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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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1. 개요[편집]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은 1961년부터 1972년까지 NASA의 주도로 이루어진 미국의 유인 달 탐사 계획이다. 이를 통해, 1969년부터 1972년까지 6차례에 걸쳐 인간이 달에 발을 디뎠다.
1961년 존 F. 케네디가 취임과 함께 1960년대에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해 출범시켰고, 소련에 뒤쳐졌던 우주 경쟁을 일거에 뒤집었다. 발사장 이름도 케네디 우주센터.
당초 NASA가 구상한 초대형 4단 로켓 1기로 달에 바로 착륙-이륙하는 '직접 도달', 여러 로켓으로 올린 각종 선체를 지구궤도에서 조립해서 가는 '지구궤도 랑데뷰', 우주인과 착륙선을 유무인 로켓 2대로 따로 달에 보내는 '달표면 랑데뷰'를 뒤집고, 로켓 1대로 사령선-기계선-달탐사선을 쏘아 달궤도에서 달탐사선만 착륙 후, 사령과 달탐사선 상단이 '달궤도 랑데뷰'로 귀환[3] 하는 방식으로 최초로 인간을 달에 보낸 미션이다.
2. 구조[편집]
3단 로켓인 새턴 V 로켓 3단 상부에 사령선-기계선-달착륙선 모듈이 있으며, 사령선 위에 비상탈출로켓이 장착되어 있다.
아폴로 15호부터는 월면차를 가져가 이용하기도 했다.
- 달착륙선 (LM)
3. 역사[편집]
3.1. 시작된 달 경쟁[편집]
"사람이 다단계 로켓에 타고서 대기권을 벗어나서 달의 중력이 미치는 곳으로 가 무사히 착륙한 후 과학적 관측을 한 다음에, 지구로 무사히 돌아온다는 것은 쥘 베른의 엉뚱한 상상 속에서나 가치있는 일이죠. 저는 미래가 어떻게 발전하든지, 인간이 그런 항해를 할 수 없으리라고 장담합니다."[원문1]
리 드 포레스트 박사, Lewiston Morning Tribune 1957년 2월 25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5]
아폴로 계획의 시작은 소련이 인류 최초로 우주로 쏘아보낸 스푸트니크 무인위성에서 시작된다. 적성국이었으나 자국에 비해 여러모로 뒤쳐진 나라라고 여겼던 소련이 제일 먼저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불리는 사회적인 충격을 받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소련보다 달에 사람을 먼저 착륙시킨 후 귀환시킴으로써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가지고자 했다.
1960년대의 미국은 이 계획에 집착하듯이 달라붙었는데, 이는 한때 NASA의 예산이 미국 GDP의 0.75%를 차지했던 시절이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6][7]
아폴로 계획에 투입된 총 예산은 1973년 봄에 NASA가 의회에 공식적으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254억 달러인데, 이는 당시 미국 GDP(약 1.4조 달러)의 1.8%, 미국 예산(2,463억 달러)의 10.3%에 육박했던 데다가 당시 대한민국 GDP(약 139억 달러)의 2배에 육박하는 금액이었으며, 심지어 당시 GDP 순위 세계 25위를 기록한 터키의 전체 GDP(약 257억 달러)와 동급이었다.
아폴로 계획에 투입된 자금을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 1722.1억 달러(약 206.7조 원)이다. 이는 2021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예산(6150억 원)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고, 2022년 나사의 현재 1년 예산(240.4억 달러)의 7배 이상에 달하며, 2023년 기준으로도 미국 GDP[IMF] (약 26.9조 달러)의 0.6%, 미국 예산(약 5.8조 달러)의 약 3%, 한국 GDP[IMF] (약 1.7조 달러)의 10%, 한국 예산(638.7조 원)의 약 32.4%를 기록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세계 2위 수준의 국방예산을 기록한 2023년 중국 국방예산(약 2,240억 달러)의 3/4 이상에 달한다. 거기다가 마셜 계획에 투입된 공식 금액을 2023년 환율로 환산한 금액이 약 1,794억 달러라는 것을 감안하면[8] 한 프로그램에 이 정도 거액을 투입한 미국이 아폴로 계획에 얼마나 큰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1961년, 소련이 보스토크 1호로 세계 최초의 유인우주선 제작국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자, 미국은 가뜩이나 스푸트니크로 상처받은 자존심에 비수가 꽂힌 느낌이었다.
미국도 이에 응수하기 위해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 후 한 달도 안 되어 머큐리 계획을 통해 첫 우주비행을 감행하였다.
앨런 셰퍼드가 탑승한 프리덤 7호를 머큐리 계획의 일환으로 발사했으나, 로켓의 파워부족으로 소련의 보스토크가 지구를 한바퀴 돌고 온 것과는 달리 준궤도비행으로 그쳤다.
이후 리버티 벨 7호(거스 그리섬)까지도 탄도비행에 그쳤고, 3차 우주비행인 프렌드십 7호(존 글렌)에서야 겨우 궤도비행에 성공했다.
3.2. 미국의 선공[편집]
당시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우주 경쟁에서의 소련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고 1961년 5월 25일 국회에서 그 유명한 "1960년대 안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연설을 통해 달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최초로 언급했다.I believe that this nation should commit itself to achieving the goal, before this decade is out, of landing a man on the moon and returning him safely to the earth.
-전 우리나라가 10년 안에 달에 사람을 보내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962년 9월 12일 휴스턴[10] 에 위치한 라이스 대학교 경기장에서의 연설에서 보다 명확히 했으며, 특히 이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한 나머지 지금도 여러곳에서 인용되고 있다.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9]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3.3. 소련의 반응과 이후[편집]
연설 직후 소련의 우주개발을 이끌던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소련도 달 탐사에 나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흐루쇼프는 큰 비용이 드는 모험을 내켜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코롤료프에게 달 탐사에 필요한 비용이 얼마인지 물었고, 코롤료프는 잘 모르지만 금액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자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소련은 우선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많다"면서 달 탐사에 부정적이었다. 경제력이 풍족하던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한정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예산을 무조건 달 탐사에 올인할수는 없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단 큰소리 치기는 했지만, 계획이 계획인 만큼 워낙 큰 돈이 들고, 기술도 부족하여 케네디는 당시 루나 2호를 달 뒤편에 충돌시키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던 소련과의 연합 계획도 고려하게 되었다.
