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유언/실존인물/서양
덤프버전 :
분류
아래 토론들로 합의된 편집방침이 적용됩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 내용 펼치기 · 접기 ]
1. 개요
2. 기원전
3. 1세기
4. 2세기
5. 3세기
6. 6세기
7. 7세기
8. 9세기
9. 11세기
10. 12세기
11. 13세기
12. 14세기
13. 15세기
14. 16세기
15. 17세기
16. 18세기
17. 19세기
17.1. 1800년대
17.2. 1810년대
17.3. 1820년대
17.4. 1830년대
17.5. 1840년대
17.6. 1850년대
17.7. 1860년대
17.8. 1870년대
17.9. 1880년대
17.10. 1890년대
18. 20세기
18.1. 1900년대
18.2. 1910년대
18.3. 1920년대
18.4. 1930년대
18.5. 1940년대
18.6. 1950년대
18.7. 1960년대
18.8. 1970년대
18.9. 1980년대
18.10. 1990년대
19. 21세기
1. 개요[편집]
실존 인물 중 한국사를 제외한 외국인 중 서양인(서아시아와 아시아 외 다른 대륙)들의 유언을 정리한 문서다. 인물들의 사망 시점을 기준으로 시대 순으로 나열한다.
2. 기원전[편집]
3. 1세기[편집]
4. 2세기[편집]
5. 3세기[편집]
6. 6세기[편집]
7. 7세기[편집]
8. 9세기[편집]
9. 11세기[편집]
10. 12세기[편집]
11. 13세기[편집]
12. 14세기[편집]
13. 15세기[편집]
14. 16세기[편집]
15. 17세기[편집]
16. 18세기[편집]
17. 19세기[편집]
17.1. 1800년대[편집]
17.2. 1810년대[편집]
17.3. 1820년대[편집]
17.4. 1830년대[편집]
17.5. 1840년대[편집]
17.6. 1850년대[편집]
17.7. 1860년대[편집]
17.8. 1870년대[편집]
17.9. 1880년대[편집]
17.10. 1890년대[편집]
17.11. 1900년대[162][편집]
18. 20세기[편집]
18.1. 1900년대[편집]
18.2. 1910년대[편집]
18.3. 1920년대[편집]
18.4. 1930년대[편집]
18.5. 1940년대[편집]
18.6. 1950년대[편집]
18.7. 1960년대[편집]
18.8. 1970년대[편집]
18.9. 1980년대[편집]
18.10. 1990년대[편집]
18.11. 2000년대[339][편집]
19. 21세기[편집]
19.1. 2000년대[편집]
19.2. 2010년대[편집]
19.3. 2020년대[편집]
[1] 1900년은 19세기에 속하며 20세기는 1901년부터이다.[2] 2000년은 20세기에 속하며 21세기는 2001년부터이다.[3] 유언 전문은 열왕기상 2장 2절부터 11절까지이다. 그러나 이후의 내용을 보면 솔로몬은 이를 지키지 않았고 결국 솔로몬 사후에 나라는 두 개로 분열된다.[추정]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것은 랍비 전승에 따른 것이며, 쓴 사람이 솔로몬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해당 문서 참조.[4] 아시리아는 사방팔방으로 늘어난 전선과 성경에도 기록된 정복한 왕들의 뼈들을 장식물로 가져오거나 그들 기준 이교도의 문화유산을 다 박살내는 등의 여러 잔인한 짓거리로 인해 벌어진 반란으로 공세종말점을 맞이하기 직전의 상황이였고 아시리아 내부는 늙고 병든 아슈르바니팔의 빈 자리를 채울 권력다툼으로 아슈르바니팔의 가족들이 부끄러운 짓을 꽤 많이 한 상태였다.[5]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경우에는 닭은 제물이 된다)과, 소크라테스가 알던 사람의 이름이라는 해석이 있다. 다만 더 간지나는 전자의 해석(즉 이미 죽었어야 할 몸, 아스클레피오스 덕분에 한 번 더 살았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은 편.[6] 마지막으로 의식이 돌아왔을 때 후계자를 누구로 할 거냐는 질문에 남긴 대답. 결국 이 유언에 의해 제국은 최강자를 자처하는 장군들의 전쟁이 이어졌고, 급기야 제국은 분열되었다.[7] 칸나이 전투를 지휘한 집정관. 유언에 나오는 파비우스는 파비우스 전략을 사용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로, '최강의 로마 제국이 수비로만 일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는 이유로 굼벵이라고 욕을 먹거나 경질되기도 했다. 그러나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가 대패하면서 카르타고가 얕볼 상대가 아님이 밝혀지자, 대번에 파비우스의 전략이 힘을 얻게 됐다. 그래서 이 유언을 했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도 파비우스를 지지했던 것이다.[8] 사실 이건 의도는 아니었으나 유언이 되어버린 말이다.[9] 로마군은 한니발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는데 신병이 인도되면 로마에서 본보기나 놀림감 취급당하며 처형당할 것이 기정사실이고, 이는 한니발이 사랑하는 카르타고에게 (구국의 영웅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좌절감을 안겨줄 수도 있었기에 거부하고 반지에 숨겨두었던 독으로 자살했다.[10]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2차 포에니 전쟁 때 위기에 몰렸던 조국을 구해낸 스키피오는 종전 후 정적들의 모함으로 대단히 피곤한 재판에 휘말렸고, 결국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시골에 틀어박혀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11] 동맹시 전쟁을 막기 위하여 이탈리아인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노력하다 살해당한 호민관. 마지막 순간에 의문을 표한 것처럼 그의 사후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은 없었고 결국 동맹시들과의 내전이 시작된다.[12] 카이사르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외친 말이다.[13] 브루투스의 친구이자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던 푸블리우스 볼룸니우스의 회고. 패주한 브루투스가 어느 동굴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남긴 말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에서 메데이아가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을 저주한 시를 인용한 것이다. 사실 이 때 브루투스는 시 한 편을 더 말했으나 블룸니우스가 이를 기억하지 못해 결국 기록에 남지 않았다.[A] A B 두 유언 모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수록되었다.[14] "By all means must we fly; not with our feet, however, but with our hands." (중략) he said, that he found an infinite satisfaction in this, that none of his friends had been false to him; that as for fortune, he was angry with that only for his country’s sake; as for himself, he thought himself much more happy than they who had overcome, not only as he had been a little time ago, but even now in his present condition; since he was leaving behind him such a reputation of his virtue as none of the conquerors with all their arms and riches should ever be able to acquire, no more than they could hinder posterity from believing and saying, that, being unjust and wicked men, they had destroyed the just and the good, and usurped a power to which they had no right. After this, having exhorted and entreated all about him to provide for their own safety, he withdrew from them with two or three only of his peculiar friends. 필리피 전투에서 패한 후 호위병 중 하나가 도망치자고 건의하자 이를 거절하며 한 말. 이 말을 남긴 후 칼 위로 쓰러져 자살했다.[15]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모든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그저 배우일 뿐. 등장과 퇴장이 있고 각자 자기 인생에서 다양한 역을 연기한다."는 구절과 묶어서 읽어보면 여러모로 생각할 여지를 준다. 어쩌면 셰익스피어가 정말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6] 각 복음서마다 그 기술(記述)이 다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참조. 주류 기독계에서는 예수가 이 일곱가지 말들을 모두 했다고 보며, 이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한다. 예수의 수난을 다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죽기 전에 위에 나온 말들을 모두 하고 죽는 것으로 표현되었다.[17] 암살자의 칼에 맞고 게르만 근위병들을 부르며 남긴 말.[18] 네로에게 반역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외친 유언. 당시에는 경기 우승자가 상을 받을 때 관중들이 외치는 함성이었고, 그 후에는 동방정교회 사제 서품식에서도 서품을 선포할 때 주교가 외치는 선언문으로 쓰인다.[19] 칼로 찔러 자결하려던 자신을 옷을 벗어 지혈해 준 병사에게 한 말. 허나 병사가 그에게 이렇게 했던 이유는 '가급적이면 살려서 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그랬던 것이었다.[20] 일설에 의하면 이후 "신이니까 일어서서 죽어야지." 라며 무리하게 일어나다 시종의 품에서 죽었다고 한다.[21] 생전에 신격화를 거부했던 2대 황제 티베리우스를 제외한 모든 로마 황제는 죽으면 신격화가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는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비튼 것이다.[22] 후계자가 통치권을 이양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당직 중인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에게 남긴 군호.[23] 디오 카시우스가 기록한, 처형 직전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24] 아들들에게 남긴 말. 하지만 전자는 지켜지지 않았다. 