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매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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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로서 포로 생활을 했고,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오랫동안 미 의회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버락 오바마 당시 후보와 대결했던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자이기도 했다.
2. 생애[편집]
갓난아기 시절 할아버지 존 매케인 시니어(당시 미 해군 대령) 품에 안겨 있는 사진. 옆에 아버지 존 매케인 주니어도 앉아 있다.
도쿄에서 정박 중에 평화롭게 만난 매케인 시니어(중장)와 주니어(중령). 이 사진은 9월 2일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이 이뤄진 그 날에 찍혔는데, 사실 매케인 제독이 대전기에 고령임에도 너무 무리를 했던 탓에 체중이 100파운드(45kg 정도) 선까지 내려갈 정도였음에도 윌리엄 홀시가 항복문서 조인식에 참가하라고 붙들어맨지라 몸에 무리가 많았다고 한다. 결국 4일 후 매케인 제독은 미국으로 돌아간지 얼마 안되어 캘리포니아주의 본가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의 할아버지 존 매케인 1세(John S. McCain, Sr.)는 52세의 나이에 해군 조종사 자격을 취득한 뒤 태평양 전쟁 직전에 소장으로 태평양함대 정찰군 항공사령관을 맡았고, 전쟁이 일어난 뒤 남태평양 항공사령관, 해군본부 항공국장을 역임했으며, 중장으로 진급한 뒤에는 해군본부 항공참모부장, 제38.1기동전대장, 제38기동부대장을 맡았고, 사망 후인 1949년에 대장 계급이 추서되었다.
아버지 존 매케인 2세(John S. McCain, Jr.)는 태평양 전쟁 당시에 거널함과 덴투다함의 함장으로 근무했고[2] , 전후에는 해군본부 인사국 기록부장, 세인트폴함 부장, 수중전연구개발국장, 제6잠수함전대장, 몬로비아함 함장, 알바니함 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했고, 해군장관실 의회연락단장, 제2상륙단장, 해군본부 공보국장[3] , 대서양함대 상륙군사령관[4] 을 역임한 뒤 한직이던 UN 군사참모위원회 부의장 겸 동부영해사령관 겸 대서양예비함대사령관이 되었지만, 해군장관실 의회연락단장을 지내면서 친분을 쌓은 상원 소수당 원내대표인 에버렛 덕슨의 지지[5] 로 1967년에 대장으로 진급해 유럽해군사령관을 거쳐 1968년에는 베트남 전쟁을 총괄하는 태평양사령관에 임명된 "Mr. Seapower"[6] 라는 별칭을 가진 미군의 최고 실세였다.[7]
전통적인 해군 가문인 매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 역시 가문의 전통에 따라 해군에 입대하여 파일럿이 된다.[8] 물론 매케인 본인은 1981년에 대령으로 제대했다.
그런데 그가 파일럿으로 있는 동안 무려 5번의 추락사고를 내고 1번 격추당했으며, 1번 초대형 사고가 났고, 1년 후에 적지에서 격추되어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포로 생활 때 일화를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NPR)에 소개한 것 - "좋은 월맹군"도 있었다는 얘기랄까
5번이나 벌인 추락사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착륙하다가 실수로 부딪혔다던지, 고도를 잘못 알아서 전깃줄에 휘감겨 기체가 파손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파일럿에서 잘리지 않은 건 그의 가문이 워낙 빵빵한지라 존 매케인 스스로가 알게 모르게 여러모로 인맥상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고, 애초에 그 당시의 항모에서는 이런 사고가 의외로 잦았다.
베트남에 파병되어 항공모함 USS 포레스탈 함에 배치된 A-4 스카이호크 조종사로 복무하던 중, 전대미문의 초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난다. 그 이후 다른 항모로 지원했으나 겨우 2달 뒤에 베트남 상공에서 북베트남군의 대공포에 격추, 포로가 되어 하노이 힐튼이라 불린 북베트남의 호아 로수용소에서 무려 5년 6개월간의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9] 그는 비상탈출 때 충격으로 두 팔과 다리 하나가 부러진 채 낙하산에 매달려 호수에 떨어졌다. 북베트남 병사들은 익사 위기에 몰린 매케인을 밖으로 끌어내고서 어깨를 개머리판으로 때려 부수고 대검으로 발을 찍었다. 심지어 진통제, 마취제 없이 수술을 받았고 현지 의료진이 조각난 팔다리뼈를 제대로 껴맞추지 못해 오랜 시간을 허둥댔을 뿐만 아니라 실수로 무릎 인대까지 절단했다.
이런 상태로 감방에서 멀건 호박죽과 빵 조각으로 연명하던 매케인의 체중은 70㎏에서 45㎏까지 줄었고, 재활치료도 열악한 환경에서 혼자 해야했다. 특히 북베트남군에게 수많은 고문을 당하며 강제로 자백서를 강요받아 써야했다.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로 인해 이후 후유증으로 평생 한 쪽 다리를 절게 되었고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없게 되었다.[10] 한편 닉슨의 미치광이 전략 때문에 위협을 느낀 소련이 북베트남을 설득하여 공산측도 결국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가 태평양사령관의 아들이라는 점을 알게 된 북베트남군 측이 그를 협상용으로 쓰려고 미리 석방시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의 아버지 매케인 제독은 자신의 아들이 적을 위한 협상용 도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 석방기회는 무산되었다.
