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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그룹 해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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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전두환 참고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언론과 재계의 반응
5. 결과
6. 후일담
7. 대중매체에서
8.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1985년전두환 정부국제그룹을 해체시킨 사건.


2. 배경[편집]


전두환 정부1981년 12월에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 정리에 나섰다.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및 산업합리화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1985년 5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총 6차례 걸쳐 부실기업 정리가 단행되었는데 해운업을 필두로 조선, 합판, 섬유,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1988년까지 모두 78개의 기업이 합리화 대상으로 지정되거나 3자 인수방식으로 정리되었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 대해선 각종 특혜가 주어졌다. 이런 기업들은 대출원리금 상환을 유예받았고 이자 지급과 조세를 감면받았다. 뿐만 아니라 종잣돈으로 불리는 '시드머니'를 비롯한 금융과 세제상의 특혜까지 주어졌는데 이를 통해 재미를 본 것은 대부분 재벌 그룹이었다. 이은숙 교수는 당시 30대 재벌에 인수된 기업이 부실기업 중 절반 이상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80년대에 정리된 부실기업의 부채는 모두 6조 8천억원이 넘었는데, 기존 대출원리금 상환유예액은 4조 2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조세감면액은 총 2조 1천억원에 달하였다. 시드머니는, 대출원금의 상환유예나 이자감면으로도 정리가 곤란한 업체에 대해 10년 거치 10년 분할상환의 특별장기저리 융자로서 총 4608억원이 대출되었고, 시드머니에 대한 특혜시비가 있자 은행대출금 자체를 대손처리하여 원금을 탕감시켜주는 편법을 썼는데, 그 규모도 9863억원이나 되었다. 이와 같은 부실기업 처리과정이 은행의 부실채권과 대손처리로 인한 은행부실 가능성으로 부각되자 한은금융을 통하여 지원하였는데, 그 규모는 1조 7200억원에 달하였다.

- 원 출처: <1980년대 혁명의 시대(이혜영 편)> - '1980년대 한국경제의 구조(이은숙 글)' 파트 p198. 새로운세상. 1999.



3. 전개[편집]


첫째는 내가 미워서고, 둘째는 내 것 뺏어다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나눠주려고 그랬겠지요.

- 양정모 회장의 말. 원 출처: 월간 말 1993년 10월호 <심층추적: 전두환과 국제 인수 3사의 검은 뒷거래>. p46.

1983년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순직자 유자녀를 위한 장학재단으로 설립된 일해재단의 연간 운영비용으로 당시 돈 100억원(3년에 걸쳐 300억원)을 확보하기 위해 청와대에서는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에게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이 때 현대그룹삼성그룹이 15억을, 럭키금성그룹 등이 12억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는데 사실상 이들 다음으로 거대한 기업 규모를 가진[1] 국제그룹의 오너인 양 회장이 5억원짜리 어음으로 퉁치려고 하자 최순달[2] 일해재단 초대 이사장이 "미국 유학 간 아들은 외제차를 끌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나라를 위한 일에는 참 야박하십니다"라고 비아냥조의 면박을 줬다. #

1984년 10월 하순에 새마음심장재단 성금 및 새마을성금을 기부할 때도 달랑 3억으로 때우면서 이미 전두환의 눈총을 받은 상태였다. 양 회장이 월간 말 1993년 10월호에서 한 증언에 따르면 이때 만찬 자리에서 그는 전두환 내외 앞에 갑자기 10대 재벌에 속하지 않은 그룹총수 부부가 앉아 있어 의아해했다. 이후 전두환이 총 30억원[3]의 성금을 낸 동국제강그룹 장상태 회장(1927~2000)에게 "장 회장은 회사도 조그마한데 성금을 30억원이나 내셨습니다. 참 훌륭한 기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같이 참석한 재벌총수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뿐더러 분위기도 무거웠다. 그 증거로 10월 8일자 청와대 성금접수일지에는 '동국제강 새마음심장재단 20억원, 새마을성금 10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반면 국제그룹은 그때까지 3억원밖에 내지 않아 청와대 성금납부실적 30위에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제그룹이 새마을 성금으로 10억원을 냈었다는 반론이 있다. #)