케네디는 두 차례에 걸쳐 흐루쇼프에게 기술-자금 협력을 제안했지만 당시 소련의 기술이 훨씬 앞섰기 때문에 기술 유출을 우려한 흐루쇼프의 반대와 케네디의 암살로 결국 양국은 독자적으로 달 탐사를 추진하게 된다.
한편 진 크랜츠를 비롯한 나사 직원들도 이 연설을 듣고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지금 머큐리도 간신히 올려놓은 판국에, 사람을 달로 보낸다니? 소련을 따라잡기도 벅찬데?"
그러나 그 직후 NASA에는 일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줄을 섰다. 크랜츠의 회고에 따르면 "좋아. 저 인간이 우릴 믿어주는데 한번 해봐야지!" 이런 분위기였다고 한다.
결국 NASA 전체는 자발적인 크런치 모드로 돌입했다. NASA 직원들이 갈려나간 것은 기본이며, 이들과 함께 하는 노스 아메리칸[11] , 그루먼[12] , 더글라스, 보잉[13] 같은 당대의 주요 항공/군사 기업 엔지니어들도 가족 얼굴을 보기 힘들어질 정도로 아폴로 계획에 인생을 바쳤다.
달 착륙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NASA의 연구 개발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달까지 보내기 위한 거대 로켓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는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의 주도 하에 진행된 새턴 V 로켓의 개발 프로젝트였다.
두 번째는 달 착륙 미션 과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실질적인 비행 기술을 테스트하고 익히는 것이다. 이것이 머큐리 계획 이후에 진행된 제미니 계획이었다. 제미니 계획 동안 랑데부, 도킹, 우주 유영, 장기간 우주 체류 등 달 착륙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에 대한 테스트가 이루어졌다.
4. 아폴로 계획의 전모[편집]
이렇게 서로의 자존심을 건 레이스가 시작되었고, 두 나라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최고의 시험비행사들을 모아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하면서 하드웨어를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소련은 루나 무인 탐사선들을[14] ,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의 주도하에 레인저[15] , 서베이어[16] , 루나오비터를 보내 착륙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폴로 계획의 세부일정 수립을 총괄하던 오언 메이너드(Owen Maynard)는 아폴로 계획의 세부 미션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4.1. 아폴로 1호[편집]
유인 테스트 비행은 미국이 먼저 시작했다. 미국은 아폴로 1호의 발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우주인들은 각각 거스 그리섬, 에드워드 화이트 그리고 로저 채피로 선발되었다.
AS-204 미션의 목적은 향후 아폴로 계획의 사령선과 기계선으로 쓰일 기체의 작동과 통신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미션을 목적을 봐도 알겠지만, 이 미션은 정식 아폴로 미션이 아니었고 아폴로 1호 발사에 대비해 계속되었던 여러 훈련 및 테스트 미션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NASA는 케네디가 했던 1960년대 이내에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귀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 엄청나게 촉박한 일정에 시달리고 있었다.[18] NASA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단 제껴. 시간 없어."로 일관하면서 시험비행들을 강행했다고 한다.
그러던 1967년 1월 27일, 케이프 커내버럴에서 새턴 IB 로켓이 투입된 AS-204 미션 훈련 중 사령선 기체를 테스트하기 위해 우주비행사 3인이 탑승해 있던 중 사령선 내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사령선의 문을 여닫는 부분의 전선의 피복이 벗겨져서 생긴 스파크였는데, 당시 사령선 내부의 공기는 순수한 산소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스파크는 순식간에 격렬한 화염으로 확산되고 말았다.
우주비행사들은 급히 탈출하려고 했지만 당시 사령선의 해치는 안전 문제 때문에 열리는 데 90초가 걸렸는데 화재로 인한 폭발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5초였다. 애초에 탈출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해치가 열리기 전에 3명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21]
- 거스 그리섬 (Gus Grissom) - NASA 우주인단 1기. 일명 머큐리 세븐의 한명이다. 아폴로 1호의 사령관이자 미 공군 중령으로(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다.) 이전에도 사고기록이 있었다. 머큐리 계획 중 리버티 벨 7호를 타고 두 번째 탄도비행을 성공시킨 우주인이 되었는데, 착수 직후 우주선 캡슐 해치가 저절로 열려버려[22] 익사할 뻔 했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리섬 중령의 과실로 여겨졌다가 재조사후 해치의 오작동 문제로 밝혀졌는데 이 때문에 그리섬 중령은 징계를 받지 않고 아폴로 1호의 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리섬은 아폴로 1호의 해치를 쉽게 열리지 않도록 하고 문을 안으로[23] 열리도록 설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 에드워드 화이트 (Edward White) - NASA 우주인단 2기. 일명 'New Nine'의 한명으로, 닐 암스트롱과 동기이며 매우 친밀하게 지낸 사이이다. 시니어 파일럿으로 미국 최초로 우주유영을 하였다. 구명줄만 잡고 나간 소련의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달리, 우주 총(가스를 분출해 작용 반작용의 원리로 우주유영이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을 사용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우주를 돌아다녔던 경력이 있으며 사고 당시 해치를 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 로저 채피 (Roger Chaffee) - NASA 우주인단 3기.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 데이비드 스콧 등과 동기이다. 미 해군 소령,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 상공에서 정찰임무를 수행하였는데 U-2[24] 를 조종했다는 설이 있고 A-3 스카이워리어를 조종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 당시 미션들이 죄다 일급 기밀이라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사고 당시 통신회선에 "화재다!"라고 외친 사람이다.
참사의 원인은 그야말로 여러 가지 사소한 부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태를 키운 것. 우선 일부 배선 하네스가 사령선 출입문 근처에 배치되어 문을 여닫을 때 씹히면서 배선 피복이 벗겨져 전원 공급시 스파크가 튈 가능성이 있었다.
