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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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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탐라(耽羅)는 제주도의 옛 명칭이자 그곳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이다.
약 12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19] , 조선 초기에 완전히 본국에 편입되고 이후 구한말까지 제주도의 이름을 계속해서 '탐라'로 부르다가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라는 이름에 밀려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탐라국의 주민인 제주 원주민, 즉 탐라인은 탐라국이 있던 당시 육지의 한민족계와 완전히 다른 혈통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한반도에서 공존한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서로 말이 통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삼한인이라 지칭하는 등 어느 정도 공통의식은 있었으나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가야인이나 탐라인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말하자면 본토 사람들과는 고구려-백제 관계와 비슷한 수준인 형제뻘 관계 정도. 한국이 현재 단일민족 국가이며 친척국가가 없다 보니[20] 생소할 뿐이지 이런 형제뻘 민족이나 국가 관계는 지금도 세계 각처에 흔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본토와는 차별되는 문화가 발전해 왔고, 언어적으로도 차이가 났다.[21]
원대부터 명초까지는 탐라국에 중국 윈난성과 몽골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나, 본토에서의 중앙 집권 통치가 굳건해진 조선 왕조부터 한반도 본토와 같은 목, 군, 현 단위 행정구역이 설치되며 관리를 받으면서 점점 한반도 본토와 일체화되어 갔다.
2. 명칭[편집]
명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우선, 당시 발음되던 한자의 재구음과 남아있는 한국어 어휘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접근해보자면, "耽羅"의 중고 한어 재구음은 "tʌm lɑ"이며, "耽(tʌm)"과 대응되는 한국어 어휘는 '두엄'(풀, 짚 또는 가축의 배설물 따위를 썩힌 거름)이다. 두엄의 옛말은 "두험"인데, "耽"의 Baxter-Sagart 상고 한어 재구음은 "t-qˤəm"으로 서로 음상사한다. 중국의 기록인 《수서》 <백제전>에는 백제의 부용국(큰 나라에 딸려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인 탐모라(耽牟羅)라고 기록되었는데, "牟羅(모라)"는 '마을'을 뜻하는 일본어 "무라(村)"에 대응되는 발음이며, 중국의 기록인 《양서》에는 신라인들이 왕성을 "건모라(健[22] 牟羅)"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있다. "탐라(耽羅)"는 "탐모라(耽牟羅)"의 축약이다. 즉, 이에 따르면, "탐라(耽羅)"의 의미는 '두엄(거름) 마을', 혹은 '밭(논) 마을'이 된다.
또,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삼국시대 신라 문무왕 때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원래 복속하였던 백제의 멸망 이후 신라에 탐라국을 대표해 입조할 때 전라남도 강진군의 옛 지명인 '탐진'의 탐(둥그렇다는 뜻으로 추정된다)과 '라'를 합쳐서 붙여준 것이란 설이 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 대에 황룡사를 제작할 당시, 여러 나라들의 이름을 각 층에 올릴 때 백제에 복속되어 있던 탐라국은 이때 이미 '탁라'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탐라국에서 신라에 입조한 문무왕 때보다 훨씬 앞서는 것은 물론, 진흥왕 때보다 앞서는 476년 백제 문주왕 때 이미 탐라국에서 조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따라서 위의 설화와 달리 탐라라는 국호는 백제나 신라가 붙여준 게 아닌 자생적인 국호로 원래부터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라는 명칭에서 '라' 부분의 경우 ~라/야[23] 는 한반도 남부에서 국호로 자주 쓰인 말이므로 탐라에서도 자생적인 국호에 쓰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24]
따라서 종합하면 탐진이 먼저인가 탐라가 먼저인가의 선후관계가 꽤 어지러운 편인데 기록을 따져보면 탐라가 자생적인 명칭으로 먼저 발생한 것으로 보이므로 탐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의미에서 탐진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한편으로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 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즉, 이 풀이를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25] ㅅ이 어떻게 ㄷ, ㅌ이 되느냐를 의문을 갖는 경우도 있는데, ㅅ이 ㄷ, ㅌ로 변한 것이 아니라 ㄷ, ㅌ에서 ㅅ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26] 이외에도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어로 '읍'(邑)을 '담로'(擔魯)라고 부르고, 《신당서》에서 탐라가 '담라'(儋羅)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탐라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주란 건널 '제'(濟) 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지명인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행정구역인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형태를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알렉산더 보빈은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면서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랑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가설로 평가받으며 제주어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기도 있지만 탐라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3. 역사[편집]
제주도의 역사는 오랜 기간 한반도와 동떨어져 진행되어 왔으며, 그 기록 또한 매우 소략하다. 이로 인해 기초개론 수준인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내용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잘 인지하지 못할 뿐, 선사시대 고산리 선사유적 기록부터 시작해 은근히 제주도 관련 기록이 적지 않다.
