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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하라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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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 국민민주당의 정치인으로, 현 국민민주당 공동 대표대행이다.
민주당 대표 및 국토교통대신, 외무대신, 국가전략담당대신을 지내며 한때 간 내각에서 수차례 차기 총리 여론조사 1위를 했을 정도로 일본 야권의 거물 정치인이었으나 민진당 대표 시절 2017년 9월 민진당 분열사태를 시작으로 2023년 국민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패배해 몰락한 상태다. 중국 위협론을 의식하는 평화헌법 개헌론자이며, 정치 파벌인 료운카이(凌雲会)를 이끌고 있다.
2. 활동[편집]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1987년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 8기생으로 합격했다.[2] 1991년 정경숙 졸업 후, 교토부의회 의원 선거에 입후보해서 당선된다.
2.1. 활동 초기[편집]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신당 후보로 (구) 교토부 제1구에 처음 중의원 의원에 2위로 당선되었는데[3] ,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1인 독재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다가, 1994년 5월 20일 에다노 유키오, 아라이 사토시, 타카미 유이치 3인과 함께 일본신당을 탈당해 "민주의 바람(民主の風)"이란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한다.
두달 후 1994년 7월 5일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해 간 나오토 당시 정무조사회장 아래 원내부간사(국회대책부위원장)을 맡는다. 이후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 구 민주당, 1998년 민주당의 창당에 참가한다.
제41회 중원선에서 구 민주당 소속으로 교토 2구에 출마하지만 자유민주당 소속 오쿠다 미키오[5] 에게 패배하고 석패율 비례대표로 당선된다. 이후 오쿠다의 제42회 중원선 불출마 및 정계 은퇴 이후 대신 출마한 자민당 야마모토 나오히코 후보를 꺾고 1위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이 부진한 44, 46, 47회 중원선, 48회 중원선에서도 1위로 당선된 것을 보면 지역구 관리를 굉장히 잘 하는 것 같다.
2.2. 2005년 - 2017년[편집]
2005년 민주당이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한 뒤 오카다 가쓰야 대표가 사퇴하자, 만 43세의 젊은 나이에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치바 2구 나가타 히사야스 의원의 허위폭로에 대한 책임을 지고 1년도 안되어 대표직을 사퇴했다.
2009년~2012년 민주당 정권 3년 동안[6] 국토교통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국가전략담당대신, 외무대신을 지냈다.
2011년 3월 재일교포 한국인으로부터 25만 엔(원화 환산시 약 230만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던 것이 드러나 외무대신 직을 사임했었다.
2011년 여름에는 다른 파벌 소속 노다 요시히코를 지원해서 총리로 올리는데 공헌했지만, 2012년 가을에는 노다의 사퇴를 압박하기도 했었다.
2011년 11월부터 료운카이(凌雲会)라는 당내 파벌의 회장으로 취임해서 계속 파벌을 이끌고 있다. 파벌의 성향은 중도 ~ 중도우파 정도[7] 다.
마에하라 세이지는 2015년 11월초에는 민주당을 해산하고 유신당과 합당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었는데 # 유신당이 맥을 못추고 오사카 유신회가 오사카 선거이후 부상하자 오사카 유신회와 연대를 모색중이다. 만약 그가 파벌 구성원들을 이끌고 탈당한다면 민주당에게 중도표 일부이탈이란 큰 피해를 주게된다. 하지만 그의 의사대로 민주당이 유신당과 합당해 민진당을 창당함에 따라 탈당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7월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마에하라는 2015년 11월 창당한 개헌파 우익정당 오사카 유신회와 선거제휴를 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당 주류의 방침과 어긋난다. 그리고 렌호, 다마키 유이치로 등과 대표 경선을 치뤘으나 패배한다.
2017년 9월 새로운 민진당의 대표에 선출되었다.
대표 취임 직후부터 기존에 있었던 야당연합을 파기하고 유신회와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당내에 보수 성향이었던지라 다른 당보다도 공산당과의 연대가 아무래도 껄끄러웠던 듯하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은 유신회를 자민당 2중대로 여기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의석 확보 및 지자체장 선거 승리를 기존 야당 연합의 연대로 인해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민진당은 실력도 없으면서 주제파악도 못한다'고 반발하는 중이다.
