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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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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예술가.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와 함께 서양 고전 미술을 상징하는 인물.
2. 생애[편집]
보통 같으면 하늘이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은총과 귀중한 선물들을 때로는 단 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안겨주는 때가 있다. 우르비노의 라파엘로가 바로 그런 경우다..... 하늘은 예술을 정복하려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이 세상에 보냈지만 라파엘로는 예술뿐만 아니라 예절도 다스리도록 세상에 내려보냈다..... 라파엘로는 과거 예술가들과 달리 인간 정신의 갖가지 미덕, 즉 예의, 근면, 우미, 겸손, 그리고 모든 부도덕과 결점을 상쇄할 만한 착한 성품을 간직했다. 하늘로부터 축복받은 라파엘로는 단지 하나의 인간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면서 다만 영생을 하지 못하는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을 것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업적만 가지고도 하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라파엘로 덕택으로 예술의 방법도, 색채도, 창의력도 모두 하나가 되어 이와 같이 최고도의 완성에 도달했으므로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를 능가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화가로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 왕자처럼 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라파엘로를 따르는 사람들도 지상에서 명성을 얻을 것이며, 그의 생활을 본받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포상을 받을 것이다.
2.1. 우르비노 시기[편집]
1483년 우르비노에서 조반니 산티와 마자 디 바티스타 차를라 사이에서 태어났다.[3] 부친은 유명한 피렌체의 용병 대장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아들 구이도발도의 궁정에서 배우고 소속되어 일한 미술가이자 시인이었다.[4] 어린 라파엘로는 부친의 작업실에서 화가로 훈련을 시작했다. 1491년 모친이 딸을 낳다가 사망하였고, 부친은 금세공사의 딸과 재혼한다.[5] 1494년 부친이 사망하고 작업장을 물려 받았다. 11세의 라파엘로는 작업장 운영을 부친의 제자이자 협력자인 에반젤리스타 다 피안 디 멜레토에게 맡기고, 그의 도움으로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 들어가 도제이자 조수로 활동하였다. 다만 라파엘로가 페루지노 공방의 모범적인 도제가 아니었으며 공방에도 가끔 나타난 정도라고 주장하는 미술사가도 존재한다.[6] 누가, 언제 보냈고 실제로 얼마나 배웠는지는 현재 확실하지 않으나 페루지노와 라파엘로는 분명히 접점이 있으며, 페루지노의 작업장에서 완성된 그림의 일부에 라파엘로의 손길이 닿아있음은 분명하다.
라파엘로가 의뢰받은 첫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은 1499년에 그린 행렬용 깃발 그림 2점이다.[7] 17세 때인 1500년에 에반젤리스타 다 피안 디 멜레토와 함께 시타 디 카스텔로의 산타코스티노 교회 예배당 제단화를 제작하는 의뢰를 받았다.[8] 이 제단화는 1789년 지진으로 파손되어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없어졌다가 4조각이 남아있다. 제단화의 천사 그림이 라파엘로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성모자를 다룬 여러 그림을 그렸으며 이 주제는 인물 뿐 아니라 두 인물 사이의 애정을 다양하게 연출하는 창조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502년에 그린 '성 예로니모,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있는 성모자' 그림은 핀투리키오의 장식적 특징을 참조한 모습이 보인다. 핀투리키오는 라파엘로의 친구였으며 시에나 두오모에 있는 프레스코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밑그림을 그릴때 라파엘로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503년에 '몬드 십자가 처형', 1504년에는 '오디 제단화(성모의 대관식)'를 완성한다. 이 그림들은 라파엘로가 점차 페루지노 양식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인다.[9] 이런 모습은 라파엘로의 특징인데 다른 화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 후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러한 특징은 일생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보인다.[10]
1503년과 1504년에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딸[11] 이자 소라 공작 부인이던 조반나 펠트리아에게 작품을 의뢰받는다. 두폭 제단화 '성 제오르지오와 용'[12] 과 '성 미카엘과 용'[13] 이다. 우르비노 공작 가문은 라파엘로에 대한 후원을 지속적으로 해주며 자신들의 초상도 후대에 남기게 된다.[14] 라파엘로는 우르비노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공작 가문의 사람들 외에도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15] 등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2.2. 피렌체 시기[편집]
1504년 10월 조반나 펠트리아가 피렌체 공화국의 장관 피에르 소데리니[16] 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지닌, 우르비노의 화가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얼마간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능한 한 친절하게...' 피렌체에서 작품 제작 기회를 제공해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소데리니는 당시 도시의 명성과 위신을 높일 예술작품의 창작을 북돋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1504년 팔라초 베키오의 거대한 홀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의 그림을 의뢰받았다. 둘은 모두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으나 여러 예술가들이 습작한 그림들이 남아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시 고향을 갓 벗어난 23세의 라파엘로 또한 그 현장을 목격했을 것이다. 당시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는 재능을 닦는 수많은 젊은 예술가 중 한 명이었으며 한동안 이름이 이미 알려진 우르비노와 페루자에서 의뢰 받은 작품의 제작에 몰두한다.[17] 레오나르도의 스튜디오에 방문해서 모나리자를 보고 남긴 스케치도 전하고 있다.
