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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덤프버전 :
조선시대 함경북도에 존재했던 행정구역에 대한 내용은 경성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1=본 틀에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 12일) 이후 폐지된 행정구역만 등재한다.,
토론주소2=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2=대한제국 선포부터 광복(1945년 8월 15일) 전까지 폐지된 행정구역 가운데 현재 휴전선 이남에 위치했던 행정구역만 등재한다.,
토론주소3=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3=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행정구역을 원칙적으로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4=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4=단 광복 이후 6.25 전쟁 전까지 38선 이남에 위치했으나 휴전 후 북한 치하에 들어간 경우와 일부 영역을 수복했으나 인접 시군에 편입시켜 휴전선 이남에 실효지배하는 영역이 없어진 경우에 한해 등재한다.,
토론주소5=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5=명칭 변경 사례를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6=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6=폐지된 행정구역의 소속 도(道)는 폐지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단 제주도에 소재했던 행정구역에 한해 제주특별자치도 소속으로 표기한다.,
토론주소7=OutstandingAgreeableFeignedKnowledge#10, 합의사항7=폐지된 행정구역이 행정구역 명칭과 단위가 같은 행정구역으로 다시 설치된 경우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주소8=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8=단 1995년 대규모 도농통합 뒤에 폐지된 동명의 행정구역은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9=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9=폐지된 동·읍·면은 원칙적으로 등재할 수 없다. 단 1995년 대규모 도농통합 뒤에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읍·면은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10=YouthfulTangibleDryClam, 합의사항10=1995년 이전에 폐지된 읍·면이라도 2개 이상의 행정구역에 분할 편입되어 폐지된 경우는 등재할 수 있다.,
토론주소11=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11=1995년 후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읍·면이라도 군 전체가 시로 승격하면서 관할 읍·면이 동으로 승격되어 폐지된 경우는 등재할 수 없다.,
토론주소12=FriendlyObtainableAnnoyedCopper#11, 합의사항12=1995년 이후에 군이 폐지되고 해당 지역에 동명의 새로운 시를 설치한 경우 이전의 군을 틀에 등재하지 않는다.(따라서 틀에서 경기도 광주군을 제외한다.),
)]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인 1910년 10월 1일부터 8.15 광복 이후 경기도 서울시로 개칭되어 폐지된 1946년 8월 11일#까지 만 35년 10개월 10일 간 존속한 경기도에 속한 옛 행정구역으로, 현재 서울특별시의 전신이다. 일본어로는 게이조후(けいじょうふ)라고 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대한제국 수도였던 한성부도 대한제국 수도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0월 1일부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가 발표됨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로 편입되었으며, 경기도청 직할 구역이 되었다.
비록 1910년부터 1946년까지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격하되기는 하였지만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1.1. 명칭[편집]
공식적인 영문 명칭은 일본어 '게이조'의 헵번식 표기인 Keijo였지만, 일본제국은 조선어에서 유래한 Seoul이라는 명칭도 대외적으로 사용하였다.
1.1.1. 명칭 유래[편집]
'경성'이란 표현은 수도(京)+성곽(城)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쓰였다. 그러나 이는 지명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임금이 거하는 '서울'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서울'이라는 고유어도 원래는 도읍을 뜻했으니 이상할건 없다. 여하간 '서울'이란 이름도 이 경성의 직역 또는 그 연장선에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래서 '경성(게이조)'이라는 이름이 일본이 만든 신조어는 아니다. 당대 명백한 성곽도시였던 서울의 모습이 '京+城'로 개칭을 하는것을 당연시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은 일제가 강제로 한양의 수도 지위를 박탈하고 한양 일부(1936년 이후에는 여기에 근교 경기도 지역도 포함)를 하나로 묶어 '경성부'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이전 보통명사 '경성'과 일제강점기 고유명사 '경성'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대한 임시정부 대표 위원장으로 미국 경성 워싱턴에서 말합니다. (중략) 공화를 위하야 피를 흘리는 모든 친구들이여, 저 왜적의 거짓 선전에 속지 마시오, 낙심 마시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가서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원 간섭기에 개경(開京)이란 명칭을 두고 원나라 측에서 천자국만 쓸 수 있는 경(京)자를 제후국에서 쓰는 것이 무엄하다 하여 충렬왕 때 개성(開城)으로 격하시켰던 것에 반해 일본은 경(京)자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래 일본인들에게 경성이라는 표현이 익숙해졌고, 그것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경성부로 칭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설도 있다.