201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희망의 당에 선거 승리를 위해서 흡수통합 당하는 형식으로 합당을 결정했다. 그의 이런 정치적 결단은 선거 결과에 따라서 평이 갈리겠지만 전권을 잡은 고이케 유리코가 당내 리버럴 성향의 의원들에게 무자비한 공천학살을 하자, 구 민진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리버럴 성향 시민들에게 원수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8]
그리고 총선거가 끝나고 여당의 개헌선 도달 압승이라는 결과가 도출된 지금 마에하라는 야권의 역적이 되었다. 연립 여당만으로도 개헌이 가능해진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야권에서 표가 갈렸기 때문이다.[9][10] 마에하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이케 지사에게 백기 투항하는 바람에 그녀가 입헌민주당에 자객을 보내는 등의 야권 분열을 일으켰고 이걸 가능하게 만든 마에하라는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고이케는 전국 조직이 없고 선거는 갑작스럽게 열리기로 결정되어서 사실 그녀 자력으로는 야권 분열을 시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2012년에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집단 탈당해 노다 총리가 조기 총선을 열 수밖에 없어 야권을 패망하게 한 오자와 이치로의 뒤를 따라갈 가능성이 이야기 되고 있다. 카미카제 총선 이후에 오자와는 두 번 다시 메이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다. 마에하라는 지역구의 지지는 탄탄하니 평생 무소속 중의원을 할거라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이후 판세 분석이 어느정도 이루어지자 민진당의 전현직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이게 다 마에하라 때문이다라고 연호하고 있는 상황. 그가 이번 정치적 모험을 한 이유에는 공산당의 안보 성향에 대해 반대 입장이였기 때문. 이후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공산당에 혼을 팔지는 않았다."라면서 미일안보조약을 반대하는 일본 공산당과의 연대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며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선거가 끝나고 그는 희망의 당에 입당하기로 결심을 한 듯하다. 현재 그의 입장상 희망의 당이 존속해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 희망의 당이 소멸해서 입헌민주당으로 야당 세력이 결집할 경우, 입헌민주당이 그를 받아줄 리가 없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본인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총선에서 살아남았지만, 선거에서 반아베-호헌 성향의 야당 지지층의 민심이 에다노 유키오와 입헌민주당에 힘을 실어줬음이 확인됨에 따라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곤란하게 됐다. 당장 민진당 당 대표에서도 축출당하게 생긴 상황. 결국 2017년 10월 23일 미명에 기자회견을 열어, 참의원과 지방조직 처리 문제를 결론 짓고 난 후에 물러나겠다고 표명하였고 결국 일주일 후인 10월 30일 민진당 대표직 사임을 표명했다. 그리고 2일 민진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6일에는 희망의 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해서 14일에 승인되어 현재는 희망의 당 중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3. 민진당 분당 이후[편집]
그러나 2018년 5월 7일 오쓰카 고헤이 대표와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의 견의로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국민민주당으로 합당하여, 국민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2020년 6월에 일본유신회와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또한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일본유신회가 지지하는 오노 다이스케 후보를 지지했다.
2020년 8월 15일,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의 합당을 놓고 국민민주당 내 분당 논의가 계속되자 자신은 합류하지 않고 당에 잔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본인이 밝힌 가장 큰 이유는 입헌민주당과 선거 협력 중인 공산당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한다.
2021년 10월 31일 열린 49회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12월부터 선거대책위원장을 겸임한다.
2022년 들어 당대표인 다마키 유이치로와 갈등하고 있는데, 일본유신회와의 야권 연대 강화를 원하는 마에하라와 다르게 다마키 측에서는 자민-공명 연립 여당과의 연대를 강화하려하고 있어 노선 차가 크기 때문이다.
2022년 7월로 예정된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교토부 선거구 일본유신회 후보인 구스이 유코를 추천하고 입헌민주당의 후쿠야마 데쓰로 전 간사장을 낙선시키기 위해 주력했으나, 결국 후쿠야마 전 간사장이 2위로 당선되어 살아남으면서 또 한번 패자가 되었다. 또다시 야권 분열의 원흉이 되었다는 비판은 덤. 이걸로 당의 실권자로 활동해오던 본인의 입지에 치명상을 입었다는 평이 다수이다.
2022년 7월 28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여름 감기 정도의 증상이라고 한다.#
8월 31일, 양원의원총회에서 신바 가즈야 간사장이 선거대책위원장을 겸직하게 되면서 물러나게 되었다.
