절반을 유지하고 버틴 [[송나라]]에 비해 서요는 아예 멀리 서쪽으로 이주해서 새로 세운 국가에 가까운 면이 있다. (초원 유목민의 영토 개념을 그리 빡빡히 따질 것은 아니라지만 아예 영향권 자체가 거의 안 겹친다.) 세계사의 다른 사례와 비교하자면 [[우마이야 왕조]]→[[후우마이야 왕조]]의 관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그러니까 요→서요 계승성을 부정하자면 '같은 왕조 구성원이 세운 새 나라지 요나라 자체의 후계국가라긴 좀 애매하지 않으냐? 고 말할수도 있고, 인정하자면 '같은 왕조가 세운 새 나라면 그게 바로 후계국가 아니냐? 애초에 요나라로부터 축적된 문화적, 세력적 기반을 활용할 수 없었으면 [[야율대석]]이 어떻게 먼 땅의 투르크족을 규합하고 복속시켰겠느냐?' 식으로도 말할 수 있는 문제가 되니 결국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게다가 남송은 이후 150년이나 더 버텼다. 심지어 북송을 무너트린 금나라는 반 세기쯤 먼저 멸망하고 말았으니, 후세인의 눈으로 보자면 금나라 사람들이 송나라를 조롱하던 모습이야말로 섣부른 설레발이었다.[* 물론 당대 금나라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동부 유목제국의 최강자이던 요나라를 격파한데 이어 중화제국 송나라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그 영토의 절반을 단숨에 빼앗았으니 엄청난 승리감을 만끽함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또한 금나라는 오래 못간건 운이 나쁜 것도 있었다. 요나라는 요성종 사후 서서히 쇠퇴하긴 했지만 그래도 100년 가까이 버텼는데 이는 요나라를 몰락시키는 여진족(금나라)가 딱 이 시기에 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나라는 금태종 시기에 이미 몽골 초원에서 카마그 몽골이 일어나 금나라 후방을 위협했고 해릉양왕 시기에 카마그 몽골을 박살내는데 성공했으나 50여년 뒤 '''[[칭기즈 칸]]'''이라는 희대의 정복자가 나오는 바람에 박살이 났다. 여기다가 요나라와 북송은 도망칠 곳이라도 있었지만 금나라는 도망칠 길도 없었다. 기껏해야 남쪽으로 천도하여 도망쳤지만 결과적으로 몽골과 남송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고 남송처럼 장강~사천의 자연국경이 있던 것도 아니다.][* 여기다가 금나라는 요나라와는 달리 장강 이북을 차지하다보니 민족적으로 한족이 너무 많아졌고 또 깊숙히 들어오다 보니 여진족의 한족화 문제에 또한 멸망한 요나라의 거란족과의 불화, 취약한 경제력 등 여러모로 결함이 많은 나라였다.] 또한 나라가 망할 때 그 나라를 위해 죽는 사람들을 '의를 위해 죽은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남송이 멸망한 [[애산 전투]]에서는 흔히 <송말삼걸>이라 부르는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의 세 네임드를 시작으로 나라와 함께 죽겠다는 이들이 20만 명이나 나서서 그중 10만 명이 전사했으니 의인 10만 명이라고 해야 한다. 송태조 조광윤이 (제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특히 우대하라고 지시한 시씨 가문의 종손을 비롯하여 송나라가 300여 년간 우대하며 양성한 선비(사대부) 중 수많은 이들도 멸망하는 나라의 마지막 싸움에 참여하여 나라와 최후를 함께했던 것. 나라가 멸망할 때 목숨을 걸고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가 그 나라의 격을 판단하는 요소라면, 세계사를 통틀어도 송나라 멸망만한 비장미를 보여준 망국의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송의 멸망에 얽힌 요나 금, 이들을 모두 멸망시킨 원나라 모두 송나라처럼 비장하게 망국의 길을 걷지는 못하였다. 그렇다면 왜 북송이 무너질 땐 그런 의인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는 송나라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도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던 시기에 임금인 송휘종이 워낙 한심하고 찌질한 암군이었기에 그런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봄이 적절할것이다.[* 요의 [[천조제]]도 요나라 패망에 기여한 [[암군]]으로 분류되지만 송휘종만큼 정력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암군계의 레전드까지는 아니다.] 세상에 대체 누가 나라를 말아먹고 포로로 잡혀가면서도 기생이나 찾는 한심한 작자를 위해 죽어주고 싶겠는가? === 쓸쓸한 최후 === 결국 금나라의 땅 [[오국부|오국성]][* 오늘날의 [[한반도]] 북부, [[함경북도]] [[회령시]]의 [[회령역]] 자리라는 설이 있지만, 정설은 오늘날 [[하얼빈]] 이란현 부근이라는 것이다.]