이에 후계자로 내정된 사위인 김덕영 부회장은 이 때 꺼림칙했던 것도 있고 회사의 규모에 비해 5억은 눈치가 보인다며 10억원 정도로 맞추는 게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기도 했지만 결국 양 회장이 11월경에 청와대 비서실의 전화를 받고서야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눈치보이는 모금액을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제공한 것이 화근이 되어 전두환의 미움을 사면서[4] 마침내 회사 공중분해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또 당해 초에 그가 일해재단 모금차 방문한 최순달에게 모금액수가 많다고 불평하거나 그해 여름에 준공된 양산 통도사 골프장과 관련된 새마을성금을 10억 연수표로 내서 이미 권력층에게도 눈총을 받았다.

이후 12월 22일 전두환은 청와대로 재벌 총수들을 소집해서 만찬을 열었데 이 자리에 양 회장이 지각해 버렸다. 이날 만찬은 다음해 2월 12일에 있을 총선에 대비해 재계의 협조를 구하려는 차원에서 연 것이었는데 양 회장은 부산에서 스케줄에 맞춰 서울행 항공편에 탑승했는데 때마침 내린 폭설로 항공기가 연착하면서 늦었다고 한다.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양 회장에게 전두환이 했던 말이 가관인데 "우리 국제 양 회장님은 어디 외국이라도 갔다오셨나요?"라며 비아냥댔다고 한다. 이후 전두환은 "내년 총선에서 민정당이 이기려면 뭘 했으면 좋을지 고견을 내주십시오"라고 회장들에게 의견을 묻자 양 회장은 "부산지역 경기가 낙후해 민정당 지지 기반이 취약하니 임해공단을 건설해달라"는 말을 불쑥 꺼냈다. 결국 그의 눈치 없는 말 한 마디가 국제그룹에 화가 될 줄은 몰랐고 5일 만에 제일은행이 어음 78매 432억원을 부도 처리시킴으로써 국제그룹은 1차 부도사태를 맞았다.

국제그룹 출신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 회장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미국 유학 중이던 막내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양 회장이 즉시 미국으로 갔는데 하필이면 이 때 전두환이 재벌들을 소집했다는 것.[5]

청와대 측은 제5공화국 후반의 권력 장악을 위해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압승이 절실했다. 특히 야권의 핵심 인물인 김영삼의 텃밭 부산 지역이 선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수였는데 부산시민들로부터 표를 얻고자 했던 전두환은 2월 4일 국제그룹의 기반인 부산으로 직접 내려갔다. 표면적 이유는 부산직할시청 연두 순시였으나 민주정의당 후보들에 대한 측면 지원 성격이 짙었다. 특히 선거를 일주일 앞둔 2월 5일에는 부산지역 인사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양정모에게 선거를 위해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인 2월 6일 양정모 회장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49재를 위해 부산을 떴는데 이 일로 전두환은 "대통령인 내가 부산에 있는데 멋대로 여길 뜨다니!"라며 또 한 번 분노했다.

이렇게 전두환에게 찍힐 대로 찍힌 상황에서 2월 총선 직전 김대중이 갑자기 미국에서 귀국하자 막판 선거 판세가 신한민주당 쪽에 유리해졌고 결국 청와대 측의 우려대로 총선에서 민정당은 간신히 과반을 넘겼는데[6] 그쳤다. 특히 지역구 184석 중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몫은 87석 뿐이었고 나머지 97석은 신한민주당,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 야권의 몫이었다. 특히 부산에서는 모든 선거구에서 신한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중선거구제였음에도 3개 선거구에서 민주정의당 후보가 3위 이하로 낙선하며 선거의 판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것이 전두환의 심기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어 버렸다. 시기를 볼 때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잠시의 지체도 없이 국제그룹을 해체해 버리기로 결정한 듯하다. 국제그룹복원본부 측의 의견은 아래와 같다.

