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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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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병도(1966) 문서
1. 개요[편집]
''우리의 최고 정신은 개인이 국가나 민족을 떠나 존재의 의의가 없고 항상 국가와 민족의 통일 발전 가운데 살고 그것에 봉사하는 일원인 것을 자각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영원한 이상에 순하는 정신이다.''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경기도 광주군 춘궁리(현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성산성)고,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사성(蛇城)이다.''
대한민국 역사학자. 대한민국 실증사학의 시조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한국사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기도 하다. 본관은 우봉(牛峰), 호는 두계(斗溪).
2. 생애[편집]
1896년 9월 20일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노루실(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노루실마을)에서 아버지 이봉구(李鳳九, 1847. 10. 15 ~ 1907. 10. 22)와 어머니 나주 김씨(1864. 4. 23 ~ 1926. 12. 30) 김진환(金璡煥)의 딸 사이의 5남 3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와 보광학교, 중동학교,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사학 및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처음에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으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4] ,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영향으로 동양사, 특히 한국사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 그를 지도한 교수는 일본 실증사학의 대부 쓰다 소키치였는데, 문헌 비판과 언어학적 고증을 중시하는 쓰다 소키치의 태도는 이병도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이외에 도쿄대학에 있었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게도 자주 가르침을 청하러 간 것은 유명한 일인데 이병도 본인은 이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두 학자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의 졸업 논문은 고구려의 對 수, 당 전쟁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으며 학위를 마친 뒤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 중 하나였던 《조선사》 편찬에 참가하여 수사관보로 재직했는데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 한자 독음으로 금서룡)와의 불화로 사임하고 보수가 없는 촉탁으로서 조선사 편찬 사업 종료까지 일하였다. 이후 이병도가 한국 고대사학계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가하면서 각종 사료에 손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나혜석, 김억 등과 함께 <폐허>를 냈고 1922년 횡보 염상섭, 오상순 등과 함께 '문인회'를 결성했으며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 이직했다. 1934년 '진단학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기관지 <진단학보> 편집 및 발행인,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2년 진단학회 해산 이후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이직해 강사로 출강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그의 학술적 업적은 고대사와 유교 사상사에 집중되었는데 일반에 알려진 연구 업적은 주로 고대사에 대한 것이다. 광복 후 그의 나이는 50세로 조선학술원 역사철학부장을 거쳐 12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선사 교수로 임용되었고 서울대학교로 개편될 때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창립 멤버로 교편을 잡으면서 1961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여러 후학들을 양성했고(대표적으로 김철준 교수) 1952년 문학박사 학위를 땄다.[5] 교수 재직 동안 1945년~1951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195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장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부원장, 196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각각 역임 후 1962년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는데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초빙된 적도 있었다.
해방 후 친일 논란으로 그의 활동은 어느 정도 위축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 후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사학자들이 월북 및 납북되고 대신 실증 사학이 주류 사학으로 다시 격상하여 그의 활동 영역이 폭넓게 전개되었다. 전쟁 당시부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을 4년간 지내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으로 부임 후 1955년 진단학회 이사장으로서 학회에 복귀해 사학계 원로로 지위를 굳혔고 1960년 4.19 혁명 후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면서[6] 문교부 장관을 4달간 맡았다. 그는 임기 초부터 학원의 정치 도구화 및 경찰의 학원 감시를 배격한다고 했고 '학원 정상화, 사도 확립, 교육 중립성 확보' 등 3대 원칙을 내걸고 5월 10일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당시 성행하던 학원 민주화 운동에 부정적 입장을 표했고 싹터오르던 '교원노조 운동'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해체 요구를 하면서 재야 측으로부터 비판받는 면도 있다.
1960년 장면 내각 수립 후 학술원 회장을 21년간 맡으며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국민대학 학장, 고려대학교 교우회장(1957~1966) 등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 수립 후 1965~1978년까지 학교법인 동구학원[7] 이사장, 1966년 5.16 민족상 심사위원회 고문이사, 1970년 국토통일원 고문 및 민족문화추진회 이사(1982년부터 이사장), 1975~1989년까지 학교법인 송산학원[8] 이사장 등을 각각 거쳤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부터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8년간 재직했다.