1.2. 상징[편집]
2. 역사[편집]
공식 명칭 한성부(漢城府)(1895년에 23부로 행정구역을 대개편할 때 한성부 산하 한성군으로 변경되었다가 1년만에 도로 원상복구.)로서 경기도에 소속된 도시가 아닌 오늘날 서울특별시처럼 독립된 도시였던 서울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1일에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한 도시로 격하되었다. 이듬해인 1911년에 5서(署, 1895년에 개칭)가 다시 5부(部)로 환원, 개편되고, 성저십리 지역의 각 방(坊)은 면(面)으로 개칭되었다.
1910년 당시 경성부. 1911년과 1914년 사이에 은평면 일부(현재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효자동 일대)가 고양군 신도면으로 편입되었다.[5]
1914년 3월 1일 일제는 대대적인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였는데 이 때 옛 한성부 성저십리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옛 도성 안쪽(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 및 용산, 신용산의 일본인 거류지만을 경성부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참고로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경성부 관할로 남게된 곳은 동대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숭인동과 창신동, 서대문과 서소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무악동, 천연동, 만리동 등, 그리고 마포나루가 있던 마포동과 도화동 등이었다.
1926년, 부청을 본정1정목에서 태평통1정목 문화일보 사옥 자리로 이전했다. 종전 경성부청 자리는 미츠코시백화점이 되었고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되었다.
경성부가 성벽을 벗어나 동서로 크게 확장된 것은 병참기지화와 민족성 말살을 획책할 목적으로 1936년 조선총독부가 한 '대경성계획(大京城計劃)'을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을 자연경계로 확장된 경성부 경계를 결정 지었고, 인구 60만을 돌파하여 일본 제국(만주국, 대만 등 해외 영토를 포함) 7대 도시 반열로 올라섰다. 이때부터 1949년 서울특별시 확장 이전까지 경성부 시가지였던 곳은 동네 이름에 '~가'가 붙는 경우가 많다 (보문동1가, 한강로2가, 문래동3가 등)
1936년에 경성부가 확장될 당시에 시흥군 영등포읍에서는 일본인들이 편입을 반대하였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 유지들은 경성부 편입이 아닌 영등포부 승격을 주장했다. 영등포 지역 일본인들의 주장이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인천권을 경성부에 추가 편입을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 지역의 경성부 편입을 추진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경성부 편입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이 강했었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사태로 사실상 편입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경성부 확장 초안에 노량진과 흑석동이 포함되었다가 갑자기 영등포도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만약에 일본인들들 의견대로 경성부 편입대신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지금 서울 서남부와 광명시 일대는 지금 인천광역시마냥 서울특별시와 접하는 광역시급 서울 근교 위성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영등포구/역사 참조.
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경성부 내 회색 점선과 괄호는 1943년 설치된 7개 구(區). 1944년 신설된 마포구는 표현되어있지 않다.
1941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꼬여 버린 지번을 정리할 목적으로 한강통( 둔지정, 이촌정 중 옛 둔지면 사초리 지역)을 한강통 일정목~삼정목, 용산정 일정목~육정목, 연병정 등으로 분할했다. 1943년 최초로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중구(
2.1. 인구[편집]
한성부는 조선 후기부터 대략 20만명 전후에서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였고, 1910년에 경성부로 개편될 당시에는 약 278,958명이었다. 1912년 통계에서는 266,131명으로 집계되는 등 소폭의 감소세를 보였다.
