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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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15년 9월 16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 2014년 7월에 촬영을 개시했고, 2015년 8월 11일 제작보고회를 개최했다.“이건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
배경은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는 임오화변이다. 사도세자의 사후를 그린 에필로그 부문을 제외하면 사건들을 병렬적 시간 구도로 보여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8일 동안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면서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와 관계가 틀어지고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의 상황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임오화변은 너무나 익숙한 소재이기 때문에 사도가 뒤주에 갇히는 장면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왜 사도가 뒤주에 갇혔고 부자 사이가 틀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에 집중하려고 한 영화다. 이준익 감독 말에 의하면, 충혈된 감정으로 시작되는 영화.
영화 자체가 장기간의 역사를 매우 압축해서 보여주므로, 보기 전에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아는 것이 좋다.
2000년대에 제작된 영화 및 드라마 중 2015년 8월 7일에 방영한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4] 과 함께 노론 음모론을 전면 배제한 작품이다.[5] 그런데 인터넷의 영화 관련 댓글에는 노론 음모론을 앞세운 자칭 전문가들의 글이 잠시 폭주한 적 있고 이후에도 간간이 활동세력이 눈에 띈다.
2. 개봉 전 반응[편집]
영조 역할의 송강호가 관상에서 처음으로 사극에 출연한 후 왕 역할은 처음이라 송강호표 왕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와중에, 아무리 연기파 배우라도 어색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등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송강호의 출연작 중 〈변호인〉, 〈효자동 이발사〉 등이 있었지만 일반 형사(살인의 추억), 공원 매점 주인(괴물) 등 서민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가 많았고 관객들에게도 이런 서민적인 이미지가 친숙해져 있었기 때문. 그러나 예고편과 스틸컷이 나오면서 그런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영화 〈베테랑〉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유아인은 〈베테랑〉의 천만 돌파로 영화배우 커리어의 전성기를 맞게 된 상태에서 사도세자 역을 맡아 기대가 큰 상황. 적어도 주역 연기자의 연기력에는 걱정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베테랑〉에서 재벌 3세 마약중독자 싸이코 역으로 나오던 유아인이 이 영화에서도 정신병자 역으로 나오는 것이 묘하게 배역이 매치가 된다는 시각도 있었다.
〈서부전선〉과 추석 극장가를 노렸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전체적인 이야기가 부자지간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추석즈음 개봉이 시의 적절했던 셈.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두 부자가 갈라졌다는 속설 대신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사도세자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영조의 모습, 부자의 성격 차이와 그로 인한 부자간의 갈등을 주로 묘사할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편집증 수준으로 정신적 폭행을 가하고 이로 인해 사도 세자가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사도세자와 영조가 서로에게 반감을 가지고 이것이 극도로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결국 임오화변이 일어났다는 것은 현대에 남아있는 사료에 근거한 정설이다. 주류사학계에선 여기에 해석을 더하여 정치적 문제와 부자 갈등을 섞는 게 보통이다. 물론 이 정치 갈등도 이덕일 같은 노론 음모론은 절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문서 참고.)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는 예고편의 사도세자의 대사가 이것을 잘 나타내는 듯하다.
3. 예고편[편집]
4. 시놉시스[편집]
5. 등장인물[편집]
5.1. 영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영조(사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 사도세자[편집]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 조선의 세자이자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아들."사람이 있고난 다음에 공부와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였소."
영화 도입부에서 사도세자는 마치 분노에 미친 사람처럼 칼자루를 쥔 채 영조가 있는 곳을 쫓아간다. 물이 흐르는 진창을 따라 걸어가는데, 당시의 일을 기록한 한중록에도 "수구(水口)를 통해 윗 대궐로 가리라.", "내 기어이 '협검(狹劍: 칼을 참)하고 아무리나 하고'[8] 말 것이다."라는 사도세자의 말이 있다. 하수도를 따라 영조가 거처하는 궁궐로 가서 (아마도 영조를) 죽이고야 말리라는 분노 어린 말.
