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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키 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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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新しい政治の流れをつくる。
새로운 정치의 흐름을 만든다.
홈페이지와 사무소 유튜브 채널의 캐치프래이즈
일본의 정치인. 현 카가와현 제2구 중의원이자 국민민주당 대표이다.
대장성, 재무성 관료, 민진당 간사장 대리, 희망의 당 2대 대표, 국민민주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69년 5월 1일, 카가와현 산가와정(현 사누키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지역의 농협조합장, 아버지는 수의사,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근무하였다. 3남매 중 장남이었고, 논 한가운데가 집이었다. 어머니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 유치원에 다녔으며 항상 큰 목소리로 애니메이션 노래를 불렀었다고 한다.
사누키시립 칸자키 소학교에 들어갔으나 작은 마을이었기에 한 학년에 반이 하나였고, 지금도 전원의 출석번호를 기억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은 수영을 좋아해 대회에도 나갔고 축구도 좋아해 브라질 유학을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기 싫어서 도망치듯 공부했다. 주판이 취미였고 소년 점프를 좋아해 근처 잡화점에서 매주 샀다. 졸업 문집에는 '유엔 사무총장'이 될 것이라고 썼다.
사누키시립 텐노 중학교에서부터 반이 두 개가 되었고 3학년 때 야구부 투수를 했다. 당시에는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연습이어서 힘들었지만 몸이 단련되었다고 한다. 여름 방학 때 괌으로 여행가 다른 나라의 아이들과 만나고 처음으로 외국의 문화를 접했다. 다마키 본인은 이 경험이 국제적인 시야를 가진 첫 번째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카가와현립 타카마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높은 빌딩과 상점가에 놀랐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문화제 위원장을 맡아 댄스 이벤트를 기획했다. 음악부에도 들어가 밴드 활동도 하고 기타와 피아노도 쳤다. 체육도 잘 해 제자리 멀리뛰기와 캐치볼도 했었다.
도쿄대학 법학부 시절 제2외국어로 스페인어를 했지만 지금은 잊었다. 매일 근력 트레이닝에 몰두하고 400m 달리기와 장대 높이뛰기 등을 했으며 연습 후 가라오케에 갔다.
2.2. 공무원 시절[편집]
1993년 대장성에 입성해 주계국 총무과에 배치된다. 복사와 문서 배포 등 간단한 작업만 했지만 일은 매우 재미 있었다고. 1995년 유학 기회가 찾아왔으나 토플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얻어 대부분 실패하지만 기적적으로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에서 합격 통지가 나와 유학을 했다. 이후 필사적으로 영어를 공부했으며, 인생에서 제일 많이 공부한 시절이라고. 이때부터 정계 입문을 바랬다. 1997년 행정학 석사(MPA)학위를 받았으며 졸업장을 건네 준 학장은 조지프 나이 전 국무부 차관보였다. 아내와의 결혼은 하버드 대학교 교회에서 했다. 일본 정계에도 한국처럼 케네디스쿨 출신들이 은근히 있는데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경제안보담당대신,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 미야자와 요이치 자민당 세제조사회장 등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즉시 외무성의 중동 제1과에 파견되어 요르단과 리비아 담당이 되었다. 1999년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갔는데,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와 마사코 당시 황태자비가 거기에 참석했었다. 리비아에선 일본 비즈니스단과 함께 사막 한가운데서 무아마르 알 카다피와 만났었다고 한다. 미국 이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이후 오사카 국세국에 파견되어 총무과장이 되었고, 츠루하시역 근처에서 살았다. 2002년에는 내각부에 파견되어 이시하라 노부테루 규제개혁담당대신, 가네코 가즈요시 행정개혁담당대신,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내각부특명담당대신 세 명의 내각부 소속 대신의 비서전문관으로 있었다. 당시 자유민주당 본부에 이끌려가 아베 신조 당시 간사장이 선거구의 목록을 보여주면서 출마 안 하겠느냐며 제안했는데, 고향이 포함된 카가와현 제2구는 이미 사람이 차서 "선거한다면 고향에서 하고 싶습니다"라고 거절했다.