말년에 진단학회 운영을 빼고는 특별한 일 없이 권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와 <환단고기> 역자 임승국 같은 소위 재야사학자들이 자기네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로 그의 존재를 들어 '식민사학의 괴수'로서 대중 일부에게 낙인찍히고 말았다. 심지어 이병도를 사칭해서 회개하고 단군을 인정했다는 식의 책이 나오기까지 했는데 물론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 애초에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단군신화의 실체와 의의를 부정한 적이 없다. '이병도 회개설'의 출전은 최태영 박사의 <인간 단군을 찾아서>라는 회고록인데 신빙성은 적다.[9] 그리고 아래 설명되어 있듯이 이병도는 단군 신화의 내용 일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반응이나 추상화된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으나 단군의 실존을 부정한 적이 없다. 이병도가 1923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사개강>, 1948년 출판한 <조선사대관> 등의 저작에서 알 수 있듯이 이병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의 실존을 긍정하고 있다. 비슷한 주장으로 죽기 전 이병도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존의 주장을 뒤엎고 단군이 실존한다며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미 그는 1986년 10월 9일 개천절을 기념해 조선일보에 특별기고문을 올린 바 있는데 내용을 보면 이전에 이병도 본인이 했던 주장들을 다시 꺼내는 수준이다.
죽기 직전까지도 진단학회, 송산학원 운영에 힘쓰며 꾸준히 글을 쓰고 연구를 하던 중에 1989년 9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죽기 불과 4달 전에는 '올해의 고대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3. 기타[편집]
- 굉장히 장수하는 집안이다. 이병도 박사는 5남 5녀의 자식이 있는데 1991년 53세의 나이로 별세한 4녀 이영희(李永姬, 1937. 4. 5 ~ 1991)와 2002년 88세로 별세한 장남 이기녕(李基寧, 1913. 7. 26 ~ 2002. 1. 29) 박사, 2016년 99세로 별세한 차남 이춘녕(李春寧, 1917. 3. 27 ~ 2016. 7. 31)[10] 박사, 2019년 95세로 별세한 3남 이태녕(李泰寧. 1924. 2. 8 ~ 2019. 3. 6) 박사, 장녀 이순경 여사를 제외하고 모두 생존해 있다. 이춘녕 박사는 농학계의 권위자이며 이장무[11] 전 서울대학교 총장, 고고학자 이건무(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전 문화재청장, 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의 부친이다. 한국추상화가 장욱진[12] 화백의 부인인 장녀 이순경(李舜卿, 1920. 9. 3 ~ 2022. 8. 18) 여사는 1920년 9월 3일생으로 2022년 101세로 별세하였다. 나머지 자녀들도 80~90대로 모두 생존해 있다. 4남 이동녕(李東寧, 1927. 7. 22 ~ ) 박사는 1927년 7월 22일생으로 94세, 차녀 이운경(李雲卿, 1931. 9. 9 ~ ) 원장은 1931년 9월 9일생으로 90세, 5남 이본녕(李本寧, 1936. 1. 14 ~ ) 박사는 1936년 1월 14일생으로 86세다.
- 가족 관계를 살펴보면 친일파인 해평 윤씨 윤치영 집안과 3중 사돈을 맺고 있다. 정확하게 이병도의 맏형 이병묵(李丙默, 1876. 6. 19 ~ 1950. 2. 12)[13] 의 셋째 아들(이병도의 조카) 이재녕(李宰寧, 1918. 5. 4 ~ ?)[14] 이 윤치영의 둘째 형 윤치소(尹致昭)의 딸 (윤치영의 조카이자 윤보선의 동생) 윤계경(尹桂卿, 1918. 2. 13 ~ ?)과 결혼하여 이중 사돈, 윤치소의 누나 윤노덕(尹老德, 1890. 6. 14 ~ ?)이 이병도의 6촌 재종형(再從兄) 이병림(李丙琳, 1890. 6. 18 ~ ?)과 결혼하여 삼중 사돈이다. 그밖에도 이병도의 장인은 일본군 중장을 지낸 조성근이다.