1914년에 성저십리 지역 대부분이 고양군으로 편입되며 한양도성과 용산 일대의 인구만 집계됨에 따라 약 2만여 명이 감소하기는 했으나, 경성부의 인구는 1920년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1920년에 250,208명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302,711명으로, 1930년에는 394,098명으로 늘어나고, 1936년 경성부 확장 직전에는 부내 인구가 444,098명으로 집계되었다.
경성부의 인구가 이렇게 증가할 때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던 성저십리 지역도 시가화가 되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1936년 경성부 확장 이후 다시 경성부로 합쳐지고 거기에 더해 영등포를 편입하게 되면서 전년도에 444,098명으로 집계되었던 데에 비해서 약 15만 명이 늘어난 6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37년에는 거기서 10만 명이 더 증가한 706,396명, 1940년에는 3년 만에 거의 23만 명이 더 증가한 935,464명으로 집계되며 말 그대로 미친 듯한 성장세를 보여 준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이 공업도시로 전환되며 일자리가 많아지고 본격적으로 근대 도시로서의 시가지가 계획됨에 따라 경성으로 유입되던 인구가 상당히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인 1944년에는 988,537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 증가세는 해방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만주나 일본 등지로 갔던 동포들이 돌아오면서 인구가 대폭 늘어 1950년에는 무려 약 70만 명이 늘어난 1,693,224명으로 집계되기에 이른다.[7]
2.2. 경인통합 계획[편집]
1939년에 일제는 '경인(京仁) 일체화'의 목적으로(병참기지화의 목적이 짙었음) 당시 시흥군 동면(현 서울 금천구,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관악구 대부분), 서면(현 경기 광명시 일부(지금의 광명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일대 및 소하동 북부), 부천군 소사면/부내면/오정면(현 경기 부천시, 서울 구로구 서부, 인천 부평구,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인천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인천 서구),
3. 특징[편집]
경성은 피지배국의 고도(古都)임에도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데, 식민지의 중심은 철도망의 핵심이 되는, 새로 건설된 항구도시로 선정되는 것이 구미 식민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경성은 근린 식민지로써 조선을 경영한 일본제국의 식민지 경영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비록 경성부는 경기도 소속이었으나, 일본의 조선 지배정책에서 경성부는 언제나 특수성을 인정받았다. 적어도 조선후기부터 서울이 곧 조선이었고, 일제강점기에도, 현재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경성부내 일본인 거주지로 남촌과 용산을 꼽을 수 있다. 남촌은 남산 북쪽 구릉으로 조선 후기 이미 상인들의 거주지였으나, 1883년 이후 일본인 상인들이 경성에 이주하면서 일본인 거주지가 되었다. 당시 한성의 중심지는 북촌인 정동이었는데 청나라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이권을 쥔 청국인들이 정동을 선점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남촌, 그것도 끝자락에 거주하였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서 패권을 잡으면서 남대문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남촌을 장악하였다. 용산은 크게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한강변 모래톱이었던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지대를 간척하여 거주지로 삼았고,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여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결과 20년대 이전 경성부는 북촌과 동대문 일대의 조선인 거주지와 남촌+용산+명동의 일본인 거주지의 이중 도시적 모습을 띄었으며, 식민 행정부 당국은 기반 인프라 건설에 있어서 일본인 거주지에 대한 노골적인 특혜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 신축, 경성부청 신축, 경성역 신축, 조선신사 신축 등 경성 및 식민지 조선의 행정중심이 종로일대로 이전하면서 경성의 이중 도시적 측면은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특히 기존 북촌의 동(洞) 행정체계, 남촌의 정(町) 행정체계로 이원화되었던 경성의 행정구역이 정(町)으로 일원화된 것은 식민지 당국이 조선 경영의 중심축을 이화(異化)가 아닌 동화(同化)에 두었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행정중심의 북상은 1925년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로 용산 등 한강변의 일본인 거주지가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는 1930년 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 제국의 향락을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현 명동, 충무로, 남촌 일대의 중심가는 혼마치(本町)라고 불리며 중심 시가지를 이루었는데 모던보이(modern boy)와 같은 서구적 스타일을 고수하는 소비현상이 나타났다. 때문에 본토에서는 각종 유흥 문화가 정부의 통제로 거의 씨가 말라 즐길 거리가 없어졌던 데 비해 식민지 조선과 그 중심인 경성에서는 유흥 문화가 전쟁 전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한반도에는 연합군의 공습이 거의 없어 전전의 유흥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토에서 출장을 오면 한번 질펀하게 즐기고 돌아갔다고 한다.[8]
하지만 대다수 조선인의 거주 환경은 이와 크게 대비됐는데 만년 적자였던 총독부의 예산 부족으로 도시 개발이 지지부진해지고 공공 인프라 보급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인해 대다수의 경성 조선인의 삶은 병합기 이전과 크게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수도 시설이나 발전소 같은 사회 인프라는 남촌 일대에 집중적으로 지어지고 공급가격도 높았으며 부족한 급수시설로 인해 1927년 기준으로 한국인은 전체의 가구의 29%, 일본인은 89.9%,기타 외국인은 99.9%가 급수 혜택을 받았다.
