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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아이 다카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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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79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났다. 세타가야구립 코마자와 소/중학교, 고쿠가쿠인 고등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전국 세미나의 대학생들과 협동하여 정치인을 초청해 다양한 정책 제언을 하는 싱크탱크를 만들어 활동했다. 졸업 후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 입사하여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2005년 퇴사하고 에다 겐지와 마츠다 코우타[1] 의 비서로 일하였다.
2012년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에다 겐지가 속해있던 모두의 당에 입당하게 된다.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모두의 당 공천을 받고 도쿄 6구에 출마하지만 5명 중 4위로 낙선한다. 2013년 11월 27일 모두의 당이 특정비밀보호법 찬성을 당론으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하여 탈당한다. 이후 자신이 스승로 모시던 에다 겐지를 따라 결속당에 합류하였고, 2014년 9월 결속당이 일본 유신회와 합당하여 유신당이 창당되면서 그와 동시에 유신당 소속이 된다.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유신당 공천을 받아 도쿄 6구에 출마하였고 이번에는 2위로 석패율제로 비레 당선된다. 당시 상대 후보였던 자유민주당의 오치 다카오[2] 는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44.1%를 득표하였으나, 오치아이가 일본공산당측 후보와 단일화에 실패하여 야권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오치 다카오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그래도 4년 사이에 지역구 내에서 입지를 부지런히 쌓아 올렸기 때문에 인지도는 크게 올랐던 상태였고 이 덕분에 비례 당선될 정도의 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2016년 민주당과 유신당이 합당하여 민진당이 창당되면서 그와 동시에 민진당 소속이 된다. 이후에는 의정 활동을 열심히 했는지 NPO법인 만년야당(...)이 발표한 국회 의정활동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기도 했다.
2017년 9월 27일 마에하라 세이지 민진당 대표가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위해 민진당을 사실상 해산한 뒤 희망의당에 합류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여 탈당한 뒤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려고 하였다. 이후 입헌민주당이 창당되자 10월 4일 합류한다. 그렇게 48회 총선에서는 입헌민주당으로 도쿄 6구에 출마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0.8% 차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오치 다카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워낙 접전이였기 때문에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 1시 반이 지나서야 당선이 확정되었고, 다음날 조간신문 당선자 명단에도 실리지 못했다고 한다. 비록 희망의당과 표 분산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번에는 일본공산당 후보와의 호헌파 단일화에 성공한 것이 당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3] 또한 행복실현당 후보가 1.75% 득표하며 자유민주당에 고춧가루를 뿌린 것도 한 몫 했다(...). 아무튼 해당 당선은 아무런 빽이 없던 의원이 세습 정치인을 꺾은 당선으로서 파장이 꽤 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 할 정도이다.
2020년 신 입헌민주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도쿄 6구에 출마하여 또 다시 오치 다카오를 누르고 3선에 성공하였다. 유신회 후보의 표 잠식으로 아주 약간(0.7% 정도) 득표율은 줄었으나 득표 격차는 5000표차로 오히려 더 격차를 벌렸다. 아무래도 젊은 소장파라는 점이 세대교체 선거 분위기 속에서 장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정치 성향[편집]
정치적 스승인 에다 겐지의 영향을 받았었기 때문에, 초창기 유신당 시절에는 어느 정도 보수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입헌민주당 합류 이후 특정비밀보호법 반대를 계기로 성향이 점점 좌경화되었고 이후에는 입헌민주당에 합류할 정도의 리버럴 성향이 되었다.
- 2014년까지만 해도 헌법 개정에 대해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찬성"이라고 밝혔었지만 2017년 10월 22일 입헌민주당 합류 후 시민연합의 정책협정서에 서명하면서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후에 뉴시스와 인터뷰 하면서도 명확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또한 반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과거에 일본 국민 300만명이 전장에 끌려가 죽은 역사가 있다며 그런 과거사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2012년에는 찬성한다는 쪽에 가까웠지만 2014년부터 반대로 선회하였다. 단, 일본의 방위력 강화에는 찬성한다고 밝혔다.
- 일본의 핵무장에 대해 반대한다. 또한 원자력에 대해 반대한다.
-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
-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 재검토를 반대한다.
- 여성 미야케 창설을 찬성한다.
-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찬성한다.
- 유치원 및 어린이집부터 대학까지의 무상교육에 찬성한다.
- 카지노 규제 해제를 반대한다.
- 한국에 대해서는 친한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으나, "아베 총리가 헤이트 스피치를 방치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처럼, 한국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민간단체가 소녀상을 세워둔 것을 가만히 두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양국 국민들이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고 해도 정치인은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국민들을 미래지향적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즉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하게 양국 정치인들이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한국의 젊은 정치인과 교류를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4. 소속 정당[편집]
5. 선거 이력[편집]
6. 기타[편집]
- 기혼이다. 슬하에 2남이 있다.
- 에다 겐지의 비서를 지냈고 정계 입문도 그가 있던 모두의 당으로 했던 만큼 에다 겐지를 정치적 스승으로서 모시고 따랐다. 2013년 에다 겐지가 모두의 당을 탈당하고 결속당을 창당할 때도 함께 합류하였고, 그의 최측근으로 있었다. 2017년 입헌민주당 합류를 두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하기도 했으나, 에다 겐지가 후에 복당하며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하게 된다. 현재도 에다 겐지와의 좋은 친분을 가지고 있으나, 두 사람의 정치 성향은 서로 세부적으로는 다르다.[7]
- 2018년 1월 한국의 뉴시스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2001년 게이오기주쿠대학 재학 시절 서울특별시에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 후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학생들과 2주정도 함께 지낸 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본인은 이에 대해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회고하였다.
- 저서로 민정입국론이 있다. 2020년 9월 출판한 책이며, 자신의 삶과 함께 정치적인 견해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오자키 유키오 기념재단의 북 오브 더 이어 2020 국정 부문 대상에 선정되었다.
- 대학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배낭여행을 하며 세계를 여행했다고 한다. 은행원 시절은 물론 국회의원이 된 지금도 장기 휴가를 활용해 계속 여행을 즐기고 있으며 현재 30개국 이상을 방문했다고 한다.
- 에다 겐지 비서 시절 별명은 "마로(麻呂)"[8] , 마츠다 코우타 비서 시절 별명은 "잠버릇의 왕자"(...)였다.
- 배우 단 미츠와 친분이 약간 있다. 학창 시절 학원 알바 동료였기 때문에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오치아이의 당선 이후 단 미츠는 "알바 동료가 국회의원이 되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 지역구 경쟁자인 오치 다카오 의원과 같은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과 동문에 정계 입문 전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서 근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7. 둘러보기[편집]
[A] 석패율제 비례대표[1] 참의원 의원이였으며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의 대표를 맡았던 적이 있다. 현재는 기업가다.[2] 후쿠다 야스오의 조카이자 아버지가 세습 정치인인 전형적인 일본 정치인 가문 출신 세습 정치인이다.[3] 선거 공보물에서도 "소선거구제는 오치아이 다카유키에게, 비례는 공산당에게"라는 문구를 사용하였다.[4]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5] 일본 유신회와의 합당[6] 민주당과의 합당[7] 오치아이가 헌법 개정을 완전히 반대하고 핵무장, 집단적 자위권도 반대하는 반면 에다 겐지는 헌법 개정을 찬성(단, 9조 개정에 대해서는 반대한다)하고 집단적 자위권도 신중히 생각하자는 쪽, 핵무장도 장래에 걸쳐 검토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8] 헤이안 시대에나 사용되던 아주 옛날의 고어체 1인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