- 이러한 개인가족사 외에도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것 때문에 치암 신석호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친일인명사전 2권 876~877P). 사전에 등재된 그의 활동 내역은 1925년 8월에서 1927년 5월까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일했으며 이후 1938년 6월까지 촉탁을 맡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청구학회 활동 경력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병도의 제자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이병도 등의 진단학회 창설 경위가 청구학회에 편승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학회에 소속되어 있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증언에 의하면 "다만 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의 1명인 이병도 씨가 청구학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이씨는 우리들이 가기 전부터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로 있었고, 후에는 촉탁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15] 라고 하여 이 부분은 함부로 속단하기 어렵고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 외에 역사 왜곡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소속 기간이 장기간에 달한다는 점에서 친일 의혹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역대 수뇌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인 <조선사> 편찬 작업에 '수사관보'와 '촉탁'의 신분을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참여한 조선인 중 1명이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역대 수사관보는 총 10명으로 그 중에서 조선인은 이병도, 신석호, 이종명 등 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특히 조선사편수회는 스스로를 조선총독부 산하에 직속으로 설치된 "하나의 새로운 독립 관청"이라고 규정했던 점이 있는만큼 실제로 이병도의 이름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올라있다.
-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에 따르면 이병도는 교사 생활 중 이케우치 히로시의 권유로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근무한 것이었고 무급으로 근무한 것과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 등으로 인해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고도 하고 있다. 그 밖에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도 일본에서 황국사관을 신봉하고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대학(天理大學)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증거가 증언 밖에 없는데다 증언이 정말 사실인지도 불확실하다.
- 흔히 웹상에서 볼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소문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지 않은 사실과 혼동된 결과로 추측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이병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어 있다.
-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기사에 보면 1979년 이완용의 묘를 이장할 때 나온 부장품 중 하나로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중인 관뚜껑을 이병도가 개인 연구에 쓴다고 가져가서는 불태워 버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당시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8선에 빛나는 그가 지위를 남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병도를 변명하는 입장의 이야기로는 관뚜껑을 없앤게 어차피 조리돌림당할 관을 자기 손으로 태워서 아예 없애는게 낫다고 판단했지 않나 말한다. 몇몇 이들은 이완용 때문에 평생 시달린 까닭에 이완용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어 사학자로서의 책임감을 버리고 개인 감정을 우선한 결과라고도 한다.
- 1984년 잡지 '학원'과 인터뷰에서 이병도는 이완용과 관계성을 부인하다 못해 이완용은 "익산 출신이다"라고 슬쩍 흘리는데 이 말 때문에 실제로는 경기도 성남시 지역 출신인 이완용이 졸지에 전라도 반역향의 화신 쯤으로 지역 감정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완용의 '익산 출신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병도의 1984년 학원지 대담 사실을 주구장창 들고 나와 논쟁이 컸었다. 이완용과 이병도는 성남 판교의 우봉 이씨 집성촌이 고향으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16] 이 이완용 생가에 대해 원주민 증언과 더불어 2001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1번지 또는 223번지[17] 로 생가터를 확정한 사실이 있다. 이후 2005년 성남시청에서는 이 생가터의 위치를 백현동 226-1번지[18] 로 바로잡았다. 물론 이완용과 이병도는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이병도가 특혜를 받은 것이 적어도 드러난 것은 없어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역사학자로서 온당한 것인가 의구심이 들게 한다.
