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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 정치인, 시인.
2. 생애[편집]
1900년 평안남도 평양시 내천면에서 개신교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평양 숭덕 소학교, 1918년 일본 메이지 학원 중등부, 1919년 구제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25년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교 재학 중 상하이의 독립 신문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박시창, 안원생 등과 상하이 유학생 축구팀 소속으로 국내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1918년 시 불놀이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근대시 형성에 기여하였다.
대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친일파로 전향하여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수많은 친일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학병 권유 연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복 이후 친일 행적에 대하여 뭐가 잘못이냐고 큰소리치면서 지금도 비난받는 원인이 되었다.
8.15 광복 후 흥사단 등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윤치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및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고, 1965~1973년까지 대한일보 회장을 지내며 민영 대한해운공사 초대 사장(1968~1976) 및 한국선주협회 회장(1968~1969/1971~1976), 한국능률협회 회장(1975~1979), 전국경제인연합회 수석부회장(1978~1979)도 지냈다. 말년에 문필 활동에 전념하다 1979년 11월 17일 새벽 3시, 서울 관악구 반포동 반포주공아파트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의 형이다.
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어버이주일에 자주 불리는 찬송가 579장(통일찬송가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의 작사자로도 알려져 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