이 유언은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 디오 카시우스의 창작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말을 했다고 한다.[25] 어머니 율리아 돔나 앞에서 형 카라칼라의 칼에 찔렸을 때 남긴 말이라고 한다. 다만 이 말은 야사에서만 전해진다.[26] 임종 전 준비한 연설문에 적힌 마지막 문구. 연설문은 수석 사법관 사크리 팔라티가 대신 읽었다.[27] 포카스에 의해 처형되기 전 자신의 아들들이 먼저 처형되는 것을 보고 이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28] "그대가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라는 이라클리오스의 질문에 대한 대답. 이후 분노한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토막나 사냥개들에게 던져졌다.[29] 이슬람교의 시조.[30] 죽기 전 자신의 저서를 부정하며 단의론을 인정한 말. 그가 사망한 이유도 로마 교황 요한 4세가 단의론 대신 단성론을 인정한 데 대한 상실감이었다.[31] 겨울에 목욕하고서 늑막염에 걸려서 마지막을 앞에 두었을 때. 카롤루스는 생전에 의사들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전해지는데, 자신은 고기를 구워먹고 싶은데 의사들은 옥체를 생각하시어 삶아 잡수시라는 조언을 끈질기게 반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언에서도 카롤루스의 의사 혐오를 알 수 있는 대목.[32] 새끼 멧돼지들이란 라그나르의 아들들을 뜻한 것이었다. 실제로 라그나르가 감옥에서 죽은 다음 해에 그의 아들들이 이끄는 이교도 대군세가 브리튼 제도를 휩쓸었고, 결국 아들 중 한 명인 이바르가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한다. 이 때 라그나르를 죽인 엘라 2세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33]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으로 한때 제압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반격을 받고 로마에서 피신, 망명지 살레르노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34] 유수프의 발렌시아 공격 당시 기습 공격에 나섰다가 중상을 입은 후 아내인 히메나에게 한 말이다.[35] 뒤늦게 찾아온 알폰소 6세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자 한 말. 이 말을 한 후 사망했다.[36] 성명미상이지만 대시인으로 알려진 중세 프랑스의 시인.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37] 유수프는 살라딘의 본명이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비오는 날 바깥을 시찰했다가 병이 악화되었다. 아픈 그를 두고 옆에서 성직자가 끊임없이 코란을 읽어주었다고 하는데 신이 신도를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대목에서 미소를 지었고 얼마 있지 않아 이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38] 호라즘 왕조의 황금기를 연 군주였으나 칭기즈 칸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도망친 후 카스피 해의 외딴 섬에서 폐렴으로 죽어가며 한 말이다.[39] 동방견문록의 내용이 거짓이었다고 고백하고 눈을 감으라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말에 답하며.[40] 출처는 위키백과 영문판(https://en.wikipedia.org/wiki/Osman_I). 아들이자 뒤를 이어 2대 베이가 되는 오르한에게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길이가 꽤 긴 탓에 정말 유언이라기보다는 훈요십조처럼 후대의 군주들에게 남기는 가르침으로 보는 게 옳을 듯 싶다.[41] 그리고 실제로 1세기 후, 그 백조가 등장하여 그 말이 실현된다.[42] 유언에 '100년 뒤'가 붙는 기록도 있지만 출처가 불명확하다.[43] 잔 다르크가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당한 곳이 바로 루앙. 당시 루앙은 잉글랜드 영토로, 잉글랜드령 프랑스의 군사, 정치적 수도 역할을 담당했다.[44] 이 유언 때문에 그의 관은 네 구의 조각상이 떠받든 형상으로 설계되었다. 허나 그가 저렇게까지 된 것은 그 자신의 책임이 컸다.[45] 당시 적군 지휘관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가 왕이 봉토를 몰수하자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가 되어버린 부르봉 공작 샤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피에르 테라일은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샤를이 피에르에게 다가와 진정으로 고결한 기사가 이렇게 최후를 맞다니 참으로 안타깝다며 유감을 표하자, 그에게 남긴 말.[46] 이탈리아 전쟁 시대 프랑스 최고의 명장 중 한 사람. 1524년의 세시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의 후방에서 아군이 퇴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과 맞서 싸우다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47] 독일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정신적 지주였다.[48] 처형대의 받침 위에 놓인 자기 수염을 치우며.[49] 잉글랜드 학자. 일반인도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의 영어 번역에 힘을 쏟았지만 도중에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이 유언은 70여년 후 그가 남긴 번역본을 토대로 킹 제임스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현실로 이루어졌다.[50] 암살자들과의 격투 끝에 쓰러지면서 남긴 말.[51] "선생님은 지금까지 주님의 가르침을 선생님이 전한 것에 대해 확신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질문을 한 사람은 자신의 지지자인 루터파 신학자 유스투스 요나스였다.[52] 한 귀족이 왕의 심장을 꺼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53] 사망 수시간 전, 쉴레이만 1세가 평생을 기록했던 일기에 남긴 마지막 기록. 46년의 치세 동안 열 세 차례의 군사원정을 단행한 쉴레이만은 세상을 떠나는 1566년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던 헝가리를 공격했는데(실질적인 지휘는 재상이 하고, 자신은 가마를 타고 갔다), 여기에서의 '요새' 는 시겟바르 요새를 일컫는다. 갑자기 병환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기에, 숨을 거둔 날의 일기가 남아있다. 시겟바르 요새는 쉴레이만이 사망한 다음 날에 함락되었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568년에 체결된 에디르네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 제국에 3만 두카트의 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강화를 체결했다.[54]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라는 귀족들의 요청을 거부하며 남긴 말. 이후 세바스티앙은 적진으로 뛰어들었고, 전사(?)하였다.[55] 칼에 맞아 죽기 전 남긴 말. 죽기 몇 시간 전 앙리 4세는 오랫동안 자신을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신하인 막시밀리앙 드 베튄의 병문안을 가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파리는 난데없는 교통 혼잡 상태였다. 그리고 멈추어 선 마차 안에서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프랑수아 라바이약의 칼에 찔려 눈을 감았다.[56] 신성동맹을 창시한 기즈 공작의 동생. 기즈 공작 사후 신성동맹의 수장으로 앙리 4세와 대립하나 1595년 앙리 4세에게 투항, 이후 그의 충실한 조언자로 지냈다.[57] 그러자 옆에 있던 개신교 목사가 한 말이 일품이다. "그건 예수와 사탄을 화해시키려는 발상이오." 죽는 사람 옆에서 시비나 걸고 참 잘하는 짓이다. 아무튼 케플러가 죽은 뒤에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다. 천문학의 본좌에 걸맞는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할까.[58] 마지막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했던 최후변론.[59] 사형당하기 전에 남긴 말.[60] 사형 집행인에게 자신을 처형하러 온 것이냐고 묻는 말.[61]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자, 제2차 빈 공방전 당시 오스만 제국군의 총사령관. 빈 공격을 주장, 주도하였으나 대패했고, 그 죄로 처형되었다.[62] 사형 집행 직전.[63]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극작가.[64] 루이 15세에게 남긴 말.[65] 나중에는 혁명이 일어나 종국에는 왕조도 끊어지고 말지만, 프랑스는 멸망하지 않았으니 어떤 의미로 아직까지도 그의 말은 현실이긴 하다.[66] 대단히 용감한 장군이기도 해서 총사령관이 가장 선두에서 진격하는 미친 짓을 자주 하곤 했는데, 이때도 겁을 상실한 듯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직접 정찰하며 한 말. 프랑스 장교가 놀라 말리려 했지만 옆에 있던 스웨덴 장교가 "말리면 더 위험한 행동을 하시니 그냥 두라"고 하였는데, 이후 총알이 왼쪽에서 오른쪽 관자놀이를 관통하여 즉사했다. 다만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67] 이건 야사에서 전해지는 유언이다. 야사에 따르면 죽음을 앞두고 목사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Ich bin nackt von meiner Mutter Leibe gekommen, nackt werde ich wieder dahinfahren, 욥기 1장 21절)'이라는 성경 구문을 읽어주자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68] 마음이 편안하냐고 물었을 때.[69] 아일랜드 작가.[70] 여기서 말하는 홍수는 수많은 목숨을 쓸어갈 재앙과 같은 사건, 그러니까 루이 15세는 죽어가며 프랑스 혁명을 예감한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유언은 실제로 이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고, 야사에서만 전한다.[71] 죽기 전에 악마를 거부하라는 말을 듣고 한 대답.