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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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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후삼국시대의 인물. 신라와 고려의 문인 겸 관료.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우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렸다.
2. 생애[편집]
6두품 최치원의 11살 어린 사촌동생으로 경주 최씨 가문 출신이다. 886년 18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906년 중국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했는데 신라와 발해의 은근한 경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당나라 빈공과 수석은 신라 출신 학생들이 거의 싹쓸이를 하는 수준이었는데 한 번은 발해 출신 오소도(烏炤度)가 신라 학생 이동(李同)보다 높은 등수를 받아 신라를 이겼다.[2] 이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당나라 빈공과에 응시했는데 최언위가 오광찬보다 등수가 높았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는 오광찬의 등수를 최언위보다 높여줄 것을 당나라의 시험관 설정규에게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짓밟혔던 신라 학생들의 자존심을 최언위가 살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최언위는 중국에서 당나라가 907년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고[3] 909년 후삼국시대로 혼란스러운 신라로 귀국하여 효공왕에게 집사성시랑(執事省侍郞)[4] -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5] 직위들을 받아 역임한다. 최언위는 일찍이 벼슬을 버린 사촌형 최치원과 달리 오랫동안 벼슬을 지냈는데 특히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과 최언위의 딸이 혼인을 맺어 사돈 관계였을 정도로 크게 출세했다.
918년 태봉의 시중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고, 최언위는 언젠가 고려에 귀부했는데 그 시기가 불명확하다. 고려사에서는 918년 왕건이 즉위하자 경주 최씨 가문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했다고 하는 반면, 고려사절요에서는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따라서 개경으로 갔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서가 훗날 조선에서 편찬된 반면, 최언위가 직접 남긴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 따르면 924년(경애왕 원년)에 최언위가 신라의 집사시랑을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924년 이후에 신라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928년 정월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국서를 최언위가 썼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만약 이대로라면 고려사절요의 935년 귀부도 틀린 것이 된다.
하여간 당시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던 그가 언제인가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크게 우대해, 태자사부(太子師傅)[* ] 벼슬을 제수했다. 이는 고려 초기 태자부의 직위로 보인다.[6]
성품이 온후하고 신라 삼최로 일컬어질만큼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당시 고려의 많은 호족 가문들이 최언위를 존경했다고 한다. 궁원(宮院)의 액호[7] 를 모두 썼으며 높은 직위로 승진했다.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를 썼는데 당시 관작은 대상(大相) - 검교상서좌복야(檢校尙書左僕射)[8] 겸(兼) 어사대부(御史大夫)[9] - 상주국(上柱國)[10] -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11] 였다.
이후 944년 천수를 다하고 죽을 때까지 관직에 있었으며 관직이 평장사(平章事)[12] 에 이르렀다. 최언위의 최종 관작은 대상(大相)[13] - 원봉대학사(元鳳大學士)[14] - 한림원령(翰林院令)[15] - 평장사(平章事)[16] 였다.
사후 혜종에게서 정광(政[17] 匡) 향직 품계와 시호 문영(文英)을 추증받았다.
신라에 있던 시절부터 고려에 벼슬하던 시절까지 많은 승려들의 비문을 작성했고 상당수는 지금도 남아있다. 이 시대에 새긴 비문의 대부분이 최언위의 문장이다. 당시 시대상이 담겨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데, 흥녕사 징효대사탑비에서는 890년대 치안이 불안하던 난세 정국을,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 작성한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나 오룡사 법경대사 보조혜광탑비에서는 폭군 궁예를 물리친 왕건의 혁명과 중흥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작성하였다.
3. 기타[편집]
- 견훤과 왕건이 주고 받았다는 국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견훤을 대신하여 고려왕에게 보내는 글)' 및 '대고려왕답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 고려왕을 대신하여 견훤에게 답하는 글)'로 알려진다. 간략한 고대사 기록에서 본 문장은 상대적으로 아주 자세히 사료에 전해지는데 그만큼 두 글이 명문임을 반증한다.[18] 다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상세한 내용과는 달리 필자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그나마 <동문선> 제57권에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의 필자를 최승우라 명시한 반면 '대고려왕답견훤서'의 필자는 무명씨로 소개하고 있으니 '최언위 집필설'은 불명확한 실정이다.
4. 가족 관계[편집]
- 아들
- 손자
- 최항(崔沆): 8대 현종의 배향공신. 최광원의 아들이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대중적으로 유명한 최치원, 최승우와는 달리 인지도가 낮다. 오히려 최언위를 대신해 최응 혹은 최지몽을 신라 3최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최승우, 최응, 최지몽이 비중있는 역할로 나왔고 최언위는 신라 3최로 이름만 언급되었다. 16화 17분 30초 무렵에는 "이 작품에서 최언위는 나중에 등장을 한다"라며 직접 등장할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다. 최언위 정도라면 최승우의 라이벌이거나 모시는 주군은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의 벗 정도의 비중을 가져야 할텐데 이 포지션을 최응이 가져갔고, 그렇다고 명색이 신라 3최 중 1명을 일반 신료 정도로 묘사할 수도 없으니 나오지도 못한듯. 대고려왕답견훤서는 누가 썼는지는 나오지 않으며 고려는 최치원이 썼다는 거짓말로 백제 조정을 당황케하려는 술수를 부린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함께 신라 3최로 불렸던 최승우가 백제 조정에 중신으로 있는지라 효과는 없었다.
6. 둘러보기[편집]
[1] 사후 추증. 2품 2등위.[2] 최치원은 이를 가리켜 신라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깠다.[3] 최언위의 지공거(시험 감독관 및 인맥)인 설정규가 당나라를 무너트리고 세워진 후량에서 어사사헌을 지냈기 때문에 그 휘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4] 집사성의 차관. 집사성은 신라 13부 정부 기관 중 하나.[5] 서서원 소속 직위. 서서원은 신라 국왕의 명령을 문서화하는 부서.[6] 당시 고려의 태자는 왕무였다.[7] 額號 : 대문에 걸어놓는 현판.[8] 검교는 해당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걸 명시하기 위해 붙힌다.[9] 어사대의 장관.[10] 최고위 훈위. 훈위는 실무직이 아닌 명예를 치하하기 위한 훈장에 가깝다.[11] 원봉성 소속 직위.[12] 고려의 문산계 품계로는 정2품 직위이며 향직 품계로는 몇 품인지 알 수 없다.[13] 향직 품계. 4품 1등위.[14] 원봉성 소속 직위. 원봉성은 신라의 서서원과 같은 부서.[15] 한림원의 장관. 한림원도 원봉성과 비슷한 부서.[16] 내의성의 차관. 내의성은 중서문하성의 전신.[17] 正의 오기로 보인다. 고려사 선거지에는 바를 정 자로 나오기 때문.[18] 출처는 삼국사기 열전 견훤편, 고려사 세가 태조 10년(927), 11년(928)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