에 끌려가 한 칸짜리 방에 수감되어 망국의 한을 품다 1135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다만 [[정강의 변]] 항목에도 나오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은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아들 [[송고종|고종]]이 협상 끝에 유해를 송환받을 수 있었다. [[남송]]으로 송환된 휘종의 유해는 고종이 황릉 지대로 정한 소흥 일대에 마련한 영우릉에 묻혔다. 고종 역시 이 일대에 묻혔으며, 이 후 [[도종]]까지 남송의 역대 황제, 황후, 후비, 제왕 등 황족들은 대대로 이 지역에 묻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휘종의 무덤인 영우릉은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쿠빌라이 칸|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소]][[뼈]], [[말(동물)|말]]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 남쪽, 즉 남송의 기운을 진압한다는 주술적인 의미의 탑으로 도굴을 한 것은 양련진가가 남송의 부활을 막기 위해 건의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도굴이었고, 진남탑 축조는 혹여나 죽은 황제들과 황후들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 봐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정복 왕조라 할지라도 이전 왕조를 계승했다고 보고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양련진가의 행위는 원나라 조정 내부에서도 당연히 문제가 되어 결국 양련진가는 주살되었고 수하 승려들은 같이 주살당하거나 부장품 분배를 가지고 싸우다가 이미 죽거나 병으로 갑자기 모두 죽었다고 한다. 당시 원 세조는 양련진가가 도굴한 보물들을 몰수해서 대도에 절과 탑을 지았다고 한다.] 아래에 묻혔다.[* 진남탑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고 진남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대치되는 기록이 있다. 양련진가에 의해 황릉이 비참한 피해를 입자 이를 비통하게 여긴 그 일대 주민들이 황야에 버려진 역대 황제와 황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상자에 담고 [[비단]]으로 싸서 감람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대신 소뼈와 말뼈를 황야에 흩어놨고 이걸 자기가 버린 황제의 유해인지 알았던 양련진가는 완벽하게 속았다. 그런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감람나무를 찾을 길이 없다. 8백년 가까이 됐는데 그 나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 후 폐허가 된 소흥의 남송 황릉 지역은 [[명나라]] 때 [[주원장]]이 복구를 명했고, 청도 전 왕조를 계승하는 측면에서 이를 존중했지만 나라가 개판이 된 [[청나라]] 말기에는 다시 폐허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파괴가 한번 더 있었고 이때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명나라 시기에 복구된 석물의 석재를 빼내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구릉 일대가 [[차]] 밭으로 [[마개조]]되었다. 그나마 1989년이 돼서야 공현[* [[낙양]] 근처에 있다.] 일대의 북송 황릉 지역과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다. 그나마 북송 황릉은 봉분이라도 남아 있는데 비해 남송 황릉은 개간되어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질 않았다. == 사후 평가 == === 정치적 평가 === ||<tablebordercolor=#2e8b57><bgcolor=#2e8b57>||<tablealign=center><width=100%><bgcolor=#fff,#1f2023>{{{#!wiki style="margin:10px" 송나라 중엽의 재앙은 [[장돈]]과 [[채경(북송)|채경]]이 원흉이었고, [[조양사]]가 재앙의 근원을 이었다. 