특히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 이후 북한 지역의 공장 건설이 우선순위가 되면서 경성의 도시 인프라 구축은 더욱 지연되었는데 독립 직후 한반도의 88.5%의 발전시설이 북한 지역에 산업 발전 목적으로 집중돼 있었다.
당시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은 본토의 평균을 훨씬 넘는 소득 수준을 지녔고 통신, 전기, 수도 요금 부터 조선인 보다 적은 금액을 지출하였다. 그에 반해 조선인에게 근대 인프라는 지주나 영세업자가 아닌 이상 누릴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중에서는 외곽으로 밀리면서 토막민으로 불리는 도시빈민이 되기도 하였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서울 내 조선의 유적이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서울 한양도성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훼손되어 왔고, 숭례문은 도로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철거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박문사를 짓기 위해 궁궐의 전각을 뜯어가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조선의 민족의식을 꺾기 위해 원구단을 철거하고, 국사당을 강제로 이전시켰다. 특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복판에 건축함으로 기존 궁궐을 훼손하자 당대 양식 있는 일본인들에게도 지나친 행위라 비판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 행정부가 도시계획에서 피지배민의 반응을 전적으로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례로 총독부는 오늘날 율곡로인, 혜화로 나가는 직선로가 경성의 격자도로망을 구성하는 데 핵심이 되기 때문에 부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했다. 그러나 이 도로가 창덕궁과 종묘를 가로 지르며 완전히 분리하였기에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이 완강하게 거부해서 착공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망 후에 공사를 할 수 있었지만 전주 이씨 종친의 압박에 의해 창덕궁-종묘간 구름다리를 설치하여야 하였다.(2020년대 초에 지하차도가 설치되어 현재는 창덕궁과 종묘가 이어져 있다.) 총독부의 이런 소극적 태도는 3.1 운동의 경험에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개전 이후 조선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일본의 조선 경영은 더욱 가혹해졌고, 경성부에서도 그러하였다.
4. 교통[편집]
4.1. 철도[편집]
19세기 말엽부터 한성을 중심으로 놓이기 시작한 전국의 철도망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거의 그 완성을 보게 되었고, 현대까지도 서울 간선철도망은 이때 완성된 것에서 큰 변화가 없다.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경인선이나 경부선 같은 노선명이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데 사실은 경성-인천, 경성-부산이 아니라 그냥 수도를 뜻하는 서울 京 자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한참 뒤인 2016년에 경강선이 개통되었을 때도 이름을 듣고 반발이 상당히 많았었다. 정작 경인선이나 경부선은 당시 서울의 이름이 한성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선명이 한인선이나 한부선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경인선과 경부선, 경의선은 경성부 출범 이전부터 개통되어 있었고, 경성부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경원선은 경성부 출범 이듬해인 1911년에 개통되었다. 본래 경의선은 시점이 용산역이었기 때문에 경부선과도 용산역에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으나, 경성부민들의 편의를 위하여 1919년에 신촌역을 경유하여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선로가 지어졌고, 기존선은 용산선이 되었다.