84년 당시 전두환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양김씨의 민추협이 바람을 타고 있는 이 같은 상황에서 2.12 총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불황 때문에 10대 재벌에서는 수금이 잘 안됐다. 이때 재벌순위가 저 아래인 재벌 중에서 회사규모에 걸맞지 않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권력에 밀착한 재벌들이 있었다. 총선 때 이들에게 비자금을 받아 쓴 전두환은 이들에게 나눠줄 먹이가 필요했다. 그때 걸려든 것이 국제그룹이었다.

- 원 출처: 월간 말 1993년 10월호 <심층추적: 전두환과 국제 인수 3사의 검은 뒷거래>. p48.


국제그룹의 부도는 자금난에 빠진 이 그룹에 대해 제2금융권에서 2,000억원이 넘는 여신을 회수한 게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이미 그룹 해체 결정 2개월 전인 1984년 12월 23일에 정부가 국제그룹에 대한 완매채 대환 지원방침을 철회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가 있어 정부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이 잘 알려진 상황이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예고된 위기였다. 실제로 국제그룹은 1980년대 초반에 무리한 확장과 당해 초 계열사인 연합철강 창업주인 권철현과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소송비를 쓰는 바람에 유동성이 굉장히 부족해져서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으로부터 여러 차례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고 부채비중이 900%를 넘어 당시 재벌로는 부채비중이 높은 편이었다.[7] 부채비중이 조금 높은 것을 빼면 몇몇 부실 계열사 매각으로 충분히 회생이 가능했고 당시 은행감독원과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두환에게 찍혀 버리는 바람에 결국 1985년 2월 21일 오전 10시에 재무부에 의해 부실기업이라는 오명을 쓰고 그룹의 전면 해체 결정이 발표되었고[8] 그 해 7월부터 21개 계열사들이 모두 청산된 후 다른 기업들로 합병되며 정리되었다. 2월 총선 결과가 나오고 나서부터 청와대 측에서 국제그룹에 은행 채권단을 보내는 등의 직접적인 액션을 취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2일, 그리고 국제그룹 완전 해체 발표까지 고작 1주가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때 제일은행장 이필선은 오전 10시 30분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재무부가 쓴 <국제그룹 정상화대책>이란 제하의 유인물을 마치 제일은행에서 작성한 것인 양 열심히 낭독했다.

훗날 국제그룹 해체 이유에 대해 김만제 당시 재무부 장관은 한국일보 <재벌이력서> 연재 당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업 운이 따르지 않은 결과다. 벌여놓은 일들이 수습되지 않았고 부실 구멍은 자꾸 커져갔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한푼 두푼 넣어서 될 상황도 아니었다. 또 그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을 그만큼 늘려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해체당하게 된 것이 국제다.

- 원 출처: <재벌이력서(이종재 저)>. 한국일보사. 1993.



4. 언론과 재계의 반응[편집]


국제그룹의 해체 당시 언론은 그러한 사건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아니, 보일 수밖에 없었다. 1991년 7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국제그룹 해체 기사를 1면에 크게 싣지 말고 작게 보도하며 재벌의 부도덕한 경영 및 족벌경영을 부각시키라는 보도지침 때문이었다. 문공부 홍보조정실과 청와대에 축소 보도를 요청한 김만제 재무부 장관은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작게 다루어 달라고 각 언론기관에 따로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생각하면 애초부터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짓이다. 비록 국제그룹이라는 기업집단이 해체되었지만 그 계열사들은 타 재벌집단에 피인수되어 멀쩡히 존속한 상태였으나 외국 언론과 기업들은 이러한 '선 인수방식 전면해체'란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사실상의 파산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 경제적 정책을 추진한 전두환 정부가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반면 재계의 경우 재무부 측에서 각 경제단체에 일제의 논평을 삼가라는 엄포로 인해 양정모 총수가 회장으로 일하던 부산상공회의소도, 많은 회비를 받아가던 전국경제인연합회 역시 어떠한 의견도 피력하지 못했다. 재계의 첫 공개적 논평은 국제그룹 해체 이후 3년도 더 지난 1988년 5월 11일에 한국능률협회 주최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처음으로 아래와 같이 정면 비판한 것이었다.