다만 존 매케인의 정치 입문 이후 본인의 증언이나 베트콩 언론의 보도를 짜깁기해서 존 매케인은 사실 베트콩 부역자라는 말이 반대파(주로 민주당)들로부터 제기되게 된다. 요약하면 고문을 멈추고 병원에 가는 대가로 군사기밀을 누설해서 동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음모론이다.[11] 매케인이 공화당 유력 경선후보로 출마한 2000년 대선, 오바마와 맞붙은 2008년 대선 때 제기되어 나름 쏠쏠한 효과가 있었다. 물론 대놓고 제기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은근히 뒤에서 '까고보니 이렇다더라'는 투로 찌르는 방식. 이렇게 정치 반대파들에게 요긴하게 쓰이다보니 어느새 악취미적인 별명도 붙었는데, 이른바 '송버드(songbird) 매케인'. 베트콩에게 술술 불었다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다.
워낙 드라마틱한 이야기라 당시 그의 포로생활이 등장하는 영화도 몇 편 있긴 하다. 더불어 지난 2000년 베트남 전쟁 종전 25년을 맞이하는 자리에 나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발언을 하면서 "이 전쟁은 정의로운 미국이 이겨야 하는데 왜 저런 쓰레기들이 이겨야 하는 거냐!?"이런 대사를 해버렸다. 포로로 잡혀 8년이나 고문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닌데, 공화당 측에선 당시에 언짢게 여겼다. 이렇게 현 베트남 정부를 엄청 까면서 1990년대 이후 베트남과 경제교류 및 여러가지 개방을 받아들인 미국 수뇌부도 엄청 비난하기도 했다. 덕분에 베트남에서도 엄청 불쾌해하면서 일부 지역에선 그의 사진을 불태우며 반미적인 분위기까지 만든 바 있다. 매케인 본인이야 베트남에 좋은 기억이 있을 리 없지만 정치인으로서 처신은 부적절했다. 그래도 매케인은 존 케리와 함께 베트남 내 실종미군과 유해를 찾는 일을 계속하며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를 주도했다. 1994년 베트남에 대한 수출제한을 해제하고 관계회복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2017년에는 애리조나 주 연방 상원의원(공화당)이자 미국 국회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12] 2018년 4월 29일, 애리조나의 자택에서 자신의 장례식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참여 대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참석할것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게 정치를 떠나지 말 것을 주문했다.기사 5월 5일, 뇌종양에 의한 부작용이 심화되어서 워싱턴 DC를 떠나 애리조나의 자택에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7월 말에 뇌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2018년 8월 24일, 그의 가족들은 "그는 생존에 대한 기대치를 뛰어넘었지만, 병의 진행과 노쇠해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는 성명을 발표, 치료를 중단했다. 그리고 25일 오후 4시 28분(현지시각), 82번째 생일을 나흘 앞두고 자택에서 사망했다.#추도식 그가 세상을 떠난 해,1912년 2월 7일 생인 어머니가 106세 나이로 여전히 정정(2020년 10월 12일 사망)했다. 일부에선 매케인이 고문받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처럼 오래 살지도 모른다 카더라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버지 존 매케인 주니어(1911~1981)도 군인으로서 살다가 만 일흔으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역시 해군 제독인 할아버지 매케인 시니어(1884~1945)는 만 61세 나이로 심장발작으로 갑자기 급사했다. 이처럼 어머니가 더 특별히 오래 살 뿐이지 매케인 가가 대놓고 다 존 매케인 어머니처럼 100살 넘게 산다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아우인 조 매케인은 1942년생으로 생존 중이다.
9월 1일 워싱턴 국립성당에서 엄수된 존 매케인의 장례식에서 장녀 매건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한 후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사망 당시에도 현역 상원의원 직함을 달고 있었으며[13] , 그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애리조나 상원의원 자리는 그와 같이 애리조나 상원의원을 지낸 존 카일 의원이 주지사의 지명을 받아 채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유족에게 깊은 연민과 존경을 전한다. 우리의 마음과 기도가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My deepest sympathies and respect go out to the family of Senator John McCain. Our hearts and prayers are with you!)"라고 애도의 뜻을 밝혔는데,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만큼 평소보다 짧은 트윗이다.
이 영향으로 인해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에 존 매케인의 부인 신디 매케인이 등장해 조 바이든 후보자에 대한 찬조 연설을 하게 된다.# 실제 대통령 선거에서도 애리조나가 1996년 이후 최초로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며 도널드 트럼프의 패배에 결정타를 놓았으며, 연방 상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승리를 거두며 1950년 이후 무려 70년만에 애리조나에 배정된 2석의 연방 상원의원을 모두 민주당이 차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2.1. 정치 경력[편집]
1982년 중간 선거에서 현역의원이 정계를 은퇴하면서 공백이 생긴 애리조나 주 제1선거구에서 연방하원 공화당 후보로 출마, 지역의 보수성향과 개인적인 전쟁영웅 이미지로 무난히 당선되었다. 이후 1984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1986년에는 애리조나의 상원의원 중 한 명인 배리 골드워터가 정계은퇴하면서 그 지역구에 출마해 정계입문 4년만에 상원의원이 되었다.