[72]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던 중 석판에 이 글을 남기고 쓰러졌다. 실로 수학자, 과학자다운 유언이 아닐 수 없다. [73] 호흡하기 쉽도록 딸이 침대에 누워 있는 그의 위치를 바꿀 것을 말했을 때.[74] 자신이 작곡한 <레퀴엠(진혼곡)>에 대해 남긴 말.[75] 그 직후 목이 잘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 이후로도 한동안 프랑스에서는 단두대에 피 마를 날이 없었다.[76] 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찔린 뒤 죽어가면서 한 말.[77] 단두대로 올라가다가 실수로 간수의 발을 밟았다고 한다.[78] 처형당하기 전에 남긴 말.[79] 프랑스의 작가 겸 혁명가. 지롱드당의 일원으로 "지롱드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80] 처형 전까지 저 말을 외치다가 처형되었다.[81] 공교롭게도 당통은 실제로 상당한 대두였다고 한다.[82] 처형장으로 가던 중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에서 이 말을 했다고 하고, 실제로 로베스피에르도 3개월 후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로 가기 전 총에 맞아 턱뼈가 박살나는 바람에(단두대에 오르기 전에 자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설과 체포되던 중 헌병대의 총에 맞았다는 설이 있다), 당통 같은 나름의 위트는커녕 데물랭처럼 살려달라는 애걸복걸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83] 사실 사형 판결을 받고도 덤덤했지만 아내 뤼실마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끌려가는 길에 발버둥치며 저렇게 외쳤다. 당연히 아내도 처형.[84] 프랑스 혁명 시기 유명한 언론인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에 반대하다가 처형.[85] 역시 병상에서 한 말인 '나는 죽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한 말은 이것이라고 한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신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빨리 끝내라고 말했는데 주변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이 없어서 주변에 저렇게 물어본 것. 이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 더 간지나는지 자주 인용되긴 하지만.[86] 공식적인 유언. 이후에도 몇 번이고 자기 말을 확인하거나, 혼수상태에 있었다가 깨어난 뒤에도 자기 말을 확인했을 만큼 말을 꽤 많이 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자기 딸인 호레이샤 넬슨도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도 있었다.(법적으로는 엠마 해밀튼과의 불륜에서 태어난 혼외자식이라서 받을 순 없었다고 한다.)[B] A B 사실상의 마지막 말로 추정되는 말.[87] 넬슨이 작별의 키스를 해 달라고 하자 부관 토마스 하디가 키스를 해줬다고 한다.[88]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결과에 대한 충격으로 남긴 말이다.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가 지도가 필요 없어졌다는 의미.[C] A B 총살당하기 직전.[89] 제자 아우구스트 루트비히 폰 노스티츠에게 한 말이다.[90] 미국의 첫 여성 연쇄살인범으로, 남편 존 피셔와 함께 살인, 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그 당시 결혼한 여자는 사형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법정에서 이 사실을 말했지만 판사는 그녀의 남편을 먼저 사형시킨 뒤 그녀를 처형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처형 당일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빼어난 미모(착각이 아니라 진짜 미인이었다고)로 처형을 보러온 남자들 중 하나를 꼬셔 결혼식을 치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나서지 않았고 처형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유언을 남기고 집행인이 미처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뛰어내려 자살했다.[91] 사망 전 남편 펠릭스 바초키에게 남긴 말.[9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큰여동생. 카롤린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주제넘은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다.[93] 영국 시인.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폐결핵으로 죽는 걸 곁에서 간호하면서 봤기에 자신도 피를 토하는 걸 보고 폐결핵이 전염된 걸 알고 죽을 걸 알았다. 페니(1800. - 1865.)라는 약혼녀가 있었고 그녀를 사랑했으나 그녀에게도 병이 옮을 것을 걱정하여 그녀를 떠나 친한 친구와 요양을 하던 도중 죽었다. 페니는 12년 뒤에 결혼했지만 키츠가 사준 반지를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94] 조제핀의 유언(보나파르트, 엘바, 로마 왕)에도 보나파르트, 즉 나폴레옹이 있다.[95] 문제는 아들이 없어 동생(뒷날의 니콜라이 1세)에게 황제 계승권도 밝히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는 것. 그 덕분에 생긴 혼란을 틈타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실 죽음을 가장하고 은둔해 성직자가 된 것이 아니냐는 도시전설도 있다.[96] 바로 아래의 애덤스와 같은 날인 1826년 7월 4일 사망. 제퍼슨은 애덤스보다 3시간 정도 먼저 죽었는데, 죽기 직전 제퍼슨은 주위에 그 날의 날짜를 물었다고 한다.[97]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망했다. 사실 바로 위에도 나와있지만 제퍼슨은 3시간 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죽은 날은 미국 독립 50주년이었다.[98] 엄밀히 말하면 사망 전날 한 말이라고 한다. 이게 좀 더 간지나는지 자주 인용되기는 하지만.[99] 베토벤이 병상에 누워있던 중 쇼트 음악출판사가 자기가 좋아하는 라임 와인 한 세트를 보냈다고 하자 뇌까린 말. 베토벤은 이 말을 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와인은 베토벤이 죽은 뒤에야 도착했다.[100] 병상에서 혼잣말을 되뇌이던 그에게 작은형 페르디난트가 "모두 널 걱정하여 모였으니 걱정 말거라." 라고 말하자 외친 말.[101] 베토벤을 존경하여 그의 장례식에서 관을 들었던 그는 딱 1년 5개월 뒤에 따라갔다. 가난으로 인해 건강관리는 커녕 밥조차 굶는 일이 허다했고 때문에 베토벤이 죽었을 때 그는 고작 30세였음에도 단 1년 뒤에 사망한 것이다. 여담으로 사후에는 소원대로 베토벤 곁에 묻혔는데 생전엔 알아주는 사람만 알아주는 듣보여서 반대가 있었지만 슈베르트의 후원자 중 하나가 음악계의 큰손이었는데 그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베토벤 못지않게 유명해졌을 사람이고 베토벤이 알아준 사람이니 문제가 없다고 내세워 베토벤 곁에 묻힐 수 있었다. [102] 콜롬비아에서 저격을 당했을 때 남긴 말.[103] 페루와 볼리비아의 대통령. 베네수엘라의 독립 투사이자 시몬 볼리바르의 동료이다.[104] 42살 한창 나이로 다른 연구를 하던 도중에 갑작스럽게 죽었으니 이런 한맺히는 말을 남겼다. 게다가 샹폴리옹은 그 연구를 하다가 얻은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을 해쳐서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에 더더욱 한이 맺힌 것.[105] 로제타 석 해석으로 유명한 프랑스 언어학 및 고고학자.[106] 총에 맞아 죽어갈 때 면회 온 아우 알프레드에게 남긴 유언.[107] 프랑스의 수학자.[108] 공부와 연구에 열중하다가 쓰러져서 혼수상태 와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109] 앙페르의 법칙으로 유명한 프랑스 물리학자.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가 바로 이 사람 이름에서 나왔다.[110] 펠릭스 뒤팡루라는 신부(후일 오를레앙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가 그의 병자성사를 집전했는데, 이때 그가 탈레랑의 손바닥에 기름을 부어 정화하려 하자 탈레랑이 그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했던 말. 주교인 탈레랑이 당시 신부였던 그보다 높기에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손바닥 대신 손등에 기름을 발랐다고.[111] 병원에서 아내에게 남긴 말.[112] 러시아 근대 문학의 창시자로, 아내인 나탈리야 곤차로바(1812-1863)가 프랑스 귀족 조르주 당테스와 염문설이 터지는 통에 그 귀족과 권총 대결을 벌였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사실 푸시킨 본인도 호색한이긴 했다.[113] 아내에게 상술한 말을 한 후 이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114] 미국의 제9대 대통령. 미국의 23대 대통령인 벤저민 해리슨의 할아버지.[115] 미국의 제 7대 대통령.[116] 미국의 제 6대 대통령.[117] 폭풍의 언덕 작가. 병세가 악화되고 있음에도 언니 샬럿이 의사를 부를지 물을 때마다 항상 싫다고 하며 일상을 지속하다가 마지막에야 의사를 부르는 것을 허락했다. 너무 늦었지만.[118] 죽기 몇 시간 전에 이 말을 라틴어로 한 뒤 가슴에 십자가를 놓고 잠들었다가, 이후 사망했다.[119] 의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습니까?' 라고 묻자 남긴 말이라고 한다.[120] 의식불명 상태에서 외친 말이라고 하며, 묘비명에는 이 유언이 적혀있다.[121] 쇼팽은 생전에 생매장에 대해 신경증적인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죽기 몇 시간 전 이 유서를 남겼다. 이 사실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122] 어머니라는 단어가 쇼팽의 조국 폴란드를 뜻한다는 해석도 있다.[123] 자신의 작품 "고리오 영감" 속에 등장하는 의대 수련생.[124] 프로이센 왕국의 지리학자.[125] I, John Brown, am now quite certain that the crimes of this guilty land will never be purged away but with blood. I had, as I now think vainly, flattered myself that without very much bloodshed it might be done.