2.3. 정계 입문[편집]
2005년 재무성 주계국 주사직을 마지막으로 퇴임하여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그 해 9월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5] 카가와현 제2구에 출마했으나 현역 의원이던 자민당 키무라 요시오 후보에게 밀려 70,177표로 낙선했다. 낙선 후 본가로로 이사를 갔는데 아이가 전학하고서 적응을 못 했었다. 이후 2009년 8월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다시 카가와현 제2구에 재출마하여 당선된다. 2010년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카가와현 총지부연합회 대표가 되었고 10월 마에하라 세이지 정책조사회장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지지가 낮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지역구인 카가와현 제2구에서 자민당의 세토 다카카즈를 누르고 재선했는데, 놀라운 건 이 선거에서 일본 주고쿠, 시코쿠, 규슈, 오키나와 지역의 민주당 지역구 당선은 다마키 뿐이었다. 이후 그는 민주당 부간사장 및 정책조사부회장을 역임한다. 게다가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카가와현 제2구에서 다시 세토 다카카즈를 꺾고 3선에 성공한다.
2016년 9월 2일 민진당 경선에 당 대표 후보로 출마했으며, 경쟁자로는 무라타 렌호, 마에하라 세이지가 있다. 결과는 무라타 렌호에게 패배하지만, 간사장 대리를 맡는다.
그러다가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희망의 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카가와현 제2구에서 4선에 성공하며, 10일에 도쿄도지사 직과 희망의 당 대표직을 겸임하기 힘들다며 사퇴한 고이케 유리코 대표의 후임으로 희망의 당 대표에 선출되어 14일에 취임했다.[6]
2018년 5월 7일,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진 국민민주당에서 오쓰카 고헤이와 함께 공동대표로 취임한다. 다마키 공동대표는 "어떤 정당보다도 정권을 엄격하게 추궁하는 자세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9월 다마키 대표는 이날 도쿄도내 한 호텔에서 열린 국민민주당 임시 당대회에서 경쟁자인 쓰무라 게이스케(津村啓介) 전 내각부 정무관을 제치고 3년 임기의 새 대표로 뽑혔다. 게다가 다마키 대표는 지방 의원과 당원 등을 대상으로 한 우편과 인터넷 투표에서 총 142포인트 중 106포인트를 얻었고 국회의원 대상 투표에서도 쓰무라 전 정무관에 크게 앞섰다. 다마키 대표는 이날 기자들에게 "당의 지지율 회복과 당 세력 확대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3.1. 2019년[편집]
2019년 4월 26일 자유당의 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와의 협상으로, 자유당을 국민민주당에 흡수시켰다.
2019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헌법 개정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다마키 대표는 지난 25일 인터넷 방송인 분카진호소쿄쿠에 출연해 "우리도 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해왔다. 아베 총리와도 부딪힐 것이다. (아베 총리가 국민민주당에) 추파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신문에서 보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마키 대표는 "반성한다. 우리는 모리토모 문제에 국회에서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중요 과제(헌법 개정)에 대해서 논의할 시간이 적어졌다. 확실히 아베 총리와 나의 생각은 다르지만 헌법 개정 논의를 제대로 진행해보겠다"는 점을 개헌 논의 참여 명분으로 들었다.
다만 다마키의 발언은 국민민주당 안에서도 반발을 불렀는데 쓰무라 게이스케 공동 부대표는 26일 밤 트위터에 "오보이기를 기도한다"는 글을 올렸다. 파문이 확산되자 다마키 대표는 26일 기자단에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하자는 자민당 개헌안에는) 반대라는 점은 전혀 변함이 없다"며 반발 물러섰다.
태풍 하기비스가 일본에 큰 피해를 주자, “국회와 정부는 재해 복구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11월 29일, 전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사망하자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나카소네에 대해 "존경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경무 과장으로 가가와현에 파견되었을 때 만난 인연도 있고, 인연이 있어 개인적으로도 여러 번 이야기를 해 주셨죠. 허리에 일본이라는 척추가 들어간 기개있는 정치인이셨습니다. 국철 민영화를 시작해 정치에 큰 발자취를 기록한 위대한 정치가셨습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일반적으로 강경파라는 이미지이지만, 1983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청와대에서 연설을 한국어로 해 매우 감동을 주고 이후의 한일관계가 개선된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국익을 생각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나카소네 전 총리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2.3.2. 2020년[편집]
2월 중순 일본에서 첫 코로나19 사망자가 나왔을 때부터 긴급사태 선언을 요구해 온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郞) 국민민주당 대표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고 비판했다. 최근 일었던 ‘불량 마스크’ 논란도 재점화되고 있다. 일본 제2야당인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지난 5일 트위터에 ‘후생노동성에서 마스크를 받은 간호직원이 비명을 질렀다. 귀에 거는 곳이 고무가 아닌 끈이라 귀에 걸지 못하고 마스크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장에 당혹감이 번지고 있다’고 썼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10만엔 수령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제2야당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10만엔을 수령한 뒤 일본골수은행 등에 기증할 것”이라며 “정치인들이 받지 않는 게 옳다는 풍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난센스”라고 트위터에서 말했다.