서서히 이름을 알린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도 봉헌화와 초상화, 종교화의 의뢰를 받아 제작했고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타데오 타데이[18] 는 라파엘로를 저녁 만찬에 자주 초대했고, 라파엘로는 그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2점의 그림을 선물하였다.[19] 그 그림 중 하나가 '테라누오바 성모'이다. 비슷한 시기에 '대공의 성모'도 완성한다. 1506년에는 '벨베데레 성모'를 그렸다. 이 성모 그림들 외에도 '검은 방울새의 성모', '큰 쿠퍼 성모', '에스테라지 성모' 등의 성모 그림들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를 돌봐준 친한 숙모 시모네 차를라에게 주기 위해 맨 위의 프로필에 있는 자화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보석상 아뇰로 도니의 의뢰로 도니 부부의 초상을 그려주었다.[20][21] 그리고 1507년 피렌체에 머문 막바지에 피렌체의 상인 도메니코 카니자니의 의뢰를 받아 '카니자니 성가족'을 그렸다. 24세의 라파엘로는 이 작품으로 다른 대가들의 기법을 완전히 숙달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물 사이의 애정과 친밀함을 더욱 돋보이게 연출해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또한 페루자의 발리오니 가문의 의뢰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 '발리오니 제단화(보르게세 매장)'를 완성했다.
2.3. 로마 시기[편집]
1508년 라파엘로는 현재 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에 있는 '발다키노의 성모'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로마로 떠났다. 이 그림은 피렌체에서 라파엘로가 처음으로 공적으로 의뢰받은 작업이었다. 중요한 작업이었음에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교황 율리오 2세가 불렀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성당의 초대 건축 책임자를 맡을 정도로 유명했던 브라만테가[22] 교황이 예술 후원 작업으로 자신의 집무실 4곳을 꾸미기 위해 예술가를 찾자 라파엘로를 추천했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교황의 조카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23] 가 자신과 고향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예술가로 라파엘로를 삼촌에게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우선 서명의 방의 일부 장식에 프레스코화를 그려보였고, 그 장식을 본 율리오 2세는 즉시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기존에 있던 그림을 모두 파기시키고[24] 라파엘로에게 방의 4면을 장식하는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명했다. '성체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신학적 덕'이 그 결과물이다. 이 그림들은 기존의 선례와는 다르게 고대의 지식과 그리스도교 지식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혁신적인 묘사를 하는데 성공했다. 대만족한 율리오 2세는 엘리오도로의 방을 포함한 나머지 방의 그림도 모두 라파엘로에게 맡긴다.[25]
라파엘로는 즉시 로마에서 유명해졌고 성직자와 지식인 계층의 의뢰가 빗발치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이 시기부터 자신의 초안과 구성, 배치, 색감을 바탕으로 뛰어난 제자들인 줄리오 로마노[26] , 조반 프란체스코 페니[27] , 조반니 다 우디네[28] , 페리노 델 바가[29] 등의 도움으로 작품을 총감독하며 완성하게 된다.[30] 1511년 율리오 2세의 의뢰로 '율리오 2세의 초상'과 '로레토의 성모'와 '시스티나 성모'를 그렸다. 시지스몬도 데 콘티[31] 의 의뢰로 '폴리뇨의 성모'도 그렸으며, 시에나 출신의 은행가이자 예술 후원가 아고스티노 키지[32] 의 의뢰로 '키지 예배당'을 설계하고[33] 그의 교외 빌라인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를 장식했다. '갈라테아의 승리'가 여기에 그려져 있다.[34] 라파엘로가 '성 베드로의 구출'을 그리던 중인 1513년 율리오 2세가 사망하였다.