공화당내에서 중도 성향의 아웃사이더[14] 였던 인물로 워싱턴 정계에서는 '1년에 절반은 민주당과 싸웠고 나머지 절반은 공화당과 싸웠던 사람'이란 평가를 받았다.
2000년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 출마하여 초반엔 나름 선전했으나, 당시 유력했던 조지 W. 부시 캠프발 흑색선전[15] 으로 인해 지지율이 폭락하고 자금력에서도 밀리면서 경선 중반에 결국 패배를 시인하고 경선을 중도 포기했다.
이후 아들 부시 정권 8년 동안 백악관과 각을 세우면서 정권의 실정을 집요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이라크전의 난맥상과 금융위기로 공화당이 무너져 내릴때 오히려 반사이익을 보면서 보수층 일부와 중도부동층 사이에서 지지도를 크게 끌어올렸다.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경선은 무난하게 통과했지만, 본선을 앞두고는 당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오바마에 심각하게 뒤지고 있던 여성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중앙정계에서는 완전무명이었던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지명했다가 완전히 망했다. 골수 지지층들의 지지는 얻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잦은 병크로 몇주 지나지 않아 도리어 마이너스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승리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물론 페일린을 지명한 직후 얼마간 오바마보다 지지도가 조금 앞섰다. 흑인 대통령 신드롬을 '첫 여성 부통령' 후보로 오바마에게 갈 표를 어느 정도 자기쪽으로 끌어들이며[16] 잠재우려 했다. 하지만 페일린 자체가 승부수였던지라 공화당에서도 그런 신비주의와 신선함을 밀려고 했지만[17]
하지만 꼭 이런 것뿐만 아니라 매케인의 공화당 내에서 진보적인 성향으로 보수주의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었다. 후보로 확정되고 나서도 보수 진영 인사 여러명이 매케인을 지지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무래도 보수표는 백인쪽에 많기 마련인데 매케인이 2008년 대선에서 백인들에게 55%밖에 득표 못한 것도(롬니도 59%는 얻었다) 그와 무관치 않았던듯. 그의 진보, 중도적인 성향은 상대 민주당 후보가 당내 보수파였다면 중도층을 상대로 통했을 지도 모르나 상대는 젊은 뉴페이스 진보 오바마였다. 즉 어중간한 포지션으로 보수표도 잃고 중도표도 잃으며 완패했다.
사실 2008년 대선에서 여성만 따로 보면 매케인의 득표율은 43% 오바마는 56%였다(남성은 매케인 48%, 오바마 46%). 2012년 대선에서 남자 폴 라이언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롬니는 여성 득표율이 44%였다(남성은 롬니 52%, 오바마 45%). 여성 득표율이 2012년 롬니보다도 1%가 더 낮다. 즉, 매케인은 여성인 사라 페일린을 런닝메이트로 올려서 얻은건 없고 오히려 손해만 봤다. 이미 망한 전력이 있는 (여성표, 남성표 모두 손해) 사라 페일린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공화당 러닝메이트로 거론된다는 것이 미스테리.
2015년 7월에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그(존 매케인)는 전쟁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적군에게 잡혔기 때문에 전쟁영웅이 된 거에요. 난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좋습니다."라고 비난을 받았기도 하였다. 어쨌든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선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다음에는 잠시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녹취록이 공개되자 지지철회를 선언하였다. 힐러리 클린턴에게는 투표하지 않을 것이지만 도널드 트럼프에게도 투표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트럼프에게 어느정도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지만, 결국 트럼프가 힐러리를 이기고 당선되면서 트럼프 열풍을 막기엔 부족했다는 것이 방증되었다.
하지만 몇년이 지나고, 매케인이 사망한 이후에 열린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매케인의 지역구였던 애리조나 주의 주민들이 트럼프를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상대 후보로 나온 조 바이든은 민주당 후보지만 매케인과 막역한 사이였으며[18] 매케인 사망시 정성을 다해 헌사를 바쳤던 사람이었다.[19] 존 매케인의 부인[20] 마저 공개적으로 조 바이든을 지지한다고 밝히며 바이든 지지를 호소했다. 그 결과, 애리조나주에서는 바이든이 1%미만의 득표율 차이로 승리하였는데, 애리조나 주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가 이긴 것은 1996년 이후 처음이었다.
3. 성향[편집]
공화당 내 좌측이다. '매버릭'(maverick, 이단) 소리 들으며 100명 중 보수정도로 45번째 정도이던 사람이[21][22] 크게 안 바뀌면서 표결만 보수화 된거지만 이 효과를 톡톡히 봐서 2010년에도 거뜬히 연임에 성공했다. 트럼프 행정부 초기 오바마케어 폐지법안에 찬49:반51을 만드는 마지막 반대표[23] 를 날리면서 법안을 좌초시켜 같은 당 대통령인 트럼프를 엿먹이기도 했다.
