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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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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23대 임금. 연호는 건원(建元).
2. 호칭[편집]
매금(寐錦)이라는 단어는 〈광개토대왕릉비〉, 〈충주 고구려비〉, 《일본서기》,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군주의 칭호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중원 고구려비에는 매금이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나온다. 주로 고구려, 일본 등 외국 기록에서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매금의 의미에 대해 "신라의 왕명이다", "신라 밖에서 신라의 왕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등의 의견이 갈리었으나, 1988년 1월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신라의 매금이 직접 와 조공을 바쳤다."
이라는 비문이 등장함에 따라 법흥왕 때까지 신라 스스로 사용한 칭호임이 밝혀졌다."갑진년(524년) 정월 15일, 탁부(啄部)의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매금이 마립간의 동일 명칭이라면 지증왕 대에 칭호를 중국식 명칭인 왕으로 이미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법흥왕 대까지는 '매금(마립간) + 왕'이라고 합쳐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3. 생애[편집]
3.1. 즉위 전[편집]
법흥왕은 이미 아버지 지증왕 시절부터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지 마립간이 40세 전후하여 승하한 것에 비해 그의 뒤를 잇는 지증왕의 즉위시 나이가 64세로 고령이었다는 점에다 인척 관계로 보면 그리 가깝지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지증왕에 있어서는 석연치 않은 왕위 계승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3]
그러나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혼인 시기가 500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법흥왕은 지증왕이 60세에 접어들 때에 낳은 아들이 되는데, 법흥왕은 즉위 시 16세를 넘을 수 없는 나이여야 한다. 지증왕이 그 이전에 혼인을 안 했을 리가 없고 그 전에 자식이 없을 리도 없다.[4] 그럼에도 법흥왕은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 왕위에 올랐을 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래서 대체로 법흥왕의 위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영향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실제 혼인 시기는 기록과 달리 500년 이전이었는데, 지증왕의 즉위 과정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지증왕 즉위 이후의 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487년 박씨 가문과 연계되는 신궁을 설치했던 일에 지증왕이 어느 정도 관여했었다면, 이 즈음에 지증왕과 연제부인이 이어졌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즉위 시 나이도 10대 후반이 아닌 20대~30대 사이가 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에는 충분한 나이가 된다.
법흥왕의 어머니 연제부인은 성씨가 박씨다. 눌지 마립간의 자손들은 대체적으로 눌지 형제의 자손들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역시 눌지 형제의 자손에 속하는 지증왕의 부인이 박씨라는 점은 당시 여러 체계에서 꽤나 벗어난 경우가 된다. 하지만 지증왕이 김미사흔계에 밀리고 있었던 복호계의 위치에서 생각해 볼 때, 다른 왕비족을 맞아들여서 영향력 강화에 나섰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정이 된다.
실제로 연제부인은 신라 왕비로는 꽤나 특이하게 전설을 남기고 있다. 또한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의 부인이 모두 박씨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복호계와 박씨의 연합은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법흥왕은 아버지의 나이가 70세를 바라보는 시점에 접어들면서 외가인 박씨 집안의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본인의 입지를 다졌을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동생인 김입종과 함께 왕권 강화에 어느 정도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에 김입종은 법흥왕 대에 신라 6부 중 한 부의 수장으로 올라가게 된다.
3.2. 율령 반포와 관리의 공복 제정[편집]
520년 1월 율령을 반포하고[5] 유리 이사금 때 6부에 17관등을 처음 둔 이래 율령으로써 17관등에 대한 정비를 완료하였고,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여 골품제를 확립시켰다. 521년에는 나제동맹 동맹국인 백제와 함께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중국과의 외교는 내물 마립간 시절에 전진의 부견과 교류한 이후 약 140년 만이었다.