그러나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휘종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장돈은 휘종의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 천하를 아래에 두는 임금으로써는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요나라]]의 [[천조제]]가 패망하고 장각(張覺)이 평주(平州)를 바치며 귀순해오자, 조양사는 장각을 거두어들이면 [[금나라]]의 신용을 잃어버리고 반드시 외국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장돈과 조양사의 계책을 행하여, 송나라가 휘종을 세우지 않았거나 장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금나라가 비록 강성하였으나 어찌 틈을 노려서 송나라를 정벌할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변고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비록 소인도 역시 능히 알 수 있었지만, 군자는 어느 정도 능히 막지 못하였다. 휘종이 나라를 잃은 이유를 상고해보면, 만약 [[서진|진나라]]의 [[혜제(서진)|혜제]]의 어리석음과 [[오(삼국시대)|오나라]]의 [[손호]]의 폭정이 없었고 또한 [[조조]]와 [[사마의]]의 찬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휘종은 특히 그 사사로운 지혜와 잔꾀를 믿으며 한편으로 치우치며 마음을 썼고, 의로운 선비를 멀리하고 물리쳤으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 하였다. 이에 [[채경(북송)|채경]]이 경박하고 교묘하게 아첨하는 자질로, 휘종의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탕하게 노는 뜻을 도왔다. 허황된 것을 맹신하고, 꾸미며 노는 것을 숭상하여,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력이 곤궁하여 없어졌다. 임금과 신하가 멋대로 즐기고 놀며 서로 방종하여, 국정을 게을리 하여 돌보지 않았고, 하루 종일 터무니없는 짓을 행하였다. [[동관(북송)|동관]]이 권력을 잡자, 다시 전쟁과 예술에 탐닉하여, 재앙을 초래하여 혼란을 가속시켰다. 훗날 [[정강의 변|나라가 무너지고 몸에 치욕을 당하여]], 결국 [[후진|석진]]의 [[석중귀]]와 같은 죄를 저질렀으니, 어떤 핑계를 셈할 수 있겠는가? 옛날 [[서주]] 시기에 나라를 새로 만들면서, [[소공석|소공]]은 오히려 [[무왕(주)|무왕]]에게 무익한 해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유익하게 하였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도 쓸 물건이 아니라면 천하게 여겼다. 하물며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치며 송나라를 다스려야 하거늘, 희녕(熙寧)·원풍(元豐)·소성(紹聖) 연간의[* 각각 북송 신종과 철종 때의 연호이다. 이 시기에 왕안석 일파인 신법파가 집권하였다.] 정치를 경계로 삼아야 하거늘, 휘종 또한 두 일의 폐단을 몸소 행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임금이 놀면서 뜻을 잃고 욕망을 좇아 법도를 무너뜨리면 망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는데, 휘종은 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특별히 저술하여 경계로 삼는다.}}} ---- {{{#!wiki style="margin:4px; text-align: right" {{{-2 - 『[[송사]]』}}}}}} || [[유왕|주 유왕]], [[영제(후한)|한 영제]], [[유자업]], [[후폐제(유송)|유욱]], [[소소업]], [[해릉양왕]], [[양제(수)|수 양제]], [[의종(당)|당 의종]], [[만력제]]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군주로, 예술에 심취해 나라를 말아먹었기에 조선 포함 후세의 [[성리학]]자들이 군주의 예술 활동을 반대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됐다. 명나라 [[만력제]]의 스승인 [[장거정]]은 '황제는 글씨만 쓸 줄 알면 됐지. 예술에 심취하면 송 휘종처럼 될 수 있다.'며 만력제의 예술활동을 반대했다. 문제는 만력제에게 [[파업]]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는 점은 생각을 못한 것. 이는 중국만 아니라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미쳐 조선 [[성종(조선)|성종]]도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휘종이다! 휘종이 하던 짓이다!'라고 대차게 까여야 했다. 연산군이 예술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말로는... 물론 취미생활을 즐기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린 군주들도 얼마든지 있다. 