후임 교황이 된 레오 10세 또한 라파엘로를 인정하며 작업 의뢰를 지속한다.[35] 라파엘로는 역시나 그의 정치적 의도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엘리오도로의 방'을 완성하였고[36]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지만 엘리오도로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역사화에 거대한 변혁을 일으켰으며 매너리즘의 시작을 알렸다. 1514년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시스티나 예배당 하단의 장식을 위한 태피스트리 제작을 의뢰하였다. 실물 크기의 밑그림(평균 크기 3.5 x 5 미터) 10점을 18개월에 걸쳐서 직접 채색하고 제작하였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작업과 자신의 태피스트리가 필연적으로 비교될 수 있음을 잘 알았고, 깊은 색감을 만들기 어려운 태피스트리의 한계를 넘기 위한 심혈을 기울였다. 그림을 비대칭적으로 구성하였으며 태피스트리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레센도처럼 전개한다.[37] 대규모 인물을 풍경과 건축물보다 강조하였으며 인물 그룹과 고립된 인물을 대조시켜 동작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비대칭의 와중에도 라파엘로는 베드로와 바울,두 주인공의 영적인 떨림을 강조하며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태피스트리의 내용은 베드로와 바울의 삶의 장면이며, 라파엘로의 카툰(밑그림)을 바탕으로 당시 최고 기술을 가진 플랑드르의 브뤼셀에 위치한 피터 반 엘스트[38] 의 공방에서 작업이 시작되어 1516년부터 1521년까지 10개가 완성되었다.[39][40][41] 1520년에 뒤러가 공방에서 밑그림을 보고 그의 '네 사도' 그림의 영감을 얻는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플랑드르 지방에 알려지는데 공헌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교황의 명으로 교황 아파트에서 로마를 바라보는 외벽에 로지아를 세우고 장식하였다. 이 로지아는 라파엘로 로지아로 불린다. 로지아를 네로의 황금저택 양식의 그로테스크로 장식하고 볼트에 성서에서 인용한 52개의 장면을 도안하였다. 이 아파트 1층 위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비비에나 추기경의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를 위해서도 따로 작은 로지아와 욕실을 만들어 주었다.[42] 같은 시기에 라파엘로는 토마소 인기라미[43] , 비비에나 추기경,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백작 등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초상도 남겼다. '토마소 인기라미의 초상',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빈토 알토비티의 초상', '친구와의 자화상'을 포함하여 '라 벨라타'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44] 그리고 레오 10세의 명으로 보르고 화재의 방에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45]
라파엘로는 기존에 맡고 있던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책임자 외에 로마 고대 유물 발굴의 책임자[46] 가 되어 고대를 재건하기 위한 측량법을 고안하는 등 눈코뜰새 없이 더 바빠졌다. 당시 큐레이터로서 라파엘로가 후대에 남긴 업적은 묻혀 있던 그로테스크 양식을 자신의 그림 및 건축에 적용하며 되살려낸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 최초의 그로테스크 양식은 라파엘로의 방 작업에 처음 도입된다. 라파엘로가 사망 1년 전인 레오 10세와 카스틸리오네에게 공동으로 보낸 서한에 따르면 발굴 책임자로서 계획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고전 건축 유적과 복원 가능한 곳을 드로잉해 기록하도록 하고,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의 로마 건축은 비트루비우스의 원칙을 고수했기에 그의 이론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게 하고 그에 근거해 작업할 것임을 알린다.[47]
라파엘로는 당시 교회의 당시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서 요구된 이데올로기의 구현을 혁신적이고 뛰어난 결과물을 완성해냈으며 이 작품들은 현재 미켈란젤로의 걸작들과 함께 로마를 넘어 르네상스의 최절정기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당연하게도 고용주이자 후원자인 '레오 10세의 초상'도 그렸으며 1518년에 '악마를 무찌르는 성 미카엘'을 완성하였다. 레오 10세의 조카 로렌초 데 메디치가 프랑스인과 결혼하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하기 위해 라파엘로에게 의뢰한 그림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우호를 위해 의뢰된 중요한 외교적 목적을 가졌다. 또한 이 시기에 레오 10세의 사촌인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48] 의 의뢰로 '빌라 마다마'(Villa Madama) 건축 의뢰를 받아 디자인하였다.[49] 1519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에 7개의 태피스트리가 완성되어 시스티나 예배당에 처음으로 걸렸고 라파엘로는 자신의 그림으로 만든 태피스트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말년의 라파엘로는 브라만테가 설계한 카프리니 궁(Palazzo Caprini)에서 살며 'Groom of the Chamber'라는 명망 있는 타이틀로 숭상 받았으며, 가톨릭 교회의 영광에 기여한 공으로 교황 훈장을 수여 받아 황금 박차 기사단의 기사[50] 가 되었다.