- 사실 이병도가 이완용 후손이라고 쓰는 사람들도 제대로 안 알아보고 쓰는게 어떤 곳에서는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조카라고도 한다. 같은 편끼리도 말이 엇갈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사단법인 모 단체에서 전국 학교를 돌면서 환단고기를 참된 역사라고 하며 최태영을 두둔하고 이병도 박사를 '식민사학의 거두, 이완용의 조카'라는 되도 않는 강의를 하고 있다. 다만 "이병도의 부친인 이봉구가 이완용의 자택에서 집사로 일했으며 덕분에 이병도의 형인 이병희는 당대의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다"는 이운구 성균관대학교 전 교수(우봉 이씨)의 증언과 더불어 사학자로 적절치 못한 부분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병도의 부친 이봉구는 1907년에 죽은걸로 알려져 있어 집사를 언제 한건지는 사실 검증이 필요하다. 그가 회장을 8선이나 하고 원로위원까지 역임한 학술원에서도 이완용과 관계성을 두고 뒷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 전 서울대학교 총장은 이런 뒷말에 대해 이완용과 이병도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관련 블로그
- 위 이야기들에 덧붙이자면, 일단 이병도(李丙燾)와 이완용(李完用)은 각각 25세 병(丙) 항렬, 23세 용(用) 항렬을 쓰고 있어 항렬상으로는 족조(族祖)-족손(族孫) 간으로, 이완용의 조카라는 말은 절대 될 수 없다. 그리고 같은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이긴 하지만 공통 조상이 감찰공파 파조 이기(李圻)로, 이완용은 이기의 장남 이승녕(李承寧)의 13대손이고 이병도는 이기의 차남 이승건(李承健, 1452. 1. 25 ~ 1502. 12. 6)의 15대손이다. 촌수로는 30촌 지간이니 사실상 남이다. 게다가, 이완용은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 후손이었기에 생가 기준으로 하면 이병도와 이완용은 36촌 지간으로 더욱 멀어지게 된다.
- 1956년 김창룡이 암살당하자 그의 묘가 관악산에 있던 시절 묘비명을 이병도가 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개였다가 건국 이후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개가 되어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의 온갖 전횡을 일삼은 김창룡을 비판하는 내용이 묘비명에 하나도 없고 호국의 영웅으로 찬양하고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슲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1951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1952년) 대통령 암살 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1954년) 남도부 등의 대남 유격대 사건 88년(1955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1920년) 11월 23일. 향년은 37세.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입.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 언론인 김삼웅의 칼럼에 의하면 이병도는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관지 <최고회의보> 창간호에 "조국의 위기를 구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봉기했다"며 쿠데타를 미화하는 칼럼을 기고한 바 있었다.
- 그가 회장으로 몸담았던 진단학회에서는 1980년부터 매년 그의 호를 딴 '두계학술상'을 시상한다.
-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잘못된 속설(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처벌해서 옥사하고 대동여지도 목판을 불태웠다는 속설)을 처음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 한국 사학계의 서울대학교 카르텔을 형성하고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사회주의 사학에서는 이들 주류 사학자를 '서울대 학파'라고 지칭한다. 학자들 본인은 '강단 사학'이나 '서울대 학파'라고 자칭하지는 않는다.
-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인 김명순과 인연이 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 잡지 '폐허'의 동인이기도 했고, 이병도의 아내인 조남숙과 김명순은 진명여학교 동문이었다. 이 인연으로 인해 김명순은 한동안 이병도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책을 교열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병도 본인도 훗날 김명순과의 인연에 대해 회고하기도 했다.
4. 평가[편집]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 한국 기성 사학의 대부이자 거두 - 덕분에 더욱 비난받은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병도 이후 사학계가 이병도의 학설을 종교 교리처럼 떠받든 일은 전혀 없다. 이미 이병도 생전에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병도 자신이 "요즘에는 이기백 등 내 제자들이 내 학설을 잘 따르려 들지 않아"라고 섭섭해한 적도 있다.