정치가로서 간웅이었지만 일을 열심히 하고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조조]][* 다만 조조 또한 예술가 기질이 결국 과하게 감정적이라는 단점으로 돌아왔다. 이것으로 천하통일을 날려 먹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여담으로 조조와는 달리 예술성이 없던 인물이 시 못하기로 유명했던 [[사마의]]였는데, 사마의는 조조와는 달리 대업에 성공했다는 특징이 있다.],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을 뿐더러 나름대로 [[명군]]으로 평가받는 [[선덕제]]라든지 예술에 심취했거나 사치가 심했지만 십전무공이라는 공적으로 강건성세를 완성한 [[건륭제]], [[셀주크 제국]]을 세운 토그릴 베그,[* 990~1063.천문학과 시나 온갖 글에도 재능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갓 세우면서 전쟁도 연전연승해 국토도 엄청 넓힌 군주다.] 수학과 천문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고 치정에도 재능을 보인 [[티무르 왕조]]의 [[울루그 베그]],[* 1392~1449. 8자리 소수까지 계산하는 수학 재능과 같이 각종 천문대를 만들고 천문학에서도 재능을 보이던 인물이다. 심지어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정확하게 항성 간 거리를 측정하는 등 수학과 천문학에 보이던 기록과 재능은 서구 천문학자들까지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독일 천문학자 폰 마들러(1794~1874)는 울루그벡을 칭송하며 자신이 발견한 달에 난 분화구를 울루그벡이라고 이름지어 그를 기렸다. 황제로 제위한 건 겨우 2년뿐이고 일생 대부분을 선황 샤루 흐(1377~1447)가 오래 살아서 지방 영주로서 있으면서 영지를 잘 다스리면서도 저런 천문학과 여러 연구도 한 걸 보면 치정에서도 무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무슬림]]인 울루그벡이 종교적으로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자 아들이 극단파랑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참수당하고 만다. 하지만 아버지와 많은 형제를 죽이고 제위한 아들 압달 라티프 미르자는 애비를 죽인 패륜아라는 명분으로 친척들이 일으킨 반란에 겨우 6달 만에 똑같이 무너져 나이 서른에 아버지처럼 참수당해 죽는 [[인과응보]]를 당했다.] 역시 팔방미인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같은 군주들처럼. 하지만 휘종은 명나라 말에 취미 생활로 국정을 내팽개친 [[천계제]]의 [[프리퀄]] 격으로 천재 예술가인 동시에 역대급 암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휘종의 업적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 휘종 시기의 [[북송]]과 이후의 [[남송]]의 미술은, 미술사학적으로 중국 미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휘종의 예술 사랑은 궁내 도화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고, 재야 미술가 발굴과, 송나라 이전 미술품들의 평가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북송 시기에 이성과 범관 등 걸출한 미술가는 물론, 휘종 자신도 서예 뿐만 아니라 그림에 능해, 미술가로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때문에, 송나라의 그림은 중국 미술사에 남을 걸작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중원의 황제는 일개 제후국의 왕과는 다르다. 한 마디로 산이 생기고 없어지는 와중에, 그는 그 막강한 힘을 예술과 사치품에만 쏟았다. 그의 예술사랑은 북송은 물론이거니와, 남송 대에 풍부한 예술자원과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며, 중국이 자랑하는 도자기 문화도 그 기법이 완숙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산과 개봉의 불야성과 송의 막대한 경제력에도 한 몫했을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레시피도 송 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완숙된 시기였으며, 현대에도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으나, 그것은 곧 '[[사치]]'를 의미하며, 사치는 언제나 망국에 다다르는 요소 중 하나였다. 