그리고 1520년 '그리스도의 변용'[51] 을 완성한 자신의 37세 생일인 성 금요일(Good Friday)에 8일 동안 고열을 앓은 뒤 사망하였다.[52] '그리스도의 변용'은 공방에서 라파엘로 임종 당시 그의 머리맡에 있었고 바티칸에 엿새간 전시된다.[53] 죽기 전에 판테온에 묻히기를 바랐고 소원은 이루어졌다.[54] 라파엘로의 장례식은 행사 책임자였던 Paris de Grassis 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많은 군중이 집결하여 거대하게 진행되었으며, 4명의 추기경이 그의 사체 운구에 참여하였으며 라파엘로의 손에는 교황 레오 10세가 키스를 하였다고 한다.[55] 판테온의 라파엘로 묘비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당대의 유명 학자, 추기경이자 레오 10세의 비서이던 피에트로 벰보[56] 가 아래와 같은 묘비문(사진 참조)을 남겼다.[57][58]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59]
[60]
3.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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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라파엘로의 사망은 흔히 르네상스 절정기의 끝으로 여겨지며 이후 마니에리즈모를 거쳐 바로크 시대로 이어진다. 라파엘로는 성실함은 기본에 사교적인 성품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의 의뢰를 받아 훌륭히 마무리지었다.[61]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룬 화가답게 그의 그림은 고전 미술의 완성을 보여준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식으로 흡수하여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재창조를 해내는 기량을 발휘했다.[62]
단정한 선과 형태, 명료한 색상, 기품 있는 인물의 자세 연출, 배치와 구도의 극한에 다다랐으며 고전 미술의 최고 덕목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여긴 '우아한 아름다움(Grazia)'의 원형을 만들었다.[63] 서정적인 동시에 역동적이며, 회화적으로 풍요로우면서도 조각적인 견고함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라파엘로는 또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를 절정에 올려놓은 동시에 자신이 이룩한 조화, 균형, 안정감을 토대로 한 르네상스 고전주의 회화에 새로운 도전을 했다. '서명의 방'에서 이룩한 그 정점을 '엘리오도로의 방' 작업에서 스스로 파괴하고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시도하며 매너리즘 양식을 탄생시켰다. 매너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바사리가 한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고대 이래 미술의 절정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 의해 달성되었고 이들보다 더 잘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자신을 포함한 후배 화가들은 이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 완벽한 미술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아테네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정신[64] 을 가장 완벽히 구현하였다고 여겨지며 그 이상을 극한으로 끌어냈다. 중앙 집중형의 대칭적 구성, 인물의 상호 관련성과 건물의 구조에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높게 설치된 돔과 원통형의 궁륭, 거대 조각상이 등장하는 거대한 건물은 레오나르도에 비해 훨씬 복잡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내고 있다. 건물의 기하학적인 정확성과 장대한 공간감은 마사초에서 시작되어 피에로 델 라 프란체스카, 페루지노를 거쳐온 전통인데 라파엘로가 이 그림으로 완성해냈다. '갈라테아의 승리'에서는 회화적 공간을 연출하는 방법으로 원근법적인 광경보다 인체의 움직임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구현해냈고, '아테네 학당'의 엄숙한 이상주의와는 반대로 고전 문화의 화려함과 감각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독일 미술계의 나사렛 운동(Nazarene movement)[65] 과 뒤셀도르프 회화 학교의 종교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에서는 앵그르가 나폴레옹이 전리품으로 가져온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보고 평생의 예술 방향을 결정한다.[66]
라파엘로의 작품은 후대의 레퍼런스가 되었으며 1900년대까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능가하는 르네상스 최고의 미술가로 떠받들어지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파엘로의 명성은 당대부터 8세 연상인 미켈란젤로와 동급으로 여겨졌다. 미켈란젤로 본인은 라파엘로가 죽은지도 22년이 지난 1542년에 쓴 편지에서 '라파엘로가 예술을 알았던 것은 나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67] 이라며 여전히 의식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라이벌이라고 진술했다.[68]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라파엘로 소개에서는 '수백년 동안 미켈란젤로에 비해서는 다재다능하고, 레오나르도에 비하여 다작을 남긴 최고의 화가로 여겨져왔다'[69] 고 언급된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3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화(most famous oil painting in the world)로 불렸다.[70] 초상화는 물론이고 과거 그림의 위계에서 가장 높이 평가 받는 '역사화'에서도 최고의 모델로 추앙받았다.