2023년 8월 2일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에 맞서 9월에 있을 대표 선거에 정식으로 출마를 선언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에서 "자민당에게 확실히 대치하는 강한 야당이 필요하다. 非자민·非공산의 골조로 야당 결집을 진행시켜 정권 교체의 길을 마련하고 싶다."라고 밝히면서, 동시에 "자민당의 보완 세력이 되지 않겠다, 자민당을 이롭게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 자민당과의 대결 및 다마키 대표의 노선을 비판했다.#
2023년 9월 2일, 대표 선거에서 총 111점 중 31점을 획득하며 낙선했다. 패배 가능성이 높다는 평은 받았지만 예상을 벗어난 범위의 참패라 정치인으로서의 내상이 적지 않을듯하다.
일단 다마키 대표의 신 지도부에서도 큰 골격을 유지하기로함에 따라 대표대행 직을 연임하기로 했다.
2023년 11월 24일 교토신문에서 추경 반대를 이유로 탈당을 고려한다는 기사가 올라왔으나,# 본인이 트위터에서 직접 부정했다.#
3. 료운카이(凌雲会)[편집]
료운카이(凌雲会)는 원래 센고쿠 요시토 前 내각관방장관를 중심으로, 지금은 마에하라 세이지 前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한 계파이다. 대체로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들과 신당 사키가케, 일본신당 출신의 신진, 중견급 의원들이 모인 계파다. 성향은 현실주의적인 외교를 주장하는데 중국과의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견제론을 취하는 입장이라 친중적인 성향인 오자와 그룹과는 차이가 있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대체로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띈다. 이런 탓에 생추어리쪽과는 으르렁거리는 편이다. 중요 인물로 마에하라 세이지 외에 에다노 유키오 등이 있다. 다만 현재 에다노는 입헌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마에하라와 결별했다.
2015년 11월 현재 파벌 소속 의원은 중의원 13명, 참의원 4명이다. 파벌 소속 참의원중 2019년까지 임기가 보장되는 의원은 1명이다. 파벌 소속 참의원 4명은 대체로 호헌파다. 다만 파벌 소속 참의원 오가와 가쓰야(小川勝也)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호헌파이긴 하지만, 일본의 핵무장에 대해서는 "미래에 검토해야 한다"라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의원에서는 아즈미 준(安住淳), 이즈미 겐타(泉健太), 후루카와 모토히사(古川元久), 와타나베 슈(渡辺周),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郞), 야마노이 가즈노리(山井和則), 가미야마 요스케(神山洋介), 기이 다카시(城井崇) 8명이 개헌파다. 마에하라 본인도 포함하면 파벌 소속 중의원 9석이 개헌파인 것이다. 2021년 현재 아즈미, 이즈미, 와타나베, 야마노이, 가미야마, 기이 의원은 입헌민주당으로 이당해 마에하라와 결별했다.
4. 정치적 입장[편집]
일본 정계에서 보수자유주의 비슷한 포지션이지만, 정작 평화헌법의 개정 의견을 피력한 바 있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주장했었다. 중국위협론도 그의 지론이다. 외국인 참정권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국론이 분열되어 있고 위헌이라는 논란도 있다."라면서 법안 제출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안보법을 무효화시키자는 민주당 내의 의견에 대해서 "이미 통과된 법을 무효화시키긴 어렵다" 라면서 사실상 안보법 반대에 딴죽를 걸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재정 지출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긴축 재정파이다.
한국 관련해선, 민주당 시절부터 언론 기사를 통해 노출된 바로는 친한 성향의 인물로 분류된다.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재일 한인 아주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 나온 정치자금 수수 얘기도 이 아주머니와 관계가 있다.#
5.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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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에하라세이지 근황올림픽.jpg||파일:마에하라 세이지 근황올림픽2.jpg|| 정치인 중에선 꽤 잘생긴 축에 드는 얼굴이었으나, 2010년대 들어 부침을 많이 겪어서인지 이후부턴 노화가 꽤 진행된 상태다.- 2010년 3월 3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센고쿠 요시토 국가전략담당대신, 하라구치 가즈히로 총무대신과 함께 지각을 한 전적이 있었다. 이거 때문에 위원회 개회가 15분 늦게 시작하게 되는 메이와쿠를 저질렀고, 히라노 히로후미 내각관방장관이 사죄하는 일이 벌어졌다.