부실기업정리란 있을 수 있는 정책이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와 합리적인 판단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5공화국의 부실기업정리는 완전한 실패작이다. 국제그룹의 경우처럼 기업인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일군 기업군을 일거에 분해시켜버린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국제그룹 20여 개의 업종 가운데 창업자에 의해 살릴 것이 없었다는 판단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정도 규모의 기업군을 부실기업으로 판정하려면 보다 객관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고 최소 1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경제정책가들은 그런 일을 다시는 해서는 안될 것이고 경제계도 다시 그렇게 당해서는 안된다.



5. 결과[편집]


1986년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자금난에 빠진 국제그룹을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른바 국제그룹 정상화 대책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뿌린 뒤 계열사 지분 처분까지 모두 위임받아 정해진 순서대로 계열사들을 순식간에 처분해 버렸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국제상사[9], 용산 그룹사옥, 남주개발(제주 하얏트[10]), 신남개발(해운대 하얏트), 원효개발(통도컨트리클럽) → 한일그룹
  • 국제상사 건설부문, 동서증권극동그룹
  • 연합철강, 국제통운, 국제종합기계 → 동국제강
  • 국제방직 → (주)동방
  • 국제제지 → 봉명그룹
  • 조광무역 → 서우산업[11]
  • 동우산업 → 대양물산
  • 성창섬유 → 화승[12]
  • 국제기술개발 및 원풍산업[13]우성그룹

특히 전두환에게 잘 보였던 한일그룹이 이 과정에서 상당한 특혜를 받으면서 재계 순위가 1984년 기준 26위에서 1986년에 1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한일그룹도 무리한 확장의 결과[14] 부채비율이 1,039%까지 치솟으면서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5월 해체되었다. 또 당시 주 거래 은행인 제일은행도 이 시절에 부도났던 기업들에게 마구 대출한 여파로 타격을 입어 영국 스탠다드 차타드에 매각된 끝에 SC제일은행이 되었다.

연간 순이익 50~60억을 내던 연합철강은 자산 규모나 매출이 인수자인 동국제강보다도 컸기에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초 김만제 재무부 장관은 연합철강과 국제통운(구 연합통운)을 2대 주주인 권철현 창업주에게 넘기고자 그에게 인수자금을 마련하라고 통보까지 했으나 전두환의 재가 과정에서 하루 만에 또 동국제강으로 넘어갔다. 이에 권철현은 동국제강을 상대로 10여 차례나 소송을 제기했지만 돌려받지 못한 채 2003년 눈을 감았다. 연합철강 분쟁은 권철현의 아들 권호성 중후산업 대표가 연합철강 지분을 모두 동국제강에 매도하면서 마무리되었으며 연합철강은 유니온스틸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14년 동국제강으로 합병되어 산하 냉연부문이 되었고, 2023년 동국씨엠으로 재분사했다.

6. 후일담[편집]


결국 정치권력에 의해 거대 재벌 하나가 공중 분해된 결과가 됐고 그렇게 된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당시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전두환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그 사이 재무부 장관이나 제일은행 간부들이 전부 바뀐 탓에 1989년 부실기업정리 관련 청문회에서 출석한 사람들 중 해체 당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대신 증인 중 전두환 시절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인 사공일이 가장 주목을 받아 그가 핵심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으나 그는 정치적인 음모는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국제그룹과 대한선주 등 전두환 정부 시절 부실기업 정리 내용만을 시인하였다. 여기서 상당한 특혜성 금융지원 및 은행부실을 보전하기 위한 한은금융 등의 조건이 밝혀졌지만 정치자금 수수 등을 둘러싼 알맹이만 빠져 국민들은 궁금증에 빠졌다.