18세기 영국 왕립미술학교(Royal academy)의 초대 원장으로 24년 동안 재임하며 영국 미술계를 이끈 화가, 교육가로 작위까지 받았던 조슈아 레이놀즈 경[71] 은 라파엘로를 최고로 평가하였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중 누가 더 위냐는 질문이 있고 꼭 답해야 한다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높은 예술의 질에 누가 도달했는가에 답이 존재하고, 의문의 여지 없이 그것은 라파엘로이다. 다만 롱기누스[72]
의 의견을 따른다면 인간으로서 미의 부재와 결핍에 대한 속죄,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 그 자체로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우위이다. 이 두 명의 비범한 사람은 이전의 어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예술의 최상위 레벨에 도달했으며 이후로도 넘어설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73]To the question therefore which ought to hold the first rank, Raffaelle or Michael Angelo, it must be answered that if it is to be given to him, who possessed a greater combination of the higher qualities of the art than any other man there is no doubt but Raffaelle is the first. But if, as Longinus thinks, the sublime, being the highest excellence that human composition can attain to, abundantly compensates the absence of every other beauty, and atones for all other deficiencies, then Michael Angelo demands the preference. These two extraordinary men [i.e. Michelangelo and Raphael] carried some of the higher excellencies of art to a higher degree of perfection than probably they ever achieved before. They have certainly not been excelled or equalled ever since.
- Sir Joshua Reynolds, Discourse 5, 1772링크
17세기 말에서 19세기 말까지 200여년 동안 라파엘로의 신성은 그 누구보다 위로 추앙받아왔으나, 20세기에 접어들며 그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 라파엘 전파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예술가의 자의식에 대한 인식 전환도 동반되며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모습인 개성 넘치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대한 평가가 상승한다.[74]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75] 은 라파엘전파에 대해 쓴 글에서 유럽 예술의 파멸이 서명의 방에서 나왔고 쇠퇴는 라파엘로의 탁월함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76]
유럽 예술의 파멸은 그 방(서명의 방)에서 나왔고, 예술의 쇠퇴는 그의 엄청난 탁월함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그의 위대한 작품에서 얻게 된 실행의 완벽성[77]
과 형태의 아름다움은 모든 예술가들의 주된 목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대 예술가들은 생각보다 실행을, 진실성보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중세 예술에서는 생각이 첫째이고 실행이 다음이지만, 현대 예술에서는 실행이 첫째이고 생각이 다음이다. 그리고 중세 예술에서는 진실성이 첫째이고 아름다움은 두번째이지만, 현대 예술에서는 아름다움이 첫째이고 진실성은 두번째이다. 중세 예술의 원리는 라파엘로에게 전해졌고, 현대의 원리는 라파엘로에게서 온 것이다.The doom of the arts of Europe went forth from that chamber(the Stanza della Segnatura), and it was brought about in great part by the very excellencies of the man who had thus marked the commencement of decline. The perfection of execution and the beauty of feature which were attained in his works, and in those of his great contemporaries, rendered finish of execution and beauty of form the chief objects of all artists; and thenceforward execution was looked for rather than thought, and beauty rather than veracity...... In mediæval art, thought is the first thing, execution the second; in modern art execution is the first thing, and thought the second. And again, in mediæval art, truth is first, beauty second; in modern art, beauty is first, truth second. The mediæval principles led up to Raphael, and the modern principles lead down from him.