다마키 대표는 "받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는 풍조가 생기면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받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수령 거부를 하는 사람들로 인해 마치 돈을 받는 사람이 가난한 것처럼 인식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10만엔을 받는 것을 체험해서 얼마나 돈이 빨리 지급되는지도 보고 싶다"면서 "받은 돈은 일본 골수 은행 등에 기부할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학교가 아직 임시 휴교 중으로 인해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郞) 국민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휴교가 계속되고 있어 배움에 구멍이 생기고 있다"면서 9월 학기제로 이행하는 방안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따른 긴급사태 1개월 연장하자 이에 대해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郞) 대표는 "연장 이유와 해제 조건을 알 수 없으면 국민이 불안해진다. 지구전에 들어가면 경제대책을 병행하지 않을 경우 자숙을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관련하여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가 후보 옹립에 신중을 나타냈다.# 결국 당 차원에서의 특정 후보 지원 없이 오자와 이치로 전 자유당 대표가 입헌민주당과 일본 공산당, 사회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우쓰노미야 겐지 후보를 별도로 지원하는 선에서 그쳤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퇴하자 "놀랍고, 치료에 전념하길 바란다. 향후 체제를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입헌민주당과의 합당이 불거지던 시점인 11일,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국민민주당을 해산한 다음 합류와 잔류로 분당하고, 자신은 합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잔류조와 국민민주당 지방조직을 중심으로 국민민주당을 계승하는 신당을 창당하는 방침이라고 한다. 기자회견에서 에다노 유키오와 당수회담이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해, "기본 정책에 대해서 일치를 얻을 수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구민주당 정권을 염두에 두고 "이념이나 정책이 다른 사람이 모여, 무리하게 당을 만들어도, 과거의 반성을 살릴 수 없다"라고 합류 불참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의 신당 결성에 대해서는 "정책 제안형의 개혁 중도 정당이 필수적이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논의해야 새로운 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9월 11일 신 국민민주당을 창당해 대표가 되었다.
스가 내각이 출범하자 "아베 내각을 계승한 성향이 짙다. 장기정권으로 인한 여러 뒤틀림, 공문서 관리 문제나 공무원의 눈치 보기와 같은 문제를 계속하지 않기 바란다"고 말했다.#
자민당에서 개헌절차를 준비하자 "큰 원칙은 생각이 달라도 출석해서 의견을 개진하고 반대하면 반대, 수정해야 할 점이 있으면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하는 것이 의회민주주의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이 당선되자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은 패배를 허용하지 않겠지만 원활한 권력 전환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향후 대중국정책,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경제대책환율정책이 어떻게 될지 긴장감을 가지고 추이를 예의주시하겠다"고 게시했다.
일본에서 코로나가 다시 퍼지자 기자회견에서 "지금의 상태로는 확산을 더 초래, 오히려 경제를 축소시킬 수 있다"며 "고 투 캠페인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6일 오전 기자 회견에서 벚꽃 모임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책임을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라고 아베의 자세한 경위 설명을 요구했다.
27일 임시 회견을 열고 국민민주당의 코로나19 관련 추가 경제 대책을 발표했다.
12월에 열리는 당대표 선거에 출마해 이토 다카에와의 대결 끝에 연임하게 됐다. 다마키는 당선 소감에서 "국민민주당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현실적이고, 정직하며, 미래의 지향적인 정책을 제안해 나가는 정당으로, 무엇보다 국민들을 위해 역동적으로 움직여 나가겠다"며 당선 소감을 발표했다.