타이틀 직후 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첫 번째 날부터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빈 이씨에게 간밤에 세자가 저지른 일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경화문을 통과해 세자를 어전으로 나오도록 시킨다. 그저 앉아만 있는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매정함에 기막혀하며 세자는 영조 앞에 나서고, 영조는 각종 냉병기와 굿하는 도구를 가져와 세자가 자신을 해하려는 저주를 내리려 한 게 아니냐고 추궁하자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자기 스스로의 굿을 지낸 것이라며 비꼬듯이 답한다. 영조는 더 들을 것도 없다며 칼을 내던지며 자결을 명령하고, 세자는 이런 법도가 대체 어디 있냐고, 차라리 의금부에 끌고 가 심문을 하라며 절규하고 반항한다. 이어 악에 받힌 세자는 칼을 들어 스스로 목을 베려 하지만, 뒤에서 난입한 신하들이 몸으로 막아내자 머리를 바닥에 찧어가며 거듭 자결을 시도한다. 이런 소동을 보다못한 영조는 아예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세자가 제발로 들어가자 직접 뚜껑에 못을 박는다. 못을 박는 영조의 현재 모습에서 세자가 막 글을 배우던 과거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회상이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눈에 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아버지'가 아닌 '군주'로서,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영조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진 않았으나 다정한 말로 표현하는 대신 완벽을 요구하며 지나치게 공부하라고 갈궜고, 복잡한 정치상황과 왕가의 숙명에 대해 알기 쉽게 풀이해 설명해주진 않고 끊임없이 아들을 검열하며 구박만 한다. 대리청정을 맡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와 관계는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면 영조가 뒤에서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하냐며 트집을 잡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면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하니 대리시킨 보람이 없다며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지 않나[9] , 능행 중에 비가 오자 영조에게 "네가 거짓말[10][11] 이나 하니깐 가뭄에 시달리는 남도에 내려야 할 비가 능행길에 내린다"는 말도 안되는 면박과 함께 "넌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할 자격이 없다. 돌아가라!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라는 말을 들으며 행차에서 쫓겨나 길에 쓸쓸하게 남겨진다.
대왕대비와의 언쟁으로 영조가 왕위를 선위하겠다며 별궁으로 떠나자, 선위를 거두어달라며 눈 오는 날에 끝까지 엎드려 석고대죄를 하다 쓰러지고 만다. 이후 대왕대비인 인원왕후의 죽음을 계기[12] 로 온갖 기행을 일삼는다. 이때 상중에서 영조가 한 말이 가관인데 가만히 있었으면 네가 왕이 되는 건데 윤허를 거두게 해서 대비까지 돌아가시게 만들었냐며 세자를 갈군다. 이에 울화통이 터진 사도세자는 "예, 다 제 잘못입니다!"하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 뒤 국정에 전념하기 보다는 사냥이나 유희를 즐기는 쪽으로 바뀌었고, '내관의 목을 따가지고 가족들에게 내보이기', '관을 짜서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기', '상 중에 술 마시기', 생모인 영빈 이씨가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중전복을 입히고 중전의 예우로 배례와 행차를 하는 등 정순왕후를 대놓고 무시하고 아버지인 영조를 아예 늙은이라고 부르는 등 부자 관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에 폭발한 영조는 "네가 며칠째 대리청정도 안 들어오니, 내가 너한테 문안드리러 왔다."라면서 귀 씻은 물까지 끼얹으면서 내 탓이다. 너 같은 인간을 자식이랍시고 세자로 세운 내 잘못이야라는 폭언으로 대꾸한다.
세자는 부왕의 가혹한 압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주변 사람들과도 점점 멀어진다. 수행원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공부를 아예 놓아버려서 스승들과도 서먹해지고,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세손 얘기만 꺼내 부부 관계도 어긋나버리게 된다. 심지어 아들의 가례(결혼식)에도 영조의 허락을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부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나 좌절되고 머리 숙여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사과하기를 여러 번. 그러던 중 김상로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자신이 역모를 한다며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고하고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고 영조가 나경언의 발언을 지지하게 되자 힘겹게 버티던 세자는 무너지고 만다. 한번 더 사과하며 부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솔직히 울화가 있어 힘들다고 외쳐 보지만 부왕은 "넌 존재 자체가 역모야! 울화? 왜, 차라리 미쳐서 발광을 해라, 이 자식아!!"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금천교로 가서 석고대죄하라는 명을 내린 채 세자의 눈 앞에서 방문을 닫아 버린다. 이것도 실제로 실록에 나오는 일화다. #
폭우 속에서 대죄하던 세자는 결국 울화가 폭발해 상복을 입고 측근들과 함께 부왕을 죽이러 경희궁으로 향한다. 영화는 여기에 또 다른 영화적 창작을 덧붙여 진행한다. 세자가 부왕을 상대로 역모를 감행했으나 세손을 위해 포기했다는 것이다.[13] 사도세자는 영조와 대화하는 세손을 보고, 처음에는 세손만 편애하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과 그 세손에 대한 질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문밖에서 칼을 쥐고 노려보지만, 이어지는 문답에서 세손이 광기 속에 감춰진 자신의 진심을 헤아리고 있었음[14] 을 알게 된다.[15] 이로써 자신이 결코 가지지 못한 군주의 자질과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갖춘 세손과, 그 세손이 왕위를 잇는 데 갈림돌이 되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세자는 결국 검을 내려놓게 된다. 하지만 끝내 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설득해 세손의 영위를 위해 세자를 내치기로 결심하면서 이 사건은 영조의 귀에 들어가고, 이렇게 과거 서사는 영화 초반부의 첫 번째 날로 이어진다.