송 휘종은 중국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그는 동방을 아우르는 [[천자]]였다. 중국 미술과 문화의 활로를 열었지만, 북송의 망국의 길도 열어버린 황제이다. 대국적인 경영과 경제 측면에서 고려한 문화 융성이 아닌, 개인의 단순히 취미와 사치를 위해, 대륙을 뒤엎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결국 휘종은 북송을 망국으로 몰아간 대가로 [[역대제왕묘]]에 배향되지 못했다. === 예술적 재능 === || [[파일:attachment/송휘종/Example.jpg]] || || 휘종의 수금체[* [[천자문|천지현황]]의 현玄자를 원元으로 쓴 것은 송 황실의 시조인 [[조현랑]]의 이름자 중 玄을 [[피휘]]한 것이다.] || 휘종은 문인이자 예술가로서 확실히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시서(詩書)에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이 개발한 서체인 수금체(瘦金體)는 자획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날렵하면서도 우아하며 가냘픈 것이 특징인데, 후대의 역사가나 감정가들로부터 ''''글자에 기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약한 서체\''''라고 까이기도 한다. 글씨에는 개인의 성품이 묻어난다는데 역시 그런 모양이다. 물론 이런 평은 결과론적인 것이고 휘종이 명군이 됐다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고 칭찬받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북송을 무너뜨린 금나라 황제들과 상류층들조차 휘종의 수금체를 애호했다.[[https://blog.naver.com/whitepema/221382299643|#]],[[https://blog.naver.com/hopoiuyt/222237805571|#]] 그림실력이 출중하고 도자기 수집, 또는 가끔 조각도 했다. '계산추색도' 같은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후대에 고서화 수집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악명 높은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큼지막한 도장이 여기저기 찍히고[* 보통 고서화를 수집한 주인들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과시하기 위해 인감을 찍는데, 보통은 그림의 운치를 망치지 않기 위해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세심하게 위치를 선정해가며 찍었다. 그런데 건륭제는 인감 찍는 게 취미였는지(...), 여러 개의 도장을, 그것도 큼지막한 도장을 그림 한 가운데에(...) 떡하니 찍은 것도 수두룩하다.][* 웃긴건 건륭제는 송나라를 박살내고 휘종 자신을 타지로 잡아간 금나라 여진족의 먼 후손인데다 건륭제와 휘종의 취미가 비슷했다는 점이다. 다만 능력과 업적 측면에서 보면 건륭제가 송 휘종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건륭제는 사고전서와 같은 문화사업도 하고 십전무공 같은 영토확장에 성공했고, 내정도 말년에만 엉망이었지 초중반에는 옹정제와 다를 바 없었다.], 좌측 상단부에는 엉터리 시까지 적히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사실 건륭제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작자가 예술활동을 한답시고 망쳐놓은 고서화가 한둘이 아니다. [[고려]] [[예종(고려)|예종]]이 지은 [[안화사]]에 친필로 편액을 써서 보내준 적이 있다. 또한 '직접' 국서를 써서 사신편에 전달한 적도 있다. 고려에 송나라의 아악인 대성악과 음악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악기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고려 [[인종(고려)|인종]] 때 화가 이령(李寧, ?~?)의 예성강도를 보고 그 솜씨를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령은 [[전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인종 때 추밀사 이자덕을 따라 송나라에 갔을때 휘종을 만났다. 이때 휘종은 한림대조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 등에게 명을 내려 고려에서 온 이령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하면서 이령에게 고려 예성강을 그리게 했는데,이령이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이를 휘종에게 바쳤다. 