하타 유이치로 의원의 사망 후 "하타 유이치로 참의원 의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직도 믿을 수 없는 기분입니다. 지난해 참의원 선거에서 함께 선거 자동차를 타고 역 앞에서 가두 연설을 한 것이 어제의 일처럼 생각납니다. 균형 잡힌 분이라 더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진심으로 명복을 기원합니다."고 밝혔다.#
2.3.3. 2021년[편집]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과정에서 호헌파 진영이 입헌민주당과 공산당 간의 야당 공투에 대한 역풍으로 선거에서 예상밖으로 크게 패했지만, 야권 공투에는 참여하면서도 공산당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선거 운동을 진행했던 국민당은 의석 수를 기존에 비해 늘리면서 선전했다. 또한 본인도 지역구에서 63.5%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5선 성공. 덕분에 당분간 당 대표로서의 입지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7]
총선 이후 입헌민주당, 공산당, 사민당과의 국회대책위원장 회담에는 더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거리를 뒀다. 또 향후 입헌민주당과의 제휴에 대해서도 "공산당과 계속 밀착하여 있다면 교류가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총선 이후 마에하라 세이지, 호소노 고시 등 비슷한 성향 정치인들과 함께 몸값이 올랐다. 일단 이중 호소노 고시 전 민진당 대표대행은 자민당으로 아예 당적을 바꿨고, 다마키 대표는 기존의 야4당 연대를 대신해 일본 유신회와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다.
김창룡 경찰청장이 독도에 방문한 것을 놓고 항의의 트윗을 한 적이 있다.
한국 경찰청장의 다케시마 상륙에 강력히 항의한다.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봐도 국제법상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
2.3.4. 2022년[편집]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에 국민민주당이 일본 유신회와 연대하는 것을 이끌고 있다. 특히 2022년 2월 20일에 기시다 내각이 제출한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며 입헌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의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일본 유신회도 야당답지 않다며 비판했다. 이를 두고 국민민주당이 자민당과 연립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관측도 나왔지만 다마키 대표는 연립 참여에는 선을 그었다.[8]
그래도 입헌민주당과의 교류는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고 계속 진행하는 것 같다.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는 이즈미 겐타 입헌민주당 대표와 토론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실제로 아예 대놓고 국민민주당이 여권에 붙을 경우, 분노한 야권 표심이 아예 입헌민주당에 쏠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2.3.5. 2023년[편집]
2023년 4월 9일에 있었던 제20회 통일지방선거 전반전에서 국민민주당이 참패하면서 그간의 친여당 행보가 심판받았다. 도도부현의회선거에선 지난 선거 대비 52석을 잃고, 나라현지사선거에서는 현직 아라이 쇼고 지사를 지지했으나 일본유신회 후보, 입헌민주당 지지 후보에 밀려 3위에 그쳐 낙선하는 등 굴욕을 당했다.[9]
9월에 있는 당대표 선거에 출마해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대행과의 맞대결 끝에 연임에 성공했다.#
야타 와카코가 총리대신보좌관에 임명된 것에 대해 자신의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3. 정치 성향[편집]
처음에는 중도에 가까웠으나 국민민주당 시절부터는 9조 개헌을 주장하는[12] 중도우파다. 일본의 핵무장에 대해서는 '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원자력 규제 위원회의 기준을 충족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에 찬성하나,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의 재검토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외국인 참정권에는 반대하지만 특정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집단적 자위권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민주당 - 민진당 시절에는 이즈미 겐타, 쓰지모토 기요미와 함께 플래카드를 들고 반대를 했다.
4. 다마키 채널[편집]
파일:다마키 채널.jpg
2018년 7월 23일에 가입해 7월 27일 시작한 다마키 대표의 유튜브 채널이다. 일본에서 정치인들 유튜브는 구독자가 별로 없지만, 다마키 채널은 구독자가 꽤나 있는 편.
유튜브 주제는 본인의 정책 주장이거나 게스트를 초청해 토론하는 거지만, 가끔씩 먹방을 주제로 할 때가 있다.# 아이가 귀엽게 말하는 "다마키 챤-네루~" 오프닝이 특징이다.
가끔씩 나오는 게스트가 화려한데,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대표 타치바나 타카시와의 합동 방송을 진행했으며 2019년 12월에 일본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당 대표와 찍은 유튜브 영상에서 가와시마 에고의 술과 눈물과 남자와 여자(酒と泪と男と女)를 피아노로 연주했다. 실제로 고교 시절 피아노를 쳤다고 한다. 자유민주당의 야마다 다로 참의원 의원도 출연했다.#
이외에도 오쓰카 고헤이 의원#, 호리에 타카후미#, 야마모토 타로 대표#, 하라구치 가즈히로 의원#, 히라노 히로후미 의원#, 오자와 이치로 의원#, 마부치 스미오 의원#, 이즈미 겐타 의원#, 야마오 시오리 의원도 출연했다.#
신바시역에서 인지도 조사를 했는데, 아는 사람이 11명, 모르는 사람이 30명이었다(...)# 더군다나 영상의 좋아요 수보다 싫어요 수가 더 많다
5. 가족[편집]
아내의 이름은 다마키 에리(玉木恵理)로, 도쿄도 출신이니 시골 출신의 다마키와는 정반대다. 하버드 대학교 재학 중 만나 1995년 25살의 젊은 나이에 대학 캠퍼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끔씩 유세할 때 다마키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제44회 총선거에 패배한 날 밤 힘내려고 격려해준 적이 있다고 한다. 오히라 마사요시 전 총리의 손녀라는 설이 있었으나 다마키 본인이 찌라시라고 부정했으며, 실제 오히라 손녀는 다마키의 비서다.