이 스파크가 조종석 하단의 나일론 망 등의 가연물질에 튀었고, 일상적인 대기 중에서는 그정도의 불꽃으로 큰 화재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당시 아폴로 1호 사령선 내에는 100% 순산소가 공급된 상태였다. 그것도 무중력 하의 선내 압력조건 재현을 위해 가압된 상태로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해치가 안쪽으로 열리게 설계되어 선내가 가압된 상태[25] 에서는 설사 해치 잠금장치를 제때 풀었더라도 해치를 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순식간에 사령선은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리고 해치가 열리는데는 90초가 소요되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해치가 열리기 전에 우주비행사 3인 전원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NASA는 계획을 중단하고 사령선을 재설계했다. 화재에 대비해 가연성 재료를 불연성으로 교체하고, 배선을 보호물질로 덮었으며, 선내 공기를 산소 100%에서 산소 60%와 질소 40%의 혼합기체로 변경했다. 또한, 해치를 여는데 걸리는 시간을 7초로 줄였다.
이러한 재설계를 위해 아폴로 계획은 1년 이상 지체되고 말았다. 결국 사령선이 재설계되는 동안 새턴 V 로켓의 무인 발사가 진행되었고, 이후 시간에 쫒기게 된 아폴로 계획은 8호와 같은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그리고 죽은 우주비행사들이 탑승한 우주선은 비록 비행은 하지 못했지만, 아폴로 1호가 되었다. 원래 이 미션은 AS-204라는 이름의 임무로, 아폴로 1호 미션을 대비한 훈련이었다.
그전에 실시된 유사한 3회의 미션은 AS-201, AS-202, AS-203으로만 불릴 뿐 아폴로 몇 호라는 식으로 불리지 않았다. AS-204 역시 원래 그러한 아폴로 1호를 대비한 훈련미션 가운데 하나였으나 사고로 희생된 우주비행사들의 유가족들이 아폴로 1호로 명명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고, 결국 그들을 달래기 위해 아폴로 1호로 명명되었다.
존슨 위원회가 자세한 원인을 규명하겠지만, 원인은 분명하다. 바로 우리다. 준비도 안 되어있었고, 장비도 불충분했고,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아무도! 아무도 중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철저'와 '완전'을 신조로 삼자.
이 사건을 경험한 NASA 직원들은 이 사건을 '그 화재'로 가리키며 죽은 이들을 기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NASA의 인명피해는 계속 이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이 사건 19주기 하고도 딱 하루가 지난 1986년 1월 28일 챌린저 우주왕복선이 발사 도중 폭발했고, 1월 중순 발사하느라 앞선 참사들의 추모식을 좀 일찍 치르고 우주에 올라갔던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이 2003년 2월 1일에 귀환 도중 공중분해되었다.
이 참사는 HBO 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 2화 전체를 할애하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영화 퍼스트맨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4.2. 아폴로 4호, 5호, 6호[편집]
아폴로 2호, 3호는 없다.
훈련미션이었던 AS-204의 우주비행사들이 사망하면서 AS-204가 아폴로 1호로 승격 명명되면서 아폴로 미션 전체의 넘버링이 완전히 꼬여버리게 되었다.
결국 NASA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 AS-204를 아폴로 1호로 못박는다. 하지만 다른 테스트 미션들을 아폴로 계획으로 승격시키지는 않는다.
- 아폴로 2, 3호는 비워둔다.
- 향후 계획된 테스트 미션 중에서 새턴 로켓이 실제 투입되어 발사되는 AS-501부터 전부 아폴로 미션으로 승격하여 명명한다.
이에 따라 새턴 로켓을 실험하기 위한 추진 중이었던 AS-501, AS-502, AS-503 미션도 졸지에 아폴로 계획으로 승격되어 아폴로 4,5,6호가 되었다. 졸지에 아폴로 4호~6호가 된 3개의 미션은 사람이 탑승하지 않은 채로 발사된 무인 미션이며, 새로 개발한 새턴V 로켓(4호, 6호)과 달착륙선(5호)을 테스트하기 위한 미션이었다.
1967년 11월 9일, 아폴로 4호가 최초로 새턴 V 로켓을 사용해서 발사되었다.[* 새턴 V는 지금까지도 발사된 최대 크기의 로켓으로[26] , 높이 110m, 300만개의 부품, 약 370만 리터의 연료를 실을 수 있었다.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개발된 로켓을 합쳐도 가장 무겁고, 큰 로켓이다. 만재시 무게는 2,970톤. 물론 새턴 V급의 로켓을 못 만드는건 현대의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저런 괴물'을 만들 필요가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다.
나사가 아폴로 계획의 후속으로 계획했던 컨스털레이션 계획에서 사용될 예정이었던 로켓, 아레스 V의 경우는 새턴 V보다 거대하고, 더 높은 성능을 가질 예정이었다. 물론 계획이 취소되었기에 이 로켓을 볼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리는줄 알았으나, 새턴 V급으로 큰 로켓인 SLS 로켓과 스페이스X의 신형 발사체인 스타십이 곧 발사를 시작할 것이다.]
1968년 1월 22일, 아폴로 5호가 2단형인 새턴 IB[27] 로켓에 의해 발사되었고 달착륙선을 테스트했다.
1968년 4월 4일, 아폴로 6호가 새턴 V 로켓으로 발사되었다. 아폴로 4호와 6호는 로켓이 분리되는 장면을 촬영함으로서 TV에서 새턴 V 로켓의 1단과 2단이 분리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아폴로 4호~6호는 새턴 V 로켓 및 달착륙선의 기계적인 테스트를 위한 성격의 무인 미션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아폴로 미션은 유인미션인 7호부터라 볼 수 있다.
4.3. 아폴로 7호[편집]
아폴로 계획에서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 미션이다. 1968년 10월 11일에 새턴 IB 로켓에 의해 발사되었으며, 달 착륙선은 실려있지 않았다.
탑승한 우주비행사는 머큐리 세븐의 일원인 월리 시라(사령관)[28] , 돈 아이즐리[29] (사령선 조종사), 월터 커닝햄(달착륙선 조종사)이다.
4.4. 아폴로 8호[편집]
1968년 12월 11일 발사.
새턴 V 로켓이 유인 비행에 첫 투입된 아폴로 계획이다.[30]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궤도를 벗어나 달 궤도에 갔다 온 미션으로, 아폴로 계획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을 이룬 미션이다.
인류가 지구궤도를 벗어나 최초로 다른 천체로 향한 대 업적이라 칭할 수 있다.
달에 직접 착륙한 아폴로 11호만큼이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미션으로 평가된다.
아폴로 8호 문서로.