성격이 급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5년간 고문당했을 경우 보통 사람이라면 폐인이 되었을 터인데 성격이 좀 급한 정도로 뭐 어떠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가 대통령 선거에 나갈 때 오랜 친구 한명은 "친구지만 이렇게 성격 급하고 화잘내는 사람이 원자폭탄 발사 스위치를 들고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공식적으로 반대하기도 했고 선거유세중에 한 젊은이가 "대통령 하기에는 너무 노땅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질문하자 매케인 옹이 웃으며 "질문 고맙다, 요 쬐끄만한 놈아"(Thanks for the question, you little jerk)로 답을 한 것을 보면 한성깔 하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애초 질문을 했던 학생이 "일하다가 늙어서 사망하거나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냐?"식으로 무례하게 물어봤고, 매케인은 화를 내지 않고 농담식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후로는 상원에서 미국이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때 공화당 측 전문가로써 발언을 많이 하는 중이라 존재감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레바논이나 소말리아에서의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등 국제외교에는 온건한 성향을 가졌으나 9.11 테러 이후 매파로 변했다. 군사적 개입을 지지하는 네오콘들과는 달라서, 피해가 막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북한이나 이란 공습에는 반대하고 있다.[24] 또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긴 이라크가 상대가 안될 정도로 막장이고 해마다 막대한 군비가 들어가도 탈레반만 기세가 좋은 곳이라 그냥 장기간 주둔말고 다른 해결방법이 있냐는 반대파 및 민주당의 일갈에는 그도 고민하고 있다. 반면 중동에서의 미군 영향력 감소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며, 또한 이란의 경우 핵 협상 타결 이후에도 꾸준히 이란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이 쿠르드족과의 관계에서 미적거리는 상황에서도 쿠르드족과의 신뢰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범죄자의 고문에 매우 반대하며, 관타나모 등지에서 일어나는 전쟁포로 및 테러용의자들에 대한 고문 및 인권침해 요소에 강력히 반대하는 진보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매케인은 8년이라는 긴 포로 생활동안 직접 고문을 당했던 경험이 있으며, 테러리스트와 같은 악(惡)을 상대하면서 미국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2014년 12월에 미국을 강타한 부시 정권의 CIA 고문 리포트에 대해선 "이제 와서 뭘 위해 저걸 들추냐?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기만 하는 행동이다"라고 주장하는 딕 체니와는 달리, 저런 잘못을 밝히는게 미국의 가치이며 옳은 행위임을 말하며 본인 본래의 자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2015년 1월엔 또 다시 성질을 못 이기고 의회 청문회에서 반전 시위대를 향해 "인간 쓰레기들"이라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다. 관련기사# 단 반전 시위대가 90대의 원로 정치인인 헨리 키신저를 향해 "전범을 체포하라"며 청문회장 안에서 플래카드와 수갑을 흔드는 등 심각한 결례를 보였기에 생각보다 악영향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일부 보도에서는 "(매케인의 행동에) 방청석에서 박수가 나왔다."라는 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2015년 3월에는 강연에서 일본 총리 아베 신조에 대해 "일본에서 오랜만에 처음으로 강한 지도자와 안정된 정부가 나왔다" "나는 아베 총리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라고 치켜세웠다.
2017년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중이다.[25]
2017년 5월 한국의 대통령 특사인 홍석현과의 면담에서 THAAD 유지비용은 미국이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발언함으로서 한국쪽이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런데 2017년 6월 제임스 코미 청문회에서 정신이 멀쩡한지 의심될 정도로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생중계되면서 고령으로 인한 치매증상이 드러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나중에 나온 해명으로는 그날 새벽 1시까지 이어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경기를 보느라고 피곤한 탓이라는데 정작 청문회 직후 기자에게 내가 무슨 이상한 소릴 했느냐고 쏘아붙인걸 보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한국을 방문하려 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문 대통령과의 회담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아 화가 나서 방한을 취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케인이 요청한 날짜에 문재인 대통령이 일정을 비우고 오찬을 하기로 했으나 매케인 측에서 당초 희망했던 날짜가 아닌 다른 날에 방문하길 요청해왔고 일정을 다시 조율하는 과정에서 매케인이 방문을 파토낸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정황상으로 보면 그 당시엔 트러블이 있었다고 보는게 맞다.