또 같은 해 말 국회 청문회 증언에서 전두환은 재무부장관의 국제그룹 해체안을 보고 받고 재가한 사실은 있으나, 부실기업 정리라는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며 항간의 소문에 대해 부정하였다. 또 국제그룹 해체에 관여한 이필선 제일은행장과 김만제 재무부 장관도 한국일보에 연재된 <재벌이력서>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그 당시 국제를 부도내 도산시키는 쪽으로 해결했더라면 양 회장은 아마 감옥에 갔을 것이다. 은행의 공신력을 감안해 밝히길 꺼렸지만 사실 국제그룹이 해체되기 전 4개월동안 지원했던 구제금융만도 2천억원이 넘었다. 그룹의 경영이 방만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경기 전망도 어두웠고 국제에 무한정 돈 대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매일매일 돌아오는 어음이 수백억원 씩이었다. 양씨는 '설마 재벌을 망하게 하랴'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정치적 입김 얘기는 말도 안된다.

- 이필선 전 제일은행장의 말. 원 출처: <재벌이력서(이종재 저.)>. 한국일보사. 1993. p314.


그룹을 부실하게 해놓고 경영을 잘해서 이를 풀려고 하기보다 청와대와 고위층 주위를 들쑤셔 해결하려 했다. 주거래은행이나 재무부에 한마디 안 한 것은 물론이다. 은행이나 당국을 우습게 봤거나 사태 자체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경영은 부실한데 족벌경영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해결책으로 군 출신 인사를 동원할 생각도 했다. 결국에는 국제상사 사장도 지낸 손상모 씨에게 국제의 수습을 부탁했다. 그는 당시 미국 하버드 유학까지 마친 사람이었다. 부탁을 받은 손씨는 양 회장에게 가서 정부가 내놓은 수습방안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 회장은 "영감이나 사위를 모두 아는데 나로써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손씨를 통해 전달한 수습방안이 국제 해체의 시그널이 되었다.

- 김만제 전 재무부장관의 말. 원 출처: <재벌이력서(이종재 저.)>. 한국일보사. 1993. p313.

당시 국제그룹의 수많은 인재들도 인수합병에 따른 강제이직을 거부하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특히 부산의 다른 신발 회사들이 적극적으로 스카웃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양 회장의 사위 김덕영은 국제그룹 시절 인사들을 모아 1986년 두양상사를 세워 1990년대에 두양그룹으로 거듭났으나 1997년 김현철 스캔들 사건에 휘말려 몰락하는 흑역사를 맞았다.

국제그룹이 해체되는 날 "양정모 회장은 이게 다 자신 탓이다. 운명을 받아들이자"고 했다고 한다. 양 회장은 그룹 해체 사실을 발표 30분 전에야 통고받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양 회장의 부인은 녹내장으로 눈이 멀어 가고 있었는데 미국의 병원에 수술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수술 시기를 놓치면 영영 앞을 못 볼 상황임에도 전두환 정권은 출국을 시켜 주지 않았으며 양 회장의 사위들, 국제그룹 소속 전문경영인들 역시 출국금지로 묶였다. 또 임직원들이 연대보증을 선 것도 해제해 주지 않아 그들의 집이 넘어갈 판이었다.

이에 양 회장은 완강히 버티다가 마침내 이런 문제들을 포함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합의 각서 아래 각종 경영권 양도 문서, 주식매매 계약서 등지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양 회장의 장남 양희원 ICC 대표는 "그들은 부친을 도장 찍는 기계처럼 여겼다."고 표현했다. 순식간에 알거지가 된 양 회장 일가는 친구와 친지들의 남모르는 도움으로 연명해야만 했다.

어디 하소연할 데 없어 2년 6개월 간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산 양 회장은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빛을 보면서 9월에 '국제그룹 복권 추진위원회'를 세워 그룹 복원운동에 나섰다. 1988년 4월에 양 회장은 서울민사지방법원(현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부)에 국제그룹 해체는 정치적 동기에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주식반환 청구소송을 진행했는데 경향신문 1991년 7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이를 진행한 이유가 나온다.