3.1. 선사 시대[편집]
애월읍의 빌레못굴 유적과 같은 구석기시대 유적부터 인류 거주의 흔적이 발견되며, 이는 당대에는 제주도가 해수면의 영향으로 육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사적 412호인 고산리 선사유적이 매우 유명하며, 삼양동 선사유적 역시 사적 416호로 지정되어 있어 제주도의 인류 거주가 역사 기록 이전에도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에서 송국리형의 문화상이 청동기 중기 이후로 발현한 이래 가장 오래도록 송국리 유형의 주거지와 문화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제주도, 즉 탐라국이기도 하다. 5~6세기가 되면서부터 백제나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제된 기법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종의 해상 문화 지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 제주도의 신화적 기록으로는 개척 설화인 <삼을나(三乙那) 설화>가 있다. 이는 특이하게 타 지역과 다른 '3성(三姓) 신화'의 형태이다. 《고려사》, 《동문선》 등에 인용된 탐라국 건국신화에 따르면 태고에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 오늘날 삼성혈)에서 신인(神人) 삼형제가 솟아났는데[27] , 맏이가 양을나(良乙那)[28] , 버금이 고을나(高乙那), 막내가 부을나(夫乙那)였다.[29][30][31] 이들은 벽랑국(碧浪國)[32] 에서 들어온 세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면서 제주 양씨, 고씨, 부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 형태상 고구려, 백제와 동계인 부여계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도 하며, 지도자의 칭호가 을나(乙那)인 것 또한 음가상 백제에서 부여계 왕호로 보이는 어라하(於羅瑕)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33] 시조가 바다를 건너온 여인과 결합한 부분은 금관국 수로왕이 바다를 건너온 왕후 허황옥과 결합한 것이나 신라 혁거세 거서간이 물의 근원으로 태어난 알영부인과 결합한 것과 유사하다고 본다. 이렇듯 초기에는 삼을나(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후술하듯 고려 이후에는 국왕 격인 성주(星主), 부왕 격인 왕자(王子), 이 양자가 함께 다스리는 이원적 통치체제로 변화해 나간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2337년으로 단군조선보다 빠른 건국이라지만 애초에 단군조선의 2333년 기록부터가 신뢰하기는 어렵다. 이때 세 씨족 사회가 뭉쳐 고씨가 왕이 된 건 인간 세상이 생긴 후 900년 뒤라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신화적 기록은 실제 출신이나 성씨, 시간관념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창세 설화 내지 건국 설화에 나타나는 신화적 요소로서 파악해야 한다.
3.2. 삼국시대[편집]
탐라국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기 이전에,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주호국이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마한 서쪽 바다 큰 섬의 세력이라는데, 한반도 부속 도서 중에는 제주도가 가장 크므로 이들이 고대에 탐라를 지배한 세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 추정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탐라가 한반도 국가와 직접적으로 통교한 것은 백제의 웅진 남하 시기 이후로 추정된다.[34] 근초고왕 대의 남방정벌 기사를 과거에는 침미다례를 제주 탐라로 규정하여 제주도까지 소급 적용했던 바 있으나 이후 침미다례와 같은 마한계 후기 국가의 소재를 전남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백제 문화권이 전남으로 내려오는 것은 웅진백제기 이후이고,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서도 백제의 전남, 제주 등의 남방 진출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이후로 해석할 수 있다.(다만, 이는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의 공물 납입 및 복속 기록, 《일본서기》의 복속 기록, 《수서》 <백제전>의 백제 부용국인 '탐모라(耽牟羅)'[35] 기록 등을 종합해 볼때 일반적으로 시기의 오차가 조금 있기는 해도 동성왕대를 전후하여 500년 무렵에 전남 해안 지역과 탐라까지의 편입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중론이다.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년). 한국 사서 중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36]
南海中耽羅人 初通百濟國
2년 (508년) 겨울 12월 :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하였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중략)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진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중략)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리이다. 토산물로 노루,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九韓, 구한)에도 탁라(托羅)가 들어간다. 이외의 8국은 왜(倭), 중화(中華), 오월(吳越),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말갈, 단국(丹國, 거란), 여적(女狄, 여진족)[37] , 예맥(濊貊, 고구려로 보임)이다. '구한'(九韓)이라고는 하여 삼한을 비롯한 주변의 대동소이한 민족들을 열거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38] 을 참조했을 때 백제가 복속한 이후 백제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며, '왕자'의 존재도 확인된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39] 도동음률(徒冬音律)[40] 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41]