본래는 서대문역(폐역)이 경성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경성의 중앙역 노릇을 했으나 경의선이 연장되면서 경성의 중앙역 역할을 남대문역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1923년에 남대문역이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1925년에는 본래의 역 건물을 헐고 지금의 서울역 구 역사에서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즈음의 경성역은 한반도의 중간 기착지로서, 선양시, 창춘시로 향하는 국제열차가 운행했다.
1939년에는 경춘선과 중앙선이 개통되며 청량리역이 동부 경성의 관문이 되었고, 동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며 중요도가 늘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철도망이 경성으로 연결되며 상경하는 사람도 확연히 늘어나게 되었고, 경성의 거대화를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일제는 만성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1944년에는 아예 철길과 역 건물까지 뜯어가게 되면서 역들이 무더기로 폐역을 당하게 된다. 이때 폐역을 당한 곳들은 광복 후인 1974년부터 지하철 시대가 시작되며 어느 정도 부활했지만, 끝내 부활하지 못 한 역들도 있다.
시내 궤도교통으로는 경성전차와 경성궤도가 있었다. 경성전차는 해방 후에도 서울전차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왕성하게 운행하다가 1968년에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시장이 폐선을 단행해 역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당시의 노선들은 대부분 서울 지하철을 건설할 때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대문에서 왕십리를 거쳐 광장동으로 향하던 경성궤도는 끝내 사라져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기존 간선철도망을 이용하여 운행하던 경성순환노선이라는 것도 있었다. 경의선과 용산선을 따라 서울역 - 용산역 - 신촌역을 거쳐 경성 서부를 한 바퀴 도는 노선이었는데, 이것도 1944년 물자공출로 인해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1930년대에는 최초의 서울 지하철 계획이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의 서울 지하철 1호선과 선형이 유사했다.# 크게 종로를 지하로 통과하는 안과, 아예 청계천 물을 막고 복개하여 그 밑에 지하철이 다니게 하는 기상천외한 안도 존재했으나, 이 또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계획으로 남았다가 30년이 흐른 1960년대에나 가서 다시 논의되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1974년 개통한다.
4.2. 도로[편집]
일제강점기 초반만 하더라도 화물의 운송을 대부분 철도로 했고, 자동차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도로교통은 미비하기 그지없었다. 한강철교가 1900년에 개통된 데에 반해 한강인도교는 그보다 17년이나 늦은 1917년에나 개통되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고종 대에 대한제국은 한성에 서구 열강처럼 대각선 도로망을 갖출 예정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자동차가 늘어나게 되면서 경성부의 도로도 개수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1930년대에 이르면 대대적으로 토목사업을 벌이며 도로를 닦았다. 삼일대로나 한남대로, 이태원로 등이 다 이때 생긴 도로였다. 1940년대에도 도로 건설은 부지런히 이루어지다가, 이 또한 물자공출로 인해 공사가 무기한 중단되었고, 6.25 전쟁 직후에나 겨우 완성을 본 경우가 많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전국에서 경성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개·보수할 필요성도 높아지면서 1930년대를 전후하여 현재의 경인로가 되는 경인산업도로가 개수되고, 경수가도, 경춘가도 등이 개수되거나 신설되었다.
5. 사법 · 행정[편집]
경성지방법원: 현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남부지방법원, 서울북부지방법원
6. 경제[편집]
6.1. 상권[편집]
한성부 시절부터 전통적인 중심 상권은 육의전이 있던 종로였으나, 남촌에 일본인들이 점차 늘어나며 명치정(明治町, 지금의 명동)과 본정(本町, 지금의 충무로) 등이 크게 성장하였다.
