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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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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관료, 법조인 출신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전라남도 광양군 출신으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지역에서 3선 의원을 지낸 것을 들어 현재 대구경북권의 보수성과 비교할 때 언급되기도 한다.
2. 생애[편집]
1912년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구룡마을#에서 태어났다. 광주서공립중학교와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전라북도 청하보통학교 훈도, 1935년부터 1936년까지 남원보통학교 훈도를 지내는 등 몇년간 교원 생활을 했으며,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전라남도 산업부 농무과에 촉탁으로 근무하는 등 얼마간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재학하다가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주오대학을 중퇴하였다. 그리고 판사, 검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검사로 근무하여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담당검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에게 누명을 씌우는 데 가담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경찰관료, 경상북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민주당 대변인을 맡아 명대변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재천 이후 대변인으로 명성을 떨친 정치인으로는 박희태, 박지원, 정동영 등이 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법무부 장관을, 1961년에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 소속이었는데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7년 신민당을 탈당하여 군소정당인 민주당 총재에 추대되었으나, 제7대 국회의원 선거서 민주당이 참패하고 자신도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서 신민당 김홍일 후보에게 패하자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로는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70년 1월 6일 자택 앞 빙판에서 넘어지면서 뇌일혈로 인해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악화되면서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별세했으며, 사후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벽제리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시절 판검사로 재직한 경력으로 인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