그리고 안구 위에 생긴 혈전 수술로 입원중이던 2017년 7월 19일, 의료진들이 교모세포종을 발견했다. 혈전 제거는 잘 끝났지만 교모세포종의 특성상 사실상 시한부가 아니냐는 의견이 많다. 거기에 그의 나이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2017년 7월 25일, 뇌종양 수술 재활중인 몸을 이끌고 미 상원에 출석하여 오바마케어 폐지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리고 해당 법안은 49대 51로 부결되었다. 오바마케어 폐지를 노리던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 물을 먹인 셈. 당시 연방 상원 의회에서 공화당은 52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매케인을 포함해 공화당 내에서는 폐지에 반대하는 의원이 3명[26] 이었다. 민주당은 48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당론으로 폐지에 반대해서 전원이 페지 반대에 투표했다. 이 때문에 마이크 펜스 미 연방 부통령 겸 상원의장[27] 이 표결하기 전에 끈질기게 설득했으나 실패했다.[28] 이 일로 트럼프 지지층에서는 거의 역적 취급을 받고 있다. 그도 그럴게 근 8년동안 "우리가 집권하면 오바마케어부터 폐지하겠다. 그 대안? 진작 준비되어있으니까 집권만 시켜주라"고 내건게 공화당인데 막상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
그 반면 주로 친민주당 및 진보진영 쪽에서는 좋은 이미지를 얻나 싶었지만, 공화당의 감세 법안에 찬성하기로 하면서 진보 성향 유권자들에 반감을 샀다.[29]
2018년, CIA 국장 내정자인 지나 해스펠이 과거 CIA 고문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을 이유로 인준을 반대했다. 매케인의 평소 소신에 따른 당연한 행보.[30] 그런데 백악관의 '켈리 새들러' 백악관 커뮤니케이션 담당 특별보좌관이 "어차피 죽어가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망발을 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논란이 거세지자 결국 새들러 특별보좌관은 사임하였고 매케인의 가족들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하였지만 가족들은 백악관의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정작 백악관은 공개사과를 거부하고 있다.[31] 백악관도 해당 발언의 진위 여부보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공식 사과를 거부했다.[32] 참고로, 이 시점에서 매케인은 불과 수 주 정도밖에 남은 시간이 없다는 의료진의 판단하에 가족 및 친구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4. 선거 이력[편집]
5. 가족[편집]
존 매케인은 생전 두 번의 결혼을 하였으며, 7명의 자녀가 있다. 첫번째 부인인 캐롤 매케인과는 1965년에 결혼하였는데, 캐롤은 이미 전 결혼을 통해 2명의 아들, 더글라스(1959년생)와 앤드류(1962년생)가 있었고, 존 매케인은 캐롤과 결혼하면서 두 아들을 법적으로 입양하였다. 그리고 1966년에 둘 사이에 딸 시드니가 태어났다. 베트남전 이후인 1979년 존 매케인은 하와이에서 애리조나주에서 거대 사업체를 운영하던 부잣집 딸 신디 헨슬리와 만났다가 사랑에 빠져서 1년 가까이 유부남 상태로 바람을 피웠다. 결국 존 매케인과 캐롤 매케인은 1980년에 이혼하였는데, 그럼에도 이후에도 둘은 친밀한 사이로 남아서, 캐롤이 존 매케인의 선거 캠페인을 돕기도 하였다고. 존 메캐인은 이혼하자마자 18세 연하 신디 헨슬리와 결혼하였고,[34] 둘 사이에 메건(1984년생), 존(1986년생), 제임스(1988년생)을 두었다. 그리고 신디 매케인이 1991년 테레사 수녀의 고아원을 방문하였다가 두 갓난아기를 소개받았는데, 매케인 부부는 한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녀가 막내 브리짓(1991년생)이다.
존 매케인의 법적인 장남은 더글라스 매케인으로, 미국해군사관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버지니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하여 파일럿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기장이다. 둘째인 앤드류 매케인은 현재 매케인&헨슬리 가족이 운영하는 맥주 양조 회사의 이사로 있다.
존 매케인의 생물학적 첫 자녀인 시드니는 사실 가족 내 아웃사이더인데, 군이나 정치와는 관련 없는 음악 산업계로 경력을 쌓은데다, 민주당 지지자이다. 이러다보니 가족 내에서 실질적으로 맏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메건 매케인이다. 미망인 신디 매케인의 장녀이기도 하고, 2008년 대선 캠페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잡으면서 이후 미디어나 정치에서도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섯째인 존 S.매케인 4세는 존 매케인의 첫 생물학적 아들로 '존'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그도 가문의 전통대로 미국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항공 병과로 소속되어 현재 미합중국 해군 헬리콥터 파일럿으로 복무 중이다.[35]
2009년 졸업했는데 임관식에 당연히 참석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도 웃으며 악수를 하였다.
한편, 잭은 괌에서 복무하다 만난 공군 예비군[36] 대위와 2013년 결혼하였는데,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꼴통 인종주의자들이 매케인 부자를 비난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아내인 러네이 스위프트(Renee Swift)가 매케인 4세보다 두 살 연상이고 계급도 높다. 결혼 때 매케인 4세는 중위였다. 5세는 아마 흑백혼혈이 될지도 모른다.
잭 매케인 부부.
막내 아들인 지미는 집안의 전통인 해군 대신 미합중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이라크 파병을 다녀왔다. 해병대 지원 당시 부모님와 상의하지 않고 지원했다고 하며, 지원 당시에 17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해병대에선 부모의 동의를 얻어오라고 지시했다. 입대 전에는 시력이 좋지 않았으나 수술을 통해 시력이 좋아졌다고 한다.부대가 이라크로 출발하기 전 상부에서 부모님과의 특별 면회를 주선해 줬으나 "그런 특혜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형인 잭과 찍은 사진. 외모는 아버지를 많이 닮은 듯 하다.
막내 딸인 브리짓은 매케인 가족들 중에서 미디어를 가장 기피하고 있어서 사실상 가장 잘 안 알려진 인물이다. 이는 2001년 존 매케인이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 조지 부시 주니어 측에서 브리짓이 입양된 딸이 아니라 간통으로 낳은 사생아라는 식으로 저질 네거티브 캠페인을 진행하였는데, 전화와 편지 등으로 인종차별적인 욕설이 난무하였었다고. 이러니 당연히 미디어를 피할 수 밖에. 생전 존 매케인은, 브리짓이 자기 가족 중 가장 똑부러지고 터프한 아이라고 자랑했었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존 매케인을 모욕하자 긴 침묵을 깨고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서 공개적으로 트럼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어머니 로버타 매케인(Roberta McCain)은 1912년 2월 7일생으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37] 후 2년 뒤인 2020년 10월 12일 108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아래 사진은 2014년 2월 7일 102번째 생신을 맞은 어머니와 함께 한 모습을 메케인이 트위터에 인증한 모습.[38]
아들이 월남전 포로 시절의 후유증으로 일찍 늙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어머니는 상당히 젊어보인다.
