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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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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군사 독재로 인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된 정책. 이 용어는 본래 일본 제국 말기에 처음으로 사전에 등장하였으며,[1] 당시 일본에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 선전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2] 이후 미국의 일본 점령기 당시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탈피를 위해 GHQ가 의도적으로 실시한 정책을 일본인들이 이렇게 부르며 소극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3]
정식 명칭은 딱히 없으며,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불렸던 3S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S로 시작하는 세 단어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삼에스 정책 또는 쓰리에스 정책이라고 읽는다. 이 정책은 대한민국 정부 산하 기관인 대통령기록관에서도 3S 정책이라고 부를 정도로 표현이 굳어진 상태이다.
사실 독재 정권이 정치적인 이유로 스포츠를 장려했던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비단 올림픽[4] 을 체제 선전용으로 활용했던 나치 독일이나 월드컵[5] 을 체제선전용으로 써먹었던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와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뿐 아니라, 중남미에서 독재정권이 축구리그나 야구리그를 활성화시켜서 사람들의 눈을 돌리게 만든다거나 하는일이 많았다. 공산정권 시절의 동유럽에서 아예 트레이닝 시스템을 선진화, 체계화시켜서 애초부터 인구 세계 3위를 차지했던 소련이나 나름대로 인구가 많았던 폴란드뿐만 아니라 당대 기준으로도 인구가 많은 나라로 분류되지 않았던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이 줄줄이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였다.[6] 따지고 보면 전두환 정부도 이러한 사례를 참고해서 이러한 기조에 발을 맞춘 것이었다. 참고로 MBC 드라마 <제5공화국> 25부에는 일본의 세지마 류조[7] 가 전두환, 노태우와의 식사자리에서 '국민에게 적당히 즐겁고 신나는 일을 만들어주면 정치에 무관심해진다'는 조언을 한다.
정통성 없이 집권한 전두환 정부가 박정희 정권기때의 여러 사회, 문화적 제한을 풀고 정부 차원에서 자유화를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유럽, 남유럽과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일대에서는 68 혁명과 함께 히피문화, 성해방이 한창 유행이 되었고, 각 나라별로 낙태금지 철폐, 학교내 두발자유화 및 체벌금지같은 문화적 자유주의도 널리 퍼졌으며,[8] 이러한 유행 중 일부는 한국에서도 전파가 되어서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유행하였다. 박정희는 자신이 일제강점기때 교사였었고, 이후로는 여러차례 소속에 변화가 있었지만 어쨌든 군대에 오랫동안 몸담았기 때문에 군대식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문화적 자유화 경향을 아니꼽게 생각한데다가 사회불안의 요인으로도 지목하여 단속하는데 집중했지만[9] , 반발을 잠깐 억누르던 수준이었고, 1978년 총선과 1979년 부마항쟁에서 드러났듯이 젊은층들의 불만표출을 막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또한 박정희 사후의 서울의 봄 때에도 민주진영에서는 정치적인 민주화를 주로 요구했지만, 동시에 중, 고등학생들이 두발자유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등 박정희 시절의 통제일변도 정책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문화적 자유화를 요구하는 흐름도 확연해있던 상황이었다. 신군부 세력은 5.17 내란을 시행하여 국회를 강제로 해산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제 진압, 언론통폐합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며 민주화 세력들을 완전히 억누르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사실은 매우 뚜렸했고, 신군부에 대한 반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일단 박정희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이미지는 심어주어야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10] 때마침 전두환 자신 또한 술과 축구를 좋아하는 향락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11] 그래서 약한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소위 전문가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가리지 않고 정권에 끌여들이려 애썼는데,[12] 3S정책도 이 당시 영입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시행된 정책이었던것이다.[13]
실제로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취한 대표적인 조치 중 하나가 컬러 방송 시행과[14] , 야간통행금지 폐지였고, 이외에도 두발자유화와 교복 폐지 등 당시로선 상당히 획기적인 조치들도 여럿 시행되었다.[15] 물론 정치적인 검열을 완화시키는 일은 없었고, 만화 검열제나 가요검열은 이때에도 여전히 잔존하여서, 방송계나 출판계, 문학계에서도 검열이 여전히 잘만 진행되었으며 특정한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되거나 한수산 필화 사건처럼 소설이나 시를 썼다가 고문당하는 사건들도 당연히 있었다. 만화검열과 가요검열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나 완화되었고, 가요 검열이 폐지된것은 1996년도의 일이었다.