다음 장면은 다시 현재,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일곱 번째 날 밤이다.[16] 세자는 영조와 마지막으로,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대화를 신하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공부와 예법에 평생 목숨을 걸었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그동안 세자를 갈구고 모질게 대한 의도가 다 제대로 된 군주로 만들기 위함이었음을 토로한다. 이에 세자는 그런 아버지의 사정을 알기에 자신도 노력했지만, 공부와 예법에만 집착한 나머지 세자라는 사람 개인을 짓밟으면서 키워온, 성인이 돼서도 후계자 노릇 하려는데 간섭하고 무시하고 구박하기만 한 아버지 밑에서 미치도록 괴로웠다고 고백한다.[17] 영조는 삶과 죽음의 문턱까지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냐며 슬퍼하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세손이 살려면 임금인 자신은 자식을 죽인 아비로, 세자인 아들은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되어야만 한다고 절규한다. 그리고 세자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난다.
죽은 다음날 시신을 수습하고 염을 하는데, 뒤주에 갇힌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시신의 처참한 몰골과 그 굳어버린 다리를 관절채로 우지끈 꺾어서 펴는 장면이 압권.[18]
영화에서 이야기 흐름 상 영조와 사도의 사이가 중심 줄거리이지만, 주제의식은 사도와 그의 아들 정조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가 부왕인 영조를 죽이려다 포기한 것은 예법보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아들 정조 때문이었으며, 뒤주에 들어갔을 때 세손 탄생 시 자신이 그린 부채 그림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깨닫고 울부짖는다.
자신과 다르게 영조의 사랑을 받는 정조에 대한 부러움도 내비친다. 활터에서 정조에게 숙종의 능행을 따라갔던 사실을 묻거나 영조가 좋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정조의 말에 화살을 일부러 허공에 날리는 장면은 사도가 가진 정조에 대한 부러움과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 슬픔을 동시에 보여준다. 마음고생이 워낙 심해 그다지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했으나, 동시에 아들이 할아버지의 기대때문에 원치도 않는 공부를 하는 자신을 비관하자 사도세자는 아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차가웠던 세자와 세손의 부자 관계는 점차 부드러워 지기 시작한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19]
[20]
영화를 보다 보면 비참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영조의 콤플렉스로 인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은 자식의 모습으로 나온 사도세자는 영화속에서 제일 비참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계속 갈굼받다가 뒤주에서 굶으면서 아들인 세손의 울음소리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안타까움만 자아낸다. 관객 입장에서는 사도세자의 행동을 볼 때 변덕스러운 영조에게 갈굼받으며 미쳐가는 과정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볼 수 있다. 안 미치는 게 기적일 지경이다.
더 무서운 건 이 모든 게 사료에 기록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영조가 실제 사료에 비해 미화가 많이 되었다. 영화에서 더 많은 영조의 악행을 시간상 추가하지 못했다 하여도, 끝말의 뒤주 속에 갇힌 세자와 미안한 마음의 대화는 당연히 없고, 말년의 후회나 참회의 모습 따위 보이지도 않았다.
편집된 장면들 중 부왕의 지나친 구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세자가 인원왕후와 정성왕후를 모시는 빈소에 홀로 찾아가 "중전마마, 대비마마.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지나가게 해 주소서."하고 힘없이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다.
영화는 심의문제 때문인지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이 상당히 순화되어 있다. 예로 조선왕조실록에선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고 나오는데 영화에선 내시 딱 하나만 죽이며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도 않는다. 아마 저런 것들을 다뤘다면 저 심의로 나오긴 힘들 수도 있다. 사도세자가 딱 하나 죽이는 장면도 좀 아슬아슬하다. 머리를 잘라서 들고 다니긴 하는데 카메라가 미묘하게 비껴가며 촬영하고 있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런 순화조차도 "사도세자를 사람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아래 '노론 음모론자들의 비난' 항목 참고.[21]
5.3. 정조[편집]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도 예법의 말단을 보지 말고, 그 마음을 보라 하였습니다. 그날 소손은 제 아비의 마음을 보았나이다."[22]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도 드릴 수 없사옵니까!!"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 자신의 아버지인 세자가 할아버지인 영조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을 듣자,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박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어머니 혜경궁에게 '어머니, 아버지 어떻게 해?'라며 울먹인다.[23] 이후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못을 박자 뛰쳐나가서 글공부든 뭐든, 아버지의 몫은 자신이 대신 할테니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결국 영조의 명령으로 다른 신하에게 안겨 쫓겨나고 만다.