휘종이 이 그림을 감상한 뒤 “근래 사신을 따라온 고려 화공이 많았지만 이령의 솜씨가 가장 뛰어나다”고 감탄하고는 이령에게 술과 음식 및 화려한 비단옷과 명주실로 짠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고려사』권122, 「열전」35 ‘방기’ 이령][* '[[천수사]]남문도'를 그린 화가도 이령이다.] 여러모로 예술과 연관이 많은 임금. 하여간 중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 암군이긴 하지만 예술쪽에선 시서화, 음악 등의 동양 미술,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만능 예술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시서화에 다 능한 것은 물론 원림[[조경]] 쪽에서도 역사에 한획을 그은 수준이다. 한번은 휘종이 [[만수산]](후에 간악이라 다시 명명)이란 원림을 세웠던 적이 있었는데 이걸 너무 잘 만들어서 너도나도 저 원림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국의 원림 조경은 송휘종의 만수산 이전 / 이후로 세대가 나뉜다. 사물의 배치, 기암괴석의 감별, 산수의 형세 등등 그냥 기준점을 새로 세웠다고 보면 된다. 명나라의 서원(현재 [[중난하이]])과 청나라 [[이화원]]도 저 영향력에서 못 벗어날 정도이다. 그리고 악기 '제작' 쪽에서도 미학적 재능이 빛을 발했는지 송석간의(松石间意)라는 [[고금]]을 만들어 냈는데, 천하의 명금이라 송나라 황제들은 물론이고 후대 왕조 내내 전승되면서 보물 취급 받았다.[* 참고로 청나라 [[건륭제]]는 여기다가도 기필코 지 친필 사인을 기어이 남겼다.] 아무리봐도 황제가 아니라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나거나 돈 많고 잘 놀면서 예술을 후원하는 황족 겸 예술가가 했어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딱 맞다. ==== 연산정 ====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 휘종이 지은 연산정(燕山亭). ||裁剪冰绡 새하얀 [[비단]] 마름하여 打叠数重, 사뿐히 몇겹을 접어서 冷淡胭脂匀注。 가볍게 [[연지]]를 골고루 칠한 모양 新样靓妆, 새로운 유행의 [[화장]]이라도 했는가 艳溢香融, 한껏 예쁜 자태 향기 감돌고 羞杀蕊珠宫女。 예주궁의 [[선녀]]가 무색하구나 易得凋零, 그렇지만 이 꽃은 시들고야 말겠지 更多少无情风雨。 또 몇번이나 모진 풍우 겪어야 하겠는지. 愁苦。 아, 이 괴로움! 问院落凄凉, 이 처량한 뜨락엔 几番春暮。 봄이 몇번이나 지났던가. 凭寄离恨重重, 겹치고겹친 상실의 서러움 전하고싶지만 这双燕, 이 한쌍의 [[제비]]가 何曾会人语? 사람의 말을 어찌 알수 있으랴 天遥地远, 멀고먼 하늘 저 멀리 万水千山, 첩첩한 산과 강을 건너서 知他故宫何处? 예전의 궁궐 그 어디에 있는가 怎不思量, 어찌 생각이 나지 않으랴 除梦里有时会去。 깨여서도 몇번이나 가보았건만 无据。 이제는 의지할데 없구나. 和梦也新来不做。 어이하여 요즘은 꿈에도 보이질 않느냐.||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된 휘종의 심란함이 드러나는 시. 절절하기 그지없다. ==== 도구도 ==== || [[파일:external/www9.wind.ne.jp/hato.jpg]] || || 휘종이 그린 도구도(桃鳩圖). [[복숭아]] 꽃과 [[비둘기]]를 그린 그림이다. || 화가로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실제로 휘종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단순히 황제가 그려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게 아니라 '''진짜로 그림을 잘 그렸다.''' "답화귀거마제향 踏花歸去馬蹄香"(뜻: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더니 다른 화가들이 모두 어리둥절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 시절 이야기.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은 예술가가 아니라,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황제]]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유능한 이를 등용해서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예술을 즐겼거나, 나라를 평안케 한 뒤에 노후에 소일거리로 즐기는 정도에서 끝냈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휘종은 국정은 외면하고 예술활동에만 심취한 나머지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게다가 그냥 예술활동에 심취하기만 했다면 모를까 저걸로 백성들 등골까지 빨아먹었다. 