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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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8·10대 국회의장, 제4·10대 국무총리.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무총리[3] 이며, 5선 의원에 두 번의 국회의장과 두 번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화려한 정치 경력의 소유자다.[4]
2. 일생[편집]
2.1.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편집]
1908년 황해도(현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 신천읍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학교,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츠바시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의 직원이 되었다.
2.2. 미군정[편집]
1945년 광복과 함께 조선은행 이사가 되었다.
2.3.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 때인 1951년 최연소로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하술할 정치인 백두진과 달리 재무부 장관 백두진은 과감한 불도저식 정책집행과 실행력으로 이승만의 큰 신임을 얻었다. 백두진은 재무장관으로 조세범처벌법, 임시토지수득세법[5] , 귀속재산처리법[6] 등을 일사천리로 밀어부쳐 전쟁 중이었던 대한민국 정부의 세수확보에 앞장섰고, 1952년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특사 클라렌스 마이어와 협상해, 50년 7월 전임 최순주 장관이 맺었던 <UN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지불해야 할 UN군 경비 집행 미지급금 1억달러를 즉각 받아내는 한미경제조정협정(일명 마이어 협정)을 이끌어낸다.6.25 난리통에서 미국돈 1억 달라를 받아낸 인물 백두진
1953년 국무총리로 등용되어 1954년까지 재직하였다. 국무총리로서 1953년 100원을 1환으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당시 500환(구 5만원) 이상의 자금은 강제로 은행예금으로 동결하는 등 초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책을 실행하였고, 그 덕에 한미경제조정협정을 이끌고도 지지부진하던 미지급금 1억달러의 상환을 이끌어냈다.[7]
국무총리에서 해임된 뒤 자유당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야인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4.19 혁명 후에 실시된 1961년 4월 24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최하영의 반민주행위자 지정에 따른 국회의원직 상실)에 경기도 이천군(현 이천시)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대한민국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여 또다시 야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1967년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 총재상담역으로 기용되었다. 곧이어 그해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70년 12월 국무총리로 한 번 더 발탁되어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소속의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고,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는 1979년 3월과 달리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때 별 잡음이 없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함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유신정우회 의장 겸 정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당선되고 국회의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민당에서 강경 노선을 걷던 김영삼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의 꼭두각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이 되는 건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계보에 있던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국회의장 선출을 보이콧하였다. 이것이 백두진 파동. 결국 백두진은 일단 당선은 되었으나, 반쪽짜리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은 뒤, 그해 12월 국회의장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하여 상임고문을 맡았다.
1993년 9월 5일 오전 10시 10분에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25세손 'O진(鎭)' 항렬.[2] 이갑성과 공동으로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52년 10월 9일 ~ 1953년 4월 23일)[3] 첫 취임 당시 만 44세.[4]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제와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영혼 없는 관료로서만 연명한 그의 모습이 있다.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초선 의원으로 고작 20일 재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당인 민주공화당 전국구와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사실상 무투표 당선되어 의원직을 수행한 셈이다.[5] 당시 심각한 인플레를 잡기 위해 농민의 세금을 현찰 대신 쌀 등 현물로 내게 한 것.[6] 이전까지 연고자 우선 혹은 주먹구구였던 일제 적산의 처리를 공개입찰 최고가 매각으로 바꾼 것.[7] 대신 미국은 1공화국 내내 이 마이어 협정 이행을 문제삼아 한국의 경제정책을 감시하고 관리했다. 심지어 케네디 행정부는 아예 미국인 경제고문단이 직접 대한민국의 경제부처를 장악해서 간접통치하는 방안까지 고려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까지 있었던 한미경제위원회가 그 역할을 했다.[8] 전임자 최하영 의원직 상실(반민주행위자 지정)[9] 1961.5.16 자격정지(5.16 군사정변)[10] 국회의장[11] 제9대 총선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3년 임기로 2번 나눠서 선출했다. 백두진은 1기와 2기 모두 선출되었다.[12] 국회의장[13]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