태어났을 당시에는 싫어하는 세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영조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24] ,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곧 사랑과 총애를 듬뿍 받는다.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릴 때도 명을 거두어달라는 많은 신하들을 내쫓았음에도 세손을 보자마자 뒤주에 못박던 것도 멈춘 채, 세손마저 뒤주 안에 들어가게 둘 거냐며 다급한 기색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영조는 세자에게는 억지를 부리면서 능행 도중에 쫓아낸 반면, 세손과는 같이 능행을 가서 옆에 두고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 한다. 이때 영조는 세손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데[25] , 이 장면은 손자를 대하는 여느 가정의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손의 경연에서 영조가 직접 심사하는 가운데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자 "그래, 통이야!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이런 생각이 나오기는 힘들다."라며 세손을 칭찬하며[26] "삼백년 종사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데 이 때의 문답과 영조의 발언은 모두 실록에 있는 내용 그대로다.[27] 하지만 영화에서는 자신이 공부에 열중하는 건 모두 할아버지가 기뻐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며 내키지 않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털어 놓기도 한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관계와는 또 다른 부자관계를 보여주는 인물로 사실상 제3의 주인공이다. 두 관계 다 아버지의 정치적 입지, 정신적 문제가 부자관계의 악영향을 주는 공통점이 있는데, 파국을 맞이 한 전자와 달리 후자의 관계는 어느정도 공감대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사도세자가 분노하여 칼을 들고 영조에게 갔을 때 사도세자를 포기시킨 게 바로 정조.
영조와의 대담에서 영조가 사도세자가 영빈 이씨의 환갑 잔치에서 사배[28] 를 할 것을 정조가 받아 들인 점[29] 을 지적하자, 자신은 할아버지(영조)가 왕이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대접을 할 수 있다며 '예법도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아버지(사도세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등의 발언을 한다. 이때 아버지에 대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가 마당에서 마침 이 말을 듣자 분노를 풀어버린다.
이는 사도세자가 젊은 시절 끊임없이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음을 연상케 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이 자신의 심정을 이해했다는 발언을 한 순간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자기 아버지와 다를바 없다는 점을 인지했을 것이다.[30]
세자가 뒤주에 갇힌 뒤 세손빈과 함께 물그릇을 들고 와서[31] , 세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을 가져왔으니 나오시라고 애처롭게 외치다가, 소란을 듣고 나온 영조를 보며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 제대로 줄 수도 없냐며 서러움과 한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는다.[32] 영조는 세손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세손에게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에 근신하고 있으라며 끝내 외면하고 만다. 이후 세자가 죽자 아버지의 상을 치르며 슬퍼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분량은 끝난다.
어른이 된 정조 역으로는 소지섭이 특별출연을 했다. 카메오 수준이라고 보기엔 후반 10여분 동안 무려 4개의 씬에 나와 특별출연이라기엔 결코 비중이 적지 않다.[33] 영조와 함께 당시 있었던 화변의 기록을 세초하는 것을 바라보며 네 아비 일을 함부로 꺼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지만, 그날 있던 일이 한이 되어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조가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오르고 결말 부분에서 어릴적 참혹한 일이 너무 많아, 어머님께 재롱 한번 피우지 못하였는데, 이참에 제대로 놀아보겠다며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새겨진 부채로 부채춤을 추는 장면을 10여 분이나 되는 짧지 않은 시간으로 마무리한다. 이 결말 부분은 감독의 의도가 섞여 있지만 평이 제법 갈리는 편이다.
이 영화가 정조 영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조 등장 장면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기 때문에 결말이 지루하다는 평도 있다. 다만 이 영화는 영조와 사도세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정조도 엄연한 임오화변 관련인이다. 특히 본작은 영조가 세손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사도세자를 희생시켰다는 해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관련될 수 밖에 없다.
그 해석을 따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장면이 영화 말미에 왕이 된 정조가 아버지 능에 참배할 때, 당시에 못 드린 물을 올리며 "제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제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며 오열하는 장면.
정조가 태어난 날 꿈에 나온 용을 그린 그림으로 만든 부채는 훗날 정조가 왕이 되었을때 선물하려 했던 물건이고 극 중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사도세자의 최후까지 함께한 사도세자의 유품이다. 그래도 관객 중에선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를 취한 뒤[34] 복받치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엔딩 장면은 그야말로 백미.
원래 영화 말미에는 정조가 영남 만인소를 올리는 선비들을 접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상영판에서는 편집되었다. 사족이 길다고 느낄까봐 편집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준익 감독은 이 장면이 편집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35]
이처럼 본작에서 등장 장면이 적지 않았지만, 소지섭은 출연료 없이 출연했다.
5.4. 그 외 인물[편집]
사도세자의 아내. 풍산 홍씨. 정조의 어머니다. 정조 역으로 소지섭이 출연했는데, 이에 대해 문근영은 반농담으로 "소지섭과 로맨스 연기를 찍고 싶었는데 어머니 역할을 맡아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문근영이 〈사도〉에 출연한 이유는 평소 존경한 연기자인 송강호와 연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역부터 시작해서 60대 노인 분장을 한 문근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장이 안 어울린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다. 차라리 이 부분만 적령기 나이대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낫지 않았겠냐는 평가도 있다. 분장이 마치 90대와 같아 보이는데 피부 관리도 염색 기술도 없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다.