4.5. 아폴로 9호[편집]
1969년 3월 3일, 새턴 V 로켓으로 발사되었으며, 지구 궤도를 돌면서 달 착륙선과 우주복의 안전성을 시험했다.
탑승한 우주비행사는 제임스 맥디비트(사령관), 데이비드 스콧(사령선 조종사), 러스티 슈바이카트(달착륙선 조종사).
우주복 안정성 시험을 위한 우주유영 준비 중 슈바이카트가 구토를 하는 바람에 잠시 임무가 지연되었으나 모든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이 중 스콧은 아폴로 15호 사령관으로 달에 착륙하였다.
아폴로 9호 문서로.
4.6. 아폴로 10호[편집]
1969년 5월 18일 발사.
이는 달 착륙을 한 역사적인 아폴로 11호의 바로 직전 미션이었다.
성과라면 달 궤도에서 달 착륙선 실험. 여기에서 더욱 유명한 것은 사령선 내부에서 누군가의 똥(...)이 둥둥 떠다닌 사건이었다.
아폴로 10호 문서로.
4.7. 아폴로 11호[편집]
1969년 7월 16일 발사.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외의 천체에 발을 디디게 된 역사적인 미션이다.
아폴로 11호 문서로.
4.8. 아폴로 12호[편집]
"SCE를 Aux로!"
"SCE Aux로? 그게 뭔데?"(SCE to Aux? What the hell's that?)[31]
1969년 11월 14일 발사된 인간의 2번째 달 착륙이다.
아폴로 12호 문서로.
4.9. 아폴로 13호[편집]
간단히 말하자면 아폴로 13호는 폭발했고, 우주비행사 3명은 죽을 뻔했으며, 지구에서 가장 멀리 나가본 인간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미션에는 실패했으나 귀환에는 성공하여 Successful Failure(성공적 실패)라고 이름붙여졌다.
1970년 4월 11일에 발사되었다.
아폴로 13호 문서로.
4.10. 아폴로 14호[편집]
1971년 1월 31일 발사 ~ 1971년 2월 5일 프라 마우로 크레이터에 착륙
이곳은 아폴로 13호가 착륙하려다 실패한 곳이다.
우주비행사는 앨런 셰퍼드(사령관), 스튜어트 루사(사령선 조종사), 에드거 미첼(달착륙선 조종사)이다.
4.11. 아폴로 15호[편집]
1971년 7월 26일 발사
데이비드 스콧(사령관), 앨프리드 워든(사령선 조종사), 제임스 어윈(달착륙선 조종사)이 탑승했다.
신형 우주복을 사용한 첫 임무이고, 로버(rover)라는 이름의 월면차를 사용한 최초의 달 탐험대이며, 3회의 선외활동을 행한 최초의 미션이다.
4.12. 아폴로 16호[편집]
1972년 4월 16일에 발사되었으며, 승무원은 존 영(사령관), 켄 매팅리(사령선 조종사), 찰스 듀크(달착륙선 조종사)이다.[32]
4.13. 아폴로 17호[편집]
1972년 12월 7일, 새벽 5시 33분 발사
아폴로 유인 비행 중 유일한 야간 발사였다.
유진 서넌 (사령관), 로널드 애번스 (사령선 조종사), 해리슨 슈미트 (달착륙선 조종사)가 탑승했다.
이후로 인류는 50년이 다 되도록 달에 다시 가지 않았다.
국제 공동의 달 탐사 미션인 아르테미스 계획에 따라 53년이 지난 2025년에 인류가 다시 달에 발을 디딜 예정..이지만 스타십 HLS가 개발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2025년에 다시 달에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4.14. 스카이랩[편집]
1973년 5월 14일(1호)가 새턴 V 로켓으로, 이어 5월 29일(2호), 7월 28일(3호), 11월 16일(4호)까지 새턴 IB 로켓으로 발사되었다.
아폴로 13호의 실패 이후 아폴로 계획은 20호까지였던 원래 계획에서 17호까지로 축소되었지만,(취소된 아폴로 미션들 문서로.) 이미 만들어진 아폴로 우주선은 스카이랩 계획에 재활용된 경우이다.
이를 통해 유인 아폴로 우주선 3대(3개 팀이 다녀왔으므로)가 사용되었으나 아폴로 00호라는 이름 대신 스카이랩 2호, 3호, 4호(스카이랩 1호는 스카이랩 본체)라는 번호가 붙여졌다. 스카이랩 항목과 우주 정거장 문서로.
우주인 왕복 용도로 지구 저궤도용 새턴 로켓인 새턴 IB형이 사용되었다. 즉, 스카이랩 본체를 띄운 스카이랩 1호 이후로는 부품 수송용으로 새턴 V대신 새턴 IB가 투입된 것이다.
4.15.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편집]
최후의 아폴로 미션으로, 새턴 IV로 1975년 7월 15일에 발사되었다.
아폴로 우주선의 승무원은 토머스 스태퍼드(사령관), 밴스 브랜드(우주선 조종사), 디크 슬레이튼(도킹모듈 담당)이다.[33]
소유즈 우주선의 승무원은 알렉세이 레오노프(사령관)와 발레리 쿠바쇼프[34] 이다.
이 미션에서도 귀환 도중 열어둔 감압 밸브로 추진기의 하이드라진 퓸이 사령선 안에 흘러들어오는 바람에 세 우주비행사가 하마터면 하이드라진 중독으로 사망할 뻔한 사고가 있었다.
이 임무가 끝난 이후 아폴로 계획에 사용된 LC-39A 발사대는 폐쇄되어 우주왕복선용으로 리모델링하였다.
이후 STS-135까지 우주왕복선을 이곳에서 발사한 후 지금은 팰컨 헤비용으로 쓰이고 있다.
4.16. 결산[편집]
아폴로 계획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유는 실패한 미션이 2개(아폴로 1호, 아폴로 13호)뿐이고, 사망자도 아폴로 1호 미션의 3명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35]
아폴로 13호는 연료전지의 이상으로 기계선이 폭발하는 사고를 겪었지만, 승무원들이 달 착륙선으로 대피해 우주선을 수동으로 조종한 끝에 결국 지구로의 귀환에 성공하였다. 이는 후에 영화로도 나오게 된다.[36]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아쉽게도 문레이스 도중 사망하여 그 끝을 볼 수 없었고, 그 이후 소련의 우주개발부를 맡은 바실리 미신 시대에 아폴로가 달에 착륙함으로서 끝이 났다.
