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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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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자원부장관 (1993~1994)

초대
김철수
통상산업부장관 (1994~1998)

제2대
박재윤
제3대
안광구
제4대
임창열
제5대
정해주
산업자원부장관 (1998~2008)

초대
박태영
제2대
정덕구
제3대
김영호
제4대
신국환
제5대
장재식


제6대
신국환
제7대
윤진식
제8대
이희범
제9대
정세균
제10대
김영주
지식경제부장관 (2008~2013)

초대
이윤호
제2대
최경환
제3대
최중경
제4대
홍석우
산업통상자원부장관 (2013~현재)


초대
윤상직
제2대
주형환
제3대
백운규
제4대
성윤모
제5대
문승욱

제6대
이창양
제7대
방문규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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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부장관 (1955~1961)


초대
유완창
제2대
김현철
제3대
송인상
제4대
신현확
제5대
전예용


제6대
주요한
제7대
김우평
제8대
태완선
제9대
주요한
제10대
박기석

제11대
신태환

건설부장관 (1962~1994)

박정희 내각


김현철 내각


초대
박임항
제2대
조성근
제3대
정낙은
제4대
전예용
제5대
김윤기

제6대
주원
제7대
이한림
제8대
태완선
제9대
장예준
제10대
이낙선



제11대
김재규
제12대
신형식
제13대
고재일
제14대
최종완
제15대
김주남


제16대
김종호
제17대
김성배
제18대
이규효
제19대
최동섭
제20대
박승


제21대
권영각
제22대
이상희
제23대
이진설
제24대
서영택
제25대
허재영

1994년 교통부와 통합
제26대
고병우
제27대
김우석









대한민국 제15대 상공부 장관
주요한[1]
朱耀翰 | Chu Yo-han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070530142139197238152.jpg

출생
1900년 10월 14일
평안남도 평양부 내천면
(現 평양시 중구역)
사망
1979년 11월 17일 (향년 79세)
서울특별시 관악구 반포동
(現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본관
신안 주씨

송아(頌兒)
재임기간
제6대 부흥부 장관
1960년 8월 23일 ~ 1960년 9월 12일
제15대 상공부 장관
1960년 9월 12일 ~ 1961년 5월 3일
제9대 부흥부 장관
1961년 5월 3일 ~ 1961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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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주공삼
형제자매
동생 주요섭, 주영섭
(4남 4녀 중 첫째)
학력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메이지 학원 중학부 (수료)
구제제1중학교 (졸업)
상하이 후장 대학 (공업화학과 / 학사)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4, 5(민)
경력
상하이 독립신문 기자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제4~5대 국회의원 (서울 중구 갑)
제6대 부흥부 장관
제15대 상공부 장관
제9대 부흥부 장관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 정치인, 시인.


2. 생애[편집]


1900년 평안남도 평양시 내천면에서 개신교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평양 숭덕 소학교, 1918년 일본 메이지 학원 중등부, 1919년 구제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25년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교 재학 중 상하이의 독립 신문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박시창, 안원생 등과 상하이 유학생 축구팀 소속으로 국내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1918년 불놀이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근대시 형성에 기여하였다.

대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친일파로 전향하여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수많은 친일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학병 권유 연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복 이후 친일 행적에 대하여 뭐가 잘못이냐고 큰소리치면서 지금도 비난받는 원인이 되었다.

8.15 광복 후 흥사단 등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대한국민당 윤치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및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고, 1965~1973년까지 대한일보 회장을 지내며 민영 대한해운공사 초대 사장(1968~1976) 및 한국선주협회 회장(1968~1969/1971~1976), 한국능률협회 회장(1975~1979), 전국경제인연합회 수석부회장(1978~1979)도 지냈다. 말년에 문필 활동에 전념하다 1979년 11월 17일 새벽 3시, 서울 관악구 반포동 반포주공아파트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의 형이다.

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어버이주일에 자주 불리는 찬송가 579장(통일찬송가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의 작사자로도 알려져 있다.[2]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둘러보기[편집]


한국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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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서정 갈래
서사 갈래
1910년대
상징주의 시 (김억) · 현대적 자유시 (주요한)
신소설 (이인직 · 이해조 · 최찬식)
1920년대
동인지 시대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시 (이상화) ·
김소월[1] · 한용운[2]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소설
(김동인)
자연주의 · 사실주의 소설
(염상섭 · 현진건)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민요 운동 · 시조 부흥론)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계급주의 문학
계급주의 문학
1930년대
시문학파[3] (모더니즘 시) · 생명파 · 전원파
모더니즘 소설[4] · 장편소설[5] · 농촌소설[6] · 역사소설[7]
1940년대
~ 광복
청록파 · 저항시 (이육사 · 윤동주 · 신석정)
국문학의 암흑기[8]
광복 ~
1950년대
이념시(연간조선시집) · 해방기념시집 · 순수시
귀향 소설 · 분단 문학

전쟁시 · 모더니즘 시 · 서정시
전쟁소설 · 분단 소설 · 귀향 소설
1960년대
현실 참여시
순수 서정시
참여문학
순수문학
1970년대
민중시 · 노동시
민중 소설 · 농민·어민 소설 · 노동 소설 ·
순수 소설 · 중간소설 · 대중소설
1980년대
민중시 · 서정시 · 해체시
노동 소설 · 연작소설 · 역사 장편 대하소설
1990년대
~ 현재
생태시 · 해체시 (도시시 · 일상시) · 메타시
일상 소설 · 다문화 문학
장르소설
[각주]
[각주]

고전문학 · 장르문학
[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날개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태평천하, 염상섭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1]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 마쓰무라 요칸(松村耀翰).[2] 1967년경 작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