문근영 연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머니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 전체적으로 세자의 아내로서의 모습보다는 세손의 어머니라는 모습이 더 부각된다. 영화 시작 부분을 보면 "세자는 포기하고 세손을 살릴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만 보이니 세자도 입만 열면 세손이라고 자네 눈엔 내가 안보이냐고 하소연하거나, 며느리(세손빈)에게 "부부란, 서로의 실수를 덮어주고,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니라."라고 얘기한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세자는 아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악처까지는 아니어도, 그다지 좋은 아내는 아니었던 것으로 표현된 셈이다.
그래도 영화 최후반부에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뒤 함께 사도세자의 무덤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 남편의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앞에 불려갈 때, 영조가 유달리 예뻐한 제 아들(정조)의 휘항[36] 을 쓰고 가려 하자 홍씨가 머리에 맞지도 않는다며 말리면서 세자 본인의 것으로 바꿔쓰라며 실랑이를 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한 세자의 말이, "자네는 어찌 이리도 자네 생각만 한단 말인가"였다고 한다.[37]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기묘한 말이다. 세자는 영조가 귀여워한 세손의 휘항을 쓰고 나가면 영조가 세손을 생각해 자기를 살려줄 것이라 생각한 것인데 혜경궁은 그걸 모르고 말리자 죽을 사람이 자식의 물건을 쓰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냐고 말한다. 그제서야 눈채 챈 혜경궁이 휘항을 내오라고 하자 싫어하는 것 써서 뭐하냐고 거부하며 자네는 세손과 함께 살려고 그러는 것이냐는 등의 폭언까지 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 기록이 혜경궁 홍씨 본인이 쓴 책인 한중록에 나오는 부분이라 혜경궁 홍씨의 행동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죽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논쟁거리이다. 정말 그런 의미면 혜경궁 홍씨 자신이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계의 평도 꽤 많기 때문이다. 즉 당시 혜경궁 홍씨는 진짜로 단순히 세자의 의도를 몰랐을 뿐이고, 사도세자는 아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오해하고 섭섭해했다는 해석.
다음날 사건의 전말을 영조에게 알리고 '세자는 처분하시되 세손은 보존해 달라'고 하는 것으로 정조를 살리고 세자가 죽는데 일조하게 된다.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도 영빈의 고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안색이 변할 정도였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직후, 세자와 세손 둘 모두 살리기 위해 고발한 것이 최악의 상황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충격을 받는다.
아들인 사도세자에 의해 억지로 중전 복장을 입게 되고 배례와 행차를 중전과 동일하게 하는 바람에 영조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이것은 영조가 스스로의 손으로 사도세자를 죽이는 원인 중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 본심은 자신에게 효도하고 싶어서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세자가 죽은 뒤 "살아서 뭐해. 내 무덤엔 풀도 안 날거야."라고 힘없이 말하다가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죽인 게 아니지?'라고 네 번이나 되뇌이며 통곡하고 마는데, 의도야 어떻든 결국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의 죄책감과 슬픔을 보여준다.[38] '내 무덤에 풀도 안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실제로도 영빈이 세자의 죽음을 듣고 한 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3년상을 끝낸 후 자식을 뒤따르듯 사망한다.
대왕대비로, 숙종의 계비이다. 경주 김씨. 사도세자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인원왕후가 세자를 끼고 밥을 많이 먹인 통에 세자가 살이 쪘다고 영조가 타박했을 정도다."윤~허~하오~"[39]
세자에게는 자상한 할머니지만 화완옹주와 혜경궁을 비롯한 궁중 여인들에게 궁중 예법을 강조하는 엄격한 모습을 보인다. 작중에서 화완옹주가 세자빈인 혜경궁과 나란히 앉아있자 당장 곡좌(아랫 사람이 윗사람 앞에 앉을 때, 정면으로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야 하는 예법)를 하라고 꾸짖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화완옹주는 영조가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무릎에 앉힐 정도로 가장 아낀 자식인데다 아직 예법을 잘 모를 어린애라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음에도, 인원왕후는 따끔하게 "네 이년! 어디 옹주 따위가 빈궁과 나란히 앉는단 말이냐!"라고 꾸짖으며 엄격하게 예법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40]
문 소원이 영빈에게 무례하게 군 것을 알고 매질을 하다 영조와 큰 말싸움이 났는데, 영조가 출신 운운하며 왕 못해먹겠다며[41] 양위하겠다고 화를 내자 빈정대는 투로 윤허한다고 대답한다. 세자를 구박하는 영조의 버릇을 고치려는 의도였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세자가 눈을 맞으며 석고대죄를 하다 거의 얼어 죽게 되자 윤허를 거두어 달라는 중전과 영빈의 부탁을 듣고 처음에는 대비의 말은 함부로 거둘 수 없다고 하지만, 세자의 상황을 듣고는 "그럼, 내가 죽으면 되겠네"라고 말한 후[42]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유언으로 윤허를 거두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모호하게 표현되는데, 스스로 윤허한 것을 모양빠지게 취소한 것에 대한 자존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윤허 사건은 실제로 있던 건 아니고 실제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중재하려 애쓰던 도중 죽었다.