- 일본 정계에서는 꽤 유명한 철덕이며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일단 프로필부터 SL사진촬영 및 관련 수집이라고 언급하고 있을 정도인데[13] , 토리테츠(撮り鉄)로서의 실력도 수준급이라 철도 잡지에 사진이 실리거나 개인 사진전을 열기도 한다. 특히, 증기기관차(SL)[14] 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서 같이 활동하는 철도 전문 잡지사의 편집장도 그의 지식력과 사진 실력에 놀랄 정도라고 한다. 국토교통대신 시절 지치부 철도를 일부러 시찰한 일화는 유명할 정도. 이후에도 간간히 철도를 주제로 하는 방송에 출연하거나 같은 덕후인 이시바 시게루[15] 와 함께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6. 소속 정당[편집]
7. 선거 이력[편집]
8. 둘러보기[편집]
[겸] 당 안전보장조사회장[1] 한국으로 치면 당협위원장 정도의 직책으로,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오카다 가쓰야, 겐바 고이치로 같은 중진 의원들은 총치부연합회 대표나 회장 자리를 나가츠마 아키라(도쿄도련), 나가하마 히로유키(치바현련), 나카가와 마사하루(미에현련), 가네코 에미(후쿠시마현련) 등 후배 정치인들한테 넘기고, 중진 의원들은 상임고문 자리에 남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소속 정당에서 본인 지역의 국회의원이 본인 1명밖에 없으면 총지부연합회 대표나 회장을 직접 맡는 경우도 많은데 마에하라가 이런 케이스이다.[분야] 경제재정정책, 과학기술정책, 원자력행정, 우주정책[2] 이때 정경숙에 합격한 8기 동기생이 나중에 외무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을 역임한 겐바 고이치로인데, 1993년 제40대 중원선에서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된 동기이다. 이 외에도 노다 요시히코, 다카이치 사나에, 이토 다쓰야 등이 제40대 중의원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였지만 이 3명은 한번씩 낙선해서 9선이지만 마에하라와 겐바는 완전 낙선한 적이 없어서 10선이다.[3] 당시 1등으로 당선된 의원이 일본공산당 소속 고쿠타 케이지로 지금도 긴키 권역 비례대표 중의원 의원 및 일본공산당 국회대책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4] 現 문부과학대신.[5] 제1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문부대신[4] 을 맡았으며, 2018년 별세했다.[6]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간 내각, 간 제1차 개조내각, 간 제2차 개조내각, 노다 제3차 개조내각[7] 센고쿠 요시토 시절에는 빅 텐트 파벌의 성격이 강했으나, 마에하라가 회장이 된 이후에는 확실히 우경화되었다.[8] 유세 현장에서 '거짓말쟁이','꺼저라','배신자'등의 야유가 만무하고, 선거 중에 그가 연 민진당의 정책 포럼에서는 민진당 장례식장이라고 시민들이 항의하고 있다. [9] 이것은 민공 연대가 성사되어 이긴 부분과 분열되어서 진 상반되는 케이스가 뚜렷히 존재한다. 입헌민주당이 지역구에서 승리한 선거구 중 당선자가 많은 도쿄(4곳)-가나가와(3곳)-홋카이도(3곳)의 모든 선거구에서 공산당이 야권 연대를 위해 자발적으로 후보를 내렸다. 특히 도쿄-가나가와에서는 도쿄 7구를 제외하고 공산당이 후보를 냈으면 7 개구 중 6 개구는 전멸한다. 1~3% 차이의 선거구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각 자민당이 승리한 지역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야권연대가 이루어졌다면' 이라는 생각이 드는 지역구가 상당하다. 단순히 연대한다고 모든 지지율 합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민당이 승리한 지역구 중 접전지가 제법 많았기 때문에 야권 분열의 상황이 커보인다.[10] 선거를 이기고 나서 시행한 어느 인터뷰에 노다 세이코 총무대신이 이번 선거는 '절대 평가가 아닌 상대평가. (야당이) 분열해준 덕에 의석을 지켰다'고 발언 했다.[11] 자위대 보유, 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환경 정비 실시 내용 명기, 지방 공공 단체 권한 강화, 긴급사태 조항 신설과 관련한 부분의 개헌을 찬성했다.[12]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13] 바로 위의 2장의 사진을 보면, 의원실 책상 위에 증기기관차의 명판들이 몇 개 전시되어 있다.[14] 일본어 위키백과 설명으론 증기기관차를 가리키는 영단어인 Steam Locomotive에서 앞글자를 딴 SL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출처.[15] 다만 이시바 시게루의 경우 철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둔 덕후이며. 철도에서는 타는 것을 중점으로 두는 노리테츠(乗り鉄) 쪽에 가깝다.[16] 민정당, 사회시민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17] 민진당과 신설 합당[18]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9] 1994년 5월 20일
탈당, 1994년 7월 5일
입당. 1996년 8월 30일
탈당, 동년 9월 28일
창당.[A] 석패율제 당선[20] 당선 당시에는 당적을 가진 무소속 의원이었으나, 이후 을 거쳐 소속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