이후 8년 동안 양복 한 벌 해 입지 않고 2,300원 짜리 도시락으로 버티며 끈질기게 법정 투쟁을 한 양 회장은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가 국제그룹 해체를 '위헌'으로 판정하자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에 1994년 양 회장은 한일그룹으로부터 국제상사를 되찾기 위해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진행했으나 1996년 대법원에서 “정부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해 개인 간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수는 없다”는 논리로 인해 패소 판정을 받았다. 이후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며 국제상사 등 당시 강탈당한 그룹 계열사들이 또 다른 기업으로 서서히 넘어가거나 해체되면서[15] 다시 소유권을 반환하지 못했다. 결국 국제그룹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허상으로 남게 되었고 양 회장도 결국 실의에 빠진 채 부산에서 칩거하다가 200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정치 권력이 돈에 환장하면 기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비운의 사례이며 이후 재벌들이 신군부세력의 기선제압에 몸사리기로 일관하며 정치자금을 성실히 바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런 식으로 돈을 뜯긴 재벌들은 이를 보상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로부터 이들의 몫을 걸레 짜내듯 쥐어짜내야 했으며 이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파업으로 저항하면 자금을 받은 정권이 나서서 마구잡이로 짓밟아 해결해 주는 판국이 벌어졌다. 실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88년 5공 청산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서 '국제그룹 해체를 보고서 정치자금 상납 액수를 두배로 올렸다'고 증언했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도 정치자금 납부는 여전하여 문민정부 시기인 1995년에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에 연루된 40여개 기업 총수들이 검찰에 불려가는 결과를 맞았으며[16]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출범했음에도 국제그룹의 후폭풍인 기업들의 납죽 엎드림은 꽤나 계속되었고 현대그룹 자금지원 중단 등 정부의 '기업 길들이기'도 여전했다.

문민정부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민주주의 정권이라고 자부할 정도는 되었지만 여전히 정치문화는 행정부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했고 3당 합당으로 인해 5공의 인력풀의 일부가 문민정부로 계승되었기에 기업들은 국제그룹의 멸망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청와대에서 김영삼이 기업 총수들에게 "칼국수[17] 좀 먹읍시다"라고 말만 꺼내면 총수들은 다른 일은 다 팽개치고 달려갔다. 이것이 세간에서 불리는 '칼국수 오찬' 혹은 '칼국수 회동'이다.

2002년 대선 시즌 도중 "차떼기 사건"이 벌어진 후 2004년부터 정부는 기업이 정당에 기부하지 못하도록 정치자금법을 개정했다. 따라서 기업은 더 이상 적어도 법적으로는 정치자금을 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치자금 헌납이 드러났고 박근혜 정부 내내 CJ그룹이나 한진해운 같은 사례처럼 '기업 길들이기' 사례도 있었다.

김호진 고려대학교 교수는 저서 <한국정치체제론>에서 자본가계급이 전두환 정권의 강압정치에서 순응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재벌이 전두환 정권과 지배연합을 형성해 정경유착 관계를 형성했다고 해석했다.[18]

국제그룹이 해체됨에 따라 부울경 대표 향토기업 지위는 롯데가 가져갔다. 회장 신격호의 고향이 울산광역시이고 부산광역시 연고 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운영하는 등 여러 행보로 그렇게 이미지가 잡히긴 했는데 하필 이 롯데그룹이 실질적인 기여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막장드라마가 따로 없는 경영권 분쟁어느 나라 기업인지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추태가 드러나면서 "국제그룹이 롯데그룹을 대신해서 부산을 대표해야 했다"는 의견과 함께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 제 33~34회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 바 있다. 양정모 회장 역은 배우 한인수가 담당했다. 국제그룹이 해체되자 양정모 회장이 고무신을 꺼내 신은 채 통곡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양정모 회장이 처음 시작한 사업이 고무신 생산이었다.[19]