인원왕후 사후 사도세자의 광증은 급격히 악화되는데, 상을 치르는 와중에도 인원왕후가 죽은 걸 세자의 탓으로 돌리고, 세자도 참다못해 온갖 기행을 벌이게 된다.
참고로 영화에선 직접 묘사되지 않지만 영조 본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영화상에서도 간접적으로 나온다. 인원왕후가 문 소원(정4품의 후궁 직책명이다.)을 매질하는 와중 영조가 들어와서 인원왕후에게 "그럼 천한 저를 임금으로 만든 분이 대비이시니"하는 부분. 연잉군 시절 생모인 숙빈 최씨가 사망한 이후 의지할 곳이 없던 영조를 지원해주고 그를 왕세제로 공식 지명해준 사람이 인원왕후이기 때문이다. 인원왕후가 사도세자를 보호하자 영조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크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는 인원왕후가 대왕대비란 것도 있지만, 영조 자신의 은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작중에서는 영조와의 나이 차이가 조금 모호하게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인원왕후와 영조는 겨우 8살 차이였다. 다만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12살이고, 영조 역의 송강호 역시 하얀 수염을 붙히고 할아버지 분장을 했기 때문에 작중 나이 차이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보이는 건 아니다. 송강호가 중년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사도세자와 갈등을 겪을 당시 영조의 나이는 60대 중반으로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 이미 42세였다) 조선시대엔 자연사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었다.
부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서인지, 옹주 치고는 철없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상술한 혜경궁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영조의 슬하에 앉아 눈을 사시처럼 뜨는 장난을 쳐서 사도세자가 결국 폭소를 터뜨리고, 영조가 한참 설교를 하다가 "너 왜 웃니?"라고 말하는 개그씬이 등장한다. 또한 계비인 정순왕후에게 문안을 드리기로 약속한 세자를 다른 식구들과 기다리다 '그 여자가 무슨 교태를 부렸기에 아버지가 그리 푹 빠져계실꼬?' 라는 실언을 했다가 생모인 영빈에게 '중전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판단력이 빠르고, 가족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안다. 그렇게 어머니와 개그씬을 찍던 찰나, 오라비 사도세자가 내관의 수급을 들고 풀어헤쳐진 몰골로 등장하자 소스라치게 겁을 먹는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미쳐서 바쳐진 옷마다 마구잡이로 찢어 던지다, 옷시중을 들던 내관의 목을 베었던 것이었다.
세자는 영조와 도저히 한 지붕에 못 지내겠으니 당장 경희궁으로 영조를 보내라며 칼을 들이대고, 혜경궁과 영빈마저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화완옹주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자신이 나서서 아버지를 경희궁으로 이어하게 하겠다 말하며 세자를 진정시킨다.[43]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와 이상한 말까지 나올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사도세자 사후 혜경궁보다 더 세손에게 매달리는 장면을 통해 조카를 아끼는 고모의 모습도 드러낸다. 다만 이 장면에서 화완옹주의 판단은 옳았고, 혜경궁도 이에 동의하여 세손에게 상복을 벗으라 명령한다. 이후 혜경궁 홍씨와 화완옹주의 사이가 매우 나빠진 것도, 화완옹주가 친모인 홍씨보다도 더 지나치게 정조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으로 인해 섭섭함+부담을 가지고, 이것이 증오로 악화되었다는게 정설이다.
실제로도 조카와 친했지만 영조 말기 세손이 척신들을 바짝 경계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정조 즉위 후 정후겸이 사사당하면서 화완옹주도 귀양간다. 화완옹주는 1737년생으로 임오화변 당시 만 25세로 정치달과 혼인했다가 젊은 나이에 상부하고 궁에 들어왔는데 영화에선 만 16세의 진지희가 섭외되었다. 당시 17세였던 정순왕후 김씨 역에 만 25세인 서예지가 섭외된 것과 대비된다. 역사 내용 그대로를 보자면 실제로는 화완옹주 역 배우가 정순왕후 역 배우보다 더 나이가 많았어야 한다는 의미다.
영화에선 딱히 선역도 악역도 아닌 중립자적 인물로 나온다. 실제로도 이 시기 정순왕후의 발언권은 매우 미약했다. 정순왕후의 발언권이 커진 건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이다. 양부모가 모두 죽고 난 뒤라 법적 보호자가 없었기에 그 틈에 정순왕후가 발언권을 키웠다.
작중에서도 정순왕후의 방이 노론 회합소로만 사용될 뿐, 뭔가 음모를 꾸미는데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영조가 두렵다고 말한다. 이 뒤로 영조의 앞에서 자신의 총명함을 보이는 장면만 나와서[44] 뭐가 무서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런 정석적인 답밖에 하지 못하게 하는 영조의 압박감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뒤주 사건 이전에 있었던 외척들과의 모임에서는 "문안 한 번 안 오는 세자에게 무슨 정이 있겠느냐"며 사도세자에 대한 적대적인 의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45] 아버지와 오빠에게 주상이 무섭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것 때문에 화완옹주가 그 여자 속이 깊은 건지 맹한건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릴 정도.