이 때 어떤 식으로 검열이 진행되었는가 하면 대머리와 주걱턱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이 금지되었으며[16] , 순자라는 여자 이름을 가진 배역이 비천하거나 웃기는 역할을 하는 것도 안 되는 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과 김수정의 아담과 이브가 대머리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연재가 중단되었던 적이 있으며, 탤런트 박용식이 전두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출연금지를 당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17] 그리고 노동 문제를 다루는 것도 어김없이 검열 대상이었다. 이 당시에는 연간 노동시간이 3000시간에 육박했던 시절로, 많은 직장에서 초과근무와 야근이 일상다반사라서 저런식의 자유화 조치가 이어지다한들 주6일 동안 열심히 일만하다보니 휴일에는 피곤에 찌들어서 문화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던 경우가 태반이었다.[18]
그리고 당시 뉴스 프로그램과 신문들도 평일 메인 뉴스의 경우에는 전두환과 이순자의 동정소식을 맨 앞에 다루는 것이 당연시 되었으며 신문들도 보도지침이란 명분하에 검열당해야 했다. 당연히 시사 프로그램들도 국내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소재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이나 사회 문제를 정부에 불리한 쪽이거나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도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MBC 리포트나 레이다 11, 추적 60분 같은 시사프로그램들을 보면 사회 비판적인 내용은 있기는 하지만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은 일절 찾아볼 수 없거나 찾아보기 힘들다. 노태우 정권기의 뉴스비전 동서남북, MBC 리포트에서 노태우 정부를 직, 간접적으로 비판적인 내용을 볼수 있는것과는 차이가 크다.
2. 3S는 무엇인가?[편집]
3S라는 이름은 전두환 정부가 주력으로 육성한 다음 세 가지 산업의 약어에서 유래했다.
- Screen (영상)
- Sports (스포츠)
- Sex (성문화)
3. '정책'의 실존 여부 논쟁[편집]
전략과 정책으로서의 3S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며, 전두환 정권의 비판자들이 포르투갈 독재정권의 3F 정책을 대입해 진짜로 실행되었던 정책인 양 둔갑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여느 정권이나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즐길거리'를 만들어 대중에게 공급하려 하며, 그 결과로서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소산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지지도를 높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걸 막기 위해 우민화 정책을 연구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려면 여기에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정책의 입안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의 정책 가운데에서 '3S'로 대변되는 우민화 정책을 연구, 추진한다는 정책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처럼 장관(당시 조윤선)이 인정한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실존여부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전두환 정권이 그런 방식을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것은 인정하더라도, '정치적 우민화'에 대해선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3S를 두고 당시 운동권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80년대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군부독재를 타도해야 하는 입장에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수적이었지만, 전두환 집권 이후 경제는 점점 안정화되어 갔고 과격 운동권에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비롯한 사고들을 치면서 "다소 불만은 있지만 현 체제에 그럭저럭 순응"하는 국민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불리함을 타파하고자 경제 성장에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대중의 자유화 요구를 수용한 정책들을 3S 정책이란 이름으로 싸잡아 "전두환의 우민화 정책"이라고 프레임화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흔히 3S로 일컬어지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 각 분야에서 의도성의 존재에 대한 찬반 양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 스포츠[편집]
- 옹호론
- 비판론
3.2. 스크린 & 섹스[편집]
- 옹호론
한편 영화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선정적인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 등도 세운상가에 가서나 몰래 구입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제한이 풀린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다음 전두환 정권이 레임덕에 걸리면서 자유화 바람이 불었던 1987년 하반기였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정적인 문화가 심했던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년대 중반 연예인들이 누드사진을 대놓고 찍을 때 였다고 하지만, 그런 류의 누드사진은 이미 외국에서는 소프트한 누드에 불과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이라고는 하기 어렵다.[27]
- 비판론
또한 사실관계도 일부 다른데, 유흥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권력과 서서히 결탁하기 시작했던 것이 80년대였다. 실제 전두환 시기 지방의 유흥업이나 관광호텔의 경우에는 서울의 안기부에서 대놓고 허가권을 휘두르며 관리를 했다.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문화적으로는 섹스를 지향점으로 삼지 않을 만큼 보수적이었을지언정 '성'을 통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는 주장 자체는 근거가 있다.