1930년 10월 24일, 조선 최초 백화점인 미츠코시(三越)백화점이 본정에서 개업하였고, 뒤이어 원래부터 경성에 있었던 히라타(平田),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아(丁子屋)가 백화점이 되었다. 미츠코시백화점은 훗날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되었고, 히라다 백화점은 1947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1969년 그 자리에 대연각호텔이 세워졌으나 화재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고 현재는 고려대연각타워로 바뀌었다.
미나카이백화점은 훗날 명동 밀리오레로, 조지아백화점은 미도파백화점이 되었다가, 1997년 외환 위기로 도산하고 롯데백화점에 인수되어 현재는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되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때 명치정을 중심으로 세워진 일본인 자본의 백화점들은 해방 이후에 적산으로 몰수되었다가 대부분 활용 중인데, 히라다만 제외하면 여전히 모두 백화점 건물로 쓰이고 있다.
종로에는 순수 조선인의 자본으로 세워진 화신백화점이 있었는데, 오랜시간 종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 왔다. 적산으로 몰수된 나머지 백화점들과는 다르게 소유주가 조선인이라 미군정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나 1970년대부터 몰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1978년 종로 확장 계획과 맞물려 건물이 철거되었다. 그러나 화신백화점이 사라진 이후에도 보신각 앞은 한동안 화신앞이라는 지명으로 불려지다 서서히 잊혀진다. 현재는 그 자리에 종로타워가 세워졌고, 특이한 외양과 높이 때문에 옛 화신백화점처럼 종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7. 생활·문화[편집]
7.1. 주거 환경[편집]
구한말부터 남촌 일대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일본식 주택과 문화주택(文化住宅)이라 불리던 서양식 주택이 경성에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한옥은 감소하던 추세였다. 이에 경성에 살던 정세권이라는 사업가는 북촌과 서촌 일대에 남아 있던 99칸 저택들과 조선왕조의 별궁이었던 누동궁 등을 매입하여 서민들을 위한 소형 한옥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집'이라는 건축 양식이다.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이나 익선동 한옥마을이 당시 조선집 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 전국의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시가지를 재개발하고 근교에 새로운 택지지구를 마련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발표한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온 좁고 난잡한 도시의 구획을 정리함과 동시에 제반시설을 위한 용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경성에서는 시범적으로 무교동, 장사동 등의 지역이 재개발에 착수하였고, 새로 돈암지구, 영등포지구, 대현지구, 한남지구 등이 조성되었다. 이 구역들은 재개발과 재건축을 거듭하며 현재로서는 당시 모습이 모두 사라졌으나, 도로망 자체는 당시에 지어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현대 서울의 틀을 다진 사업이라 하겠다.
이후 용두, 사근, 번대방, 청량리, 신당, 공덕의 6개 지구가 추가로 지정되어 삽을 떴으나 본격적인 공사는 시작도 못 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잠정 중단되었으며, 이 사업들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특별시청이 떠안았다. 해방 이후에도 6.25 전쟁 등의 일을 겪으며 사업을 마무리 짓지 못 하다가, 서울 환도 이후 제1공화국 때 서울을 복구하기 위하여 삽을 떴고, 이 사업들은 삽을 뜬지 거의 30년 만인 1960년대에 가서 그 끝을 보게 되었다.
이런가 하면 도시 빈민 문제도 심각했다. 총독부가 용산의 일본인 부촌이나 병참기지화 발표 이후 영등포 일대에 공장 인프라를 구축한 것과 반대로 동대문 지역의 조선인 주거지는 외면 받기 일수 였다. 독립 이전까지 경성내 조선인 중 상하수도를 이용할수 있는 인구는 전체의 30%도 안되었고 대다수는 재래식 빨래터나 우물을 이용하였다. 특히 토막민이라고 해서 도시에서나 밀려나 흙으로 만든 움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히 신석기 시대 수준의 생활이었던 것이다. 이런 토막촌은 당시 고시정(현 후암동)과 도화정, 신당리, 북아현리 등에 형성되어 있었고, 1940년 말 경성부 사회과 자료에 의하면, 공식적인 토막민의 숫자는 1만 6,344명, 비공식적으로는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토막민이 계속 증가해서 경성부는 교외지역인 홍제정·돈암정·아현정 등에 토막 수용지를 설정해 부내에 산재하는 토막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이후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7.2. 교육[편집]
7.2.1. 고등교육기관[편집]
1927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 일본 제국대학 체계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조선 내 유일한 대학교였다. 다른 학교들도 대학교로의 승격을 희망했지만, 총독부에서는 번번히 퇴짜를 놓아 전문학교(專門學校)로 남았다가 해방 이후에나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이후에 경성대학으로 개칭된 뒤에 서울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법전),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 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광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는 모두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의 각 학부로 통합되었고, 이외에도 현재의 인서울 대학교의 모태가 되는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이화여자전문학교(現 이화여자대학교),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명륜전문학교(現 성균관대학교), 혜화전문학교(現 동국대학교), 숙명여자전문학교(現 숙명여자대학교)가 있었다.