6. 기타[편집]
오른쪽 사진을 보면 해사 시절에 비해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다. 베트남에서 복귀 이후의 사진으로 고문으로 머리가 하얗게 됐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38세.
아킬레스건 파열로 목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매케인의 의원실에서는 아킬레스건의 가벼운 파열과 (뇌)종양에 따른 부작용 등으로 지난주 말 워싱턴 DC의 미 육군 월터리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상원으로 복귀했다고 밝혔다.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절친이었다.[39] 연방대법원의 안토닌 스컬리아-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함께 정치성향이 정반대인 친구 페어로 유명하다. 매케인의 마지막 유언 중 하나가 조 바이든에게 정치를 계속 할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었을 정도. 조 바이든은 트럼프 대통령이 매케인을 무시하는 행보를 보이자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으며, 마지막으로 매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저는 민주당원이지만 매케인을 좋아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해 30분 동안 추도사를 했다. # 참고로 오바마 전 대통령은 19분에 걸친 추도사를 읽었고 아들 부시는 10분을 못 채웠다. 정치적 경쟁자였던 오바마, 바이든은 도합 50분에 걸친 추도사를 읽었는데 이는 매케인의 소속당이었던 공화당 측 추도사보다 더 긴것 이었다. 매케인 집안에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은 것이었으며, 이후, 바이든이 2020년 미국 대선에 출마를 할 때, 메케인의 부인인 신디 메케인은 민주당 전당대회 둘째 날에 출연해 찬조 연설을 하였다. 이로 인해서 아내인 신디 메케인은 공화당 탈당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다.
파나마 안에 있던 조차지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태어난 그의 경력 때문에 출생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파나마 운하 지대내에서 태어났다면 미국 대통령 피선거권이 있기는 하지만, 특이한 점은 파나마 운하 지대 안에 월경지로 파나마국의 주권이 바로 미치는 지역이 두 개가 있었기 때문에[40] 반대자들은 그중 하나인 콜론 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코코 솔로에서 태어난 기록이 확인되어 모두 입을 다물었다.
7. 스포츠 관련[편집]
권투 애호가이며 종합격투기를 싫어하였다. 해군사관학교 시절 권투선수로 활동하였으며 8년간의 혹독한 포로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권투를 통해서 맞는 것에 단련된 덕이었다고 한다. 권투는 두 선수가 맨 몸으로 실력을 겨루고,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공정하고 명예로운 운동이라 생각한다고.
반면 종합격투기를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1990년대에 종합격투기를 처음 본 후 CNN에서 대놓고 '인간 닭싸움'이라고 하면서 금지해야 할 스포츠라고 이종격투기를 비난하였고[41] 개싸움, 닭싸움은 금지하는데 왜 사람싸움은 막지 않느냐는 논리로 격투기 금지를 요청하는 서한을 대다수 주의 주지사에게 보내는 동시에 유료 시청 채널 사업자에게 프로그램 방영 금지를 종용했다. 매케인의 이런 움직임은 1990년대 중반 이후 UFC 위기에 결정타가 되었다고... 그런데 이때 경영이 휘청거린 UFC는 외부 사장도 영입하고, 스포츠화를 진행하며 경기 룰도 바꾸며 체계를 현대화하는 바람에 현재에는 도리어 복싱을 위협할 지 모를 차세대 격투 스포츠로서 성공을 거두고 만다. 이렇게 보면 정말 재수가 없는 사람인 듯.
또한 자기의 지역구 야구팀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팬이다. 워싱턴 내셔널스의 홈구장인 내셔널스 파크의 개장경기가 애리조나와의 경기였는데 그 때 모든 관중들이 내셔널스의 모자를 쓰고 홈팀을 응원하는 가운데 나홀로 다이아몬드백스의 모자를 쓰고 관중석에 앉아있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단, 이러한 행보가 전국에 중계되는 스포츠 경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의도이고 실제로 그다지 광팬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실제로 자신의 고향 혹은 지역구 팀을 응원하는 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 다른 정치인들도 종종 하는 일이며 애리조나의 경기도 특별히 주목받는 빅 경기가 아니면 잘 나타나지 않아서 그런 설도 나오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명예와 에티켓 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2013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홈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지구 우승을 헌납하고 다저스 선수들이 기쁨의 셀레브레이션을 즐기다가 디백스의 명물인 풀장에 뛰어들자 분노해서 '돈만 많이 받고 교양은 없는 천박한 놈들' 이라는 요지의 트윗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곧바로 브라이언 윌슨(야구선수)에게 '2등하는 것과 1등이 풀장에 뛰어드는 걸 보는 것 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반격을 당했다.