3.3. 결론[편집]
서구적인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영화와 스포츠 문화는 더욱 발전해 있었고 성문화에 개방적이었던 편이다. 스크린 역시 한국은 컬러 TV 등의 보급에서 서방 표준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자본진영에서는 오히려 문화가 자유로워지면 자유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증폭시켜 서구식 민주주의를 촉진한다고 봤으며, 반대로 독재 때문에 저항 문화가 퍼지는 것을 우려하던 공산진영 국가들에서 문화를 검열하곤 했다.[28] 이는 냉전기 자유진영의 수장이던 로널드 레이건이 베를린 장벽 앞에 서서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벽을 부수시오!"라고 소리친 연설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는 "3S 정책을 시행해 국민들을 우민화하고 관심을 돌렸다"는 주장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프로파간다는 공산진영이나 자본진영을 막론하고 수행되어 왔으며, 시민들을 스포츠나 오락물 등의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 정치적 무관심을 증폭시키는 정책은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너무 오래된 수법이라 빵과 놀이라는 말도 있을지경. 당대 전두환 정부가 비록 "자본진영"에 속해 있었다고는 하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음은 분명한데다, 서구 선진국들과는 달리 전두환 시대의 자유화는 "모든 문화에 대한 자유"라기보다는 (스포츠·스크린·섹스라는) 자극적인 특정 요소들에 한정한 자유와 정치적 풍자 등 나머지에 대한 검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실제로 독재정치를 하며 정치적인 소재의 검열은 철저히 하는 와중에 일부 성적인 것이나 스포츠만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바로 3S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3S 정책이 명시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거나, 문민정부에서 검열이 더 완화되었기에 3S 정책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적절하지 않은 반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전두환 정부의 부분적인 문화 자유화 정책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소위 '3S'에 대한 관대함이 정말로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자유화 요구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는 시발점이었는지[29] , 아니면 우민화라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영역에서만 연출된 것인지[30] 이다. 둘째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국민들이 과연 부분적으로라도 정말로 문화 자유화의 혜택을 누렸는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문화통치[31] 마냥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는지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32] 일 뿐이고 후자는 개개인마다 관심 분야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테니[33] ,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 또한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평가[편집]
4.1. 긍정적 평가[편집]
3S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민화 정책이라는 마땅한 실증적 근거가 없고, 사회자유화의 일부분으로 사회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줬다고 평가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대 한국 문화 사업을 만드는 것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 정책들이다. 1950~70년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들을 이어가면서 극도로 경직된 한국 문화와 사회 분위기를 유화[34] , 시키는 것에 일조하였으며, 지나치게 억압되며 불문율로써 여겨지던 성문화 역시, 3S 정책이 행해질 당시 해방되면서 더 개방적으로 변했다. 특히 컬러수상기가 도입되고 보급률도 빠르게 상승하여 TV문화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풍부해졌다.
또한 KBO 리그를 비롯한 프로 스포츠 리그 역시 자유화 정책의 일부로써 만들어지며, 실업 리그와 아마추어 리그만 있던 체육계의 상업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실업 리그, 대학 리그와 프로 리그 간의 관계로써, 인력 시장과 공급하는 하부 리그들의 연계 기틀이 점점 등장하였다.
그리고 문화 사업 협회같은 것들이 이때 등장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가요를 비롯한 여러가지 대중 문화 사업들이 더욱 거대해질 수 있었다. 대학가요제 같은 행사나 그런 곳에서 발굴된 신인 가수들 역시 거대 문화 사업과 연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3S에 속하는 셋 모두가, 빈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일본이 1940년대에서 1950년대로 넘어오며 그랬듯이, 한국의 1980년대 역시 급격한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향상으로 대중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며 문화소비욕구가 넘쳐났다. 3S 정책의 아이디어가 누구의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프로 스포츠산업 육성, 그리고 컬러TV의 확산에 맞춘 영상물, 음악 정책의 자유화 시작은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마지막 S에 대해서는, 그동안 금욕적으로 묶었던 것을 자유롭게 풀어준 것에 불과했고, 조폭은 그 과정에 큰 기생충이어서[35] 이후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21세기의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향락을 금지시킨 독재정권이 자신들이 중요시하는 가치를 국민들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국민들을 옭아매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결과적으로 80년대 3S 당시보다 훨씬 끔찍한 지옥을 지상에다 만들어놨을 뿐이었다. 그리고 87년 민주화 이후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두환 시절의 잔재라고 다시 탄압을 하긴 커녕 스스로 주머니를 열어 3S를 즐겼다. 지금에 와서 우민화 정책이라고 비난하지만 문화 산업을 즐긴 당대 대다수의 대중들은 엄청나게 경직된 과거 이승만, 박정희 시절에 비해 크게 만족했으며, 그런 산업을 규제했어도 더욱 큰 비난을 가했을테니 무의미한 비난일 뿐이다. 또 그러한 문화 산업을 즐기던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정치에 아예 무관심하게 '우민화' 되지도 않았다. 정말 멍청하게 우민화가 되었다면 전두환이나 전두환 측 인물들이 90년대 이후에도 장기 집권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4.2. 부정적 평가[편집]
3S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민화 정책으로서나, 경제 부흥 정책으로서나 부작용이 있었던 정책이라 주장한다. 박정희 정권 직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과의 지나친 반목,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한 경제 개혁의 시한부화, 2차 석유 파동, 이상기후로 인한 식량 공급 불안 등의 사건들로 인해서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경기가 하강하고 있었고, 1980년 기준, 경제 성장율은 -1.5%가량의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한강 유역, 강남 등지에 대한 개발 정책들을 펼쳤고, 3S 정책 역시 이 중 일부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 개발 정책들과는 달리, 도리어 갑작스럽게 풀려버린 에로 영화, 유흥 업소 등의 성문화 산업들은 조폭 같은 온갖 조직 범죄들의 손에 관리되는 모습을 가져왔으며, 이는 범죄율 증가와 치안 악화등의 악영향들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대해진 조폭들을 비롯한 여러 조직화 범죄들은 노태우 정부 당시 범죄와의 전쟁 정책을 만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문화 사업을 비롯한 여러 방송계들의 육성 역시 기만적인 태도로 나왔었다. 언론통폐합을 통해서 반정부 혹은 친좌익 성향을 보이거나, 반정부 성향의 인물이 있는 여러 방송국과 언론사들을 폐쇄시켰고, 또한 연예계 역시 어느 정도 발전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건전가요와 금지곡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민주화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5. 이야깃거리[편집]
우스개로 술(酒, spirit/sake 혹은 SUL/SOOL) 아니면 스파이(간첩 혹은 무장공비, Spy)를 가해서 4S라고도 한다[36] . 희석식 소주는 주정으로 값싸게 만들어낸 술이라 빨리 먹고 빨리 취해서 빨리 토해버릴 수 있었기 때문. 물론 몸에는 매우 좋지 않다. 그리고 간첩은 언제나 훌륭한 떡밥이었다.