훗날 명나라의 [[천계제]]와 비견될 만한 행보이지만, 천계제는 목수질에만 심취했을 뿐 예술품 수집 등으로 사치를 부리지는 않았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휘종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 비슷하게 남당의 마지막 황제인 [[이욱]]도 국정에서는 실정만 거듭하고 국정을 돌보기보다는 문학에만 심취해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먹었지만(어느 정도냐면 송나라 군대가 수도까지 밀고 왔는데도 본인은 시 짓고 노래부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욱은 백성을 쥐어짠다던가 하는 폭정은 하지 않았다. 폭정은 하지 않아서인지 적어도 이욱은 나라 망한 후에 "ㅉㅉ 황제만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말을 들었고 취미를 위해서 백성을 착취하지는 않아서 그가 독살당하자 남당의 옛 백성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 여담 == * 전설에 따르면 휘종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신종의 꿈에 휘종과 마찬가지로 예술가 황제로 유명한 남당의 3대 황제 [[이욱]]이 나타나 신종을 알현하였다고 한다. * 휘종이 황자 시절 고모 촉국공주[* 영종과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둘째 딸이자 신종의 누이동생. 일반적으로 보안공주, 위국대장공주라고도 부른다. 남편 왕선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1명을 얻었다. 하지만 아들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촉국공주 자신 역시 1080년 불과 29세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다.]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때 촉국공주의 남편이자 영종의 부마였던 고모부 왕선을 흠모하고 존경했다. 왕선에게는 세 가지의 두드러진 개성이 있었는데 우선 금기서화(琴棋書畫)[*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에 능하고 한 번 읽은 것은 모두 기억할 정도로 문예적 기질이 뛰어났다. 실제로 당시의 장원 정해는 왕선의 글을 읽고 "니가 쓴 글은 문장이 멋지다. 훗날 반드시 출세하겠구나." 라고 감탄했고 북송의 문학가인 황정견 역시 그의 시서화를 극찬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하면서.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의 개성이 문제인데, 사치를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다는 것이다.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무녀(무희)까지 집에 둔 인물이기도 했다. 좋게 표현하면 풍류남아, 나쁘게 표현하면 문화건달.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여읜 채 고모네 집에 머물던 10대의 휘종은 고모부를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복사판처럼 따라하고 가르침을 구했다. 이에 40살이나 연상인 고모부 왕선 역시, 자신을 흠모하고 자신의 재능과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려 하는 처조카를 아끼며 몸소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스승이자 보호자로서 함께 했다. 그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힐방루로 휘종을 데리고 가 몸소 침대 위에서의 모든 스킬들을 알려주고 여자와 노는 법, 유흥을 즐기는 법들을 세세히 알려줬다고 한다. 그 결과 이미 10대 초반의 나이에 휘종은 수도 내 홍등가들을 돌아다니며 글공부보다는 주색잡기, 유흥, 축국(공놀이), 미술에만 몰두했고, 주변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래사 철종이 승하한 뒤 후계 논의가 벌어졌을 때, 이런 사정을 알던 장돈 등 반대파 조정대신들은 단왕(휘종)은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면서 철종의 뒤를 이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 어린 시절부터 여색을 무척 좋아했던 만큼 황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황제가 된 이후에도 황후들과 100명이 넘는 비빈들에게 자녀를 계속 얻었다. 그래서 역대 중국 황제들 중에서도 자녀가 많기로 유명한 황제가 바로 휘종이다. [[송사]] <종실전>과 <공주전>에 따르면 휘종은 황제 및 태상황으로 있는 동안 아들 31명과 딸 34명 총 65명의 자녀를 황후 및 비빈들에게 얻었다고 한다. 