한편, 663년, 신라, 당나라와 백제 부흥군, 왜의 양대 연합군이 맞서 싸운 백강 전투에 탐라국도 백제/왜 연합군측에 참전했다고 보는데 이는 《구당서》 <유인궤 열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가령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에서는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 왜군과 연합해 나당동맹군에 맞서 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탐라는 한중일 역사서에 모두 나오는 이 전투 관련 기록을 통틀어봐도 《구당서》 <유인궤 열전> 이외엔 언급이 없고, 그 《구당서》에서도 백제•왜 연합군 잔병들이 항복할 때 탐라인도 같이 데리고 항복했다는 구절이 전부라 이 전투에서 비중이 미미해 본격적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 참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662년 도동음률의 신라 항복과 663년 탐라가 백제부흥군의 편을 들었다는 두 기록은 모순되는데, 둘을 모두 인정할 경우 당시 탐라는 백제/왜와 신라/당이라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 신라가 다시 한 번 탐라국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탐라를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662년의 신라는 백제 부흥군 상대하랴, 고구려 상대하랴, 그리고 곧 나당전쟁 준비하랴 바빴기 때문에 탐라국에 신경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본 쪽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직후인 661년에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를 보낸 이후 수 차례 탐라국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사비백제가 붕괴한 이후 탐라국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활로를 모색한 흔적이 보인다. 탐라국과 일본의 교류는 693년 사신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리고, 이후로는 일본이 탐라국과 연락할 일이 생겨도 직접 하지 않고 신라 조정을 통하는 식으로 바뀐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이즈음부터 신라의 탐라 통제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3.3. 남북국시대[편집]
위와 같이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에 따르면 “신라 때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삼형제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고계에게는 '도내'(都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성주란 명칭은 '별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탐라가 입조할 당시 신라 남쪽에 객성이 떴고, 그 후 고후 형제가 신라에 입조해오자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하사한 것이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항로 지표로 별자리를 이용하였고, 탐라국에선 북두칠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칠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 칠성단인데 현재 속칭 칠성통이라 불리는 곳에 칠성단이 있었다.[42] 《탐라지》 등에 조선조 칠성단에서 제를 지냈는데 칠성은 하늘의 북두칠성이고 제의도 천제란 기록이 있다.
이후 탐라국은 892년 육지에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통일신라에 정기적으로 조공하였다. 보덕국이나 우산국처럼 일종의 신라의 번국이 된 것인데, 속국이지만 일단 국가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어서, 신라 복속 초창기인 7세기까지는 당나라에 조천사를 보내거나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과 탐라 사이에 견탐라사(遣耽羅使)라는 사신단이 잠깐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8세기가 되면 신라의 속국화가 진행되어 견탐라사는 끊겼다. 8~9세기가 되면서 일본 측도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인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속일본기》 기록에 따르면 778년 일본의 견당사가 탐라국 주민들에게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나자[43] 779년 신라에 견신라사를 보내 탐라국에 억류된 우나카미노마히토 미카리(海上眞人 三狩) 등을 빼내 일본으로 귀국시킨다. 탐라국에서 붙잡은 외국인을 신라 조정이 지시하면 바로 수도 서라벌로 데려올 수 있었단 말이며, 즉 탐라국은 일단 시스템은 별도의 국가지만 신라의 통제를 받는 상태였던 것이다.[44]
신문왕 4년(684)에는 고지창(高支昌)을 신라에 보내 설총의 이두문자를 도입했다고 한다. 다만 《탐라국 왕세기》에서만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불확실하다.
김헌창의 난 때(822)는 신라 귀족들 일부가 탐라국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3.4. 고려시대[편집]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2년여가 지난 938년 탐라국주 고자견은 태자 고말로를 보내 고려에 입조하여 형식상 속국이 되었으며, 이에 고려 태조는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에 성주와 왕자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탐라가 신라나 고려로부터 관작을 제수받은 것은 지방 호족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가진 중앙정부에 입조하여 탐라 지방의 지배력을 인정(책봉)받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고려 초기까지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지방 호족을 고려의 지배 체계에 편입시키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탐라국 역시 차츰 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입되었다. 처음으로 설치된 '제주'라는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탐라인이 고려 빈공과(賓貢科 : 외국인을 자국의 관료로 임용하기 위하여 치르던 시험.)에 합격하거나, 탐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간관에 임명되지 못한 고유의 사례처럼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고려와는 별개인 속국 취급을 받는 등 자치는 허용되었다.