그러나 소련은 유인 달착륙 대신 우주 정거장에 매달렸고, 1970년대에는 살류트, 1980년대~1990년대에는 미르를 운용했으며, 2000년대부터 운용한 ISS에서도 거대 물주로 부상하였다.
4.17. 성과[편집]
총 250억 달러를 들인 아폴로 계획을 통해 미국은 돈으로 계량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얻었다.
처절한 냉전 체제에서 자유진영 종주국으로서의 위신을 세우고, 인류의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 가장 큰 성과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립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위는 1990년대 들어 구 소련 공산주의 진영의 궤멸과 맞물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폴로 계획을 통해 축적된 우주과학기술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 로켓, 궤도 계산, 형상기억합금, 심우주 통신, 도킹... 전부 머큐리 - 제미니 - 아폴로 계획을 통해 다듬어진 기술들이다.[37]
"당시의 미국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덜떨어진 음모론자들이 있지만,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적 처리 기술을 제외한다면 다른 우주과학 핵심기술은 이미 아폴로 계획 시점에서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봐도 좋다. 당장 아폴로 계획에 사용된 추력 3,000톤(!)을 훨씬 넘어서는 새턴 V 로켓만 보더라도, 그 이후 다른 국가들이 만든 어떤 우주비행체도 1960년대 미국이 개발한 이 초거대 로켓의 힘을 넘어서지 못했다.[38][39]
이외에도 아폴로 계획을 통해 얻어진 과학적 업적들이 만만치 않다. 385kg의 월석과 월토를 직접 채취해왔고, 달에 설치한 지진계를 통해 달의 내부 구조가 지구와 유사하다는 점을 파악했으며, 11호, 14호, 15호가 총 3개의 레이저 반사경을 설치하고 옴으로써 달과 지구의 거리 및 달의 궤도를 보다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또한 월석과 월토의 분석을 통해 달에 매장되어 있는 자원이나 달의 생성연도 등을 추정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월토에서 생명체 반응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박테리아조차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폴로 미션을 통해 얻어진 월석과 각종 데이터들을 이용한 과학 연구는 2010년대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관련 기사
아폴로 11호가 가져온 월석은 1970 오사카 엑스포를 통해 최초로 민간에 공개되었고, 지금도 스미소니언 등 각국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폴로 11호 월석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직접 선물한 것으로 현재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서 대통령기록물로 보존 중이다.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목록
4.18. 달 경쟁의 이면[편집]
소련 역시 유인 달 탐사 계획을 진행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N1이다.
그러나 이 로켓은 1969년 3월 7일에 폭발하고 말았다.[40]
소련은 어떻게든 계획을 지속하려고 했지만, 그해에 7월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면서 경쟁은 끝났고, 남은 부품도 모조리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소련은 로봇 탐사선 루나호를 이용한 무인 탐사 쪽에 더 주력하는 한편 우주 정거장에 올인해서 살류트, 미르 등의 걸작 우주정거장을 만들었다. ISS(국제 우주 정거장)도 비록 하드웨어는 미국이 대부분 제공했지만, 운영은 러시아의 노하우 덕분에 돌아간다.
원래 아폴로 계획은 아폴로 20호까지 계획되어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41] 과 사회복지 프로그램들로 인해 달착륙을 목적으로 한 마지막 3개의 미션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18호[42] 는 달에 가는 대신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 사용되어 우주에서 소련의 소유즈 19호와 도킹을 했다.[43] 다만 발사 로켓으로는 새턴 V를 쓰는 대신, 지구 저궤도용인 새턴 IB를 썼다.
남은 세대의 새턴 V 로켓중 하나는 개조되어 스카이랩 발사에 사용되었다. 남은 로켓 두 대는 휴스턴 우주 센터[44] 와 케이프 커내버럴 로켓 박물관에 누워있고, 기타 남은 하드웨어들은 미국 각지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NASA는 오리온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5월 새로운 달 유인 탐사 계획인 아르테미스 계획을 발표했다.
2024년 아르테미스 3호가 아폴로 17호 이후 52년만에 달에 다시 유인 착륙을 할 예정이다.
5. 이미지로 보는 아폴로 계획[편집]
6. 우주인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편집]
달에 다녀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아폴로 우주선에 타더라도, 달에 가기 위해서는 여러 난관을 넘어야 한다.
- 달에 내리는 사람은 두 명이므로, 달을 밟고 싶으면 달착륙선 조종사가 되거나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 사령선 조종사는 상대적으로 주목이 덜한데 어지간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폴로 11호에서 버즈 올드린까지는 기억해도 콜린스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실 짬밥이나 비행 경력으로 따지면 사령선 조종사의 능력이 더 좋다고 보는 것이 적절함에도 세간의 이목은 달에만 가 있다. 예를 들어 11호의 멤버는 원래 올드린이 사령선 조종사였고 착륙선 조종사는 초짜인 프레드 헤이즈가 맡았지만 이런 중대한 미션에는 더 능력있는 파일럿이 필요하다며 콜린스를 사령선 조종사로 배치한 뒤 올드린을 LM으로 보내고 헤이즈를 제외하였다. 또한 8호와 9호, 10호, 11호, 12호, 14호의 사령선 조종사들은 모두 이후 미션에서 사령관 직위를 보장받았다.(13호의 잭 스와이거트는 귀환 후 NASA를 나와서 헤이즈가 대신 19호 사령관으로 예정되었다)
- 아폴로 우주선은 매우 좁다. 의자 세 개가 있는 비좁은 사령선 안에서 1주일 넘게 버텨야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남자 세 명이 어깨를 맞대고 지내보면 우주비행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49]
- 배설물을 몸에서 내보내고 싶으면 몸에 비닐 주머니를 붙이고 힘을 준 후, 비닐 주머니 입구를 잘 막고 처리해야 한다. 제대로 막지 않으면 똥이나 오줌이 선실을 둥둥 떠다니는 비극이 일어난다.(더러운 건 둘째치고, 배설물이 장비에 들어갈 경우 각종 장비에 결함을 일으킬 수 있다.) 아폴로 10호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아폴로 13호는 오물을 밖으로 내보냈다간 우주선 궤도가 비뚤어질 수 있어서 밖으로 내보내지도 못했다[50] 제대로 된 화장실이 설치된 곳은 우주왕복선이나 우주 정거장 정도다.