사도세자에게 엄청난 무시를 당한다. 자기는 친어머니 문안도 제대로 안드리는 불효자식인데 그 여자 문안을 왜 가냐고 핑계를 대다 친모인 영빈 이씨가 눈물로 부탁하자 마지못해 하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영조를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미쳐 내관을 살해하는 난리를 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특히 세자가 영빈 이씨에게 중전 복장을 입히고 행차까지 하는 등 굉장한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있다. 실제 역사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영화만 보면 세자에게 악감정이 생기고도 남는다.
사도세자가 아무 잘못 없는 정순왕후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어머니나 다름없던 정성왕후가 사망하고 맞이한 계비여서일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머니가 정성왕후처럼 아버지에게 박대당하며 살다가 한 많은 인생을 뒤로 하고 죽었는데 아버지가 얼마 안가 한참 어린 새어머니를 맞이한다고 생각해보자. 새어머니가 딱히 잘못이 없더라도 자식 입장에서 좋게 보일 리가 없다. 특히나 사도세자에게는 정성왕후가 무척 각별한 존재였음을 생각하면 영화 속에서나 실제 역사 속에서나 정순왕후는 애초에 사도세자가 좋아하기가 힘든 존재이다.
- 김상로 (이대연 扮)
영조가 뒷날 세손에게 김상로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사실 가장 큰 책임자는 영조라서 면피성 발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김상로의 행적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임오화변의 결정적인 사유는 되기 힘들다는게 정설이다. 아무튼 정조 즉위 후 관직이 삭탈되는데, 이 때 김상로는 이미 죽은 뒤였다.
이후 난입하여 자해를 거듭하는 사도세자를 막고 왕이라고 법전 어디에도 없는 이런 처분을 내릴 수 없다며 어떻게든 영조의 처분을 막으려 하지만 결국 끌려나가게 된다. 적극적으로 처분을 반대하는 역할.
이야기 자체가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타 신하들처럼 큰 비중은 아니다. 채제공이 실제로는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든든한 우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비중을 좀 더 늘려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반대로 주된 서사구조와 주연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딱히 언급 없이 지나가는 점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임오화변 당시 채제공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있어서 사도세자를 위해 별 일을 해주지 못했다. 정조도 이를 알았는지 실제 역사에는 정약용과 더불어 정조가 가장 아낀 신하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죽을 때까지 지키며 충성하다 노환으로 죽자 정조가 절규할 정도였다.
분량상 삭제된 장면에서는 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얼마 후 영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하들과 경전을 읽자 채제공이 이를 한탄하며 세자의 처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영조가 이 일은 궁궐 밖을 넘을 수 없는 일이며, 신하가 임금의 가족 문제에 참견하냐며 언성을 높이자 채제공도 이에 지지않고 이 일을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세초하면 다 지워질 기록일 뿐이라며 대꾸하는 영조의 말에 그렇다면 세초하라는 전하의 하교까지 다 기록할 것이고 그것만은 임금도 지울 수 없다며 세자의 처분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 말을 들은 김상로는 채제공에게 강력한 처벌을 청하지만, 영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채제공에게 "그래. 어디 한번 승정원일기에 낱낱이 기록해봐라"라는 투로 대답하는 걸로 끝낸다.
- 이천보 (조승연 扮)
잘 부각되지는 않으나 극중 등장하는 조정 대신들 중 분량이 꽤 많은 편이다. 어린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첫 등장하며, 세자가 졸 때 물을 뿌리면서[46] '지금 잠이 오시냐'며 깨운다. 엄하게 세자를 가르치지만 영조 앞에서는 질책당하는 세자를 최대한 감싸준다[47] .
이천보 또한 양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영조처럼 모질지 않았고 이천보가 보기에는 영조가 세자에 대한 엄한 질책과 가혹한 훈육이 도를 넘었다고 느꼈을 수 있다. 자신의 양아들인 이문원[48] 은 편한 입장이지만 사도세자는 입장이 다르다.
이천보는 아들을 키우는 아비로써 사도세자가 영조의 가혹한 훈육에 정신이 피폐해져서 광증이 생겨 안타깝게 된 것을 안쓰럽게 여기는 듯 하다. 한마디로 친자식인데 연약하여 맘에 안든다고 엄혹하게 대한 영조와 양아들이 양녕대군급 말썽을 피우는데 자상하게 대한 이천보가 대비되는 부분.
여담으로, 작중 상당히 개혁적인 대신으로 묘사된다. 세자의 첫 대리청정때, 노론 원로대신들의 군권 장악을 비판하는 발언(저들이 주상의 즉위를 도운 공로를 내세우며 군권을 독점한다)을 하는 장면이라든가, 그가 자결한 후 김상로의 "순진한 것들이 개혁이니 명분이니 하다 감당 안되니 도망치듯이 죽었다"는 발언 등으로 유추해볼수 있다. 때문에 노론 음모론을 먼저 접한 관객이라면 소론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역사상의 이천보는 노론이었다.