- John Ruskin (1853), Pre-Raphaelitism[78]
라파엘로는 유년기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계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있지만, 이후의 삶은 그의 초월적인 능력과 성품이 결합하며 실패 한 번 없이 성공만 반복하며 커리어의 절정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갔고 그 절정에서 추락도 없이 갑자기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현재는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3 대가 중에서 캐릭터의 개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되며
미켈란젤로와 함께 바티칸을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바티칸 박물관 입구 위에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에 피에타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남겼다면, 라파엘로는 '라파엘로의 방(Raphael Rooms)'이라고 불리는 교황의 집무실, 회의실인 서명의 방, 엘리오도로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방 4곳[81] 에 벽화[82] 와 천장화를 남겼으며[83]바티칸 박물관 공식 버추얼 투어 시스티나 예배당의 초대형 태피스트리 10점의 밑그림을 그렸다.[84] 여기에 더해 제대화 3개(그리스도의 변용, 폴리뇨의 성모, 오디 제단화)를 포함한 여러 그림들도 피나코테카에 전시되어 있다. 바티칸 외에도 우피치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영국 내셔널 갤러리, 프라도 미술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들은 그의 작품을 확보하여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건축가로서의 라파엘로는 수백년 동안 저평가 받아왔으나 1980년대 이후 재평가되고 있다. 라파엘로는 회화적 재능을 배경으로 하는 건축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며[85] 1512년에 로마의 키지 예배당을 설계한 것이 첫 작품이다. 바티칸 궁의 레오 10세 로지아[86] 와 비비에나 추기경의 아파트를 만들고 그의 욕실도 장식해주었다. 로마의 빌라 마다마는 마지막 작품이며 완성하지 못했다. 연속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선보여 매너리즘의 또 다른 효시가 되었다.[87] 라파엘로는 또한 1514년 브라만테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그의 사후 작업 대부분은 변형되거나 사라졌다.[88] 라파엘로는 성당의 평면을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 모양으로 바꿨다.
5. 여담[편집]
- 자화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한 미남으로 당시 여성들의 인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약하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외모와는 별개로 그는 여색을 매우 밝혔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동시대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자신의 저서 <미술사 열전>에서 연애의 열병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게 아닐까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다만 정설은 찬 날씨에 연인과의 만남을 위한 잦은 외출로 인한 폐렴이며 의료사고의 가능성도 있다는 논문도 발표되었던 바가 있다. 판테온에서 발굴된 두개골로 3D 복원을 시행하여 공개되기도 하였다.
- 동 시대의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남긴 라파엘로의 모습이 동판화로 남아있다. 1512년 작품으로 파리의 프랑스 국립 도서관 및 LA 미술관, 볼로냐 미술관 등 여러 곳에 전시되어 있다. 라파엘로는 뒤러가 판화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어 라이몬디에게 연구해보도록 권유하여 성공한다. 라이몬디는 라파엘로의 여러 그림을 판화로 남기고 대중화에 성공하게 된다.