[126] 처형당하기 직전 교도관에게 위 내용을 적은 쪽지를 건내주었다.[127] 사망 전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에게 남긴 유언. 그러나 후술할 아들의 유언을 봐도 짐작하겠지만 나라를 2년만에 말아먹었다.[128] 전사 직전에 외친 말.[129]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54 매사추세츠 지원병 연대 사령관이자 영화 영광의 깃발의 주인공. 워그너 요새 전투 도중 사망했다.[130] 남군 측 저격수 때문에 꼼짝 못 하던 병사들에게 한 말. 이후 바로 왼눈 아래에 저격을 당해 죽었다. 남군 측에 코끼리 사냥꾼이 있었나보다[131]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132] 암살당하던 날 보좌관에게 한 말[133]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에게 남긴 말.[134] 남동생에게 남긴 말.[135] Tell mother, tell mother, I died for my country…useless…useless…[136] 사망하기 전 "내세에 당신이 무엇을 할지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Have you ever pondered by yourself what will be your occupation in the next world)?"라는 질문을 받자 이 말을 남겼다.[137] 아내의 이름이다.[138] 3국 동맹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세로 코라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와중에 신변을 보장해줄 테니 항복하라는 브라질 제국군 총사령관 주제 다 카마라(José Antônio Correia da Câmara) 공작의 마지막 제안을 듣자 칼을 빼들고 총사령관에게 달려들면서 남긴 말.[139] 집 주변을 걷던 중 사망하기 1년 전에도 겪었던 뇌졸중을 다시 겪어 땅바닥에 누워달라는 말을 듣자 남긴 말.[140] 크레이지 호스리 불리는 북미 원주민 추장으로 경찰관의 칼에 찔려 죽어가며 한 말. 여러 곳에서 패러디되었다.[141] 아버지 앨버트 공과 같은 날짜에 사망했다.[142] 죽기 며칠 전 친구 의사에게. 사망 당일에는 조용히 기도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143]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한 러시아의 황제. 하지만 인민주의 혁명가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최후의 날, 그를 노린 첫 번째 폭탄이 터졌지만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택에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부상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문을 열면서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사함을 드러내는 순간 2번째 폭탄이 날아들었다. 심지어 암살자들은 만일을 대비한 3번째 암살자까지 준비해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암살당한 당일 알렉산드르는 그간 반대해왔던 의회 설립에 대해 검토하는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고, 그의 뒤를 이은 황제는 다시 전제정치를 시행했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결국 멸망의 길을 걷는다.[144] 인터넷 상에서는 다윈이 죽기 전 레이디 호프라는 사람과 이야기 하면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받아들였다는 고인드립성 루머가 떠돌고 있다. 1915년 레이디 호프(Elizabeth Hope, 1842.12.9 . - 1922.3.8)는 자신이 다윈이 사망하기 전 그와 이야기를 나눴고 그가 사망 전 자신의 진화론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다윈의 가족들은 당연히 이런 고인드립성 헛소리에 반박했지만 이 루머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창조론 신봉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현재도 '찰스 다윈의 유언'이라고 검색하면 대부분 이 루머가 나온다. 도시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여담으로 죽기 며칠 전인 아내에게 말했던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I am not the least afraid to die)'는 유언이 아니다. 진짜 유언은 4월 18일 산책 도중 아내에게 남긴 이 말이다.[145] 바그너는 생의 말년에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다. 마지막 유언을 하기 전에 바그너는 또다른 작품을 쓰기 위해서 간단한 소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도중에 갑자기 심장마비가 찾아왔고, 위에서 언급된 말을 하고 사망하게 된다. 여기서의 아내는 코지마를 의미한다.[146] "유언으로 생각해둔 말이 있냐"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이 말을 했다는 근거가 없다.[147] 그리고 정말로 그의 시대가 왔다.[148] 손녀에게[149] 무법자로 살면서 교수형이나 총에 맞아죽는 최후가 아닌 침대에서 곱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한 말이다.[150] OK 목장의 결투 용의자. 사인은 심장마비.[151] 동생 테오에게 남긴 말.[152] '그것'은 '창(窓)'을 말한다.[153]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154] 우유 한 모금을 주었을 때.[155] 죽기 전에 마지막에서 2번째로 한 말은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좋겠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156] 자신의 글라이더를 타다가 사고가 났는데 사고가 난 며칠 뒤에 이 말을 남기고 죽었다.[157] 최초로 안전하게 글라이더를 탄 사람.[158] 그의 딸을 뜻한다.[159] 일설에는 "나는 공(公)의 묘지에 매장되고 싶지 않다. 내가 프로이센 왕 빌헬름 대왕의 충실한 충복이었다고 묘석에 새겨 다오." 라고 유언했다고 하는데 빌헬름 2세와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빌헬름 1세의 신하임을 명기하고 싶었을 것이란 해석이 있다.[160] 아나키스트 암살자에게 심장을 찔린 뒤 과다출혈로 사망하기 전에.[161] 미국의 정치가로 합리주의자로 유명하며, 성경을 비난하여 당대에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호탕한 성격으로 인기를 모으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죽을 때 기도를 한다니 얼마나 웃겼을까.[162] 1900년은 19세기에 속하며 20세기는 1901년부터이다.[163] 니체가 미쳐서 '나는 신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 니체는 자신의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임종을 지키는 옆에서 동생의 이름만 읊조렸을 뿐이다.[164] 바로 위의 매킨리를 저격한 사람.[165] 전기의자에 묶일 때 남긴 말이다.[166] 미국 정치인. 헤이마켓 사건 주동자들의 전면 사면을 주장했다.[167] 스스로 산소 마스크를 벗으며 한 말.[168] 미국의 정치가.[169] 아내가 따라준 샴페인을 마시고 한 말.[170] 자신의 병세가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한 말.[171]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극작가.[172] 서양인이지만 한국을 위해 공헌한 일이 상당하고 한국 땅에 묻힌 인물이다.[173] 심장병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일을 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174] 결국 침대에 눕고서 후의 조지 5세가 되는 아들로부터 자신의 경주마가 경마에서 이겼다는 말을 듣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하고 잠이 든 후 잠시 뒤 사망했다고 한다.[175] 아문센 탐험대 다음으로 남극점을 밟은 스콧 탐험대의 대원. 눈보라 속에 고립된 가운데 다리에 동상을 입어 걸을 수 없자 탐험대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텐트를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시체는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의 찢어진 침낭(다리가 불편해서 드나들기 쉽게 하기 위해 한쪽을 일부러 주머니칼로 찢어 두었다고 한다)은 지금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76] 사망 전 탐험일지에 마지막으로 쓴 내용.[177] 남극점을 탐험하다 조난을 당해 사망.[178] 1912년 4월 15일 밤 기울어가는 배에서 선원들에게 한 마지막 말. 이 말을 한 후 그는 조타실로 들어가 끝내 배와 함께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179] 부인에게 남긴 쪽지.[180] 자신의 계획에 대해 남긴 말. 실제로 슐리펜은 죽기 전까지 계획을 머릿속으로나마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었다고 한다.[181] 미리 적어둔 유서.[182]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에 맞고 의식을 잃기 전 운전기사 레오폴드 로이카에게 속삭이며.[183]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하기 직전에 쓴 일기의 내용이다.[184]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 보병 중위.[185] 로댕은 말년에 정신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요양받던 신세였다. 곁에 있던 간호사는 "그래, 당신은 신이야. 하지만 똥오줌 싸는 신이지."라고 대답했고, 그 대답을 들으면서 사망했다고 한다.[186] 자결 전에 남긴 말. 그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적군에 가담한 카자크들에 대해 남긴 유언이었다.[187] 자신을 죽인다고 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대꾸한 말. 이 말을 한 직후 일가족과 함께 총살당했다.[188] 빅토르 세르주의 의견.[189] 취침 전 하인 제임스 아모스에게 한 말. 이 말을 남기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숨져 있었다.[190] 우익 민병대에게 끌려가 처형을 기다리는 중에 민병대의 지휘관이 "당신이 로자 룩셈부르크 부인 맞습니까?"