학술적으로도 상당히 비판받은 부분이 많은데 특히 그가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 주장해 온 '진한=한강 유역설'은 무리한 점이 많아 살아 생전에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대사 연구에서 지나치게 음상사(音相似)에 의존한 연구 결과들도 비판받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초기 백제의 도성(하남위례성)을 둘러싼 '몽촌토성 vs 풍납토성' 논쟁에서 이병도는 풍납토성이 위치한 풍납리(風納里)를 '바람들이'로 뜻을 풀어서 바람들이→바람드리→배암드리와 같은 음운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면서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 유적이 아니라 삼국사기 초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유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9] 하지만 이후 고고학 조사 결과 나온 유물의 수와 토성의 규모는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가볍게 발라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주장은 폐기당한 상태다. 충주 고구려비 관련 연구에서 "꿈에서 봤다" 드립을 쳤는데 얼마 전 충주 고구려비에서 '영락7년 세제정유' 글자가 판독되면서 역사 관련 커뮤니티들에서 회자되기도 하였다. 《역주 삼국사기》와 《역주 삼국유사》에서 보여 준 오역들과 1970~1980년대 사육신 논쟁에서 보여 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 때문에 부산대학교 이재호 교수에게 엄청나게 비판받은 적도 있다.[20] 물론 이런 비판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에서 이뤄진 정당한 비판이니 억지로 점철된 환빠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꾸준한 비판을 받은 것과 별개로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비판도 있다. 재야 사학이라 자칭하는 환빠들의 비판으로 치부되기도 하나 실제로 이 비판을 시작한건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이다. 일단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히려 그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를 내려 주장하는 일본인 사학자의 주장에 반발하여 건국연대를 신라의 경우 내물왕, 백제의 경우 고이왕으로 주장하여 100여 년 이상 끌어올리는 등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학설들을 내세웠다.[21] 이병도 본인은 광복 후에 식민사학과는 거리가 먼 민족주의적 사고를 가졌다는 주장 관련 자료를 보면 이병도의 단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위만은 조선인이다"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도 이병도라는 것. '한사군 한반도설'을 이병도가 일제 식민사학자들한테 이어받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서북한 일대로 비정한 견해는 그 뿌리가 가깝게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사회주의 사학의 경우는 이병도의 개인사를 가지고 비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 역사학에서의 이병도 비판은 백남운이 월북한[22] 한국전 시기 이후로는 정체되게 되어 지금에 와서는 그 분들이 그리 말했다는 식으로 강의에서 언급된다.
광복 이후 친일 문제의 역사학적 평가 문제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사학자 및 사회주의 사학자들과 대립한 탓에 진단학회가 폭삭 무너진 경우도 있어서 평이 썩 좋지는 않다. 단, 정치적 상황으로 봐서는 실증 사학의 사정이 나았는데 민족주의 사학자는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신채호, 박은식 등은 안정적인 학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저서 몇 권만을 남긴 채 사망하였고 일제의 직접적인 역사학적 공격 대상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학계에서 신채호는 사상 문제로 반 매장 상태였고 안재홍이나 정인보 등은 납북당했다. 사회주의 사학 또한 광복 이후 남한에서 된서리를 맞았고 백남운과 김석형이 월북하면서 남한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다. 북한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연구 성과를 낸 바 있으나 사상색이 섞이지 않는게 사실상 힘든 상황이고 남한에는 더더욱 전해지기 어려웠다. 물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학이 많은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이런 학자들이 살아있었다면 역사학의 방향이 훨씬 다양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병도를 비난하는 부류 중 환빠와 같은 유사역사학은 정작 이병도의 방식을 답습하거나 오히려 이병도보다 더욱 후퇴한 방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유사역사학에서는 시대에 따른 지명의 변천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글 독음만 같고 한자는 다른 지명을 동일시하면서 언어의 유사성에 따른 추론을 맹신하는데 이는 이병도의 음상사 연구보다도 더욱 뒤떨어진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혈통, 민족, 영토의 구분 및 관계를 매우 자의적으로 행하는데 이병도의 '위만 조선인설'과 같은 특유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이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
5. 둘러보기[편집]
6. 수상 경력[편집]
- 충무금성훈장 (1954)
- 서울시 문화상 (1955)
- 대한민국학술원상 (1956)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62)
- 인촌문화상 (1977)
- 5.16 민족상 (1979)
- 자랑스러운 고대인상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