7.2.2. 중등교육기관[편집]
구한말부터 신식 교육이 도입되며 한성에는 우후죽순 학교들이 생겨났고,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때 설립되었던 학교들은 대부분 현재까지 남아 오래된 역사를 가진 명문이 되어 한 번 쯤 이름은 들어 봤다 싶은 학교들이 되었다.
당시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와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가 가장 명문으로 손꼽혔는데,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와 경복고등학교이다. 당시 경성부가 경기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고등보통학교를 구제중학교로 변환할 때 경성제일고보를 경기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학교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만 가던 학교였으나, 1980년대에는 고교평준화가 실시되며 위상이 그만큼은 못 하게 되었다. 현재도 경복고는 그 자리에 있고, 경기고는 도심공동화로 인하여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였다. 옛 경기고 교사(校舍)는 서울특별시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이외에도 옛날 서울의 명문 공립고라고 하면 서울고, 경동고, 용산고 등을 꼽았는데, 서울고등학교는 일본인 전용 학교인 경성중학교로 존재하였다가 해방 이후에야 일반 학교로 전환되었다.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이고보의 여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성여고보)였다. 현재의 경기여고이다. 그 외에 경성제2고등여학교(경성제2고녀)가 수도여고로, 경성제3고등여학교(경성제3고녀)가 창덕여고로 바뀌었다.
사립으로는 배재고보, 이화여고보, 양정고보, 휘문고보, 보성고보, 중앙고보, 숙명여고보, 중동고보 등이 있었다.
7.3. 문화[편집]
경성은 인천, 부산 평양 같이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던 곳이었고, 상류층을 중심으로 외국 문물이 가장 빨리 유행하던 곳이었다. 이 영향으로 의복도 한복에서 양장으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모던걸과 모던보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경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우리나라 최초 실내극장이자 관립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1903년 정동 야주현(夜珠峴), 지금 새문안교회 자리에 세워졌고, 1910년에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했다. 이어 1912년 종로에 우미관, 1915년을 전후하여 황금관, 대정관, 유락관 등이 문을 열었다. 중앙극장, 동양극장, 단성사 등도 유명했다.
7.4. 언어[편집]
한성부 시절부터 쓰던 서울 방언은 경성부에서도 계속해서 쓰였는데, 이 시기의 경성은 일본을 통해 여러 신문물이 들어오며 일본어나 혹은 일본어로 발음하는 외래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서울 방언에 녹아들었다. 현재도 노년층이나 중장년층이 구사하는 말 중에 이 시절의 잔재가 많이 남았다.
이 지역의 방언을 토대로 해방 이후에는 현대 표준어가 제정되었고, 평양을 수도로 삼은 북한도 서북 방언이 아닌 서울 방언을 기준으로 문화어를 제정했다.
옛 경성부 지역인 지금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서 오래 산 서울토박이들은 더러 구한말 때부터 쓰던 서울 사투리를 현재도 구사하는 편이며, 1963년 이후 서울로 편입된 지역에 살던 주민들 같은 경우는 서울 방언보다 경기 방언을 사용하지만 표준어나 표준화된 현대 수도권 방언을 섞어 발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