라고 묻자 그건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시죠."라고 답하고 다시 "수배자 사진을 보니 당신이 틀림없군요"라는 말에 위와 같이 답했다. 그리고 이후 침묵을 지키다가 살해당함.[191] 살해당하기 전날 쓴 글의 마지막 구절.[192] 죽기 전날 밤 아내에게 한 말.[193] 정말 북극점에 도달했는지의 논란과 소송에 시달린 끝에 죽기 며칠 전까지 혼수상태에서 저 말을 중얼거렸다. 이후 1996년에 피어리는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했음이 확정되었다.[194] 1922년, 사우스조지아의 그리트비컨에서 쓰러진 후 병상에서 의사이자 친구인 매클린에게 한 질문. 이 질문에 매클린은 '보스는 제 말에 찬성하지 않겠지만, 술을 끊어야 합니다.'라고 답변했고, 몇 분 후 사망했다.[195] 사망 전 아내가 들고 있던 십자가를 보며 남긴 말.[196] 총살형을 집행하려고 늘어선 군인들에게 한 말이었다.[197] 아일랜드 작가. 대표작으로 "모래톱의 수수께끼"가 있다. 신페인 당원이기도 했다. 아일랜드 내전 도중 아일랜드 자유국에 의해 처형되었다.[198] 프랑스의 배우.[199] 암살자의 총에 맞은 직후 동료를 움켜잡으며.[200] 자신의 결핵이 남에게 옮겨짐을 부단히 두려워하던 그는 머리를 떠받쳐주던 친구를 여동생으로 착각해서[201] 러시아의 시인, 이사도라 덩컨의 남편. 아내의 재능을 질투, 만취한 채 손목을 그어 피로 유서를 쓰고 목을 매 자살하였다.[202] 백혈병에 걸린 줄 모르고 애인에게 줄 장미를 모으다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는데, 장미 가시에 찔렸다는 사실 때문에 파상풍으로 죽었다고 알려졌다. 특히 그의 묘비명 때문에 파상풍 사망설이 더 널리 퍼졌다.[203] 차를 타기 전 사람들에게 한 말.[204] 전설적인 무용수. 목에 두른 스카프가 차 뒷바퀴에 휘말려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205] 처형 직전에 외친 말. 하지만 알렉산드르 오를로프의 기록에서만 나오는 말이고 실제로 이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206] 사회혁명당 출신의 체카 요원. 튀르키예에서 트로츠키를 만나고 왔다가 스탈린에 의해 당원들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체포, 처형되었다.[207] 죽어서도 독일을 경계하겠다는 의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슷한 동기의 유언이다.[208] إِنَّا لِلَّهِ وَإِنَّآ إِلَيْهِ رَٰجِعُونَ (Inna lillahi wa inna ilayhi raji'un). 죽음에 관한 이슬람적인 관점을 담은 말로, 장례식의 인사로 많이 쓰인다.[209] 의식을 잃기 전 아내에게 한 말. '저곳'이 사후 세계를 뜻했는지 창문을 통해 그가 본 풍경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210]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211] 죽기 전 자신이 무대에 올린 공연을 상상하며 외친 말.[212] 미국의 연극 제작자.[213] 처형당하기 전에 외친 말.[214]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 폴 두메르를 암살한 인물. 동기는 백군을 무시한 협상국에 대한 복수였다고 한다.[215] 집에 일하러 온 로버트라는 목수에게 아침인사를 건네고 얼마 후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사인은 관상동맥혈전. 다만 죽기 며칠 전에 친구에게 남겼다는 "나는 더 이상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네(I feel I no longer fit in with these times)"가 더 유언같은 느낌을 풍겨서인지 이 말이 잘 알려져 있다.[216] 목사에게 한 말.[원문] You give me electric chair. I no afraid of that chair! You one of capitalists. You is crook man too. Put me in electric chair. I no care! Get to hell out of here, you son of a bitch … I go sit down all by myself… Viva Italia! Goodbye to all poor peoples everywhere!… Lousy capitalists! No picture! Capitalists! No one here to take my picture. All capitalists lousy bunch of crooks. Go ahead. Pusha da button![217] 전기의자에 앉으며 남긴 말. 문법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라 영어가 서툴러서 그런 듯하다.[218]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암살하려 한 인물.[219] 주사를 놓으려는 의사에게.[220] 주치의가 고통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안락사 시켰다.[221] 아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유언 중 하나다.[222] 러시아 측 증언에 의하면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한다.[223] NKVD 위원장. 대숙청을 주도했으나 본인도 자신이 숙청한 전임자처럼 한직으로 밀려난 뒤 숙청당했다.[224] 1940년 8월 19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의 얼음 깨는 망치(혹은 도끼)에 맞고 그의 비명을 들은 경호원들이 라몬을 죽이려 하자 했던 말.[225] 2월 27일 죽음을 직감하고 쓴 듯한 유언장.[226] 자살하기 전 남편에게 남긴 유서.[227]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본부에서는 함교 인원들이라도 데려오려 했으나 부하들과 끝까지 싸우기 위해 거부했다.[228]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낙서가 적힌 곳은 스탈린그라드(現 볼고그라드)가 아니라 벨라루스의 브레스트 요새다.[229] Stjepan Filipović,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에 대항했던 크로아티아인 빨치산으로 추축군에게 잡힌 뒤 교수형을 당했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두 팔을 펼치고 당당하게 만세를 부르는 자세를 취한 것이 사진으로 남았다. 후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죽기 직전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다.[230] 미국 배우. 손녀로 드루 배리모어가 있다.[231]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해병대 병사. 과달카날 전역에서 경계를 서던 중 침투를 시도하던 일본군 부대와 조우했다. 홀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지휘관을 사살해 적을 쫓아냈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232] 고국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233] 역사학자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전쟁 발발 당시 스트라스부르 대학 교수로 53세였는데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마자 대위로 참전했다. 됭게르크 철수 이후 영국에서 제대하여 귀국한 이후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1944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죽기 전, 16살의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걱정하지 마라, 얘야. 아프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234]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맨 마지막 순서에 총살당할 때 외친 말. 정확히는 마지막 처형 순서는 아니었지만 그의 부하인 대위가 그의 앞으로 뛰어와 대신 맞고 슈타우펜베르크가 마지막으로 총살당했다.[235] 이 말을 하고 박격포에 맞아 사망.[236]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한 해병. 일본군의 야습에 당해 총검으로 난자당하다가 전우에게 구조되었지만 이내 사망.[237] 이 말을 하고 의자에서 앞으로 굴러떨어져서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 사망.[238] 루르의 산업시설을 지키기 위해 국민돌격대에게 제대장을 발부하고 휘하의 장병들에겐 무전 연락으로 자유롭게 항복해도 좋다는 명령. 이 말을 한 날과 사망일은 차이가 있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 가장 유명하기에 기술한다.[239] 자살 전 휘하 참모 빈리히 베어(Winrich Behr) 소령에게 남긴 말. 이후 베어 소령이 뒤스부르크 방면으로 정찰을 가겠다는 것을 수락한 게 마지막 대화였다고 한다.[240] 하지만 무솔리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유언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낮다고 한다.[241] 남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최악으로.[242] 종전 후 영국군이 그를 체포한 후, 신분이 드러날 것을 예상하고 한 말. 이 말을 한 후 입에 숨겨둔 청산가리 캡슐을 물어 자살했다.[243]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의식을 잃기 전에 남긴 말.[244] 루마니아의 전범으로, 40만명의 유태인 및 소련인들을 학살한 혐의로 이온 안토네스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245] 영역판은 My last wish is that Germany realize its entity and that an understanding be reached between East and West. I wish peace to the world.[246] 죽은 독일 군인을 뜻한다. 실제로도 카이텔은 무능한 아첨꾼이었을지언정, 자신의 부하들에게만큼은 아버지같이 자상한 상관이었다. 똥군기 같은 것으로 부하들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말단 사병들의 복지까지도 직접 챙겨주었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자 수많은 장병들이 탄원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의 인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247] 영역판의 경우 I call on God Almighty to have mercy on the German people. More than two million German soldiers went to their death for the fatherland before me. I follow now my sons — all for Germany![248]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냐는 질문을 받고 남긴 말.