- 동시대인인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 뒤러와 접점이 있다. 뒤러가 12세 연상이며 서로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당발이자 자신의 프로모션에 열심히 노력한 뒤러는 유명한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하고 그들의 작품도 소장하기 원했다. 뒤러는 1505년에 안드레냐 만테냐와 조반니 벨리니 등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들들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제로 벨리니를 만나기도 했다. 뒤러는 라파엘로에게도 자신의 자화상[89][90] 을 보낸바 있으며 라파엘로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1515년에 2명의 남자를 적분필로 그린 드로잉을 선물로 보낸다. 뒤러는 라파엘로에게 받았다는 메모를 같이 남겨두었다.[91] 라파엘로의 방에 있는 '오스티아의 전투'의 준비를 위한 드로잉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라파엘로가 왜 완성본을 보내지 않고 드로잉을 보냈냐면 드로잉이 인체의 구성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 천재의 상징으로 '신적 예술가(divino artista)'라 불리며 후대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서 당시 유행했던 골상학자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두개골은 1675년 판테온에서 라파엘로의 흉상이 설치될 때 나무 성물함에 담겨 산 루카 아카데미로 옮겨진다. 1788년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순례 여행 일정 중 하나로 산 루카 아카데미에 들러 라파엘로의 두개골을 보고 존경심을 바쳤다. 한발 더 나아간 괴테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석고 모형과 거푸집을 통해 모형 복제품을 만들어 유명 골상학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젊은 예술가들은 라파엘로 두개골에 연필을 대는 숭배 의식을 통해 그의 재능을 얻고자 했다. 성 누가는 구름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를 보고 그림으로 그려 예술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는데, 괴테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은 라파엘로가 성 누가의 자리를 대체한 것으로까지 여겼다.[93]
- 라파엘로가 1505년에 남긴 모나리자의 스케치가 전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루브르에 있는 모나리자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2개의 모나리자'가 존재한다는 이론이 있다. 그 근거는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의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모나리자를 보고 남긴(본 자리에서 그렸는지 추후에 기억의 의존해서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스케치이며 현재의 모나리자와 달리 인물 뒤에 기둥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전에는 현재의 모나리자는 추후에 레오나르도가 변형을 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1993년 연구 결과 그런 것은 없다고 확인 되었으며 이후의 연구들도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다른 모나리자를 본 것이라는 이론이 떠오른다. 많은 연구자들은 라파엘로의 스케치가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을 기반으로 했을 것이라고 동의한다. 아마도 그림의 모델인 리사 델 조콘도의 남편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1503년 10월에 주문해서 착수한 첫번째 모나리자가 라파엘로가 본 그림일 가능성이 높으며[94] , 1513년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주문한 그림이 아마 현재의 모나리자일 가능성이 높다. 레오나르도가 현재의 모나리자 그림에 1513년에 착수하여 1516년 프랑스 궁에 초청 받아 떠나며 가지고 갔고 1516년이나 1517년까지 수정을 계속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517년에 오른손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미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전시되어 있는 루브르에서는 1503-1506년에 그려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동의하지 않는 사학자들도 많다. 라파엘로는 이 스케치 뒤의 기둥을 자신의 그림 '유니콘과 함께 있는 여인의 초상'에 활용하였고, 현재의 모나리자와 유사한 구도로 '마달레나 스트로치 도니의 초상'을 그렸다. 라파엘로의 이 스케치도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다.링크