8. 매체에서[편집]
2012년 3월 10일, HBO에서 게임 체인지(Game Change)라는 존 매케인 진영이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를 방송했다. [42] 여기서도 세라 페일린의 막장 행보를 수습하기 위해 고생하는 참모진과 이를 보며 고뇌와 답답함을 느끼는 매케인을 볼 수 있다. 에드 해리스가 존 매케인 역할을 맡았는데, 싱크로율 100%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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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군인 신분으로 미국이 조차하고 있던 파나마 운하 지대에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존 매케인이 태어났기에, 자연적으로 태어난 미국 시민의 조건을 만족하여 대통령 피선거권이 있다.[2] 지중해에서는 횃불 작전 이후 연합군의 상륙부대에서 활동했고, 태평양에서는 4천여 톤의 일본 전투함을 수장시켰다. 심지어 즈이호를 격침시킬 작정으로 어뢰를 작렬했다가 아쉽게 빗나가기도 했다고.[3] 스레셔함 침몰 사고 당시 언론 대응을 맡았다.[4] 도미니카 내전 당시 제124기동부대장을 맡았다.[5] 에버렛 덕슨은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의 제정 당시 남부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무효화시키는 데 도움을 줘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덕슨에게 빚을 지고 있었고, 존슨 대통령은 매케인 2세를 부정적으로 판단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덕슨이 지지하는 매케인 2세를 대장으로 진급시킬 것을 지시하게 된다.[6] 소련 해군에 대한 해양력 우위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서 얻은 별칭이다.[7] 미 해군 사상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해군 대장 직위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할아버지는 월튼 워커 장군처럼 4번째 별은 대전이 마무리된지 한 달도 안되어 사망한지라 사후 추서된 것이긴 하지만,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과 함께 미 해군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관 중 한명이었고 워낙 고령이었기에 저평가받을 인물이 아니다.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의 현역 함정 중에 이들의 이름을 딴 '존 S. 매케인' 함이 있으며 제7함대 소속으로 활동 중.[8] 미 해군은 항모 전단이 해군력의 주축이라 파일럿 출신들이 진급도 빠르다. 지금은 덜하지만, 제독들의 반란에서 테일후크 스캔들 사이의 시대엔 해군참모총장의 과반이 파일럿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잠수함 출신들.[9] 호아 로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한 다른 정치인으로는 제임스 스톡데일과 제레미아 덴튼이 있다.[10] 근데 이것은 존 매케인만 당한게 아니라 북베트남에게 포로가 된 미군들이 흔하게 당했다. 이 당시 포로에 대한 정당한 대우라는 개념이 없었던 북베트남군의 포로 학대는 심각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프랑스군을 대신해 들어온 미군도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침략자라는 관념으로 전쟁에 임하다보니 포로를 학대하는 것에 대해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미국의 앞잡이인 남베트남군도 똑같이 당했다. 한편, 미국 국내에서도 반전여론이 대세가 되었고 미군 포로에 대한 학대가 이런 여론에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인지한 북베트남 정부는 더이상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1969년 10월부터 정부가 직접 나서서 미군 포로에 대한 고문과 학대를 금지하고 단속했다. 존 매케인도 이때부터 더이상의 고문과 학대를 받지 않고 나은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11]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전쟁포로들이 모진 고문에 못이겨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누설하는건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기에 반역이 될 수 없다.[12] 정확히는 교모세포종이다. 교모세포종은 뇌암으로 분류된다. 그것도 암중에서 생존률이 가장 극악한 암으로. 교모세포종의 생존률은 한없이 0에 가깝다.[13] 미국 상원의원들은 80대가 되어서도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고, 죽기 직전까지 상원의원 직함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원의원의 경우, 사망 등으로 공석이 되면 최대 2년 임기로 그 자리를 채울 상원의원을 주지사가 임명할 수 있는 것, 즉 보궐선거의 위험이 적은 것이 그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14] 1997년 3월 13일 미국 및 멕시코 국경에서 목격된 괴이한 불빛(이른바 피닉스 라이트 사건) 정체를 두고 진상파악을 요구하던 인물이기도 하다. UFO라는 음모이론보단 미군 비밀무기 및 아니면 무슨 훈련 사항이 아니냐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가장 딴지를 걸던 정치인으로 이 당시 공화당에서도 넘어가자는 것을 고집스럽게 1년 넘게 따져들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음모이론을 조장하며 미군의 불신을 조장한다고 엄청 비난했다.