- 화장실에서 목욕도 못하고 1주일 이상 지내면 내부 공기가 굉장히 탁해진다. 산소가 모자라는 건 아니지만(...).
- 우주 식량은 맛이 없다. 맛도 맛이고 먹는 장소의 특성상 음식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 목숨을 위협하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우주 비행사들의 아내들 역시 정신적인 고통이 매우 심했다. 프랭크 보먼의 아내는 알코올 중독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고, 닐 암스트롱, 피트 콘래드, 존 영, 토머스 스태퍼드 등 수많은 우주 비행사들은 끝내 아내와 갈라서야 했으며, 에드 화이트의 아내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등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가 남편의 사망 이후 재혼을 했음에도 정신적 방황이 이어지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온갖 험한 꼴을 다 겪으면서도 백년해로하는 짐 러블 같은 사례는 양호한 편이다.[51] 아내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의 11화에 묘사되어 있다.
7. 아폴로 계획 음모론[편집]
해당 문서로.
8. 기타[편집]
- 아폴로 계획의 달착륙선은 착륙후 귀환시 하드웨어 분리 없이 달궤도에 진입이 가능한 인류가 만든 몇 안되는 발사체중 하나이다. 이른바 SSTO. 소련 달계획의 몇몇 착륙선 또한 하드웨어 분리없이 달궤도 진입이 가능하다. 달의 적은 중력때문에 가능한 것.[52]
- 구글 어스에서 보기메뉴에서 탐색영역을 달로 설정해서 실제 아폴로 착륙장소를 3D, 파노라마, 이동경로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아폴로 11호 미션의 가이드를 볼 경우 달착륙선의 시점에서 착륙하는걸 볼 수 있다.
- 외국의 한 디자이너가 아폴로 미션 로고들을 이용하여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 달에 간 우주인은 달에 많은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이는 달착륙선의 이륙 중량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버려진 물건은 대부분 달 표편에서만 사용했던 물건들로, 선외용 생명유지장치, 우주복 덧신, 카메라 등이며, 그외 두명의 우주인의 배설물도 있는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이 배설물은 우주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샘플로 보고 있다.
- 여담으로 프로젝트 A119라고 미 공군이 1958년부터 독자적으로 시행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바로 달 표면에 핵폭탄을 터트리겠단 계획이다. 소련도 비슷한 시기에 프로젝트 E란 달 핵실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다행히도 양쪽 우주국의 달 방사능 오염에 의한 미래 달탐사 방해우려로 실행되지 못했다.
8.1. 탑재 컴퓨터와 프로그램[편집]
- 아폴로 계획에서 기체에 탑재되는 컴퓨터는 모두 4개였다. 새턴 V의 유도 컴퓨터인 LVDC, 사령기계선과 달 착륙선의 주 컴퓨터인 AGC, 달 착륙선의 보조 컴퓨터인 AEA가 있었다.
- 아폴로 우주선에 탑재된 유도컴퓨터, 소위 AGC는 클럭스피드 2048KHz 컴퓨터로 DSKY라 불리는 디스플레이와 키보드를 통하여 조직하는 물건이었다. 0~9까지의 숫자, 부호, Verb, Noun, Enter, Pro 키를 조합하여 컴퓨터를 조작하였고 숫자 디스플레이로 컴퓨터의 데이터가 출력되었다.[54] 사령선과 달 착륙선에 설치된 그 컴퓨터는 당시 세상에서 제일 작고 크기 대비 성능이 좋은 컴퓨터였다. 연산 능력이 이로부터 10년 넘게 지난 뒤 등장한 컴퓨터인 패밀리 컴퓨터의 두 배에 달할 정도. 새턴 로켓의 관제 컴퓨터와 함께 집적회로를 최초로 사용한 컴퓨터이기도 하다. 그나마도 11호 미션에선 달에 착륙을 시도하는 중에 오류가 발생했지만 큰 탈은 없었다.
- 이 오류는 1201번 알람[55] 및 1202번 알람[56] 이란 것으로, 컴퓨터의 메모리가 가득 차서 컴퓨터를 재시동하고 착륙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의 알람이었다. 이 오류의 원인은 오늘날 정확히 분석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달착륙선의 랑데부 레이더 때문이었다. 달 착륙선의 전력 회로 설계 결함으로 발생한 잘못된 랑데부 레이더 정보가 계속 컴퓨터로 계속 보내지며 달착륙 프로그램을 수행할 메모리를 잡아먹어 달착륙 프로그램이 수행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달 착륙선에는 AGC 외에도 AGS(Abort Guidance System)라 불리는 별도의 보조 유도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AEA(Abort Electronics Assembly)라는 별도의 컴퓨터가 탑재되어 있었다. AGS는 TRW라는 회사에서 제작했는데, AEA는 AGC보다 가볍고 전력 소모가 적었다. AGS도 AGC처럼 별도의 키보드와 디스플레이가 있었으며 달 착륙선의 AGC나 주 유도시스템이 고장났을 때, AGC를 대신하여 달에서 이륙하고 랑데뷰를 수행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착륙, 이륙 시에는 AGS가 항상 작동하며 주 유도 시스템이 고장나는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또한 AGC와 AGS의 유도 데이터를 비교해가며 두 유도 시스템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다. AEA는 순차 접근 메모리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처리 속도는 AGC보다 느렸지만, 일부 연산은 비슷하거나 더 빠르기도 하였다.
- 아폴로 우주선을 탑재하였던 새턴 V 로켓에는 LVDC(Launch Vehicle Digital Computer) 라는 디지털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었다. 이 컴퓨터는 FCC(Flight Control Computer)라는 아날로그 컴퓨터와 연결되어 자동으로 새턴 V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LVDC는 7개의 파이프라인을 가지는 동일한 논리 시스템을 3중으로 탑재 하였는데, 각각 파이프라인 단계에서 가장 많이 나온 연산값을 도출하여 다음 단계로 넘기는 투표 시스템이 있었다.[57] 따라서 LVDC는 매우 높은 신뢰성을 가질 수 있었다. 발사중인 새턴 V는 온전히 LVDC에 의해서 제어 되었으며, 궤도에 오르기 전 까지는 외부에서 제어할 수 없었다.