[249]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250] 인민공화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하기 직전에 남긴 말.[251]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고, 한국에서 사망했으며 한국의 묘지에 안장되었다.[252] 282 고지 전투 당시 아가일 앤 서덜랜드 하이랜더 연대 1대대 지휘관. 해당 전투에서 전사. 연합뉴스 관련 기사[253] 흔히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를 조지 버나드 쇼의 유언 혹은 묘비명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참고)[254] 한국명 방일은(方溢恩). 초대 주한 교황청 대사.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평안도에서 사목하다 1949년 주교로 서품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서울에 남았다가 7월에 체포되어 납북되어 북한의 퇴각과 함께 수용소를 전전하다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춘천 함락 직후 연행되어 같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1953년 4월 생환한 춘천교구장 토마스 퀸란 몬시뇰(한국명 구인란(具仁蘭), 1955년 주교 서임)이 번 주교의 임종을 지켜봤다.[255] 데이지는 제시의 아내였다.[256] 미군 내 인종 차별 정책이 철폐된 이후 처음으로 해군 전투비행사가 된 흑인이었으며, 6.25 전쟁에서 최초로 전사한 미국 흑인 해군 장교이다. 장진호 전투 당시 전투기를 몰던 중 중공군의 공격에 추락, 다리에 비행기 잔해가 박히고 난 후 의식을 잃고 죽었다. 유해를 발견할 수 가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과다출혈과 동상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257] 의사가 곧 죽는다고 말하자 한 대답.[258] 사형당하기 전에 남긴 말.[259] 희곡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의 저자로 유명하다. 아버지가 순회공연을 다니는 배우였기에 호텔에서 태어났고, 본인 스스로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돌았기에 결국 호텔 투숙 중 사망했다.[260] 영문 : I hope the exit is joyful and I hope never to return[261] 유서[262] 수양딸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실제 사망 직전에도 유언이 있었다고 하나, 이는 독일어로 하였고 이를 임종을 지키던 미국인 지인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묻혔다는 야사가 있다.[263] 마릴린 먼로와 <부적응자(The Misfits)>를 촬영하던 중 죽기 전에 카메라 앞에서 남긴 의미심장한 대사. 먼로의 '어둠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죠?'에 대답하는 대사였으며 이 장면이 게이블의 마지막 씬이 되었고, 이 촬영 후 열흘 뒤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덧붙여 이 <부적응자>라는 영화 제목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도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영화는 클라크 게이블뿐만 아니라 마릴린 먼로의 유작이기도 하다.[264] 사형 직전 외쳤던 유언. 세월이 지나 복권되면서 결국 튀르키예에선 아드난 멘데레스 대학까지 세워져 그의 유언이 이뤄졌다.[265] 튀르키예의 정치가이자 총리. 1960년 쿠데타로 축출되어 재판 끝에 국고횡령과 낭비 및 부패 혐의로 교수형당했다.[266] In einem kurzen Weilchen, meine Herren, sehen wir uns ohnehin alle wieder. Das ist das Los aller Menschen. Es lebe Deutschland. Es lebe Argentinien. Es lebe Österreich. Ich werde sie nicht vergessen.[267]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하기 전에.[268] 요한 복음서 21장 15절 - 19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요한 23세는 의식을 잃기 전 이 구절을 또렷하게 2번 말했다.[269] 댈러스에서 카 퍼레이드를 할 때 많은 환영 인파를 보고 케네디의 앞에 앉아 있던 텍사스 주지사 부인이 케네디에게 "대통령님. 댈러스가 대통령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말에 한 대답. 이 말을 한 몇 초 후 저격당했다.[270] I'm so bored with it all.[271] I am ready to meet my Maker. Whether my Maker is prepared for the great ordeal of meeting me is another matter.[272] 연설을 시작하기 직전에 청중석에서 갑자기 "검둥아! 내 주머니에서 손을 빼!"라는 외침과 함께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청중이 혼란해지자 이들을 진정시키면서 한 말. 혼란을 진정시키다가 암살범에게 저격당했다.[273] I said how we are gonna get to the Moon if we can't talk between two or three buildings?[274] 아폴로 1호의 사령관.[275] Hey(Flames)! Hey! We've got a fire in the cockpit![276] 아폴로 1호의 시니어 파일럿.[277] We have a bad fire! We're burning up!!![278] 이 유언을 마지막으로 사령선의 교신이 끊겼다.[279] 아폴로 1호의 비행사.[280] We've reached one of our phase lines after the fire fight and it smells bad─meaning it's a little bit suspicious…Could be an amb─[281] 베트남의 전장에서 테이프에 녹음을 하던 중 지뢰를 밟기 전에 한 말.[282] 유명한 종군기자이자 역사가, 정치학가, 인도차이나 전문가였다.[283] Da jitt et nix zo kriesche! 임종 직전 슬퍼하는 딸에게 남긴 유언. 뭔가 네덜란드어 같지만 쾰른 지방 사투리이다. 표준 독일어로는 Da gibt es nicht zu weinen.)[284]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분위기가 기존의 도련님 이미지였던 비틀즈와 맞지 않게 앨범 커버가 굉장히 화려했던지라 흥행을 망칠까봐 걱정돼서 한 소리였다고 한다. 다행히 엡스타인의 이런 걱정과 반대로 페퍼 상사는 대성공을 넘어, 현재는 비틀즈는 물론이고 콘셉트 앨범을 대표하는 명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285] 커피에 설탕을 타며 했던 말. 이 말을 남긴 그 날 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86] 체 게바라를 쏜 병사는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다 못해 투신자살했다.[287] 총에 맞기 직전 호텔 발코니에 서 있었는데 발코니에 함께 서 있던 벤 브렌치라는 사람에게 건넨 말이다. 벤은 그날 저녁 킹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음악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288] I've always loved my wife, my children, and my grandchildren, and I've always loved my country. I want to go. I'm ready to go. God, take me[289] 영국계 캐나다인이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유언은 그의 묘비에도 새겨졌다.[290] 사망 몇 분 전 아내에게 남긴 말.[291] 인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제대로 유언을 들은 사람이 없다.[292]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이 유언을 주제로 곡을 쓴 적이 있다. Band on the Run 항목 참고. [293] 쿠데타군에 의해 대통령 집무실이 점거되기 직전에 남긴 라디오 연설문.[294] In keeping with the WXLT practice of presenting the most immediate and complete reports of local blood and guts news, TV 40 presents what is believed to be a television first. In living color, exclusive coverage of an attempted suicide.[295] 뉴스가 시작된 8분 후 갑자기 대본을 무시한 채 위의 내용을 말한 뒤 수만 명의 시청자가 TV를 통해 지켜보는 가운데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를 쏘아 죽었다. 그녀의 '생방송 자살'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296] 처형 전날 아들에게 보낸 편지.[297] 처형 전날 부모에게 보낸 편지.[298] 자신의 가정부가 소리내어 기도를 하자.[299] 애인의 잠들지 말라는 부탁에 남긴 말.[300] That was a great game of golf, fellers[301] 골프광 가수.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홀을 돈 다음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302] 유서이다.[303] 자살 직전 녹음한 테이프의 내용.[304] 화산학자로써,1980년 5월 18일 폭심지로부터 약 6Km 정도에 위치한 기지에서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측면분화로 인한 폭발을 무전으로 보고하다 화산쇄설류로 인해 휩쓸려 사망하고 말았다.향년 31세.[305] 총에 피격을 당한 후 경찰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306] 아들 지미에게 남긴 말이다. 한국에서는 '내가 그대를 위해 자리를 준비해 놓겠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멋진 말이기는 하지만 밥 말리가 한 말이 아니다.[307] 빈센트 친 사건의 피해자인 중국계 미국인. 