더해서 훗날 금나라에 끌려가 혼덕공으로 불리며 포로생활을 할 동안에도 다시 6남 8녀를 더 얻어서, 죽기 전까지 총 80명의 자녀를 뒀다고 한다. * 휘종은 [[피휘]]에 매우 엄격해서, 황실의 시조 [[조현랑]]의 이름자 현(玄)[* 이로 인해 [[현종(당)|당 현종]]은 송대 이후로 [[묘호]]인 현종대신 [[시호]]인 당명황(唐明皇)으로 많이 지칭된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의 여덟 자로 이름이나 자호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지은 이름과 자호도 고치게 했다. [[명군]]이나 하다못해 능군이었으면 이런 조치도 욕을 크게 먹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암군]]인 휘종이라...그래서 [[수호전]]에서 [[이규]] 등 여러 [[양산박]] 호걸이나 반란군이 송 휘종의 휘를 막 부른다. == 미디어 믹스 == * 시대적 배경이 되는 [[수호전]]에도 등장한다. 바탕은 선량한데 놀기만 좋아하는 탓에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순진한 황제로 나오다가 개봉부에 잠입해 이사사와 의남매가 된 낭자 [[연청]]을 통해 [[양산박]] 호걸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이들을 용서하고 장군으로 임명하는 [[대인배]]로 등장. 하지만 이들이 각지의 난을 평정한 뒤에는 이들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나중에 이를 알고는 크게 슬퍼하며 그들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준다. 휘종보다 그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하던 간신 4명([[고구]], [[채경(북송)|채경]], 동관, 양전)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에 불과하고, 북송 멸망의 중심은 애시당초 휘종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4명의 간신들도 모두 휘종이 어리석은 것을 이용하여 국정을 농단한 것이다. 본래 송나라는 황제권이 막강했기에 황제의 의도에 따라 정국을 운영하고 관직을 편성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채경 등 간신들을 등용하고 지나친 예술 탐닉과 사치로 국정을 파탄낸 1차 책임은 휘종 자신에게 있기에 수호전에서 지나치게 휘종을 옹호한 면이 있다. 수호전 외전인 수호후전에서 역사대로 정강의 변으로 금에 끌려가면서 양산박 호걸들을 만나고 호걸들은 초라하게 금으로 끌려가는 송휘종에게 황감과 노자돈을 바치며 황제에 대한 예우를 지킨다. * [[코에이]] 전략시뮬레이션 [[수호전 시리즈]]에는 이벤트에만 등장하며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나라 걱정을 하며 고구를 해치우길 바라는 모습으로 미화되어 나온다. 이 게임에서 최종목표인 고구 척결을 달성하려면 명성치를 모아서 이 인물에게 칙령을 받아야 한다. 이벤트에만 등장하는 까닭에 아쉽게도 능력치가 안나오는데 나왔다면 F4급의 환상적인 능력치가 나왔을듯 하다. *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이나 [[고우영 수호지]]에서 휘종은 희대의 멍청이로 나온다. 고우영 수호지의 리메이크작인 고우영 수호지 2000에선 초반 빼고 아예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송 휘종을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문제는 그가 황제라는 점이다. 황제가 예술한답시고 나라를 안 돌보고 간신배들에게 나라 맡기고 예술이나 하고 있으니 나라 저렇게 말아먹어요~라는 투로 소개할 뿐. * 2013년 드라마 "[[정충악비]]"에 등장한다. 정강의 변으로 금에 끌려가면서도 수석과 그림만 챙기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 이를 한심하게 본 금나라 장군 올출이 수석들은 모두 황하에 버리고 서화는 모두 태워버린다. 그리고 금태조의 명으로 송휘종은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같이 지내게 되는데 물론 역사적 고증오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사)] [각주] [[분류:송나라/황제]][[분류:퇴위한 군주]][[분류:중국의 화가]] [[분류:1082년 출생]][[분류:1135년 사망]][[분류:카이펑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휘종(송), d=2023-12-27 13:28:12)]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