1105년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편되면서 속국 지위가 박탈되었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왔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탐라 현지인은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1168년 양수의 난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성주'는 여전히 대를 이어 세습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고려 말 목호의 난 진행 과정에서도 목호 측과 고려 진압군 측 모두 명목상 탐라의 지배자인 탐라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고려 중기 이후의 탐라는 사실상 고려에 복속했지만 아직 독립국가의 성격도 일부 가진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3권 명종 광효대왕편에 따르면, 탐라국 내에서도 정쟁이 일어났는데, 본래 양씨가 '왕자'를 제수받았지만 정작 마지막 왕자의 이름은 문충세(文忠世)였다. 오히려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다. 이렇게 된 사연은 좀 길다. 탐라국은 명목상 고씨 성주가 군주였지만 사실상 서쪽 반만 성주의 영토, 동쪽 반은 양씨 왕자의 영토, 수도는 공동 통치였다. 화산재 때문에 농사가 어려운 동부보단 서부가 항상 더 강했지만 성주들은 이에 만족못하고 외국인 고려에서 과거를 보고 관직까지 얻을 정도로 중앙의 조정에 협조해서 지원을 받았다. 조정은 덕분에 고씨와 양씨가 분열한 틈에 탐라국을 속국화시키고, 고씨 성주는 탐라국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얻는 윈윈 전략이었으나 이들에게 부림당하는 탐라인들과 토호들에겐 의문의 2패가 되었다. 그러다 무신정변으로 고려가 막장이 되니 성주는 반발하는 토호들을 찍어누를 수 없게 되었고, 왕권 유지를 위해서 육지 이주민 가문인 문씨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45]
고려사절요 제13권에 따르면, "고려 명종 1194년 탐라국에 파견되어 중앙 문물을 제주에 전파하는데 공헌하였다. 문탁의 5세손 문창우가 제주고씨의 사위가 되면서 탐라의 왕자직을 세습하였다. 근래에 연구진에 의해 복원된 씨족원류 및 동문선의 복원에 따르면, "문탁의 5세손이자, 문극겸의 장남 문후식의 차남인 문착(文𧨳)부터 문양부(文陽夫), 문영희(文永禧), 문신(文愼), 문창우(文昌祐), 문공제(文公濟), 문승서(文承瑞), 문신보(文臣補), 문충걸(文忠桀), 문충세(文忠世)로 이어지는 왕자직 세습으로 고씨 양씨의 성주가문에 버금가는 가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현재]
여기서, 뜬금없이 남평 문씨가 등장하는 이유는 탐라 서쪽의 고씨 세력이 탐라 동쪽의 양씨 세력에게 위협받자, 육지의 세력인 고려의 중앙정부 귀족들과 권력적으로 연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들간의 다툼으로 혼돈의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무신들에게 잘못 줄을 대었다가는 역으로 숙청될 위험이 높았다. 따라서 문신 출신이면서 무신들과 가깝고, 또한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가까운 남평(나주)의 문씨가 정치적 차선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14권에서 제17권 그리고 고려시기의 씨족원류에 따르면, 제주 고씨는 탐라에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재상이자 상장군이었던 문극겸에게 지속적으로 접촉하였고, 문극겸의 아들들인 문후식, 문유필때 되어서야(고려 고종시기) 군사와 친족을 보내어 제주 양씨를 축출하고 제주 고씨는 탐라의 서쪽, 남평 문씨는 탐라의 동쪽으로 함께 권력을 분점했다. 그 결과, 제주 고씨는 고려의 중앙정부와 연줄을 대고, 지속적으로 성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남평 문씨는 약 400년간 탐라의 동쪽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몽골의 침략에 대한 것이 있다. 당시 고려가 더더욱 혼돈 상황이 된 끝자락 쯤, 고려의 빽이 완전히 증발한 성주 고적을 왕자 양호가 끌어내리고 성주에 올랐다. 다수의 탐라인들과 성주 양호는 탐라국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도왔고, 1인자 자리에서 밀려난 고씨와 고려중앙정부에서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문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해줄 여몽 연합군을 지원했다. 최종적으로 김통정이 이끌었던 삼별초가 전멸하면서 이때부터 고씨가 다시 성주를 차지하고 동맹인 문씨에게 왕자의 자리와 왕자의 영토인 섬 동부를 주었으며, 이 문씨의 왕자 직위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였고, 몽골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주목해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고려에서는 1295년부터 탐라라는 이름을 '(바다를) 건너야(濟) 갈 수 있는 고을(州)'이라는 뜻의 '제주'로 고치고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하는 '제주목'으로 행정단위를 재설정했는데, 한편 원나라와 외교관계 하에서 탐라는 지방관인 만호가 파견되는 탐라만호부로도 기능했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 반원 정책을 펴자 제주에 남아 있던 몽골인 목호(牧胡)[46] 들은 불만을 가졌고, 1374년 목호의 난이 일어나 최영 장군이 진압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려 정부, 몽골, 삼별초 등이 탐라국을 계속 뺏고 빼앗았지만 그 동안에도 탐라성주는 계속 존재했다. 탐라의 토호인 성주와 왕자는 고려와 원나라에서 보내는 지방관들에 밀려 지역의 실제적 통치권을 서서히 잃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62년에 성주 고복수가 목호들과 반란을 일으키거나, 1386년 고려가 성주 고신걸과 그 아들 고봉례를 개경에 억류해두고서야 비로소 탐라가 귀순했다고 평한 것을 보면 고려 말 제주(탐라) 성주가 허울뿐인 직책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5. 조선시대[편집]
조선시대에 들어선 1402년, 명칭이 제주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高鳳禮)가 삼국시대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했다.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도에 속했으나 제주목은 사실 조선시대에도 특수행정구역에 가까웠다. 실제로 다른 군수, 현감들이 목사와 독립적으로 관찰사의 직속 부하였던 것과 달리 정의현, 대정현의 현감들은 전라도 관찰사의 직속이 아니라 제주목사의 관할하에 있었고, 소속 현감에 대한 행정적 명령에 대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사후 보고하였다.