3.3. 불교 공인[편집]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며 527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 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 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 설화에 등장하는 승려나 고구려 출신 승려 묵호자 혹은 아도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법흥왕 이전에도 신라 일부, 특히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거나 널리 퍼지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법흥왕이 공식적으로 불교 수용을 선포한 것으로, 흰 피의 기적으로 유명한 이차돈이 이때의 사람이다.
이후 529년에는 살생을 금지시켰다. 신라는 귀족들이 고유 토착 종교의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던 까닭에 토속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 중국과 가까워 비교적 일찍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최초 전래된 시기도 아리송하고 공인 과정에서 강력한 반대로 피를 줄줄 흘렸던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다. 외래 종교를 들여와 토속 종교를 억누르는 것으로 제사장을 겸하고 있던 귀족 계층의 권위를 찍어 누를 수 있기 때문.[6]
법흥왕은 신라의 토착 종교와 관련된 7개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선전하며 밀어버리고 절을 짓는 국책 사업을 벌였는데, 이 중 유명한 것이 흥륜사, 분황사, 사천왕사, 불국사이다.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도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부쉈다가 다시 짓는 등의 진통을 겪었으나, 법흥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7] 신라는 이후 100년도 안 되어 놀랄만한 불교 국가로 변신했으며, 이 시기에 활동한 고승만 해도 원효, 의상, 대안, 명랑 등 수두룩 빽빽하다.
법흥왕 재위 당대인 535년에 남겨진 울주 천전리 서석 을묘명[8] 은 안급이(安及以)라는 이름의 승려와 그의 일행이 왔다갔다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법흥왕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하여 불교를 중흥시킨 성스러운 대왕으로 높여주고 있다. 불교를 밀어준 왕이다보니 불교계에서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3.4. 병부와 상대등 설치[편집]
531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9] 으로 임명했는데, 귀족의 대표를 상대등에 임명한 것은 곧 귀족을 관료제 체계에 포함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신라의 왕은 사실 법흥왕 이전까지 귀족과 공동 하교를 내릴 정도로 신라 6부 중 하나인 탁부(啄部)의 지도자에 불과했지만[10] , 이후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며 이후로는 모든 당대 기록에서 오로지 왕(王)으로 표현되게 된다. 또한 군사력을 담당하는 전문 부서인 병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그 전까지는 왕실과 유력자들이 사병 비슷하게 사유하고 있던 병사를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소속시키고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 신라라는 국가가 점차 조직적으로 변해가는 것.
3.5. 금관국(금관가야) 편입[편집]
한편 법흥왕이 신라를 다스리던 6세기 초반 당시의 금관국[11] 은 100여 년 전의 신라-왜 전쟁 이후 전성기를 벗어나 가야 지역의 주도권도 잃은 채 약화된 상태였고, 한때 고구려의 속국 신세였던 신라와의 국력 차이는 이미 넘사벽으로 벌어져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법흥왕은 장차 나라를 합병하기 위해 금관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529년에는[12] 구형왕이 신라로부터 위협을 느껴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며[13] , 신라는 상신(上臣) 이사부에게 3,000명의 병력으로 토벌을 명한다. 왜국 측 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이사부의 군대를 보고 도망가자 이사부는 금관국을 포함한 4개 도시를 빼앗고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쇠퇴한 상태였던 금관국은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532년, 금관국의 구형왕이 왕비와 큰 아들 김세종, 둘째 아들 김무덕, 막내 아들 김무력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 이때 금관국의 항복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특별한 군사적 충돌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것처럼 나오는 데 반해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신라가 쳐들어오자 군을 이끌고 맞섰음에도 병력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으로 나오며,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여튼 구형왕이 항복해오자 법흥왕은 금관국을 정식으로 합병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해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금관국을 흡수하면서 얻은 법흥왕의 또 다른 이득은 인재인데, 구형왕의 장남인 김세종과 막내 아들인 김무력은 진흥왕 시대에 신라에서 장군으로 활동하였으며 김무력의 첫째 손자는 그 유명한 김유신이고 둘째 손자인 김흠순도 뛰어난 장군으로 활약했다.《일본서기》에서는 금관국뿐만 아니라 탁순국[14] 과 탁기탄의 항복까지 법흥왕 때 받아낸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신라와 인접한 가야권 동쪽 몇몇 나라가 신라에 흡수되면서 나머지 가야 소국들은 대체로 친(親) 백제 성향으로 기울었고, 가야의 완전한 병합은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꺾은 후인 진흥왕 시대에 완료된다.