- 아폴로 11호를 달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데 꼭 필요한 비행컴퓨터의 소프트웨어의 개발에는 마가렛 해밀튼(Margaret Hamilton)[58] 이라는 과학자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MIT 개발연구실 출신으로 NASA에서 스카이랩 계획과 아폴로 계획에 쓰인 비행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개발주임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시스템 모델링과 개발, 소프트웨어 개발, 자동 생명유지장치 개발, 소프트웨어의 신뢰성과 유지보수기능 향상, 인터페이스 설계, 오퍼레이팅 시스템, 생명유지 관리기술 등등 그녀가 담당한 분야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과정 중에 발생한 시스템 에러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저 시스템 에러는 달 착륙 시퀀스를 개시하고 3분뒤에 발생했는데, 랑데뷰 레이더 때문에 부하가 걸린 컴퓨터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작업에 들어가는 시스템 자원을 더 높은 중요도의 작업에 돌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착륙 시퀀스를 속행할 수 있었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과정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었던 위기를 넘기는 역할을 했다.[59]
- 아폴로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는 유머러스하기로 이름높다. 대개 앞부분에선 멀쩡하다가 뒤로 갈수록 프로그래머가 맛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달착륙 유도 공식의 소스코드에선 라인 1375의 주석이 "거지같은 서브루틴"인 것을 필두로, 달착륙 소스 코드의 라인 245에서는 "우주비행사에게: 그 멍청한 안테나를 돌려라"라는 주석이 달려 있으며, 마스터 점화 루틴의 이름은 "타올라라 베이비(burn baby, burn)"다. 이 역시 마가렛 해밀튼의 영향이라고 한다.
8.2. 원자력 전지[편집]
아폴로 계획에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열전기 발전기, 소위 원자력 전지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우주선의 동력원으로 이용된 것이 아니라 달에 설치할 실험기기의 동력원이었다.
발전기는 기내 수하물 가방 정도의 크기이며, 그 핵심인 핵물질은 소화기만한 강철제 캡슐 안에 흑연, 베릴륨, 티타늄 등으로 포장한 플루토늄이었다.
이 원자력 전지가 장착된 실험기기를 달착륙선에 미리 수납한 상태로 3단 로켓에 실어두는 방식으로, 아폴로 11호부터 시작해 달착륙이 계획된 모든 아폴로들이 이것을 갖고 갔다.
예외는 아폴로 11호로, 원자력 전지(?)는 열만 제공하고(즉 원자력 히터) 실험기기 자체는 태양전지의 전원으로 작동했다.
11호에서 핵물질 코어가 문제없이 작동함이 확인된 후, 12호부터는 원자력 전지를 전원으로 이용했으며 이는 이후 모든 NASA 우주선들(보이저, 카시니 등등)의 동력원이 되었다.
아폴로 13호 역시 원자력 전지를 갖고 갔는데, 다른 아폴로들은 달표면에 원자력 전지를 두고 왔지만, 13호는 달에 착륙하질 못했으니 당연히 원자력 전지도 도로 그냥 갖고 왔다.
문제는 플루토늄이 든 원자력 전지가 달착륙선에 실려 있는데, 13호는 달착륙선을 매단 채로 지구에 돌아왔기에 핵물질이 든 달착륙선이 지구에 재진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허나 이 원자력 전지를 만든 기술자들은 애당초 새턴 V 로켓이 발사대에서 폭발하더라도 핵물질 캡슐은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대기권 재진입 정도로는 끄떡 없다고 장담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60] 13호의 승무원들은 달착륙선이 통가 해구(깊이 10,800m)에 떨어지도록 계산해 달착륙선과 사령선을 분리했으며, 실제로 13호의 달착륙선인 LM7 아쿠아리우스[61] 의 잔해는 통가 해구의 심해에 가라앉았는데,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통가 해구 인근의 바다에서 방사능 누출이 검출되지 않는 것을 보면 기술자들의 장담은 허풍이 아니었던 셈.
여담으로 달표면에 남아있는 여섯 개의 원자력 전지들[62] 은 아직 플루토늄의 반감기가 반 이상 남아있다. 미래에 누군가 달표면에 조난당할 경우 이를 비상용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8.3. 월석 관련 사건 사고[편집]
아폴로 11호가 가져온 월토 중 일부는 40년이 넘도록 빛을 보지 못한 적이 있다.
NASA 측에선 연구를 위해 각 대학 연구소에 월석 및 월토들을 배분해 주었는데, 이 중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연구소에서 월토 샘플을 연구한 뒤 행정 착오로 NASA에 반납하지 않고 연구소 보관 창고에 방치한 것. 이 샘플은 2013년에야 발견되었다.
미국 법에는 월석 소유 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NASA나 세계 각 연구소에서 도난당한 월석들은 암시장에서 공공연하게 거래되고는 한다.
9. 대중매체[편집]
푸른 유성 SPT 레이즈너에선 아폴로 X라는 가상의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아폴로 11호 달착륙 전에 과연 착륙해도 안전한가를 알기 위해 일본계 미국인 비행사 혼자 탑승한 편도 우주비행을 나사가 시행했다.
죽을 줄 알고도 달에 도착한 이 우주비행사는 달에 때마침 와 있는 그라도스군과 접촉하여 구조되고, 그후 자신의 아들인 주인공 에이지에게 지구에 그라도스 침공을 알리게 한다...
Mythbusters에서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뒤,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착지하는 모습이 조작이라는 설에 대해서 시즌6 에피소드2 NASA Moon Landing편에서 다룬 바 있다. 물론 전문가들의 의견과 실제적인 실험을 한 끝에 결론은 "진실".
사진에서의 그림자 문제, 영상조작문제, 깃발의 흔들림, 달에서는 선명한 발자국이 찍힐 수 없다를 고루고루 다루면서 음모론자들을 깠다.
동방 프로젝트에서 월인들은 이 계획을 '달 침공'으로 생각한다.