- 이후[49] , 민백상
참고로 이천보, 이후, 민백상은 영조실록에서는 단순히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종실록(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1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에서는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일을 거론하며 이들이 신사년(1761년) 함께 자결을 했다는 암시가 나온다. 여기서 신사년은 사도세자의 관서행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영화에서는 이 기록을 토대로 세 사람이 자결했다고 표현한 듯 하다.
실제 역사에서는 대비인 인원왕후보다 한달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50] 영화 속에서는 인원왕후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인원왕후와 달리 승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장면이 없다. 대신 국상 중에 영조가 세자를 부르고 나서 대비와 중전이 죽었다는 언급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곡기를 끊기 전의 대왕대비는 정정한 데 반해 정성왕후는 혈색도 없고, 영빈이나 화완옹주에게 부축을 받는 묘사로 정성왕후의 건강이 나쁨이 드러나기도 했고. 사도세자가 미치고 결국 죽게 된 원인이 정성왕후의 부재도 크다는걸 감안하면 중요 인물 치고 비중이 현저히 낮다.
배역을 맡은 박명신은 영빈 역할을 맡은 전혜진이 추천해서 영화에 합류했다고 한다.
이후 영조의 총애를 믿고 오만해져 선희궁에게 버릇없이 굴다가, 이를 괘씸하게 여긴 대왕대비에게 종아리에 회초리 찜질을 받는 등 눈물 쏙 빠지게 혼쭐이 난다.[53] 참고로 이 일화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다만 영화 묘사상 이 사건은 대비의 죽음으로까지 바로 이어지지만 실제 정성왕후가 환갑을 맞은 것은 인원왕후 승하 6년전이었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영조의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는데, 아들에게는 사소한 예법 가지고 깐깐하게 굴며 갈구면서 정작 대비가 예법 문제로 자신이 아끼는 후궁을 체벌하자 대비에게 대든다. 게다가 대비가 문 소원을 '천한 것'으로 매도하자 이를 제멋대로 확대해석해서 자신의 출신 문제까지 들고 나온다. 영조의 일그러진 인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계비인 정순왕후가 들어온 이후로 등장이 없다.
이 내인을 정순왕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동일인물이 아니다. 정순왕후 본인은 정식 간택을 통해 중전 자리에 올랐다.[54] 숙종이 희빈 장씨 이후 후궁이 왕후가 될 수 없도록 법을 만들었기에, 실제로 영조가 마음이 있었어도 문 소원을 왕후로 삼을 수 없었다.
실제 인물은 1776년(정조 즉위년), 오라버니인 문성국과 함께 영조를 이간질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삭탈당하고 동년 음력 8월 10일 사약을 받았다. 문성국도 이 때 역률이 적용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실록과 한중록에 문씨 남매가 이간질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조의 며느리로서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었으며, 실록도 정조 즉위 후 정조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을 그저 기록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김상로처럼 책임전가 당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대신들은 정조가 사도세자 일을 추궁할 것을 겁내고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데다가 대신들 입장도 고려해야 했으니, 그들에게 선왕의 후궁에 불과한 그녀는 굉장히 만만한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 홍 내관 (정석용 扮)
- 박 내관 (차순배 扮)
세자가 아주 어릴때부터 잦았던 영조의 질책으로 좌불안석에, 양위소동, 무덤파고 놀기
- 나경언
그의 최후는 상당히 황당한데 이 고변을 들은 영조는 대소신료들이 나경언과 같지 않다며 화를 내고[57] 나경언을 칭찬했으나 그 즉시 나경언에게는 고언은 좋지만 역모 운운하여 왕을 놀라게 한 죄로 참수해버렸다. 채제공과 홍인한 등은 그를 문초하여 배후를 밝히자고 주장했으므로 영조와 김상로 측에서 입을 막은 것.
김상로가 그를 즉시 참하라고 주장하여 비겁하게 묘사되지만, 달리보면 애초에 역모로 거짓증언한 시점에서 죽음을 피할 순 없었기에 고문당하지 않게 빨리 끝내준 것이기도 하다. 다만 김상로가 죽을수도있다고 고한 점이나 죽이시라고 고하자 나경언이 크게 놀라서 김상로를 쳐다본 걸 보면, 나경언은 백프로 죽는 일이란 걸 모른 듯 보인다.
실제 인물은 당시 형조판서 윤급의 종으로, 실제로 역모로 과장해 세자의 비행을 신고했으며, 영조는 최대한 비호해주었지만 신하들의 강한 요구에 여러 번에 걸쳐 매를 때리다 결국 참수했다. 사도가 죽인 내관의 형제라는 것은 영화의 창작. 실제 인물이 사도에게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는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6. 줄거리[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도(영화)/줄거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