4. 역대 군주[편집]
중국과 일본 사서에서 나타나는 조공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가계도가 만들어진다.
아래의 연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정사가 아닌 《제주 고씨 문중 족보》에서[49]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열람에 주의를 당부한다. 연표에 포함되지 않은 족보상 추가 정보는 제주 고씨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족보상 정사에서 확인되는 왕의 이름이[50] 몇 있지만 워낙 기록이 적어 제대로 된 왕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도동음률이나 유리도라[51] 같은 고씨가 아닌 왕의 인명도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자료에 따라 양씨가 탐라 국왕 및 성주를 지낸 기록도 있어 고씨가 쭉 탐라국의 군주였는지도 의문이 가는 노릇이다... 그리고 애초에 시조 고을나왕의[52] 무려 136년이라는 재위기간부터가 신빙성이 없다.[53] 신라에 입조한 이후에도 다시 고려에 입조하기 전까지 왕이라는 칭호가 이어진 것을 보면 외신내왕적 성격을 띈 것으로 보인다.
4.1. 역대 성주·왕자[편집]
이하는 《고려사》 등 사서에서 확인되는 고려의 제후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조선의 지방관인 좌·우도지관의 목록이다.
5. 연표[편집]
자세한 내용은 탐라국/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탐라국 궁궐의 존재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많으나 본궐은 지금의 제주목 관아터에 지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 이유는 탐라국의 성주가 업무를 보았던 성주청이 제주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였다고 하기 때문. 824년에는 서귀포에 이궁인 남궐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민간설화에는 탐라국의 왕자가 지금의 서귀포 위미리 또는 한남리에 남궐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
- 성주청을 다시 짓는다고 한다. # 다만 애초에 탐라국 건축 관련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전통 양식의 건물을 새로 짓는 수준이 될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많다. 백제문화단지, 월정교 등이 존재한다.
- 사실 건축 관련 자료만이 아니라 탐라국 자체의 기록이 원체 부족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서도 짤막하게만 나와 명확히 무얼했는지 알기가 힘들다. 이 때문에 긴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 제주도 지역이 나오면 간혹 탐라국을 모델로 만든 것이 나오긴 해도, 탐라국 자체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은 거의 없는 편에 속한다.
- 그래도 우산국과 비교하면 많은 유적, 유물, 기록이 나온다.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시조와 말왕의 기록도 우산국보다 더 많다.
- 해적: 도깨비 깃발에서 권상우가 작중 탐라국의 왕이 되는것을 목적으로 주인공 일행들이 찾는 보물들을 노리고 있는 부흥수[71] 라는 악역을 연기했다.
- 야사에서는 베트남 왕족을 제주도의 왕이 죽였다고 한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1] 일부에 기원전 2337년이라고 서술한 자료가 있으나, 이는 신화적인 연대이다.[2] 《위서(魏書)》, 이를 신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고구려 사신 예실불이 말한 내용에 따르면 섭라가 아예 백제에 합병되었다고 나오기 때문에 통설은 탐라국으로 본다.[3] 《수서(隋書)》[4] 《신당서(新唐書)》[5] 《삼국유사(三國遺事)》[6] 주호국으로 비정되는 섬 주민의 문화 및 초기 탐라국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지금의 라마다프라자 제주호텔과 탑동로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7] 부왕 왕자(王子)가 있었다.[8] 제주 양씨의 시조이다. 그리고 제주 양씨에서 분관된 남원 양씨의 시조이기도 하다.[9] 제주 고씨의 시조이다.[10] 제주 부씨의 시조이다.[11] 이후 성주제가 실시된다.[12] 제주 고씨, 초기 통치시 국왕, 후기 통치시 주로 성주(星主), 왕자를 맡은 기록도 확인된다. 시조 삼을나(梁高夫) 이후 세력이 강성해지자 국주가 되어 현재의 제주도 전역을 관장하다가, 성주제 이후 섬의 서쪽을 통치하게 된다. 조선 이후 좌도지관(左都知管).[13] 제주 양씨, 후기 통치시 주로 왕자(王子), 성주를 맡은 기록도 확인된다. 성주제 이후 섬의 동쪽을 통치하다가, 이후 고씨와 결탁한 문씨에 통치권을 내어주고 만다. 조선 이후 우도지관(右都知管).[14] 일시적으로 탐라의 성주를 맡은 기록이 있다. 다만, 탐라지나 실록에서 고씨의 오기일 가능성도 학계에서는 제기되었다. 한자로 전사된 고대의 고유어 표기는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다. 당사자가 한자식 인명을 사용했으며 공식표기도 남겼다면 이견이 없지만 고대 한반도에는 아직 한자문화가 완전히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유어로 된 명칭이 한자로 가차되면 필사자의 습관 및 지역마다 달랐던 방언적 차이에 따라 비슷하지만 다른 한자로 가차되는 경우가 흔했다. 