자신을 일본인으로 착각한 두 백인 해직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범인들은 벌금형만 받고 풀려나 논란이 되었으며, 그 중 1명은 2010년대에 다시 세상에 나와 잘못을 시인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다른 1명은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308] 챌린저 호 승무원. 이 마지막 교신이 종료된 지 3.1초 후 챌린저호는 로켓 고장으로 폭발해 딕 스코비를 포함한 승무원 7명이 전원 사망했다.[309] 사망 전 말을 할 수 있을 때 남긴 말.[31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선임연구원이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희생자 중 한 명.[311] 미국의 가수. 당시 TV로 생중계 중이던 자유의 여신상 복원 기념 행사를 보며 아내에게.[312] Don't, don't, don't, this will hurt someone.[313] 사실 당시 상황은 생방송으로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에 자살 직전에 남긴 말로, 그 후 총을 구개에 발사하며...[314] PSA 1771편 사건의 주범. 자신을 해고한 항공사에 앙심을 품고 같은 계열사의 비행기를 하이재킹해 추락시켰다. 이 항공기에는 버크를 포함해 43명이 타고 있었지만 전부 사망했다.[315] 짐 콜먼, 테드 번디의 변호사.[316] 프레드 로렌스, 감리교 목사. 번디가 처형되기 전 마지막 기도를 해줬다.[317] Jim and Fred, I’d like you to give my love to my family and friends.[318] It's too late. We can't win, they've gotten too powerful.[319] 미국의 아나키스트.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에.[320]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 울부짖으면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미처 1절도 다 부르기 전에 형이 집행되었다. 사실 부검 결과에 따르면 차우셰스쿠의 직접적 사인은 총에 맞기도 전에 (공포 탓인지) 심장마비가 온 것이었다고 하지만, 워낙 그에 대한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의 분노와 증오가 컸기에 총살형을 집행한 군인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차우셰스쿠와 그 아내 엘레나를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고.[321] 한국에선 자신의 시체를 초콜릿, 와인, 그리고 펜과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마지막 유언은 안락사를 진행하는 간호사가 너무 아프게 주사를 놓아서 반사적으로 욕을 한 것이라고 한다. 아동문학계의 거장이 유언으로 욕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322] I'm not a human, this is just a dream and soon I will awake. It was too cold and the blood kept clotting, plus my new knife is too dull. If I don't succeed dying to the knife I will blow all the shit out of my skull.[323] 메이헴의 보컬. 같이 동거하고 있던 유로니무스와의 불화, 미래에 대한 회의감, 고향에 대한 향수, 본인이 앓고 있던 조울증이 겹쳐 1991년 4월 5일 칼과 총으로 자살했다.[324] 실종 전 몇몇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5월 10일에 도착했으며, 이후 5월 17일에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325] Following the enormous conjecture in the press over the last two weeks, I wish to confirm that I have been tested HIV positive and have AIDS. I felt it correct to keep this information private to date to protect the privacy of those around me. However, the time has come now for my friends and fans around the world to know the truth and I hope that everyone will join with me, my doctors and all those worldwide in the fight against this terrible disease.[326] 사망 24시간 전에 매니저인 짐 비치를 통한 에이즈 감염 공식 발표 전문[327] 친구에게 전화로 남긴 말. 그 전에 목사가 방문했을 때는 전 당신의 상사와 약속 시간을 잡아놨어요. 라고 했다고 말한다.[328] Tevfik Esenç, 지금은 사어가 된 우비흐어의 마지막 원어민이며, 글에서 언급된 조르주 샤라치제 교수는 테브피크 에센치의 제안으로 우비흐어 음성기록을 남기는데 도움을 준 사람 중 한 명이다.[329]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부이자 대표적인 안티마피아 운동가. 아이들과 힘 없는 사람들을 마피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도록 돕다가 시칠리아의 마피아 보스인 그라비아노 형제의 사주로 살해당했다. 이 유언은 풀리시 신부를 쏜 살바토레 그리골리가 나중에 죄를 자백하면서 증언한 것이다. 풀리시 신부는 2013년 5월 25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순교자로서 시복되었다.[330] 살해당한 날이 본인의 생일이었다.[331] 본문장은 그의 유서 중 일부로, 전문은 인터넷에 검색해 읽을 수 있다. 이 대목은 캐나다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닐 영의 노래 Hey Hey, My My 중 한 부분이다.[332] 유서다.[333] 미국의 목수. 제프리 메이즈라는 남성를 찔러 죽인 혐의로 사형되었다. 이 말은 약물주사형으로 사망하기 전에 남긴 말이다.[334] 이는 다머를 살해한 크리스토퍼 스카버의 증언인데, 스칼버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기에 신빙성은 낮은 편이다.[335] 원래는 욕이 있었는데 변호사가 뺐다고 전해졌다.[336] I really enjoyed being with you for the past 13 shows and I hope to see you again very soon. If you get a chance stop by Branson, Mussouri, say hello to us. Until next time, I'd like to wish each and every one of you happy painting, God bless, and we'll seen you soon.[337] 투팍이 총에 맞았을 때 누가 쐈냐고 묻고 있는 어느 경찰관에게 남긴 대답.[338] <잠수종과 나비>의 저자. 전신마비 상태에서도 왼쪽 눈 깜빡임으로 책을 집필했다. 그는 책 발간 이후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339] 2000년은 20세기에 속하며 21세기는 2001년부터이다.[340] 우리에겐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더 유명한 피너츠의 작가. 피너츠의 마지막 연재분에서.[34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의 자신의 사무실에서 전화로 911에 구조를 요청하던 중 남쪽 빌딩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남긴 말. Hello! We're looking, we're looking over the Financial Center. Three of us, two broken windows ─ Oh god! Ohh!![342] 당시 전화내용 (한글번역)[343] 9.11 테러 희생자.[344] 유나이티드 175편 탑승자로, 비행기가 WTC에 출동하기 전 아내의 음성사서함에 남긴 마지막 메세지. 9/11 이후 이 음성메세지가 방송되어 미 전역에 화제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9.11 테러 희생자들의 최후의 순간을 언급할 때 자료로 종종 등장하고 있다.[345] 9.11 테러 희생자.[346] 2001년 다큐멘터리 "맹점 : 히틀러의 비서(Blind Spot)"에 참여했으나 2002년 2월 9일 시사회에는 건강이 심각하게 안 좋았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시사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카메라맨이 병원으로 가서 융에에게 시사회가 잘 끝났다고 알려주자 이 말을 남기고 1시간 뒤에 사망했다.[347]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비서.[348] 지구 대기권 진입 직후 남긴 교신으로, 우주센터에서 "우리는 당신의 타이어 압력 메시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으며 당신들의 마지막 교신을 듣지 못했다" 라는 교신을 보내자 여기에 답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대기권 진입 직후 우주왕복선이 공중분해되며 끝내 교신내용을 말하지 못했고, 허즈번드 선장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은 사망했다.[349]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선장.[350] 2003년 2월 7일 자신의 부모에게 발송한 이메일.[351] 미국의 대학생으로, 국제연대운동 회원으로 활동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돕기 위해 봉사활동을 갔으며, 2003년 3월 난민촌을 파괴하려는 이스라엘군에 맞서다가 불도저에 깔려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352] 2014년 4월 28일부로 시성되었다.[353] 미국의 기자. 곤조 저널리즘의 창시자이자 괴짜 작가로 유명했으며, 영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럼 다이어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해당 유언은 1978년 톰슨이 BBC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며, 이후 톰슨이 2005년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톰슨의 절친이던 영화배우 조니 뎁과 빌 머레이가 장례 비용을 전액 지불하여 그의 유골을 47미터 높이의 탑에서 대포로 쏘는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기사[354] 몬테네그로의 독립 소식을 듣고 남긴 말.[355] 미국 토크쇼 마이크 더글러스 쇼의 진행자.[356] 교수대를 보고서 한 말.[357] 자신의 부고 동영상에서 한 말. 동영상을 미리 찍은 후 자신이 사망하면 인터넷에 올리라고 했다 한다.[358] 미국의 유머 칼럼니스트.