Sorrow(슬픔, 한)를 주제로 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 또한 있다. KBS에서 1983년 방송했던 특집 프로그램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두고 하는 이야기. 실제로 해당 항목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대북 심리전에 이용하려는 전략이 어느정도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이와 거의 비슷한 정책으로 3F 정책을 썼다. 축구(Futebol : 포르투갈어로 축구), 종교(Fatima: 파티마의 성모 사건 참조),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역시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 종교, 음악으로 돌리려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한건, 정작 파두 가수들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는 것. 1974년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 금지곡이었던 주제 아폰수의 곡이 흘러나왔는데 이것이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문명 시리즈를 하다보면 시민들의 만족 상태를 나타내는 수치인 행복도가 나오는데 이걸 올리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극장, 영화관, 콜로세움 등을 도시에 지어주는 것이다. 스핀오프인 알파 센타우리에서는 먼 미래답게 Screen과 Sports(그리고 해석에 따라서 마지막 S까지)를 가상현실로 한방에 해결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연출을 보여준다.[37] 행복도가 떨어졌을 때 각종 반란과 생산성 감소가 일어난다.
혹은 마이카 시대가 신군부때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에 착안하여 Speed를 넣어 4S라 하기도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등장하는 두 원로원 의원들의 대화는 3S 정책의 본질을 보여준다
GAIUS: Games! 150 days of games!
무려 150일 동안의 경기라니!
GRACCHUS: He's cleverer than I thought.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황제가 똑똑하군.
GAIUS: Clever? The whole of Rome would be laughing at him if they weren't in fear of his Praetorian.
똑똑하다고? 근위병이 두렵지만 않다면 모든 로마인들이 황제를 비웃을 것이네.
GRACCHUS: Fear and wonder. A powerful combination.
두려움과 호기심. 강력한 결합이야.
GAIUS: Will the people really be seduced by that?
사람들이 정말로 저런 것에 넘어갈까?
GRACCHUS: I think he knows what Rome is. Rome is the mob.
He will conjure magic for them and they will be distracted.
He will take away their freedom, and still they will roar.
The beating heart of Rome is not the marble of the Senate, it is the sand of the Colosseum.
He will give them death, and they will love him for it.
나는 황제가 로마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로마는 오합지졸의 군중이야.
황제는 군중에게 마법을 부릴 것이고, 그들은 현혹될 것이네.
황제는 군중에게서 자유를 빼앗을 것이고, 여전히 그들은 즐겁게 외칠 것이네.
로마인들의 고동치는 심장은 원로원의 대리석이 아니야, 바로 콜로세움의 모래이네.
황제는 군중에게 죽음의 경기를 보여주고, 그들은 그것 때문에 황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네
그런데 이것은 리들리 스콧이 청년때는 통했던 얘기지만 현대의 연구로는, 고증을 따지면 완전히 틀린 서술이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부터가 고증따지면 안 되지만. ○○같지만 멋있는 대사의 사례 중 하나.
국내 프로 스포츠 중 3S 정책으로 생긴 리그만 연고지 몰빵 문제에서 자유롭다. 야구야 워낙 지역에 잘 녹아들었고, 축구도 전국에 잘 퍼져 있다. 농구는 수도권과 부울경 2점 집중이[38] , 남자 배구는 수도권 집중이[39] 매우 심하다.
6. 관련 문서[편집]
7. 관련 문헌[편집]
- 스포츠와 정치 - 고광헌 저. 푸른나무.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