여기서 특히 자음은 비슷비슷해도 모음은 그보단 다르게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고의 이표기가 아닐까 추정되는 것이다. 특히 加는 매우 간단한 자형의 한자로써 음차에 흔히 이용된 한자였다.[15] 남평 문씨, 왕자(王子), 성주를 한 기록은 없으며, 양씨 대신 탐라의 동쪽을 통치한 바 있다.[16] 중세 이후의 제주어와의 연결고리는 제한적인 가능성만 있을 뿐, 같은 언어라는 근거가 아직 부족하다. 오히려 제주어는 고려 시대 한반도에서 유입된 중세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7] 언제부터 한국어족인 제주어의 고어에 해당하는 언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초로 기록된 것은 16세기경이다. 한반도의 중세 한국어가 10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성립한 것을 보아, 중세 제주어 역시 그 이후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8] 숙종 시기에 탐라군으로 개칭, 의종 대가 되면 중앙 정부의 지방관까지 파견된다. 그러나 재지 세력에게 성주와 왕자라는 세습 작위가 부여된 점과, 고려 말 공민왕 시기에 와서도 탐라가 고려에 공물을 바쳐왔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에서 고려 본토와는 다른 특수한 위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중국과 별개의 천하관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천자국을 자처하던 고려에서 탐라를 제후국으로 취급한 것으로, 이후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해 격이 낮아진 조선은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탐라 고유의 위상과 권한도 점차 철폐시키게 된다.[19] 물론 주요 사건에서 보듯 이전부터 한반도 여러 왕조의 지배권 영향 아래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20] 일단 북한이 있긴 하지만 알다시피 냉전에 의한 분단이라서 통일을 지향하기 위해 헌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21] 오키나와 류큐인도 일본인과 형제뻘(?)인 민족이지만 야마토 민족인 것은 아니며 일본 본토와 그닥 동질성을 느끼지 않는데 이와 비슷하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가까운 일본령인 큐슈 섬과 한참 떨어져 있다.) 차이점은 복속 역사가 더 긴 탐라국이 더 본토와 동화되었다는 정도. 오키나와는 지금도 일본 본토와 꽤나 이질적이다.[22] '큰'[23] 이는 같은 말의 방언상의 차이로 추정된다.[24] 비슷한 음가의 '나'는 고구려에서 땅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는데 ~라/야 계통의 국호는 땅에서 나라라는 의미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25] 비슷하게 가야 금관국이 '소(쇠)나라'라고 불린 바 있다.[26] 어린아이의 혀짧은 소리를 생각하면 된다. 사과->타과. ㄷ, ㅌ에서 혀만 떼면 ㅅ가 되기 때문이다.[27] 고조선, 고구려, 가야의 건국 신화에서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는 반대다. 백제와 신라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건 아니고 혈연(동명성왕)이나 상징물(백마(신라))을 통해 간접적으로 매개되며, 가야 같은 경우에는 신화가 2가지인데 김해의 금관국(금관가야)은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과는 다르게, 고령의 반파국(대가야)의 신화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중심이다. 반파국 신화를 생각하면 제주도의 것과 비슷하게 땅의 역할을 크게 보고 있다.[28] 양씨는 후에 신라에 입조시 梁을 하사받아 고려때까지 둘을 혼용하다가, 점차 梁으로 바뀌었다.[29] 조선왕조 관찬 사서인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형제의 순서는 차례대로 양고부(良高夫/梁高夫)이다. 다만 후에 기록된 사료에서는 고씨가 앞에 오는 고양부가 나타나기도 하나, 사찬 사서이고 고려사보다 시기가 뒤늦어 정통으로 보기 어렵다. 만년 3인자 부씨. 자세한 사항은 삼성혈 외부 링크 참조.[30] 참고로 이 삼성(三姓)의 순서를 두는 문제로 양씨와 고씨가 정통성 싸움을 하고 있는데, 2014년에는 제주삼성을 대표하는 재단의 이름에 고씨 문중의 주도로 양고부가 아닌 고양부가 들어가자 법정 다툼까지 벌일 정도였다. 다만 정통성 문제는 조선조에 이미 옛 문헌을 널리 상고한 끝에 첫째가 양씨, 둘째가 고씨, 셋째가 부씨인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에 따라 관찬사서인 고려사, 조선시대 제주목사의 삼을나 배향 신위의 순서 등에서 그대로 따랐다. 즉 현재의 논란은 3성 중 가장 수가 많은 고씨 문중의 억지인 셈인데, 이를 토대로 보면 정통성으로는 양고부, 인구수로는 고양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제주 양씨에서 분적한 남원 양씨의 수가 제주 양씨 본성보다 많아 이들 제주계 양씨와 제주계 고씨 모두 수가 50만 단위로 큰 차이가 없어 애매하다. 일단 제주 본토에는 고씨가 더 많기는 한데...[31] 조선 영조 때 고한준(高漢俊)의 상소에도 良高夫로 되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 고씨이다. 《조선 왕조 실록》 <濟州儒生高漢俊等上疏言>(제주 유생 고한준 등 상소문) 참조. 상소 내용 자체는 탐라국의 역사를 고려하여 전조 왕 대접을 해달라는 건데 쿨하게 까였다. 영조 : 귀 씻게 물 좀 가져와라[32] 《고려사》에는 일본국이라 되어 있다.