[359] 미국 출신의 소년으로 11세라는 어린 나이에 시한부 판정을 받고 2주밖에 남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되었었다. 직후 어머니가 남은 시간동안 하고 싶은 게 뭔지를 물어보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거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노숙자들의 모습을 보고 "저들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라고 말하였다. 직후 브렌든의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국 전역의 사람들의 후원으로 2주 동안 약 3,500여명의 노숙자들에게 샌드위치가 무상으로 지급되었다. 브렌든은 위의 인터뷰를 한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360] 자살 하루 전 차보 게레로에게 PPV에 참석할 수 없다며 보낸 문자 메세지.[361] 자살 직전 동료인 차보 게레로와 스캇 암스트롱에게 보낸 문자 메세지.[362] 사망 이후 조사과정에서 벤와 옆에 놓인 성경책에서 발견된 첫번째 아내에게 보내는 쪽지.[363] 2009년 5월 10일 아침 9시 5분에 마지막으로 녹음된 마이클의 음성[364] Lara, papa kommt[365] 사망하기 하루 전날 자신을 찾아온 주치의에게 한 말이다.[366] Oh Wow! Oh Wow! Oh Wow![367] 리비아 내전의 마지막에서 고향 시르테가 함락되자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 하수관에서 끌려나와 생포되었다가 연행되는 과정에서 총격을 당해 사망하였다.[368] 미국의 종군기자. 안대 문서에서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리아 내전 현장을 취재하다가 시리아 정부군의 포격으로 죽었다.[369] 로빈 깁의 아내.[370] 기사마다 다르다. 아내 드위나의 말로는 첫 번째이고, 대부분 기사들은 두 번째를 인용했다.[371] 여아 성폭행 살해범. 자신의 사형 집행을 참관하려고 모인 사람들을 보고.[372] We will be back in five minutes.[373] Mocht hij verdwijnen, zo ziet hij d'r uit.[374] 네덜란드 국적의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탑승 승객이었으며 비행 출발 전 게이트에서 해당 항공기 사진과 같이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게시글을 올린 5시간 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상공에서 친러 반군 미사일에 격추되어 코르 판을 포함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해 그의 마지막 페이스북 게시글이 되었다. #[375] 죽기 전 유언은 아니고 마지막으로 트위터에 남긴 말.[376] 역시 마지막 트윗으로 남긴 말이다.[377] Joseph Robinette "Beau" Biden III. 미국의 정치인 조 바이든의 장남이자 전직 델라웨어 주 법무관.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조 바이든이 2020년 대선에 출마한 이유도 아들과 한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 이후 바이든은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접전 끝에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며 아들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켰다.[378] ORLANDO!! Come out to the show tonight at the Plaza Live! Starts at 7:30![379] 공연을 끝내고 팬 사인회 중 괴한의 총격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세상을 떠났다.[380] 처형 영상을 찍던 반군들이 "동료들에게 경찰관을 그만두라고 전해라." 라고 명령하자 한 말.[381] 러시아 연방 소속국인 다게스탄 공화국의 경찰관. 7월 10일(현지시간) 사촌 동생과 함께 숲에서 캠핑을 즐기다 다게스탄 반군에게 붙잡혔다. 반군은 소지품을 검사하면서 그의 경찰 신분증을 발견했으며, 그들은 누르바간도프를 즉결 처형하였다. 그후 러시아군이 사살한 반군에게서 동영상을 입수하여 이 일이 알려지게 되었다.[382] 2017년 포틀랜드에서 발생한 열차 칼부림 사건의 희생자. 당시 열차 안에서 흑인과 무슬림 소녀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내뱉던 백인우월주의자 제레미 크리스천(Jeremy Chrisitian)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크리스천이 휘두른 칼에 맞아 사망했다. 칼에 맞아 쓰러진 뒤 지혈해주던 승객 중 1명에게 이 말을 남겼고, 그 후 바로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383] 해당 인물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스탠 리가 창조한 대표적인 히어로 스파이더맨이라고 추정하고 있다.[384] 사망 이틀 전 친한 후배이자 전직 마블 코믹스 편집장인 로이 윌리엄스 토머스 주니어에게 남긴 말. 사후 스탠 리의 트위터에 그를 상징하는 문구인 'Excelsior'가 올라왔지만 해당 트윗은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고 한다.[385] 아들인 조지 W. 부시의 "사랑한다"는 말에 대한 응답.[386] 실종되기 전에 비행기에서 남긴 말. 다만 이때는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이었고, 장난식으로 말하는 투였다.[387]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 테러의 희생자이다. 왼쪽은 테러범에게 한 말.[388] 동료 배우인 조시 개드에게 생전 마지막으로 보냈던 문자메시지 내용이다.[389] 브콘탁테에 올린 마지막 글[390] "Me siento mal"[391]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사한 러시아 연방군 병사. 자세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392] 심한 폐질환으로 올초부터 두 번씩 사망설이 돌자 이렇게 트윗을 올렸다. 하지만 이 트윗을 올린 지 이틀 만에 증상이 악화되어 정말 사망했고, 이것이 고인의 생전 마지막 트윗이 되었다.[원문2] Hello, everyone. Technoblade here. If you're watching this, I am dead. So let's sit down, and have one final chat. My real name is Alex. I had one of my siblings call me Dave one time in a deleted video from 2016, and it w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pranks we've ever done. Thousands of creepy online dudes trying to get overly personal, going, 'Oh, hey, Dave, how's it going?' Sorry for selling out so much in the past year, but thanks to everyone that bought hoodies, plushies, and channel memberships. My siblings are goin' to college—well, if they want to. I don't wanna put any dead-brother peer pressure on them. But that's all from me. Thank you all for supporting my content over the years. If I had another hundred lives, I think I would choose to be Technoblade again every single time, as those were the happiest years of my life. I hope you guys enjoyed my content, and that I made some of you laugh. And I hope you all go on to live long, prosperous, and happy lives. Because I love you guys. Technoblade out.[393] 이 글은 사망하기 8시간 전에 남긴 편지글이며, 사후 다음날 사망 전에 찍은 영상을 통하여 공개되었다.[394] 다만 한국에서 한국어로 활동하는 인물이다.[395] 러시아의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에 속했던 용병.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전과자 출신이며 러시아 측에 참전하였다가 우크라이나에 투항하여 협조한 뒤 바그너 그룹에 의하여 납치당하고 얼마 뒤 처형당했다. 처형당한 당일 바그너 그룹에 의하여 해당 음성이 담긴 비디오가 촬영되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서 있던 남성이 휘두른 슬레지해머에 머리를 수차례 가격당하여 사망했다.[396] 2022년 이란 시위 참가자였으며, 시위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관련 기사[397] Amor, amor e amor, para sempre.[398] Слава Україні! 우크라이나군의 경례구호다.[399] 우크라이나군의 저격수였으며, 우크라이나 전쟁 도중 러시아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처형 당시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운 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이라는 말을 남기고 향년 42세의 나이로 총살당했으며, 처형 영상이 SNS상에 유포되며 화제가 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국에서 유족과의 대화, 사진과 영상 분석, 법의학 검사 등을 통해 그의 신원을 밝혀냈으며,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마치예우스키에게 '우크라이나의 영웅' 칭호를 수여하였다. 관련 기사[400] Signore, ti amo![401] Important win for the team
Happy to be on the scoresheet 🙏[402] 2023년 2월 6일 SNS에 올린 마지막 글. 이 글을 올리고 몇 시간 뒤 일어난 지진에 의해 사망했다.[403] 미국의 목사. 20세기 기독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사망 당시 나온 기사
Happy to be on the scoresheet 🙏[402] 2023년 2월 6일 SNS에 올린 마지막 글. 이 글을 올리고 몇 시간 뒤 일어난 지진에 의해 사망했다.[403] 미국의 목사. 20세기 기독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사망 당시 나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