3.6. 연호 제정[편집]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정했으며, 이는 신라에서 기록 상으로 전하는 최초의 연호다.
538년에는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교서를 내렸는데, 이를 통해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가 조금씩 체제를 갖추어 갔음을 알 수 있다.
3.7. 기타[편집]
한국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 기록에서는 이와이의 난을 527년 지원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야마토 정권)은 백제, 가야 문제에 끼어들려 하거나 소지 마립간 시절까지 신라를 꾸준히 공격하던, 신라 입장에선 골칫거리였다. 이와이의 난을 통해 일본을 동서로 갈라버리려 했지만 이와이가 생각보다 빠르고 쉽게 무너져버려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국가 경제의 기초인 농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531년에는 제방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실제로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도남동에는 지금도 사용되는 신라 시대 저수지가 있는데[15] 여기서 536년에 건립된 영천 청제비가 발견되기도 했다. 비석 앞면에는 저수지의 넓이와 높이, 만드는 데 동원된 사람 수, 담당자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나중에 이 저수지를 수리할 때 추가로 적어놓은 내용이 써 있다. 당대의 비석이 발견된 건 이곳 뿐이지만, 신라 각지에 이런 식으로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저수지가 여럿 있었을 것이다.
3.8. 사망[편집]
말년에 사실상 출가해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운(法雲), 자는 법공(法空)이라 했고, 540년 7월 붕어하여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법흥왕릉은 법흥왕의 업적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신라왕릉의 크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대비되게 매우 작은 편인데 신라왕릉 형태의 초기형 → 후기형 변천사를 따져보면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법흥왕의 본인의 조카이자 외손자인 삼맥종이 왕위에 올라 진흥왕이 되었다.
4. 평가[편집]
고대 국가로서의 신라가 체계화되는 시발점을 만든 왕으로 신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 및 성군이다.
부친 지증왕에 이어서 삼국간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섰던 6세기 초반의 짧은 평화 기간 동안 강도 높은 내정 개혁과 국력 증대, 왕권 강화, 탁기탄과 금관가야 , 탁순국 등 신라와 인접한 가야 국가들을 병탄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
조카인 진흥왕의 폭발적인 영토 확장도 이 때 쌓아둔 국력이 배경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증왕과 함께 내정 개혁으로 신라의 향후 400년을 결정지은 신라 역사상 중요한 임금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반면 숭유억불의 시대 조선 때는 고구려의 소수림왕, 백제의 침류왕과 함께 불교를 들여와 삼한을 어지럽힌 불교 삼총사라고 악평을 받았다.[16][17]
5. 기타[편집]
- 업적도 많고 한국사 시험에는 단골로 나오지만 대중매체에서는 KBS1 부처님오신날 특집드라마 〈이차돈〉[18] 에 출연한 것 빼고는 신문왕과 함께 대중매체에서 거의 안 다뤄지는 왕이다.
6.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법흥왕 본기〉
一年 법흥왕이 즉위하다
三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 용이 양산의 우물 안에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다
五年春二月 주산성을 쌓다
七年春一月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과 위계를 정하다
八年 양에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치다
九年春三月 가야의 국왕이 혼인을 청하다
十一年秋九月 남쪽 변방 지역을 둘러보다
十二年春二月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다
十五年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다
十六年 살생을 금지하다
十八年春三月 제방을 수리하다
十八年夏四月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十九年 금관국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상대등인 철부가 죽다
二十三年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다
二十七年秋七月 왕이 죽다
지증왕과 마찬가지로 기록은 소략한 편이나 율령 반포나 불교 공인과 같은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 있다.