[33] 이는 현대 한국어의 으리으리하다의 '으리'와 연관이 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여기서 파생되어서 삼왕가 중 고씨를 칭한 왕가가 있다는 점에서 아예 고구려 왕가와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추정도 있다. 삼국시대 내내 거의 백제에 복속된 상태였던 탐라국이 바다까지 끼고 가장 멀리 있는 고구려와 연관이 있다는 점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탐라국은 백제를 달달 털었던 장수왕 재위기 즈음에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가 문자명왕 대에 백제 동성왕의 무력시위에 의해 다시 이탈하게 되었다고 당대의 기록에도 나와있다(탐라국 기준으로는 지운왕 시기에 해당한다). 또한 삼국시대 도중 항해기술의 발달로 연안항해에서 원양항해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백제를 달달 턴 시기 즈음 고구려에서 함대를 파견해 탐라국을 복속시킨 것이 되며 만약 위 고구려 왕가 관련설이 맞다면 이때 고구려 본토의 기술력, 군사력을 통해 우월한 지위를 갖고 정착한 고구려인 집단이 있었던 것이 되고 이들이 도래한 이야기는 토착지배층의 전설과 합쳐져 탐라국의 신화를 재구성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34] 정확히는 제주도에서 중국계 유물도 발견되는 만큼 이미 한사군대의 교역망에도 들어가 있었고 따라서 침미다례와 같은 남방 국가들과 교류가 먼저 있었을 건 당연하긴 한데 기록이 제대로 남을 정도로 본격적인 중앙집권 왕국과 통교한 건 이때가 최초이다.[35] 남북 1,000여 리, 동서 수백 리에 항해에 3달이 걸린다는 기록 때문에 섬의 크기나 생김새, 거리상 제주도가 아니라 지금의 대만 섬이라는 떡밥이 있으나, 군선이 대만으로 표류했다면 굳이 백제를 들러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또한 대만은 《수서》에 함께 기록된 유구국(流求國)이라는 설이 있다(다만 유구국에 대해서는 류큐설이 조금 더 우세하긴 하다.). 물론 가장 기본적으로 백제가 제주도 또한 완전히 영토로 편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만까지 원정을 나가는 뻘짓을 왜 했느냐, 그리고 했다면 관련 기록은 왜 없느냐는 비판 또한 들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수나라가 바다 동쪽의 여러 섬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로 보인다.[36] 다만 이 문단에서의 탐라국은 아래 기록의 처음으로라는 말 때문에 전남 지역에 존재하는 마한의 잔존 세력으로 파악하려는 의견도 있다.[37] 의외로 여진족의 존재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기록에 나온다. 흔히 퉁구스계 민족들의 계보를 '물길-말갈-여진-만주'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확히는 퉁구스계 제민족들을 통일한 부족의 이름이 종족명이 된 경우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즉, 말갈족이 득세할 때도 여진족이 있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말갈족에게 끽소리도 못하고 눌려지내던 겉절이였다는 뜻이다.[38] 탐라국이 연마 등을 보내 옴.[39] 백제의 관직이다. 탐라국은 상기했듯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들어오기 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40] 또는 탐라국 왕 유리도라(儒李都羅)[41] 《제주 고씨 족보》에 따르면 처량왕(處良王)이 이때 왕인데, 후대에 지어진 족보보다는 당대 기록 쪽이 당연히 신빙성이 높다. 도동음률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서 유리도라라는 이름은 《신당서》와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 등장한다. '도'(徒)는 이두로 '네'로 읽히고 유리는 '누리', '내'이므로 서로 같은 이름이다.[42] 칠성통과 그 주변 지역은 탐라국 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주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며 지가 역시 가장 비싼 곳이었다. 허나 제주도청과 시청, 법원 등 주요 기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신제주와 광양 등지로 중심지가 옮겨가면서 점차 쇠락중이다. 특히 제주도립병원(현 제주대학교병원)이 산골 아라동으로 이전한 것을 두고 호흡기를 떼버렸다는 평가도 있다. 제주도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관덕정 앞 마당이 지금의 칠성통 입구 제주목관아 앞에 있었고, 그 제주목관아와 관덕정 바로 동쪽에 있는 제주우체국이 과거 탐라국의 군주인 성주(星主)가 집무하던 성주청 터이다. 조선보다 더 이전 원간섭기에는 지금의 제주목관아 북쪽. 그러니까 탑동 매립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바로 바닷가 앞이였을 곳에 탐라총관부의 관청들이 있었다.[43]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내는 바닷길 중간쯤에 탐라국이 있다보니, 견당사를 탐라국에서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44] 신라의 또다른 종속국이던 울릉도의 우산국 역시 비슷한 취급이었는데, 863년 일본에 우산국 사람이 표류했을 때도 우산국에 직접 보내지 않고 다른 신라인과 묶어서 귀국시켰다.