- 죽을때까지 독신이었지만 정부(情婦)가 있었는데,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여인으로, 라파엘로보다 10~17살이나 연하였으며[95] '라 포르나리나'(제빵사네 딸)라는 별칭을 가진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라 발레타가 1516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1516년부터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많은 작품의 성모 마리아 모델은 마르게리타라고 추정되고 있다.[96] 이렇게 사랑하면서도 당시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 동거 관계만을 유지한 데는 이유가 있는데, 라파엘로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비비에나 추기경[97] 의 조카인 마리아 비비에나와 1514년 에 약혼하였기 때문이다. 마리아 비비에나는 라파엘로가 사망한 1520년에 같이 죽었다.[98] 라파엘로는 후원자 아고스티노 키지의 도움으로 마르게리타와 비밀 장소에서 만났다고 전해진다. 결혼 상대가 추기경의 조카인데다 추기경 역시 라파엘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형이라 차마 파혼하고 훨씬 미천한 빵집 딸과 결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낼 수도 없었기에 약혼을 해놓고도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버틴 것이다. 하지만 마르게리타를 만난 것이 약혼하고도 2년 후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냥 결혼에 뜻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마르게리타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작품은 '라 포르나리나'인데, 그녀의 왼손에는 약혼반지가 끼어져 있으며 팔에는 'RAPHAEL URBINAS(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글씨가 새겨진 리본을 하고 있다. 그런데 라파엘로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명예를 위해 반지를 덧칠로 지워 버리는 바람에 이 사실은 500년이 지난 2001년에서야 복원 과정에서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라 포르나리나보다 3년 먼저 그려진 라 벨라타도 라 포르나리나의 모델과 외모가 같아서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마르게리타 루티는 라파엘로 사후 수도원으로 갔다고 하며 이후의 일생은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수도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라 포르나리나'의 얼굴은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비비에나 추기경이 조카딸[99] 에게 쓴 편지에 라파엘로의 마지막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혼수 상태에서 잠시 의식을 회복한 그는 주위에서 친구들이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는 "해는 언제 뜨지? (Whence comes the sunshine?)"라고 말하고 "행복해...(Happy.....)"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 라파엘 전파라는 후대의 화파의 라파엘이 바로 라파엘로이다.
- 피카소가 어릴 때부터 라파엘로만큼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 드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정확한 말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건 말 그대로 드립일 뿐이고 피카소는 사실 라파엘로를 극찬한다. 피카소는 교황과 라파엘로, 라 포르나리나(마르게리타 루티)를 그린 에칭을 수십 점 남기기도 했다.링크
'라파엘로처럼 그리는데는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데는 평생이 걸린다.'
'It took me four years to paint like Raphael, but a lifetime to paint like a child.'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했고, 라파엘로는 천국을 주었다.'
'Leonardo da Vinci promises us heaven. Raphael gives it to us.'
- 유로화 이전 이탈리아 50만 리라 지폐의 주인공이다. 앞면에는 '갈라테아의 승리', 뒷면에는 '아테네 학당'의 일부가 그려져 있다.
6. 대중매체[편집]
- 닌자거북이 :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도나텔로와 함께 나온다. 다른 거북이들이 이탈리아 원어로 불리는 것과 달리 라파엘로만 '라파엘'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불린다.
- 가면라이더 고스트 : 가면라이더X가면라이더 고스트&드라이브 초 MOVIE 대전 제네시스에 등장하는 주요 악역. 라파엘로 산치오의 혼이 담긴 아이콘을 사용해 그 능력을 얻은 안마. 등에서 날개를 펼쳐 깃털을 날릴수 있다.
- 핑크레이디 클래식 : 미남이었다는 설정을 반영하여, 상당한 미형 캐릭터로 그려지지만 재수없는 자뻑 설정이 추가되었다.
- 화관의 마돈나 :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존경하여 그에게 그림을 배우러 가던 중 남장한 레오노라와 잠깐 안면을 트기도 한다. 여기서도 자뻑 기믹이 추가되어서, 자기 이름을 들어본 적 없냐는 질문에 레오노라가 모른다고 답하자 '촌놈이군'이라며 혼잣말을 한다.
- 냉정과 열정 사이 : 설정상 남자 주인공 준세이랑 도플갱어 수준으로 닮았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딱히 라파엘로와는 닮지 않은 타케노우치 유타카가 준세이 역을 맡았지만, 그래도 타케노우치 유타카 정도면 충분히 미남이기 때문에.
- 존잘시대 : 실제 기록을 반영하여 그의 실제 성격 그대로 상냥하고 겸손한 성격의 캐릭터로 구현되었다. 외형도 고동빛이 도는 흑발에 녹색눈의 잘생긴 미남이다. 우르비노 공국 출신이며 다 빈치를 존경하고, 바사리와도 안면이 있다. 미켈란젤로와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 듯 하다.
- Why? 미술 편 : 주인공의 조력자인 상당히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유령으로. 그런데 금발 삐죽머리+파란눈으로 생긴 게 실제와 딴판으로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