[15] 매케인은 흑인 고아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었는데, 부시 진영에서 이 아이가 사생아라는 근거없는 선전을 해댔다.[16] 첫 여성 대통령을 노리고 있던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던 주부들의 표.[17] 사실 극초반에는 확실히 효과를 봤었다. 페일린은 이미 대세로 자리잡은 오바마와(정확히 말하면 대세로 자리잡은 민주당 후보였다. 이때는 부시가 워낙 지지를 깎아먹은지라 웬만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민주당 후보가 되는 시기였다.) 대비되는 뉴페이스였는데, 일반인 여성들의 공감을 얻은 "사커맘" 포지셔닝이 효과를 발휘해 여성표를 많이 얻었고 이 때문에 역전은 못했었지만 매케인과 오바마의 격차가 해볼만한 수준으로 줄어든 적도 있었다. 한때 페일린의 인기가 매케인을 묻어버릴 정도였으니, 대선에서 패배해도 페일린이 일반 정치인 수준의 상식과 능력만 있었다면 꽤나 거물로 성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18] 매케인의 마지막 부탁 2가지는 도널드 트럼프를 장례식에 부르지 말 것, 그리고 조 바이든이 정치를 계속해 줄 것이었다.[19] 바이든뿐만 아니라 그의 대선 경쟁 상대였던 버락 오바마도 장례식에 참여하여 매케인을 기리는 장문의 정성을 다한 추도문을 바쳤다. 어떻게 보면 공화당보다 상대당이었던 민주당이 더 안타까워하며 정성을 다했다고도 할 수 있다.[20] 공화당원으로, 바이든을 뽑는다는 기고문의 제목도 "공화당원이 바이든에 투표하는 이유" 였다.[21] 이쯤 되면 일부 민주당 상원의원보다도 진보적이란 소리다.[22] 하지만 억울하게도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와 대립각을 이루는 바람에 정치에 어중간하게 관심을 가진 젊은 층에게 '나이든 보수'라는 고정관념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의 정치적 신념을 생각한다면 정말 억울한 일.[23] 공화당 이탈표는 3인이었는데, 매케인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수전 콜린스(메인)와 리사 머카우스키(알래스카). 콜린스는 이후에도 공화당 당론에 반하는 소신투표를 여럿 보여주었는데, 그 덕분인지 민주당 약우세지역인 메인에서 2020년에도 재선에 성공한다.[24] 이라크 전쟁에는 찬성했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가 거짓말로 밝혀지고 전후처리가 엉망인 것이 드러나자 매우 강력히 비판했다.[25] 트럼프를 가리켜 미국의 파시스트라는 등, 독재자로 변절할 가능성이 있다는 둥 강도높은 비난을 하고있다.[26] 메인주의 수전 콜린스, 알래스카주의 리사 머코우스키, 애리조나주의 존 매케인. 앞의 두 명같은 경우는 공화당 내에서 매케인보다도 더 좌측의 인물들로 민주당에 있어도 위화감이 없다.[27] 연방 수정헌법에 의해 부통령은 자동으로 상원의장을 겸임한다.[28] 그렇게 설득한 이유가 연방 상원에서 법안의 표결 처리시 50대 50으로 찬반 동수가 나오게 되면 부통령이 마지막으로 1표를 투표하여 가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캐스팅 보트 권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에 근거해 반대하는 의원 중 1명이라도 설득해 찬성으로 돌려세워 찬반동수로 만들고 난 후 펜스 부통령이 찬성표를 던져 통과를 시킬 수도 있었다. 반대한 3명 중 매케인이 가장 거물이니 그를 돌려세우지 못한 게 실패이유라 볼 여지가 있다.[29] 물론 공화당 소속인 매케인이 이 법안을 환영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에 실망한건 그를 공화당 속의 민주당원으로 보는 지지자들 정도일 것이다.[30]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독재 정권들에 대해 고문 행각을 중단할 것을 줄곧 요청해온 국가가 미국인데 정작 고문 프로그램을 운영, 고문에 대한 묵인을 해온 인물을 공직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31] 공화당은 물론이거니와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들 사이에서도 매케인은 미국 상원의원인데 아무리 대통령의 신임을 얻는다 하더라도 상원의원을 이렇게 조롱해서는 안된다고 비판하고 있다.[32] 해당 행위는 내부고발이지 당연히 배신이 아니다.[33] 2018.8.25. 임기 중 사망[34] 재미있는 일화로 둘 다 나이를 낮추고 높이고 만났다고 한다. 결혼 서류 제출할때 서로 진짜 나이를 알게 되었고 결혼에 나이는 전혀 상관 없었고 재미있는 추억이었다고 부인이 회고 인터뷰에서 밝혔다.[35] 다만 증조부대부터 이어진 이름이 걷잡을 수 없이 길어졌기 때문에 군생활에서 부담을 덜 받으려는 의도인지 대외적으로는 애칭을 써서 "잭" 매케인(Jack McCain)이라고 불리고 있다.[36] 미군의 예비군은 우리 예비군 보다는 우리 상근예비역과 비슷하다. 본업에 종사하면서 1년에 39일씩 8년을 부업으로 근무한다.[37] 로버타는 존을 포함해 2남 1녀를 두었지만, 존이 2018년에, 진은 2019년에 세상을 떠나 2020년 기준 로버타의 자녀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78세인 둘째 아들 조 매케인이 유일하다.[38] 캡션: Visiting with my dear and beloved mother Roberta today, her 102nd birthday![39] 한국으로 치면 박지원 의원과 김무성 의원이 절친인 것과 비슷.[40] 수도 파나마시티와 콜론 시[41] 그 당시 종합격투기는 고간, 눈 등의 급소공격도 가능하였고, 장비규정도 없었던 지라 제각각 다른 복장을 하고 싸웠으며, 체급이나 심지어 라운드 규정조차 없는 말그대로 원초적인 싸움에 가까웠다.[42] 원작은 2008년 미국 대선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드라마는 매케인 선거캠프 쪽을 다룬다.[43] 헐리우드 배우들 대다수가 그렇듯 에드 해리스는 골수 민주당 지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