[45] 부연하자면 남평 문씨는 육지 이주민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제주도와 가까운 나주 일대의 가문이었다.[현재] 문탁의 묘소는 없어졌지만 후손들이 하가리에 사당을 세워 문탁을 추모하고, 역사적 사료를 연구진에 공유했다.[46] 목호는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담으로, 제주도 향토사학자인 이영권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을 두고 고려시대 버전 4.3 사건이라고 했다. 제주도에 살았던 몽골인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려군에게 진압되면서 애꿎은 제주인들 일부가 몽골인으로 오인받아 학살당하자, 몽골계 귀화인(제주 초씨나 제주 좌씨 등)과 제주도 토착민 등이 자신들이 몽골인들과 연관되었음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는데, 이것이 현대의 4.3 사건 당시에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서 제주도민들의 상당수가 학살당한 후에 제주도에서 반공주의가 확산된 것과 절묘하게 똑같아서 그렇다고 한다.[47]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세습 제도가 한번에 폐지된 건 아니었고 1445년이 되어서야 좌도지관은 상진무(上鎭撫)로, 우도지관은 부진무(副鎭撫)로 명칭이 바뀌면서 비로소 선출제도가 실시된다. 그 후 1620년경 상진무는 진무(鎭撫)로, 부진무는 유향(留鄕)으로 개칭되었다.[48] 구마기와는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49] 이런 경우 대부분 숭조 작업의 일환으로 왜곡한 기록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50] 도동음률. 유리도라. 고여 등.[51] 《당회요》에 나오는 국왕 이름이다. 동시기의 다른 국왕으로는 대위해가 있다.[52] 고을나왕과 15대 고후왕은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사서와 제주의 여러 전설에 전하고 있어 근대에 창작된 허구적 인물은 아니지만 전하는 사서들이 탐라국이 망하고 워낙 수백년 후에 쓰여진 거라서 실존했다는 신빙성은 없다.[53] 28대 서왕부터 42대 소왕까지는 모두 똑같이 25년씩이다.[54] 고을나의 15대손 고후는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인물이다. 고을나의 재위 기간을 고려하면서 사서의 기록을 짜맞춘 결과 600년 전의 원삼국시대 사람이 됐다.[55] 고(高)를 제외한 성주의 성씨는 문헌상의 이름에서 성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표기한 것이다.[탐] A B 《탐라지》(耽羅志)[동]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동문선》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고]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고려사》[56] 《고려사》에서 '추장(酋長)'이라는 표현은 말갈, 여진의 군주를 이를 때 쓰인다. '성주'(星主)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아들의 이름이 고몰(高沒)인 것으로 미루어 '성주' 본인이거나 탐라국의 하위 토호인 것으로 보인다.[57] 아들 고몰(高沒)도 함께 운휘대장군 상호군에 임명된다.[A] A B C 《제주 양씨 족보》[B] A B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왕자 두라와 성주 두량을 함께 중시조 양구미의 2세손으로 파악하고 있다.[58] 《원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여] A B C D E F G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지도서》에 따르면 "원종 11년(1270년) 경오년에 반적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진도에 머무르다 이듬해 신미년에 탐라를 침략하니, 성주 고인조와 왕자 문창우 등이 (왕에게) 아뢰었다(十一年庚午反賊金通精領三別抄據珍島翌年辛未來據侵掠星主高仁朝王子文昌祐等以聞越)"고 한다.[59] 또는 인탄(仁坦)[60] 고인단(인탄)의 동생.[61] 공민왕 11년(1362년) 목호의 난에 관련된다.[62] 고인단(인탄)의 손자로, 고석의 아들이다.[63] 고순량의 동생.[64] 고순원의 아들.[조] A B C D E 《조선왕조실록》[65] 고봉례는 장남 고상온이 토호인 도주관 좌도지관을 이어받기를 태종에게 청했다. 고상온은 좌도지관을 이어받았지만, 약 3개월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66] 정부의 청으로 '고봉례의 뒤를 이어' 도주관 좌도지관이 된다.[C] A B 병조의 청에 따라 도지관직이 혁파되었다.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6월 19일)[67] 또는 차미(且美).[68]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이 인물을 4세손이자 이름(號)이 잉(仍)인 양잉(良仍, 梁仍)으로 본다.[69] 아들은 배융교위 고물(古物)[연려실기술] [70] 사서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왕자 직위는 장자 세습이었다. 하지만, 문충세는 문신보의 차남이자 문충걸의 동생으로 나온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치적 구도상 세습의 격변의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사례된다.[71] 탐라국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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