동방감주전에서는 곳곳에서 관련 소재를 차용한 듯하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시리즈에서는 문명 1부터 문명 5까지 등장하며, 과학 승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명 1에서는 게임상의 모든 도시들의 위치를 볼 수 있으며, 불가사의를 건설한 문명 뿐 아니라 모든 문명이 필요한 기술을 연구하면 우주선 부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문명 2에서는 전작과 효과가 비슷하지만 모든 문명들이 도시의 위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차이가 있다.
문명 3부터는 게임상에 하나만 건설될 수 있는 세계 불가사의에서 문명마다 하나씩 건설할 수 있는 국가 불가사의나 국가 프로젝트로 바뀌면서[64] 도시의 위치를 볼 수 있다는 효과가 사라진 채 우주선을 건설할 수 있게 된다는 효과만 남는다.
어느 작품에서건 우주선 부품을 모두 제작하거나 꼭 필요한 만큼 제작하면 알파 센타우리로 향하는 우주선이 출발하게 되며, 우주로 진출한 인류의 모습이 나오면서 게임이 끝난다.[65] 그런데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작품 <신>에서 이걸 그대로 가져와버렸다.
반다이의 어른의 초합금 제1탄으로 아폴로 11호 & 새턴 V호 로켓이 출시되었다. 로켓 발사부터 사령선의 귀환까지 달 착륙의 모든것을 재현할 수 있는 굉장한 물건. 스케일은 1/144. 전고 76cm의 거체를 자랑한다. 덧붙여 그 2탄은 무려 1/144 동 스케일의 스페이스 셔틀.
그런데 여기에 홍콩 프라모델 메이커 드래곤 모델이 강펀치를 날렸으니, 무려 1/72 스케일의 새턴 V호 로켓을 출시한 것. 높이가 1.5미터나 된다! 드래곤 모델은 그전부터 닐 암스트롱의 12인치 피규어나 1/72 스케일 아폴로 우주선 금속제 모형 등을 이미 발매하고 있는데 퀄리티가 무척 좋은 편이다.
레고도 물론 모형화에 합류, 2003년 Discovery 카테고리로 한번 출시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한계로 그냥 원통 블럭을 쌓아서 스티커를 붙이고 로켓이라 우기는 수준이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2017년에 Ideas 17번으로 재등장했는데...
총 부품수 1969개에 높이 1m, 폭 17.9cm, 직경 9cm의 괴물. 로켓 발사부터 사령선의 대기권 재돌입 후의 착수 모습까지 아폴로 계획의 모든 시퀀스를 재현 할 수 있다. 최상층부 첨탑 이외에는 상당히 튼튼하게 고정되며 거대한 덩치를 유지하기위해 내부가 상당히 복잡하게 짜맞추어져 있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아폴로 13은 위에 언급된 아폴로 13호의 사고 사례를 극화한 것이다. 이 뒤를 이어 제작된 HBO의 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From the earth to the moon)는 아폴로 계획 전체를 주제로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상파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으며, DVD로도 발매되었다.
이 외에도 2010년 들어 외계인 소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곧잘 아폴로 11호를 소재로 삼는다. 트랜스포머 3편이라든지 맨 인 블랙 3편이라든지.
트랜스포머 3에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달 뒷면에 불시착한 센티넬이 탑승한 아크를 수색하기 위한 기밀 임무를 감추기 위한 선전이었고, 착륙 후 잠시 발생한 통신 두절은 사고가 아니라 수색 작전을 위해 일부러 통신을 끊어버린것으로 나온다.
맨 인 블랙 3편에서는 아예 달에 외계인 죄수를 가둬 놓는 감옥이 있으며 보글로다이트 족을 막을수 있는 행성 방어 시스템 아크넷을 구축하기 위해 새턴 11호의 발사현장에서 과거의 젊은 K와 시간여행 한 J가 개고생을 한다.[요약] 이때 아크넷을 넣기 위해 우주선에 달라붙은 K를 본 조종사들의 만담도 압권. "이거 보고하면 발사 취소 되겠지?"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이 때 화면을 잘 보면 우주복에 이름이 쓰여 있다. 카메라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조종사의 이름은 암스트롱이라고 쓰여져 있다.
호러 영화 아폴로 18에서는 아폴로 18호가 달에 착륙했다가 외계 괴물의 습격을 받아 전멸당한다.
알드노아. 제로에서는 아폴로 17호가 달에서 화성인들의 유적인 하이퍼 게이트를 찾아내 화성개척의 시발점을 만들어 낸다는 설정이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에 대한 도전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아예 미국에서 소련에 앞서가기 위한 선전용 사기극이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Fate/EXTRA 시리즈는 1970년부터 분기가 갈라진 if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류의 기술 발전이 멈춰 물리적으로는 달에 도달하지 못했다.
동화책으로는 린드버그 - 하늘을 나는 생쥐의 후속작으로 암스트롱 - 달에 간 생쥐가 2016년 7월 25일에 출판될 계획이라고 한다. 암스트롱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을 보면 알겠지만, 아폴로 11호 계획을 패러디한 듯하다.[66]
2018년 개봉한 미국 영화 퍼스트 맨이 닐 암스트롱의 일생을 1961년 ~ 1969년까지 간추리다보니 아폴로 계획으로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019년에는 아폴로 11호 미션 당시의 기록 필름을 현대의 보정기술을 이용해 HD 화질로 보정한 다큐멘터리 아폴로 11이, 아폴로 11호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여 개봉될 예정이다.
대체역사물 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에서 이 아폴로 계획이 소련에게 뒤쳐져서 소련이 먼저 유인 달 탐사에 성공하고, 미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달 유인기지를 세우고 아폴로 계획을 종료하지 않고 80년대에도 지속된다. 예고편 영상, 작중 미국의 달 상주 기지 아폴로 23호가 발사대에서 폭발하고, 아폴로 24호가 지구 궤도에서 고장나 수리를 위해 보내진 아폴로 25호도 사고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73년 달에 '제임스타운' 유인 상주기지를 설치하게 된다. 레이건이 1976년 대선에서 당선된 시즌 2에서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1983년 결국 미국과 소련의 달 기지가 서로 교전해 다수의 사망자가 나오고 핵전쟁 직전까지 가지만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통해 전쟁 위기를 넘기게 된다.
포르노 그라피티의 데뷔곡 '아폴로'의 모티브가 되었다. 정확히는 우리들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이미 아폴로 11호는 달에 갔다고 하는데라고 하면서 11호를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