  • 2010년 SBS 창사 20주년 대하드라마 자이언트 52~54회에서도 부실기업을 재계에서 퇴출시키고 다른 회사에 인수, 합병시키는 일명 '퇴출기업 리스트'에 국제그룹이 대표적 예시로 나온다. 역사대로 대통령 눈 밖에 난 것이 원인이다.[20] 그 뒤 부실기업 정리 장면에 몇 번씩 이름이 적혀 있다. 드라마에는 나오진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아마 부실기업으로 정리됐을 것이다.[21]


8. 참고 자료[편집]


- 경향신문 - <정경산맥: 한국경제 고속성장 20년의 명암> '국제그룹의 비극' (1991.6.29 ~ 8.24일자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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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당시 대한민국의 재계 서열은 현대-삼성-대우-럭키금성-국제-쌍용 정도로 나열됐는데 21세기 들어서 5대 재벌 일원으로 일컬어지는 SK그룹롯데그룹은 현재보다 위상이 낮았다. SK의 전신인 선경은 10위권에 겨우 들던 기업이었고 롯데는 1980년대 후반이 돼서야 10위권 문턱에 이름을 올렸다.[2] 전두환과 대구공고 동기이며 유명한 과학자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발사를 주도한 인물.[3] 새마음심장재단에 20억, 새마을성금 10억원을 각각 냈다.[4] 이쯤되면 양정모가 대놓고 전두환에게 뻐큐를 날린 거나 다름없는데 보통 어음은 갑을관계에서 을이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이다.[5] 이마저도 출국금지로 묶여서 못 갈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머나먼 타지에서 사경을 헤메는데 아버지를 못 가게 막는 건 그 악랄한 신군부조차도 너무 인륜에 어긋난다 싶었는지 출국을 허가해 줬지만 아들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6] 이 당시 전두환이 격분한 나머지 노신영 안기부장을 향해 "전국구라도 있으니 그 정도라도 이긴 것 아니오! 안기부는 선거 분석이 왜 그 모양이야?"라고 다그쳤다는 일화가 유명하다.[7] 당시 평균이 500%대라고 한다. 참고로 부실공기업이라며 온갖 비난을 다 받는 한국토지주택공사의 2011년 상반기 기준 부채비율이 550% 정도다. 하지만 1980년대는 엄청난 호황기로 경제가 수직성장하던 시절이었으며 부채비율이 높다고 내일모레 부도날 상황은 아니었다.[8] 주거래 은행이자 채권단 대표 은행인 제일은행조차도 해체 결정 발표 전날에 통보를 받았을 정도로 국제그룹 해체 결정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9] 프로스펙스, 아티스로 유명하다.[10] 당시에는 '하이야트'라고 표기했다.[11] 대우그룹 창업멤버였던 박세영이 운영한 무역회사.[12] 프로스펙스의 경쟁 브랜드인 르까프로 유명하며 국제그룹처럼 부산에서 고무신 생산으로 출발하였다.[13]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유신독재 시기 대표 민주노조로 언급된 원풍모방 노조가 바로 본사 모방공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것이다.[14] 여담으로 상술한 것처럼 일부 계열사를 인수했던 우성그룹의 몇몇 계열사를 인수하였다.[15] 대표적으로 프로스펙스로 유명한 국제상사가 2007년 범LG가LS그룹으로 넘어가 LS네트웍스가 되었으며 2008년에는 아티스가 분사되었다.[16] 드라마 제5공화국 33회 초반에 보면 노태우의 부정축재 공판에 관한 이야기가 2분 가량 나온다.[17] 김영삼은 정기 모임, 국빈 대접, 특별 회동 자리에서 칼국수를 즐겨먹곤 했는데 실제로 칼국수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소탈한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도 이용했다.[18] <한국정치체제론>. 김호진 저. 박영사. 1997. p311.[19] 당시 상표는 '왕자표'였다.[20] 퇴출기업 선정에 관여한 조필연의 입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21] 최종 선정된 게 21개 기업인데, 국제그룹은 이 21개에 들어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