7. 둘러보기[편집]
[1] 지증왕이 왕후 연제부인과 혼인한 해가 500년이고, 동생인 입종 갈문왕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500년대 초반쯤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렇게 된다면 법흥왕의 나이가 즉위시 지나치게 어리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어머니 연제부인과 아버지 지증왕의 혼인 시기는 실제보다는 더 앞당겨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대체로 추정해본다면 박씨 가문과 연계되어 있는 신궁이 지어진 487년 즈음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출생도 그 즈음으로 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각종 왕권 강화에 나서기에는 나이상 적당하다.[2]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탁부 모즉지 매금왕”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법흥왕이 탁부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인되었다.#[3] 특히 소지 마립간이 벽화를 경주로 불러들여 그녀가 아이를 임신하게 된 시점이 어림잡아도 500년 9월의 일인데, 두 달 뒤 곧바로 승하한다. 왕위 계승 과정이 석연치 않은 게 확실한 셈.[4] 이 때문에 연제부인이 법흥왕의 친어머니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5] 율령 반포 기록에 대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했었는데, 524년에 새겨지고 1988년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을 통해 이 시기에 성문화된 법률을 통한 체계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지증왕 때인 503년에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율령이 반포된 520년 이후인 524년에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의 관등 기록 차이에서 520년 율령 반포를 통한 17관등의 완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6] 같은 과정을 거친 국가로 일본이 있는데, 모노노베씨와 소가씨의 항쟁으로 2탄을 찍는다.[7] 현재까지도 경상도가 전통적으로 불교세가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8] 을묘년에 새겨져서 을묘명이라 한다.[9] 신라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관직명이다. 이전 기록에서도 등장하는 이벌찬, 이찬 등의 명칭은 관직이 아닌 관등이다.[10] 사실 탁부 또는 훼부로 언급되는 금석문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모두 지증왕에서 법흥왕 시기의 것이므로, 신라 왕 중 내물왕계만 탁부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신라의 시작부터가 서라벌 6개 마을의 지배자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런 성격은 박혁거세 설화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11] 금관가야를 뜻한다. xx가야라는 표현은 한참 후대인 고려 태조 때부터나 사용된 것이다.[12] 한국 사서에는 안 나오고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조〉에만 나오는 사건이다. 이하의 내용은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과 윤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핵심만 요약한 것이다.[13] 왜국이 가야권과 유착되어 있었고 때때로 왜군이 남부 지방에 파견된 것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나오는 이야기니 일본 측의 과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14] 오늘날의 창원시로 비정된다.[15] 이름은 청제(菁堤)로, 현지인들은 청못이라고도 부른다.[16]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조선 당대의 과거 역사인물 평가는 여러모로 현대와는 다른 점이 많다.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중대보다 하대 왕들이 대체로 평가가 더 좋다.[17] 물론 조선시대 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탄압했던 시기라고 생각하고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엄연히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고, 백성들의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인데다가 종교든 학문이든 국교로 지정한 이상 후대에 갈수록 타락하기 마련이다. 저렇게 불교를 비판한 유교도 정작 훗날에는 중이 유학자로, 절이 서원으로 바뀐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심하게 타락했다.[18] 극본 김운경, 연출 이종한 PD가 맡았다. 배우 박근형이 이 연기했다.[19] 사축부인(巳丑夫人), 파도부인(巴刀夫人)이라고도 한다. 보도(保道)라는 표기도 있다. 기록마다 김씨, 박씨 등으로 성이 엇갈리는데 한 건이라면 모르겠으나 왕비의 성은 이 기록 외에도 수없이 바뀐다. 그녀가 소지 마립간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정사에서는 아버지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