아들은 1999년 출생이다. 현재 대학생으로, 아들이 어린 시절 일 때문에 바빴어도 10분 정도 같이 캐치볼을 했었다. 2015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다마키 본인이 밝힌 바로는 자신의 후배가 된다고 하니 카가와현립 타카마츠고등학교에 입학한 듯하다. 참고로 타카마츠고등학교는 카가와에서 편차치가 가장 높은 학교인지라, 아들도 아버지 닮아서 공부를 잘하는 듯하다.#
6. 소속 정당[편집]
7. 선거 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8. 저서[편집]
- 레이와 일본 개조론 (令和ニッポン改造論) - 2019
- 일본 위험해 (日本ヤバイ) - 2019
9. 기타[편집]
- 좌우명은 '열심히 하면 꽃이 핀다'이며, 취미는 가라오케, 기타, 피아노이다.
- 나라현에 간 게 평생 유일한 가족 여행이라고 한다.
- 유학 중에 갑작스러운 복통에 시달려 개복 수술을 했다. 구급차를 타고 미국의 의료 제도의 현실을 체험했고, 일본의 공적 보험 제도의 훌륭함을 실감했었다고.
- 미야케 신고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일단 사누키시 출생이라는 점, 카가와현립 타카마츠 고등학교를 졸업한 점, 그리고 카가와현이 기반인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다만 차이점도 있는데, 다마키는 국민민주당이지만 미야케는 자유민주당이고, 다마키는 중의원, 미야케는 참의원이다.
- 2009년 중의원에 처음 등원했을 때 첫 본회의에 가장 먼저 등원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민주당 동료 의원 미야케 유키코에게 추월 당해(...) 실패했다. 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2012년에 재선된 뒤 국회 개회 날에는 가장 먼저 입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 국민민주당 CM에서 일본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나왔다(...)
10. 둘러보기[편집]
[1] 카가와현 제1구 오가와 준야 중의원 의원, 카가와현 선거구 미야케 신고 참의원 의원이 동문이다. 해당 학교는 카가와현내 제일의 명문고등학교로 편차치가 71정도이며, 지역 명사가 많이 나왔다.[2] 농협조합장이었다.[3] 여기 프로필에 할머니만 있는 걸로 보아 할아버지는 별세한 듯.[4] 대학생이라고 한다.[5]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당시 관료였으며 부모님도 자민당원이라 반대가 심했지만, 양당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민주당으로 출마했다.[6] 당시 다마키가 대표가 될 때까지 대행이 다루토코 신지였다.[7] 또한 선거 과정에서 다마키 대표가 나온 당 홍보 영상#이 다른 당에 비해 상당히 세련되고 개성있다고 호평을 받으며 이미지를 개선한 점도 있다.[8] 실제로 2019년에 열린 제25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아베 신조의 인기 하락으로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과반 확보에 만족해야되는 상황이 되자, 국민민주당이 새롭게 연정에 참여하는 것이 자민당과 국민민주당 양당에서 검토되었으나 성사되진 않았다.[9] 이와는 반대로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대행은 본인이 회장으로 있는 교토부 총지부연합회에서 공인 및 추천한 후보들 전원을 당선시키면서 당 내 입지가 더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0] 프라이버시권 조항 신설, 각 도도부현에서 반드시 1명은 참의원 의원을 선출하도록 명기, 지방 공공 단체 권한 강화 명기, 헌법재판소 설치 등과 관련한 부분의 개헌을 찬성했다.[11]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12] 처음에는 9조 개정에 반대하였으나, 49회 중원선후부터는 대놓고 주장한다.[A] A B 2023년 1월 28일 기준[13] 민진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